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

[스크랩] 술을 좋아한 신하와 그신하를 좋아한 임금

똥하 2009. 4. 7. 14:07
 

술을 지나치게 사랑한 신하와 술꾼을 지나치게 사랑한 임금


술 취해 종묘 의례서 不敬하고 해롱대다 임금님 명 까먹고 낙마사고·술병으로 죽기도

 

 

여말선초의 홍영통(洪永通 ?~1395년 태조4년)은 공민왕 때 신돈의 심복이면서도 반(反)신돈파 사람들을 많이 구제하였다.

 

홍영통(洪永通) ?∼1395(태조 4). 고려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첨의중찬(僉議中贊) 자번(子藩)의 증손으로,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경(敬)의 손자이며, 선공부령(繕工副令) 증문하시중 승연(承演)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음보(蔭補)로 관계에 나와 여러 벼슬을 지내고 판소부시사(判小府寺事)·안동부사를 거쳐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가 되었으나 김경유(金景儒)의 말을 빼앗은 것이 문제되어 파직되었다. 뒤에 신돈(辛旽)에게 붙어 감찰대부(監察大夫)와 밀직부사를 지냈으나,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주살되자 같은 당으로 몰려 파직, 유배되었다. 1374년 우왕이 즉위하자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로 기용되어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에 봉하여지고, 이어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에 순성경절협찬공신(純誠勁節협贊功臣)이 되었으며,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1382년(우왕 8) 문하시중에 올랐다.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년 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고, 1388년에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에 이르렀는데, 그의 행적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듬해 공양왕이 즉위하자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된 뒤 1392년 왕조가 바뀌자 일단 파직되었으나, 곧 노인직(老人職)으로 판문하부사에 복직되고 남양백(南陽伯)에 봉해졌다. 1395년 태조의 생일잔치에 참석하고 돌아오다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시호는 안민(安愍)이다. 홍영통은 고려사열전 이춘부전에 "신돈이 그의 도당 기현 등과 함께 반역을 공모하다가 발각되어 수원으로 귀양갔는데 이 때 이춘부, 김란, 홍영통, 김진 등이 궁문에 가서 말하기를 '우리들도 오래동안 신돈과 함께 일했는데 이제 신돈을 귀양보내고 신하들만 홀로 면죄된다면 나라의 공론이 어떻하겠습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아직은 돌아가서 일이나 보라'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신돈이 제거될 때 귀양은 갔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었고 고려 우왕 때는 왕실과 인척 관계였으므로 좌의정에 해당하는 좌시중까지 지냈다.

 

정적(政敵)을 만들지 않는 처신으로 조선이 세워진 후에도 남양백(南陽伯)에 봉해져 남부러울게 없었으나 태조4년 10월11일 태조 이성계의 탄일(誕日)잔치에 갔다가 만취해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 그만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로 인해 홍영통은 조선 시대 최초의 음주낙마(飮酒落馬) 사망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세종의 대군(大君)시절 스승으로 세종이 형 양녕을 대신해 왕위에 오르는 바람에 특진에 특진을 거듭해 이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올랐던 이수(李隨)도 1430년(세종12년) 4월18일 "술에 취해 말을 달리다가 떨어져서 이내 죽으니, 나이는 57세였다"는 불명예를 남겼다.

 

이수(李隨)봉산(鳳山)은 황해도 중앙 북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 때 휴암군 또는 조파의 휴류성 등으로 불리우 다가  통일신라 때 서암군으로 고쳤고, 고려초에 봉주로 하다가 충렬왕때 봉양군으로 고쳤으며,  조선조에 와서 태종이 봉산군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 봉산이씨(鳳山李氏)의 시조 이수(李隨)는 태조때 생원시에  장원하고 태종이 인재를 구할 때 성균관의 천거로 뽑혔으나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사퇴하였고,  이듬해 충녕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그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취중에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특히 그는 문장과 덕행이 높았고, 봉산의 토지를 하사 받아 후손들이 그 곳에 정착세거하면서 본관을 봉산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수(隨)의 아들 4형제중 맏아들 귀종(龜從)이 세종때 태학에 천거되어 통훈대부, ·사헌부 지평 겸 춘추관 기주관을 지냈고  차남 서종(筮從)은 호조좌랑을 역임하였다. 삼남 복종(福從)은  평산부사를, 막내인 길종(吉從)은 참봉을 역임하여 대를 이어 가문을 빛냈다. 그밖에 조선조에 현령을 지낸 즙(楫), 병마사를 역임한 팽구(彭丘)와 경차관을 지낸 영은 봉산이씨를 빛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봉산이씨(鳳山李氏)는 남한에  총 1,523가구, 6,59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정작 '과음(過飮)' 문제로 세종을 괴롭혔던 인물은 따로 있었다.

