고려시대사

[스크랩] 고려 조선 관청 ㄴ

똥하 2017. 9. 19. 04:38

고려, 조선조 관청-
가나다~순 나

자 료 / 하얀그리움

나례도감(儺禮都監) ; 조선시대 나례를 위하여 설치하였던 임시관청.
고려 정종 때 이후로 음력 섣달그믐날 밤에 악귀를 쫓기 위해서 나례를 행하여 왔으며, 조선시대에는 섣달그믐은 물론이고, 종묘에 제사지내거나 외국사신을 맞이할 때, 기타의 경우에 나례를 행하였다. 나례도감은 이를 위하여 임시로 설치한 관청으로 나례가 끝나면 폐지되었다. 광해군 때는 상설기관으로 나례청(儺禮廳)을 두고 그업무를 맡도록 하였으나, 인조 때에는 나례의 폐단을 지적하고 나례청을 혁파하였으며, 그 뒤에 이따금 그것을 행하고자 할 때는 관상감(觀象監)에서 그 일을 맡아 하였다.
난의사(鸞儀司) : 궁내 의장을 맡은 관서.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 ; 고려시대 남경(南京 : 지금의 서울)의 창건을 관장하였던 임시관서.
1101년(숙종 6) ≪도선비기 道詵祕記≫에 의거, 도읍을 남경으로 옮길 것을 주장한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김위제(金謂磾)의 ‘남경건도의(南京建都議)’를 계기로 설치된 관청이다. 그 규모는 동은 대봉(大峰 : 지금의 駱山), 서는 기봉(岐峰 : 지금의 鞍山), 북은 북악(北岳), 남은 지금의 신용산(新龍山)의 남쪽 끝까지 걸쳐 있었다. 그리고 궁성도 쌓은 것은 확실하나 도성(都城)의 존재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남병영(南兵營) ; 조선시대 함경도 북청(北靑)에 설치되었던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
1466년(세조 12)에 처음 병마절도부사(兵馬節度副使)를 두었다가,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겪은 뒤 병영으로 승격되었다. 남도 병영 혹은 남병영으로 통칭되었고 주장(主將)을 남병사라 불렀는데, 수군절도사를 겸하였다. 함경도는 지역이 넓고 험하며 여진족과의 충돌이 잦아 3개소의 병영을 두었던바, 하나는 감영에서 겸하고 또 하나(북병영)는 경성(鏡城)에 두었다. 남병영의 관할구역은 갑산·안변·삼수·혜산·낭성포(浪城浦)·도안포(道安浦)·영흥·북청·단천·장진·원주(原州) 등이었고 그 이북은 북병영에 속하였다.
남소영(南小營) ; 조선 후기 어영청(御營廳)의 분영(分營).
서울 남부 명철방(明哲坊 : 현재 중구 장충동)의 남소문 옆에 있었다. 청사는 모두 194칸이었다. 여기에는 초관(哨官) 1인과 지방군 12인이 입직하였는데, 후에 9인으로 줄었다.
남영(南營) ; 1) 조선 후기 금위영(禁衛營)의 분영.
청사는 경희궁의 개양문(開陽門) 뒤에 있었는데 건물의 규모는 12칸이었다. 여기에는 초관(哨官) 1인, 별기위(別騎衛) 2인, 지방에서 상번(上番)한 군사 15인이 입직하였다.
2) 조선 후기에 설치되었던 훈련도감의 분영(分營).
‘별영(別營)’이라고도 하였다. 청사는 돈화문(敦化門) 밖에 있었는데 32칸이었다. 여기에는 초관(哨官) 1인과 별기대(別騎隊) 2인, 마병 53인이 입직하였다. 또 매일 말 18필을 대기시켰다.
남창(南倉) ; 1) 조선 후기 현종 때 충청도 안흥(安興)의 남쪽 해안에 잠시 있었던 조세창고.
안흥창이라고도 불렀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세미(稅米)를 이곳으로 조운(漕運)하여 보관하였다가, 10리 떨어진 북창(北倉)까지 육로로 운반하여 다시 서울까지 조운하도록 하였다. 이는 안흥 앞바다에서의 잦은 침몰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대책이었으나, 번거로운 폐단이 있어 곧 폐지되었다.
2) 조선 후기 균역청(均役廳) 소속의 창고.
1750년(영조 26) 서울 북부 진장방(鎭長坊 : 현재 종로구 삼청동 부근)의 옛 수어청(守御廳) 자리에 설치하였고, 1759년에 증축하였다. 고방(庫房)이 35개나 되었다.
3) 조선 후기 어영청(御營廳) 소속의 창고.
서울 남소동(南小洞 : 현재 중구 장충동 부근)에 있었는데, 그 규모는 137칸이었다.
4) 조선 후기 금위영(禁衛營) 소속의 창고.
서울 중랑구 묵동(墨洞)의 남별영(南別營) 남쪽에 있었는데 101칸〔間〕이었으며, 지방군사 2인으로 지키게 하였다. 근처에는 또 104칸 규모의 하남창(下南倉)이 있었다.
남한치영(南漢緇營) ; 경기도 광주군 남한산성(南漢山城) 안에 있었던 의승군(義僧軍)의 군영.
남한산성은 수도의 방어를 위한 중요한 요새로, 수어청(守禦廳)에 소속되어 있었다.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개축할 때 성 안 사찰의 의승(義僧)을 모아 치영(緇營)을 설치하고,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각성(覺性)의 지휘 아래 의승군이 이 성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성 안에는 9사(九寺)가 있어 의승군의 막사로 사용되었다.
이 치영의 구성은 승군총섭 1인, 승중군(僧中軍) 1인, 교련관(敎鍊官) 1인, 초관(哨官) 3인, 기패관(旗牌官) 1인, 원거승군(原居僧軍) 138인, 의승(義僧) 356인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들 승군은 아침저녁으로 예불 및 간경(看經)으로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고, 낮에는 군모(軍帽)를 쓰고 훈련을 받으면서 유사시를 대비하였다. 1714년(숙종 40) 남한산성의 정원을 책정하고 전국의 각 절로부터 1년에 6번 방번승을 교체하도록 하는 의승방번제(義僧防番制)를 실시하였다. 경기도 14인, 충청도 28인, 강원도 14인, 황해도 4인, 전라도 136인, 경상도 160인 등 총 356인의 의승군을 파견하도록 규정하였으나, 의승방번제를 운영하는 데는 많은 폐단과 모순이 있었다. 이의 시정을 위하여 1756년(영조 32) 의승방번전제(義僧防番錢制)를 실시하였다.
낭관(廊官) ; 고려시대 서경(西京)의 행정을 총괄하는 사무를 맡았던 것으로 믿어지는 관청.
