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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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하 2015. 10. 6. 18:53

 

[법성게(法性偈) 강론(講論) 11 ]  총론

 

 

 

() 총론 

 

(17)이사명연무변분(理事冥然無分別

있는듯 이사분별 그러나 걸림없고

  

(18)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비로자나 보현보살 대인의 경계로세 

 

강론 (17)(18)까지 합론

위의 두구절은 연기분(緣起分) 이의 결론에 해당한다.

()와 사()가 밝아서 따로 분별이 없다.

()는 심성(心性)이고 사()는 현상계의 뜻이다.

십불의 보현은 大人의 경계로다.

앞에서 설하신 바가 비록 많다고는 할망정 이(), () 곧 진리와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 까닭에 이와 같은 결론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사()란 무엇인가?

「법기」에서 밝힌바와 같이 생사(生死) 곧 나고 죽음과「생사」없는 영원한 평화 곧 열반의 성질()없음을 이()라 하고, 성질()없는 생사(生死)와 열반이 곧 사()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연기(緣起)는 성질(無性)없음이 곧 이()라 하고 성업(無性)는 연기(緣起)는 곧 사()란 말이다.「진기」에서는 진리()라는 부처님의 내향심(內向心)이므로 십불(十佛)이 곧 진리()에 해당하고 사()는 부처님의 외향심(外向心)이므로「보현보살의 경계」가 곧 이것이라고 했다.

십불(十佛)이란 부처님의 실상을「화엄경에서 열가지로 설명한 것이요, 따로히 열분의 부처님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보현보살은 부처님의 외향심(외향심(外向心)의 화현(化現)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십불(十佛)이란 부처님의 깨달음 지혜의 상징이라면 보현보살이란 부처님의 자비로운 덕행(德行)의 상징으로 이해하면 괜찮을 것이다. 지혜와 자비 그것은 둘이 아니니기 때문에 이치()와 현실() 또한 둘이 아니다. 이 이치()와 사실()에 대한 설명은 앞에서 여러번 되풀이 하였기 때문에 다음장으로 넘어가서 이야기하기로 한다.

 

 

() 도장 모양의 비유

 

(19)능인해인삼매중(能人海印三昧中

세존님 해인삼매 그속에 나툼이여

 

(20)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

쏟아진 여의보배 그속이 부사의여

 

 

() 이익 얻음

 

(21)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허공을 메워오는 거룩한 진리비는

 

(22)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중생들 그릇따라 온갖원 얻게하네.

 

 

강론 (19) (20) (21) (22)까지 합론

 

(19)능인세존께서 해인삼매중에서

(20)여의주(如意珠) 부사의법(不思議法)을 한량 없이 나타낸다.

 

「여의」란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진리요「부사의」는 형언할 수 없는 묘한 법을 말한다.

 

(21)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배를 허공에 가득히 비오듯 내린다.

(22)중생의 그릇을 따라 이익을 얻게한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대소승의 3()이 나누어지고 차별상이 생긴다는 뜻이다. 중생을 교화 제도하는 부처님을 뜻한다.

 

이 능인(能人)이 해인삼매(海印三昧)로 나와 어떻게 중생들을 이익하게 하는지 의상조사의 설명을 듣기로 하자.

도장()이라고 한 것은 비유로써 이름한 것이다. 왜냐하면 큰바다는 지극히 밝고 맑아 밑바닥까지 다 드러나 보일 정도이다. 하늘에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아수라(阿修羅)무리와 싸울때에 모든 병사의 무리들이 그속에 분명히 드러나는 모습이 꼭「도장()」에 글씨가 나타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해인(海印)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번」이란 번성하다는 뜻이다. 마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까닭이다. 날출()이란 용출무진(涌出無盡) 곧 연기(緣起)가 끝없이 솟아나와 그칠줄을 모른다는 뜻이다. 여의(如意)란 비유로써 이름한 것이니 여의보 임금님(如意寶王)은 불심의 보배를 비오듯 뿌려 중생을이롭게 함이 연()을 따라 무궁무진하다. 석가세존님의 선교방편(善巧方便)도 또 이와같아 49년간하신 일음설법(一音說法)이 시방삼세(十方三世)에 퍼저가면 중생계에 호응이 있어 나쁜마음을 없애고 착한 마음을 일으켜 중생세계를 이롭게 하니 어디에서나 쓰는 곳에 따라 뜻과 같지 않음이 없기에 여의(如意)라고 한다. 또 진기(眞記)에는「어째서「해인삼매」가 다른이을 이익케 한다는 뜻이 첫머리에 왔는가 하면 다른이를 이익케(利他)하는 시방세계 부처님(十佛)이 깨달으신바「해인」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법기(法記)에는「해인」중에는 참된 자신의 이익(自利)과 다른이의 이익이 있다고도 하였다. 자리(自利)란 세상의 내면적 깊이를 깨닫는 것이고 이타(利他)란 말은 세상으로 넓이 뛰어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또 자리(自利)란 부처님의 마음이고 이타(利他)란 부처님의 교화방편으로 알면 될 것이다. 자리(自利)에 바탕두지 않은 이타(利他)를 수반하지 않는 자리(自利) 또한 마찬가지 이치이다.

