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香

예불문2

똥하 2012. 1. 31. 08:45

1.

새벽예불

아금청정수 변위감로다

봉헌삼보전 원수애납수

我今淸淨水 變爲甘露茶

奉獻三寶前 願垂哀納受

 

제가 지금 맑은 청정수를

감로의 차로 변하게 하여

불법승 삼보 전에 받들어 올리오니

원컨대 어여삐 여겨 거두어 주소서

 

 

예불의 서곡

 

도량석

 완전한 휴식, 그 다음의 새벽, 모든 것을 깨우는 목탁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여리게, 차츰 크게 두드리기를 세번....  .....  .....

 어둠이 가고 밝음이 온다는 것을, 부드러운 달에서 강한 해의 기운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음에서 양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을 상징화하여, 처음에는 목탁을 작은 소리로 약하게 두드리다가 차츰 크게 두드린다.

 이것이 도량석의 시작이다.  도량을 푸는(釋) 의식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때가 새벽 3시.  수행자들은 이 시간을 중시한다.  대기 중에 정기(精氣)가 가장 충실하게 가득차 있는 시간이며, 진리와 합일(合一)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목탁소리에 천지만물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이 때부터 스님은 목탁소리에 맞춰 천手經을 독송한다.  눈을 뜸과 동시에 찾아오는 중생의 번뇌를 잠재우고, 마음을 일깨워 깨달음의 세계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꿈을 깨우고 미혹을 일깨우기 위해 법문을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千手經 이외에 의상대사의 法性偈, 혜연선사의 '발원문', '信心銘', '금강경' 등을 외우는 경우도 있지만, 千手經의 체제가 도량을 열고 풀고 깨우는 의식의 구조를 가장 완벽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에 千手經을 가장 많이 독송하고 있다.  이제 '천수경'의 순서에 맞추어 도량석의 의미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스님은 구업(口業)을 맑히는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을 외우고, 모든 신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安慰諸神眞言)'을 외운 다음 '개경게(開經偈)'를 읊는다.  그리고 대자비의 성자 관세음보살을 찬송하고, '대비심다라니(大悲心다羅尼)'로써 모든 중생들의 마음에 관음의 자비가 충만되도록 하는 것이다.

 대비심다라니는 자비와 위신의 법문이다.  모든 그릇됨을 물리치고 정법과 사랑을 일깨우는 신비의 주문이다.  이것은 도량을 맑히는 필수적인 힘이 된다.  다라니라는 함축된 언어로 구성되어 그 깊은 의미를 알수는 없지만, 그것 자체의 힘에 의해 도량은 이미 맑아져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게송으로 밝힌 것이 다라니 다음에 나오는 '사방찬(四方讚)'과 '도량찬(道량讚)'이다.

 

동방을 씻어내어 맑은 도량 이루었고

남방을 씻어내어 청량을 얻었도다

서방을 씻어내어 안락정토 이루었고

북방을 씻어내어 영원토록 평안하네

 

도량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사오니

삼보님과 천룡님네 이 도량에 오시도다

제가 이제 묘한 진언 지니고 외우오니

대자비를 베푸시어 굽어 살펴주옵소서

 

 이상의 과정을 통해 보리의 도량은 완성된다.  수행을 위한 환경은 완전히 조성된 것이다.  이렇게 조성된 도량에서 중생은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보다 먼저 다생다겁 동안 지어온 갖가지 업의 힘에 이끌린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이 문제는 오직 참회로써 풀 수 있을 뿐이다.

 스님은 계속 '참회게'를 외우고 '참회진언'을 외우며 도량 안을 돈다.  그리고 반드시 부처를 이루겠다는 결심과 함께 '여래십대발원문'을 외우고, '사홍서원'과 '삼귀의례'를 끝으로 도량석을 마친다.

 참회와 발원, 이것이 하루를 여는 도량석의 끝맺음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참회와 발원으로 시작되는 불제자의 하루가 깨달음을 향한 수행으로 일관되어야 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오늘은 기어이 도를 깨달으리다.  기필코 깨달음으로 나아가 이 도량을 석가여래의 보리도량으로 만들고 말리라. 그래서 뭇 생명있는 자들을 제도하리라.  뿌리없는 번뇌를 끊고 모든 법문을 익혀 기필코 가장 수승한 불도를 깨우치리라....."

 도량석은 결코 잠을 깨우는 의식이 아니다.  이제 일어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다.  일주문이 공간적인 출발의 문이라면, 도량석은 시간적인 시작의 의식이다.  자비를 베풀고 법음을 전하는 깨달음의 도량을 열어서, 나와 더불어 뭇 생명있는 자들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고 깨어 있는 하루를 이루기를 기원하는 수행의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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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전사물의 법어

 불전사물(佛前四物)을 갖춘 큰 사찰의 경우, 도량석을 끝맺음하는 목탁소리가 '또르르르똑 또르똑' 하고 매듭을 지으면, 그 소리의 끝을 법고(法鼓)가 받아 법음(法音)을 토하게 된다.  이 법고의 여운을 다시 운판(雲板)이 받고, 운판의 끝소리에 이어 목어(木漁)를 두드리며, 목어가 둔탁한 소리를 끝내면 범종(梵鐘)을 울리게된다.

 법고.운판.목어.범종!  이 네 가지 타악기를 총칭하여 '불전사물'이라 부른다.  이들은 각기 고유한 음색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제각기 소리를 토한다.

 법고는 퉁--투웅퉁퉁-퉁--투웅퉁퉁.........

 운판은 땅땅따앙땅......땅땅땅땅땅.

 목어는 탁탁 토르르 탁 뚜루루루...... .

 범종은 쾅 ---- 더웅 ---- 쾅---- 더응 ----- ...... .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던져보자.

 새벽예불 이전!  왜 도량석을 하고 불전사물을 쳐야만 하는가?  예불 때 '천수경'을 외우고 불전사물을 쳐도 될 터인데, 왜 하필이면 예불 전에 이를 행하는 것일까?  왜?  예불이 단순한 나 한 몸의 예배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땅 위의 중생, 하늘을 나는 중생, 물 속의 생명, 저 지옥의 죄많은 중생과 천인(天人)들까지, 모두 이 법회에 참여하고 함께 예배하면서 다같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를 바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요,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의 정신이다.

 이러한 대승의 정신에 따라 땅과 하늘과 물과 지옥의 중생을 일깨우고 참여시키기 위해 법고. 운판. 목어. 범종을 예불 직전에 치는 것이다.  실로 사물의 울림 속에는 나 한 몸만의 수행이 아닌 모든 중생의 수행, 나 하나의 성불이 아니라 일체 중생과 함께 성불하겠다는 지고한 정신이 담겨져 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법고. 운판. 목어. 범종을 치는 참된 의미가 "원컨대 이 세계 모든 중생과 더불어 자타가 일시에 부처를 이루어지이다(願共法界諸衆生 自他一時成佛道)"라고 한 예불문의 마지막 구절로 귀착한다는 것을..... .

 "꿈을 깨어, 미망을 깨어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 속으로 함께 나아가자.  진리를 설하는 법회장으로 함께 나아가자.  그리고 그 진리와 하나가 되어 다 함께 성불하자."

 사물을 치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대승불교의 정신과 대승보살도의 실천이 깊이 깔려 있는 우리나라 사원 의식의 참된 면모를 분명히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실로 큰 사찰를 찾는 사람들 중에는 새벽예불 전에 치는 불전 사물의 소리를 듣고 신심을 발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우연히 산사에서 하룻밤을 보내다가 이 사물 치는 모습을 보고 불교에 귀의한 이들도 많다는 것이다.  왜일까?

 하나의 고리처럼 연결되는 사물의 소리, 그 소리는 일심으로 엮어진 진리의 음성이다.

 맑은 마음을 가진 이는 그 소리를 단순한 타악기의 음으로 듣지 않는다.  그 소리가 중생의 미혹을 일깨우는 소리요, 모든 중생을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부르는 부처님의 법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이라면 사물의 소리와 하나가 되어, 깊이 깊이 부처님의 정토 속으로 나아가게 되리라.

 실로 도량석에서부터 예불이 시자가될때까지, 사찰 안에서는 일체 개인의 언어가 허용되지 않는다.  오직 필요한 염불과 게송만이 사물의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질 뿐 모두가 묵언으로 일관한다.

 "일어나세요."

 "법당으로 갑시다."

 이와 같은 언어를 구태여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찰 안의 모든 사람은 도량석의 목탁소리에 눈을 뜨는 것이고, 눈을 뜨면 세수를 하는 것이고, 세수가 끝나면 사물의 소리를 들으며 법당으로 나아가 三拜를 한 다음, 부처님 전에 꿇어 앉아 고요히 마음을 맑히고 부처님을 우러러보며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절 안에 있는 사람뿐만이 아니다.  침묵 속에서 예불에 참석한 이가 부처님과 하나를 이루는 그 시각!  법고의 소리를 듣고 깨어난 세간중(世間衆: 땅을 의지하여 사는 중생), 운판의 소리를 듣고 모여든 공계중(空界衆: 허공을 의지하여 사는 중생), 목어의 소리를 들은 수부중(水府衆: 물속의 중생), 범종의 28번 타종 소리를 들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28천(天) 중생, 그리고 지옥의 중생들까지 잠시 형벌을 면하여 부처님의 법회장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백팔번의 타종과 종송(鐘頌)

법고. 목어. 운판. 범종의 순으로 이어지는 범종의 마지막 타종음은 법당 안의 소종(小鐘)이나 금고(金鼓: 盤子.禁口라고도함)가 받아 새로운 종성(鐘聲)을 만든다.

 이 때는 소종 또는 금고를 백 어덟번 치게 되는데, 108타종은 곧 108번뇌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불전사물의 소리를 듣고 모여든 여러 유형의 중생, 예불에 참여한 불자들의 108번뇌를 소멸시켜 맑고 밝은 마음으로 예불을 드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108번뇌! 이것은 우리의 흩어지는 마음을 뜻한다.  하나로 모아진 마음이 아니라 바깥으로 흩어진 마음, 근원을 돌아보는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 내려가는 유전(流轉)을 뜻하는 것이다.  이 108번뇌와 깊이 결속되어 있는 삶이 중생의 삶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108번뇌가 깨달음의 도량 안에서는 강한 삼매의 힘으로 변화한다.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일심의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환멸(還滅)의 시간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무한한 능력,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이 번뇌를 따라 밖으로 밖으로 뿔뿔이 흩어질 때는 무능에 빠지고 끝없는 생사의 유전 속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번뇌 속으로 흩어진 그 마음을 하나로 모을 때 삼매의 힘은 다시 되살아나고, 원래의 무한능력이 우리에게서 한번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108타종을 통하여 108번뇌를 끊는다."

 이 108타종 속에는 번뇌를 좇아 흘러 내려가는 삶을 일심의 원천으로 돌리겠다는 의지가 숨겨져 있다.  유전이 아니라 혼멸의 삶, 번뇌 이전의 영원 생명으로 돌아가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삶, 곧 성불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번뇌는 끊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하나로 모을 때 번뇌는 저절로 사라진다.  108의 타종음(打鐘音)은 번뇌를 끊는 소리가 아니라 깊은 삼매의 음성, 진리의 음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 소리와 함께 삼매 속으로 몰입할 때 우리으. 모든 번뇌는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삼매와 호나멸과 성불!  이것이 새벽예불 직전에 108타종을 둔 까닭이다.

 종소리는 모든 중생의 각성을 촉구하는 부처님의 음성이다. 그 소리는 지옥의 고통을 쉬게 하고, 모든 귀신들을 광명의 세계로 인도하며, 꿈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정신을 일깨우는 총림(叢林)의 대호령이다.

 이 호령은 중생의 번뇌를 해탈의 지혜로 탈바꿈 시키고자 하는 자비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

 종을 치는 스님들은 이와 같은 부처님의 자비심을 이어받아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하여 낭랑한 음성으로 종송(鐘頌)을 읊는다.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

 철위산의 그 어둠에서 벗어나 모두 다 밝아지소서

 삼악도의 고통을 여의고 도산지옥을 허물어

 모든 중생이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어지이다  - 새벽종송

 

 종소리 들으면 번뇌가 끊기네

 지혜가 자라네 깨달음이 생기네

 지옥을 떠나네 삼계를 벗어나네

원컨대 성불하여 일체중생 건질지니            - 저녁종송

 

 모든 중생이여, 어두운 마음을 열어 지혜로 밝히소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때문에 생겨난 칼날 같은 마음의 지옥을 벗어나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소서.  중생이여.  가없는 중생이여....... .

 멀리 멀리 하늘 저 끝까지 울려 퍼지는 그 종소리.  깊이 깊이 땅 속 저 깊은 도산지옥까지 스며드는 그 종소리.  그 종소리와 함께 종송은 어둠과 밝음, 삼악도와 정각이 중생의 마음 여하에 달려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자, 그에게는 삼악도와 끝없는 어둠의 나락만이 있음이요,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열어 사는 이, 그에게는 영원히 죽지 않는 감로의 세계와 정각이 함께 함을 설법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하나의 고사(古事)를 인용하면서 이 장(章)을 끝맺음하고자 한다.

 

 

 수나라의 지흥(588-632) 스님은 대장엄사에 거처하면서 종을 치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

 대업 5년(609)의 일이다.  함께 있던 삼과 스님의 형은 어가를 시종하다가 도망을 쳐버렸기 때문에 행방이 묘연하였는데, 언, 날 그 아내의 꿈에 도망했던 남편이 나타나 말하였다.

 "나는 팽성에 이르러 병이 나서 죽은 다음 지옥에 떨어졌소.  그러나 다행히 대장엄사에서 울리는 종소리의 메아리가 지옥을 진동하였으므로 해탈할 수 있게 되었소.  그 은혜를 갚고자 하니 대장엄사 스님께 비단 10필을 대신 바쳐주기 바라오.

 그의 아내가 비단을 바치자 지흥스님은 대중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대중들이 어떻게 종을 쳤기에 그와 같은 감응이 일어났는가를 묻자, 지흥스님은 담담히 말하였다.

 "나는 처음 종을 칠 때, '모든 성현께서 도량을 함께 들어오시길 원하옵니다' 하는 축원과 함께 세번을 치네.  이어서 길게 종을 두드리며 또 축원하기를, '모든 나쁜 세계에 사는 중생들이 이 종소리를 듣고 다 함께 고뇌를 떠나게 하옵소서'라고 한다네."

 그 뒤로도 지흥스님은 엄동설한에 꽁꽁 얼어붙어 살갗이 트고 손바닥에 피가 엉기는 일이 하다하였지만 종치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고사 속에는 종을 치는 참 의미가 그대로 담겨 있다.  곧 종을 침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흥스님과 같은 마음 씀씀이이다.  스님의 축원이 지옥의 고통까지 소멸시켰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축원의 마음'을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아니, 적어도 사찰에서 직접 종을 치는 스님, 예불에 참여하는 사람들만이라도 종소리를 들으며 마음으로 축원을 하자는 것이다.

 "발보리심(發菩리心)하여 모두 성불하여지이다."

 발보리심!  그것은 무생사(無生死)의 진리를 깨닫겠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더 이상은 번뇌의 물살을 따라 떠내려가기만 하는 중생으로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심과 더불어 완전한 해탈자, 완전한 인격자인 부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의지 그 자체가 발보리심인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은 '나' 하나에만 한정시킬 것이 아니다.  나의 가족, 나의 이웃, 나아가서는 모든 중생에게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생명체를 향해 축원하여 보라.

 "발보리심하여 부처를 이루소서."

