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보르헤스의 불교강의-<11> 윤회

똥하 2009. 3. 30. 23:07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11>윤회

 

오늘날의 불교는 거대한 종교가 되어 방대한 경전과 주석 그리고 복잡한 이론을 구축한 학파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원래 붓다의 가르침은 해탈에 이르는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는 매우 단순하고 실천적인 것이었다. 붓다는 추상적 토론의 무용(無用)함을 비유하기를, 인간이 화살을 몸에 맞았는데도, 그것을 뽑을 생각은 않고 그 상처의 원인만 따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붓다는 현학적인 토론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화살 뽑는 시급한 일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불렀다.

또한 붓다는 우주가 유한한지 무한한지, 창조되었는지 아닌지 등을 물어오는 사람에게 대답대신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지는 비유를 들었다. 우주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의 한 부분만을 만지고서 거대한 코끼리를 정의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이 유대교(구약)를 전제로 하듯이, 붓다의 가르침도 힌두교(베다)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 힌두교는 윤회에 대한 믿음을 중요시한다. 현대인들에겐 다소 환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윤회설은 사실 알고 보면 굉장히 광범위한 지역의 부족들 사이에서 인정되어온 것이다.

 

그리스에서 윤회설을 주창한 사람은 피타고라스였다. 디오게네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자기의 전생(前生)을 기억해 내는 능력을 헤르메스(그리스 신화에서의 언어의 창조신. 제우스의 아들로 신과 인간사이의 통역을 맡음)로 부터 받았노라고 말했다 한다. 그는 자신이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던 헤르모티모였다고 말하며, 어느 신전에서 당시 전쟁에서 헤르모티모가 사용했던 방패를 찾아냈다. 고대 그리스 종교의 하나였던 오르페우스교(敎)에선, 육체는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가르쳤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그의 <단편>에서, “나는 남자도 되어 보았고, 여자도 되어 보았다. 나는 나무였고, 새였으며, 물속에서 고기로도 살아 보았다”고 기록했다. 특히 그는 물속에서 육지를 보고 매우 동경했으며, 육지에서 태어나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공화국> 제10권에서 어느 상처받은 병사가 천국과 지옥을 순례하면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오르페우스의 영혼과 만났는데, 그 시(詩)와 음악의 신은 백조의 몸을 빌어 환생해 있었다 한다.

 

트로이 전쟁을 지휘했던 아르고스의 왕 아가메논은 독수리로 환생했고, 율리시즈는 평범한 무명씨(無名氏)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플라톤은 윤회의 주기를 천년으로 추정했는데, 이것은 브라만신의 잠자는 시간인 일겁(一劫)의 천이백만년에 비하면 매우 소박한 스케일에 지나지 않는다. 3세기경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플로티누스는 “윤회하는 생들은 순차적인 꿈과 같은 것이다. 혹은 침대를 옮겨 다니면서 자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시저는 영국과 프랑스 북부지방에서 살았던 고대(古代) 켈트족의 사제계급인 드루이다족의 연구에 몰두했는데, 이들은 영혼의 불멸과 윤회 전생(轉生)을 믿었다. 다음의 6세기경의 영국 시는 그 사상의 편린을 보여준다.

 

 

나는 칼날이었다

나는 강의 물방울이었다

나는 빛나는 별이었다

나는 책의 글자였다

나는 최초의 책이었다

나는 등불의 빛이었다

나는 물 위의 다리였다

나는 독수리처럼 여행하였다

나는 하프의 줄이었다

나는 마법에 걸려 일년동안 물거품속에 갇혀 있었다

 

유대신비주의 카발라에서는 윤회를 ‘길굴(Gilgul, 回歸)’과 ‘이부르(Ibbur, 回生)’로 구분한다. 길굴에 대해서 이삭 루리아는 이렇게 말한다. “피를 흘리고 죽은 사람의 영혼은 물속으로 들어가서 이리저리 떠돌아 다닌다. 폭포를 만나면 그 고통은 극에 달한다” 이부르는, 조상이나 스승의 영혼이 후손의 영혼에 스며들어가 그를 훈련시키고 기를 불어 넣는 것을 가리킨다.

 

인도인들은 윤회를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로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마누법전에 이런 말이 있다. “승려를 살해한 사람은 그 상황에 따라 개, 돼지, 말, 낙타, 소, 염소, 양, 들짐승, 새 혹은 풀카자(카스트 계급의 최하위 천민)로 태어난다” 또, “비단옷을 훔친 사람은 메추리로, 아마포(亞痲布)를 훔친 사람은 개구리로, 무명옷을 훔친 사람은 백로로 태어난다. 향수를 훔친 사람은 새앙쥐로 태어나고 박하를 훔친 사람은 칠면조로, 익힌 곡식을 훔친 사람은 고슴도치로, 날곡식을 훔친 사람은 돼지로, 소를 훔친 사람은 악어로 태어난다. 불을 훔친 사람은 거위로, 집기를 훔친 사람은 꿀벌로, 붉은 옷을 훔친 사람은 붉은 꿩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인간의 영혼이 다른 인간이나 동물 혹은 식물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생각은 서구의 많은 지성인들에게 호기심과 함께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볼테르는 윤회설에 대해 식이요법적인 가설을 세웠다. 브라만계급의 지도자들은 더운 인도에서 육식을 하는 것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사람들이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인간이 동물로 다시 태어난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아랍지방에서도 식중독과 기생충으로 인한 병을 방지하기 위해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게 한다. 볼테르는 소에 대한 숭배도, 인도에서는 고기보다 우유가 훨씬 더 소중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12>윤회

- 해탈하면 윤회의 수레바퀴 멈춰 -

- 서구학자들 일회성 창조설 부정 -

 

데이비드 흄은 윤회설이야말로 철학이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영혼이 미래에서도 불멸한다는 교설은 동일한 논리로 영혼이 과거에서도 존재해 왔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의지’이며, 세계의 모든 사물의 모습은 그 의지의 표상이라고 보았다. 그는 영원하고 편재(遍在)하는 그 존재가 지속적으로 세상에 나타난다고 신화화된 이론이 윤회설이라고 보았다.

