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香

사념처 수행

똥하 2012. 3. 20. 16:11

수행하는 네 가지 대상.

몸을 부정한 것으로 아는 신념처(身念處),

감수(感受)하는 모든 것이 고통인 것을 아는 수념처(受念處),

마음은 무상한 것임을 아는 심념처(心念處),

법(法)은 무아(無我)인 것을 아는 법념처(法念處)를 이른다.

원어 사념처관 (四念處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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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처(四念處)란 무엇인가?<1> -  박태원 교수


지난번에 설명한대로 정념은 한국어로는 ‘올바른 지켜보기’ 혹은 ‘올바른 알아차리기’라 하고,

사념처는 ‘지켜보아야 할 네 가지 것들’이라 하겠습니다.

사념처, 즉 ‘지켜보아야 할 네 가지 것들’ 가운데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신념처(身念處)입니다.

‘몸을 지켜보기’라고나 할까요. 몸과 관련된 현상들을 ‘지켜보는’수행이 신념처입니다.

그런데 사념처를 이해함에 있어서 먼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념 수행은 해탈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데,

사념처 내용 모두를 일일이 마스터해야만 해탈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념처 내용 가운데 어느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성취하면 해탈로 이어집니다.

사념처는 그 내용상 본질적으로 한맛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인 각자의 성향이나 기질적 특징 등의 개성에 따라 가장 적합한 것을 선택하여 제대로 수행하기만 하면 곧 해탈이 보장되는 것이 사념처입니다.

따라서 사념처 내용들은 우열이나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제 그 내용 하나 하나를 살펴보도록 합니다.

‘몸 지켜 보기’에 관한 부처님 설법은 ‘호흡 지켜 보기’로시작합니다. 먼저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수행자는 먼저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빈방에서 가부좌 자세를 취한 후 상체를 곧추 세우고 ‘지켜보는 마음’을 수립한다. 그리고는 지켜보면서(알아차리면서) 숨을 들이쉬고 또 내쉰다. 숨을 길게 들이쉬면서는 ‘나는 숨을 길게 들이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길게 내쉬면서는 ‘나는 길게 내쉬고 있다’고 알아차린다. 숨을 짧게 들이쉬면서는 ‘나는 숨을
짧게 들이쉬고 있다’고 알아차리고, 짧게 내쉬면서는 ‘나는 짧게 내쉬고 있다’고 알아차린다.

또 숨의 전과정을 알아차리면서 숨을 들이쉬도록 노력하고, 전과정을 알아차리면서 숨을 내쉬도록 노력한다. 몸기능을 가라앉히면서 들이쉬는 것을 알아차리고, 몸 기능을 가라앉히면서 내쉬는 것을 알아차린다.”호흡은 수행법을 설하는 모든 가르침에서 한결같이 중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오는 순간 숨을 터트리기 시작한 인간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삶을 마감합니다. 인간의 생명 현상은 호흡과 그 운명을 같이 합니다.

호흡 현상은 곧 생명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살아 있는 한 호흡과 함께 합니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지속되고, 또 생명 현상의 원천이기 때문에, 호흡은 모든 수행법에서 중시하게 됩니다.

불교 이외의 수행법 가운데 호흡을 중시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기(氣) 수련을 들 수 있습니다. 호흡을 통해 기를 단전에 모으고, 마침내는 온 몸의 기맥을 터 자유자재로 기를 운행하는 수행이 기 수련이기에, 이를 흔히 단전 호흡법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불교의 참선법에서도 호흡을 우선 주목합니다. 그런데 호흡관(呼吸觀) 혹은 수식관(數息觀)이라고도 부르는 불교의 참선법은 도교(道敎) 계통의 단전 호흡과는 그 내용과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뿌리깊은 도교 수행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극동 아시아인들은 흔히 도교 계통의 단전 호흡법과 불교의 호흡관을 혼동하여, 단전 호흡법을 참선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불교인들 가운데서도 이런 오해를 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목격됩니다.