 이 짧은 축원이 우리의 마음을 깨달음의 마음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고, 이와 같은 축원이 '나' 자신의 것이 될 때 자성불(自性佛)은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모든 번뇌를 끊는 종소리!  종소리를 들으며 마음으로 이와 같은 축원을 외울 때 우리의 모든 번뇌는 해탈과 삼매의 밑거름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많은 불교국 가운데 유일하게 새벽 3시에 일어나 도량석을 열고 사물을 치는 우리나라 사찰이 자랑스런 전통과 함께 도량석을 행하고 사물을 치고 작은 종을 울리는 참된 정신을 되새기면서, 우리의 내면에더 일심의 보리도량을 열고 자비의 동산을 만들어 가야 하리라.  그즈음이면 正法은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할 것이고, 이 땅은 불국토로 화현할 것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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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배를 올리는 까닭

 도량석이 끝나고 불전사물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큰 법당을 에워싼 주변 전각에서의 예불이 끝나면 모든 대중들은 큰 법당으로 모여든다.  그때 비로소 법고. 목어. 운판. 범종의 사물소리를 이어받아 큰법당 안의 소종(小鐘)이나 금고(金鼓)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또한 대중들은 큰법당 안에 울려 퍼지는 소종이나 금고의 소리를 들으며 본존불을 향해 三拜를 올리고, 고요히 무릎을 꿇고 앉아 부처님을 우러러 보면서 삼보의 은덕을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모두가 꼭 알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 사항을 밝혀야만 하겠다.  그것은, "왜 삼배를 하는가?"  "불가에서 삼배를 절의 기본 數로 삼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삼배는 거룩한 부처님과 불변의 진리인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화합하면서 수행하는 僧伽를 향해 한번씩의 절을 올리는 예배법이다.  마땅히 공경해야 할 바를 향해 존경의 마음을 바치는 의식인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불자들이 알고 있는 사항이다.

 그러나 그 뒷면에 '나 스스로의 三毒을 끊고 三學을 기른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불자는 드물다.  공손히 올리는 삼배 속에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마음을 거두어, 청정한 계율과 고요한 선정과 밝은 지혜로 바꿍어 놓겠다는 결의가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속의 일을 글로 옮겨보자.

 "거룩한 불보와 법보와 승보님께 귀의하옵니다.  이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이 마음을 되돌려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을 기필코 이루오리다."

 이러한 결심으로 삼배를 하는 것이다.  불전에서 뿐만이 아니라 큰스님을 친견하면서 삼배를 올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삼배를 올리는 까닭은 절을 받는 스님이 위대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절을 받는 스님의 수행 정도나 나이의 많고 적음을 따질것 없이 삼배를 올리는 참 뜻을 새기며 절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절을 하면 한량없는 공덕을 심는 것이 된다고 한다.  절을 받는 스님은 바로 공덕의 씨를 뿌릴 수 있도록 해주는 밭, 곧 福田인 것이다. 그러므로 절을 받는 스님은 공덕의 씨를 자라나게 하는 緣에 불과하다. 어떠한 복도 스님에게는 돌아가지 않는다.  결국 복의 씨를 뿌리고 복을 거두는 이는 진실한 마음으로 삼배를 올리는 바로 그 사람일 뿐이다.

 삼배를 올리는 이는 이 사실을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이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참다운 신심으로 삼배를 올릴 때 우리의 마음은 계. 정. 혜 삼학으로 그만큼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다게(茶偈)

 소종의 마지막 울림을 받아 큰법당의 분수승인 노전(爐殿스님은 목탁이나 경쇠(磬釗)를 한 차례 쳐서 대중에게 예불의 시작을 알린다.  대중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노전스님은 모든 대중을 대표하여 새벽예불문의 첫 구절인 다게를 외운다.

 

아금청정수 변위감로다

봉헌삼보전 원수애납수

我今淸淨水 變爲甘露茶

奉獻三寶前 願垂哀納受

 

제가 지금 맑은 청정수를

감로의 차로 변하게 하여

불법승 삼보전에 받들어 올리오니

원컨대 어여삐 여겨 거두어 주소서

 

 다게!

 다게는 차를 올릴 때 외우는 게송이다.  부처님께 차를 올리면서 예불할 때는 다게를 외우지만, 차를 올리지 않고 예불을 드릴때는,.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戒香 定香 慧香 解脫香 解脫知見香)...."으로 시작되는 五分香의 글과 함께 헌향진언을 먼저 외우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새벽예불 때 다게를, 저녁예불 때 오분향문을 외우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이제 필자는 이 다게와 관련하여 평소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던 한 가지 의문을 풀어보고자 한다.

 그 의문은 청정수를 감로다로 변하게 한다는 구절에 대한 것이었다.

 정녕 예불을 하는 이가 어떠한 신통력을 갖추었기에 "내가 지금 청정수를 감로차로 바꾼다"고 하였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실로 새벽예불 때 올리는 물은 정성 들여 달인 차가 아니다.

청정수를 달여서 차를 넣고 적당히 우려내어 만든 차가 아닌 것이다.  그야말로 청정수요 그 절에서 먹는 물로 사용하는 자연수이다.  그런데 그 물을 올려놓고 '내가 차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것도 보통의 차가 아닌 甘露의 차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범어에서 비롯된 '감로'의 원래 뜻은 不死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이다.  죽음을 논하기 전의 不生不滅,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말이다.  곧 우리 모두의 본성이자 부처님의 본성인 불성에 대한 또다른 표현인 것이다.

 감히 예불을 올리는 사람의 입장으로, 그리고 자재한 신통력을 갖추지 못한 범부가 이렇게 건방진 말을 해도 되는 것인가?

 나는 참으로 오랫동안 이 의문을 풀 수가 없었다.  여러 스님들을 찾아 그 참뜻을 여쭈어보기도 하였지만 이 다게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분조차 드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의문이 풀림과 동시에, 새벽예불 때 오분향문을 외우지 않고 다게를 외우는 이유를 함께 깨달을 수 있었다.

 그 해답의 실마리는 사찰의 하루 일과가 미혹의 세계에서 성불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펼쳐놓았다는 데서 출발한다.  사찰의 하루 일과를 경전의 체계에 배당시켜보라.

 모든 경전은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의 세 체계로 갖추어져 있다.  서분에는 그 경전을 설하기까지의 여러가지 배경과 조건이 묘사되어 있고, 정종분에는 경전의 중심 내용이, 유통분에는 중심 내용이 널리 유포될 수 있도록 당부하고 그 공덕을 찬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새벽의 도량석과 사물의 울림과 새벽예불은 경전의 서분에 해당하고, 새벽예불에서 저녁예불 전까지의 일과는 경전의 본론 부분인 정종분, 저녁예불은 경전의 유통분, 곧 회향의 법회의식인 것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서분인 새벽예불은 신심을 일으킨 중생의 모임이요, 사찰의 하루 소행은 보살의 정진이며, 저녁예불은 법신을 다섯으로 나눈 오분향을 온 법계에 가득 채워 해탈의 환희를 나타내는 법회이다.

 또다시 부연하면, 새벽예불을 통하여 초발심보살은 신심과 기필코 성불하겠다는 서원을 바치고, 예불이 끝난 다음부터 分에따라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 등각위(等覺位) 등의 갖가지 수행을 닦아 나아가는 것이다.  저녁예불의 오분향은 법신을 완전히 회복해 가지는 부처님의 묘각위(妙覺位)를 증득하여 오분법신의 향을 온 법계에 가득 채우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아침에 청정수를 올려서 감로차로 바꾼다는 말의 의미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맑디 맑은 신심, 때묻지 않은 신심이 바로 청정수이고, 그 맑디 맑은 신심의 청정수로써 기필코 불사(不死)의 몸, 부처님과 같이 생사가 없는 감로의 몸을 이루겠다는 결심을 부처님께 바치는 것이다.  맑은 신심으로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하여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불사의 일심(一心)을 기필코 회복해 가지겠다는 결심을 새벽예불 때의 삼보전에 바치는 것이 바로 다게인 것이다.

 "맑디 맑은 신심과 기필코 생사가 없는(無生死) 해탈을 이루겠다는 결심을 부처님 전에 바치오니, 원컨대 이 불쌍한 중생을 위해 본지(本地)로부터 내러오시와,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받아주시옵소서."

 이것이 다게에 담긴 참뜻이다.

 불자들이여, 부디 단순히 게송을 읊는 것으로, 그 게송을 듣는 것만으로 끝내지 말자.  청정수를 공양하는 이 다게 속에 깃든 정신을 최대한 되살려, 참된 공양을 부처님 전에 올려야 할 것이다.

 공양!  불전 공양은 부처님을 위해 베푸는 것이 아니다.  나의 참 생명을 기르기 위해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이를 깊이 명심하여 청정수를 올리는 참 정신으로 올바로 깨어나서 수행한다면, 마침내 不死의 부처를 이룰 날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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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분향례(五分香禮)

 

 戒香 定香 慧香 解脫香 解脫知見香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계율의 향 선정의 향 지혜의 향

해탈의 향 해탈지견의 향이여

 

光明雲臺 周邊法界 供養十方無量佛法僧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무량불법승

광명의 구름대가 온 법계에 두루하와

시방세계 한량없는 불.법.승

삼보전에 공양올리옵니다.

 

 

오분향을 바치옵니다

 

 향공양

새벽예불이 다게로 시작되는 것과는 달리,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리는 사시마지(巳時-)와 저녁예불, 그리고 평소 예불때에는 오분향(五分香)을 외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이 오분향은 진리 그 자체인 법신의 덕을 다섯으로 나누어 올리는 향공양이라 하여 '五分法身香'이라고도 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사찰의 하루를 초발심에서 해탈에 이르는 과정으로 풀이하면, 새벽예불의 茶偈는 초발심이요 저녁예불의 오분향은 종일토록 수행한 겨과 영원한 진리의 몸인  法身을 회복하여 이 세계에 계율의 향기, 선정의 향기, 지혜의 향기, 해탈의 향기, 해탈지견의 향기를 가득 채우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곧 법신이 원래부터 지니고 있는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의 다섯가지 공덕을 '나' 스스로가 갖추어 그 향기로 온 세계를 맑히고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오분향의 근원적인 의미를 아직은 수행을 완성하지 못한 우리들에게 적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흔히들 이 오분향을 아직은 수행의 초입에 있는 중생의 측면에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곧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을 모든 불자들이 마땅히 걸어야 할 수행의 길이자 최종목표로 삼아 향을 올리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중생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오분향의 뜻을 풀어 보고자 한다.  먼저 '향(香)'에 깃든 불교적인 의미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향공양의 참 정신은 불교의 여러 의식문에 수록되어 있는 향게(香偈)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심향(心香) 하나를 피워 구름 봉우리를 일으키고

  그 밑에 맑고 밝은 창공을 뚫었습니다.

  우러러 불법승 삼보께 청하옵니다.

  천잎 갖춘 보배연꽃 가운데 강림하소서

 

  향 연기는 널리 퍼져 온 세계를 덮고

  정혜(定慧)는 능히 팔만 법문을 여는구나

  오직 원하오니 삼보의 대자비를

  믿음의 향(信香)으로 열어 법회에 임하게 하리

 

   의식문에 자주 등장하는 이 두 가지 향게에서 우리는 心香과 信香이라는 글자를 읽을 수 있다.  마음의 향, 믿음의 향....   삼보전에 올려 삼보를 청할 수 있는 향은 지극한 믿음과 맑고 밝은 마음의 향이라야 한다.  심향이라댜, 신향이라야 신성한 삼보와의 교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향은 스스로를 태우면서 좋은 향기를 바친다. 향기를 팔아 스스로를 몰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향기를 뿜어 뭇 생명을 맑게 밝게 가꾸면서 자신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향은 타버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한 진리 그 자체의 몸인 法身으로 환원된 것일 뿐이다.

  오분향을 올리는 참 뜻 또한 여기에 있다.  깊은 믿음의 향(信香), 맑고 밝은 마음의 향(心香)을 사루어서 마땅히 법신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하는 의식이 오분향이며, 그 자신이 향이 되어 진리 그 자ㅇ체의 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맹세이기도 하다.

계로써 만든 향, 선정으로 만든 향, 지혜로 만든 향, 해탈의 향, 해탈지견을 베푸는 향을 완전히 태워서 법신불의 세계로 되돌아 가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제 이 법계에 충만되어 있는 법신의 다섯 가지 향기인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의 하나하나에 대해 사라펴보면서, 참된 불자의 길과 오분향의 眞意를 새겨보고자 한다.

 

  계율의 향기(戒香)

  계향의 '계(戒)'는 불자 생활의 기본 자세로서, 나쁜 일을 모두 끊어버리고 좋은 일을 닦는 것을 말한다.  이 계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조심한다'는 말로 풀이 할 수 있다.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인가?

  첫째, 이 몸으로 손을 한번 들고 발을 한번 내딛는 것이 죄 짓는 일이 아니면 복을 짓는 일이 되기 때문에 몸조심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한마디 내뱉는 말로 복을 짓기도 하고 화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는 생각을 조심해야 한다.  머금는 한 생각 속에 복과 화가 깃들어 있고, 그 머금은 생각에 따라 '나'와 주변 환경은 다른 모습을 띠고 전개된다.  따라서 불자들은 그 무엇보다 생각을 잘 다스리고 항상 마음 단속을 하여야 한다.

  나아가 '계'에는 그릇됨을 막고 악을 멈추게 한다는 소극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모든 선을 발생시킨다"는 만선발생(萬善發生)의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어느 불자나 반드시 지키도록 되어 있는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의 근본 5계 뒤에는 자비(慈悲). 복덕(福德). 청정(淸淨). 진실(眞實). 지혜(智慧)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다.

  중생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자비심으로 뭇 생명 있는 이들을 구원하고, 도둑질을 하지 않음은 물론 남에게 두루 베풀어 복덕을 키워 나가야 하며, 사음을 하지 않음은 물론 청정을 이루어 모든 중생이 그 속에 들어와 맑게 깨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헛된 말을 떠나 진실을 이루고, 술을 먹지 않는다는 차원을 벗어나서 지혜를 발현시켜야 한다.

  우리 불자들은 단순히 몸조심을 하고 말조심을 하고 행동을 조심하여 신.구.의 삼업을 잘 다스린다고 하는 계율의 소극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마음으로 자비와 지혜를 기르고 입으로 진실을 가꾸며, 행동을 통하여 복덕과 청정행을 쌓아 갈 때 계의 향기는 저절로 널리 널리 퍼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옛스님들께서는 계율을 부처님의 행이라 정의하셨다.  바꾸어 말하자면, 지극히 평등하고 자비로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부처님의 행위가 계율이라는 이름으로 바뀐것이며, 그 계율을 온전히 행할 때 부처님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불자는 부처님을 닮고자 하는 존재들이다.  장차 부처가 될 부처님의 아들딸이다.  하지만 불자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불자가 되려면 반드시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를 받아야만 한다.

  참선은 불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닦을 수 있고, 불경은 누구든지 배울 수가 있다.  불교 바깥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참선과 불경은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율만은 다르다.  오직 계율은 불교 집안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비구계를 받으면 비구불자가 되고, 사미계를 받으면 사미불자가 되며, 보살계를 받으면 보살불자가 된다.

  계율이 있을 때 불자가 있고, 불자가 계율을 잘 지킬 때 불. 법. 승의 삼보도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불자가 가장 먼저 지녀야 할 것도 계율이요, 가장 소중히 지녀야 할 것도 계율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오분향 중에서 계향을 가장 앞에 두게 된 것이다.

  정녕, 계를 잘 지켜 허물이 없는 '나'를 이룰 때 모든 문제는 저절로 사라진다.  계를 지키라고 하는 까닭은 결코 불교를 빛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의 평화와 해탈을 위해 계를 지키라는 것이다.

  실로 계를 잘 지키면 향기가 난다.  청정한 기품이 온몸에서 우러나오고, 그 기품과 향기가 우리들 주위를 맑힌다.  바로 이러한 계의 향기를 바치는 것이 '계향' 속에 깃든 의미인 것이다.

 

 

  정향을 이룰 때

  우리 불자들은 '마하반야바라밀'이라는 구절을 즐겨 외운다.  "마하반야로써 바라밀 한다"--크나큰 지혜에 의하여 피안에 이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반야의 지혜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우리 모두가 원래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  곧 마하심에서부터 나온다.  어떻게 할 때 마하심을 개발할 수 있는가?  정(定)을 통하여 정향(定香)을 이룰 때 마하심을 가장 빨리 개발할 수 있다.

  곧, 정향은 마하심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를 보다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자.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이 하나같이 마하심을 지니고 있다고 하셨다.  무한한 능력과 영원한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는 마하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에게 갖추어져 있는 이 무한 능력과 영원 생명을 올바로 개발할 줄을 몰랐다.  오히려 밖으로 눈길을 돌려 외부의 유혹을 쫓아 다니고 자기 중심적인 삶에 집착하여 갖가지 업을 지음으로써 스스로를 창살없는 감옥 속에 가두어놓고 말았다.  무엇 하나 뜻과 같이 이루지 못하는 감옥 속의 괴로움.....