인도의 윤회설은 우주의 창조와 파괴가 끝없이 계속된다고 하는 우주론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주가 반복해서 창조되고 파괴된다는 이론은 무엇보다도 우주의 절대적이고 일회(一回)적인 창조설을 부정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 이 사실에 접한 서구의 학자들은 혼돈스러워서 매우 당황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약의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천지창조설을 정면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창조에서 파괴로 이어지는 한 주기는 일겁년(Kalpa)동안 지속된다. 거의 무한한 시간인 겁의 단위를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인도의 경전들은 흔히 다음의 비유를 든다.

여기 3만미터의 바위산이 있다. 백년에 한번 베나레스에서 짠 부드러운 비단천으로 그 바위산을 스친다. 이렇게하여 바위산이 완전히 닳아 없어지기 전에는 일겁의 시간이 다 흐르지 않는다. 글쎄 최근의 천문학에서 사용하는 아찔한 단위도 이 정도에 이르지는 않는 것 같다.

 

서구인들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장구한 시간단위에 인도인들의 정신은 익숙해져 있다. 기원후 2세기 프랑스 리용의 주교였던 유명한 신학자 이레네오(Lreneo)는 창세기의 6일간에서 힌트를 얻어 우주의 역사가 6천년간 지속될 것이라고 계산했다. 말세론(末世論)은 인도인들에겐 우스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브라만신의 세계에도 밤과 낮 그리고 해(年)가 있다. 그러나 브라만신의 하루는 인간세의 43억2천년에 해당한다. 겁(劫)의 세월들이 모여 다시 네개의 주기를 만드는데 첫번째가 황금의 시대(Krita-Yuga)로 4,000신년(神年)동안 지속되고, 두번째는 은(銀)의 시대(Treta-Yuga)로 3,000신년(神年)을, 세번째로 동(銅)의 시대(Duapara-Yuga)로 2,000년을, 네번째는 철(鐵)의 시대(Kali-Yuga)로 1,000신년동안 지속된다고 한다. 이런 복잡하고 거대한 연대학(年代學)은 대략 리그베다 시대(기원전 10-12세기)와 마하바라타 시대(기원전 4-2세기) 사이에 만들어졌다. 인도의 고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에는 전사(戰士), 마술사, 문법학자로 등장하는 유명한 원숭이왕(王) 하누만(Hanuman)이 복잡한 연대학을 정리하여 체계를 세우는 장면이 나온다.

 

위에서 말한 네개의 시대에서 각각의 시대마다 인간의 수명, 키, 윤리가 다르다. 뒤로 갈수록 수명이 줄어든다. 황금의 시대에선 모든 인간들이 신처럼 오래 살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맨 마지막 철의 시대다. 브라만 신도 영생(永生)하지 않고 수명이 있다. 그는 36,000겁을 산다. 그가 죽으면 다른 브라만신이 태어나 다시 끝없는 창조와 파괴의 놀이를 계속한다.

 

새로 태어난 브라만신은 먼저 자신의 궁전을 짓는다. 거대한 궁전은 그러나 비어 있어서 쓸쓸하다. 브라만신은 다른 신들을 창조한다. 그뒤 메루산, 대지, 인간과 지옥을 창조한다.

 

불교에서 겁(劫)은 부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해서 전후 두시대로 나뉜다. 공겁(空劫)시대에는 부처님이 탄생하지 않는다. 불겁(佛劫)시대에는 연꽃이 피어 보리수아래에서 정각을 얻을 성자의 탄생을 알린다.

 

만일 이생에서의 탄생이 전생의 업보라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 모두는 수많은 전생을 전전하며 오늘까지 살아왔지만 해탈을 얻어 열반(Nirvana)에 들기만 하면 미래에 전전해야 할 수 많은 삶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한다. 시작도 끝도 없는 삶의 수레바퀴 속에서 인간은 허망한 부침(浮沈)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전생(前生)의 행위가 이 생을 결정하고, 이 생의 행위가 내생(來生)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다음 생을 결정하는 행위를 인도 철학자들은 업(業, Karma)이라고 정의했다.

 

이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만들다’ 혹은 ‘창조하다’를 의미하는 ‘크리(Kri)’에서 파생되었다. 업은 우리가 끊임없이 짜나가는 천(織物)과 같은 것이다. 한 사람의 모든 행위, 말, 생각 그리고 어쩌면 꿈까지도 사후(死後) 그의 다음 생을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가 받을 몸과 운명은 모두 전생의 업에 달린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지니고 있으면, 그것이 씨가 되어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한다.

 

라드하크리슈난은 업을 ‘윤리유지법(倫理維持法)’이라고 정의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윤리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한편 매 우주의 주기마다 그 우주의 산, 강, 대지, 바다, 숲의 모양을 결정하는 것은 전(前) 우주 때의 인간의 행위라고 한다. 과일나무에서 열매가 맺고, 땅에서 곡식이 자라는 것은 모두 인간의 공덕(功德)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리(地理)는 윤리의 투영(投影)이 된다.

 

업의 작용은 비인격적이다. 상과 벌을 판별하는 판관신(判官神)은 존재치 않는다. 모든 행위는 상이나 벌의 씨앗을 안고 있다. 그 결과가 행위 후 즉각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그것을 피할 도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