이 뜻을 다시 말하면 허공에서 세차게 쏟아지는 보배의 소낙빗물도 자기가 가진 그릇만큼 밖에 더 못받는 법이다. 예를들면 한 대담을 그릇이면 한 대만큼, 한말담은 그릇이면 한말만큼 한섬담을 그릇이면 한섬만큼밖에…세상을 내다보는것도 자기안목이상은 더 바라보지 못하는 법이다. 이것이 곧「중생수기득이익」이란 법문이다.

 

 

 

 () 수행법 

 

(23)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행자여 돌아가라 진리의 고향으로

  

 (24) 파식망상 필부득(息妄想必不得)

망상을 쉬고가라 헛길을 가지말라

 

(25)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

교묘한 절대방편 그길로 찾아가라

 

(26)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自糧

여의주 자량얻어 부처님 고향으로 

 

 

강론 (23) (24) (25) (26) 구까지 합론

 

(23) 이론고로 수행하는 사람이 본원에 돌아가면

(24) 다못 망상을 쉬어야만 반드시 얻는 것은 아니다.

 

이사(理事)가 명연(冥然)해서 분별없은 자리에서 망상을 제거하고 얻는다면 이는 사상(事上)의 도리요 화엄종지에는 어긋나는 것이다. 여기서는 진망(眞妄)을 구별하는 경지가 아니다.

 

(25) 연이 없어도 교묘함으로「여의」를 잡게된다.

 

「무연(無緣)에 있어 다른 경전에서는 연법(緣法)과 숙연(宿緣)으로 인과(因果)과 성취되어 불과(佛果)를 성취한다.」했으나 법성게에서는 초발심시가 부처님되는 도리이니 연()으로 성취하는 바가 아니라는 뜻이다.「선교」란 법성의 미묘법문을 말씀한 것이다.

 

(26) 본분따라 자량얻어 집으로 돌아가라.

 

「귀가」집으로 돌아가라함은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요「분」은 자기본분을 말한다.

 

위의 네구절은 수행방법(修行方法)을 가르쳐 보인 것으로 법기(法記)에는 다음같이 이 구절을 풀이하고 있다.

행자(行者)란 말은 모든 믿음을 가지고 보현보살의 수행법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가르친다.

본제(本際)란 말은 깨달은 마음(內證) 진리의 고향 해인(海印)이다.

「파식망상필부득」이란 구절은 두가지 아집(我執)을 망상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위에 말한바와 같은 진리의 고향「해인」의 경지에는 무아집(無我執) 곧 아상(我相)을 끊은 사람이라야 능히 도달할 수 있다. 만약「아집」을 남기면 도달할 수가 없다. 마치 바닷가의 우물에는 짠성품이 있기 때문에 먹어서 목마름을 가시게 할 수가 없다.

이와같은 의식(意識)의 인법이아(人法二我)는 말나식(末那識) 및「아뢰야식」의 바다에 숨겨있다가 다시 일어난다.「아뢰야 본식」은 바로 나의 뿌리고 그「말나식」은 바로 나의 줄기이다. 육식(6) 전오식(5)은 모두 이 아집(我執), 법집()이 출입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사람이 수미산에 오르고자 하면 팔해(8), 여덟바다를 말리고 난뒤에야 육지를 따라 가야만 수미산에 오를수가 있다.

이와같이 행자(行者)가 진리의 고향으로 뒤돌아 가고져 하면 점차로「8식망상」의 바다를 멈추게 하고나서야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삼승(三乘)의 뜻이다.

다시 말하면 본제(本際)란 의상조사가 말씀한「진리의 고향」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 진리의 고향으로 뒤돌아 가기 위해서 철저히 무아(無我)의 경지를 터득해야 한다.「나」에 집착하는 망상을 남겨둔체「진리의 고향」에 도달할 수 없다.「나」에 대한 집착과 내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이「아집 법집」이 두가지 집착을 이집(二執)이라고 한다. 이「이집」으로부터 자유로와 지는 길은 무연(無緣)해야 한다. 곧 어느 대상에도 의거함이 없어야 한다. 어떤 대상도 변함없는 고유성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귀가(歸嫁)란 말은「진리의 고향」으로 뒤돌아 가는 것이다.

