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香

새벽예불1

똥하 2012. 1. 31. 08:21

일체 중생의 미망을 깨워 깨달음의 세계로 향하게 하는 목탁소리로 출발한다.



그 목탁소리는 결코 잠을 깨우는 의식이 아니다. 이제 일어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다. 일주문이 공간적인 출발의 문이라면, 도량석은 시간적인 시작의 의미이다. 자비를 베풀고 법음(法音)을 전하는 깨달음의 도량을 열어서, 나와 더불어 뭇 생명있는 자들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고 깨어있는 하루를 이루기를 기원하는 수행의식인 것이다.



도량석을 끝맺음하는 동시에 불전사물이 법계을 울린다. 모두 이 법회에 참석하고 함께 예배하면서 다같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자고.



이와같이 도량석에는 나 한 몸만의 수행이 아닌 모든 중생의 수행, 나 하나의 성불이 아니라 동체대비(同體大悲)를 바탕으로 함께 성불하겠다는 지고한 정신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새벽예불의 다게(茶偈)



도량석이 끝나고 불전사물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대중들은 큰 법당안에 울려 퍼지는 소종(小鐘)이나 금고의 소리를 들으며 본존불을 향해 삼배(三拜)를 올리고, 고요히 무릎을 끊고 앉아 예불을 준비한다.



노전스님의 목탁이나 경쇠(磬釗)소리에 대중은 새벽예불을 시작한다.


아금청정수(我今淸淨水) 제가 지금 맑은 청정수를

변위감로다(變爲甘露茶) 감로의 차로 변하게 하여

봉헌삼보전(峯獻三寶前) 불법승 삼보전에 받들어 올리오니

원수애납수(願垂哀納受) 원컨대 어여삐 여기 거두어 주소서



범어에서 비롯된 ‘감로’의 원래 뜻은 불사(不死)이다.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말이다. 곧 우리 모두의 본성이자 부처님의 본성인 불성에 대한 또다른 표현인 것이다.



맑디맑은 신심, 때묻지 않은 신심이 바로 청정수이고, 그 맑디맑은 신심의 청정수로써 기필코 불사의 몸, 부처님과 같이 생사가 없는 감로의 몸을 이루겠다는 결심을 부처님께 바치오니, 원컨대 이 불쌍한 중생을 위해 본지(本地)로부터 내려오시와(垂跡), 측은히 여기는 마음(哀愍心)으로 받아주시옵소서.



청정수를 공양하는 이 다게 속에 깃 든 정신을 최대한 되살려, 참된 공양을 부처님 전에 올려야할 것이다. 공양! 불전 공양은 부처님을 위해 베푸는 것이 아니다. 나의 참 생명을 기르기 위해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오분향례(五分香禮)



마음 공부를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분간 못할 때가 많아서 낱낱이 분별하고 시비하게 된다. 따라서 종합해서 꿰뚫는 지혜(智慧)가 필요하다. 마음공부를 하되 생활이 진리(眞理)요, 법(法)이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참나가 나를 이끌어 주게끔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혜(智慧)가 끼지 않고는 중도(中道)를 쓸 수가 없고, 우리의 기본적 양심이나 상식 등 일체의 계법(戒法)이 끼지 않고는 중도(中道)를 활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계향(戒香)이 정향(定香)이고, 혜향(慧香)이 정향(定香)이다. 정향(定香)이 바로 우리의 중심이자 중도(中道), 중용을 말한다. 그래서 그 중도를 모두 한데 합쳐서 처음에는 버림으로써 얻고, 얻는 것을 얻는다는 생각조차도 없을 때 한 주먹에 꿰어들 수 있는 그런 중도(中道)가 되고 바로 ‘해탈향(解脫香)’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벗어나고 나면 바로 전부 같이 벗어난다는 뜻이다.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라 함은 우리가 부처님 앞에 예(禮)를 올릴 때 바로 자기 마음을 공부하는 뜻이다.



우리가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할 때 말로만 그렇게 노래하듯이 염불하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불러야지 입으로 불러서는 절대로 안되고, 마음에 새겨야지 머리로 굴려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계향(戒香) -계율 향



이 세상 돌아가는 도의, 의리, 질서, 문제들 모두가 계율(戒律)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계율(戒律)인 것이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려면 부처님 법에 누(累)가 되지 않게 하며 자기 자신에게 누(累)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자기한테 누(累)가 되면 은사에게 누(累)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계와 내면 세계에서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일체 모두에게 화목을 가져 올 수 있고, 더불어 나쁜 것을 녹이고 선행을 여여(如如)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기는 것이 계향(戒香)이 아닌 계향(戒香)이다.

번뇌가 아니라면 해탈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에 번뇌(煩惱)와 해탈(解脫)은 둘이 아니다.



모든 걸 안과 바깥을 다 놔라. 모으는 작업을 해라. 이 ‘정(定)’에다 놓는 작업을 해라. 이게 한마디로 ‘계향(戒香)’이다.



정향(定香) -정심 향



굳건히 내면 세계에 자성 주인공을 세우고 나쁘고 악한 것이 다가올 때는 한 생각 잘 내어 굴려서 놓고, 또 선행을 하든 좋은 일이 생겼든 감사하게 생각을 해서 굴려놓는 즉, 한구멍에다가 모아서 익어지는 것이 정향(定香)이다.



내 주장자가 엄연하게 세워져 어디를 가도 흔들리지 않는다 하게끔 됐을 때 그걸 ‘정(定)’이라고 합니다.

그게 완전히 백혀졌을 때는 인제는 그 정향속에서, 즉 말하자면 완전히 심봉이 배혀서 흔들리지 않을때는, 들이고 내는 살림살이가 여여하게 들이고 낸다 이겁니다.



혜향(慧香) -지혜 향



여여하게 들이고 내게 됨으로써 지혜가 생기고, 지혜가 생기면은, 지혜로써 여여하게 하니까 자기 말이 법이 돼서 그대로 들이고 나는 게 모두 두드러지지 않고, 또 꺼내도 줄지 않고, 지혜로운 정향에서 완전히 들이고 내는데 손색이 없으니 ‘혜향(慧香)’이 되는 것입니다.



즉, 지혜(智慧)로운 마음으로서 물질계와 내면 세계를 둘 아니게 관찰(觀察)하고 체험(體驗)하는 도리가 바로 혜향(慧香)이다. 둘로 보지 않으면서 듣고, 보고, 느끼고, 체험한다면 해탈이 오는 것입니다.