  하지만 그 괴로움 속에 영원히 빠져 있을 수만은 없다.  어떻게 하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창살없는 업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는 이 업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법문을 일평생 동안 설하셨다.  그 법문의 요지는 부자유한 삶의 감옥에 갇혀 있다 할지라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 마하심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중생들이여, 너희에게는 마하심이 있다.  그런데도 너희는 무한능력, 영원생명의 마하심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욕망을 쫓아 흘러다니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부자유한 업의 감옥에 갇히고 만 것이니라.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마하심을 개발하라.  마하심을 흩어버리지 말고 한군데로 집중하고 모아라.  집중하다보면 마음이 차츰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져서 암흑과 같은 감옥이 저절로 사라지게 되느니라.  힘써 정진하라.  힘써 마음을 모아라."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불경을 통하여 이러한 해탈법을 거듭거듭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해탈을 염원하는 우리는 무엇보다 자기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공부를 해야만 한다.  읷이 계. 정. 혜 삼학중 두번째 공부인 정학이다.

  바꾸어 말하면 '定'은 곧 선정(禪定)이다.  마음이 안정되었다는 말이다.  고요한 마음, 집중된 마음, 맑은 마음, 편협됨이 없는 마음, 바른 마음, 안정된 마음을 이룬 것을 선정이라 한다.

  이러한 선정을 이루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고요히 앉아 호흡에 모든 의식을 집중하는 방법에서부터 염불을 하거나 주문을 외우는 방법, 불경을 읽는 간경법( 看經法), 화두를 들면서 마음을 닦는 참선법 등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기도. 염불. 간경. 참선 그 모두가 선정을 이루는 공부이다.  번뇌를 넘어서서 마음을 맑히고, 三昧를 이루는 공부가 바로 '定學'인 것이다.

  실로 염불하고 기도하다가 잠깐이라도 일념삼매( 一念三昧)에 젖어들게 되면 기도성취를 이루게 되고, 경전을 열심히 보다가 문리(文理)가 터지게 되면 홀연히 지혜의 눈을 얻게 되며, 참선을 통하여 화두일념(話頭一念) 이르게 되면 도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참선. 기도. 염불. 간경....   무엇이라도 좋다.  오직 새겨야 할것은 간절한 마음, 곧 '간절 절(切)' 한 글자이다.  간절하면 반드시 통하는 법이요, 통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밝아지기 마련이니, 정향을 발현시키고자 하는 이는 '간절 切'이 한 글자를 잊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수행 도중에 일어나는 번뇌에 대한 우리의 태도이다.

  기도나 참선 등을 행하다 보면 평소에는 느끼지 못한 것 이상으로 번뇌가 많이 일어나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그들은 "번뇌 때문에 기도를 못하겠다.  참선이 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리고는 "기도도 참선도 나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새로운 수행법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번뇌의 속성이요 유혹이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서 번뇌 때문에 수행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  오히려 수행 중에 번뇌가 많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기도가 되고 있고 참선이 조금씩 되고 있기 때문에 번뇌가 많은 듯이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탁한 물이 담긴 항아리에 비유해보라.

  평소 '나'의 항아리는 생존경쟁 속에서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돈과 이성과 출세와 명에, 그리고 스스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쫓아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하지만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항아리와 항아리 속에 담긴 물이 함께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그 물이 심하게 출렁이고 있다는 것을 쉽게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참선. 염불 등의 소행을 통하여 항아리를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켜 보라.  바로 그때 항아리 속의 물은 어떻게 되는가?  항아리는 멈추었지만 물은 계속 출렁인다.  오히려 얼마동안은 평소에 느껴보지 못했던 강한 출렁임 속에 젖어들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더욱 흐르면 물의 출렁임도 차츰 멎게 되고, 물이 고요해짐에 따라 물 속의 찌쩌기가 서서히 가라앉게 되는 것이다.

]  따라서 참선. 염불. 기도 등의 소행을 할 때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히 찾아드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번뇌가 심하게 일어나 방해를 할지라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다시 간절히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 참선하면 된다.

  번뇌의 속성은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번뇌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벗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저절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집착하고 사로잡히게 되면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번뇌가 일어났을 때 다시 간절한 마음으로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게 되면 번뇌는 저절로 사리지고 집중으로 인한 삼매의 힘이 저저로 생겨나서  기도하는 이는 마음의 평화를 , 참선하는 이는 禪定을 이루어 정의 향기를 두루 뿜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원리를 깊이 알아서 번뇌와의 싸움에서 지지 않고 정향을 이룰 수 있게 되면 곧바로 혜향(慧香)도 성취할 수 있게 된다.

 

  혜향.해탈향.해탈지견향

  혜향의 '혜(慧)'는 반야(般若)이다.  반야의 산스크리트 원어는 프라즈나(prajna)로서, 마음이 밝아졌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 예지'로 풀이된다.  곧 '있는 그대로'를 비추어 볼 수 있는 지혜가 반야인 것이다.

  선정을 통하여 마음의 물결이 고요해지고, 고요함 속에서 모든 번뇌의 찌꺼기들이 가라앉으면 물은 차츰 맑아진다.  맑아진 물은 다시 밝아지고, 밝아지면 모든 것이 그대로 비칠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물 속까지도 여실히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안과 밖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볼 수 있는 지혜가 반야이다.

  옛 성인들은 말씀하셨다.

"있는 그대로를 관찰할지면 기뻐할 것도 없고 슬퍼할 것도 없다."

  실로 그러하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모든 것을 '나' 중심으로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가 불러일으킨 감정사건에 휘말려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을 수시로 걲으면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알고 받아들일 줄 알면 능히 모든 감정사건은 넘어설 수가 있다.  그야말로 반야가 있으면 자유롭고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 반야의 지혜를 통하여 영원생명, 무한능력을 갖춘 마하심이 원래부터 '나'에게서 잠시도 떠난 일이 없었다는 것을 비추어 보게 되면 모든 苦를 벗어나 解脫香을 이룰 수 있게 된다.  곧 바羅蜜多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잠깐 바라밀다의 원래 뜻을 해석해보면서 해탈의 의미를 새겨보도록 하자.

  '바라밀다'라 함은 마하반야의 힘에 의해 즐겁고 자유롭고 편안한 대해탈의 세계에 이르게 됨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바라밀다의 산스크리트 원어인 파라미타(paramita)는 파라(para:彼岸)와 미타(miat:到)의 두 낱말이붙어서 이루어진 합성어로서, 도피안(到彼岸)으로 한역되어지며, 중국및 우리나라에서 줄여서 '바라밀'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먼저 파라미타의 '파라(para)'에 대해서 살펴보자.

  파라는 피안, 이상의 세계인 저 언덕을 뜻한다.  생로병사의 고통으로 가득찬 이 세상, 참지 않고서는 살아갈수 었는 이쪽 사바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한없이 즐거운 세상이 '파라'의 세계이다.

  이 '파라'를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열반의 세계, 해탈의 세계, 극락 또는 불국정토로 풀이할 수 있다.

  그리고 파라 뒤에 분는 '미타(mita)'는 거기에 '도착한다', 그것을 '완성한다', '이룩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피라미타'라고 하면 '파라에 도착했다', '파라를 완성했다', '해탈을 이루었다'는 등의 종결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바라밀의 세계, 해탈의 세계는 결코 먼 곳에서 구하여서는 안된다.

 

불법은 바로 세간속에 있음이니

세간을 떠나지 않고 깨닫는도다

세간을 떠나 따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마치 토끼의 뿔을 구하려는 것과 같도다

 

 

  이 게송에서처럼 진정 해탈을 구하고자 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야 한다.  이 세간을 떠나, 우리의 번뇌망상을 떠난 곳에서 해탈을 구하거나 다른 이상적인 세계를 찾아가려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물러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파라의 세계를 완성시켜야만 한다.

 

 

  소설 '서유기'를 보면 현장법사를 무시고 천축국으로 가던 손오공이 갑자기 나타난 여섯 도둑과 싸우는 이야기가 있다.  도둑들을 보고 놀란 현장법사는 숨어버리고, 손오공과 도둑이 마주서게 된다.

  "이 놈, 가진 것을 모두 놓고 가거라."

  "못 주겠다면 어쩔 것이냐?"

  "네 놈의 머리를 깨트려 버리겠다."

  "그래?  깨트려라."

  내미는 손오공의 머리를 여섯 도둑이 칼로 내리치고 도끼로 찍었으나, 손오공의 돌머리는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는 것이었다.  제풀에 나가 떨어진 도둑들을 향해 손오공은 '이제 내가 때릴 차례'라고 하면서 여섯 도둑들의 머리를 여의봉으로 후려치자 모두 죽고 말았다.  현장법사가 돌아와 보니 사람이 여섯이나 죽어 있지 않은가!

  "오공아!  불법이 대자대비인 줄을 모르느냐?  불법의 제1계가 불살생인줄을 모르느냐?  사람을 때려 죽이다니."

  "햐, 조금 전에는 겁이 나서 똥줄잉 빠져라 도망을 가더니, 이제 나타나서 잔소리를 해요?"

  "오공아, 여섯 도둑을 돌이키면 육신통을 만들 수 있고, 여섯 가지 인식을 돌이키면 육바라밀을 이룰 수가 있다.  번뇌망상을 떠나서 따로 진리를 구하려는 것은 파도를 떠나서 물을 구하려는 것과 같으니라."

 

  이 현장법사의 설법처럼,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여섯 도둑(六賊: 눈.귀.코.혀.몸.마음, 곧 六根)을 되돌려 육신통을 이루고, 육식(六識)을 되돌려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이루어가야만 한다.

  실로 우리의 감각기관인 눈.귀.코 등을 바르게 쓰면 얼마든지 해탈을 보호하는 훌륭한 일들을 이루어낼 수 있다.  눈으로는 모든 것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천안통(天眼通)을 이루고, 귀로는 세간의 모든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천이통(天耳通)을 이룰수 있다.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숙명통(宿命通), 남의 마음을 읽는 타심통(他心通), 어디에나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신족통(神足通), 모든 번뇌를 끊는 누진통(漏盡通) 등을 이룰 수가 있다.

  아울러 눈이 색에 현혹되고 귀가 소리에 미혹되고 코가 냄새를 쫓아가고 혀가 맛있는 것을 찾고 몸이 좋은 감촉에 휘말리고 마음이 분별경계에 집착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눈으로 깨닫고 귀롤 깨닫고 코로 깨닫고 혀로 깨닫고 몸으로 깨닫게 되면 우리의 모든 삶은 곧바로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 禪定).. 반야(般若)의 육바라밀행으로 탈바꿈 되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불자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꾸준히 수행하다보면 마침내 마하심을 회복하여 모든 무명의 결박을 끊어버리고 영원히 생사를 벗어나는 해탈의 날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다섯번째의 해탈지견향은 해탈한 이가 항상 밝게 살피고 밝게 통달하면서 자재롭게 살아가는 삶을 뜻한다.  곧 중생교화의 향기로 가듣\ㄱ찬 삶이 해탈지견향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높은 경지를 아직 해탈의 경지게 이르지 못한 사람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그릇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언제나 고통받는 중생들과 함께 함년서 해탈지견향을 피우고 계신 관자재보살을 예로 들어 간략히 그 진의를 밝히고자 한다.  관자재보살은 바로 관세음보살이시다.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그분은 중생의 고통을 귀로써 듣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중생들이 호소하는 모든 고통의 소리를 마음으롤 보고 마음으로 듣는 분이다.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중생의 고통을 관하여 무한자비를 베풀고 중생의 영원생명을 일깨우는 분이다.

  또한 관자재보살은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는' 분이시다.

자기의 마음을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분이라는 뜻이다.

  우리도 수행하여 마음을 관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모든 중생들을 보살피는 대자대비의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지 아니할 수 없게 된다.  그 사람의 입 속에는 언제나 향기가 가득차 있기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 말은 온통 향기로 가득하여 모든 사람에게 기쁨교ㅏ 즐거움을 안겨주고,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푸근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내 이름을 듣는 이 삼악도를 면하고, 내 얼굴을 보는 이 해탈을 얻네."

  입가에는 언제나 미소를 띄우는 사람이요 가슴에는 태양을 안고 사는 사람이며, 언제나 희망과 용기가 가득차 있으니 기쁘구나!  즐겁구나!  편안하구나!  좋고 좋은 것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해탈지견이요 관자재의 묘한 작용이다.

  나아가 이 자재로운 마음잉 밖으로 밖으로 퍼져나갈 때, '세계는 하나의 꽃'이 된다.  자재로와 기쁘고 즐거운 내 마음을 따라 온 세계는 밝고 깨끗한 연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오분향 예불.  이 예불은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의 향을 태우며 일심삼보의 세계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는 의식이다.

  향은 완전히 태워야 한다.  계의 향을 완전히 태운 자에게서는 허물을 찾아볼 수 없고, 정의 향을 완전히 태운 자에게는 산란함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이기적인 생각, 일체의 주관적인 관념을 모두 비우고 오분향을 올릴 때 진리의 몸인 법신은 우리와 하나가 된다.

  오분향을 올리는 우리 불자들!  우리 모두 오분향의 참 정신을 되새기며 지극한 마음으로 예불을 올리자. 바로 그때 '영원생명. 무한능력'을 갖춘 마하심은 용솟음치고, 그 향 연기가 피어오름과 함께 마음 밭에 심은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의 씨앗이 뿌리를 내려 점점 자라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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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분향이 광명의 구름대를 이루어

 

  앞에서 우리는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으로 나누어지는 오분향에 대해 상세히 살펴보았다.

  오분향!  우리는 이 오분향을 외우면서 우리의 깊고 깊은 일심 속에 감추어져 있는 청정한 계율의 향, 고요한 선정의 향, 밝은 지혜의 향, 자유자재한 해탈의 향, 끝없는 사랑의 힘인 해탈지견의 향을 피우면서 살겠다는 강한 결심을 밝힌 것이다.  이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외운다.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무량불법승

  光明雲臺 周邊法界 供養十方無量佛法僧

  광명의 구름대가 온 법계에 두루하와

  시방세계 한량없는 불.법.승 삼보전에 공양올리옵니다.

  이를 풀이하기전에 번저 이 구절의 중심 단어인 '三寶'와 '供養'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삼보와 공양

  삼보는 불자들의 세 가지 귀의처인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이다.  바꾸어 말하면 '불. 법. 승 삼보가 바로 불교'라고 할 수도 있다.  불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삼보가 있어야 하고, 불자의 삶 또한 삼보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곧 사람들은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불자로 다시 태어나고 삼보의 은혜 아래 살다가 영원한 삼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럼 삼보는 언제 비로소 생겨난 것인가?  삼보의 성립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많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성도(成途)로부터 시작된다.

  석가모니는 35세 되던 해 12월 8일의 이른 새벽에 생로병사의 근본 원인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큰 깨달음을 통하여 더 이상은 어떠한 경계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떠한 번뇌도 일어나지 않는 적대적정( 絶對寂靜)의 경지를 실현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석가모니는 우주와 인생의 진리인 법을 깨달은 사람, 곧 부처(佛, Buddha)가 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됨으로써 이 땅에 최초로 불보가 생겨나게 되었다.

  성도한 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깨달은 진리를 한동안 혼자서만 즐기다가, 참된 법열(法悅)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지난날 함께 고행을 했던 다섯 사람의  수행자를 찾아 바라나시 교외의 녹야원으로 갔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쾌락과 고행의 양극단을 배제하는 中途와 사제. 팔정도. 십이인연등의 법을 설하였으며, 이 설법을 듣고 최초의 승려인 5비구가 나타나게 되어 불. 법. 승 삼보를 모두 갖추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 당시의 삼보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열반 이후 약간의 변화를 가져왔다.  부처님 열반 후 불상이 제작되기 전까지의 약 5백년 동안에는 석가보니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동산과 성도지 부타가야, 최초의 설법지 녹야원, 열반지 구시나가라등의 4대성지를 비롯하여, 불족적. 보리수. 법륜. 불사리탑 등을 모두 불보로 숭배하였다.  곧 부처님 생애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장소나 설법 또는 깨달음의 상징물, 특히 부처님의 유신인 사리. 치아. 모발 등을 모두 불보로 받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BC  1세기경에 이전까지 금기시되었던 부처님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허용되자 금속이나 나무. 돌 등으로 만든 불상과 종이 등에 그린 불화까지를 모두 불보로 채택하여 경배하게 되었으며,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난 뒤부터는 석가모니부처님외에도 아미타불. 미륵불. 약사여래. 비로자나불 등 교법의 說主이자 구제자이며 불자들의 귀의 대상이 되는 모든 부처님을 불보로 받들게 되었다.

