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

[스크랩] 고려대장경이 일본으로 간 까닭?

똥하 2009. 4. 7. 13:52

고려대장경 오래된 인쇄본은 왜 일본에만?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해외 전적문화재 조사목록―일본 오타니대학 소장 고려대장경'을 발간했다(헤럴드경제 3월 12일 보도).

 

불교 배척했던 조선초

 

세계기록유산인 해인사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즉 팔만대장경을 찍어낸 책 중에서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대장경판이 만들어진 지 600여 년 뒤에 나온 강원도 월정사 소장본(1865)이다.

 

다른 것들은 모두 20세기에 찍어낸 판본들이다.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흔히 고려대장경이라 말하는 것은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해인사대장경을 가리킨다. 원래는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으로 구분되는데, 해인사대장경을 고려대장경으로 통칭하는 것은 고려대장경 중 그것만이 현재 해인사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촉판대장경 이래 완벽한 대장경이 간행된 것은 고려의 현종 때였다. 이것을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라고 하는데, 나라와 백성을 외적으로부터 지키려는 기원의 소산이었다. 이 작업은 적어도 1011(현종 2~29년)의 18년에 걸쳐 완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 내용과 체재는 촉판대장경을 토대로 한 것이엇으나 몽골족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그 일부는 국내 및 일본의 여러 곳에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거란판대장경은 이후의 간행으로 자국 내의 불전들과 초조대장경을 토대로 삼았고, 거란의 도종(道宗)은 1063년 대장경 전질을 고려에 보내기도 하였다. 초조대장경에 만족하지 않은 고려에서는 보완 작업을 계속하던 중, 문종의 넷째아들 의천(義天)의 주도 하에 중국과 한국의 여러 선사(禪師)들이 저술한 문헌까지 총망라하는 속장경(續藏經)의 간행에 착수했다.


그는 이를 위해 국내의 고서를 수집함은 물론 송나라로 가서 3,000여 권의 문헌을 수집하였고, 요(遼)나라와 일본에서도 서적을 구입하였다. 1092년 본격젼인 간행에 착수한 이래 1,010부 4,740여 권의 문헌을 9년에 걸쳐 목판에 새겼다. 그러나 이 대장경 역시 소실되었으며, 다만 그 간행본의 상당수가 일본 도다이 사[東大寺]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국내의 송광사에서도 일부가 발견되었다.


이것이 해인사대장경을 만들 때까지는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해인사대장경 판각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한편 의천이 작성한 목록 〈신편제종교장총록 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이 현존하므로 속장경에 어떤 문헌들이 수록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해인사대장경은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족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간행되었다. 고종 때인 1237년에 착수하여 1251년 완성했다. 소위 '팔만대장경'이라 하듯이 완성 당시 경판의 총수는 8만 1,137매였고 현재 보관되어 있는 것은 8만 1,258매에 이르며, 1,516종의 문헌 6,815권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후대에 판각된 15종의 문헌이 추가되었다. 조선시대 초까지는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되었던 것이 해인사로 옮겨져 해인사대장경으로 불리게 되었고, 옮긴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異論)이 있으나 1398년(태조 7)에 옮겼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해인사대장경은 첫째, 현존하는 대장경판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여러 차례의 교열을 거친 가장 정확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 수록된 문헌의 종류[部]나 양[卷]에 있어서는 이보다 상회하는 다른 나라의 대장경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중국 찬술의 논서[註疏]나 잡서를 포함시켰거나 그 종류와 양을 정확히 헤아리지 못한 착오에 기인하는 바가 있다.


둘째, 해인사대장경은 최초의 대장경판인 송나라 촉판대장경을 토대로 하면서 거란판대장경을 비롯한 당시의 권위있는 모든 대장경과 대조하여 엄밀하게 교정하였으므로, 지금은 사라진 촉판대장경과 거란판대장경의 내용을 아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셋째, 독자적으로 수집한 귀중한 문헌이 수록되어 있다. 즉 이전의 다른 판본에는 전혀 수록되어 있지 않았던 20종 가량의 불전이나 각종 목록 및 사서(辭書) 종류 등, 이 대장경이 수록하지 않았더라면 영구히 알려질 수 없을 뻔한 귀중한 문헌들이 실려 있다. 현재 해인사대장경은 1976년 동국대학교에서 색인 1권을 포함한 48권의 축소판으로 영인하였다.

