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스크랩] [법성게(法性偈) 강론(講論)] 깨달은분(證得分)

똥하 2015. 10. 6. 18:49

 

[법성게(法性偈) 강론(講論)] 깨달은분(證得分)

 

 

 3. 법성게의 한글말씀과 본문

  

() 깨달은분(證得分)

 

 

①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둥글고 둘이아닌 법성의 모습이여

 

②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고요뿐 동작없는 삼라의 만상이여

 

③ 무명무상절일체(無明無相絶一切

이름도 꼴도없고 일체가 다없거니

 

④ 증지소지여경(證智所知非餘境

불보살 아니고는 이 경계를 뉘알소냐

 

 

강론 (1)구절부터 (2) (3) (4)구절까지 합론

이 법성게는 위에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신라시대 의상조사께서 지으신 게송으로서 7(七言) 30구절 이백열(210) 글자로 화엄경사상을 통째로 표현한 철학적이요 종교적인 시구(詩句)이다. 그래서 이 게송은 무릇 세계적으로 찬송받는 명시(名詩)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법성게는 형상세계의 우주삼라만상과 본체계(本體界)의 심성(心性)이 어떻게 연기(緣起)하고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경전이다.

먼저 법성게(法性偈)란 제목부터 그 출처가 화엄경의 어느 품중에서 나왔는가를 살펴 보기로 한다.

화엄경 야마천궁 게찬품 각림보살 찬송중(華嚴經 夜磨天宮 偈讚品 覺林菩薩 讚頌中)에 이런 사구게(四句偈)가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과() () 미래(未來) 삼세간(三世間)의 모든 부처님 경계를 알고저 할진데 마땅히 화엄법계의 성질을 관찰하여라. 우주간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짓는다.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였다. 이 네귀글중에 넷째줄「응관법계성」의 구절중에 있는 계()자를 빼고, 법성(法性) 두자를 발취하여 제목(題目)으로 지은것이「법성게」가 아닌가 생각한다.(이것은 필자의 사견임).

그리고 화엄경중에 게찬품송이 한량없이 많은데 어찌하여 특히 이 「유심사구게」만을 「대방광불화엄경, 제일게」라 하여 칭송하는 소이가 무엇일까?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화엄법계성(法界性)을 통하여 관찰하니 천지만물일체는 자기 심성이 짓는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셨다네.

이 법성게는 일심(一心)과 현상(現相)을 표리(表理)로 하여 연기(緣起)를 설하고 있다.

법성(法性)이란「법」자는 곧 「다르마」라는 불교에서는 대단히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의상조사는 이 부분의 해석을 생락하고 있다. 스스로 깨달음(自內證자내증)의 내용을 천명하는 부분이기에 설명이 필요없는지 모른다.

후학(後學)들을 위하여 상기원문(上記)을 다시 직역하여 두는바 원문과 대조 참고하기 바란다.

 

① 법성은 원융하여 두모양이 없다.

 

「법성」이란 심색(心色)을 말한다. 만유(萬有)의 본덩치로서 진여(眞如)법계(法界)라고도 한다.「원융」이란 마음덩치를 말함이니 현실(事과 진리(眞理)가 차별이 없이 둥글둥글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무이상」이란 상대성(相對性)을 말한 것이다. 심성(心性) 자체가 넓고 크고 무변하여 걸림이 없다. 곧 비유하면 허공이 넓고 커서 가시없고 크기에 상대가 없어서「둘이 없다」는 뜻이다.

 

② 모든법이 움직임이 없이 본래 적적하다.

 

「제법」이란 우주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事物)을 말씀하는 것이다.「부동」이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사상(四相)이 없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곧 천지만물이 무상(無常)하여 생()이 있으면 멸()함이 있어 모든 사물은 변하지만 그러나「제법의 성」은 상주불멸(常住不滅)하고 항상 적적하다는 뜻이다.

 

③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어 일체가 끊어졌다.

 

「무명」인데 명()이란 사람들이 무슨 대상에 이름을 붙인것이지 그 자체는 본래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무상」이란 모양이라는 뜻을 말씀한 것인데 모양이란 본래부터 진실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④ 증지와 소지가 다른 것이 아니다.

 

「증지」란 후득지(後得智)를 뜻하고 수도(修道)로 증득(證得)하는 지혜를 말한다.「소지」란 근본지혜를 뜻함이니 일체중생이 본래부터 부처님성품을 갖고 있는것이「근본지혜」이다.「비여경」은 근본지혜와「후득지」가 다른 것이 아니란 뜻이다. 마치 황금이 채굴되기 전에는「근본지혜」요 채굴된 후에는「후득지혜」에 비유한다.

 

그런데 법성게기(法記)에는 다음같이 풀이하고 있다.

 

묻는다 : 무엇이 「법」인가?

답한다 : 인분(因分)을 빌어 나타낸 것이다. 만약 억지로 지적하라 한다면「네몸과 마음이 그것이다」하였다.

