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

[스크랩] 세종의 세자와 섹스 사건

똥하 2009. 4. 7. 14:12

 

세종 4男 임영대군 여종들과의 섹스 스캔들

 


세종은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만 8남2녀를 두었다.

 

이 '8왕자 2공주' 이야기만으로도 거뜬히 책 한 권이 넘칠 만큼 이들 10남매는 능력과 재주가 차고 넘쳤다.

 

첫째 문종은 병약했으나 문약(文弱)하지 않아 병법과 과학기술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문종 (文宗, 1414년 ~ 1452년, 재위 1450년 ~ 1452년)

조선의 제5대 임금으로 휘는 향(珦), 자는 휘지(輝之), 정식 칭호는 문종공순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이라 칭하며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맏아들이다.


[생애] 

세종대왕의 맏아들이자 소헌왕후 소생으로 태어나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젊은 나이에 일찍 혼인하였으나 첫번째 부인이었던 김씨와 두번째 아내였던 봉씨는 자질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으로 인해 폐위되었고, 권씨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권씨는 왕세자빈 시절이었던 1441년 단종을 낳은 지 3일 만에 죽고 말았다.


문종은 어렸을 때부터 인품이 관대하고 후하여 누구에게나 좋은 소리를 들었으며 학문을 무척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정량적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를 발명할 정도로 천문학과 산술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1421년부터 1450년까지 무려 29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왕세자로 지내는 동안 문신과 무신을 골고루 등용하였으며, 언관의 언론에 대해 관대한 정치를 폄으로써 언론을 활성화해 민심을 파악하는 데 힘쓰는 등 아버지 세종을 곁에서 잘 보필하였다.


1442년, 세종이 병상에 누워 국정을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세종을 대신하여 8년 간의 섭정기간 동안 국사를 처리하다가 1450년 2월에 세종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조선의 임금이 되었다. 문종은 재위 기간 동안 언론의 활성화와 역사책 편찬, 병법의 정비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유연함과 강함을 병행하는 정치를 실시하려고 했다.


문종은 6품 이상까지 윤대를 허락하는 등 하급 관리들의 말도 빠짐없이 경청하는 등 열린 정책을 펴는 한편,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편찬하였다. 문종은 역사와 병법을 정리함으로써 사회 기반을 정착시키고 제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문종은 왕세자 시절에 진법을 편찬했을 만큼 국방에도 관심이 많아서 병력 증대를 통해 병법의 정비와 국방의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또 태종 때 만들었던 화차를 새롭게 개발하여 “문종화차”를 만들어 혹시나 있을 전쟁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문종은 왕세자 시절의 과중한 업무와 공부로 인해 건강이 급속히 나빠진 데다가 임금으로 즉위한 후에는 건강이 더욱 악화되는 바람에 재위 기간 내내 병상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러다가 결국 즉위한 지 2년 3개월 만인 1452년 5월에 39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다. 능은 현릉(顯陵)이다.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6-3에 있는 현릉(문종의 능)

 

둘째 수양대군은 전형적인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인물로 지금까지도 역사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세조 (世祖 조선 왕 수양대군)1417(태종 17)~1468(세조 14).

조선의 제7대 왕(1455~68 재위).

재위기간 동안 왕권강화, 군현의 정비, 직전법(職田法)의 실시, 군액(軍額)의 증강, 불교의 진흥 등의 정책을 실시해 조선 초기 왕권 강화에 공헌했다. 이름은 유(瑈). 자는 수지(粹之).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아우로,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이다. 비는 윤번(尹璠)의 딸 정희왕후(貞熹王后)이다.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에 있는 조선 세조의 능 및 정희왕후의 묘역 안내도

 

▲ 세조의 능

사적 제197호. 1468년(세조 14)과 1483년(성종 14)에 축조했다. 이 능은 세조가 "원릉의 석실은 유해무익하니 석실과 병석(屛石)을 쓰지 말라"고 한 유언에 따라 병석을 없애고 석실은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꾸몄다. 능 배치는 두 언덕을 한 정자각(丁字閣)으로 묶는 동원이강(同原異岡)의 양식을 수립해 조선 왕릉제의 일대 개혁을 이루었다.