 

                          ▲ 강원 평창군 진부면 월정사에 보관중인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고려대장경 판본중 반야심경



한마디로 우리나라에는 고판본(古版本)이 없다. 그렇다면 '최고(最古)의 팔만대장경 인쇄본'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이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그것은 일본 교토(京都) 오타니(大谷) 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고려대장경이었다.

 

▲ 일본 오타니대 도서관이 소장한 고려대장경의 각 권 표지. 해인사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의 현존 인쇄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 한국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이 대장경은 587상자 4995첩의 방대한 분량으로 고려 말의 학자 이색(李穡·1328~1396)의 발문(跋文·책 끝에 발행 경위를 적은 글)이 붙어 있다.

 

이색 (李穡 고려말의 문신·학자) 1328(충숙왕 15)~1396(태조 5)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아버지는 찬성사 곡(穀)이다. 15세에 부음(父陰)으로 별장(別將)의 직을 얻고,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가 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아버지가 원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가 되자 조관(朝官)의 아들로 원나라 국자감의 생원이 되었다. 이색은 이제현(李齊賢)을 좌주(座主)로 하여 주자성리학을 익혔고, 이 시기 원의 국립학교인 국자감에서 수학하여 주자성리학의 요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1352년(공민왕 1)


아버지가 죽자 귀국해 토지문제·왜구대책·학교교육론·이단배척 등의 상소를 올렸다. 1353년 고려의 과거에 합격했으며, 이듬해 정동행성(征東行省) 향시(鄕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에 가 회시(會試)·전시(殿試)에 합격하여 응봉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應奉翰林文字承事郞同知制誥) 겸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이어 고려에 돌아와 전리정랑(典理正郞)·내서사인(內書舍人)을 지냈다. 1355년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본격화되자 왕의 측근세력으로 활약하면서 〈시정8사 時政八事〉를 올렸는데 그중 하나가 정방(政房)의 혁파였다. 이 일로 이부시랑 겸 병부시랑에 임명되어 문무(文武)의 전선(銓選)을 장악하게 되었다.


신흥유신으로서 현실개혁의 뜻을 가진 이색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반영시키는 가운데 순조롭게 출세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색의 이러한 정치적 성장은 오히려 현실개혁의지를 약화시키고, 자신과 관계를 맺은 부류와 타협하게 되었다. 1357년 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 등과 더불어 염철별감(鹽鐵別監)의 폐지를 논했다.


새로이 별감을 파견하면 이배(吏輩)들이 농간을 부릴 것이며 별감은 세포(稅布)를 많이 거두어서 왕의 총애를 받으려 하기 때문에, 일반 민은 소금을 받지도 못하고 포만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색은 왕이 재추(宰樞)와 대성관리(臺省官吏)를 모은 가운데 별감 파견의 가부를 물으려 하자 병을 칭하여 피했다.


이는 염제신과 같은 권세가가 별감 파견을 주장한 것에 대한 이색의 타협으로서, 다른 간관(諫官)이 이 일로 좌천된 것과 달리 이색은 중임되었다. 또한 1362년 성균시의 합격자를 뽑던 중 왕이 환관(宦官)을 보내어 벽승(嬖僧)의 사패(賜牌)에 어보(御寶)를 찍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색은 처음에 신하들과 의논할 일이라 하여 반대했지만 이내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찍었다.


사패는 국왕이 충성의 대가로 공신이나 기타 사원에게 설정해주는 토지의 증빙문서였는데, 당시에는 권세가의 토지확대방법으로 이용되어 토지겸병과 수취체계 중첩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이색은 국왕의 힘에 의해서 자신의 뜻을 계속 관철시키지 못하고 이를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1359, 1361년 홍건족이 침입했을 때 왕을 시종하여 호종공신 1등에 책봉되어 전(田) 100결(結), 노비 20구(口)를 받았다. 또한 아버지에게서 받은 토지·노비와 관직을 통해 얻은 수조지, 그리고 공신전으로 중앙정계에 정치적 지위에 상응하는 경제적 기반도 마련하고 있었다.