해탈향(解脫香) -내가 죽어 벗어날 향



바깥으로 다니면서 그저 보는 대로 무명에 얽매여서 헤어나지 못하는 생명들을 그냥 다 풀어주고 진화를 하게끔 하게 되니 해탈향이러는 것입니다.



더불어 같이 무명을, 묶인 무명을 풀어준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내 아픔처럼 생각하고 만물만생의 무명(無明)을 풀어 여여(如如)하게 다스려 나가는 것이 해탈향이다. 그것도 이름해서 해탈향(解脫香)이자 해탈향(解脫香) 아닌 해탈향(解脫香)이다.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나와 더불어 일체 죽어 벗어나 밝은 향



모든 것이 내 생명 아닌 게 없고, 내 마음 아닌 게 없고, 내 아픔 아닌 게 없어, 그래서 모두 하나가 돼서 묶어지면 하나로 되고, 펼치면 수만으로도 되니, 모든 것이 내가 아니 됨이 없을 때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입니다.



우주 삼라만상 일체(一切) 만물 만생을 다 밝게 보고 보살피며 바로 걸림없이 여여(如如)하고 구족(具足)하게 다스리면서 조건없는 자비로써 일체 만물 만생을 응신(應身)으로 보답하는 것이다.





한가지는 믿음이요

둘째는 전체 놓는 것입니다.


우리들 지금 놓듯이 어떤 거든지 다 놓아버리는 것이다. 다 놓게 되면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문제가 나오죠. 다 놔서 다 얻는 것이 둘째입니다.



셋째는 다 놔서 다 얻었다면 모든 일체 중생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천차만별로 달라고 하더라도 조건없이 줄 수 있는 그런 것이 완결돼야 바람을 거슬러가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냥 바람부는 대로 흘러가기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분향(五分香)이라는 것도 밖으로 향을 켜서 향이 아니라 내 마음 안으로 아름다운 향을 켜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전에 예(禮)를 올릴 때 바로 마음 공부를 하는 것이 오분향(五分香)입니다.

칠정례(七頂禮)



지혜(智慧)가 풍부해야 된다. 칠정례가 일정례가 되고 일정례가 삼정례도 되고 칠정례가 바로 삼정례도 되고 고정됨이 없다. 그러니까 백팔배를 한 생각에 일배로서 그냥 다 녹일 수도 있다. 일정례로 인해서 백팔배의 고뇌를 다 그냥 바꿀 수가 있다. 그러니 처음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절은 삼배(三拜)를 하되 우리 마음이 익어질 때까지 우리가 항상 겸손하고 ‘나’라는 그 생각의 빳빳한 것을 없애기 위해서 절을 하게 한다. 부처님이 절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시공(時空)이 없는 도리를 알기 위해서는 삼정례도, 칠정례도 일심으로서의 일배(一拜)로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 얽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 환경에 따르고 용도에 따라서 자유롭게 절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원(圓)을 굴리는 법(法)이란 원심력으로서 일 배를 할 때에 만 배도 될 수 있고 전 우주에 그냥 통할 수도 있는 것이다.


至心歸命禮 三界導師 四生慈父 是我本師 釋迦牟尼佛



삼계(三界)의 길잡이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 나의 근본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께  제 마음 다 바치옵니다.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佛陀耶衆



제 마음 다 바쳐서 시방 삼세(三世) 주인으로 걸림없는 침착한 지혜로 온 누리에 항상하여 함이 없이 떳떳하니 불타야중 이니라.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達摩耶衆



제 마음 다 바쳐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걸림없는 지혜로 온 누리에 항상한 진리를 통달하여, 한 생각에 일체를 제도하시니 달마야중 이니라.



至心歸命禮 大智文殊舍利菩薩 大行普賢菩薩 大悲觀世音菩薩 大願本尊地藏菩薩 摩訶薩



한마음의 지혜는 글 문이나 벽이 없이 보살피는 대행을 두루한 보현 보살이니, 한마음의 자비로 세상을 관해보시며 말없이 보살피시어 대원을 세움도 마음의 근본이라, 마음이 근본은 근본을 존경하는 마음 속 깊이 계시기에 일체가 마음 근본을 존경하며, 근본 마음은 일체 만물만생과 더불어 내 몸도 보살핌이니 보살마하살이니라.



至心歸命禮 靈山當時 受佛付囑 十大弟子 十六聖 五百聖 獨修聖 乃至 千二百諸大阿羅漢 無量慈悲聖衆



제 마음을 다바쳐서, 영원히 둥글어 끝이 없는 한마음 깊이 자부(慈父)를 받들어 밝히니, 시방에 한마음은 내 부모 내 형제 내 제자 아님이 없고, 시방에 육신과 마음이 공한 한마음, 스스로 청정하게 끝없이 이루니, 천이백 분이 모두 큰 한경지를 이루시어, 한마음의 능력으로 끝간 데 없이 무량한 자비를 베푸시니, 일체 중생을 거두심이라.


至心歸命禮 西乾東震 及我海東 歷代傳燈 諸大祖師 天下宗師 一切微塵數 諸大善知識



동서가 둘 아닌 한마음의 찰나찰나 나툼은 지혜로운 마음에 광력의 밝음을 끝없이 밝히심이니 마음에 등불 전하여 눈뜨게 하시이다. 작은 생명들이 모여 큰 사람되어 늙었으니 스승이라. 천하가 합하여 우뚝 솟아 공을 이루니, 한마음의 소리는 두루 높아 모두 온 게 없기에 갈 것도 없이 그대로 대심(大心)내어서 선지식이니라.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僧伽耶衆



제 마음 다 바쳐서 한마음의 지혜로운 통찰력으로 법망에 걸림 없이 찰나찰나 일체 시방삼세 다스리기에 승가야중이니라.



唯願 無盡三寶 大慈大悲 受我頂禮 冥熏加被力 願共法界諸衆生 自他一時 成佛道



오직 원하건대, (한마음은) 삼세의 보배이며, 큰 사랑 큰 자비의 뜻을 받들어 바른 마음으로 어두움을 깨고 얼음을 녹이는 가피력도 한마음이니, 온 법계 모든 중생 스스로 다같이 성불하여 길 없는 길 두루

----------------------------------------------------------------------------------------------------------------------------------------------------

새벽 3시. 엄동설한에 밤새 몸서리치던 문풍지를 뚫고 목탁소리가 방안에 스며 들었다. 문틈으로 내다 보니 스님 한 분이 목탁치고 독송하며 경내를 돈다.