  법보 또한 부처님 당시에는 석가모니께서 직접 남기신 설법으로 국한시켰다가, 열반 뒤부터는 나뭇잎. 나무껍질. 직물. 종이 등에 쓰여진 경전 모두를 포함시켰다.  그리고 '법'에 대한 정의도 확대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현실의 불안과 고뇌에서 벗어나 해탈의 이상향에 도달하게 하는 가르침, 사회전체를 평화롭고 행복한 세계로 만드는 가르침 모두를 법보라 칭하였다. 

  승보는 처음에 부처님의 출가제자에 국한되었다가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부터 민중을 교화. 지도하고 불교교단의 유지를 위해 보필하는 출가.재가불자 모두를 지칭하는 뜻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삼보에 대해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는 '대승기신론소'에서 '귀명삼보(歸命三寶)'를  풀이하면서, 삼보를 일방적으로 경배하고 따라야 할 객관적인 대상으로 보지 않고 주체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생의 六根은 一心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그 스스로 근원을 배반하고 뿔뿔이 흩어져 육진을 일으킨다. 이제 가장 귀중한 목숨을 바쳐 번뇌의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시킴으로써 그 본래의 원천인 일심으로 되돌아가는 까닭에 이를 歸命이라 하며, 그 일심이 바로 삼보이니라." 

  곧 원효대사는 일심을 삼보라고 정의하였고, 일심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불교 수행의 목표로 삼아야 함을 천명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원효대사의 일심삼보는 선종의 祖師들이 주장하는 삼보관과 그대로 통한다.

  당나라 임제스님을 비롯한 선종의 조사들은 마음 청정한 것을 참다운 부처로, 마음이 광명스러운 것을 참다운 법으로, 맑고 청량하여 어느 것에도 걸림없는 마음을 참다운 승보로 삼았던 것이다.

  이렇듯 여러가지로 해석할수 있는 삼보에 대해 예불문에서는 '시방무량불법승'이라고 하였다.  시방세계 그 어느 곳에나 한량이 없는 불. 법. 승 삼보!

  이 삼보는 시간과 공간을 모두 넘어서고 있다.  주체와 객체를 모두 넘어서고 있다.  우주 어디에나 가득한 이 삼보는 우리들 속에도 가득 충만되어 있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뿐.....

  이와 같은 삼보를 향해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예배를 드리고 공양을 올린다.  왜 공양을 올리는가?  부처님을 위해 공양을 올리는 것이 아니다.  내 육체를 수양하고 정신력을 함양시키기 위해 올리는 것이 공양이다.  곧 '공양이라는 단어 속에는 무엇인가를 바쳐서 '첨 생명을 기른다'는 뜻이 깃들어 있다.  삼보에 대해 정성을 다하는 공양을 올려 일심의 참 생명력을 기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찰에서는 '식사를 한다'거나 '밥을 먹는다'는 말을 쓰지 않고 '공양한다'는 표현을 쓴다.  "공양하십시오." 바로 그 말 속에 '음식을 먹고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위를 많이 하여 참 생명을 기르라"는 간곡한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실로 참된 공양은 일심에서 우러난다.  참된 공양은 일심을 살찌우는 것이요 우리의 참생명을 회복시키는 지름길이다.  진정한 삼보에 대한 향공양.....

 

  광명의 구름대

  그런데 참으로 묘한것이 있다.  이 오분향 예불문에서는, 처음 단순히 피워 올린 한 줄기의 향을 계향. 정향. 혜향 등의 오분향으로 바꾸더니 이제는 '광명의 구름대가 온 법계에 충만한다(光明雲臺 周邊法界)'라고 하였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지극한 정성을 기울여 삼보전에 올린 향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라 찬란한 빛을 지닌 구름으로 바뀌면서 전 우주에 가득 채워지기를 염원하고 있다.

  이 구름은 단순한 구름이 아니다.  광명을 지닌 향기로운 구름!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의 다섯 가지 광명이 뿜어져 나오는 서기로운 구름!  마침내 오분향의 향기가 빛으로 바뀐 것이다.

  빛!  빛은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빛이 없으면 이 세상이 암흑천지가 되듯이, 우리의 삶 또한 빛이 없으면 방황과 상처만 가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빛이 이르면 모든 암흑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수만년의 암흑동굴도 촛불 하나 밝히는 순간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정 우리 불자들이 행복한 삶을 바라고 깨어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의 마음에다 오분향의 향기를 심고 그것을 빛으로 발현시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 향기와 광명을 오직 '나' 하나만의 것으로 만들고자 해서도 안된다.

  법계, 곧 온 우주에 그 향기와 빛을 가득 채우고자 노력해야 한다.  나 혼자만의 삼학 수행이나 해탈이 아니라, 법계의 모든 중생과 법의 향기를 함께 나누어 가지고 진리의 빛을 함께 나누어 가지고자 해야만 한다.  법계와 '내'가 둘이 아닌 不二의 경지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올린 한줄기의 향에서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의 향기가 일어나고, 다시 그 향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광명이 온 법계의 모든 중생에게 두루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불. 법. 승 삼보전에 공양을 올리고 예불을 드려보라.  그 공양과 예불이야말로 '나

의 참생명을 기르는 일심삼보에 대한 공양이 되고 시방세계의 무량한 불. 법. 승 삼보님께 올리는 참다운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무량불법승."

  이 구절에 이어 우리는 헌향진언을 외운다.  삼보에 대한 공양의 길은 뜻을 새기며 헌향진언을 외우는 것이다.

  헌향진언 옴 바아라 도비야 훔(3번)

  '헌향진언'은 이름 그대로 향을 올리면서 외우는 진언이다.  곧 향을 올리면서 외우는 '참된 말'이라는 뜻이다.  이 진언은 범어로 되어 있다.  그리고 '옴 바라아 도비야 훔'을 풀이할 수도 있다.  "귀의하옵니다.  금강소향존(金剛燒香尊)이시여.  모든 더러움을 맑히소서"라고.

  하지만 옛부터 절집안에서는 이 진언들을 풀이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깊은 뜻이 담긴 참된 말을 굳이 풀이하다 보면 참된 말이 잘못 번역될 수 있고 깊은 뜻을 그르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문에 진언이 나오면, 해석을 하기보다는 그 진언을 외우면서 '관(觀)'을 할 것을 권하였다.

  어떻게 관하는 것인가?  입으로 헌향진언 '옴 바아라 도비야 훔'을 외우면서, 한 줄기의 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온 법계에 두루 퍼져 광명의 구름대를 이루도록 하여 시방세계 모든 불. 법. 승 삼보님께 ;공양을 올린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곧 마음으로 그려보고 머리로 그리면서 진언을 외우면 된다.

  부디 이 헌향진언을 입으로만 외우지 말고, 마음을 모아,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오분향과 삼보공양의 모습을 속으로  그리면서 외워보라.  물론 처음에는 쉽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거듭거듭 관하다보면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저절로 떠올릴 수 있게 되고, 일심삼보의 참생명을 발현시킬 수 있게 되리니......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지극한 마음

  사찰의 노전 스님 또는 한 사람의 선창자가 외우는 새벽 예불의 다게나 저녁 예불의 오분향례가 끝나면, 모든 대중이 함께 '지심귀명례'를 외우며 예배를 올린다.

  예불문에는 모두 일곱번의 '지심귀명례' 구절이 있다.  그래서 이 예불을 '칠정례(七頂禮)'라고도 한다.

  이 일곱번의 '지심귀명례'는 불. 법. 승 삼보께 올리는 예배이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부처님께, 세번째는 법보를 향하여, 네번째에서 일곱번째는 승보전에 올리는 절이다.  바꾸어 말하면 삼보에 대해 구체적이면서도 함축성 있게 설명한 짧은 글귀를 외우며 절을 올리는 삼귀의례(三歸依禮))가 예불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심귀명례란 무엇인가?

  지심귀명례!

  뭇 생명있는 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목숨이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생명이다.  이제 모든 대중은 생명을 바쳐 삼보전에 귀의한다.  단순한 귀의가 아니라 가장 소중한 생명의 원천으로 돌아가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를 올리는 것이다.  이것이 지심귀명례이다.

  지심(至心), 지극한 마음은 다른 마음이 아니다.  누구나가 나타낼 수 있는 一心이다.  하나로 모아진 마음, 모든 번뇌가 비어있는 순수한 마음이요 空한 마음이다.  그와 같이 하나로 모아진 마음, 번뇌가 완전히 비워진 마음이라야 부처님과 거룩한 진리와 화합승가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말기,  비단 장사를 하면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한 청년이 있었다.  어느 날 비단을 짊어지고 오대산의 진고개를 넘어가던 청년이 고갯마루에서 쉬고 있는데 노스님 한분이 길 옆 풀섶에 서서 꼼짝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노스님의 모습을 매우 이상히 여긴 청년은 가까이 다가서며 여쭈었다.

  "스님,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중생들에게 공양을 드리고 있는 중일세."

  "어떤 중생에게 무슨 공양을 베푸십니까?"

  "옷 속에 있는 이와 벼룩에게 피를 먹이고 있네.
 " 그런데 왜 그렇게 꼼짝도 않고 서 계십니까?"

  "내가 움직이면 이나 벼룩이 피를 빨아 먹는데 불편할 것이 아닌가."

  말을 끝낸 노스님은 발걸음을 옮겼고, 스님의 말씀에 큰 감동을 받은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스님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오대산 동쪽 봉우리 밑의 관음암에 도착한 스님은 청년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인 일로 나를 따라왔는가?"

  "저도 수행하여 스님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부디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내 제자가 되려면 내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하여야만 한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예."

  청년의 굳은 결심을 확인한 노스님은 그의 출가를 허락하고, 가장 먼저 부억에 있는 큰 가마솥을 거는 일부터 시켰다.  청년은 흙과 질을 섞어 이긴 다음 부뚜막을 만들고 솥을 걸었다.  하루가 족히 걸려 일이 겨우 마감되었을 무렵, 기척도 없이 불쑥 나타난 스님은 호통을 쳤다.

  "이놈아, 이것을 솥이라고 걸어 놓은거냐?  한쪽으로 틀어졌으니 다시 걸도록 히라."

  노스님은 짚고 있던 석장으로 솥을 밀어 내려앉혀 버렸다.  겉으로 보아서는 조금도 틀어진 곳이 없었지만 청년은 스님의 분부에 따라 불평 한마디 없이 새로 솥을 걸었다.

  그렇게 솥을 걸고 허물어 다시 걸기를 아홉번!  드디어 노스님은 청년의 求道心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솥을 아홉번을 고쳐 걸었다는 뜻에서 청년에게 '구정(九鼎)'이라는 법명을 내렸으며, 자신이 중국으로부터 동방대보살로 추앙받았던 무염선사(801-888)임을 비로소 밝혔다.

  그 뒤 어느날, 원래 글을 알지 못하였던 구정스님은 무염선사를 찾아가 간절히 여쭈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즉심즉불(卽心卽佛)이니라."

  워낙 무식한 구정스님이었는지라,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의 즉심즉불을 '짚신즉불'이라는 말로 알아듣고 말았다.

  "짚신이 불?  짚신이 부처라고?"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스승을 지극히 존경하고 있었던 구정스님이었기에 그 말을 무조건 받아들였다.

  "우리 스님은 부처님 같으신 분인데 허튼말을 했을 리 없다.  부처를 물었는데 어째서 짚신이라고 대답을 하셨는고?  짚신이 어째서 부처인고?  어째서....?"

  그날부터 자기 짚신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이 짚신이 어째서 부처인고?" 하는 생각을 놓아버릴줄 몰랐다.

  하루는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한 다음 , 짚신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짚신아, 어째서 네가 부처냐?  짚신아, 네가 어째서 부처냐?"하다가 그만 깊은 三昧에 들었다.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앉았는지 서 있는지도 모르고....  그야말로 '산도 산이 아니요 물도 물이 아닌' 삼매 속에서 사뭇 "짚신아, 네가 어째서 부처냐?" 하며 소리를 지르다가, 홀연히 짚신의 끈이 '뚝' 끊어지는 순간 廓徹大悟 하였다.

 

  도를 구하는 구정스님의 지극한 마음, 이와 같은 지극한 마음이면 통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지극한 마음이 되면 번뇌는 저절로 사라지고, 번뇌가 없을 때 부처님은 온전히 모습을 나타내며, 의심없이 받아들일때 진리는 가득 채워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의 마음이 순수하다면 그 누구와의 불협화음도 생겨날 까닭이 없다.  그야말로 불. 법. 승 삼보를 모두 갖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귀명례(歸命禮)

  부디 구정선사와 같은 지극한 마음으로 예불을 올려보라.  비록 5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 예불이 우리를 생명의 원천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생명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예배, 귀명례....

  결국 귀명례는 생명의 원천인 일심을 회복해 가지라는 말씀이다.  마음을 지극히 모아 절을 하면 저절로 생명의 원천인 일심을 회복해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하지만 중생은 나약한 존재이다.  스스로 번뇌를 일으키고 끊임없이 업을 지어 윤회의 세계를 흘러다니면서도, 스스로의 근원은 돌아볼 줄 모르는 슬픈 존재이다.  일찍이 신라의 원효대사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심 그 밖에 별다른 법이 없건만

  오직 밝지 못한 무명으롤 스스로 일심을 가리어

  갖가지 파도를 일으키고 윤회의 세계를 흘러다니네

 

  스스로 일심을 가려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 등의 세계로 흘러다니며 갖가지 고통의 파도 속에 몸을 맡기고 있는 중생.  그러나 중생의 바탕은 원래가 일심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일심은 한결같이 있는 것이다.  오직 무명이 일심을 가리고 있어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심귀명례'하여야 한다.  지심귀명례를 통하여 스스로 일으킨 무명번뇌를 흩어버려야 한다.  지심이 잘 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부질없는 분별이나 의심만은 갖지 말아야 한다.  최소한의 도라도 이루기 위해서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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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 전, 일본에 대산청만이라는 문학박사가 있었다.  그의 집에는 늙은 하녀가 함께 살았는데, 묘하게도 병든 사람을 앞에 앉혀놓고 몇 마디 중얼거리기만 하면 병이 낫는 것이었다.

  '미신임은 분명한데 병이 완쾌되다니....'

  궁금함을 떨쳐버리지 못한 박사는 어느 날 늙은 하녀를 불러 물었다.

  "당신이 외우는 주문이 무엇이오?"

  "오무기 고무기 이소고고, 오무기 고무기 이소고고를 외웁니다."

  듣고 보니 더욱 이상했다.  오무기는 보리요, 고무기는 밀, 이소고고는 두되 다섯홉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보리 밀 두되 다섯홉이라는 말에 병이 나을 깓ㄺ이 없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구절은 <금강경>에 나오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인 것 같았다.  "응당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낸다"는 응무소주이생기심을 일본 발음으로 하면 '오무소주 이소고싱'이다.  그런데 그녀는 한 스님이 '오무소주 이소고싱'이라고 하는 것을 잘못 듣고 '오무기 고무기 이소고고'라는 비슷한 음으로 늘 외워왔던 것이다.

  "그 발음은 잘못되었으니 앞으로는 '오무소주 이소고싱'이라 하시오."

  평소 존경하던 주인인 박사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녀는 다음부터 환자가 올 때마다 열심히 외웠다.

  "오무소주 이소고싱, 오무소주 이소고싱.... "

  하지만 그 진짜 주문으로는 어떠한 사람의 병도 낫게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보리 밀 두되 다섯홉이라는 뜻의 '오무기 고무기 이소고고'를 외웠다.  그러자 이전과 같이 사람들의 병이 낫는 것이었다.

  엉터리 주문으로는 병이 낫고 진짜 주문을 외우면 낫지 않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박사가 가르쳐준 것이 올바른 것이기는 하지만 많이 외우지도 않았고, 또 '이렇게 외우면 병이 나을까?',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의심이 있는 반면, 오랫동안 외워왔던 엉터리 주문에 대해서는 확신이 가득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조화요 위력이다.  따지고 분별하고 의심하기보다는 깊은 믿음으로 살아가면 문제는 차츰 사라진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일도 지극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이어가면 마침내는 결실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예불을 올리는 우리에게 정녕 필요한 것은 지극한 마음이다.  지극한 마음.... ,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암행어사 박문수(1691-1756)의 태어남도 이 지극함의 결실이었다.

