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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법성게(法性偈) 강론(講論) 9 ] 시간성의 분별(時間性分別)

똥하 2015. 10. 6. 18:47

 

[법성게(法性偈) 강론(講論) 9 ]  시간성의 분별(時間性分別

 

 

 

 

() 시간성의 분별(時間性分別

 

⑪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한없는 긴시간도 눈깜박 일념이고

 

⑫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時無量劫

찰나의 한생각도 끝없는 긴겁일세

  

⑬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삼세와 구세십세 응킨 듯 한덩인 듯

  

⑭ 잉불잡난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그러나 따로따로 뚜렷한 만상이여 

 

강론 (11)구부터 (12) (13) (14)구까지 합론

 

⑪ 한량없는 먼시간도 한생각에 달려있고,

 

⑫ 한생각 한량없이 먼시간에 미처있다.

 

「무량겁」이란 아승지겁을 뜻함이다. 그러나 아승지겁이 비록 멀다하나 그 또한 한생각에 달렸으니 가직하고 멀다는 뜻이 없다는 것이다.

 

⑬ 구세와 십세가 서로 한뭉치다.

 

⑭ 이것이 서로 섞여도 어지럽지 않고 각각 이룬다.

 

이는 한량없는 중생들 마음이 우주간에 꽉차 있지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섞여도 어지럽지 않고 각각 따로 이룬다는 뜻이다. 여기 11구에서 14구절까지는 시간성(時間性)에 관련지어 진리를 설하는 대목이다.

 

()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아주 어마어마하게 오랜 긴시간 세월을, 그리고 일념(一念)이란 가장 순간적인 눈깜박할 사이도 못되는 찰나의 시간을 두고 말한다. 사방 60리되는 성안에 개자씨를 가득 채워놓고 우리현재 인간시간으로 백년만에 한번씩 그 성중에 와서 개자씨 한알씩을 집어내가서 완전히 그 성안을 비우게 될 때를 일개자겁(一芥子劫)이라 한다. 그것을 현재 우리인간의 시간으로 따진다면 몇백억만년이 될 것이다. 몇백억만년씩 되는「겁」이 한량없이 많은「겁」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는 것을 무량원겁(無量遠劫)이라 한다. 그렇게 오랜시간이 곧 한생각이다 하였다.

이것을 좀더 알기쉽게 다음같은 비유를 들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친구를 따라 카바레를 갔다. 아름다운 선녀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유혹에 빠져 날새는줄 몰랐다. 친구녀석이 등을 두들기며「야! 어서가자. 출근시간이 되었다.

「뭐 벌써 그렇게 되었어」하고 자리를 떴다. 그는 그 자리를 뜨면서 그의 파트너에게 어디서 몇시에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는 퇴근시간에 부랴부랴 달려가서 정한 장소에서 기다렸는지 아직 그가 나오지 아니하였다. 어찌나 몸이 달았던지 일초가 여삼추(一秒如三秋)였다. 1 2분이 가고 3 5분이 지난뒤에 만나서 벌컥 화를 내면서 10년도 더 기다렸다 하면서 팔짱을 끼고갔다. 같은 시간인데도 어제밤 시간은 14시간이 벌써라는 말로 표시되었는데 여기서는 5분이 십년으로 표현 되었다. 길고 짧은 것이 모두가 마음이요 환경이다.「극락세계의 일주야의 시간」이 현재 우리인간세계의 시간으로 따지면「일억팔천만년」이 된다고 한다. 그래 마음에 한 생각을 일으켜 멀고 먼 시간관념을 일으키면 일념속에 무량겁이 형성되고 무량겁속에서도 한생각없이 지내면 일념이 곧 무량겁이 된다.「초초분분」의 생각이「시시일일(時日」을 이루고「시시일일」의 생각이「월월녀년(月年)」을 이루고「월월년년」의 생각이「겁겁의 세월」을 형성하는 것이므로 이렇게 하여「910세」가 서로 즉하여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깊고 묘한 철학인가? 만일 거기에 생각이 끊어진다면 시간도 겁도 없을 것이니 시간과 공간 또한 모든 것이 일심(一心)의 소현인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시간에 속아사는 사람, 공간에 속아사는 사람이 얼마나 가련한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시간의 단위를 과거, 현재, 미래의 3세로 나눈다. 9세란 3세마다 각각 그속에 3세가 있다고 생각하여 시간의 단위를 아홉으로 세분한 것이다. 과거의 과거(1), 과거의 현재(2), 과거의 미래(3), 현재의 과거(4), 현재의 현재(5), 현재의 미래(6), 미래의 과거(7), 미래의 현재(8), 미래의 미래(9) 이렇게 9세인데 이 전체를 일세(一世)로 통괄하면 10(十世)가 된다.