 

세종이 아직 상왕 태종으로부터 임금 '인턴'을 받고 있던 세종2년9월 사헌부에서는 병조참의 윤회(尹淮 1380년 고려우왕 6년~1436년 세종18년)가 종묘에서 의례를 진행하던 도중 술에 취해 불경(不敬)을 저질렀다고 탄핵했다.

 

윤회(尹淮)1380(우왕 6)~1436(세종 1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청경(淸卿), 호는 청향당(淸香堂). 아버지는 동지춘추관사 소종(紹宗)이다.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사재직장(司宰直長)이 되었고, 좌정언(左正言)·이조좌랑·예조정랑·이조정랑·우부대언·병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422년(세종 4) 부제학이 되었고, 그뒤 동지우군총제·동지경연사 등을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고 대제학까지 맡으면서 국가적인 편찬사업에 여러 번 참여했다. 1423년에는 부제학으로서 유관(柳觀)·변계량(卞季良) 등과 함께 〈고려사〉를 고쳐 편찬하는 데 참가했으며, 1432년에는 동지춘추관사로서 맹사성(孟思誠)·권진(權軫) 등과 함께 〈팔도지리지 八道地理志〉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1435년에는 왕명으로 권도(權蹈) 등과 함께 문신 40여 명을 집현전에 모아서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義〉를 편찬했다. 남수문(南秀文)과 더불어 당대의 문장가로 술을 좋아했는데, 세종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술을 마시되 석 잔을 넘지 말라고 하자, 그이후 커다란 그릇에 석 잔씩 마셨다고 한다.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아마도 태종과 세종 모두로부터 총애를 받던 인물이 아니었다면 종묘에서의 그같은 무례는 결코 용서받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날 세종은 윤회를 따로 불러 "너는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인데 과음이 너의 결점이다"고 책망하며 자제를 당부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자타가 공인했던 주호(酒豪) 윤회가 여기서 그칠 인물은 결코 아니다.

 

세종12년 12월22일 세자의 스승을 맡고 있던 윤회가 술에 취해 세자의 공부시간이었던 서연(書筵)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사헌부가 탄핵했다.

 

세종도 답답했던지 따로 김종서를 불러 "술을 삼가라는 명령이 뭐가 그리 어렵단 말인가"라고 한탄한다. 하긴 그 무서운 태종도 고치지 못한 주벽(酒癖)이었다.


세종 때 윤회가 있었다면 성종 때는 손순효(孫舜孝 1427년 세종9년~1497년 연산군 3년)가 주호(酒豪)의 맥을 잇는다.


손순효 (孫舜孝 조선 문신)1427(세종 9)~1497(연산군 3).

조선 초기의 문신.본관은 평해. 자는 경보(敬甫), 호는 물재(勿齋)·칠휴거사(七休居士). 아버지는 군수 밀(密)이다. 1453년(단종 1) 증광문과에, 1457년(세조 3)에는 감찰로서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병조좌랑·형조정랑·집의·전한 등을 지냈다. 1471년(성종 2) 시무책(時務策) 17조를 상소하여 채택되었으며, 그 공으로 형조참의에 특진되었으나 직무상 과오를 저질렀다 하여 무관직인 상호군으로 전임되었다. 뒤에 다시 문관직인 장례원판결사로 복귀하여 동부승지·도승지·강원도관찰사·호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역임했으며, 성종이 왕비 윤씨를 폐위하려 할 때 반대했다. 1480년 지중추부사가 되어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경기도관찰사·대사헌·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1485년 임사홍(任士洪)을 변론한 것이 화가 되어 경상도관찰사로 좌천당했다. 그러나 곧 우찬성으로 복직되었으며, 이어서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성리학 연구에 힘을 기울여 〈대학〉·〈중용〉·〈주역〉에 정통했으며, 묵화에도 능했다.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식료찬요 食療撰要〉를 편찬했다. 저서로는 〈물재집 勿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손순효의 글씨, 〈명가필보〉에서

 

▲ 손순효 선생 지묘


그러나 윤회의 호방한 기질과 달리 상당한 주사(酒邪)가 있는 편이었다.