또 자량(資糧)이란 말은 깨달음을 얻는 여러 가지 방편덕목(方便德目)을 말하는 것이다. 수행의 방편을 밝히는 위의「4구절」의 의미는「본제」곧 진리의 고향과 망상(妄想)이라는 두 낱말을 통해 분명해 질 것이다.

옛날 어떤 도둑놈이 도둑질을 하기 위하여 모여관에 들어갔다. 주인에게 문간방을 달라하여 일찍이 죽치고 앉아 들어오는 손님을 하나하나 점검하였다. 누가 무엇을 가지고 들어와서 어느방 어느곳에 놓고자나 살펴보는 것이다. 그런데 밤이 좀 이슥하여 한 노스님이 돈자루를 무겁게 짊어지고 들어왔다. 주인 마님이 반색을 하며 인사를 한다.

「아이고 스님, 스님께서 어찌 이렇게 나오셨습니까?

「세금내러 가는 길이요.

「안방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며 길을 인도하니 스님은 방으로 들어가자마다 돈 자루를 들어 벽장에 넣고 앉았다. 도둑놈은 안심하고「오늘은 내가 꿈을 잘 꾼 날이다.」생각하고 초저녁엔 편히 누었다가 밤중이 되어서 조심스럽게 찾아갔다. 손가락에 춤을 묻혀 창구멍을 뚫고보니 노스님은 그때까지 잠을 자지않고 앉았는데 금시금시 변화를 한다. 방금 황금 덩이 부처가 되었다가 다시 또 사람이 되었다가 계속하여 신통변화를 부린다. 한참동안 들여다 보고 있다가 생각을 돌리ㅕ 돌아왔다.

「옳지 내가 이렇게 남의 눈치를 피해가면서 도둑질을 할것이 아니라 저 신통만 배운다면 걱정없이 살겠다.

생각하고 그날밤을 편히 잤다. 아침일찍 일어나서 스님을 찾아 뵙고 통성명을 하였다. 그리고 그뒤를 따라갔다. 산재를 넘을 무렵 큰소리로 스님을 부르며 달려갔다.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세금을 내러 가는 길이요. 왜 묻소?

「예, 다른게 아니라 어젯밤 그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것이라니?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 있지 않아요. 그것」

「아니 그것이라니 알 수 없는 소리를 자꾸하면 어떻게 하나. 사실대로 말을 해보라구」

하며 스님께서 조금 언성을 높이자 도둑놈은 황송한 듯 사정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사실 저는 도둑놈인데 어젯밤 도둑질을 하러 갔다가 스님께서 황금부처가 되는 것을 보고 나도 이젠 도둑질을 그만두고 그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가르쳐 주어야지.

「스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래 시키면 시키는데로 하겠느냐?

「예, 하구 말구요. 사람이 금부처로만 변할 수 있다면 어떠한 고난도 참고 견디겠습니다.

「꼭 그렇다면 오늘부터 집에 돌아가서 나무아미타불 금부처만 관()하게…」하고 자세히 그 방법을 일러 주었다.

집에 돌아온 도둑놈은 아무 말도 없이 돌아앉아 벽만 바라보고 나무아미타불 금부처를 관했다. 그 마누라가 보니 이는 필시 정신이 돌지 않고서야 저럴수가 없다. 그전에는 돈을 벌어오면 지저라 볶아라 하고 먹고 놀고 자고 하였는데 먹는것도 자는것도 다 잊어버리고 앉았으니 뭐가 끼이지 않고서야 저럴 리가 없다.

「여보, 당신 거기서 무엇을 찾고 있어요.

「금부처를 찾고있어.

「뭐라구요. 금부처는 절에가서 찾아야지 집에서 무슨 금부처를 찾아요.」하고 야단쳤다. 그러나 저러나 남자는 아는체도 하지않고 그저 앉아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돈은 벌어다 주지않고 금부처만 찾으면 장땡인가」

중얼 거렸다.

「가만히 있어. 금부처만 찾으면 돈은 저절로 뭉탱이로 벌리게 될테니까」하고 앉아 있으니 마누라의 잔소리 때문에 공부가 제대로 안되었다. 그래서 그는 골방으로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앉아 있었다. 몇일후에 마누라가 궁금하여 찾아왔다. 그런데 사람이 없어져 버렸다. 사방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골방안을 들여다 보니 골방안에 누른 금부처가 한분 앉아 있었다. 깜짝놀라 문을 벌떡 여는 바람에 도둑놈은 그만 도통을 하였다. 순간 금부처님은 간곳없고 남편이 부스스 눈을 비비고 일어섰다.