조설(曹設)이라고 하였다. 태조 이후 갖추어지기 시작한 분사제도(分司制度)의 일환으로, 922년(태조 5)에 아관(衙官)·병부령(兵部令)·납화부(納貨府)·진각성(珍閣省)·내천부령(內泉部令) 등과 함께 설립되었다. 그 뒤 995년(성종 14)의 관제 개편에서 유수관(留守官)으로 개편될 때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이는데, 관원으로는 시중 1인, 시랑 2인, 낭중 2인, 상사 1인, 사(史) 10인이 있었다. 관원의 구성으로 보아 당시 개경(開京)의 광평성(廣評省)에 해당하는 관부로서 서경의 행정을 총괄하던 최고관청이었다고 믿어진다.
내각(內閣) ; 조선 말기 최고의 행정기관.
1895년(고종 32) 3월에 종래의 의정부를 개편하여, 교지를 받아 행정 각부를 통일하는 책임을 맡은 내각총리대신과 왕을 보필하여 국정을 맡아 처리하는 각부 대신으로 구성되었다.
법령·칙령안·예산 결산·국채(國債)·국제 조약 및 중요한 국제 조건, 각 부간 주관(主管) 권한의 쟁의, 신민(臣民)의 상소 가운데 특별히 왕이 지시한 것, 예산외 지출, 칙임관(勅任官)·주임관(奏任官)의 임명 및 진퇴, 구규(舊規)의 존폐 및 변경과 관청의 폐치(廢置) 및 분합(分合), 그리고 정리 개혁(整理改革)에 관한 건, 조세·관유 토지(官有土地)·삼림·옥우(屋宇)·선박 등의 관리 처분에 관한 사항 등 국가의 중대사는 반드시 내각회의를 거친 뒤 왕의 재가를 받아 시행하였다.
소속 관원으로는 내각총리대신의 명을 받아 기밀 문서와 내각 서무를 장악하는 총서(總書), 법률·명령안의 조사 발포와 공문서의 사열(査閱) 및 기초(起草)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는 참서관(參書官)이 있었다.
내고(內庫) ; 고려시대 왕궁에 직속되어 왕실재정을 담당하던 창고 관청의 하나.
인종대를 전후한 시기에는 대영창(大盈倉)·대영고(大盈庫)라고도 불렸다. ‘내고’가 관청명이기는 하나, 그곳에 부속되어 있던 물품보관소도 내고라 칭하였다. 내장택(內莊宅)과 함께 왕실의 재정 운영에 있어 중추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 내장택에 부속되어 있었다고 여겨지는 내창(內倉)이 주로 내장택 소유의 토지로부터 얻어지는 어용(御用)의 곡물류를 저장했음에 반해, 내고는 금·은 등의 보물과 포백(布帛)을 주로 보관하였다.
내군(內軍) ; 고려시대 의장(儀仗)과 병기류를 관장하던 관서.
918년(태조 1)에 내군경(內軍卿)을 두었다. 태조 때의 내군은 태조가 즉위한 직후의 인사내용에 내군의 차관직인 경으로 능혜(能惠)와 희필(羲弼)이 기재되어 있다. 이 때의 군사 및 감찰관부에 순군부(徇軍部)·병부·의형대(義刑臺)와 병칭된 것에서 내군이 근시기구(近侍機構)로 특임을 지녔음이 확인된다. 960년(광종 11)에 장위부(掌衛部)로 고쳤다.
내궁전고(內弓箭庫) ; 고려시대 궁중에서 소요되는 활과 화살을 제작, 보관하던 관서.
문종 때 관제를 정리하면서 관원으로 판관 2인을 두었고, 이속으로 기사(記事) 2인과 기관(記官) 2인을 배치하였다. ≪고려사≫ 녹봉조에 의하면, 행수교위(行首校尉)의 직함을 지닌 각궁장(角弓匠) 1인이 있었다. 그 밖에 창고의 간수를 위하여 잡직장교와 소정의 군인이 배치되어 있었다.
내금위(內禁衛) : 금군청의 한 부대. 조선 초기 국왕의 경호임무를 맡은 특수군.
1407년(태종 7) 내상직(內上直, 內廂直)을 고쳐 만들었다. 1409년에 별도로 내시위를 만들었다가 1424년(세종 6) 내금위에 합쳤다. 조선초에 군제를 정비하면서 갑사·별시위·겸사복(兼司僕) 등 여러 종의 시위군을 만들지만 내금위는 겸사복과 함께 왕을 가장 가까이서 호위하는 부대였다. 이때문에 문종대 이후 5위체제로 군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갑사와 별시위는 일반 병종으로 변하지만, 내금위는 5위에 속하지 않고 단독으로 내금위절제사에 의해 통솔되었다. 세조는 내금위를 독립아문으로 성립시켜 내금위장은 5위장과 별도로 번갈아 궁중에 숙직하여 왕을 경호하게 했다. 선발도 신중을 기하여 간혹 여진족이나 특출한 무예를 지닌 자는 신분을 불문하고 입속시킨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동서반 3품 이하관, 양반가문의 자제 중에서 무재도 탁월한 자들로 뽑았다. 병력은 성종 때까지는 60~200명 사이에서 변동이 심했는데 〈경국대전〉에는 190명으로 했다. 이들은 정3품에서 9품까지의 체아직을 받았으나 장번(長番)이며, 품계가 있는자가 많아 무신으로 대우받았고 108일을 근무하면 정3품에서 거관(去官)했다. 내금위는 취재(取才) 없이 만호로 차정할 수 있었는데, 만호직이 고역이라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왕이 이름을 모두 기억할 정도로 왕의 가까이에서 경호하는 부대로 법전상의 규정보다는 실질상의 특혜가 많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양계에 군관으로 파견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일일이 왕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성종 때 이후 양계 파견이 증가하여 예차내금위(預差內禁衛) 제도를 만들었는데, 이로써 병력이 증가하여 연산군 때는 500명으로 늘었다. 이후 약 400명 정도의 규모를 유지했다. 1505년(연산군 11)에 내금위는 형철위(衡鐵衛), 예차내금위는 소적위(掃敵衛)로 개칭했다가 중종 때 환원했다. 임진왜란 때 폐지했다가 1601년(선조 34)에 복설했으며, 나중에 겸사복·우림위와 함께 금군청으로 통합했다.
내농포(內農圃) ; 조선시대 환관들이 궁중납품을 목적으로 채소를 재배하던 밭, 또는 그 관서.
