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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법성게(法性偈) 강론(講論)] 화엄사상의 극치 -신십현과 고십현의 연기론

똥하 2015. 10. 6. 18:50

 

[법성게(法性偈) 강론(講論)] 화엄사상의 극치 -신십현과 고십현의 연기론 

 

 

 

 ▶ 의상스님께서 지엄화상의 입적 3개월전에 저술한 이 법계도는 화엄경의 사상을 한편의 시로 압축한 것이다. 가운데 부분의 法자에서 시작, 글자 사이의 붉은 줄을 따라 7자씩 읽어가면 法자 바로 아래에 있는 佛자에서 끝나도록 되어 있다. 법계도는 좌측과 같이 전체적으로 배치되어 하나의 圖印 형태를 띠고 있다.

 

 

 

法性圓融無二相  법과 성품은 원융하여 두가지 모양이 없나니

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이 움직임이 없어 본래부터 고요하다

無名無相絶一切  이름없고 모양도 없어서 온갖 경계가 끊겼으니

證智所知非餘境  깨달은 지혜로만 알 뿐 다른 경계 아니로다

眞性甚深極微妙  참된 성품 깊고 깊어 지극히 미묘하나

不守自性隨緣成  자기 성품 지키잖고 인연따라 이루더라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중에 일체있고 일체 중에 하나있으니

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

一微塵中含十方  한 티끌 그 가운데 시방세계 머금었고

一切塵中亦如是  일체의 티끌 속도 또한 다시 그러해라

無量遠劫卽一念  끝이 없는 무량겁이 곧 일념이요

一念卽是無量劫  일념이 곧 끝이 없는 겁이어라

九世十世互相卽  구세 십세가 서로서로 섞였으되

仍不雜亂隔別成  잡란없이 따로따로 이뤘어라

初發心時便正覺  처음 발심 하온 때가 정각을 이룬 때요

生死涅槃相共和  생사와 열반이 서로 서로 함께 했고

理事冥然無分別  이와 사가 그윽히 조화하여 분별할 것 없으니

十佛普賢大人境  열 부처님 보현보살 큰 사람의 경계더라

能仁海印三昧中  부처님의 해인 삼매 그 가운데

繁出如意不思義  불가사의 무진법문 마음대로 드러내며

雨寶益生滿虛空  보배의 비로 생명을 이롭게 한 일 허공에 가득 차니

衆生隨器得利益  중생들이 그릇따라 갖은 이익 얻음이라

是故行者還本際  이 까닭에 수행자들은 마음자리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파息妄想必不得  망상을 쉬지않곤 얻을 수 없네

無緣善巧着如意  인연 짓지않는 좋은 방편으로 마음대로 잡아쓰니 

歸家隨分得資糧  마음자리에 돌아가매 분수따라 양식 얻네

以陀羅尼無盡寶  이 다라니 무진법문 끝이 없는 보배로써

莊嚴法界實寶殿  온 법계를 장엄하여 보배궁전 이루고서

窮坐實際中道床  영원토록  법의 중도 자리에 편히 앉아

舊來不動名爲佛  억만겁에 부동함을 이름하여 부처라하느니라.

 

 

 

1. 화엄사상의 극치 

 

일승원교 화엄사상(一乘圓敎 華嚴思想)은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도리를 밝힌다. 모든 법의 덩치()와 꼴()을 구명(究明)하고 주인()과 손님()이 주인될 때도 있고 주인이 손님될 때도 있어 주객이 구분없고 걸림(無碍)없음을 연설하며 결과()와 꼴()이 두루 갖추었음을 보이고 있다.「사사무애」란 다른 대로 존재하는 사물(事物)들이 아무런 걸림도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결과적인 꼴()」이란 말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로서 그 깨달음 속에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러한「일승원교」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것이「연으로 일어나는 열가지 진리」십현연기(十玄緣起)와「여섯꼴의 둥글둥글한」상태를 나타냄이란 것이다.

