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

[스크랩] 한글이 몽고 문자 모방?

똥하 2009. 4. 7. 14:10
 

한글이 옛 몽골 문자 본떴다?

 

해외학자들 "파스파 문자 본떠"

            "ㅇ자·받침 등 한글 독창성" 반박



해외의 일부 문자(文字)학자들은 한글이 몽골의 '파스파(八思巴) 문자'를 본뜬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파스파 문자 (八思巴文字)

1269년 몽골의 라마교 승려 팍 파(1235~80)가 쿠빌라이칸의 명을 받아 몽골어를 쓰기 위해 만들었던 공용문자.


몽골 문자, 네모꼴 문자[方形文字] 라고도 한다. 창제한 해에 공용문자로 채택·공포했다. 티베트 문자를 기초로 하여 그것을 방형화하고, 왼쪽부터 세로로 몽골어를 적었다. 처음에는 자음 33자, 모음 10자, 기호 9개로 되어 있었으나 후에 성종의 제사(帝師) 쵸에기 오에셀이 연모음이나 복합모음을 쓰는 방법을 고안하여 결국 자음 31자, 모음 8자로 모두 39개의 자모로 개량되었다.


이 문자는 원의 세력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언어, 즉 몽골어·한어(漢語)·티베트어·토이기어 등을 모두 잘 적을 수 있도록 고안된 표음력이 뛰어난 문자였다. 그러나 이 글자는 빨리 쓰는 데 적합하지 않아 글로 쓰기에 불편했다. 그래서 보급이 잘되지 않은데다가 당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위구르 문자를 차용한 몽골 문자의 세력에 밀려 원왕조가 멸망한 이후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비문이나 고문서 등 공식적인 기록에 남아 전하고 있을 뿐이다. 파스파 문자는 13세기 몽골의 지배층 지식인들이 사용하던 당시 남부 몽골 방언의 근본적 음성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렇듯 뛰어난 표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몽골어는 물론 동양의 여러 나라의 옛 언어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생소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 글자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파스파 문자를 한글의 기원으로 꼽는 학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익은 〈성호사설 星湖僿說〉 권7 상(上) 잡서문(雜書門)에서 이러한 주장을 펼쳐보였는데, 그 이유로는 우선 파스파 문자는 소리로 된 글자이므로 한자와 달리 우리말의 성질에 가깝고, 또 성삼문이 요동(遼東)에 있던 명나라의 학자 황찬(黃瓚)을 만나 자문을 구했을 때 몽골의 글자에 관한 지식을 전해주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하며, 고려 후기에 궁중에서 몽골어가 쓰인 적이 있는 만큼 그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고 있다. 또 유희의 〈언문지 諺文志〉와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朝鮮佛敎通史〉에서도 이같은 주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최현배는 〈한글갈〉에서 한글이 꼭 몽골의 파스파 문자의 영향만 받은 것이 아니고, 성삼문이 황찬에게 질문한 것은 중국의 운서(韻書)와 운학(韻學)이었다는 사실을 밝혀 위의 주장을 반박했다. 한글은 발음기관의 꼴을 본뜬 상형성과 닿소리와 홀소리의 생성과정이 독창적이어서 파스파 문자와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파스파 문자의 표음기능이 한글의 창제과정에 다소간의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국내 학자들은 지금까지 이 학설에 대해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김정배)이 18~19일 개최하는 '훈민정음과 파스파 문자 국제워크숍'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자리다.

 

파스파 문자 관련 고서인 영국도서관 소장 《몽고자운》의 영인출판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한 이번 워크숍은 오래 전부터 관련 자료를 분석해 온 정광(鄭光) 고려대 명예교수가 본격적인 '반론'을 마련했다.

 ▲ 몽골어

 


파스파 문자는 1269년 티베트 출신의 파스파가 원(元)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의 명을 받아 만든 문자로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쿠빌라이 칸 [원 세조, 쿠빌라이]

쿠빌라이 칸(忽必烈, 1215년 ~ 1294년) 칭기즈 칸의 손자이다. 묘호세조(世祖)이다. 국호를 원(元)으로 고치고 대도(大都, 현재의 북경)를 도읍으로 정하였다. 남송을 멸망시켰고, 통일된 다민족국가의 발전을 위해 공헌하였다. 그는 한때 고려와 연합해 일본을 정복하려 했으나 두차례 모두 태풍으로 실패했다.

쿠빌라이는 즉위 직후 남송공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며, 1268년 한수의 요충 양양의 포위전을 개시했다.