창덕궁 돈화문 밖 동편에 있었다. 본래 서울 성내에서는 농사가 금지되어 있었으나, 내농포는 궁중납품이라는 특수성으로 하여 채소재배가 허용된 것이다. 이 밖에 채소운반을 위한 마필이 부여되었고, 전체 결수를 알 수 없으나, 72결 24부 9속에 대해서는 면세의 특전도 주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특전을 배경으로 내농포환관은 채소납품 때 여러 관청의 서원(書員)을 한 달씩 도로청소에 동원하는 등 횡포가 심하였다. 그와 같은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일반백성에게 경작하게 하는 방안이 여러 차례 검토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내무부(內務部) ; 조선 말기 1885년(고종 22)에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이라 하던 것을 개칭한 관청.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내무아문(內務衙門)이라 고쳤다가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내부(內部)로 고쳤다.
내무아문(內務衙門) ; 1894년 갑오개혁 때 의정부에 설치된 중앙행정기관의 하나.
1894년 6월 군국기무처의 의안에 따라 궁내부와 의정부로 나누고 의정부 아래 내무·외무·탁지·법무·학무·공무·군무·농상아문 등 8개 아문을 설치하고, 그 해 7월 20일부터는 아문관제에 따라 직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내무아문은 구제도 아래서의 내무부(內務府)와 이조·제중원(濟衆院) 등의 사무를 포함하여 지방행정을 총괄하는 부서로 설치되었는데, 1895년 4월 2차내정개혁과정에서 칙령에 의하여 의정부는 내각으로, 각 아문은 부(部)로 축소, 재편성되어 내부로 되었다.
직제를 보면, 대신 1명, 협판(協辦) 1명을 두고, 그 아래 총무국·판적국(版籍局)·주현국(州縣局)·지리국·사사국(寺祠局)·회계국·위생국을 설치하고, 각 국에 참의 1명과 주사 2∼6명씩을 두어 사무를 관장하였다. 판적국은 호구 및 생산물의 조사를, 주현국은 지방을 감독하는 모든 사무를, 위생국은 전염병 예방 및 의약과 우두의 관리업무를, 지리국은 측량·지도제작·도로 및 교량 등에 관한 업무를, 사사국은 악독(岳瀆)·사찰·신사(神祠)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국장은 참의가 하였는데, 지리국과 사사국은 위생국장이 겸임하여 모두 참의 5명에 주사 24명이 배치되고, 그밖에 기수(技手) 4명, 의사·제약사 등도 있었다.
내방고(內房庫) ; 고려 후기의 재정기관.
왕실의 재정을 관장하던 것으로 보이는 관서이다. 관제개혁을 시도한 충선왕이 광흥창·풍저창·덕천고의 개편과 아울러 종래의 운진창(雲臻倉)과 부흥창(富興倉)을 병합, 의성창(義成倉)을 설치하였다. 그 뒤 1325년(충숙왕 12) 내방고로 고쳤다가 1330년 의성창으로 다시 고쳤으며 1355년(공민왕 4) 내방고로 환원하였다. 주요기능으로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였음은 왕실의 연회경비를 전담하였음에서 알 수 있으며, 태후궁과 공주궁의 상공(上供)도 전담하였다. 그 밖에 물가조절과 빈민구제활동도 아울러 폈다. 관원으로는 사(使)·부사(副使)·승(丞) 등 각 1명씩을 두었는데, 그 치폐는 덕천고와 같았다. 1355년 관원을 모두 없애고 제거별감(提擧別監)을 두었다.
내병조(內兵曹) ; 조선시대 각 궁궐내에 설치하였던 병조의 지부.
궁궐내의 시위(侍衛)·의장(儀仗) 등 군사사무를 보기 위한 병조 관리들의 출장소였다. 경복궁에는 근정문(勤政門) 밖에, 창덕궁에는 호위청 서쪽에, 경희궁에는 건명문(建明門) 밖 동편에 각각 설치하였다.
내부(內部) ; 1) 조선조 때 궁중(宮中)의 재화(財貨)의 간직과 복식(服飾)·포진(鋪陳)·등촉(燈燭)의 출납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곳. 또는 그 창고.
2) 조선 말기 내무행정을 관장하던 관청.
1894년 내무부(內務部)와 이조의 소관 업무를 통합, 계승했던 내무아문(內務衙門)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1895년 4월에 설치되어 1910년 국권을 상실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관원으로는 대신 1명, 협판 1명, 국장 5명, 참서관(參書官) 8명, 시찰관(視察官)·기사·기수(技手) 각 4명, 주사 40명을 정원으로 하였다. 1등국인 주현국(州縣局), 2등국인 토목국·판적국(版籍局), 3등국인 위생국·회계국이 있었다. 내부대신은 칙임관(勅任官)으로 지방행정·경찰·감옥·토목·위생·지리·출판·호적·구휼 등에 관한 사무를 총괄, 지휘하고 지방관·경무사(警務使)를 감독하였다.
내부협판은 칙임관으로 대신을 보좌하여 내부의 사무를 정리하고 각국의 사무를 감독하였다. 주현국장은 칙임관이나 주임관(奏任官)이었으며, 그 밖의 4개국의 장은 주임관이었다. 주현국은 지방행정·진휼 구제·공립영조물(公立營造物)에 관한 업무를, 토목국은 내부 관할의 토목공사·토지측량·토지수용 등에 관한 업무를 맡았다.
내부감(內府監) ; 고려 시대에, 궁중의 공예품과 보물을 맡아보던 관아.
1298년(충렬왕 24)에 소부감을 개칭한 관청. 충렬왕 24년(1298)에 소부감을 고친 것으로, 후에 다시 소부시로 고쳤다.
내부시(內府寺) ; 고려 때 재화(財貨)의 보관을 맡아보던 관청.
대부시(大府寺) 또는 외부시(外府寺) 또는 내부사(內府司)라 하던 것을 1309년(충선왕 1)에 내부시(內府寺)로 개칭하였다. 그후 1356년(공민왕 5)에 대부감(大府監), 1362년(공민왕 11)에 내부시, 1369년(공민왕 18)에 대부시, 1372년(공민왕 21)에 다시 내부시로 환원하였다. → 대부시.