산사의 하루를 여는 도량석(道場釋). 그 소리, 어쩌다 절바람들어 하룻밤 절에서 묵고가는 세속의 객손에겐 그저 특이한 ‘모닝콜’로 들릴지도 모를 일. 그러나 불법의 수행도량에서 도량석은 단순히 잠을 깨우는 의식이 아니다. 자비를 베풀고 법음을 전하는 깨달음의 도량을 열어 생명있는 모든 것이 함께 깨달음의 세계로 가기를 서원하는 성스런 수행의식이다.

전남 순천 송광사(주지 현봉스님). 달없는 그믐 하늘에 별빛이 현란하다. 가을밤 귀뚜리 울음처럼 찬연한 새벽하늘 별빛. 어둠을 뚫고 눈 맑은 스님들이 대웅보전의 법당에 모여 들었다. 법당안 맨 앞줄은 황갈색 옷의 행자. 그 뒤가 장삼가사의 스님들 자리다. 정면 제단의 금빛 부처님을 향해 방석에 무릎꿇고 앉은 스님들. 어제 그믐날 새로 깍은 머리에는 파르나니 빛이 서렸다.

“둥, 둥…”. 법고(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북)소리가 법당안을 메웠다. 목어, 운판, 범종의 울림이 뒤를 이었다. 이 사물(四物)을 울림은 사람뿐만 아니라 어울려 사는 모든 일체 만물이 함께 깨어 불법을 따라 부처가 되자는 숭고한 뜻을 담는다.

그 소리의 바다 안에서 스님들은 참회진언과 여래십대 발원문을 올렸다. 새벽예불에 앞서 참회와 발원의 기도로 스스로 수행의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다. 그 범종의 마지막 울림에 법당안 스님 오십여분이 함께 일어섰다. 새벽예불이 시작된 것이다.

3시반. 새벽예불은 청정한 마음을 차에 담아 올리는 다게(茶偈)로 시작됐다. 이어 다함께 오분향례를 외우며 절을 했다. 기필코 부처를 이루겠다는 간절한 서원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 독송 가운데 절을 하며 반복하여 외우는 구절, ‘지심귀명례’(至心貴命禮). “주머니의 안팎이 둘이 아니듯이 부처와 내가, 나와 남도 둘이 아니지요. 지극한 마음으로 참본심을 향해 내 스스로에게 절을 올리며 발원하는 것입니다.” (송광사 주지 현봉스님의 말씀).

스님 모두가 반야심경을 함께 외우고 나면 새벽예불은 끝난다. 이때가 4시. 절반쯤은 자리를 떴지만 나머지 스님은 목탁에 맞춰 금강경을 외웠다. 강원에서 공부중인 학승들이었다.

죽비 소리가 들렸다. 참선시간이었다. 참선에 이어지는 백팔배. 무릎꿇고 머리 조아리는 제배의 자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불법에 귀의하겠다는 서원의 지극한 표현이라고 했다. 새벽예불에 참가한 제가불자도 함께 백팔배를 올렸다.

10여분후. 백팔배마저 끝났다. 이제 아침공양 시간. 불가에서는 밥먹는 것까지도 수행의 한 방편이다. ‘계공다소 양피래처…’(計功多小 量彼來處·이 공양이 여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와 땀이 배어있는가를 헤아리고). 공양에 앞서 외우는 게송인데 이 소리가 들리면 스님들의 발우공양이 시작된 것이다.

불자의 공양은 발우공양 다음이다. 이날 아침 공양은 노란 호박죽에 정갈한 반찬 서너가지. 벽에 ‘공양하는 마음가짐’이라는 오관게(五觀偈)가 붙어있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건강을 유지하는 약으로 알아 진리를 이루고자 이 음식을 받습니다.’ 공양은 설걷이까지를 포함했다.

공양을 마쳤어도 산사의 밖은 아직 깜깜하다. 동이 트려면 아직도 한시간은 족히 남은 새벽. 도시는 아직도 게으른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이 시간에 사찰의 하루는 벌써 시작된지오래다. 그 아침도 어제와 그리 다름없는 세속범부의 것과는 다르다. 참회와 발원으로 번뇌를 몰아내고 용맹정진의 수행심으로 단단히 무장한 수행자의 불심 치열한 빛나는 아침이다.

-----------------------------------------------------------------------------------------------------------------------------------------------------

1. 예불하는 마음

 

경     전

      수  행  자

서분(序分)

여시아문(如是我聞)-

경(經)을 설(說)한 경위(經緯)

 새벽예불로 시작

정종분

(正宗分)

경의 내용(內容)

 사시공양과 하루

 일과생활

유통분

(流通分)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쁘하여 유포함

 저녁예불로 마무리



경전을 보면 서분(序分)과 정종분(正宗分) 그리고 유통분(流通分)으로 나뉘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수행자들도 역시 하루의 일상생활도 서분과 정종분과 유통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렇듯 경전에서처럼 수행자들도 하루의 일과생활 자체가 곧 수행과 연관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불이란 부처님께 올리는 정성스런 마음이란 뜻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도(祈禱)라고 말한다. 이러한 기도에는 세 가지의 마음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첫째는 성심(誠心)이다.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다. 경전 몇번 읽었다 지루해 하지 말고, 절 몇번 했다고 힘들다 생각하지 않는, 그리고 언제 어디에서나 부처님 계신 곳이라고 생각하고는 함부로 행동해서는 아니되는 마음을 일러 성심(誠心)이라 하였다.


둘째는 청정심(淸淨心)이다. 청정이란 마음을 맑히는 뜻이니, 마음을 맑힌다 함은 잡다한 생각, 번뇌와 망상에 가득 찬 생각에서 벗어나 오로지 부처님을 생각하고 깨달음에 오르겠다는 보리심을 발하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가진 잘못된 생각을 바뀌어야만 한다. 생각을 바꾸는 것 우리는 이것을 청정심(淸淨心)이라 한다.