 

 () 신십현과 고십현의 연기론 

우주간에 나타나 있는 사사물물(事物) 만상전체(萬象全體)가 둥글고 원만하여 걸림없는 관계에 있음을 열가지 관점에서 설한 것이 십현연기무애문(十玄緣起無碍門)이란 법문인 것이다. 그런데「십현문」에는 두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지엄선사의 일승십현문(一乘十玄門)이다. 법장스님의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에 실린 십현문(十玄門)의 명칭에 어긋남이 있다. 전통적으로 앞의 것을 고십현(古十玄) 뒤에것을 신십현(新十玄)이라고 불러왔다. 가장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고십현」의 아홉째「유심회전선성문(唯心回轉善成門)」인데「신십현문」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심(唯心)이나 일심(一心) 또는 진여심(眞如心)등을 우주만법(宇宙萬法)의 실체(實體)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니 범하지 말라고 법장스님이 일부러 없앴다고 전한다. 그러면「신십현」에 기초해서 의심되는 실마리를 풀어보자

 

(1)「동시구족상응문」이란 무엇인가?

 

십현문의 총설(總說)이며 나머지 9문까지는 별설(別設)이라고 한다. 이제부터 「제1문」의 의미를 들것 같으면 우주만유(宇宙萬有)는 시간과 공간을 통하여 상즉상입(相卽相入)해서 연기(緣起)하는 것으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삼세현상(三世現相)은 반드시 동시에 서로 응하며 과거에도 현재와 미래를 구족하였고 현재에도 미래에도 또한 동일하게 과거 현재 미래를 구족히 하여 앞과 뒤, 시작과 끝의 분별이 없이 서로 구족히 응하여 마침내 한덩치(一體)의 관계를 지어서 연을 일으켜 나타난다.(緣起現顯)는 것이다. 한 예를 들면 금으로 만든 금사자가 있다면 금과 사자가 동시에 성립하여 두루 구족한 것과 같다. 즉 바닷물 한방울에도 백천강물의 맛이 갖추어 있는것과 같다는 법문이다.

 

(2)「광협자재무애문」이란 무엇인가?

 

「고십현」의「제장순잡구덕문」에 해당하는 법문이다.「제장순잡구덕」의 현상(現相)을 설하는 것으로서 인연으로서 일어나고(緣起)있는 모든 법은 순수한 것과 잡박한 것이 섞여 있으나 그러나 순수한 것은 순수한 대로 잡된 것은 잡된대로 곧 금은 금대로 은은 은대로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제자리(本位)에 의지하여 있다. 이것이 동시일념(同時一念)으로「광협」이 자재하여 걸림없는 것을 설하는 법문이다.

 

(3)「일다상용부동문」이란 무엇인가?

 

현상세계의 일체사물의 작용(作用)에서 무진연기(無盡緣起)를 설한다는 것이다. 이 우주간 모든 존재를 상호역학관계(相互力學關係)에서 보게되면 하나(개체)는 전체에 들고(一入多) 전체는 개체에 들어있어(多入一) 걸림없이 자재한다. 그러면서도 각각 나름대로의 개성을 잃지않고 본래의 면목(面目) 곧 금은 금모습 빛이있고 은은 은모양의 빛을 보유하고 본분에 의지하면서 개성과 전체가 혼란되지 않는 것이 마치 한방에 일천등불의 광명이 비취되 서로서로 걸림없는 것과같이 상입무애(相入無碍)의 소식을 전하는 법문이다.

 

(4)「제법상즉자재문」이란 무엇인가?