이외에도 상세(商稅) 징수와 물가통제기능을 수행했다. 문종 때 처음 설치했으며 관원으로는 정3품의 판사(判事) 1명, 종3품의 경(卿) 1명, 종4품의 소경(少卿) 2명, 겸관인 지사(知事) 2명, 종6품의 승(丞) 2명, 종7품의 주부(注簿) 4명을 두었다. 이속(吏屬)으로는 서사(書史) 12명, 계사(計史) 1명, 기관(記官) 6명, 산사(算士) 1명을 두었다. 그뒤 관청이름과 관원이 자주 바뀌었다. 1298년(충렬왕 24) 이름을 외부시(外府寺)로 고치는 동시에 판사를 없애고 경 2명, 소경 1명, 승 1명, 주부 2명으로 했다가, 이를 다시 대부시로 고치고 경을 윤(尹), 소경을 소윤(少尹)으로 바꾸었다. 또 1308년에는 내부사(內府司)로 개칭하면서 정3품의 영(令) 2명, 정4품의 부령(副令) 4명, 종5품의 승 4명, 정7품의 주부 4명을 두었다. 그뒤 다시 내부시(內府寺)로 고치고 정3품의 판사를 다시 두게 됨에 따라 다른 관원의 관계(官階)는 1품씩 강등되었다. 그후에도 1356년(공민왕 5) 대부감(大府監)으로, 1362년 내부시로, 1369년 다시 대부시로, 1372년 내부시 등으로 개칭을 반복했으며 그에 따라 관원도 변화를 거듭했다.
내빙고(內氷庫) ; 조선시대 왕실 전용의 얼음을 관리하던 관청.
창덕궁의 요금문(曜金門) 안에 있었다. 본래 종5품 아문이었으나 영조 때 종5품 별좌(別坐)가 감원됨으로써 종6품의 별제(別提)를 최고책임자로 하는 종6품 아문으로 되었다. 관원으로는 별제 2인과 별검(別檢, 종8품) 2인이 있었다. 해마다 저장하는 얼음은 2만여정(丁)에 이르렀는데, 각 전감(殿監)의 얼음을 구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색으로 염빙(染氷)하였다. 동서 양빙고가 예조에 소속되었던 것과는 달리, 내빙고는 자문감(紫門監)에 속해 있었다.
내사고(內史庫) ; 조선시대 한성(漢城)에 설치되어 있던 실록보관 창고.
내사복시[ 內司僕寺 사마천(司馬遷)의 “원본은 명산에, 부본은 서울에 보관한다.”라는 서적보관법에서 연원하여, 고려시대 이래 서울에 내사고, 지방에 외사고를 두어 실록을 보관하였다. 조선시대 내사고의 기능은 춘추관에서 겸임하였으므로 춘추관고가 곧 내사고이다. 그러나 내사고는 외사고의 상대개념으로 춘추관고에 비하여는 포괄적인 일반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내사고에는 실록과 ≪선원록 璿源錄≫이 필수적으로 보관되는 외에 일반 시·문집류들도 상당수 보관되었다. 외사고의 경우는 조선 초기 충주·성주·전주 세 곳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뒤 묘향산·마니산·오대산·태백산 네 곳으로 확대되었다.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 ;고려 때 최고 중앙의정기관(中央議政機關). 내사성(內史省)과 문하성(門下省)을 합한 관청.
내사성은 조칙(詔勅)에 관한 일을 맡고, 문하성은 왕명의 출납(出納)과 중신의 건의를 맡아보았다. 982년(성종 1)에는 한 성(省)처럼 되었다. 1061년(문종 15)에 내사성이 중서성으로 개칭하였으므로 중서문하성으로 불렀다.
내사복시(內司僕寺) ; 조선 때 궁전의 마굿간과 임금이 타는 말을 관리하던 관청.
고려시대에는 상승국(尙乘局)이 담당했다. 관원으로는 내승(內乘) 3명이 있었는데, 2명은 종2품에서 9품 사이에 있는 자가 겸임하고, 1명은 사복시의 정(正)이 겸임했다. 왕이 경희궁으로 갈 때에는 1명을 더 두었다. 이밖에 이속으로 서리 5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사복시에서 뽑았다.
내사성(內史省) ; 고려시대 문하성(門下省)의 전신.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단지 976년(경종 1)에 내사성의 최고관직인 내사령(內史令)이 임명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늦어도 이때에는 직제로서 확립을 보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내사성은 문하성·상서성과 함께 삼성제의 한 관부로 성립되었으나 실제로는 문하성의 기능과 서로 밀접하여 단일정사기관, 즉 내사문하성으로 1성과 같은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내사성은 1061년(문종 15) 6월에 중서성이라 개칭되었고, 따라서 내사문하성도 중서문하성이라 개칭되었다.
내사옥(內司獄) ; 조선시대 내수사(內需司)에 관련된 죄인을 수감하던 감옥.
‘내수사옥’의 약칭이다. 모든 업무는 내시들이 관장하였다. 초기에는 내수사에 직접 관련된 죄인을 처리하기 위한 감옥이었으나 궁궐내의 옥사라는 특수성으로 궁중의 유죄자는 모두 수금하였으며, 때로는 형조의 영역을 침범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사헌부에서는 국가의 기본틀인 형옥(刑獄)의 일이 내시들의 손에서 처리될 수 없다고 하는 혁파의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 조선 후기까지도 왕의 사옥(私獄)과 같은 특권을 누렸으나, 1711년(숙종 37)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내서성(內書省) ; 고려시대 경적(經籍)과 축문(祝文)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고려 건국 초기에는 내서성(內書省)으로 설치했는데, 995년(성종 14)에 비서성으로 이름을 고쳤다. 관원은 문종(文宗) 때 정3품의 판사(判事) 1명, 종3품의 감(監) 1명, 종4품의 소감(少監) 1명, 종5품의 승(丞) 2명, 종6품의 낭(郎) 1명, 정9품의 교서랑(校書郞) 2명, 종9품의 정자(正字) 2명을 두었다. 1298년(충렬왕 24)에는 비서감(秘書監)으로 개칭했으며, 1308년에는 전교서(典校署)라 하고 예문관(藝文館)에 예속시켰다가 다시 전교시(典校寺)로 분리했다. 그뒤에도 여러 번 개칭해 1356년(공민왕 5)에 비서감으로, 1362년 전교시로, 1369년 비서감으로, 1372년에는 다시 전교시로 바뀌었다.
내섬시(內贍寺) ; 조선 때 각 전(殿)과 궁(宮)에 제공할 음식물,제물 등을 맡아보고 2품이상의 관원에게 음식을 제공하던 관청.
조선시대 각 궁과 전에 대한 공상(供上)과 2품 이상 관리에게 주는 술. 왜인과 야인에 대한 음식물 공급, 직조(織造) 등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서. 공주를 낳은 왕비의 권초(捲草 : 출산 때 까는 거적 짚)를 봉안하기도 하였다.
1392년(태조 1) 설치한 덕천고(德泉庫)를 1403년(태종 3) 6월의 관제 개혁 때 내섬시로 고친 뒤, 1405년 3월에 육조의 분직과 소속을 정하면서 호조의 속사(屬司)가 되었다. 1637년(인조 15)에 양난을 겪고 난 뒤의 재정 궁핍을 타개하려는 의도로 용관(冗官)을 줄이면서 일시적으로 내자시(內資寺)를 병합했다가 얼마 뒤에 다시 분리하였다.