 

  박문수의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이름있는 가문이었다.  그러나 박문수의 부모는 늦도록 자식을 두지 못하여 애를 태우고 있었다.  하루는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상의를 했다.

  "우리가 자식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무래도 전생에 닦은 복이 없어서인 듯합니다.  오늘부터라도 복을 지으면 틀림없이 과보가 있을 것이오."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크게 복을 짓는 일이 삼보에 대한 공양이라 생각하고, 닷새에 한번씩 돌아오는 장날마다 시장에 나타나는 스님 한분을 모셔와 대접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오직 자식 하나를 얻겠다는 일념으로 5일에 한번씩 스님을 모셔와서 성심성의껏 공양을 올렸다.

  그렇게 하기를 만3년이 되던 날, 하인이 시장으로 스님을 청하러 갔으나 그날따라 스님은 한분도 보이지 않았다.  날이 저물도록 기다리니 얼굴이 부어터지고 손과 발에서 고름과 피가 흐르는, 그야말로 문둥병에 걸린 스님 한분이 나타났다.

  데리고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다른 스님이 없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모시고 가서 대문밖에 기다리게 하고 주인에게 사정을 아뢰었다.  그러나 주인은 흔쾌히 명하였다.

  "빨리 스님을 사랑채로 모셔 오너라."

  스님이 사랑채로 들어가는데 발에서 피고름이 흘러내려 마루와 방바닥을 더럽혀 놓았다.  하지만 그들 부부는 조금도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기꺼이 음식을 드려 공양하였다.  음식을 먹는데도 수저에 피고름이 묻고 음식에도 흘러 보기 흉한 지경이었지만, 그들 부부는 조금도 싫어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  문둥이 스님이 공양을 마치고 일어나자 주인은 대문 밖까지 배웅하면서 말하였다.

  "다른 곳에 가서 우리집 사랑에서 공양을 대접받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시오."

  "당신은 다른 곳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말라."

  문둥이 스님은 이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부인이 아이를 가져 마침내 아들을 낳았고,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낳은 아이라 하여 '문수'라 이름지었으나, 성인의 이름을 그대로 쓸 수가 없어 뒷 글자를 '빼어날 수'자로 하였다고 한다.

  박문수 부모의 스님들에 대한 지극한 마음.  지극한 마음이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우리 또한 참된 불자의 삶을 바라고 진정한 행복을 바란다면 지극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아니, 마음을 지극히 모아야 한다.  이밖에는 특별한 비결이 없다.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예불을 하든 경전을 모든, 모름지기 마음을 지극히 모아서 하면 된다.  그리하여 생명의 원천인 일심으로 돌아갈 때 큰 깨달음은 곧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이제 마음을 가다듬고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라.  우리의 '지심귀명례'가 누구에게 올리는 절인가를....

  어떤 이는 말할 것이다.  부처님을 비롯한 삼보에 올리는 절이라고.  그렇다.  부처님께 올리는 절이다.  그리고 그 부처님은 '깨달은 분', '일심을 회복해 가진 분', '불성을 발현시킨 분'이다.  이것이 보통명사 붓다(Buddha)에 대한 정의이다.

  이에 대해 법당에 앉아 계신 부처님, 그 부처님은 철로도 만들고 흙으로 빚어 만들고 나무로도 조성한다.  그러나 철로 된 부처님은 용광로의 불길을 이길 수 없고, 흙으로 빚은 부처님은 물속에 들어가면 부서져버리며, 나무로 된 부처는 도끼를 견디지 못한다.

  이와 같은 불완전 상태의 불상을 참된 부처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불상이 우리의 절을 참되이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 불상들은 갖가지 영험을 나타낸다.  왜?  그 부처님들이 비록 돌이나 철, 나무 등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불상에 생명의 원천적인 힘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힘은 목불이나 철불의 힘이 아니다.  바로 불성을 갖추고 있는 이가 신심을 다하여 절을 할 때 발현되는 일심이 나투어낸 힘이다.  곧 지심귀명례의 힘인 것이다.

  지심귀명례는 조성된 부처님께 올리는 예배가 아니다.  맑고 밝고 신령스러운 스스로의 일심으로 나아가는 절이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일심을 회복해 가지도록 하는 절, 지심귀명례!  마침내는 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 부처를 이루게 하는 절, 지심귀명례!  그와같은 절을 불자들은 예불의식 때마다 올리고 있는 것이다.

  부디 이를 깊이 명심하여 지심으로 한배 한배 절을 올리는 불자가 되어보라.  정녕 그 절과 ㄱ\함께 일심에서 우러나오는 자비와 지혜와 행복이 충만하게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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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시여 크나큰 진리여

 

至心歸命禮 三界導師 四生慈父 是我本師 釋迦牟尼佛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삼계의 도사요 사생의 자부이신 우리의 근본스승

석가모니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명례하옵니다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佛陀耶衆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시방삼세와 제망찰해에 항상 머물러 계시는

모든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명례하옵니다.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達摩耶衆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달마야중

시방삼세와 제망찰해에 언제나 가득한

모든 진리에 지극한 마음으로 귀명례하옵니다.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예불시, 머리를 땅에 대고 올리는 일곱번의 절(七頂禮)중 첫번째는 석가모니불께 올리는 절이다.

 

  至心歸命禮 三界導師 四生慈父 十我本師 釋迦牟尼佛

  삼계의 도사요 사생의 자부이신 우리의 근본스승

  석가모니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명례하옵니다.

 

  석가모니, 석가모니부처님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불자들이 부처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예불문에 나타나 있는 석가모니불에 대한 정의, 곧 '삼계도사.사생자부.시아본사'의 세 낱말을 심도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삼계도사(三界導師)

  첫째, 석가모니부처님을 삼계의 도사라고 하였다.  삼계의 중생을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는 위대한 스승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계란 무엇인가?

  삼계는 생사윤회하는 중생의 세계로서,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셋으로 나누어진다.  이들 세계는 중생의 속성인 삼독(三毒)., 곧 탐욕(貪)과 분노(瞋)와 어리석음(痴)의 짙고 얕은 정도에 따라 각기 모습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삼계 중에서 탐. 진. 치 삼독이 가장 많고 가장 저열한 세계는 욕계이다.  특히 욕계는 탐욕이 많아 정신이 흐리고 거칠며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어리석게 살아가는 중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욕계에 속하는 세계로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의 세계와 28천(天)으로 나누어지는 하늘나라중 사왕천(四王天). 도리천(도利天). 야마천(夜摩天). 도솔천(도率天). 화락천(化樂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육욕천(六欲天)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지옥은 가장 짙은 삼독의 기운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이고, 타화자재천은 탐욕이 극히 미세한 중생들이 사는 세계이며, 우리가 사는 인간계는 스스로가 하기에 따라서 삼독심(三毒心)을 극복할 수도 있고 삼독 속에 더욱 깊이 빠질 수도 있는 선택의 의지를 지닌 존재들이 사는 세계이다.

   색계는 비록 욕심은 떠났지만 아직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일으키는 미세한 진심(瞋心)과 치심(痴心)이 남아있는 중생들이 사는 세계이다.  이 색계는 모두 하늘나라에 속하는데, 범천(梵天)에서부터 대자재천(大自在天)까지 18개가 있다.

  무색계는 탐욕과 진심이 모두 사라져서 물질의 영향을 받지는 않지만 아직 '나(我)'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게 되는 정신적인 장애, 곧 치심이 남아있는 세계이다.  이 무색계는 중생이 사는 세계 가운데 가장 깨끗한 세계로서, 미세한 자아의식으로 인한 어리석음만 떨쳐버리면 완전히 해탈하여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이 세계에는 공무변천(空無邊天). 식무변천(識無邊天). 무소유천(無所有天).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 등의 사공천(사공천)이 있다.

  고대 인도인들은 지옥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비상비비상천까지를 땅 밑에서부터 허공으로 올라가면서 차례로 형성되어 있는 유형적인 세계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삼계를 단순한 입체적인 공간으로 보지 않고 정신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 중생의 미혹에 따라 전개되고 수행의 깊이에 따라 펼쳐지는 세계로 풀이하고 있다.  곧 삼계를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을 성취함에 따라 전개되는 체험 세계로 해석함과 동시에,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정신적인 영역으로 해석하셨던 것이다.

  나아가 중국의 달마대사, 우리나라의 원효대사 등 수많은 고승들은 삼계를 특별한 세계가 아닌 우리의 일사이생활권으로 파악하고 있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탐.진.치의 삼독심을 계. 정. 혜 삼학으로 바꿀 때 곧 바로 삼계를 벗어나 해탈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마음속에 이와 같은 삼독심이 더하고 덜함에 따라 삼계의 여러 세계를 그때 그때 옮겨 다니게 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와 관련된 이야기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옛날 백은 스님께 한 무사가 찾아와 여쭈었다.

  "스님, 부처는 그만두고라도 천당과 지옥이 정말로 있는 것입니까?"

  "당신, 무엇을 하는 사람이요?"

  "예, 저는 무사입니다."

  "하하! 당신이 무사라고?  도대체 당신같은 사람의 호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군.  머저리같이 생긴 놈에게 생명을 맡기다니!"

  모욕을 느낀 무사의 손이 허리에 찬 칼로 옮겨 갔지만 백은스님은 계속 그를 비웃었다.

  "그래, 칼은 가졌군.  내 목을 자르기에는 그 칼이 너무 무딜걸?"

  무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칼을 뽑아들었을 때 스님은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입을 열었다.

  "지옥의 문이 열렸구나."

  이 말을 듣는 순간 무사는 크게 뉘우쳐 칼을 다시 꽂고 무릎을 꿇었다.  스님은 말씀하셨다.

  "천당의 문이 열렸구나."

  지옥의 문과 천당의 문은 이렇게 열리고 이렇게 닫힌다.  이것이 바로 삼계의 실체이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 바요, 삼계는 오직 일심이다(一切有心造 三界有一心)"라고 하신 원효대사의 말씀처럼, 삼계 속에 모든 세계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어떠한 마음을 지니고 어떻게 한마음을 쓰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다시 '삼계도사'라는 본문으로 돌아가자.

  지금까지 우리는 삼계의 실체를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욕계.색계.무색계의 셋으로 구성된 삼계...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인간계에 비하면 너무나도 깨끗한 색계. 무색계조차 이상향으로로 보지 않으셨다.   오히려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을 통하여 "삼계에 편안함이 없음이 마치 불타는 집과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당신께선, 이 삼계의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의 경지로 인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삼계의 중생을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것일까?

  <법화경>에는 불타는 집 속에 정신없이 뛰어놀고 있는 아이 (중생)들을 급히 집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아버지(부처님)가 취하는 방편 이야기인 '화택유(火宅喩)'라는 것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중생을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는 방법을 쉽게 파악할 수가 있다.

 

  어느 나라에 수십 명의 아들과 함께 사는 한 부자가 매우 넓고 큰 집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출입을 할 수 있는 문은 단 하나밖에 없었으며, 집이 낡아 벽은 떨어지고 기둥 뿌리는 썩고 대들보는 기울어져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집 속에서 불길이 일어나더니 삽시간에 집 전체로 번져갔다.  그런데 마침 부자의 아들 수십 명은 모두 집안에서 놀고 있었다.  아버지는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고 크게 소리쳤다.

  "얘들아, 큰일났다!  빨리 뛰쳐 나가거라."

  그러나 재미있는 놀이에 심취한 아들들은 아버지의 외침을 듣고도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놀라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다시 생각하였다.

  '이 집에서 조금만 더 지체하게 되면 모두가 불에 타 죽을 것이다.  방편을 써서라도 이 아이들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들들 저마다가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였다.

  " 이 아버지가 너희들이 좋아하는 노리개감을 준비했단다.  지금 너희가 이것을 갖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들이 지금 문 밖에 있으니, 빨리 나가 마음에 드는 수레를 골라서 타고 놀아라.  그 수레들을 너희에게 줄 것이니라."

  아들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앞을 다투어 뛰쳐 나갔고, 아들들이 불타는 집에서 무사히 벗어난 것을 본 아버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여러 아들들에게 아름다운 보석으로 꾸며져 있는 아주 멋있고 큰 수레 하나씩을 주었다.

  더욱이 그 수레는 털빛이 깨끗하고 몸체가 좋은 흰소가 끄는 것이었다.  흰소는 힘이 셀 뿐 아니라 걸음걸이도 평정하고 빠르기가 바람과 같았다.

  이 비유 속의 아버지는 부처님이고 아들들은 중생이요 불자들이다.  사람들은 흔히 "아이구, 속 탄다.  속에서 천 불이 끓어오른다"고 한다.ㅣ  바로 내 마음의 불집 속에서 매일같이 속을 태우고 볶고 끓이고 썩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 불집 속에 들어가 속을 태우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중생의 삶이다.  집이 불타고 있는 데도 그 집 속에서 무엇인가를 하기에 바쁜 존재, 그것이 바로 중생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중생들 각각에게 맞는 적절한 방편을 베풀어서 그들을 불타는 집 밖으로 나오게끔 인도하는 분이시다.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 성문의 성품을 지닌 이엑;는 양의 수레를, 홀로 조용히 명상하기를 좋아하는 연각의 성품을 지닌 이에게는 사슴의 수레를,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보살에게는 소의 수레를 주어 이끌어 들인다.

  그러나 부처님의 자비는 성문. 연각. 보살의 경지에서 멈추지를 않는다.  처음에는 방편으로 세 종류의 수레를 제시하지만, 결국에는 그들 모두에게 흰소가 끄는 대백우차, 곧 일불승의 가르침을 내려 삼계를 벗어나고 마침내는 부처가 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삼계도사, 예불을 올릴 때 우리가 석가모니부처님을 일컬어 '삼계의 중생을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는 스응'이라고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능히 알 수 있으리라.  이제 석가모니불에 대한 두번째 설명으로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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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자부(四生慈父)

  둘째, 예불문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을 사생의 자부라고 하였다.

  사생은 모든 생물이 생겨나는 형식을 네 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이 그것이다.

  태생은 사람이나 소.말 등과 같이 어미의 뱃속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모습을 갖춘 다음 태어나는 중생들이고, 난생은 새나 고기처럼 알에서 태어나는 모든 생명을 지칭하는 말이다.  습생은 물기가 많은 습한 곳에서 생겨나는 모기. 귀뚜라미 등의 벌레들을 지칭하며, 화생은 의탁할 것이 없는데도 홀연히 변화하여 태어나는 중생을 가리킨다.  곧 지옥이나 천상에 태어날 때는 그 어떠한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곧바로 나아가 화생을 하게 된다.

  부처님은 바로 이와 같은 사생 중생, 곧 모든 중생의 자상한 어버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물론이요 하찮은 미물에까지 어버이와 같은 자비를 베푸는 분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부처님의 특징이다.  다른 종교의 신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부처님만의 특징이다.

  흔히 타종교에서는 인간만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타종교의 신들은 자기를 믿는 인간만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푼다고 한다.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얼마든지 죽이고 이용할지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부처님은 달랐다.  일체중생을 모두 평등하게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철두철미한 불살생의 정신 아래 하찮은 미물에까지 자비를 베푸신 분이 부처님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왜 인간들끼리만의 사랑이 아니라 '일체 중생에 대한 자비'를 중요시한 것일까?  그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폭이 그 어떤 성인들보다 크고 넓었기 때문이다.  '온 우주가 나와 한 몸이요 모든 중생이 하나'라는 폭넓은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我相을 버리라고 하셨다.  '잘났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하신 것이다.  실로 이 아상만 버려도 성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라는 생각(人相)도 버리고 중생이라는 생각(衆生相)마저 남김없이 버리라고 하셨다.  나. 인간. 중생이라는 생각이 없어지면 온 우주와 저절로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참다운 깨달음이 스스로 다가오며, 일체를 나의 몸과 같이 돌보는 자비는 저절로 샘솟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일체중생을 평등하게 아끼고 돌보는 부처님의 크나큰 자비가 모든 것을 다 비워버린 크나큰 깨달음 속에서 나온 것임을 우리는 깊이 명심하여야 한다.

 

  시아본사(是我本師)

  예불문에서는 세번째로 석가모니불을 '시아본사'라고 정의하였다.

  시아본사.  시아본사는 글자 그대로 '나의 근본 스승'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석가모니불만을 시아본사로 삼는 것인가?