셋째는 하심(下心)이다. 나라고 하는 생각에서 모든 번뇌가 시작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불교의 가르침은 나를 버리는 공부이다. 바로 그 첫 번째 과정이 하심(下心)이다. 그래서 절 입구에 써여져 있는 글귀도 입차문외막존지해(入此門外莫尊之解 또는 下)로 쓰여져 있고, 공부하는 행자들의 방에는 묵언(黙言)과 하심(下心)이 벽에 붙어 있다. 나를 버리지 않고는 공부가 될 수 없다. 세속에서도 나를 비우고 가슴을 열어야만 상대방과 대화가 이루어지듯이 부처님과 대화를 하려 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낮추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아무쪼록 자신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마음을 맑혀서, 최대한 자신을 비워 나갈 때 비로소 기도는 시작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하루 일과 생활이 경전의 서분(序分)과 정종분(正宗分) 그리고 유통분(流通分)으로 나뉜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경전에서의 서분은 그 경을 설하기까지의 여러 가지 배경과 조건이 묘사되어 있으며 정종분은 경전의 중심내용이 유통분은 모듬 사람들이 그 경의 말씀을 듣고 환희하며 경의 중심내용이 널리 유포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럼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될까? 서분인 새벽예불은 신심을 일으킨 중생들의 모임이요, 정종분은 사찰의 하루 수행은 보살들의 정진이며, 이러한 수행의 결과가 모여 오분법신향을 이루어 광명의 구름이 피어 오르듯 온 우주 법계가 해탈의 환희를 나타내는 저녁예불이 유통분이 되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새벽예불을 통하여 초발심은 신심과 기필코 성불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예불이 끝난 다음 분(分)에 따라 십신(十信)과 십행(十行)과 십회향(十廻向)과 십지(十地)의 수행을 닦아서 나아가는 것이며 저녁예불의 오분향은 법신을 완전히 회복해 가는 부처님의 등각(等覺) 묘각(妙覺) 위(位)를 증득하여 오분법신의 향을 온 법계에 가득 채우는 것이다.


여기서 참회(懺悔)라는 말을 살펴보도록 하면, 육조혜능대사는『과거의 잘못한 허물을 뉘우치는 것을 참(懺)이라 하고 다음부터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뉘우침이 회(悔)라 한다.』고 하셨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인데 마음을 깨닫지 못하여 생사번뇌에 시달리는 자신을 참회하는 것, 즉 자기 자신이 부처인 줄 모르는 것을 참회하는 것을 일러 이참(理懺)이라 하였는데『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 죄의 자성은 본래없이 마음따라 일어난 것이니)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 마음을 멸하면 죄도 역시 따라 없어지니) 죄망멸시양구공(罪亡滅時兩俱空 - 죄도 없고 마음을 멸하여 두 가지를 다 비우게 되면) 시즉명위진참회(是則名爲眞懺悔 - 이것을 이름하여 참된 참회라고 한다네)』라는 천수경의 구절이 있으며, 사참(事懺)이란 다생(多生)을 두고 지은 모든 악업으로 말미암아 현세의 업(業)을 받게 된 것을 참회하는 것을 말하는데 역시 천수경의 구절을 보면 그 뜻을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 옛부터 내가 지어온 모든 악업은)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嗔痴 - 모두 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 아닌 것 없어)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 몸과 마음과 뜻으로 생긴 것이니)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 이 모든 것을 내가 이제 참회합니다)』이렇게 본다면 마음의 향(心香)을 피어 올리기 위해서는 참회(懺悔)하는 마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속세의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출가한 초심자는 더욱 중요함은 불문가지라 할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광명은 한량이 없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그릇은 어떠한가? 부처님의 마음은 우리들의 부모님의 마음처럼 무엇인가를 원하는 중생들이 있으면 주지 못해서 걱정을 하시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많은 것을 원하고 있지만 받을 그릇이 충분치 못하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먼저 그릇을 만드는 도공(陶工)이 되자고 이야기 한다. 여기서 그릇이란 공덕(功德)을 말함이요, 도공(陶工)이란 공덕 짓는 일이다. 앞에서 우리는 하루의 일과가 곧 수행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사찰의 하루를 초발심(初發心)에서 해탈(解脫)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수행한 결과 영원한 진리의 몸인 법신(法身)을 회복하여 계율의 향기, 선정의 향기, 지혜의 향기, 해탈의 향기, 해탈지견의 향기를 피워서 광명의 구름으로 온 법계를 가득채워(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온누리에 퍼지듯)나가는 것이다. 곧 법신이 원래 지니고 있는 계(戒)정(定) 혜(慧) 해탈(解脫) 해탈지견(解脫知見)의 다섯 가지 공덕을 ‘나’ 스스로가 낮추어 그 향기로 온 법계를 맑히고 밝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심향(心香)이라고 한다.


       心香一炷起雲峰(심향일주기운봉) 

       直下淸明透碧空(직하청명투벽공)

       仰請佛法僧三寶(앙청불법승삼보) 

       降臨千葉寶蓮中(강림천엽보련중)

              심향(心香) 하나를 피워 구름 봉우리를 일으키고

              그 밑에 맑고 밝은 창공을 뚫었습니다

              우러러 불법승 삼보께 청하옵니다

              천잎 갖춘 보배연꽃 가운데 강림하소서


      香煙遍覆三千界(향연편복삼천계) 

      定慧能開八萬門(정혜능개팔만문)

      唯願三寶大慈悲(유원삼보대자비) 

      開此信香臨法會(개차신향임법회)


             향 연기 널리 퍼져 삼천대천 세계를 덮고

             정혜는 능히 팔만 법문을 여는구나

             오직 원하오니 삼보의 대 자비를

             믿음의 향(信香)으로 열어 법회에 임하게 하리


위의 두 가지 향게(香偈)에서 심향(心香)과 신향(信香)이라는 글자가 중요한 것임을 알 수가 있는데, 이 마음의 향과 믿음의 향이야 말로 비로소 삼보(三寶)를 청할 수가 있고 또 부처님과의 교감(交感)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다. 향은 스스로를 태워 몰락(沒落) 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향기를 뿜어내어 뭇 생명을 맑고 밝게 가꾸면서 자신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향은 타버린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 그 자체의 몸인 법신으로 환원될 뿐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심향(心香)하나를 태우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나를 낮추고 부처님을 향한 마음이 한결 같아야 한다는 뜻이니, 부처님을 향해서 예불(禮佛)하고 찬탄(讚歎)하며 찬양(讚揚)하고 공경(恭敬)하며 공양(供養)하고 또한 나 자신을 죄업(罪業)을 끊임없이 참회(懺悔)하면서 결국은 나도 부처가 되어야 겠다는 원(願)을 세우는 것, 이것이 바로 초발심자(初發心者)가 해야될 중요한 일인 것이다.


부처님께 올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두 가지 나누어 살펴보면 그 첫 번째로 능례(能禮)이니 능례(能禮)란 예배하는 중생의 마음이요, 두 번째는 소례(小禮)이다. 소례(所禮)란 예배받는 부처님이니 우리들의 부처님 향한 마음에 성심(誠心)이 깃들고, 최선을 다해 마음을 맑히며(淸淨心), 한없이 자신을 낮추어(下心)나갈 때 그때를 일러 비로소 감응(感應)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마치 골짜기에 소리가 울리면 그기엔 반드시 답하는 메아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열심히 기도(祈禱)하면 반드시 불보살의 가피(加被)가 함께할 것이다.