1800년(정조 24) 4월에 다시 국가의 재정 지출을 줄이기 위해 혁파, 호조 소속의 공상육사(供上六司) 가운데 공상물종이 내섬시와 비슷한 의영고(義盈庫)에 병합하였다.
관원으로 제조(提調)·정(正, 정3품)·부정(副正, 종3품)·첨정(僉正, 종4품)·판관(判官, 종5품)·주부(主簿, 종6품)·직장(直長, 종7품)·봉사(奉事, 종8품) 각 1인을 두었다.
조선 전기에는 정3품 아문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주부 이하의 관원을 제외하고 모두 폐지해 종6품 아문으로 강등되었다. 이속(吏屬)으로는 서원(書員) 6인과 군사 1인이 있었다.
내수사(內需司) ; 조선 때 대궐에서 쓰는 물자를 공급하는 관청.
조선시대 왕실 재정의 관리를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 이조 소속의 정5품 아문(衙門)으로 왕실의 쌀·베·잡화 및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다. 조선 개국 초에는 고려 왕실로부터 물려받은 왕실 재산과 함경도 함흥지역을 중심으로 한 이성계(李成桂) 가문의 사유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따라서 내수사를 본궁(本宮)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본궁의 관리를 위해 내수별좌(內需別坐)를 두어 전곡(錢穀)의 출납 사무를 관장하게 했으나, 1430년(세종 12)에 내수별좌를 내수소(內需所)로 개칭, 개편하였다. 그 뒤 1466년(세조 12) 관제를 개편할 때 격을 올려 내수사라 개칭하고, 공식기구로서의 직제를 갖추게 되었다.
≪경국대전≫의 직제에 의하면 전수(典需, 정5품) 1인, 별좌(別坐, 정5품·종5품) 각 1인, 부전수(副典需, 종6품) 1인, 별제(別提, 정6품·종6품) 각 1인, 전회(典會, 종7품) 1인, 전곡(典穀, 종8품) 1인, 전화(典貨, 종9품) 2인 등의 관원과 서제(書題) 20인을 두었다. 이 관청은 왕실의 사유 재산을 관리하던 곳이기 때문에 전수에서 전화까지의 관직은 모두 내관이 겸하도록 하였다.
내수소(內需所) ; 조선시대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내탕(內帑)이라고도 하였다. 1430년(세종 12) 종래 궁중의 특수물품을 조달하던 내수별좌(內需別坐)를 정식관부로 개편하여 내수소라 하였다. 여기에는 별도의 토지와 노비가 다수 배정되었는데, 특히 함경도에는 내수소 소속의 해척(海尺 : 해변어부)·응사(鷹師 : 매사냥꾼) 300호가 지정되어 있었다. 내수소는 그 사사로운 성격 때문에 관서라기보다는 하나의 궁방과 같이 취급되었다. 그 뒤 1466년(세조 12) 관제를 개정할 때 내수사(內需司)로 개칭되었다.
내승(內乘) ; ①고려 말기에 궁중의 가마를 맡아보던 관청.
여기에는 주로 환관이 임명되었는데, 마료수취(馬料收取)를 위한 그들의 횡포가 심하고 농장을 설치하여 주인을 노예와 같이 부리기 때문에 응방(鷹坊)과 함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게 되자, 결국 1344년(충목왕 즉위년) 이를 혁파하고 그 토전(土田)과 노비를 본처(本處)에 돌렸다고 한다.
②조선 초에 설치한 내사복시(內司僕寺)에서 말과 수레를 맡아보던 벼슬.
1865년(고종 2)에 내사복시와 함께 폐지하였다.
내시부(內侍府) ; 1) 조선 때 대전(大殿)의 수라(임금의 식사)상을 감독,임금의 분부를 전달, 청소를 담당하는 관청.
1392년(태조 1)에 설치했으며, 궁궐 안의 음식물 감독, 왕명 전달, 궐문 수직(守直), 청소 등 궐내의 모든 잡무를 맡아보았다. 환관으로 구성되었고, 정원은 140명이었다. 관원으로는 상선(尙膳:종2품)·상온(尙醞:정3품)·상다(尙茶:정3품)·상약(尙藥:종3품)·상전(尙傳:정4품)·상책(尙冊:종4품)·상호(尙弧:정5품)·상탕(尙帑:종5품)·상세(尙洗:정6품)·상촉(尙燭:종6품)·상훤(尙煊:정7품)·상설(尙設:종7품)·상제(尙除:정8품)·상문(尙門:종8품)·상경(尙更:정9품)·상원(尙苑:종9품) 등이 있었다. 4품 이하는 문무관의 근무일수에 의거하여 품계가 올라가고, 3품 이상은 왕의 특지(特旨)에 의해 품계가 올라갔다. 정조 때 대전장번(大殿長番)·대전출입번·왕비전출입번·세자궁장번·세자궁출입번·빈궁출입번을 두었다.
2) 조선시대 내시의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
처음 설치된 것은 고려 공민왕 때였다. 고려 초기 내시직은 남반(南班) 7품에 한정되어 있었다. 곧이어 1356년(공민왕 5)에는 전문 관청인 내시부가 성립되었다. 이 때의 관원은 정2품 판사 1인에서, 종9품 통사(通事) 1인에 이르기까지 101인에 달하였다. 그 뒤 우왕 때 내시의 권력 남용이 문제되어 내시부 자체가 폐지되었다가, 1389년(공양왕 1) 대간의 요청으로 다시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 때에 내시의 직은 6품을 넘지 않도록 할 것을 규정하였다.
내시원(內侍院) ; 고려시대 왕을 측근에서 시종하던 내시들이 소속된 관청.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문종 때 내시의 인원이 20명 내외로 정해졌던 점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관부가 갖추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청(傳請)이란 절차를 통해 대부시(大府寺)로부터 내선(內膳) 물품을 공급받는 한편, 각처에 내시원별고(內侍院別庫)라 불리는 창고를 구비하고 지방에서 상납되는 특산물을 비롯하여 거란 및 송상(宋商)으로부터 구입하는 각종의 포백(布帛)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내알사(內謁司) ; 고려시대 액정국을 개칭한 관청.
왕명의 전달 및 왕이 사용하는 붓과 벼루의 공급, 궁궐문의 자물쇠와 열쇠의 관수(管守), 궁궐 안뜰의 포설(鋪設)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서.고려 초기에 액정원(掖庭院)이라 하였던 것을 995년(성종 14) 액정국으로 개칭하고 문종대에 이르러 직제의 정비를 꾀하였다. 1115년(예종 10) 약간의 직제의 변화가 있었으며, 1308년(충선왕 복위년) 내알사로 개칭하였다. 이 때의 직제는 백(伯) 2인, 영(令) 2인, 정(正) 2인, 부정(副正) 2인, 복(僕) 2인, 알자(謁者) 2인, 승(丞) 2인, 직장(直長) 2인, 내전숭반(內殿崇班) 4인, 동·서두공봉관(東西頭供奉官) 각 4인, 좌·우시금(左右侍禁) 각 4인, 좌·우반전직(左右班殿直) 각 4인, 내반종사(內班從事) 4인이었다. 1309년 내알사를 파하고 다시 액정국이라 하였다.