「여보, 당신 어찌된 일이요?

「아무것도 아니여. 금부처가 곧 나로구만」

金부처가 나와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고향가는 수행의 결과이다.

 

 

 

() 이익을 말함(결론

 

(27) 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끝없이 쓰고쓰는 다라니 무진보로

  

(28) 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

한바탕 불국토에 법왕궁을 꾸미고서

  

(29)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宋)

중도의 해탈좌에 앉으면 깨달으리

 

(30)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예부터 그랬었네 부동이 부처였네 

 

강론 (27) (28) (29) (30) 구절까지 합론

 

(27) 이 다라니가 무진보배가 된다.

(28) 실상의 불국토에 보배궁전 꾸미고서.

(29) 몸이 실제로 중도상에 앉았으니.

 

이는 유무양번(有無兩邊) 즉 세상만물이 무너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고집과 세상만사는 아주 허무하다는 고집을 초월하고 마음가는 곳과 말길이 끊어진 경계에 머문다는 뜻이다.

 

(30) 옛적부터 부동하는 것은 부처님이라 하네.

 

마지막 이 네구절은 수행(修行)의 이익을 밝히는 부분이다. 그 이익이란 본래부터 우리들 자신속에 간직되어 있는 참다운 나를 되찾아 가자는 것이다. 그 참다운「나」란 의상조사가 되돌아가기를 염원했던 이름마저도 없는 참된 곧「진리의 고향」이며 원효성사가 말씀하는 한마음고향(一心之源)이다. 이것은 곧 법성(法性)의 그 자리며 부처님의 세계이다.

 

「진기(眞記)」에서는 실보전(實寶殿)과 중도상(中道床)을 다음과 같이 풀이 하였다.

「실보전」이라? 부처님 세계의 바다이다.

「궁좌실제중도상」이란? 일승(一乘)에 도달한다는 말이다.

마침내 도달한「진리의 고향」 그것은 결코 어느 먼 하늘에 있는 별다른 세계가 아니다. 거기는 내 본래의 자리일 뿐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본래의 고향」으로 되돌아 간 것 뿐이다. 그래서「구래부동명위불」이라고 한 것이다.

진기(眞記)에는 이것을 비유하였다.

한사람이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꿈속에 삼십여개의 정거장을 거쳐 돌아 다녔다. 그 꿈을 깨고보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냥 누워자고 있지 않는가.

이처럼 근본인 법성(法性)으로부터 30구절을 거쳐서 다시「법성(法性)」에 왔지만 결국은 부동한 그 자리일 뿐이다.

세존께서 다음같은 설법을 하셨다.

아버지와 집을 버리고 나간 어린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낯선 타향 외국을 흐르고 흘러서 이미 30년이 지나갔다. 세월은 덧없이 지나가고 나이는 40고개에 들어 섰지만 그의 생활은 궁할데로 궁해서 사방으로 분주히 돌아 다니며 일자리를 구해 가까스로 입에 풀칠을 해가고 있었다.

한편 외아들을 잃어버린 그의 아버지는 깊은 근심에 잠겨 사방으로 소년의 간곳을 찾아 보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잡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도시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혹시 자기 아들이 들어 올는지도 모른다는 가냘픈 희망을 품고 화화생활중에서도 늘 쓸쓸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재산은 몇백억 몇억조인지 수 많은 보배가 창고에 가득 차 있었고 많은 시봉하는 사람들게 떠받들리어 지냈다. 넓이 여러나라와 무역을 하여 그의 집은 손님과 상인들이 언제나 저자를 이루었고, 이익금도 막대했다. 그래서 항상 국왕에게 사랑을 받고 대신과 부호가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야말로 무엇 한가지 부족한 것이 없는 신세였다.

그러나 아무리 재산이 많고 세력이 있어도 간곳을 알 수 없는 아들을 생각하는 어버이의 마음은 세월이 감에따라 나날이 더해 갈 뿐이다.

이때 집을나간 그의 아들은 이나라 저나라, 이 도시 저 도시로 흘러 다녔다. 그의 발길은 이상스럽게도 고국으로 들어서서 고향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다하지 않은 부자의 인연 때문일까? 마침내 그는 자기 아버지인 장자의 집 문앞에 이르렀다.

그때 장자는 사좌상에 앉아 천하부귀를 자랑하고 있었다.