  불자들 중에는 관세음보살을 스승으로 삼아 일평생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사람도 있고, 아미타불만을 열심히 찾는 자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지장보살을, 어떤 이는 존경하는 스님의 가르침만을 따르기도 한다.  이와 같이 각자가 믿고 따르는 스승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불보살도 석가모니불의 말씀을 통해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고, 모든 스님들 또한 거슬러 올라가면 석가모니불의 맥을 이은 분들이다.

  석가모니.  불고는 이분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분은 모든 중생을 부처로, 사바세계를 불국정토롤 바꾸고자 한평생을 설법하고 교ㅗ화하며 중생과 더불어 살다가신 분이다.

  그분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그분의 뜻이 사바세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참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이 ㅣ세계를 불국토로 바꾸기 위하여, 아니 잡된 것으로 가득찬 이 세상 중생들의 마음을 평온과 행복이 깃든 마음으로 바꾸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분은 이 사바세계에서 깨달음의 문을 여는 선구자가 되었다.  깨달음의 길을 찾고 깨달음을 이루어, 그 길을 걸으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길을 열어 보이는 자사아한 스승이 되었던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해탈의 씨를 심고 우리에게 해탈의 문을 열어준 가장 근원적인 스승이 이분이기에, 예불문에서 석가모니불을 '시아본사'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불자의 공부는 석가모니불을 바르게 아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행복과 깨달음을 지향하는 우리의 수행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정녕 우리가 참된 불자라면 본사이신 석가모니불의 일대기부터 면밀히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삼계의 대도사요 사생의 자부이며 우리들의 근본스승이신 석가모니부처님.  그분께 지극한 마음으로 한 차례의 절을 올리면서 깊은 믿음의 씨를 심고 가르침을 잘 준수하겠다는 결심을 하여보라.  그 결심과 함께 우리는 나날이 새롭게 태어나게 될 것이다.

 

  어디에나 계신 부처님

 

 

  부처님은 어떠한 분인가?

  두번째로 지심귀명례를 할 때 외우는 구절은 특정인인 석가모니불이 아니라 보편적인 부처님에 대한 귀명례이다.

 

  지심귀명례 십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佛陀耶衆

  시방삼세와 제망찰해에 항상 머물러 계시는

  모든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명례하옵니다.

 

  먼저 이 구절의 용어부터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시방삼세의 '十方'은 동.서.남.북의 사방에다 동남.동북.서남.서북, 그리고 상.하를 합한 열가지의 방향을 나타낸 것으로, 모든 공간을 다 포함하고 있다.  또 '三世'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세상, 곧 시간적인 개념을 나타낸 말이다.  따라서 '시상삼세의 부처님'이라고 하면 어느 곳에나 어느 때에나 계신 부처님이라고 해석하면 된다.

  제망찰해의 '帝網'은 帝釋天의 궁전을 장엄하고 있는 그물이라는 뜻이다.

  그 그물의 가로 세로 줄이 서로 만나는 그물코에는 각각 한개씩의 영롱하고 투명한 보배구슬들이 달려 있다.  그 구슬들은 이쪽 구슬이 저쪽 구슬을 비추고, 저쪽 구슬이 또 이쪽 구슬을 서로 비추어, 한 구슬 구슬마다 매우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게된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물에 달린 수많은 구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늬와 색깔이 복합적으로 어울려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지극히 아름다운 빛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찰해의 '刹'은 국토.땅을 나타내는 말이고 '海'는 글자 뜻 그대로 바다이다.

  따라서 제망찰해는 제석천궁을 덮고 있는 그물과도 같이, 부처님께서 모든 땅과 바다에 지극히 아름답고 찬란한 빛이 되어 계신다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아울러 '상주일체'라고 한 것은 모든 시간 모든 공간에 항상 머물러 계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것이다.

  이상과 같은 용어 해설에 준하여 이 구절을 다시 풀이하면, "제석천궁의 그물에서 뿜어 나오는 빛이 모든 땅과 바다를 두루 덮고 있듯이, 공간적으로는 시방세계의 모든 것에 두루하고 시간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어느 때에너 항상 머물러 계시는 모든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명례를 올리옵니다."라는 뜻이 된다.

  모든 부처님!  여기에서의 부처님은 석가모니불처럼 특정한 부처님이 아니라 보통명사로서의 부처님이다.  부처!  그렇다면 보통명사 '부처'는 과연 어떠한 뜻을 지니고 있는가?

  부처는 범어(梵語) 붓사(Buddha)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에서는 붓다를 음역( 音譯)하여 불( 佛)이라 하였고, 뜻으로 번역하여 '각자(覺者. 깨달은 이)'라고 하였다.  곧 진리 그 자체인 법(法.Dharma)을 깨달은 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부처' 속에 담긴 각( 覺)의 의미는 단순히 깨달았다는 뜻만 간직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진리를 깨달았고 그 진리로써 다른 사람을 깨우칠 뿐 아니라, 깨달음의 행이 원만한 이."

  이것이 붓다.  곧 覺에 대한 정통적인 해석이다.  이제 예불문으로 돌아가 '佛陀耶衆'의 뜻을 살펴보자.

  불타야중을 한문으로 옮기면, '諸佛諸佛'이 된다.  곧 모든 부처님을 지칭하는 것이다.

  흔히 '여러 부처님'이라고 하면 과거칠불(過去七佛)을 먼저 연상하게 되고, '모든 부처님'이라고 할 때는 일반적으로 삼대벅(三代劫) 동안 출현하는 모든 부처님을 지칭하게 된다.

  우리가 3천배를 하는 것은 바로 삼세 3천불께 한번씩의 절을 올리는 것이며, '모든 부처님'이라고 할 때는 3대겁에 출현하는 3천불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3천불만으로 불타야중, 또는 제불제불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3대겁을 넘어서면 3천불만이 아니라 또다시 무수한 부처님이 계시고,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불로 나눌 때는 중생을 교화하는 부처님으로 천백억화신불이 등장하기도 한다.  결국 예불문의 구절처럼 부처님은 온 법계에 가득 충만되어 있는 것이다.

 

  가까운 곳의 부처님

  온 法界에 가득 충만되어 있는 부처님!  그 부처님은 어떠한 부처님인가?  바로 一心佛이다.  만약 스스로 갖추고 있는 불성을 깨달아 일심을 회복해 갖기만 하면 누구든지 시간와 자아소에 구애됨이 없이 부처를 이룰 수 있고, 모든 것 속에서 부처를 볼 수 있음을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사람은 드물다.  일심을 잊고 사는 중생들은 어느 장소에서든 거짓이나 잘못과 맞부딪치게 되고, 어느 때에나 어둡고 미천한 생각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직은 실망할 단계가 아니다.  비록 우리가 이와 같은 중새이이라 할지라도 지심으로 귀명례를 하면 반드시 상주일체의 부처님은 모습을 나타내기 마련이고, 그 부처님은 반드시 우리를 성불의 세계로 나아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  그리고 우리 곁의 가까운 곳에 계신 부처님을 찾아 잘 모셔야 한다.  우리들 가까이에 계신 불보살님들...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음미해보자.

 

  조선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경상북도 태백산 각화사 동암은 18祖師가 나온다는 대명당이라, 많은 스님들이 참선 정진하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다.  하지만 깊은 산골까지 찾아오는 신도가 없어 언제나 식량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젊은 스님이 동암에 들러 탁발을 자청하고 나섰다.  스님은 매일 걸망을 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며 식량을 구걸했다.  하지만 스님은 말을 잘 할 줄 몰랐다.  오직 하는 말은 '그렇게 하지' 한 마디뿐이었다.  남의 집 문전에 가서 서 있으면 아이나 어른이 먼저 말을 건넨다.

  "동냥 줄까요?"

  "그렇게 하지."

  "쌀을 드릴까요?"

  "그렇게 하지."

  "보리도 괸찮아요?"

  "그렇게 하지."

  "소금 드릴까요?"

  "그렇게 하지."

  언제나 하는 말없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물으면 오직 '그렇게 하지'라고 할 뿐이요, 일평생을 주는대로 받으며 '그렇게 하지'라고 할 뿐이요, 일평생을 주는대로 받으며 '그렇게 하지'라고만 하였다.  마침내 스님은 '그렇게 하지 스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루는 짓궂은 농부가 물이 가득찬 논에서 벼를 베다가 스님을 골려주고자 말을 걸었다.

  "글ㅇㅎ게 하지 스님, 이 벼 한 단 져다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 줄라요?"

  스님이 '그렇게 하지'라고 답하자, 농부는 일부러 볏단을 크게 묶어서 물이 가득찬 논에다 둥글둥글 굴려 물을 흠뻑 적신 다음 논둑에다 내어주었다.  스님은 그 무겁고 물이 줄줄 흐르는 볏단을 지고 하루 온종일 걸려 태백산 동암까지 올라갔다.  이를 보고 주위 사람들은 스님을 '천진불(天眞佛)'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천진불 스님께는 또 한 가지 남다른 점이 있었다.  탁발을 하여 절에 돌아왔을 때 대중이 공부를 잘하고 있으면 무거운 걸망을 후원에 조용히 벗어놓고 선방을 향해 합장배례하였지만, 문밖으로 잡담하는 소리가 새어나오면 걸망을 선방 앞에 힘껏 던지곤 산이 무너질 정도로 한숨을 크게 쉬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선방 스님 대부분은 묵언을 하면서 열심히 정진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그렇게 하지 스님'은 스님네의 식량을 일생동안 탁발하여 봉양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대중스님 모두를 모아 평생 처음으로 말다운 말을 하였다.

  "이제 도솔천 내원궁으로 돌아갈 때가 되어 더 이상 대중 시봉을 못하겠구려.  부디 스님네들께서는 정진 잘 하십시오."

  이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들어, 화장을 하였더니 사리가 무수히 나왔다고 한다.

  일생 동안 좌복 위에 한번 앉을 여가도 없이 탁발만 하면서 스님네의 공부를 도운 '그렇게 하지 스님'.  이 스님은 도솔천 내원궁에 계신 미래불 미륵보살의 화현이었던 것이다.

 

  불교에 깊이 심취해 있었던 당나라의 양보는 무제보살께서 사천땅에 와 계시다는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길 떠난 지 며칠 만에 신선의 모습을 한 어느 노인을 만났다.

  "젊은이는 어디를 그리 바쁘게 가시오?"

  "무제보살을 뵙고 스승으로 모시고자 찾아가는 길입니다."

  "보살을 찾으러 가느니 부처를 찾으러 가지 그러오?"

  "부처님이 어디 계시길래요?"

  "집에 가면 이불을 두르고 신발을 거꾸로 신은 채 뛰어나오는 분이 있을 것이오.  그분이 바로 부처님이지."

  "알았습니다."

  노인이 보통분이 아님을 느낀 양보는 걸음을 되돌려 부지런히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밤은 깊을 대로 깊어 있었다.

  "어머님!  어머님!  제가 왔습니다."

  문을 두드리자, 어머니는 반갑게 뛰쳐나왔다.  어머니는 옷도 입지 않고 이불을 두른 채, 신발도 거꾸로 신은 채였다.

 

  이 두 편의 이야기에서처럼, 비록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할지라도 우리 주위에는 이와 같은 불보살의 화현이 언제나 우리를 보고 있고 깨우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을 특별한 곳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법당 안에서만 찾으려 해서도 한된다.  실로 예불문의 구절구절처럼 부처님은 어디에나 어느 때에나 충만해 계신다.

  부처님은 결코 숨김도, 감춤도 없건만 오히려 우리가 가까이 접하지 못한다.  무엇 때문인가?  그 까닭은 우리의 잘못된  자세에 있다.  번뇌 속에서 요행수를 바라고 부처님을 찾는 우리의 자세 때문이다.

  이제 요행수를 바라지 말고 욕심을 비운 채 부처님과 채널을 맞추어 보라.  부처님과 곧바로 통할 수 있는 채널을 맞추어 보라.  모든 중생은 스스로 부처가 될 종자( 佛性. 如來藏)를 갖추고 있고, 부처님께서도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한결같은 원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채널만 잘 맞추면 곧바로 통할 수 있다.

  KBS의 프로그램을 보고자 하는 사람이 MBC에 채널을 맞추면 원하는 프로그램을 볼 수 없듯이, 부처님의 자비를 구하는 사람이나 부처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은 부처님과 통하는 채널을 맞추어야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과 통하는 채널은 무엇인가?  바로 지심!  지심귀명례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채널을 지심귀명례에 맞추어 보라.  그리고 채널을 고정시켜 열심히 나아가라.  분명히 부처님은 우리들 앞에 또렷한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끝으로 '지금 이 자리'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옛 선사의 일화를 예로 들면서 이 장을 끝맺음 하고자 한다.

 

  한 제자가 당나라의 건봉 선사께 여쭈었다.

  "어디로 향하나 부처님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고, 큰 길이 열반의 문 앞까지 곧게 뚫려 있다고 하였습니다ㅣ.  그러면 어디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까?"

  선사는 지팡이로 제자의 바로 앞에다 줄을 그었다.

  "ㄹ바로 여기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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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함께 하는 불법

 

  예불을 드리며 올리는 일곱번의 절(칠정례)중 세번째로 외우는 이 구절은 달마(達摩), 곧 법에 대한 지심귀명례이다.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달마야중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達摩耶衆

  시방삼세와 제망찰해에 언제나 가득한

  모든 진리에 지극한 마음으로 귀명례하옵니다.

 

  이 구절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제석천궁의 그물에서 뿜어나오는 빛이 모든 땅과 바다를 두루 덮고 있듯이, 공간적으로는 시방세계의 모든 곳에 두루하고 시간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어느 때에나 언제나 가득한 모든 진리에 지극한 마음으로 귀명례를 올리옵니다"라는 뜻이

된다.

  '달마'는 원래 여러가지 뜻으로 사용되었던 인도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진리,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법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먼저 이 '달마'라는 용어에 담긴 의미와 불법의 특징부터 함께 공부해보자.

 

  달마, 법이란 무엇인가

  달마는 범어 다르마(Dharma)를 한자어로 옮긴 것이며, 뜻으로 옮겨 '법(法)이라고 하였다.  범어 '다르마'는 불교에서 비로소 사용한 용어가 아니었다.  약 4천년 전의 인도 고대 문헌인 <베다>에도 가끔씩 보이고, 그 뒤의 브라만교 성전에도 즐겨 사용되었던 용어이다.

  이 다르마는 '유지한다, 질서를 지킨다'는 뜻의 '다르(dhr)'라는 동사어근(動詞語根)에서 파생된 말로써, 처음에는 '~을 유지하는 자, 질서를 지키는 자'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인도철학이 발달하면서 매우 다양한 뜻을 지닌 말로 사용되었는데, 크게 열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1) 인간의 삶을 보존하는 관례. 풍습. 행위규범

  2) 책임. 의무. 도리. 해야 할 일

  3) 사회질서. 사회제도

  4) 덕. 선행

  5) 전 세계의 기초

  6) 종교적 의무

  7) 진리. 진실. 보편적 의의가 있는 이법(理法)

  8) 진리에 계합하는 규범

  9) 본질. 성질. 특질 또는 본성. 속성. 특성

  10)의식의 대상이 되는 것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이러한 다양한 의미를 모두 수용하면서도, 특히 세 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다르마, 곧 법의 뜻을 풀이하고 있다.

  첫째, 법은 '모든 것(一切)'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모든 것 하나 하나를 다 법이라고 한다.  바로 우리들 의식의 대상이 되는 사물이나 현상, 개념 등이 모두 법인 것이다.  곧 경전에서 '법계(法界)' . 제법(諸法)'이라고 할 때의 법으로, 정신적인 것이건 물질적인 것이건 대상화되는 일체의 것을 법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둘째, 법은 '존재의 법칙'이다.

  범어 '다르마'라는 말 속에는 '그렇게 되게끔 되어 있는 것, 그렇게 있게끔 ;되어 있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있는 까닭, 이 사회가 이렇게 있는 까닭, 세계가 이렇게 있는 까닭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과법(因果法)이다.

인(因. 원인)과 연(緣. 환경)과 업(業. 행위)와 과(果. 결과)의 네 글자로 구성된 인과법이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사로잡힌 삶이 계속되면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라는 삼악도(三惡道)의 생존양태에 빠져들기 마련이요, 보시. 지계. 인욕 등의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보다 향상된 세계로, 더욱 나아가 선정과 지혜를 익히면 부처의 경지로 나아가기 마련이라는 불변의 사실을 그렇게 되게끔 되어 있는 법'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주의하여야 한다.  존재의 법칙, 곧 인과법이 '인. 연. 업. 과

라는 네 글자의 순서처럼 결코 단순하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 연 업. 과는 일직선 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쉽게 '지금 이 순간'을 두고 이야기해 보자.