수행자에 따라 간혹 단전 호흡법을 참선에 활용하는 경우는 있지만, 호흡관과 단전 호흡법은 전혀 다른 내용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부처님이 설하신 ‘호흡 지켜보기’의 내용을 음미해 봅시다.

부처님은 먼저 참선할장소를 언급하십니다. 그 예로 고요한 숲 속이나나무 아래 혹은 빈방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사실 참선의 본질로 본다면 장소가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고요한 산중에서나 시끄러운 시장에서나, 그 어디에서도 행할 수 있는 참선입니다. 그리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진정한
참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에 구애받지 않는 경지는 어디까지나 참선의 고수들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갓 발심하여 참선의 문에 들어서는 초심자들에게는 참선 환경이 매우 중요합니다. 초심자나 아직 참선에 힘이 붙지 않은
사람들은 환경 여하에 따라 참선이 되고 안되고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끌어당기는 유혹거리나 산란케 하는 대상들이 없는 환경이 바람직합니다. 인적이 드문 숲 속이나 나무 밑 혹은 빈방을 권하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입니다.

사실 세속의 모든 종류의 훈련이나 공부도 공(功)을 이루려면 특별한 환경이 필요합니다. 고시 공부도 그렇고 운동선수들의 훈련도 그렇습니다.

평소와는 다른 일종의 금욕적 환경 속에서라야 집중도 잘 되고 능률도 오르는 법입니다. 어떤 목적을 성취하려고 백일 기도에 들어가는 사람도 평소와는 달리 먹을 것 가려먹으며, 사람 만나는 것이나 눈으로 보는 것도 가리는 노력을 합니다.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 공부는 그에 적합한 환경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하려는 수행자는 먼저 참선에 적합한 환경을 선택합니다.

가급적 마음을 흔드는 것들이 없는 조용하고 한적한 처소에 자리잡습니다.

반드시 산속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참선 중에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면 됩니다. 요즘 같으면 전화나 휴대폰도 치워 두는 것이 좋겠지요. 적절한 장소에 자리잡은 후에는 몸 자세를 정돈합니다. 오래 앉아 있어도 피곤하거나 마음이 산란하지 않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하는 일입니다. 그 대표적인 자세가 바로 좌선하는 자세, 즉 가부좌입니다. 양 다리를 서로 포개거나 한 다리를 다른 다리 위에 포갠 후, 허리를 곧추 세우고, 어깨나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하고, 손은 엄지와 엄지 끝이 서로 가볍게 맞닿은 채 아랫배 부근 허벅지 위에 놓고, 눈은 너무 부릅뜨지 않은채 전방 앞에 둡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자세는 대표적 사례일 뿐이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험해 보니 오래 앉아서도 피곤하거나 산만하지 않을 수 있으려면 이런 자세가 권할만하다는 것이지, 누구나 반드시 이런 자세라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체 조건에 따라 자기에게 적합한 형태로 얼마든지 변형해도 됩니다.

적합한 처소에서 알맞은 자세를 취한 다음에는 ‘알아차리는(지켜보는)마음’을 수립합니다.

이미 ‘알아차리기(지켜보기)’가 어떤 국면인지를 알게 된 수행자라면 마음을 ‘알아차리기 국면’으로 돌리면 되고, 아직 ‘알아차리기’가 어떤 상태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알아차리기 국면’으로 마음을 돌리겠다는 마음가짐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의식을 호흡 현상에 집중합니다. 호흡을 주시합니다. 코끝에서 들락날락하는 숨결에 마음을 맞추고는 그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현상을 지켜봅니다. 숨을 길게 들이쉴 때는 ‘숨을 길게 들이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숨을 길게 내쉴 때는 ‘길게 내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알아차리면서 숨을 길게 들이쉬고 길게 내쉽니다.