어째서 이런 특이한 분석을 하고 있는가, 시간을 잘개 쪼개면 무한에 이른다. 이 무한의 시간을 일세가 통합하고 있다. 통괄하면 영원의 현재인 일세(一世), 쪼개면 무한임을 설하는 것이「무량원겁즉일념」이다.

지엄선사는 의상조사에게 9세의 도리를 다음과 같은 예로서 설명한 일이었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지붕위에 올라가 있고 아들과 손자가 밑에서 기와를 나르는데 자기가 그 중간에서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있는 것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과거이다. 과거이기에 오직 한자리 일뿐이다. 아버지는 과거의 현재며 현재의 과거이다. 그러므로 두지위가(二位)된다. 중간몸인 나는 과거의 미래요 현재의 현재며 미래의 현재이므로 삼위(三位)를 갖추고 있다. 아들은 현재의 미래요, 미래의 현재인 까닭에 두 위를 갖춘다. 손자는 미래이므로 오직 일위(一位)뿐이다. 이들중에서 기와를 날라주는 사람을 본위로 생각하면 나머지 8세는 간단해진다. 그러므로 현재의 현재이다.

꿈속에 다섯사람 그들을 통괄해 보면 어느 한편에 치우침이 없다. 그러므로 이 두사람에게는 두가지 뜻이 다 있다.

이와같이 총()과 별()로써 때(),「법」을 나누어 볼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살아있는 것을 결코 현재 여기만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현 존재란 현재와 동시에 과거도 미래도 함께 살고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절된 시간 즉, 9세에 통일을 주고 영원한 순간의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 다시 한번 위의 구절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요약하여 비유하면 과거 무량겁으로 부터 오늘까지라도 성냥을 딱 그으면 불이 번쩍 일어난다. 미래억천만년후라도 성냥을 딱 그으면 불이 날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오늘 불씨는 과거무량겁전의 불씨인 것과 같다. 이를 다시 말하면 불은 마찰력 즉 인연상대에 의하여 전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전기는 본래 우주간에 가득한 것으로서 이것을 사용하는 인연상대에 따라 전화 등 백천가지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간의 영원과 순간속에서 우주간의 삼라만상이 그 형용체상을 갖추기전 그 성질이 법계에 가득하여 서로 잡란치 아니함이 마치 백천등불을 한방안에 켰으되 여러등불이 서로 잡란치 아니한 것과 같이 단절된 시간. 9세에 통일을 주고 시간의 영원성과 순간성에 걸림없이 우리생명의 본원(本源이 영원무궁(永遠無窮)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였다.

이를 다시 더 뒤풀이 한다면 청산에서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잠들고 있는 바위들에게는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그리고 미래마저 없다. 여래(如來)는 안다. 과거도 현재, 그리고 미래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여래」는 시간이 아니다. 영원에 살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현재다. 현재는 결코 과거와 미래의 사이에 끼어있는 그 가상 공간이 아니다. 사전에 찾아보면 현재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현재란 과거와 미래사이에 끼어있는 그 가상공간(假想空間)이다.」그러나 이것은 결정한 의미에서의 현재는 아니다. 무슨 현재가 이런가. 그것은 이미 과거다.「현재」라고 부르는 그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로 흘러가 버렸다. 존재의 외각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므로 현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미래라고 부르는 그 순간 그 미래는 현재가 되면서 곧 과거쪽으로 흘러가 버린다. 이런 현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재가 아니다. 미래와 과거사이의 현재란 과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고 미래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의 진행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재란 어떤 것인가?「여래」는 알고 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마저도 없다는 것을! 거기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부처님은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영원의 차원이다. 이 영원의 차원에서는「지금여기」가 있을 뿐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그대신「지금여기」가 있을 뿐 영원 그 자체로 부처님이 있을 뿐이다. (계속)

 

 

 

 

출처 :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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