  항상 우리에게 다가오는 '지금 이 순간'은 바로 과보의 순간이면서 새로운 인(因. 씨)을 심는 순간이다. 동시에 이 순간은 또다른 인의 연(緣.환경)이 되기도 하고 업을 맺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곧 이 순간이 바로 '인. 연. 업. 과'를 동시에 맺고 푸는 자리인 것이다.

  이와 같이 복합적이고 수많은 인과법에 의해 지금의 '나'는 존재하게 되고, 그 흐름이 연속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존재의 법칙이 되는 인과법은 불변의 진리요 불교의 특징이다.  우리가 지심귀명례를 올리는까닭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제까지 비록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속에서 살았을지라도 '지금 이자리에서' 지심귀명례를 외우며 깊은 신심으로 참회하고 업장을 녹이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부처를 이룰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어떤 존재도 인과법을 벗어날 수는 없다.  '나' 주위의 모든 것은 '나'의 인연업과로 인한 것임을 명심하자.  내가 심고 내가 만들고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일 뿐, 신이 만들어낸 것도 우연히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나'의 모든 것은 '나'의 책임이다.  그렇게 되게끔 되어 있는 존재의 법칙, 그 인과의 법칙에 따라 '나'는 '이렇게'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명확히 알고 노력하면 누구나  복된 삶을 이루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셋째, 법은 해탈의 의지처가 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 법을 불교에서는 교법(敎法)이라고 한다.  곧 팔만대장경에 담겨져 있는 사제. 팔정도. 육바라밀. 공. 무아 등의 모든 가르침이 교법이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 교범을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내가 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도 이 법은 있었고, 내가 열반에 든 후에도 이 법은 그대로 남아 있다."

  석가모니께서는 언제나 있는 이 법을 깨달아 부처가 되셨고, 깨달음을 바라는 중생을 위해 45년 동안 한결같이 설법하셨다.  우리가 좁은 의미에서 '달마'라고 할 때는 바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굘법, 우리를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는 가르침을 뜻한다.  모든 중생에게 고통과 불안을 덜어주고 행복과 평화로운 삶을 열어주는 가르침이 부처님의 교법이요, 부처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설한것이 불법인 것이다.  올바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반드시 이러한 결과를 이룰 수 있는.....

 

  불법은 어디에나 있다

  다시 예불문으로 돌아가자.  이 예불문에서는 '시방삼세 상주일체'라고 하여 부처를 이루는 해탈법이 어느 때 어느 곳에나 가득 충만되어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그 법은 부처님 당시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요 대장경 속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 마음이 있는 곳에는 법이 함께 한다. 물론 그 마음은 결코 특별한 마음이 아니다.  우리의 평상심(平常心), 생활하는 그 마음속에 진리가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옛스님들은 말씀하셨다.

  "진리는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밥 먹고 밥그릇 씻는 거기에 모든 진리가 다 들어 있다.  오히려 진리는 공기나 물과 같아서 우리가 느끼지 못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일체의 생명이 살아남지 못하게 되는 무한한 생명의 원천이다."

  이렇게 일상생활 속에서 진리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존재가 중생이지만, 우리 중생은 지금 '나'와 더불어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불법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여 밖으로 밖으로만 찾아 헤맨다.  과연 우리를 깨달음의 경지로 이끌어주는 불법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을 깨우쳐주는 선사들의 도담( 道談) 한편을 함께 새겨보도록 하자.

 

  중국 당나라 때의 도인스님인 도로선사는 형주 천황사에 계셨다.  천황사 일주문 밖에는 떡집이 있었는데, 그 떡집주인은

자기 아들을 시켜 날마다 떡 열 개씩을 도오스님께 보내드렸다.  스님은 떡을 받을 때마다 그 중 한 개를 아이에게 집어주면서 말씀하셔ㅆ다.

  "너에게 이 떡을 주노니, 너는 자손을 위하여 많은 공덕을 지어야 하느니라."

  하루이틀도 아니고 매일같이 떡을 주며 묘한 말씀을 하는 스님의 참뜻을 아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스님, 저희 집에서 가져온 떡을 늘 저에게 하나씩 되돌려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  네가 가져온 것을 너에게 도로 주는데 무엇이 이상한고?"

  "?"

  소년의 마음속에는 의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기 물건을 자기한테 되돌려 준다?  그렇다면 자기 물건이란 무엇인가?....'

  이와같은 인연으로 소년은 도오스님의 제자가 되어 숭신(崇信)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승려가 된 다음부터는 도오스님을 시봉하며 불법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오스님은 몇년이 지나도 법문 한마디 일러주지 않았다.  숭신스님은 애가 타서 견딜 수가 없었고, 참다못해 불만을 터뜨렸다.

  "스님!  스님을 모신지가 어느덧 3년을 넘어섰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법문 한마디 일러주시지 않았습니다.  어찌 저에게 그토록 무심하십니까?"

  "이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  네가 출가한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법문을 해주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거늘!"

  "예?  스님께서 언제 법문을 해주셨습니까?"

  "이놈아!  네가 차를 다려주면 정중히 받아서 마셨고, 네가 밥을 차려다주면 맛있게 밥을 먹었고, 네가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면 내가 절을 받았지 않았느냐?  그것이 법문이 아니고 무엇이냐."

  숭신스님이 할말을 잃고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도오스님이 큰소리로 꾸짖었다.

  "볼려거든 단박에 보아야지.  머리를 굴렬 생각하면 하늘과 땅만큼 멀어져!"

  이 말씀에 숭신스님은 참된 법을 증득하여 대오(大悟)하였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진리가 가득하건만, 보는 이의 눈이 어두워 진리를 체득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우쳐주고 있다.

  실로 우리의 상식대로라면 법문 한마디 듣지 못하고 일만 한 숭신선사가 어떻게 불법을 깨달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숭신선사는 법을 깨닫고 도오선사의 법맥(法脈)을 이었다.  그동안 눈이 어두워 '나'와 잠시도 떠나있지 않았던 진리를 보지 못하다가, 일만 했던 3년 동안을 일념의 구도심(求道心)으로 살았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쉬고 원래부터 함께 하고 있던 진리를 체득하게 된 것이다.  또 한편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선불교의 요긴한 지침서인 <돈오입도요문론 頓悟入道要門論>을 저술한 대주혜해 선사에게 원율사가 찾아가 여쭈었다.

  "평소에 불법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불법 공부?  불법 공부란 별 것이 아니야.  그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잠을 자는 것이지."

  "그것은 스님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불법 공부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 모두가 스님과 같은 도인이겠군요."

  "원, 천만의 말씀!  세상 사람들의 겉은 그러하나 속은 딴판일세."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일 뿐, 어찌 겉과 속이 따로 있겠습니까?"

  "아니야, 다르고 말고.  세상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밥만 먹지 않고 이 생각 저 생각, 이 공상 저 망상을 끊임없이 하고, 잠을 잘 때는 잠난 자지 않고 기와집을 몇 채씩 짓고 헐고 하는 꿈들을 꾸지 않던가?  나야 어디 그런가?  밥 먹을 때는 밥만 먹고 잠잘때는 그저 잠만 잘 뿐이네.

  진정 불법. 불도(佛道).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현대의 고승 경봉(1892-1982)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념미생초(一念未生初. 한 생각 일어나기 전)에 도가 있고 눈과 눈이 서로 마주쳐보는 데 도가 있고, 중생의 일상생활에 삼라만상에 도가 있다.  우리가 오고 가는 그곳에 진리가 있고 물건을 잡고 놓는 것이 곧 도이건만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 딴 곳에서 찾으려 한다.  눈앞에 불법이 있건만 눈이 멀고 귀가 어두워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  어느 것이고 진리 아님이 없음이니 잘 이해하고 활용하여야 한다."

  경봉 큰스님의 말씀처럼 불법을 구하는 이, 스스로의 진실을 체험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해탈의 법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하고, 밥 먹고 옷 입고 가고 오고 대소변 보는 일상생활 속에서 불법과 하나가 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노력하다보면 어느덧 불법은 나와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불법을 나의 것으로

  그러나 '나'와 불법이 하나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불문의 가르침대로 법계에 가득 충만되어 있는 해탈의 기운, 이 해탈법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늘 가득히 있기 때문에 해탈법은 인색하지가 않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법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해탈하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의 그릇 속에 잡된 것이 너무나 많이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빛으로 되비추면 능히 불법과 하나가 되지만, 반대로 우리의 마음 그릇이 언제나 번뇌망상의 물결로 출렁이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그릇을 비워보라.  그 그릇에는 해탈법이 가득 채워질 것이요, 나의 몸은 해탈신(解脫身)으로 바뀔 것이다.  진정 해탈을 엄원하는 중생이라면 번뇌를 놓아버릴 줄 아는 슬기를 길러야 한다.

  이제 그 방법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자.

  먼저 해탈의 법인 불법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바보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일은 너무나 많다.  재물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의 근본 오욕만 탐하고 살아도 인간의 한평생은 너무나 짧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번뇌는 끊임없이 일어난다.  끝을 보고자 하여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어찌 불법을 닦을 시간이 있으리.  그러므로 약간은 바보가 되어 살아야 한다.  욕심을 접고 소욕(小慾)으로 살아야 한다.

  욕심을 거두고 살면 오히려 필요한 만큼의 것은 나에게 저절로 찾아온다.  절대 굶어 죽거나 비천하게 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우주의 법칙이요 진리이다.

  우리는 우주의 기운, 우주에 가득한 생명의 기운으로 사는 것이지 죽음의 기운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싫어하고 슬퍼하는 죽음도 알고 보면 생명의 기운에 의한 것이지 죽음의 기운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생명, 새 몸, 새 옷을 입기 위해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정녕 우리가 우주의 진리에 순응하여 살아간다면 절대로 비참해지거나 허무 속에 빠지지 않는다.  어떠한 조건도 없이 언제나 생명의 기운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간은 바보가 되어 욕심을 접고 소욕으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소욕의 밭을 이루었으면 다음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곧 염불. 경전공부. 참선, 그리고 갖가지 선행들을 형편에 맞게 꾸준히 행하여 가는 것이다.  물론 근기(根機)에 따라서는 단숨에 불법을 증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 대부분의 사람들은 갈고 또 갈고, 닦고 또 닦아야 한다.  결코 '나'를 빼어난 능력을 지닌 '천재'로 생각하지 말고 '둔재'라고 생각하면서 꾸준히 닦아가야 한다.

  물론 닦아가는 과정에는 수많은 번뇌가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일어나는 번뇌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번뇌는 뚜렷한 주체가 없기 때문에 홀연히 일어났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냥 내버려두면 저절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생다겁 동안 번뇌망상과 친구가 되어 지낸 우리는 번뇌가 일어날 때마다 그 친구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 친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것6이 문제이다.  내가 있는 불교신행연구원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전화를 하여 하소연을 한다.

  "간절히 기도를 하라고 했는데 망상이 일어나서 큰일이에요.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는지요?"

  그렇다.  특별한 방법은 없고,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생다겁 동안 친구가 되었던 번뇌가 치성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기도. 참선 등을 통하여 마음이 고요해지고 있기 때문에 번뇌가 더욱 심하게 일어나는 듯이 보일 뿐이다.  정진 중의 번뇌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할 일이 아니다.  다만 이전처럼 친구가 되어 함께 놀지 말고, 다시 염불이나 화두에다 마음을 집중하면 번뇌는 저절로 사라진다.

  이렇게 거듭거듭  채찍질하여 수행을 하다보면 저절로 지극히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서 마음이 차츰 맑아지는데, 맑아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통하게 되어 마침내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 경지에 이를 때까지 결코 고삐를 늦추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깊이 명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깨달음은 '찾아 나아간다'고 하여 구하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깨달음은 스스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법계에 충만되어 있는 해탈의 기운은 내 마음이 맑고 밝아짐에 따라 스스로 다가온다.  아니,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다시 원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행복도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스스로 다가오는 이치를 다 같이 명심하자.  이것이야말로 수행의 비결이요, 복된 삶의 비결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찰의 법당 외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심우도(尋牛圖), 소를 찾아 그토록 헤매다가 결국은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주객(主客)을 모두 잊고 일원(一圓)의 진리를 깨닫게 됨을 묘사한 이 심우도 역시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일심수행을 통하여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 모든 번뇌를 맑히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번뇌의 삶을 사는 이들은 밖으로 밖으로 해탈과 행복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그들이 가는 그 어느 곳에도 해탈과 행복은 없다.  이에 비해 참된 불자들은 해탈과 행복을 밖에서 구하지 않는다.  안으로 안으로 되돌아보면서 스스로의 번뇌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모든 땅과 바다를 덮고 있는 제석천의 그물처럼, 시방삼세 어디에나 어느 때에나(一切處 一切時) 항상 가득한 진리를 마음껏 끌어다가 쓸 수 있게 되고 우리는 불법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부디 명심하라.  그 비결은 지심귀명례!  지심귀명례에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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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사대보살(四大普薩)

 

지심귀명례 대지문수사리보살 대행보현보살

至心歸命禮 大智文殊舍利普薩 大行普賢普薩

대비관세음보살 대원본존지장보살 마하살

大悲觀世音普薩 大願本尊地藏普薩 摩하薩

 

크나큰 지혜의 문수사리보살님,

크나큰 행을 실천하시는 보현보살님,

대자비의 관세음보살님,

크나큰 서원의 본존이신 지장보살님,

그리고 모든 보살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명례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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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문수사리보살

 

 

  어떤 이가 보살인가

  예불문을 외우면서 올리는 일곱번의 '지심귀명례'중 네번째인 이 구절은 부처님의 가족인 승보(僧寶) 중 보살대중(普薩大衆)에 대한 귀명례이다.  먼저 보살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간략히 살펴보자.

  보살의 원어는 범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이다.  보디사트바는 깨달음. 각(覺)을 뜻하는 '보디(Bodhi)라는 단어와 유정(有情). 중생을 뜻하는 '사트바(Sattva)'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따라서 보디사트바를 직역하면 '불법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이(以佛道化衆生) 또는 깨달은 유정(覺有性)'이 된다.

  그런데 이 단어 중 매우 흥미를 끄는 것은 '사트(Sat)'이다.  '사트'는 생명 또는 씨를 지칭한다.  이러한 사트의 의미를 살려 보디사트바를 풀이하면 '생명을 일깨우는 자', '씨를 돌아보고 생명의 본질을 돌보는 자'가 된다.

  곧 보살은 우리의 내면 속에 있는 깨달음의 생명을 돌보는 자, 각자(覺者)인 부처가 되기 위해 언제나 스스로의 진실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분이다.  따라서 처음 보리심을 발하여 부처님의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에 있는 모든 존재를 보살이라 정의할수있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보살이 되고자 하는 이는 무엇보다 먼저 보리심을 발하여야만 한다.  그야말로 보리심을 발하지 않는자는 보살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보리심이란 무엇인가?

  보리심은 범어 보디시타(Boddhicitta)를 옮긴 말이다.  '보리'로 음사되는 보디(Boddhi)는 각(覺). 도(道). 지(智)로 옮겨지고, 심(심)으로 번역한 시타(Citta)에는 의지. 열망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곧 보리심은 깨달음의 실현, 불교의 실천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정열을 의미한다.

  따라서 보살이 되려면 무상정등각을 이루어 기필코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을 굳게 세우고 어떠한 고난도 능히 극복하겠다는 결심을 가져야 한다.  나아가 다른 중생의 고난도 기꺼이 짊어지고 그들을 구원하면서 불도의 완성을 위해 정진하겠다는 보리심을 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여 부처가 되는 길, 곧 보살의 길로 들어서도록 인도하는 분이, 보살을 향해에 대해 '지심귀명례'를 올릴 때 첫번째로 등장하는 문수사리보살님이시다.

 

  문수사리보살의 10대원

  문수사리는 범어 만주슈리(Manjushri)를 음역한 말이다.  원어의 '만주'는 달다(甘). 묘하다. 훌륭하다는 뜻이고, '슈리'는 복덕. 길상( 吉祥)의 뜻으로, 합하여 훌륭한 복덕을 지니니 분, '묘길상(妙吉祥)'등으로 풀이된다.  우리는 이 문수사리보살을 네 글자로 줄여서 '문수보살'로 많이 부르고 있다.