---------------------------------------------------------------------------------------

2. 새벽예불


한국에서는 모든 사찰에서 새벽 3시를 기하여 일제히 도량석(道場釋)을 시작으로 하루 일과가 시작이 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새벽 3시일까?

그것은 새벽 3시가 가장 어둠이 정점에 이러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3시를 기점으로 어둠에서 밝음으로 바뀌는 시간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새벽 3시에 도량석(道場釋)을 함으로써 모든 사물을 깨우고 나도 깨우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도량석에는 세 가지의 깊은 뜻이 있는데, 첫째는 깨운다는 의미이다. 어둠의 미망에서 깨어나고, 잠들어 있는 나의 불성을 깨우고, 그리고 일체중생을 깨우는 것이다. 둘째는 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언제나 열려 있을 것 같은 일주문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 도량석을 통하여 문을 활짝 열어야 육도의 모든 중생들이 마음껏 들어 올 수가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초청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불보살은 물론 육도의 모든 중생을 자비도량(慈悲道場)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렇게 도량석이 끝나면 본격적인 중생들을 초청하기 위해서 준비된 것이 바로 불전(佛典) 사물(四物)이다. 먼저 범종(梵鐘)을 침으로서 하늘중생을 초청하는데 새벽에는 33번을, 저녁에는 28번을 친다.

그 다음이 법고(法鼓)를 침으로서 육지에 살고 있는 모든 중생을 초대하고, 운판을 침으로서 하늘을 나는 중생들을 초대하며, 목어를 침으로서 물속에 사는 중생을 초대하게 된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불전사물의 초청연주가 끝나면 법당안에 있는 작은 종을 치게 되는데, 이는 지옥중생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도량석을 통하여 중생을 깨워 이곳 자비도량으로 모든 중생들을 초대한 후에 이제부터 서원을 세우게 되는 것이 바로 다게(茶偈)이다.

  

아금청정수 변위감로다 봉헌삼보전 원수애납수(세번)

我今淸淨水 變爲甘露茶 奉獻三寶展 圓須哀衲受


‘내가 무슨 재주가 있어 청정수를 감로다로 변하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의심을 할 수도 있지만 그 뜻을 새겨보면 우리들의 간절한 서원이 들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감로(甘露)’라는 말은 불교용어로 불사(不死)라는 말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새벽예불에서 올리는 다게는 다시는 생사윤회를 하지 않겠다라고 하는 서원을 부처님께 올리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서분(序分)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예불을 부처님께 올리는 것이니 어찌 소흘이 할 수 있으며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면 예불문을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예불문(禮佛文)은 삼귀의(三歸依)를 근거(根據)하여 의례화(儀禮化)한 것이다. 삼귀의(三歸依)는 佛. 法. 僧 삼보(三寶)의 삼귀의다. 삼귀의의 류형(類形)은 "부처님께 귀의(歸依)합니다. 法에 귀의(歸依)합니다. 상가(samgha僧伽)에 귀의(歸依)합니다. " "세존(世尊)에 귀의(歸依)합니다. 法과 비구(比丘) 상가(samgha)에 귀의(歸依)합니다. "  "고타마(Gotama)와  法과  比丘상가(samgha)에 歸依합나다. " 이외에도 여러 가지의 型이 있다.


부처님께 예배드리는 의의(意義)를 달마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신다.


{예배라 함은 마땅히 법(法) 답게 해야 한다. 이치의 본체는 안으로 밝고 일의 겉모습은 밖으로 변하거든 이치는 버릴 수 없거니와 일에는 드러난 것과 숨은 것이 있느니라. 이런 이치를 이해하면 비로소 법에 의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대체로 예라 함은 공경한다는 뜻이며, 배라 함은 굴복한다는 뜻이다. 참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켜야 비로소 예배라 하느니라.

공경하기 때문에 헐뜯지 못하고, 굴복시켰기 때문에 방종하지 못하나니 만일 악한 생각이 영원히 멸하고 착한 생각이 항상 존속하면 비록 겉모습으로 나타내지는 않으나 항상 예배하는 것이니라. 

활용하면 나타나고 버리면 감추어지나니, 예배를 통하여 안의 지혜가 밝아지는 일은 오직 성품과 형상이 서로 응하여야 하느니라.

만일 겉모습의 예배만을 집착한다면 안으로는 탐 진 치를 방종하여 항상 악한 생각을 일으키고 겉으로는 겉모습만을 드러내어서 거짓으로 예경하나니 어찌 진정한 예배라 하리오?  성인을 속이고 현인을 홀리는 짓이라 반드시 윤회를 면하지 못하리라.}라고 하셨다.


이렇게 새벽예불로 서원을 세우고 그 서원을 하루 일과로 수행을 해서 그 수행의 향기를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이 바로 저녁예불이다.

이것을 일러 심향(心香)이라 한다. 사람 또는 일체 중생에게는 자기 자신만의 분위기가 있다. 그리고 수행을 한 수행자에게 더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그러한 수행자에게 향기를 느끼고 나도 그러한 수행자처럼 되어야 겠다고 다짐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예불의 뜻일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 참다운 뜻을 새겨 보기위해 예불(禮佛)의 세계로  들어 가 보도록 하자.

-------------------------------------------------------------------------------------------

***五分香禮佛(오분향례)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

戒香 定香 慧香 解脫香 解脫知見香 光明雲臺 周遍法界 供養十方

무량불법승 

無量佛法僧     


<해석(解釋)>


오분법신의 향을 사루어 올리오니 정법의 향기가  구름위로 솟은 대(臺)위에 빛나는 광명처럼 법계에 두루 퍼져 어느 곳 어느 때 아니 계신 곳 없으신 한량없는 부처님과 법과 스님께 공양(供養)하여지이다.

     

부처님께서 성불(成佛)하신지 오래되지 아니할 때,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존경(尊敬)할 자가 없고, 공경(恭敬)할 자가 없는 것은 괴롭다. 따라서 나는 어떤 사람을 존경하고, 그 사람에게 歸依하여 의지하고 싶지만 그러나 나 보다도 수승(殊勝)한 계온(戒蘊). 정온(定蘊). 혜온(慧蘊). 해탈온(解脫蘊). 해탈지견온(解脫知見蘊)을 갖춘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깨달은 法(dhammo maya abhisambuddho)을 존경(尊敬)하고 공경(恭敬)하여 주(住)하리라"  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계온. 정온. 혜온. 해탈온. 해탈지견온은 "오분법신"을 말한다.