쿠빌라이는 황후 차브이를 섬기는 인물로써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 아흐마드를 재무장관에 발탁하여 증세를 꾀해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키는 한편, 이어서 복속한 고려를 통해 남송과 통상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에도 몽골에 대한 복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했고,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본이 연합하여 원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1274년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으로 보냈으나, 쓰시마 섬, 이키노시마, 규슈의 다자이후 주변을 석권하는 것만으로 끝났다. 일본원정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준비를 통해 원정 준비를 위해 설치한 출선기관인 정동행성과 고려정부가 일체화되어, 새로 속국이 된 고려는 원나라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273년에 이르러 양양이 마침내 함락되고, 남송의 방위시스템은 붕괴되었다. 원나라는 병사가 각 성과 도시에서 약탈, 폭행을 저지르는 것을 엄중히 금지시키는 것과 더불어 항복한 적의 장군을 좋은 대우를 해주는 등 남송의 투항군을 아군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지의 도시는 차례로 원나라에게 항복했다. 1274년 옛 남송의 투항군을 합친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서자 방위 시스템의 붕괴된 남송은 이렇다 할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1276년 수도 임안(臨安;항주)이 무혈 함락되었다. 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은 북쪽으로 연행되었으나,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그 후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전멸시켜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옛 남송 지역의 부(富)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써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 후 이루어진 군사원정은 특별한 성과 없이 끝났다. 1281년 다시 일본에 군대를 보냈으나 이번에도 실패로 끝났고(일명 가미카제의 도움), 1285년과 1288년에는 베트남에 침공한 군이 진조에게 차례로 패배했다. 그 이전에는 1276년 중앙아시아에서 하이두와 대치하던 원나라 군대에서 몽케의 아들 시리기가 반란을 일으켜 하이두의 세력 확대를 허용시켰다. 그런데도 쿠빌라이는 3번째 일본원정을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추진했으나, 1287년 즉위 때 지지모체였던 동쪽 3왕가가 나얀을 지도자로 삼아 반기를 들었고, 또한 중국 내에서도 반란이 빈발했기 때문에 만년의 쿠빌라이는 이에 대응하는데 시간을 보내 일본원정도 포기했다. 또 1292년 참파원정을 시도했으나 이것도 실패로 끝났다. 무엇보다도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정은 상업루트의 개척에 뜻을 둔 경우가 강해, 최종적으로는 해상루트의 안전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성공이라 말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손자 테무르가 뒤를 이었다.



[소개]

쿠빌라이 칸은 몽고 제국의 제5대 황제이다. 중국 원나라를 건국했다.(재위 1260-1294). 칭기즈 칸의 손자로 도읍을 대도로 옮기고, 1271년 국호를 원이라 하였다. 1276년 송나라를 쳐서 중국을 통일하였으며, 고려·버마·일본 등지에 침공하였다. 그는 색목인(중앙 아시아 인)을 중용하고, 서역에서 오는 문화를 중시하였으며, 티베트에서 라마교를 받아들였다. 서양인을 우대하여 마르코 폴로 등이 입국하는 등 원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그는 넓은 영토를 차지한 대제국을 완성하였다.



[고려에 대한 정책]

쿠빌라이는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 고려에 협력을 종용하였다. 또한 한인(漢人) 학자들을 동원하여 고려로 하여금 성리학(주자학)을 도입하게 했다. 그러나 고려는 이때부터 계속된 원나라의 내정 간섭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파스파 문자]

파스파 문자(Phags-pa characters, 八思巴文字)는 1265년 중국 원나라(元) 국사(國師)인 파스파(八思巴)가 쿠빌라이 칸(세조 世祖)의 명을 받아 몽골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든 문자로서, 몽골신자·방형몽골문자라고도 하는데, 파스파의 백부(伯父) 사펜이 처음 고안한 것을 파스파가 개량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 쿠빌라이 칸 이미지 그림

 

 


정 교수는 18일 발표할 논문 〈훈민정음 자형(字形)의 독창성〉에서 훈민정음과 파스파 문자를 면밀하게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훈민정음이 파스파 문자로부터 일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아음(牙音·어금닛소리), 설음(舌音·혓소리), 순음(脣音·입술소리) 같은 36개의 중국어 자모(字母·한글의 초성)를 기본 틀로 해서 글자를 만들었다는 점 등 유사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한글의 자형(字形)은 완전히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파스파 문자와는 다르다"고 정 교수는 말했다.

 

파스파 문자가 티베트 문자의 형태를 조금 변형해 만든 것인 반면, 훈민정음은 발음기관의 모습과 천(天)·지(地)·인(人) 삼재(三才)를 표현해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만든 글자라는 것이다.


《훈민정음》의 〈제자해(制字解)〉편에는 "아음 ㄱ(기역)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을 본뜨다" "치음(齒音·잇소리) ㅅ(시옷)은 치아의 모습을 본뜨다" "후음(喉音·목구멍소리) ㅇ(이응)은 목구멍의 모습을 본뜨다"는 등의 글자 창제 원리가 적혀 있지만 외국 학자들은 이를 무시했다고 정 교수는 말했다.

 

또 ▲소리가 나지 않는 'ㅇ'자를 써서 모든 중성자(모음)를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 ▲파스파 문자에는 없는 종성(받침)이 존재하는 것 역시 훈민정음만의 독창성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가 19일 발표하는 〈훈민정음의 제정과 반포 재고〉는 《해례본 훈민정음》의 완성일인 1446년(세종 28) 9월 상한(양력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한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의 창제는 1443년(세종 25) 12월(양력 1444년 1월)에 이뤄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번 학술대회는 '한글의 파스파 문자 모방설'의 대표적 학자인 게리 레드야드(Ledyard) 미국 컬럼비아대 명예교수, 몽골계 학자인 주나스트(照那斯圖) 중국 사회과학원 교수 등도 참석해 한글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을 벌이게 된다.[유석재 기자]


출처 : 석굴암
글쓴이 : 어둠속의 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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