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8>불교에 영향을 미친 사상(1)-산키아학파
우리가 앞장에서 살펴본 바대로, 불타의 탄생지가 카필라성(城)이라고 알려져 내려오는 사실속에는 산키아학파의 창시자 카필라(Kapila)의 사상이 불교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카필라성(城 바스투)은 사실상 ‘산키아학파의 요람’을 의미하며, 여기서 불타가 탄생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교의 기본 가르침을 살펴보기에 앞서 산키아학파의 교리를 일견(一見)해 볼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불교신앙이 꽃을 피운 후부터 지금까지 카필라성은 많은 불교인들이 순례하는 성지(聖地)가 되었다. 당(唐)의 현장법사도 7세기 초반 카필라성의 유적을 답사하고 귀국하여 중국에 외부세계의 현실을 부정하는 관념론(觀念論, idealism)을 도입하였다.
인도 육파철학(六派哲學)의 하나인 산키아(Sankhya, 혹은 상캬로도 발음함)는 산스크리트어로 ‘수(數)’ 혹은 ‘숙고(熟考)’를 의미하며, ‘수론(數論)’으로 번역된다. 가르브(Garbe, 프랑스 불교학자)에 의하면, 바라문 승려들이 카필라의 교리가 지나치게 세분(細分)된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것을 비꼬기 위하여 ‘수(數)의 철학’이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이것이 그만 이름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산키아는 2원론이다. 우주에는 태초에서부터, 복합물질인 프라크리티(Prakriti)와 무수한 수의 개별적이고 비물질적인 영혼인 푸루샤(Purusha)가 있다고 믿는다. 프라크리티는 3가지 요소(guna)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첫번째 요소는 사트바(sattva)로서 객체속에서는 가볍고 빛나는 것이 되고, 주체속에서는 안락과 행복이 된다. 두번째 요소는 라자(raja)로서 객체에서는 강하고 활동적인 것이 되고, 주체에서는 열정과 공격성이 된다. 세번째 요소는 타마(tama)인데 객체에서는 어둡고 무거운 것이 되고, 주체에서는 무관심과 꿈이 된다.
첫번째 요소는 신(神)들의 세계를 지배하고, 두번째 요소는 인간세계를 지배하며 세번째 요소는 동식물과 광물의 세계를 지배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사물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이나 고통은 그 사물속에 잠재해 있다는 것이다. 꽃을 볼 때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꽃에 내재해 있는 것을 우리가 느끼기 때문이다. 다양한 색깔들의 원인도 이 요소들에 기인한다. 사트바가 강하면 노란색이나 흰색이 되고, 라자가 강하면 붉은색이나 푸른색이 되며, 타마가 강하면 회색이나 검은색이 된다.
푸루샤(개별적 영)들은 물질과 결합하여 생물(生物)이 된다. 각각의 사물은 물질적 육체와 아주 섬세한 재료로 구성된 심리적이고 영적인 육체로 나뉠 수 있다고 믿는다.
푸루샤는 옮겨 다니기 위해 몸이 필요하며, 영혼은 있으나 몸이 불편한 지체부자유자에 비유된다. 프라크리티는 영혼이 없이는 보고 느낄 수 없으며, 몸은 있으나 볼 수 없는 장님에 비유된다. 물질적 육체는 인간의 죽음과 함께 소멸하지만, 심리적 육체는 소멸하지 않고 영혼과 함께 윤회한다.
이 섬세한 심리적 육체는 산스크리트어로 링가(linga)라고 불리며, 마누스(manus, 중심기관), 분별지(分別知), 개성(個性)의 원리(즉, ‘나는 말한다, 나는 강하다, 나는 만진다, 나는 죽는다’ 등 ‘나’라고 생각케 하는 환상) 등 13개의 기관으로 구성된다. 산키아학파의 학자들은 동시적(同時的)인 지각(知覺)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모든 지각은 무한소(無限小)의 지속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우리는 동시에 보고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색깔과 소리의 지각은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비물질적인 영혼은 사건의 행위자가 아니라 관객이며 목격자이다. 영적 육체가 이것을 깨달을 때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깨어진다. 영혼과 두 육체(물질적 육체와 심리적 육체)는 상호 분리된다. 심리적 육체는 첫번째 요소인 사트바의 도움과 수도(修道)를 통하여 이 확신에 이르른다. 몸으로부터 해방된 영혼은 절대적인 무의식의 경지에 도달한다. 경전에서는 이 상태를 영상이 비치지 않는 빈 거울에 비유한다. 이 무의식은 단순히 의식의 상실이나 배제가 아니다. 영혼은 이전에 생활이나 꿈의 목격자였던 것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깊은 꿈의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본질적으로는 우리 생의 배우가 아니라 관객이라는 논리를 환기시키기 위해 산키아학자들은 아름다운 비유를 든다. 무용이나 연극공연을 보러가면 우리들은 흔히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같은 착각을 한다. 우리들이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한사람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또 그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컨디션을 함께 한다. 이 친밀한 동거(同居)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곧 그 사람이라고 믿는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 프랑스의 대문호(大文豪) 빅토르 위고는 이와 유사하게 자신의 자서전 제목을 <그의 생의 목격자가 이야기하는 빅토르 위고>라고 붙였다.
인도의 여타 철학체계처럼, 산키아학파도 무신론(無神論)이다. 그러나 바라문 승려들은 이것을 가지고 산키아학파의 정통성을 문제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인도사람들 사이에서 정통성은 인격신에 대한 믿음의 유무에 의해 결정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인도의 옛 기도(祈禱)와 의식(儀式)과 송가(訟歌)를 모은 베다(Veda) 경전을 숭배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뿐 아니라, 산키아학파의 무신론은 그리 공격적인 것이 아니다. 전지전능한 유일신(有一神)은 부정하지만, 민간신앙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들은 인정하였다. 가르브(Garbe)는 산키아 경전의 한 귀절을 인용한다.
“신(神)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신은 자비신으로 세상을 창조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세상은 고해(苦海)이기 때문이다. 고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락탄치오(Lactancio)도 에피쿠로스(Epicuro)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만일 신이 악을 제거하기를 원하면서도 실행하지 않았다면, 그는 무능(無能)한 존재이다. 만일 할 수 있는데도 원치 않는다면, 그는 사악한 존재다. 만일 원치도 않고 행할 수도 없다면, 그는 사악하고도 무능한 존재다. 만일 원하기도 하고 할 수도 있다면, 이 세상에 가득찬 악의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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