대문앞에 들어선 아들은 집이 크고 또 주인의 위엄이 있고 호사한 모양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이 사람은 나라의 왕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고 갑자기 겁이났다.

「내가 왜 이런곳을 왔을까? 여기는 나같은 사람을 고용할 집이 아니다. 어름하고 있다가는 강제로 붙들어다 일을 시킬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그 집을 급히 떠난다.

의좌에 앉아서 이 사나이를 바라보고 있던 장자는 어릴때의 모습을 생각해 보고 장성한 아들의 모습을 속으로 상상해 보다가 갑자기 이상한 충격을 받아 지금 대문밖에 서있는 저 사나이가 자기의 아들임을 깨달았다. 돌아서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내재산을 상속받을 사람을 찾아냈다. 이제 내소원은 이루어 졌다하고 생각한 장자는 곧 옆사람에게 명하여 아들을 뒤찾게 했다. 명령받은 사람들이 달려가서 아들을 붙잡았다. 아들은 깜짝놀라「까닭없이 나를 붙잡는 것은 죽이려는 것임이 틀림없다. 나는 왜 이런꼴을 당해야만 한단 말인가?」생각하고「나는 아무것도 나쁜짓을 하지 않았는데 왜 잡습니까? 놓아 주십시요.」하고 울부짖다가 기절해서 쓰러졌다. 이 모양을 보고있던 아버지는 하인에게 일렀다.「이제 그 사나이를 빨리 정신을 차리게 하여라.

장자는 자기 아들이 오랫동안 불우하게 지냈기 때문에 변한 모양을 보고 자기 아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지금 내가 네 아버지다라고 일러주어야 믿지 않을 줄 알았기 때문에 하인을 시켜 깨어난 아들에게「너를 놓아 줄것이니 이 집에서 우리와 함께 쓰레기도 치우고, 변소도 청소하고, 마루도 닦는거요. 품삯은 다른이의 갑절을 받을 수 있고.」아들은 이말 듣고 그런 일이라면 자기에게 알맞다 생각하고 두사람을 따라가서 품삯을 미리받고 청소부로 고용되었다. 그는 날마다 온집안 청소를 했다. 그 아버지인 장자는 이렇게 변해버린 자기아들의 모습을 볼수록 측은했다. 장자는 일부러 때가 낀 옷으로 갈아입고 청소기를 들고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말을 붙였다.

「부지런히들 일하는군」하며 장자는 한걸음 그의 아들에게 접근하여 말했다.

「이봐 젊은이. 너는 여기서 일해라. 품삯도 더 줄테니…. 나는 네가 보는바와 같이 늙었지만 너는 아직 젊다. 나는 오늘부터 너를 자식처럼 대하겠다.」이리하여 장자는 곧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아들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로부터 장자는 아들에게 십년동안 집청소부를 시켰다. 십년이란 세월은 두사람의 마음을 융합시켜서 서로 아무런 거리낌이 없게 되었다.

「나는 이처럼 너를 믿고 있는 것이니 너도 내마음을 살펴서 모든일에 실수가 없도록 해다오.

다시 얼마를 지난뒤 아들의 마음은 깨달은바 있어 장자는 곧 자기의 친아버지임을 알았다. 깨달은 줄을 아는 장자는 몹시 기뻐하면서 친척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여러분들, 내말을 들어주시오. 지금 여기 있는 이 사람은 내 피를 받은 외다을 아무게요. 나의 모든 재산은 죄다 이 아들에게 넘겨준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린다. 모든 재산의 출납은 또한 이 아들의 자유라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라오.

장자의 오랜 소원은 이루어져서 그 둘이 부자간임을 명백히 했다.

이 설화의 내용을 비례하여 보면「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로써 법계를 장엄했듯 거부 장자가 중도상에 앉아보니 잃었던 핏줄이 부자상봉(夫子相逢)하고 가업(家業)을 전하였다. 본래불(本來佛)의 진면목(眞面目)이 여기에서 통하는 소식!

의상조사는「구래부동명위불」의 뜻을 요약해서 다음같이 풀이했다.

「가고가도 본자리에 있고, 오고와도 떠난 그 자리에 있다.(행행본처(行行本處)요 지지발처(至至發處)로다)

지금까지 법성게(法性偈)를 중심하여 의상조사의 화엄사상을 대강 더듬어 보았다. 의상조사의「법계도」는 이백열자(210)의 시문(詩文) 4()의 도장에 합친 하나의 인장(印章)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상징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깊고도 묘하고 넓은 것이다.

 

 

 

 

 

 

출처 :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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