 

술에 취하면 허풍이 심하고 '임금' 말만 나오면 눈물을 줄줄 흘려 주변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샀던 인물이다.

 

 심지어 그가 죽었을 때 졸기(卒記)에는 이런 대목까지 있다.

 

'관찰사로 나가 있을 때에는 항상 서울을 향하여 절을 하니 사람들이 혹 정상이 아닌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사람됨은 충직한데 일을 하는 데서는 모자라 가는 데마다 실적이 없었다.'


그래도 손순효는 술을 좋아하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효종 때의 병조판서 박서 같은 인물은 효종2년(1651년) 10월 임금의 명을 받고서도 술에 취해 새까맣게 잊어먹은 다음 부하에게 그 책임을 덮어씌웠다가 들통이 나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효종은 박서를 너무나도 총애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탄핵했던 사간원 관리가 고초를 겪는다.

 

이런 박서가 2년후인 효종4년 6월29일 세상을 떠났을 때 실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박서는 연일 과음을 하다가 갑자기 죽었다.' 술병이었다.


숙종12년(1686년) 2월7일 숙종의 외삼촌이기도 했던 한성좌윤(오늘날의 서울부시장) 김석익(金錫翼)이 세상을 떠났을 때의 기록이다. "이 때 과음으로 인하여 갑자기 죽었다." 박서와 같은 원인이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 임금들은 특히 자신들이 아끼는 신하들 중에 과음이나 주벽이 심한 사람들에게는 은근히 타이르는 차원에서 잔 가운데 경계의 말을 새겨넣은 자그마한 은잔(銀杯)을 하사하곤 했다.

 

숙종36년(1710년)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의 오빠로 자신의 처남이기도 한 약방제조 민진후(閔鎭厚 1656년 효종10년~1720년 숙종46년)가 지나치게 술을 좋아하자 은잔을 내렸다.

 

민진후(閔鎭厚) 민진후(閔鎭厚, 1659년~1720년)는 인현왕후의 오빠이자 민진원(閔鎭遠)과 민진영(閔鎭永)의 형이다. 스승은 송시열이며, 명성황후의 5대조이다.


[생애] 

1686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가 되었으나,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삭탈관직되어 귀양 갔다.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다시 중용되어 관찰사, 대사간, 의금부 지사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한때 소론의 탄핵으로 귀양을 갔다가 1717년 다시 기용되어 여러 요직을 거쳐 1719년 의정부 우참찬, 개성부 유수로 있다가 죽었다.


인품이 뛰어나고 문집으로 《지재집》(趾齋集)이 전한다. 시호는 충문(忠文), 경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 잔 속에는 '술이 뭐가 해로우냐고 말하지 말라, 그 해(害)가 날로 심해지리라'고 새겨져 있었다.


정조14년(1790년) 11월12일 승지 신기(申耆)가 경연에 참석했는데 술이 몹시 취해 있었다.

 

까칠한 성격의 정조가 그냥 둘 리 없었다. "면전에서 글을 받아 쓸 때 술 냄새가 코를 찌른다.

 

계설향(鷄舌香-잎냄새 제거용 약재)을 구해 입에 물기는 어렵더라도 어찌 감히 이처럼 과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신기는 큰 처벌은 받지 않았고 이후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조선은 분명 이념적으로는 경직된 나라였지만 술에 관한 한 톨레랑스(내가 남과 다른 점을 인정 받으려면 남도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프랑스 말 → 寬容)가 있었다.[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출처 : 석굴암
글쓴이 : 어둠속의 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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