1365년 신돈이 등장하고 개혁정치가 본격화되면서 그는 교육·과거 제도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367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될 때 이색은 대사성이 되어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과 더불어 정주성리(程朱性理)의 학문을 부흥시키고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유신들을 길러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되고 이어 공민왕이 죽자 그의 정치활동은 침체기를 맞았다. 그후 1375년(우왕 1)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판삼사사를 역임했다. 1386년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해에 판문하부사 조민수(曺敏修)의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는데 동지공거 염흥방(廉興邦)이 그를 합격시킬 것을 청했으나 거절했다. 그는 1377년 장경(藏經)을 인성(印成)하고, 1387년 서보통탑(西普通塔)의 탑기(塔記)를 짓는 등 주자성리학자이면서도 불교를 선호하며 긍정하고 있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고려왕조의 존립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 개혁정치를 희구한 이색은 1389년(공양왕 1) 도평의사사에서의 사전혁파(私田革罷) 논의 때 이숭인·변안렬(邊安烈) 등과 같이 옛 법은 경솔히 고칠 수 없다고 반대했다. 불법적인 대토지소유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사전개혁과 같은 급격한 전제개혁에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위화도회군을 군령을 위반하고 왕의 명령을 거역한 행위로 이해했으므로 그 주체세력이나 동조세력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위화도회군의 중심인물과 동조세력은 당대의 대유(大儒)인 이색과 같은 반대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오사충(吳思忠)·조박(趙璞)·정도전(鄭道傳)의 상소로 인하여 그는 장단으로, 아들 종학(種學)은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후 김저(金佇)의 옥(獄)과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 노선을 같이하는 이숭인·변안렬·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투옥되거나, 금주·여흥 등지로 유배당하는 등 고려 말기의 정치권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색은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고려말에 결당모란(結黨謀亂)한 자로 지목되어 우현보 등 56명과 더불어 논죄되어, 직첩을 빼앗기고 서인(庶人)이 되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장흥에서 석방된 그는 3년간 한산에서 지내고 1394년(태조 3) 오대산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서울로 돌아왔다.


1396년 여주 신륵사(神勒寺)에 가는 도중에 죽었다. 이색은 원나라에서의 유학과 이제현을 통하여 이 시기 선진적인 외래사상인 주자 성리학을 수용했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에 대처하면서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그는 원의 주자학을 받아들였으므로 그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이(理)·기(氣)·태극(太極)과 같은 주자학의 핵심개념을 사용하여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했고, 주자학의 수양론인 성학론(聖學論)을 전개했다.


그러나 주자학에서 말하는 수양론과 달리 죽음과 인간적 고뇌와 같은 초인간적·종교적 문제는 여전히 불교에 의존했다. 또한 송대의 혈연·의리·도덕·윤리 등을 말하는 도통론(道通論)을 전개한 것이 아니고 원의 형세론적 도통론을 전개했다.


즉 그의 주자성리학의 발원지인 원의 영향과 불교의 영향 속에서 송대의 주자학과 구분되는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저서로 〈목은유고〉·〈목은시고〉 등이 있다. 장단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 이색 영정


발문은 ▲1381년(우왕 7) 대신 염흥방(廉興邦·?~1388) 등이 제작비를 마련해 대장경을 인쇄한 사실과 ▲(시해당한) 공민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라는 간행 이유를 밝혔다.

 

염흥방(廉興邦?~1388(우왕 14). 고려 후기의 문신.본관은 서원(瑞原). 자는 중창(仲昌), 호는 동정(東亭). 아버지는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제신(悌臣)이다.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좌대언(左代言)이 되었다.


1362년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다른 장수들과 함께 홍건적을 평정하고, 서울을 수복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2등공신으로 책록되고 밀직부사로 임명되었다가, 1367년 밀직지신사가 되었다. 밀직제학으로 있던 1374년 제주에서 목호(牧胡)의 난이 일어나자 도병마사가 되어 최영(崔瑩)의 휘하에서 출전해 난을 진압했다.


1375년 우왕이 즉위한 뒤 당시의 권세가인 이인임(李仁任)의 비위에 거슬려 지방으로 귀양갔다가 곧 풀려나서 서성군(瑞城君)으로 책봉되었고, 그뒤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귀양갔다 온 뒤로는 이인임에게 아부하며 임견미(林堅味) 등의 권세가들과 함께 정권을 독차지하고 벼슬을 파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또한 타인의 토지와 노비를 강점했으며, 가노(家奴)들의 횡포를 방치하여 그의 가노 중 이광(李光)은 전 밀직부사 조반(趙胖)의 땅을 강탈하기까지 했다.


조반이 이광을 죽이고 그 집을 불지르자 당시 상만호(上萬戶)였던 그는 조반을 반역모의자라고 무고하고, 조반과 그 가족들을 체포해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참혹한 형을 가했다. 그러나 당시 행패를 일삼던 임견미·왕복해(王福海) 등과 함께 강탈한 토지와 노비에 대해 조사받고 처형당했다. 저서로 〈동정집〉이 있다.