 

연기(緣起)는 공()과 유()에 바탕하여 상즉(相卽)함을 열게된다. 일즉일체(一卽一切) 하나가 일체법을 통섭하고 일체법이 하나에 통섭되어 두루걸림 없는 것을 설하는 것이니 마치 금으로 만든 금사자의 팔이나 다리 4지와 털한개라도 다 사자의 전체인 것과 같다. 이를 다시 말하면 적은 영주가 대한민국에 통섭되고 대한민국이 곧 적은 영주를 통섭하는 다시 말하면 한분의 대통령이 많은 국민을 통섭하고 많은 국민들이 하나의 대통령에게 통섭되는 것과 같아서「자재원융」하다는 법문이다.

 

(5)「은밀현요구성문」이란 무엇인가?

 

고십현법문에서 설하는「비밀은현구성문」에 해당한다. 모든「연기법」은 각각 은()과 현()의 관계가 있어서 파악이 된다. ()이란 말은 숨는다는 것이고「현」이란 말은 늘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1)가 들어나면 많은()것은 숨고 많은()것이 들어나면 하나(1)는 숨는다. 상즉(相卽)이란 것이 겉()이되면 상입(相入)이란 것은 속이되고 또 상입(相入)이란 것이 겉이되면「상즉」이 속이되는 것이다. 법장스님은 이 법문을 설명하기 위해 금사자의 예를 들었다. 마치 금으로 만든 사자를 바라보는 것과 같아서 사자로만 보면 사자만 있고 금은 숨는다. 금으로만 보면 사자는 숨는것과 같은 것이다. 사물(事物)을 파악하는 법이 두가지가 있다. 안에서 내다보는 법과 밖에서 들여다 보는 법이 그것이다. 인생의 진실도 마찬가지로 숨은것과「들어남」의 두가지 측면이 있다. 한쪽만 고집해서는 진실을 놓친다. 그러지 아니해야만 진실에 접근한다는 법문이다.

 

(6)「미세상용안립문」이란 무엇인가?

 

모든 연기법(緣起法)은 크고 작은 것을 해치지 않고 더욱이 한법문(一法門)안에서 동시에 구족하게 들어남을 설하고 있다. 개체()가 능히 전체()를 포함하고「전체」가 능히 개체를 거두는 것이 마치 겨자씨 한알속에 수미산(須彌山)을 용납하고 한티끌속에 대천세계를 수용하면서 티끌만치도 현상태를 파괴하지 않고 각각 그 분수를 지켜 서로 수용하고 서로 안립(安立)한다. 얼핏보면 잡되고 무질서한 외양(外樣)을 갖추고 있더라도「속알」은 침범할 수 없는 스스로의 질서가 엄존(儼存)한다는 것을 알리는 법문이다.

 

(7)「인다라망법계문」이란 무엇인가?

 

이 우주간에 모든 존재가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얽히고 설켜서 즉입(卽入)하는 관계를 들어낸다는 말씀이다.「인다라망」이란「인드라신」곧 제석하늘을 지칭(指稱)하는 것으로서 제석궁전을 장엄한 그물이란 말씀이다. 그 보배그물은 보배구슬로 낱낱이 광채를 내면 무수한 보배 부슬빛이 서로서로 비추어서「중중무진」한 것과 유사(類似)하게 세계의「사사물물」도 서로 융합융통(融合融通)하며 끝없는 큰광명에 휩싸여서 걸림없다는 법문을 설한 것이다.

 

(8)「탁사현법생해문」이란 무엇인가?

 

이 우주간의 모든 연기법(緣起法)이 개체()가 전체()이고, 전체()는 곧 개체()로서「중중무진」으로 상즉(相卽)하며 상입(相入)하되 주인과 손님이 분명하여 참으로 설명을 다할 수 없고 참으로 어떻게 생각으로는 알 수 없는 경계를 말씀하신 것이다.「탁사현법」이란 속이 항상 사법(事法)에 의탁하여 다함없는 법문을 들어낸다는 말씀이다. 한떨기 꽃에서 화엄법계(華嚴法界)의 진상(眞相)을 느껴본다는 것이 여덟째 구절의 법문이다. 현상에 의탁하여 진리를 들어내려는 발상(發想)은 후에 밀교(密敎)에서 결실을 맺는다.「만다라」가 부처님의 생명임을 강조하는「밀교」는 화엄사상의「탁사현법」을 발전시킨 법문이다.

