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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벼슬아치의 여섯가지 유형 - 2

똥하 2009. 4. 7. 14:01
 

여섯 유형의 벼슬아치 2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설원(說苑)'에서 분류한 여섯 유형의 그른 벼슬아치는 누구인가?

 

첫째는 벼슬은 좋아하지만 공사(公事)보다는 사익(私益)에 힘쓰면서 늘 시세의 부침을 관망해 처신하는 구신(具臣)이다.

 

숫자만 채우는 신하란 뜻인데 현재도 사방에 널려 있을 것이다.

 

둘째는 군주의 언행은 무조건 칭송하면서 남 몰래 군주가 좋아하는 것을 갖다 바쳐 군주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지만 뒤에 닥칠 환란은 돌아보지 않는 유신(諛臣:아첨하는 신하)이다.

 

셋째는 말 잘하고 낯빛은 좋지만(巧言令色) 어진 이를 미워할 뿐만 아니라 자기 편을 진출시키기 위해 단점은 숨기고 장점만 나열하고, 반대편을 쫓아내기 위해 장점은 숨기고 단점만 나열해 군주에게 상벌을 잘못 시행하게 해서 호령(號令)이 서지 않게 하는 간신(奸臣)이다.


넷째는 남의 잘못을 꾸며낼 수 있을 만큼 머리가 좋고, 남을 기쁘게 할 수 있을 만큼 말도 잘하지만 집안에서는 골육지친(骨肉之親)을 이간질하고 집 밖에서는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참신(讒臣:남을 참소하는 신하)이다.

 

다섯째는 권력과 세도를 장악해 국사의 경중(輕重)도 사문(私門)의 이익을 기준으로 삼고, 당파를 만들어 군주의 명령도 무시하고 자신만 귀하게 여기는 적신(賊臣)이다.

 

군주를 국민으로 바꾸어 해석하면 지금도 여러 정치가가 떠오를 것이다.

 

여섯째는 간사한 말로 아첨해 군주를 불의(不義)한 곳에 떨어지게 하고 붕당(朋黨)을 만들어 군주의 총명을 가리고, 옳고 그름과 흑백의 구분도 없어서 군주의 잘못이 국내에 퍼지고 외국에까지 들리게 하는 망국지신(亡國之臣)이다.

 

6사(六邪)

1. 패신(貝臣)

지위에 안주하고, 봉급만 탐내고, 주위의 정세에만 신경을 쓰는 부하.

2. 유신(諛臣)

아첨을 일삼아서, 상사의 일은 무조건 좋다하고 좋아하는 것을 상납하는 부하.

3. 간신(姦臣)

겉과 속이 달라서 겉으로는 성인군자연 하면서 실제는 사악한 마음을 품은 부하.

4. 참신(讒臣)

자신의 잘못을 감추거나 남을 설득시키는 재주가 있으나 분열과 분쟁을 일삼는 부하.

5. 적신(賊臣)

자기 좋을 대로 규칙을 변경하고, 사적인 도당을 만들어 지위를 높이는 부하.

6. 망국신(亡國臣)

상사를 모함하고, 현명한 사람을 배척하며, 상사의 나쁜 면을 내외에 선전하는 부하.

 


나라를 거듭 국제적 망신거리로 전락시킨 여의도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항목일 것이다.


성호 이익(李瀷)은 '육정육사(六正六邪)'란 글에서 모든 벼슬아치는 육정이 아니면 육사에 해당하니 공정한 사람에게 어디에 해당하는지 분류하게 하자고 주장했다.

 

이익 (李瀷 조선 후기의 실학자) 1681(숙종 7)~1763(영조 39).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을 대성했다. 독창성이 풍부했고, 항상 세무실용(世務實用)의 학(學)에 주력했으며, 시폐(時弊)를 개혁하기 위하여 사색과 연구를 거듭했다. 그의 개혁방안들은 획기적인 변혁을 도모하기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것으로 현실에서 실제로 시행될 수 있는 것을 마련하기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실학사상은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自新), 호는 성호(星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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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문은 남인 계열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상의(尙毅)는 의정부좌찬성을, 할아버지 지안(志安)은 사헌부지평을, 아버지 하진(夏鎭)은 사헌부대사헌을 지냈다. 그가 태어난 바로 전 해인 1680년(숙종 6) 남인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재집권하는 경신대출척이 일어나, 남인이었던 아버지도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다시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이 유배지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682년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죽은 후 어머니 권씨는 선영이 있는 안산의 첨성촌(瞻星村)으로 이사했고, 이후 그는 이곳의 성호장(星湖莊)에서 평생을 지내게 되었다. 둘째 형인 잠(潛)에게 글을 배웠다. 처음 학문에 뜻을 두어 〈맹자〉·〈대학〉·〈소학〉·〈논어〉·〈중용〉·〈근사록〉을 읽고, 다시 〈심경〉·〈주역〉·〈서경〉·〈시경〉을 거쳐 정주(程朱)와 퇴계(退溪)를 탐독하여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705년 증광시에 응시하여 초시에는 합격했으나, 이름을 적은 것이 격식에 맞지 않아서 회시에는 응시할 수 없었다. 이듬해 둘째 형 잠은 진사로서 장희빈(張禧嬪)을 옹호하면서 노론집권당을 공격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려, 국문 끝에 장살(杖殺)당했다. 이익은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아, 과거를 완전히 단념하고 두문불출하며 독서에 전념했다. 이후 셋째 형 서(漵)와 사촌형 황(況)에게서 수학했다. 1715년 어머니를 여의고 복상이 끝난 후에는 노비와 집기 일체를 종가(宗家)에 돌리고 약간의 토지만으로 생계를 이었다. 1727년(영조 3) 학명이 알려져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끝까지 사양하고 성호장에 묻혀 저술에만 몰두했다. 1763년에는 노인을 우대하는 제도에 따라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12월 83세의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삶을 영위한 시기는 18세기 전반기로서,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말미암은 피폐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때였다. 나라의 재정은 궁핍했고, 황폐된 전지(田地)가 복구되는 과정에서 궁방전·아문둔전·영문둔전, 그리고 양반의 대토지 소유가 새로이 전개되면서 지주전호(地主佃戶) 제도가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또한 동서분당이 남인·북인·노론·소론의 사색당쟁으로 발전되고, 다시 노론의 일당독재가 굳어지는 추세 속에서 정치 기강은 극도로 문란해지고 감사·수령의 가렴주구가 심화되었다. 이로써 농민의 광범한 몰락이 현저하게 전개되었다. 이익은 이 시기에 관직의 길을 절연하고 평생을 초야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글만을 읽고 성인(聖人)의 도리만을 말하면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방책에 대하여 연구하지 않는다면, 그 학문은 개인생활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국가적 관계에서도 무용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의 학문의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 경기 안산시 일동에 있는 이익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제40호)

 

    ▲ 성호 이익은 골방에 갇혀 책만 파는 지식인이 아니라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독서를 병행하는 사농의 삶을 살았다.

<이익의 초상>

 

                              

                             ▲ 이익은 당쟁의 본질을 이해관계라 보고, 노동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호사설>(맨 위)과 이익의 간찰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이익이 세운 사상체계는 조선 후기 철학의

                 혁명이었다.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이익 사당

 

그러면 어찌 두려워 반성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육정에 해당하는 벼슬아치를 표창하고 육사를 퇴출시키는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

 

국민들이 계속해서 속 썩는 종노릇만 할 수는 없다.[이덕일·역사평론가]

출처 : 석굴암
글쓴이 : 어둠속의 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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