내약방(內藥房) ; 조선 초기 왕이 쓰는 약재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약방(藥房)이라고도 하였다. 1392년(태조 1) 7월에 반포된 관제 중에는 그 이름이 없고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고려 말 궁내어약(宮內御藥)을 취급하던 봉의서(奉醫署)의 제도에 따라서 건국과 함께 왕실내의 의약을 전담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데, 독립된 것은 아니고 전의감(典醫監)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1443년(세종 25) 6월에 이조의 건의에 따라 내의원(內醫院)이라 개칭하였다. 《세종실록》 제100권을 보면, 내약방을 내의원이라 부르고, 관원 16인을 두되, 3품은 제거(提擧)로, 6품 이상은 별좌(別坐)로, 참외(參外)는 조교(助敎)로 부른다고 하였다.
내원서(內園署) ; 고려 때 모든 원원(園苑)을 맡아보던 관청.
궁중의 원예(園藝)를 맡아보던 관아. 제향 때 채소와 과일을 공급하던 곳으로, 1308년(충렬왕 34)에 사선서(司膳署)의 관할로 되었다.
내원서(內苑署) ; 조선 시대에, 궁중 정원의 꽃과 과실나무 따위를 관리하던 관아.
내응방(內鷹房) : 대궐 안에서 매를 기르는 일을 오로지 맡아 보던 곳.
내의성[ 內議省) ; 고려 초기 중앙최고행정관청인 삼성의 하나.
조칙(詔勅)의 초안을 만들어 왕에게 상주하는 일을 맡아 보았으며, 그 장관으로 내의령(內議令)을 두고 그 아래 내의사인(內議舍人)을 두었다. 982년(성종 1)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으로 고쳤고 1061년(문종 15)에 다시 중서문하성으로 고쳤으며, 따라서 그 장관도 내사령(內史令)·중서령(中書令)으로 고쳐졌다. 그러나 내사성은 왕의 조칙을 받아 심의하여 선포하는 일을 맡던 문하성과 그 기능이 밀접하므로 두 기관이 하나의 기관으로 합쳐져 982년 이후에는 내사문하성, 1061년 이후에는 중서문하성으로 호칭되어 국가 최고의 정무기관이 되었다.
내의원(內醫院) ; 조선 때 대궐의 약과 화제(和劑:약의 처방전)을 다루는 기관.
내의원(內醫院)은 조선 시대에 국왕 이하 왕족과 궁중에서 쓰이는 약을 조제하던 관청이다.
조선 건국초에 반포한 관제 중에는 그 이름이 없으나, 태종 때 왕실의 내용약(內用藥)을 맡은 기관으로서 내약방이 있었다. 그 뒤 1443년(세종 25) 6월에 이조(吏曹)에 계청(啓請)하여 내약방을 내의원이라 칭하였는데, 관원 16인을 두고 3품은 제거(提擧), 6품 이상은 별좌(別坐), 참외(參外)는 조교라 하였다. 따라서,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독립관제로서의 내의원이 설치된 것이다.
1466년(세조 12) 1월 관제개혁 때 내의원에 소속된 관직은 정(正)·첨정(僉正) 각 1인, 판관(判官)·주부(注簿) 각 2인, 직장(直長) 3인, 봉사(奉事)·부봉사(副奉事)·참봉(參奉) 각각 2인씩 두어졌다. 이것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면서 인원수에 약간 증감이 있었을 뿐 그 관제는 그대로 존속되었다. 특히, 이때에 와서는 새로이 도제조(都提調)·제조·부제조를 1인씩 두었는데, 부제조는 승지가 겸임하였다. 그 뒤 ≪속대전≫에 와서는 직장이 3인에서 1인으로 감축되었다.
내자시(內資寺) ; 조선 때 궁내의 술, 간장, 기름, 채소 등의 물자를 공급하며 연회 등을 주관하는 관청.
내자시(內資寺)는 호조에 속한 관서로서 태조 1년 처음 설립 당시에는 내부시(內府寺)라 칭했으며 왕실의 재물을 넣어두던 부고(府庫)의 출납을 관장하고 궁궐내의 등을 밝히고 끄는 일을 담당하던 관서였으나, 태종 1년(1401) 내부시를 내자시로 그 이름을 고치고, 태종 3년 (1403) 에는 의성고를 내자시에 병합하여 이 관서의 기능이 왕실의 부고의 담당뿐만이 아니라 왕실에서 사용되는 쌀, 국수, 술, 간장, 기름, 꿀, 채소, 과일, 꽃 및 내연직조(內宴織造) 등을 관장하는 한편, 왕자를 낳은 왕비의 권초(捲草)를 봉안했다고 한다.[3] 1405년 육조의 직무를 나눌 때 호조에 소속 시켰다. 내자시에 속한 관직으로는 판사(判事) 2명 정3품이고, 경(卿) 2명 종3품이고, 소경(少卿) 2명 종4품이고, 주부(注簿) 1명, 겸주부(兼注簿) 1명 종6품이고, 직장(直長) 2명 종7품이다.
내장사(內藏司) ; ①조선 말기 왕의 세전물(世傳物)·장원(莊園)과 그 이외의 재산을 관리하던 관청.
내장원(內藏院)이라 하던 것을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내장사(內藏司)로 개칭하였다가, 1899년(고종 36, 광무 3) 다시 내장원으로 명칭을 환원하였다.
2) 대한 제국 때에, 궁내부에 속하여 왕실 경비의 예산·결산을 맡아보던 관청.
고종 42년(1905)에 회계원을 고친 것으로, 순종 원년(1907)에 내장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내장원(內藏院 ) ; 1895년(고종 32) 왕실의 보물·세전(世傳)·장원(莊園) 등의 재산을 관리하던 관청.
여기에는 경(卿)·보물사장(寶物司長)·장원사장 (莊園司長) 각 1인과 주사 9인을 두었으나, 같은 해 명칭을 내장사(內藏司)로 바꾸고, 관원도 장(長) 1인, 주사 5인으로 축소하였다. 1899년에 다시 내장원(內藏院)으로 명칭을 바꾸고, 관원으로는 경·장원과장·종목과장(種牧課長)·삼정과장(蔘政課長) 각 1인과 주사 11인을 두고, 수륜과장(水輪課長)도 소속시켰다. 1900년에는 봉세관(捧稅官) 13인을 두고, 또 공세과장(貢稅課長) 1인과 주사 1인, 기록과장 1인을 두었다.