 

(9)「십세격법이성문」이란 무엇인가?

 

시간적 관점에서 무애의 도리를 논설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다 또 과거 현재 미래의「삼세」를 설정(說定)하면(3×3=9) 9(九世)가 된다. (과거의 과거, 과거의 현재, 과거의 미래 식으로) 9세를 통합하는 절대적 현재를 추가해서 십세(10)가 된다. 이 십세가 동시에 나타나「연기」를 이룩함이 화엄사상으로 본 시간의 진상이다. 아홉째 법문구절의 성립근거는 화엄경에서 설하는 과거겁()이 미래겁으로 들어 간다든가 한점 티끌에 넓이 3(三世)의 모든 부처님세계(佛刹)를 나툰다는 상즉원융(相卽圓融)의 사상이다. 현재의 한 사건에 과거 현재 미래의 전부가 비추어 나타난다는 관법(觀法)에 기초하고 있다는 법문이다.

 

(10)「주반원명구덕문」이란 무엇인가?

 

「고십현(古十玄)」의 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을 없애고 그 자리를 대신메운 법문이다. 우주간에 현성(現成)하고 있는 모든 존재는 어느것도 홀로 일어나지 않는다. 단독자란 있을 수 없다. 사람이란 글자()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다른 한쪽이 없으면 일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짝이 필요하다. 한사람의 명배우가 있기 위해서 주위에 많은 조연(助演)이 필요한 것처럼 북극성(北極星) 곁에 뭇별들이 둘러있어 빛나는 것처럼 그물코 한 개만 들면 그물전체가 따라 오는 것 같으니 주인과 손님(主伴)이 두루 분명하여 만가지 공덕(功德)을 갖추었다는 법문이다.

 

이제까지 간략하게 나마 십현문(十玄門)의 하나 하나의 법문을 살펴 보았다.「십현문」은 처음에 지엄선사가 일승십현문(一乘十玄門)에서 논설했다. 그것을 법장대덕스님이 체계화(體系化)하고 조직화(組織化)해 놓은 것이다. 이 법문은 화엄사상의 극치(極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화엄사상의 배후에는 깊은 종교적 체험도 깔려있다. 이러한 무진연기(無盡緣起)는 실천적 체험적으로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수행(修行)이 선행(先行)되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여기서 수행이란 말은 「발심(發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마지막 10번째의「십세격법」에서 설하는 법문을 좀더 알기쉽게 풀어보면 10()의 논법은 화엄오교(五敎章)가 선택한 독특한 방식이다.

이렇게 3×3=9인데 이 전체를 일세(一世)로 통괄하면 10()가 된다.

어째서 이러한 특이한 분석을 하고 있는가? 시간을 잘게 짜개면 무한에 이른다. 이 무한의 시간을 일세(一世)가 통합하고 있다. 통괄하면 영원히 현재인 일세(一世)가 되고 짜개면 무한 시간임을 밝히고자 하는 법문이다.

시간성(時間性)은「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포착하면 하나이다. 자연과학적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직선구조(直線構造)를 갖고 있지만 불교적 시간은 영원의「지금 그리고 여기」만이 존재한다. 옛날에도 그런 현재가 있었다. 그것이 과거이다. 앞으로도 그만한 현재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미래이다. 그러나 과거는 벌써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있는 것은 다만 현재뿐이다. 다만 시간은 존재에 빌붙어 사는 우연성을 지닌다. 존재가 있어 시간이 있다. 시간이 있어 존재가 제자리를 찾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변화를 통해서만 시간이 무엇인가가 알려지는 것이다.(계속)

 

법성게(法性偈) 강론(講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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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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