이숭인(李崇仁)이 쓴 다른 기록에는 이 대장경을 경기도 여주 신륵사에 봉안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왜 이 '최고의 고려대장경'이 일본에 있는 것일까? 왜구가 약탈해 갔거나, 일제시대에 불법으로 반출됐던 것일까?

 

일본 "기막힌 보물" 애걸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조선 초기의 한일관계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오타니대 대장경 조사를 주도하고 조사목록집에 논문을 쓴 박상국(朴相國)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은 "14~16세기 한·일 양국의 관계는 선린외교이자 '대장경 교류의 역사'였다"고 말했다.


1395년(태조 4) 왜구가 잡아갔던 조선인 570명이 송환되자 조선은 규슈(九州) 절도사 미나모토 료순(源了俊)에게 감사의 뜻으로 대장경 2질을 하사했다.

 

이 기막힌 보물을 얻게 된 미나모토의 반응은 이랬다. "절하고 읽어보니 귀국의 은혜에 감동됨이 마치 바다가 끝이 없는 것 같사옵니다!"


이로부터 일본은 조선이 요구하지 않아도 섬마다 조선인 포로들을 수색하고 송환하면서 끈질기게 대장경을 달라고 애걸했다.

 

심지어 대장경판 자체를 달라고 떼를 써서 사신이 단식 투쟁을 벌이는 일까지 있었다.

 

세종이 이 요청만은 끝까지 거부하자 일본 사신은 한때 왜구를 해인사에 침투시켜 대장경판을 약탈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00번 요청에 50번 보내

 

당시 일본 무로마치(室町) 시대 외교 사절의 대부분이 승려였던 것도 이런 현상을 부채질했다.

 

1556년(명종 11)까지 대장경을 요청한 건수가 100회를 넘었는데, 조선은 이중 반 이상을 들어줬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던 나라였고 어느 시점부터 '대장경 그거 다 줘 버리자'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오타니대 소장 대장경은 이런 상황에서 일본으로 가게 됐다.

 

'태종실록' 14년(1414)조의 기록을 보면 태종은 "일본의 풍속은 불법(佛法)을 숭상하기 때문에 존경하고 믿는 것이 여기의 배가 될 것"이라고 말한 뒤 예조에 명해 여흥(=여주) 신륵사에 소장된 대장경 전부를 일본에 보내도록 한다.

 

신륵사 (神勒寺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 기슭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579~631 재위)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으며, 신륵사라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 신륵사 극락보전, 경기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

〈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불우조(驪州牧佛宇條)에 의하면 신륵사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璧寺)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벽사는 고려시대에 경내의 동쪽 언덕에 벽돌로 된 다층전탑이 세워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이 대찰(大刹)이 된 것은 나옹화상(懶翁和尙:혜근)이 입적할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난 뒤부터이다.


1379년(우왕 5) 각신(覺信)·각주(覺珠) 등이 절의 북쪽에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나옹의 초상화를 모신 선각진당(先覺眞堂)을 세우면서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했다.


1382년에는 2층의 대장각(大藏閣) 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영릉(英陵:세종의 능)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72년(성종 3) 절이 확장되고 다음해에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1702년(숙종 28)에는 위학(偉學)·천심(天心) 등이 중수했다.


1858년(철종 9)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해 중수했다. 현존 당우로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조사당(祖師堂:보물 제180호)·명부전·심검당·적묵당·노전(爐殿)·칠성각·종각·구룡루(九龍樓)·시왕전 등이 있다.


또한 다층석탑(보물 제225호)·다층전탑(보물 제226호)·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보물 제228호)·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보물 제230호)·석등(보물 제231호) 등과 같은 문화재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이 150년 넘게 계속되다 보니 조선에는 고려대장경 책이 자취를 감추게 된 반면 일본으로 건너간 대장경들은 일본의 불교문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고려대장경의 고판본은 오타니대 소장본까지 16종이나 된다.

 

고려대장경에 대한 연구도 계속돼 1710년 고려대장경의 정확성을 입증한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이 나왔다.

 

오늘날 '고려대장경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같은 일본인들의 연구 덕택이었다는 것이다.[유석재 기자]

출처 : 석굴암
글쓴이 : 어둠속의 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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