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신돈

[스크랩] 개혁

똥하 2006. 11. 28. 22:24

 신돈은 정치의 전면에 나서자 마자 전광석화와 같이 권문들,특히 무장들을 제거했다. 그 당시 무장들은 5년부터 고토회복을 위해 시작된 동북면(쌍성총관부 수복)과 서북면(압록강 너머 파사부와 8참공격)의 전쟁에 이어 8년부터의 홍적의 침입과 흥왕사 내란 그리고 12년 5월부터 고려를 긴장시키다 10월부터 개시된 덕흥군의 내침을 거치면서  무장들은 높은 관직과 많은 봉토를 받아 점차 권문화 되어 13년에는 군인으로 공을 세워도 줄 땅이 없어서 관작을 주어 그 상에 대하다보니 새로이 많은 직책이 첨설(첨설직의 시작은 3년6월에 중국파병때 였다.)되어 뒤의 산관의 문제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신돈의 개혁1탄은 당연히 무신들의 제거였다.

 

 무신들을 제거하면서 또 신돈이 집착한 것은 내재추제도의 확립이였다. 내재추제도는 궁중에 일정수의 재추를 두고 서무를 관장케하는 궁중서무기관으로 14년5월 신돈이 집권과 함께 개혁사업의 중대성과 긴급성때문에 설치한 기관이다. 이것을 통하여 신속한 의사결정 및 집행,그리고 무었보다도 보안유지가 가능한 제도였다. 개혁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보안과 신속한 의사결정과 집행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전의 중추원의 재신과 추밀원의 추신이 참가하는 도평의사사와 같은 합의기구의 성격으로는 개혁을 할 수가 없었다. 안건이 올라가면 보안이 안되는 것은 물론이고 의사결정을 하는데 갑론을박으로 세월을 보내다 보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신돈은 최영을 필두로 무장세력의 숨통을 꽉 죄어 그들에게 겁을 주어 신돈의 개혁집행에 순순히 따르게 분위기를 잡은 다음 내제추제도를 만들어 그 인원을 자기의 개혁지지세력으로 메꾸었다. 그리고 도당의 서무 또한 심복을 보내 관장케하여 원활한 집행이 이루어 지게 하였다. 이제 도당은 단지 내재추에서 결정된 사항을 출납하고 집행하는 기관으로 바뀌었다. 이전의 왕명마저 제약(왕명이 양부를 경유치 않았다 하여 봉교하지 않은 사례2건,  14년3월의 인사시 양부의비대화,-재추급이 35명 이나 됨.로 왕권위축)하던 그 위용은 사라졌다. 의사결정의 형식은 왕의 지시가 재추의 합의를 거친 형태이나 그 재추의 인원구성 성격이 신돈의당여들이다 보니 당연히 신돈의 복안이 왕의 입으로 지시되고 신돈당여에 의해 당연히 합의되어 집행되었다. 신돈이 20년에 주살당한 뒤 군수 이진수가 내재추의 폐지를 주장하며 내재추의 폐단을 말한 것을 보면 다른 대신들 즉 권문들은 얼마나 떨고 있었는지 알 수있다. 모든 것이 몇명의 내재추에서 결정되다 보니 밑에서 보았을 때는 그 지시가 왕명과 틀리게 나오더라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신돈은 최영을 제거한후 몇일뒤 형인추정도감을 설치하여 억울한 자의 소를 받았다. 이것은 권문들의 폭압에 의해 노예가 된 양민들을 구제하고 억울하게 죄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정치(整治)하여  권문들의 세를 약화시키고 양민들의 수를 늘림으로써 세원확보를 기하고 자 함이었다.이전에는 모든 것이 권문 위주의 판결과 법집행이 있었다면 이제는 양민과 천예위주의 판결과 법집행이 이루어 졌다. 양민과 천예들의 억울한 부분은 다 풀어주고 권문과 양민 또는 천예의 소에 있어 다툼이 있을 시는 양민과 천예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권문들은 억울하면서도 항의를 할 수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항의는 곧 신돈에 대한 항명이고 그것에 대한 처절한 규찰이 따를 것이었으므로 양민들과 천예들은 성인이 났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들이 좋아서 날뛰는 바람에 개성에 흙먼지가 하늘을 덮었다라고 고려사에 씌여 있다.

 

 또 여자들의 소(訴)를 잘 들어 주었는데 이에 대해 고려사나 사절요에서는 그리고는 얼굴이 예쁜여자와는 반드시 간음했다라고 씌여 있는데 신돈의 폐행으로 첫번째가 간음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 기록을 100% 믿지 않더라도 적어도 신돈은 여자들의 인기가 대단했단 것 만은 사실인 것 같다. 아마 준수한 외모와  출중한 언변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다른 승이 같는 여자 기피증이 없이 여자들을 대함에 스스럼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그만큼 그의 수행이 당시 다른 승과는 달랐다는 것이고 서민지향적인 방편이고 또 그 당시 수많은 전쟁에서 양산된 과부들의 아픔에 눈을 돌린 승이었다.그러다 보니 과부들과의 추문이 난무하는 것일 것이다.그 당시 승의 눈으로 보면 그의 행적은 음란한 요승일 수있다. 당시 집도 절도 없던 신돈은 친구인 능우가 주지로 있는 조그마한 절에 얹혀 지내고 있었다.그의 절은 신돈의 명성을 듣고 온 과부들과 아낙들로 가득찼다.능우는 그의 도를 알기에 이해했지만 사람들은 신돈이 과부들과 음란한 짓을 한다고 쑥떡거렸다. (그는 또 생활기반이 없는 과부들을 모아서 집단생활을 시키면서 일거리를 제공하기도 하고 재취의 길도 만들어 주었다.) 특히 선종인 보우계열에 경도되고 접촉이 많은 권문들은 신돈을 음란한 요승으로 이해했다.

 

 그런 신돈이 왕에 의해 강안전에 초청되어 나와 불법을 강설하자 수많은 권문들은 질문과 공격을 한다. 이에 신돈은 당당하게 그의 법을 말한다. '세상엔 흑백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흑과 백사이에는 수많은 회색이 존재한다. 선악의 2분법으로 세상을 제단해서는 안된다.' '불교는 백성위에 군림해서는 안된다.백성의 눈높이로 내러와서 그들과 함께 생각하고 희노애락을 같이 해야 한다.'그의 설법은 수많은 지금까지의 불교교리에서 보고 듣지도 못했던 진리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 서물거리며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았다. 그의 설법이 끝나자 사람들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던 침묵을 깨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신선한 충격이였다.그의 기행들이 이제야 큰 법으로 보이기 보이기 시작했다.왕은 일어나 신돈에게 깊이 머리 숙였다. 여러 대신과 관리들도 모두 깊이 머리 숙였다. 신돈은 앉아서 그들의 절을 받았다. 그리고는 일어나 주장자를 들어 딱 부러뜨리고는 걸어 나갔다. 그 의미를 두고 대신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그리고는 몇일 안되어 신돈의 왕의 사부로 임명되고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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