 

▲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의 묘

 

셋째 안평대군은 문무(文武)에 예혼(藝魂)까지 갖췄던 걸출한 인물로 형 수양대군과 권력투쟁을 벌이다 희생됐다.

 

안평대군 (安平大君 조선 왕족 이용)1418(태종 18)~1453(단종 1)

조선 전기의 왕족·서예가


[개요]

단종 즉위 후 둘째 형인 수양대군과 권력다툼을 벌였으나 계유정난으로 희생당했다.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낭간거사(琅玕居士)·매죽헌(梅竹軒).


[생애]

세종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큰형은 문종이고 둘째 형이 세조이다. 1428년(세종 10)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29년 좌부대언 정연(鄭淵)의 딸과 결혼했다. 이듬해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다. 1438년 왕자들과 함께 함경도에 설치된 육진(六鎭)으로 가서 변방의 경계 임무를 맡으면서 야인(野人)들을 토벌했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한 뒤 황표정사(黃票政事:왕자들이 추천한 사람 가운데 왕이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던 인사제도)를 장악하고 측근의 문신들을 요직에 앉히는 등 조정의 배후실력자로 등장했다. 특히 1452년 단종 즉위 이후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문신·학자 세력과 제휴하여, 수양대군과 권력을 다투었다. 1452년 7월 수양대군은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외교적 위상을 높이고, 돌아온 뒤에는 황표정사를 폐지했다. 이에 안평대군은 잃어버린 권력의 회복에 힘써, 이징옥(李澄玉)으로 하여금 함경도 경성에 있는 무기를 서울로 옮기게 하여 무력을 기르는 한편 1453년(단종 1) 9월 황표정사를 다시 실시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다음달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을 제거했으며 안평대군 자신도 더불어 반역을 도모했다 하여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후에 귀양지가 교동(喬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사사(賜死)되었다.

 

               ▲ 안평대군이 종이 바탕에 먹으로 쓴 송설체(1447), 44.6×38.7cm,

                         〈몽유도원도발문〉에서,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 소장

 

                        ▲ 소원화개첩, 안평대군 이용이 비단 바탕에

                                        먹으로 썼다(15세기), 국보 제238호,

                                         26.5×16.5cm, 서정철 소장

 

 

오늘의 주인공인 넷째 임영대군은 아무래도 무(武) 쪽으로 기울었던 인물인 듯하다.

 

임영대군 (臨瀛大君 이구) 1418(태종 18)~1469(예종 1).

조선 초기의 종실.이름은 구(璆). 자는 헌지(獻之). 세종의 넷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고 부인은 우의정 남지(南智)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활달했고 무예와 의론(議論)에 뛰어났다. 1428년(세종 10) 임영대군에 봉해졌으며, 1430년 성균관에 입학했다. 세조가 정권을 잡자 세조를 보좌하면서 조정의 득실, 민간의 이해를 잘 가려 신임을 얻었다. 왕손이면서도 근검했고 사람을 대하는 데 교만하지 않았다 한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 임영대군의 묘

 

다섯째 광평대군과 일곱째 평원대군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나 둘 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광평대군 (廣平大君)

조선 세종의 다섯째 아들(1425~1444). 이름은 여(璵). 자는 환지(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 학문을 좋아하여 경서는 물론 문선(文選), 국어(國語) 따위에 능하였으나 요절하였다.