존중경(尊重經)에는 "계(戒). 삼매(三昧). 지혜(智慧). 해탈(解脫). 해탈지견(解脫知見)"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분향을 태워서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이유에 대하여  [관심론(觀心論)]에서 달마스님은 다음과 같이 說하고 있다.

{ [향을 피운다 ]는 것은 또한 세간의 형상 있는 향이 아니라 진리(眞理) 자체(自體)의 정법(正法)의 향이다. 모든 더러운 냄새를 물리치고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의 악업(惡業)을 끊어서 모두 소멸(消滅)시킨다. 바른 法의 향이라는 것에 다섯 종류가 있다.


첫째는 계향(戒香)이니, 모든 惡을 끊고 모든 善을 닦는 것이다.        

둘째는 정향(定香)이니, 결정코 大乘의 마음을 믿어서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셋째는 혜향(慧香)이니, 항상 몸과 마음을 안팎에서 잘 관찰하는 것이다.


넷째는 해탈향(解脫香)이니, 능히 온갖 고통의 원인(原因)인 무지(無知)의 결박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다섯째는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니, 모든 존재의 실상(實相)을 알아차려 깨어있음이 항상하여 무명(無明)의 장애(障碍)를 걸림없이 통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향이 가장 높은 향이라 하여 세상에서 견줄 것이 없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에 날마다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지혜의 불로서 이와 같이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진리의 향을 사루어 십방(十方)의 온 우주(宇宙)에 항상 머무시는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라] 하셨거늘, 요즘의 중생들이 둔하고 어리석어서 부처님의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하고 오직 밖의 불로서만 세간의 침단과 훈육등 형체있는 향을 사루어 福의 결과를 희망(希望)하니 어찌 모든 괴로움을 소멸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리요. }

                                          

위의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의 다섯 가지를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 또는 줄여서 오분향(五分香)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오분향은 부처님을 위시해서 모든 깨달은 분들이 갖추고 있는 광대한 무량공덕을 가리키는 것이다.

  

공덕(功德)을 크게 말해서 만행(萬行), 만덕(萬德)이라고 하는데, 흔히 부처님께서는 팔만 사천 가지의 공덕을 갖추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다. 그것을 줄이고 줄여서 다섯 가지로 말할 때 오분향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분향 속에는 온갖 수행의 결과가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오분향의 끝에 <향(香)>자를 붙인 것은, 옛날에는 세속에서 가장 값진 물건으로 향을 첫째로 꼽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향의 고귀함을 마음에 심는다는 데 그 뜻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분향이라고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멋진 말이니다.

<계(戒)>가 잘 실천되면 향기롭고, <정(定)>이 잘 이루어지면 또한 향기롭고, <혜(慧)>가 얻어지면 그 향기는 오래도록 남는 것이다.

처음에 나오는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의 세 가지는 삼학(三學)이라고 하여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다. 그래서 삼학은 불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삼학이란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그것은 신행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것이다. 보살의 수행 덕목인 육바라밀(六波羅蜜)도 삼학에서 발전한 것이다.

삼학의 첫째인 <계>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경계한다'는 뜻인데. 흔히 계율(戒律)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글자 모양을 잘 분석해 보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계(戒)>라는 글자는 '울타리[井]'에 창[戈]'을 들고 서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계>는 집 밖에서 창을 들고 서 있으면서 집 안을 지키는 수위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수위의 역할이란 집 안으로 들여 보여야 할 사람은 들여 보내고, 들여 보내지 말아야 할 사람은 들여 보내지 않는 일을 책임지는 것이다. 또 수위는 사람을 함부로 들여 보내지 않는다고 해서 낯선 사람이면 무조건 안 들여 보내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수위의 임무를 충분히 완수하려면 취사(取捨-취하고 버리는) 선택의 분별을 잘 할 수 있는 지혜의 안목이 있어야 한다. 수위의 역할에 미루어 볼 때 <계>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분별하여 궁극적으로는 해야 할 일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뜻이 담겨 있다.

 

오늘날 <계>의 의미는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규칙이나 질서, 사회의 규범, 도덕성 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현실에 맞지 않는 계율 자체에 너무 매달리고 집착하여 좁은 안목이 되는 것은 계율의 근본 정신에서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또 계율은 개인이나 단체의 역할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즉, 승려 집단에서 필요로 하는 계율과 신도 단체에서 필요로 하는 계율은 각각 다른 것이다.


계율이라고 해서 무조건 하지 말라는 금지의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딘다. 그 속에는 우리에게 이익되는 점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일 줄도 아는 융통성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계율을 잘 지키고, 잘 범하고, 잘 열고, 잘 막을 줄(지(止)범(犯)개(開)차(遮))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각 개인이 지켜야 할 도덕이나 규칙, 질서가 한데 모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도덕과 규칙, 질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질서나 규칙을 잘 지키면서 매사를 모범되게 행동하는 것은, 마치 물이 흐르듯 향기가 저절로 풍겨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계향(戒香)>이라고 하는 것은 계율을 잘 지키면 혼탁하고 무질서한 사회가 밝고 명랑하고 깨끗한 사회가 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저절로 향기가 풍겨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단체에 나아가든지 눈에 거슬리지 않고 물이 흐르듯 조용히 규범을 잘 지켜나가는 사람에게는 향기가 저절로 풍겨 나오게 되듯이,그렇기 때문에 <계>에가 <향>자를 붙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

 

두 번째의 <정향>은, <계향>이 잘 이루어지면 저절로 오는 것이다. 여기서 <정>은 '안정'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첫 번째의 <계향>이 각자 자기의 위치를 잘 지키는 것이라면 <정향>은 모든 것이 멈춰진 고요한 안정의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개인의 안정은 물론 집안의 안정과 나아가 사회의 안정까지를 통틀어서 <정향>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사회가 불안정한 것은 모두가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고용주는 고용주의 욕심만 부리고, 종사자는 종사자의 욕심만 부릴 때 그 결과는 마찰과 충돌이 일어나며, 그것은 불안정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정향>이란 남편은 남편의 할 일을 충분히 행하고, 아내는 아내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마찬가지로 각자가 자기의 위치를 충분히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할 때 안정이 오며 거기에는 향기가 안 날 수 없는 것이다.