 

()이라고 하는것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나 대체로 보면 규범(規範)이란 의미와 임지(任持)란 의미가 있다. 규범이란 말은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인간윤리(人間倫理)와 인간지혜(人間智慧) 그리고 인간의 온갖 생활복덕을 발생케하는 것이고,「임지」란 말은 그 자신이 어떠한 기본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니 곧 사람들에게 큰 깨달음의 눈을 열어주는 기연(機緣)을 지어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법()이란 것은 다 훌륭하고 좋은 것만을 이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법」에는 어떠한 것이든지 다 그 가운데 들어간다. 다시 말하면 내적존재(內的存在)거나 외적존재(外的存在)거나 착한것이나 악한것이나 깨끗한 것이나 더러운 것이거나간에 모두를 다 포함할 수 있는것이「법」이다.

이러한「법」의 세계를 곧 법성게의 내용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주위에 벌어져 있는 세계가 곧「법계성」이란 것이다.

이 법계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성품이 무질서 하거나 난잡하거나 흐트러져 있는 세계가 아니다. 거기에는 통일성이 있고, 조직이 있어서 하나도 무용(無用)한 것이 없고 부족한 것이 없는 오로지「하나」의 세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계는「一心」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법성게는 거의 전부가 일심법계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심법계를 떠나서는 어떠한 것이든지 이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일심법계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법성게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법기(法記)에 묻기를 무엇이 성()인가?

 

답한다 : 원융 곧 둥글둥글 한 것이 성이다.

묻는다 : 그러면 어떤 것을 둥글둥글(원융)한 것이라고 하는가?

답한다 : 무이상(無二相) 곧 둥글고 둘이 아닌 모습이기 때문이다.

묻는다 : 그러면 하나인 까닭에 무이(無二)라고 하느냐 둘이면서도 무이(無二)란 말이냐?

답한다 :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무이(無二)이고, 두 모습(二相)이 곧 무이(無二)이다.

 

그러므로 화엄론(華嚴論)에 말씀하기를 일심법계가 우주만유를 총괄하여 있는지라 마음의 물이 담연하면 우주삼라만상이다. 만상이 다 그가운데 나타난다. 다시 비유하면 마치 큰바다물이 맑고 깨끗하면 허공도 해와 달도 별도 구름도 내지 크고 작은 모든 물상이 다 그 가운데 나타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정한「법계성(法界性)」에는 두모습(無二相)이 없다는 것이다.

! 여러 법성자(法性子)들이여, 이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끝이없는 허공을 바라보자! 모양없는 허공을! 허공의 성질이 하나냐 둘이냐? 태양도 달도 별도 지구도 사람도 짐승도 모든 삼라만상이 다 허공성(虛空性) 중에서 돌아가고 있드시「일심법계」중에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만상을 다 포함하고 있지만 조금도 걸림없음이 마치 허공과 같은 것임. 그래서 처음도 끝도없는 일심법계 곧 법성(法性)은 두모양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일심법계에 있는 모든만상은 서로 서로 걸림없고 평화롭고 고요하여 동요가 없다는 것이 제법이 부동하여「본래적」이란 말이다.

 

법기에 묻기를 무엇을 제법이라 하느냐?

답한다 : 법성(法性)이 그것이다.

묻는다 : 어째서 부동(동작없다)이라 하는가?

답한다 : 원융 곧 둥글기 때문이다.

묻는다 : 어째서 본래적(삼라의 바탕)이라 하는가?

답한다 : 무이상(無二相)(둘이 아닌꼴)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알기쉽게 비유하면「두모양 없음과 모든 법」이 물이라면 물은 때로 구름, 증기, , 안개, 우박, , 서리등등의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한다. 그러나 물의 본성(本性)인「에너지(H2O)」즉 산소, 수소, 습기만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구름, , 증기, , 안개, 우박, , 서리등이 곧 물의 고향으로 되돌아 가게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두모양(無二相)이 없음이란 마치 물과 같고 모든법(諸法)이란 비, , 구름, 우박, 안개와 같은 것이다. 고요하다(본래적, 本來寂)함도 또한 구름, , 안개, , 우박등이 곧 물이 되는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남자나 여자나 그 생김새, 모양은 각각 다르지만 그러나 남자 여자의 몸으로 생기기 이전 그「에너지(H2O)」곧 흙, , , 바람, 공기등은 인간남녀의 구별이 없이 남녀의 두 꼴이 없듯 오직 일심법계는 변동이 없어 항상「고요」본래적 하다는 말이다.

또 다시 말하면「전기는 뜨겁다」하면「전기는 차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전기에 온풍기를 꼽으면 더운김이 나지만 전기에 선풍기를 꼽으면 찬바람이 나기 때문이다. 또「전기는 움직인다」하면「전기는 움직이지 않는다」고도 대답할 수도 있고, 「전기는 움직이지 않는다」하면「전기는 움직인다」고도 말할 수 있으니 움직이는 장치에 전기를 넣으면 역시 전기는 고정되어 있다. 그렇다고 전기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전기는 언제나 전기로되 그 작용을 따라 이와같이 천차만별의 차이를 낼수가 있다. 전기의 본성(本性)이 원융하여 두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는 두 모양이 아니기 때문에 두 모양을 나타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전기본성은 어느 곳 어떻게 흘러가던지 변동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이와같이 모든법은 본래부터 고요하여 변동하지 않는 것이라 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 곧 법성자리에는 원래 법성(法性)이니 진여(眞如)니 무슨 제법(諸法)이니 하며 이름을 지어 붙일도리가 없는 것이다.