 

▲ 서울 강남구 수서동 산 10-1에 소재한 광평대군 묘역에 있는 광평대군 묘

 

평원대군 (平原大君: 1427~1445)

 자 진지(珍之). 호 근행당(謹行堂). 본명 임(琳). 시호 정덕(靖德).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의 소생. 1434년(세종 16) 평원대군으로 봉해졌다. 종학(宗學)에 입학, 학문에 힘써 《대학연의(大學衍義)》에 숙달하고 육예 중 예(禮) ·사(射) ·어(御) ·서(書)에도 능숙하였으나 천연두로 죽었다. 성품이 겸손하고 효행과 우애가 있었으나 요절하자 세종 말년의 숭불을 촉진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여섯째 금성대군은 훗날 단종 복위에 앞장섰다가 형 세조에게 죽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뜻이 강한 인물이었다.

 

금성대군 (錦城大君 조선 왕족 이유 1426~1457) 1426(세종 8)~1457(세조 3).

조선 초기의 왕족

이름은 유(瑜).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단종의 숙부이다. 1433년(세종 15)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태조의 여덟번째 아들인 방석(芳碩)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과 함께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정권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김종서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동에 반대했다. 1455년(단종 3) 모반혐의로 삭녕에 유배되었고, 다시 광주(廣州)로 옮겨졌다. 1456년(세조 2)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되어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이곳에서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士族)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켜 단종복위를 계획했으나, 거사 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하여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1738년(영조 14) 신원(伸寃)되었다. 영월 창절사(彰節祠), 순흥 성인단(成仁壇), 청안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 금성대군 진영도

 

 

세종이 죽음을 그의 집에서 맞을 만큼 애틋하게 생각했던 막내 영응대군은 문사(文士)였다.

 

영응대군 (永膺大君 이염) 1434~·467 세조13년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덟 째 아들이며 이름은 염이다. 1441년 영흥대군에 봉해지고 1443년 역양대군, 1447년에 영 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세종의 총애가 지극하여 1450년 세종은 영응대군의 저택인 동별궁에서 별세하였다. 1463년 '명황계감'의 가사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글씨와 그림에 능했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 영응대군 묘


파란만장(波瀾萬丈)으로 따지면 형들인 수양이나 안평을 따를 수 없지만 세종의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1420년 세종2년~1469년 예종1년)의 삶 또한 예사롭지 않다.

 

그가 스무 살 되던 세종21년(1439년) 5월3일 대궐이 발칵 뒤집어졌다.

 

세종이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허조를 급히 불렀기 때문이다.

 

세종은 두 사람을 불러 임영대군 이구의 '문제'를 털어놓은 다음 처리방향을 함께 의논했다.


이구의 '문제'란 다름 아닌 '섹스 스캔들'이었다.

 

이구는 이미 그 전에도 대궐의 여종 막비와 가야지와 사통(私通)했으나 세종은 일단 묵인해주었다.

 

또 세종19년 4월에는 악공의 딸인 기생 금강매(錦江梅)에게 빠져 아예 첩으로 삼겠다고 말하자 세종은 "정직하게 말하는 게 가상하여 특별히 허락"해주기도 했다.

 

금강매

세종실록에 등장하는 기녀이다.임영대군이 첩으로 삼고 가까이 하자 임금이 고향인 공주로 돌려보냈다. 임영대군은 여자 문제로 임금께 여러 번 꾸지람을 들었으나 고치지 않았다.

 

 

실은 이때 승지 허후가 "대군의 축첩은 옳지 못하며 굳이 첩을 두려면 기생이 아니라 양갓집에서 간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자 세종은 버럭 화를 냈다.


"그렇다면 종친들의 기첩(妓妾)을 다 쫓아내란 말이냐?"


이처럼 세종이 사실상 묵인했던 이구의 문제가 1년 후인 세종21년 5월 크게 불거진 것은 금강매에게 푹빠져 학문을 내팽개쳤을 뿐만 아니라 막비, 가야지 외에도 또 다른 여종 금질지까지 사통하는 등 여색(女色)에서 헤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록의 한 구절이다.