마찬가지 요령으로 숨을 짧게 들이쉴 때는 ‘숨을 짧게 들이쉰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숨을 짧게 내쉴 때는 ‘짧게 내쉰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리면서 숨을 짧게 들이쉬고 또 내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유의할 것은, 숨을 억지로 길게 들이쉬거나 길게 내쉬려고 할 필요는 없다는 점입니다. 들숨과 날숨에 얼마의 시간이 걸려야 한다는가, 아니면 단전까지 숨이 내려가야 한다든가 하는 말들은 불교 참선법의 호흡관(呼吸觀)과는 아무 상관없는 말들입니다. 자신의 신체 조건에 따라 길든 짧든 자연스럽게 하면 됩니다. 호흡이 가쁠 때는 가쁜 대로, 차분할 때는 차분한 대로 그저 몸에 맡겨 두면 됩니다.

호흡관의 핵심은 ‘알아차리기’에 있습니다. 긴 들숨이면 ‘긴 숨이다’고 알아차리고, 긴 날숨이면 ‘긴 날숨이다’고 알아차립니다. 마찬가지로 짧은 들숨이면 ‘짧은 들숨이다’고 알아차리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가 중요한 것이지, 호흡 자체가 긴가 아니면 짧은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호흡의 들숨과 날숨을, 그것이 길건 짧건 간에 알아차리려고(지켜보려고) 하다 보면, 점차 호흡의 전과정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코끝을 통과한 들숨이 코를 지나 목과 배로 내려가고, 다시 배에서 점차 위로 올라와 마침내 코에서 나가는 과정을 연속적으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쯤 되면 몸 기능이 매우 섬세하고 차분해집니다. 호흡이 가쁠 때면 몸 기능도 덩달아 들뜨고, 호흡이 차분해지면 몸 기능도 차분해지며 섬세해집니다. 호흡은 몸 기능이나 현상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호흡의 전과정을 연속해서 알아차리는 정도가 되면 호흡 자체도 매우 차분하고 섬세해지며, 이에 따라 몸 기능이나 현상도 차분해지고 섬세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몸 기능을 차분하고 섬세하게 가라앉히는 호흡 현상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역시 ‘몸 기능을 차분하고 섬세하게 하는 호흡이다’는 사실을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호흡관의 요결은 ‘알아차리기(지켜보기)’에 있습니다.

호흡현상이 어떤 상태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긴 호흡이든 짧은 호흡이든, 더운 숨이든 찬 숨이든 가쁜 숨이든 차분한 숨이든, 그 어떤 상태이든 간에 그 호흡 현상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남방의 불교도들은
호흡관을 할 때 배를 일부러 크게 움직이기도 합니다. 숨을 들이쉴 때는 배를 의식적으로 평소보다 많이 부르게 하고, 숨을 내쉴 때는 반대로 푹 꺼지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호흡 현상을 알아차리기가 훨씬 용이하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어떻게 호흡하든 중요한 것은 ‘알아차리면서 호흡하기’입니다. 처음 참선하는 분들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호흡을 주시하며 알아차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딴 생각에 팔려 나가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제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리거나 주고받았던 말들을 기억해 내어 마음을 거기에 돌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내일 할 일들을 떠올리고는 이런 저런 궁리를 하느라 호흡을 놓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눈앞의 광경에 정신이 팔려 멍하니 넋을 놓고 바라보느라 어느새 호흡을 놓치고 있기도 할 것입니다.처음에는 누구나 이렇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아차!’하면서 다시금 주의를 호흡으로 돌려 호흡 현상을 알아차리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점차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을 때와 놓치고 있을 때의 차이가 선명해지고 세세해질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국면과 그렇지 못한 국면과의 차이가 점차 뚜렷해질 것입니다.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을 때는 마음이 현재로 돌아옵니다. 호흡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나 미래의 호흡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몸에서 진행되는 호흡 현상은 언제나 ‘지금의 일’입니다. 따라서 호흡을 알아차리는 순간은 곧 현재로 돌아오는 순간입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에 마음이 빨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리고 여기’로 마음을 돌리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현재(卽今)로 돌리는 일은 번뇌의 뿌리를 끊고 사물의 실상을 보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참선을 하면 번뇌가 사그러들고 지혜가 밝아지는 까닭도 참선이 마음을 현재로 돌아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설명을 계속하겠습니다


**이 자료는 월간 <금강>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마니주'님의 홈페이지( http://nanoomi.com.ne.kr/ )에서  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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