예를들면「어린이」의 이름을 짓는다. 진리니 개똥이니 뭐니하고 부르게 되면 그 어린이는 그 이름으로 자신을 삼고마는 것이되듯 만일「법」에 진여니 법성이니 하고 무슨 이름이 붙게되면 벌써 법성자체(法性自體)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법성자리」에는 그 명상이 다 끊어졌다는 것이다.

 

「법성계기」에 묻기를 본래적(本來寂)한 곳에도 이름을 붙일 수 있는가?

답한다 :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무명(無名) 곧 이름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묻는다 : 어째서 무명(無名)인가?

답한다 : 무상(無相)이 곧 꼴이 없기 때문이다.

묻는다 : 어째서 무상(無相)인가?

답한다 : 절일체(絶一切) 곧 모든 것을 여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일체의 유위성(有爲性)과 조작성(造作性)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다시 예를들면「불()」이라든지「물()」이라든지 바람이라는 그 이름은 본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생활용법(生活用法)에 따라서 그 이름을 붙혀 부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억지로 무엇이라고 이름을 지어 부를 뿐이다. 즉 부처님이니 중생이니 천국이니 지옥이니 극락이니 예수니 공자이니 귀신이니 하며 칭하는 것은 하나같이 가명(假名)에 불과한 것이다.

꼴모양도 마찬가지다. 원래 법성자체(法性自體)에는 人法이 공()하여 아무런 꼴이 있는 것이 없지만 미개한 인연을 따라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니 불상(佛像)이니 예수님상이니 개상이니 소상이니 무슨 지옥 아귀 축생등 사성육범(四聖六凡)내지 천태만상이 우리의 눈앞에 벌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모든상(諸相)」이 진짜모습이 아니라 필경에는 전부가 헛되고 망령되어 진실함이 없는(虛妄無實) 가짜모습(假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착한사람, 악한사람이란 이름이나 모양(名相)이 따로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악한마음을 내서 악한 행동을 하면 나쁜별명이 붙고 도적질을 자꾸하면 저놈은 도적놈 같다는 인상을 받게된다. 그러나 반대로 착한 마음을 일으켜서 착한 행동을 하게되면 따라서 악명인 도적놈이란 인상이 지워지는 것이니 이것이 곧 절일체, 모든 것이 다 끊어 없어진 소식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의 서문을 지으신 함허득통선사가 이르기를「여기에 한물건이 있으되 이름이나 모양이 다 끊어졌으나 옛과 지금에 통한다」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성 곧 진리는 우리들의 불완전한 말씀으로나 지식으로나 생각으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이르기를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 하였다. 즉 어떤 말씀으로나 생각자리가 딱 끊어진 극단적인 표현을 하였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들 무명업식(無明業識)에 가리워진 것을 해탈못하고 있는 구박범부(垢縛凡夫)로서 어찌감히 불심(佛心)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법성게기」에 여기에는 수증(修證)도 여이었다고 한 것이다.

 

묻는다 : 실제로 수증(修證)이 없는가?

답한다 : 실제로 없다.

묻는다 : 그러나 성인(聖人)도 수증(修證)을 구하는 것인데 어떻게 수증(修證)을 하는가?

답한다 : 만일 가르칠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분(敎分)이기 때문이요 오직 대장부는 일심자리를 잘 깨달아야 할뿐 별다른 경계가 없다.

묻는다 : 이 수분(修分)중에 일체제법(一切諸法)이 갖추어져 있는가 없는가?

답한다 : 갖추어져 있다면 변계비법(遍計非法)도 갖추고 있는가?

답하다 : 무엇을 갖추고 무엇을 갖추지 않는다는 말인가?

말하자면 한가지 물건에도 보편적인「법」이 아닌 것이 없으니 무엇을 갖추겠는가? 동작업는 변계비법(遍計非法)은 곧 만족한 법이다. 어찌 그것을 갖추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지엄선사가 말씀하였다.

묻는다 : 일승(一乘)중에 무슨법이 없겠는가?

답한다 : 비법(非法)이 없다.

묻는다 : 무슨법이 없지 않겠는가?

답한다 : 비법(非法)이 없지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하면 공중에 전기의 성질이 가득하고 바닷물에는 짠맛이 가득하여 분명히 있지만 일체의 이름이나 형상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고 뜻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모든 이름과 형상이 없기 때문에 본래 없다고 말하나 분명히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물건도 없어서 마음도 부처도 법도 스승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다. 그러나 지극히 크고 신령하여 그야말로 부사의(不思議)한 경계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깨친 사람 아니고는 뉘가 알소냐 한 것이다. (계속)

 

 

 

출처 : 진흙속의연꽃
글쓴이 : 진흙속의연꽃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