 

흔히 사찰에서는 스님들이 신발을 벗어 놓은 곳에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구절이 씌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말은 ‘너의 발 밑에 잘 살펴보라’는 뜻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아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말은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잘 실행하라는 뜻이다.

일본의 어느 종파에서는『조고각하』라는 말을 보물처럼 여기며 신앙하고 있다. 그 절에서 판매하는 모든 물건마다 그 말을 풀어서 ‘한 모퉁이를 비추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나라의 보배’라고 써서 그 말이 의식 속에 배이도록 하는 것이다. 자기가 처해 있는 그 부분에 충실한 사람은 바로 나라의 보배라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그 말뜻을 이해하며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처해 있는 한 모퉁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 부분만 잘 비추면 그 사람은 보배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잘 할거라고 해서 남의 자리까지 참견하는 것은 욕심에 불과하다. 자기 임무에 충실하고 자기 자리를 잘 지키는 데서 모든 안정은 찾아지는 것이다.

<정향>이란 말의 뜻은 바로『조고각하』라는 한 마디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가 처한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잘 지키는 사람은 결국 안정을 얻을 것이며, 그런 사람에게서 저절로 향기가 뿜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중국의 어느 시인이 쓴 수필에 ‘안면문답’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입, 코, 눈, 눈썹’의 문답이다. 서로 서로의 얼굴을 보면 잘 알겠지만, 대체로 사람얼굴의 제일 밑에 있는 것이 입이고, 그 위에 코, 그 위에 눈, 제일 위에 있는 것이 눈썹이다. 입의 불평, 코의 불만, 눈의 불복은 이 눈썹 밑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눈썹의 존재가치를 의심했던 것이다. 입, 코, 눈들이 눈썹을 향해서 ‘어째서 너는 우리들 위에서 그처럼 거만을 부리고 있느냐. 대체 너는 무슨 역할을 한단 말이냐?’하고 눈썹에게 힐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썹의 대답이 참으로 재미있다. ‘과연 너희들은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식물을 먹고 호흡을 하고, 사물을 바라 보고하는 그 수고스러움에는 정말 감사하고 있네. 그러나 이제 새삼스럽게도 너희들이 ‘네가 하는 역할은 무엇이냐?’하고 물어 보니,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되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고 있으니 대답할 수가 없군. 다만 조상 대대로 여기 이렇게 있어서 밤낮으로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 그저 열심히 내가 있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네. 너희들은 자랑 할만한 그 무엇을 각기 다 가지고 있겠지만 나에게는 자랑 할만한 것이 없네. 그래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묻는 데 대답할 말이 없구먼.’ 했다.

 

끝으로 작가는 다음과 같은 말을 첨부해 두었다. ‘나는 오늘까지 입과, 코와, 눈의 마음으로 살아왔다. 금후로는 눈썹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겠다.’ 참으로 우스운 얘기 같지만 잘 음미해 볼만한 말이다. 눈썹의 태도는 무 자각해서 자각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의젓한 자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각 없는 듯이 보이면서 역시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눈썹의 태도야말로 참으로 인연에 순종하면서, 무아에 사는 생활인 것이다.

세 번째의 <혜향>은 지혜의 향기를 뜻한다. 지혜로운 인생, 지혜로운 사람 등 지혜를 항상 강조한다. 그 어떤 것이라도 지혜가 없다면 빛을 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유한 삶을 살기보다는 지혜롭게 사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지혜가 없으면 잘못 쓰여질 수가 있다. 그러나 비록 조촐한 삶이라 하더라도 지혜가 있다면 그 삶은 밝게 빛날 수 있는 것이다. 지혜는 우리의 삶을 향기롭게 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자비와 지혜를 일러 양족존이라 하는데, 자비는 복덕을 쌓아가는 것이라면 지혜는 올바른 생활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비와 지혜라는 표현 대신에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하여 항상 지혜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지혜가 바탕이 되어야 올바른 자비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는 <계>와 <정>이 마련되면 저절로 얻어지는 삼학 중의 맨 마지막에 놓이는 덕목이 된 것이다.

삼학의 가르침을 흙탕물에 비유할 수 있는데, 바람이 불고 돌을 던져 흐리게 된 흙탕물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더욱이 그 물은 마실 수도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살이이다. 그런 흙탕물을 맑게 하려면 우선 물이 움직이지 않고 고요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돌도 던지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아야 물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금지(止)하는 일이 바로 <계>에 해당된다. 그 다음에는 흙이 가라앉도록 조용히 기다리면 안정이 찾아오는데, 그것이 바로 <정>의 상태이다. 수면이 안정되어 고요해지면 그 물 위에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모두 비춰볼 수 있고, 맑아진 물은 마실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을 <혜>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무질서하고 혼탁해져서 엉망진창이 된 삶이 있다면 우선 질서를 바로잡아 안정을 되찾는 일을 먼저 해야한다. 안정을 되찾는 일은 해야할 일은 열심히 하고, 하지 말아야할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안정 위에 우리가 기대하는 발전된 삶을 꿈 꿀 수 있는 것이다.

계·정·혜 삼학의 실천은 개인의 인생살이나 가정생활에서는 물론 이웃과 사회에까지 그 어디에도 해당이 안 되는 곳이 없다. 그래서 불교를 한마디로 삼학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삼학은 팔만대장경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짧은 편지를 한 장 쓰려고 해도 삼학의 순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조금 전까지 누구와 다투고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다면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부터 해야한다. 지난 일을 자꾸 생각하면 마음은 끝까지 움직이게 된다. 생각을 멈추는 일이 <계>이며, 그래서 안정이 되면 <정>을 얻고, 그 다음에 <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일이든 계·정·혜 삼학의 순서로 이어져야 합니다.

삼학의 이런 뜻을 음미하면서 예불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결국 삼학이란 모든 개인적인 수행이나 가정과 사회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을 모두 멈추게 달라는 뜻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을 위시해서 가정과 사회가 안정되고, 나아가서 지혜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이다. 이런 의미에서『예불문』의 한 대목이 우리에서 주는 교훈은 참으로 엄청난 것이다.

 

흔히 삼학을 삼층집에다 비유할 수 있는데, 옛날에 어떤 어리석은 임금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 곳을 지나가다가 근사한 삼층집을 보게 되었는데, 자기도 그런 삼층집을 짓고 싶어 목수에게 집을 지어달라고 했는데, 그런데 한참 후에 가 보니 겨우 일층만 지어져 있길래, 어리석은 임금은 일층은 필요가 없고 다만 삼층만 지어 달라고 우겼다는 우화가 있다.