내정사(內廷司) ; 조선 말기 내정(內政)에 관한 업무를 밭아보던 관서.
1905년 3월 포달(布達) 제126호로 궁내부관제를 개정할 때 두었다. 관원으로는 궁내협판(宮內協辦)이 겸임하는 칙임관인 장 1인과 궁내주사인 주사 3인이 있었으나 1910년에 폐지되었다.
내천부(內泉府) ; 고려시대 서경에 두었던 관서.
922년(태조 5)에 낭관(郎官)·아관(衙官)·병부(兵部)·납화부(納貨府)·진각성(珍閣省) 등과 함께 설치되었다. 내천부의 관원으로는 구단(具壇) 1인, 경(卿) 2인, 대사(大舍) 2인, 사(史) 2인을 두었다. 923년 진각성에 병합되었다.
내탕고(內帑庫) ; 조선시대 금·은·비단·포목 등 왕실의 재물을 보관하던 어고(御庫)로서의 곳간.
내수사(內需司)가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때로 내탕고는 내수사를 지칭하는 의미를 가지기도 하였다. 국왕은 천재지변이나 극심한 흉년으로 백성들이 곤궁하게 되었을 때, 이 내탕고의 재물로써 그들을 구휼하기도 하고 관료들에 대한 특별한 포상에도 사용함으로써 내탕고의 재물은 왕실 사용(私用)의 용도 뿐 아니라, 왕실의 체면과 권위를 유지하는 재원으로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노방청(奴房廳) ; 조선시대 지방 각 관아의 관노(官奴)들이 대기하던 곳.
≪경국대전≫에는 지방 각 도 각 관에 배정되는 외노비(外奴婢)의 수를 부(府) 600명, 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 450명, 도호부 300명, 군(郡) 150명, 현(縣) 100명으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1413년(태종 13) 이 가운데 각각 90명, 75명, 60명, 45명, 30명을 관아의 구종(丘從)으로 정하였다. 이들 관노들은 매일 노방청에 출근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수령의 지시에 따라 향리(鄕吏)들의 업무를 돕기도 하고 각종 관역(官役)에 사역되었다.
노부도감(鹵簿都監) ; 고려시대 국왕의 행차시에 의물기계(儀物器械)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특수관서.
국왕이 행차할 때 요구되는 의장(儀仗) 일체를 책임지는 관부로서 의물기계를 관장하는 정규관부인 위위시(衛尉寺)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설치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문종 때 정제(定制)가 마련되었으므로 적어도 문종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직제로는 3품의 관리가 겸직한 사(使) 2인, 5품의 관리가 겸직한 부사(副使) 2인, 병과권무(丙科權務)의 판관(判官) 2인이 있어 하급의 실무담당자이자 이속인 기사(記事)·기관(記官)·서자(書者) 각 2인씩을 지휘, 감독하였으며 그밖에 장교 2인, 산직장상(散職將相) 2인, 군인 4인이 간수군(看守軍)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고려 말 1391년(공양왕 3)에 이르러 혁파되었는데, 이는 2년 전 위위시가 중방(重房)에 병합됨으로써 소멸되는 것과 같은 일이며, 조선시대에는 승여사(乘輿司)가 이를 대신하였다.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 ; 조선 초기 노비소송을 처리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관서.
1269년(원종 10)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이 설치된 이후 충렬왕·공민왕·우왕 때에도 설치되었고, 1392년(공양왕 4) 인물추고도감(人物推考都監)을 설치하여 불법으로 빼앗은 노비를 본주인에게 환원시키거나 노비의 신분·상속 관계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는 일을 담당하였다.
각 방에는 사(使 : 三品)·부사(副使 : 四品)·판관(判官 : 五·六品) 각 1인, 도합 45인과 별도로 도청(都廳) 12인을 두어 소송사건을 처리하여 매일 승정원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태종 말년까지 노비변정사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지어졌으며, 이후 형조의 도관(都官)에서 이를 맡았다가 1467년(세조 13)에 전담관서로 장례원(掌隷院)을 설치하였다.
노비추쇄도감(奴婢推刷都監) ; 조선시대 공노비(公奴婢)로서 도망자·은루자(隱漏者)·불법 종량(從良)된 자를 색출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서.
조선시대의 공노비는 입역노비(立役奴婢)나 납공노비(納貢奴婢)나 모두 고된 역이나 과중한 신공(身貢)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하거나 천적(賤籍)에의 등재를 기피하였다. 이에 따라 공노비의 수효는 날로 감소하였다.
≪경국대전≫에서는 공노비에 대해 3년마다 추쇄해 속안(續案)을, 그리고 20년마다 정안(正案)을 작성해 본읍(本邑)·본도·본사(本司)·사섬시(司贍寺)·장례원·형조·의정부에 비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 번 추쇄하는 데 3, 4년씩 소요되는 대사업이었으므로 조선 건국 후 150년 동안에 실제로 여섯 차례의 추쇄로 그쳤다.
녹전봉상색(祿轉捧上色 ) ; 고려 말기 공민왕의 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파천 때 녹전의 출납 사무를 관장하던 임시관청.
‘녹전받자빛’이라고도 한다.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의 침입으로 복주로 파천해 있을 때, 임시녹전의 출납을 맡기 위해 설치하였다. 본래 녹전의 출납은 광흥창(廣興倉)의 소관이었으나 전란으로 중앙의 광흥창의 기능이 마비되자 당장의 녹봉지급을 위해 마련되었다. 그 소멸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난중의 임시관청이었던 만큼 환도 이후에 저절로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농무국(農務局) ; 조선 말기 농상공부(農商工部)에 소속한 관청.
농업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설치하였다가, 1905년(고종 42, 광무 9) 일본의 보호정치때 농무국을 농광국(農鑛局)으로 고쳤으며, 1906년(고종 43, 광무10)에 농무국과 광무국(鑛務局)으로 분리하였다.
농무도감(農務都監) ; 원나라에서 일본정벌을 위한 준비로 고려에 설치한 관아.
원나라에서는 1270년(원종 11)에 일본정벌을 위한 준비로 고려에 둔전책(屯田策)을 실시하고, 이듬해인 1271년에는 농무별감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냈다. 이 농무별감의 사명은 농우(農牛)와 농기구를 원나라의 둔전에 공급하는 것이었다. 고려에서는 전통적으로 권농사(勸農使)를 파견하여 권농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고, 1243년(고종 30)에는 권농별감을 파견한 바 있는데 이는 농무별감의 선구적인 구실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권농별감은 권농의 소임보다는 방어체제의 구축에 주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농무별감이나 그 관할관서인 농무도감의 성격도 권농이나 농무에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농우나 농기구·곡물 등을 징발하는 것이 그 사명이었다. 농무도감은 일본정벌의 중단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므로 농무도감은 원나라의 일본정벌이 남긴 역사적 소산물이라 하겠다.