"임금의 성품이 엄하여 여러 종친들과 아들을 옳은 도리로 가르치고, 조금이라도 범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꾸지람을 더하기 때문에 모두 감히 불법한 행동을 방자하게 하지 못하였는데 이구는 여색으로 두 번이나 꾸지람을 듣고도 오히려 뉘우쳐 고치지 아니하였다."


그날로 당장 이구의 직첩을 회수했다.

 

대군 자격을 박탈해버린 것이다.

 

1년 후 이구는 대군 자격을 회복한다.

 

그런데 직첩 회복 1년 후인 세종23년 임영대군은 이복동생인 화의군과 함께 궐 밖의 여인 2명을 몰래 궁 안에 들이려다가 광화문 문지기에게 발각돼 다시 직첩을 빼앗기고 3년 가까이 대궐 안에서 연금생활을 해야 했다.  

 

 

 

 

무인 기질이 강한 데다가 20대 초반의 한창때이기도 했지만 이구의 불행한 가정사도 이런 음행(淫行)을 부추기는 데 한몫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종 때 좌의정에까지 오르게 되는 남지(南智)의 딸이 첫 부인이었다.

 

그러나 혼인한 지 한 달여쯤 지난 세종15년 6월 14일 세종은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최윤덕 등을 은밀하게 불러 "임영대군의 아내 남씨는 나이가 12세가 넘었는데 아직 오줌을 싸고, 눈빛이 바르지 못한 데다가 혀가 심히 짧고, 행동이 놀라고 미친 듯한 모습이 있기에" 내치고자 하는 뜻을 밝혔다.

 

남씨는 강제 이혼당했다.

 

임영대군 이구는 같은 해 12월 최승녕의 딸과 재혼을 하게 된다.

 

최승녕은 미관말직에 있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버지 최사강은 세종 시대의 몇 안 되는 권세가 중 한 명이었다.

 

문과 급제자도 아니면서 의정부 우찬성(종1품)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왕실과의 복잡한 혼맥 형성이었다.

 

그의 딸 둘이 각각 함녕군(태종과 신빈 신씨 사이의 소생)과 세종의 6남 금성대군의 부인이 되었고 또 이때 그의 장남 최승녕의 딸까지 임영대군의 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두 차례 섹스 스캔들 이후 임영대군은 크게 바뀌었다.

 

화포와 신기전(神機箭)의 개량화 특명을 수행한 인물이 바로 그와 금성대군이다. 세종의 총애도 그만큼 깊어졌다.

 

예종1년 1월 21일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실록은 이렇게 논했다.

 

구성군 (龜城君 조선 왕족) ?~1479(성종 10)조선 전기의 왕족.

본관은 전주. 이름은 준(浚), 자는 자청(子淸). 아버지는 세종의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 구(璆)이다. 1458년(세조 4)에 구성정(龜城正), 이어 구성윤(龜城尹), 1463년 구성군으로 봉해졌다.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비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466년(세조 12)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듬해 5월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함경·강원·평안·황해의 사도병마도총사(四道兵馬都摠使)로 출정하여 난을 진압했다. 이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이 되었다. 종실이면서도 병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영의정에 발탁되었다. 1468년(세조 14)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올랐다. 1470년(성종 1) 어린 성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 한다는 정인지(鄭麟趾) 등의 탄핵으로 삭탈관직을 당하고 경상도 영해(寧海)에 귀양갔으며, 모든 벼슬과 공신적(功臣籍)을 빼앗겼다. 1479년에 귀양지에서 죽었다. 1687년(숙종 13)에 김수항(金壽恒)이 주장하여 신원(伸寃)되고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천성(天性)이 활달하고, 물리(物理)에 정통하며, 무예(武藝)가 절륜(絶倫)했다.' 그의 둘째 아들이 세조 때 최고의 무장(武將)인 구성군 이준이다. [이한우 - 역사속의 Why]

출처 : 석굴암
글쓴이 : 조선통신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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