이 이야기는 삼학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기고 있다. 세상에서 삼층집만 짓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일층이 있어야만 이층이 존재할 수 있고, 이층을 지어야만 비로소 삼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발전과 마음의 지혜를 얻는 일이나 가정의 발전, 나아가 국가의 발전도 그와 똑 같은 이치이다. 제대로 밑거름도 닦아 놓지 않고 엉뚱하게 다른 결실을 바란다면 삼층만 갖겠다는 어리석은 임금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계·정·혜 삼학은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우리가 되새겨야할 중요한 가르침인 것이다.

----------------------------------------------------------------------------------------------------------------

네 번째의 <해탈향>에서 <해탈>은 모든 장애, 고통, 어려움, 문제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생로병사를 위시해서 집착 때문에 일어나는 개인적인 모든 문제를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문제들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우리가 부처님처럼 훌륭한 인격자가 되려면 현재의 상태에서 부단히 벗어나야 한다. 쉽게 말해서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겸손해져야 하고, 조금이라도 더 양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것을 삶 속에서 해탈의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생사해탈이 목적이라 하더라도 작은 해탈부터 실천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어떤 고정된 관념 속에서 보지말고 항상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늘 새로운 삶을 꿈꾸며, 창조적인 태도로 매 순간을 사는 것이야 말로 해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일 것이다. 그런 삶에는 향기가 안 날래야 안 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해탈을 실천하는 한 방법으로 옷 입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같은 옷이라도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외형적인 모습에만 신경을 기울이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면 외형적인 몸치장 또한 마음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대부분 수행력이 깊은 사람일수록 마음이 그 사람을 지배하지만 수양이 얕은 사람일수록 몸이 마음을 지배하게 된다. 그런 사실도 모른 채 그저 마음만 중요하고 몸은 별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이다. 절에 갈 때는 가능하면 가장 단정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가야 한다. 단정한 몸차림이면 마음은 저절로 상쾌해지게 마련이다.

 

관세음보살의 몸치장을 보면 온갖 장신구로 장엄한 것을 볼 수 있다. 또 절의 단청이나 탱화의 색깔도 대단히 화려하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인격을 형상화해 놓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관세음보살처럼 우리의 인격도 훌륭해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관세음보살님처럼 화려한 장식을 하고 오라는 뜻이 아니라 나의 인격을 완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격이란 몸과 마음을 합하여 지칭하는 것이지 단지 마음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몸은 아무렇게나 하고 있으면서 마음이 훌륭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몸이 잘 다듬어지면 마음 또한 정돈되는 게 중생의 근본 모습이다. 하찮은 옷 하나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한 가지 예로 스님들이 승복을 입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승복을 입고 있으면서 아무렇게나 행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외모 또한 마음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해탈이란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좀더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이며, 새로운 삶을 꿈꾸고, 창조하고, 구상하며,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매일 대하는 식구들도 새로운 각도에서 신선한 시각으로 본다면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늘 새로운 모습으로 현재의 상태에서 변화 발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일상생활 속에서의 해탈이다.

 

어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공부의 진척을 기대 할 수 없는 격이다. 우리가 법회에 참석하여 뭔가 배우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작은 해탈의 시작이다. 그러한 마음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정에서 주부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주부의 마음가짐이나 생활태도가 밝고 행복한 쪽으로 바뀌면 그 가정은 틀림없이 밝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부는 항상 행복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쉽게 실천할 수 있다. 또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무난히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가 전부 자신의 인생이다. 그 사이에 단 일 초라도 빼 버린다면 자기 자신의 전체 인생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전부 자기의 인생이라면 매 순간을 의욕적이고 신선한 생각으로 가득 채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늘 향상하려고 노력하는 그 마음가짐이 바로 해탈의 의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삶을 긍정적이고 새롭고 밝고 맑은 마음으로 성장시키려는 것이 진정한 해탈인 것이다.

 

인간의 일생은 한 번 밖에 없는 예술이다. 우리의 인생은 평생을 통해 자신의 예술품을 다듬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매 순간을 보다 아름답게 자신의 작품을 장식할 수 있도록 해탈의 의미를 되새기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오분향의 마지막으로 <해탈지견향>은 해탈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지견(知見)>은 ‘지혜’라는 말과도 통한다. 아울러 <해탈지견>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해탈의 경지로 이끄는 중생제도를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이 땅에 오셨으니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고(開), 보여서(示), 직접 깨달으시고(悟)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그 지견속으로 들어오게 하셨느니라(入)’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부처님의 지견이란 모든 중생이 함께 함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행하여 중도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불교는 자신의 해탈과 함께 다른 사람의 해탈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전법(傳法)을 통한 중생제도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해탈에 대한 바른 이해, 즉 <해탈지견향>이란 나와 더불어 모든 사람들의 해탈을 함께 성취하려는 교화활동을 뜻하는 것이다. 해탈에 대한 바른 견해가 섰다면 자기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바로 실천에 옮겨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이해가 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제대로 알게 되면 자연적으로 실천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둘이 아닌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앞의 <계향><정향><혜향><해탈향>의 각각 항목이 참으로 자기 것이 되어서 하나가 된 상태가 바로 <해탈지견향>이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오분향의 설명을 다시 정리하면 <계향><정향><혜향><해탈향><해탈지견향>은 그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중요한 뜻을 지니며, 그것이 또한 순서대로 실천될 때 완전한 것이 된다. 오분향에는 부처님의 모든 법문이 함축되어 있으며, 부처님과 모든 수행자들이 갖춘 무량한 공덕이므로 우리도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 오분향을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들은 평생을 통해서『예불문』의 구절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예배 드리는 것이다. 실제로 오분향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오분향은 읽고 또 읽어도 향기가 가시지 않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중요한 가르침인 것이다. 실제로 오분향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압권(壓卷)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계·정·혜 삼학을 통해 해탈하게 하며, 그 해탈을 남에게 전함으로써 해탈지견이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삼학이라 할 때의 학(學)은 단순한 글공부가 아니다. <계>를 지키고, <정>을 찾고, <혜>를 얻는 것 모두가 학(學)인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고 참선하는 사람을 공부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불자라고 생각한다면 항상 공부인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

 

'佛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벽예불  (0) 2012.01.31
예불문2  (0) 2012.01.31
무자화두(無字話頭) 드는 법 /만공선사  (0) 2011.12.24
화두와 참선/정혜화상  (0) 2011.12.24
천상천하유아독존  (0) 2011.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