농상공부(農商工部) ; 조선 말기 농무아문(農務衙門)과 공무아문(工務衙門)을 합친 관청.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합친 관청으로 농업·상업·공업·우체·전신·광산·선박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1895년(고종 32) 4월에 공포된 내각 및 각부 관제개혁에 따라 개편·설치된 내각 7부 중 하나. 1894년 7월 의정부관제안에 따라 새로운 중앙관제가 마련되었다. 옛 제도를 바탕으로 일본의 신식제도를 가미한 새 관제안은 구제도인 6조를 개편하여 내부·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의 8아문을 두었다. 1895년에 의정부가 내각으로 개편되면서 종래의 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이 합해져서 농상공부로 되었다. 여기에서는 농업·상업·공업 및 우체·전신·광산·선박·해운 등에 관한 일을 관장했다. 소속기관으로는 대신관방의 비서과·문서과, 농무국의 농사과·산림과·산업과, 통신국의 체신과·관선과, 광산국의 광업과·지질과, 그리고 상공국과 회계국이 있었다. 관원으로는 대신 1명, 협판 1명, 국장 5명, 참서관 4명, 주사 18명을 정원으로 하고, 기사를 7명, 기수를 13명 이하로 두었다. 그러나 이후 농상공부관제와 그 분과규정이 여러 차례 개정됨에 따라서 관장업무의 변화, 소관부서의 통폐합과 증설, 소속인원의 증감 등이 잇따랐다. 농상공부는 1910년까지 존속했다.
농상사(農商司) ; 1882년(고종 19)에 설치된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 산하 관서.
1882년 11월 편민이국(便民利國)에 관한 일체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설치된 통리내무아문이 같은해 12월 통리군국사무아문으로 개칭될 때 산하 관청의 하나로 설치되었다. 독판(督辦) 1인, 협판(協辦) 3인, 참의(參議) 3인, 주사(主事) 4인을 두었다. 1884년 10월 갑신정변 직후 수구당이 다시 정권을 잡아 상급관청인 통리군국사무아문을 의정부에 합체(合體)시켰을 때 폐지되었으며, 그 기능은 의정부내의 관련업무 기구에 흡수된 것 같다.
농상아문(農商衙門) ; 조선 말기 농업과 사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설치하였다. 농상아문에 소속한 국은 총무국(總務局)·농상국(農桑局)·공상국(工商局)·산림국(山林局)·수산국(水産局)·지질국(地質局)·장권국(奬勸局)·회계국(會計局) 등 8국이 있다.
갑오개혁 때 설치된 농상업무를 담당한 중앙행정부서. 1894년(고종 31) 군국기무처는 6월 2일자 의안에 따라 중앙정부구조를 궁내부와 의정부로 개편했고, 의정부 아래에는 아문관제에 따라 내무·외무·탁지·법무·학무·공무·군무·농상 등 아문을 설치했다.
농상아문은 농업·상업·수산·종목(種牧)·지질·영업회사 등의 사무를 관장했다. 직제는 대신과 협판(協辦) 각 1명을 두고, 그 아래에 총무국을 비롯한 국을 두었다. 농상국은 개간·종수(種樹)·잠상(蠶桑)·목축·편찬사무 등을, 공상국은 상무(商務)·도량형의 심사 및 각종의 제조·권상(勸商)·흥공(興工) 업무를, 산림국은 산림경제·사유산림의 통계 및 산림학교 등을, 수산국은 어채·해산의 번식 및 어개(魚介)의 제조·수산회사 등을, 지질국은 토질의 비옥도 판별, 식물 및 화토비료·광류(鑛類)의 분석, 지형의 측량·제도 등을 관장했고, 장려국과 회계국은 식산의 장려·흥업 및 전매특허사무 등을 주로 담당했다. 각 국마다 참의 1명과 주사 2~8명씩 모두 28명이 배치되었는데, 식산흥업(殖産興業) 및 전매특허사무를 관장하는 장려국·수산국·지질국은 산림국장이 겸임했다. 농상아문은 1895년 4월 1일에 실시된 관제개편에 따라서 공무아문과 합해져 농상공부에 편입되었다.
뇌영원 ; 조선 연산군 때 설치한 가흥청(假興淸 : 예비 기생)의 임시 처소.
1505년(연산군 11) 6월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집을 징발하여 가흥청들을 거처하게 하고, 이를 뇌영원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흥청(興淸 : 정식 기생)들의 처소는 취홍원(聚紅院)이라 하였다. 뇌영은 ‘꽃봉오리’를 뜻하며, 가흥청은 전국에서 소집된 처녀 기생으로서 아직 대궐에 들어가지 않은 자들을 지칭하였다. 취홍원과 뇌영원에는 문관 4인씩을 각각 배정하여 매일 2인씩 숙직하게 하였는데, 1506년 중종반정과 함께 혁파되었다.
누국(漏局) : 누각(漏刻)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로 보루각(報漏閣)의 별칭.
경복궁과 창덕궁 안에 있었다. 연산 11년 11월 24일 창덕궁(昌德宮)으로 옮겼다.
능라점(綾羅店) ; 고려시대 능라(비단)를 제작하는 업무를 관장하던 것으로 보이는 관서.
1178년(명종 8)에 서경에 의조(儀曹)·병조(兵曹)·호조(戶曹)·창조(倉曹)·보조(寶曹)·공조(工曹)의 6조를 둘 때 보조의 속사로 설치되었다. 그 기능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명칭으로 미루어볼 때 능라를 만드는 장인을 확보하여 서경관원에게 필요한 능라를 제작하였던 기관으로 추정된다.
능마아청(能麽兒廳) ; 조선 시대에, 무관의 병학(兵學)을 강의하고 시험을 보던 관아.
1629년(인조 7) 1월 이귀(李貴)·이서(李曙) 등의 건의로 설치했다가 1882년(고종 19)에 폐지했다. 관원은 당상관 3명, 낭청 4명 등으로, 1개월에 6번 능마아강(能麼兒講)을 관장해 무신의 질적 향상을 꾀했으며 교과서로는 〈병학지남 兵學指南〉을 썼다. 오위도총부, 훈련원의 낭청(郎廳), 내삼청(內三廳)의 금군(禁軍) 및 여러 대장의 군관들이 모두 학습했다.
출처 : 하얀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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