  일찍이 문수보살은 열 가지 큰 서원을 세웠다.

 

  1)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할 수 있게하고, 갖가지 방편으로 불도에 들게 한다.

  2) 문수를 비방하고 헐뜯는 중생, 심지어는 문수의 목숨을 앗아 가는 중생까지도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3) 문수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깨끗한 행을 하거나 나쁜 짓을 하거나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4) 문수를 속이거나 업신여기거나 삼보를 비방하는 불손한 자까지도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5) 문수를 천대하고 박해하는 자도 보리심을 내게 한다.

  6) 살생을 업으로 하는 자나 재물에 욕심이 많은 자까지도 보리심을 내게 한다.

  7) 모든 복덕을 부처님의 보리도에 회향하고 중생이 모두 복을 받게하ㅇ며, 모든 수행자로 하여금 보리심을 내게한다.

  8) 나쁜 짓을 많이 하여 육도를 윤회하는 중생들과 함께 태어나 교화하되, 혹은 빈궁자가 되고 혹은 소경. 벙어리. 귀머

       거리. 거지가 되는 등 모든 중생 속에서 같은 종륭, 같은 인연, 같은 일, 같은 행동, 같은 업으로 그들과 함께 살면

       서 불법에 들게 하고 보리심을 내게 한다.

  9) 삼보를 더럽히고 나쁜 짓을 많이 하여 악도를 헤매는 중생들과 일부러 인연을 맺어, 인연따라 변화하여 구제하고

      그들로 하여금 보리심을 내게 한다.

  10)문수와 인연이 있거나 없거나 관계없이 자비희사(慈悲喜捨)와 허공같이 넓은 마음으로 중생을 끊임없이 제도하여 

       정각( 正覺)을 이루게 한다.

 

  이상과 같은 문수보살의 십대원을 곰곰히 새겨보면 참으로 이채롭다.  문수보살은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처럼 중생의 현실적 고통을 치유하는 차원이 아니라, 오로지 보리심을 일으키고 부처가 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수를 믿고 따르고 사랑하는 자만을 제도하겠다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문수를 미워하든 사랑하든, 악인이든 선인이든, 살생을 하였건 삼보를 비방하였건 상관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수보살은 약하고 구제받기 힘든 자들과 일부러 인연을 맺어 함께 행동하고 생활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생각을 불러 일으키고, 그들로 하여금 해탈의 길로 나아가게끔 이끌어 들인다.  그분은 항상 중생의 깨달음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왜?  보리심을 발하여 깨달음을 이루면 모든 고통과 장애와 잘못은 저절로 자취를 감추기 때문이요, 부처가 되는 것 이상의 큰일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수보살은 중생의 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하는데 관심을 쏟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문수보살은 '지금 이 자리

에서 편히 살 수 있게 하는 복덕을 주고자 하지 않고 진정한 공덕의 세계를 열어주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불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불교를 수십년 믿은 사람들조차도 복덕과 공덕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잠시 달마대사와 중국 양나라 무제와의 대화를 음미해보자.

 

  527년, 달마대사가 서역으로부터 중국 남방에 이르자 양무제는 대사를 수도인 남경으로 모셔 오도록 하였다. 독실한 불자였던 무제는 인사가 끝나기 바쁘게 물었다.

  "내가 즉위한 이래 무수히 많은 절을 지었고 무수히 많은 경전을 만들어 유포하였으며, 수많은 승려에게 공양을 올렸소.  그 공덕이 과연 얼마나 되겠소이까?"

  "공덕이 전혀 없습니다."

  "어째서 공덕이 없다고 하시오?"

  "그러한 것들은 속세의 조그만 행위로서, 형체에 그림자가 따르듯이 因에 대한 과보만이 따를 뿐입니다.  그림자가 존재하는 듯이 보이더라도 그것은 실제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럼 진정한 공덕은 어떠한 것이오?"

  "진정한 공덕은 청정한 지혜 속에 묘하고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공덕과 복덕!  이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복덕은 세간의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덕스러운 행동이요, 공덕은 출세간의 해탈을 이루는데 밑거름이 되는 마음가짐과 수행이다.

  실로 달마대사의 말씀처럼 아무리 많은 절을 짓고 경전을 간행하고 스님들을 공양하는 불사를 하였을지라도 그 일이 복을 짓는 일로써 끝날 때는 참된 깨달음과 전혀 무관하다.  그것은 오직 복덕을 쌓은 것일 뿐이다.  쌓아놓은 복을 다 소모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그때는 禍가 찾아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덕은 다르다.  보리심을 발하여 마음을 비우면서 지혜를 밝혀가면 영원히 멸하지 않는 공덕을 심어 부처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문수보살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복덕이 아니라, 오로지 해탈의 밑거름이 되는 공덕에만 관심을 보이신다.  누구라도 좋다.  문수보살은 언제나 모든 중생의 道心과 함께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끝없이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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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심과 수행을 돕는 문수보살

  그리고 이를 증명이나 하듯이 현재 널리 전승되고 있는 문수보살에 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발심과 수행을 돕는 일에 직결되어 있다.  그 중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고려시대에 살았던 明悟. 達眞. 惠明 세 스님은 오랫동안 함께 정진하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어느 해 겨울, 세 스님은 결사적인 용맹정진을 약속하고 양식을 준비하여 삼척에 있는 태백산 深源庵(지금의 동막)으로 들어갔다.

  10월 14일, 세 스님이 열심히 결제(結制) 준비를 하고 있는데, 누더기 걸망을 짊어진 노스님 한분이 찾아와 방부(房付.결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함)를 드리는 것이었다.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튿날인 15일이 되면 결제가 시작되고, 결제가 시작되면 승려들은 나다니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허락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신 세 스님은 비밀리에 의논하였다.

  "저 노스님을 쫓아버릴 핑계가 없으니 함께 정진하기는 하되, 규칙을 엄하게 세워 조금이라도 규칙을 어기면 호되게 경책하자. 며칠이 지나면 틀림없이 경책에 못 이겨서 스스로 떠날 것이야."

 세 스님은 노스님을 청하여 그들이 정한 규칙을 말하였다.

  "노스님, 이렇게 함께 정진하게 된 것도 인연인가 봅니다.  노스님께서는 저희 세 사람의 가운데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리고 누구든지 잠깐만 졸아도 장군죽비로 사정없이 경책을 하도록 합시다."

  "좋습니다."

  결제가 시작되었다.  노스님은 젊은 스님들의 의도에 맞추기라도 하듯 좌선을 하기 위해 앉기만 하면 정신없이 졸았고, 세 스님은 장군죽비로 노스님을 사정없이 때렸다. 

  '며칠만 지나면 스스로 물러나겠지.'

  그러나 보름 정도가 지나자 그토록 만ㄶ이 졸고 많이 맞던 노스님이 '내가 언제 졸았느냐'는 듯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도리어 세 스님을 경책하는 것이었다.  노스님은 젊은 스님들이 졸 때마다 장군죽비로 매섭게 내리쳤고, 그 경책 속에서 젊은 스님들은 정말 참선공부를 잘 할 수 있었다.  마침내 해제일(解制日)이 되자 노스님이 인사를 하였다.

  "소승은 양식도 마련하지 않고 왔건만, 스님들 덕분에 겨울 한 철을 잘 났습니다.  고맙소이다."

  노스님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누더기 걸망을 지고 주장자를 짚으며 왼쪽으로 휙 돌아 청사자(靑獅子)를 만들더니, 그 위에 올라앉아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세 스님은 이 광경을 보고 비로서 깨달았다.  문수보살께서 그들의 수행을 돕기 위해 함께 머물러 계셨다는 것을!  그들은 허공을 향하여 무수히 절하면서 간청하였다.

  "문수보살님이시여, 젛ㅢ들의 인연처(因緣處)를 가르쳐 주옵소서."

  이때 어디선가 삼척동자가 나타나더니 노래를 하듯이 말하고 사라졌다.

  "명오는 갈래사, 달진은 김룡사, 혜명은 법흥사로 가라."

 

  1900년 초, 범어사에는 해담스님이 계셨다.  계행 하나만은 철두철미하게 지킨 스님이었지만, 천성이 괴팍하여 계행을 자기 혼자만 지키는 것처럼 남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러한 해담 스님이 문득 울산시 울주구 청량면 청량산에 있는 문수암으로 찾아가 삼칠일(21일) 기도를 올리고자 하였다.

  괴팍한 만큼 성격도 깔끔했던 스님은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렸고, 마침내 삼칠일 기도의 회향날이 되었다.

  스님이  巳時에 올릴 마지를 지어 법당으로 올라가는데, 난데없이 과객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온몸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고, 죽은 강아지를 담은 망태기까지 들고 있었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요.  제발 밥 좀 주시오."

  "기도 회향날, 이렇게 부정한 것이 들어오다니!  썩 나가시오."

  해담스님은 크게 화를 내며 몽둥이를 들고 그를 쫓아내었다.  과객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절 문밖으로 쫓겨나면서 불쑥 한마디의 말을 던졌다.

  "염정불이(染淨不二)니라."

  더럽고 깨끗한 것이 둘이 아니라는 이 말만을 남기고 망태기에서 죽은 강아지를 꺼내어 툭툭 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강아지는 커다란 청사자로 변하였고, 과객은 청사자의 등 위에 올라앚아 허공으로 멀미 멀리 날아가버렸다.  이렇게 문수보살의 가피를 입은 해담스님은 발심을 새롭게 하고 열심히 정진하여, 오래지 않아 도를 이루었다.

 

  이제까지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두 편의 문수보살 영험담을 살펴보았다.

  먼저 앞의 이야기에서, 문수보살은 젊은 세 스님의 공부를 돕기 위해 태백산 깊은 산중에 몸을 나타내었다.  노스님으로 변화한 문수보살은 세 스님을 사정없이 경책하여 참선공부 최대의 적인 졸음을 물리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참으로 공부를 잘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해제를 하자 곧바로 문수보살의 참 모습을 보여주어 그들의 신심, 곧 보리심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머무르면서 공부할 미래의 인연처까지 일러 주었다.

  인정사정 없는 경책.  문수보살은 애틋한 정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달래거나 격력하기보다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부족한 것을 일깨워주고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한다.  이것이 문수보살의 특징이다.

  해담스님에 대한 문소보살의 깨우침 또한 마찬가지이다.  문수보살의 한마디의 말 속에는 보리심을 일깨우는 큰 힘이 있다.

  "染淨不二!  더럽고 깨끗한 것이 둘이 아니다."

  해담스님은 계율을 열심히 지키면서도 '나는 청정하고 계율을 잘 지키지 못하는 이는 더럽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계율을 잘 지켜 계율과 하나가 되면 청정 그 자체가 된다.  어찌 여기에 더럽고 깨끗함에 대한 분별심이 일어나랴.  만약 계율을 통하여 염정을 구분하게 된다면 이미 계율은 그 사람에게 있어 해탈법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결박하고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죽은 개를 망태기에 담아온 문수보살은 해담스님의 오류를 '염정불이'라는 한 단어로 꼬집었다.  염과 정은 상대적이다.  상대적인 벽에 갇혀 있으면 결코 보리심을 발현시키지 못한다.

  더럽고 깨끗함, 좋고 나쁨, 괴롭고 즐거움 등의 상대적인 감정속에 사로잡혀 있으면 위없는 깨달음이나 중생제도는 커녕 자기 자신조차도 구제할 수가 없다.  이것이 문수보살의 깨우침이다.  정녕 '대지문수사리보살'을 외우며 예불을 올리는 우리는 이와같은 문수보살의 깨우침을 상기하면서 우리 속의 오류를 고쳐가고 깨달음의 마음인 보리심을 발현시켜야 한다.  그것이 바로 문수보살의 대지혜인 般若이기 때문이다.

 

  경전 속의 문수보살

  이제0 대지혜의 문수사리보살, 문수보살의 반야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살펴보기 전에, 여러 불경 속에 문수보살이 어떠한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가를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결론부터 밝히면 문수보살은 (1)역사적 실존인물이요  (2)모든 불보살의 어버이요  (3)오대산에 항상 머물러 있으면서 설법을 하고 계신 분이다.

  문수보살을 역사적인 실존인물로 표현한 대표적인 경전은 <문수사리반열반경 文殊師利般涅槃經>이다.  그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보자.

  문수보살은 인도 사위국(舍衛國)의 다라(多羅) 마을에서 범덕(梵德)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라서 여러 선인(仙人)을 찾아다니며 출가의 법을 구하였으나 그를 감당할 스승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석가모니불의 제자가 된 문수는 수도하여 수능엄삼매를 이루었고, 언제나 불가사의하고 어려운 일을 행하였다.  그리고 석가모니불이 열반에 드신 후 450년이 경과하면 雪山으로 들어가 5백명의 선인에게 부처님의 경전을 설해주고 고향으로 돌아가 열반에 들게 된다고 부처님께서 예언하셨다.

  또 <문수사리현보장경>에는 "문수사리가 오백명의 이교도를 교화하여 스스로 그 스승이 된다"고 하였고, <대지도론 대지도론>에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문수보살이 미륵 등의 여러 대보살들과 함께 대승경전을 결집(결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몇 가지 경전을 근거로 하여 현재 학계에서는 문수보살을 이 세상에 출현했던 석가모니불의 제자요 대승경전, 특히 <반야경 반야경>을 결집하고 편찬한 이로 보고 있다.

  두번째, 문수보살은 모든 불보살의 어버이로 표현되고 있다.

  <아자세왕경 >에서는 "문수사리는 보살들의 어버이다" 하였고, <불설방발경 >에서는 "지금 내가 부처가 되어 32상 80종호를 갖추고 존귀한 위신력으로 시방의 일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문수사리의 은혜 덕분이다.  본래 그는 나의 스승이었다.  옛 과거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들도 모두 문수사리의 제자이며, 미래의 부처님들도 또한 문수사리의 은혜를 입게 된다.  비유컨대 세간의 어린아이에게는 반드시 어버이가 있듯이, 문수는 불도 가운데의 부모이다."

  이렇게 문수보살을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어버이로 표현하고 있는 까닭은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청정무구한 반야의 지혜를 상징하고 있는 보살이요,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부처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문수보살은 성불을 가능하게 하는, 곧 부처님을 탄생하게 하는 반야바라밀 그 자체인 것이다.

  이밖에도 문수보살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일설에는 문수보살이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돕기 위해 일시적으로 몸을 바꾸어 보살의 지위에 머무르고 있으나, 오랜 옛적에 이미 성불하여 용존상불. 대신불. 신선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또 미래에 성불하여 보견여래로 불릴 것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다른 일설에는 현재 북방의 상희세계에 있는 환희장마니보적불이 곧 문수보살로서, 이 부처님의 이름을 들으면 지극히 무거운 죄도 소멸된다고 한다.

  특히 중국과 우리나라의 불자들이 깊이 믿고 있는 것은 세번째인 문수보살의 五臺山常住設(언제나 오대산에 머물러 계심)로서, 이는 <화엄경>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동북방에 보살이 머무는 곳이 있으니 청량산(淸凉山, 곧 오대산)이라 이름한다.  오랜 옛적부터 많은 보살이 항상 그 산중에 머물렀는데, 현재 문수사리보살이 그 권속 1만 보살과 함께 머물러 계신다. 문수사리보살은 언제나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다."

                                                                                                                       <화엄경보살주처품>

 

  "이 섬부주. 인도의 동붑방에는 대진나(중국)라고 이름하는 나라가 있다.  그 나라에 한 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오정(오정, 곧오대)이라 한다.  문수사리동자가 언제나 이곳에 머물고 노닐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을 한다."

                                                                                                                     <문수사리법보장다라니경>

 

  이와 같은 경전의 말씀에 근거하여 중국의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항상 머물러 계시는 근본도량으로 받들어져 왔고, 지금도 각양각색의 문수보살상을 모신 사찰들이 오대산 전역에 가득차 있다.

  그리고 신라의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당나라의 오대산으로 향하였고, 그곳에서 문수보살로부터 '신라땅 오대산에도 문수보살이 항상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된다.  자장율사는 신라로 귀국한 즉시 강원도의 오대산을 찾아가서 그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이 땅에도 문수진신이 항상 머물러 계신다는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매우 할 말이 많지만 지면 관계상 다음 기회로 미룬다.

 

 

  무착선사와 문수보살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반야의 문수보살과 함께 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반야바라밀 그 자체인 문수보살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가를, 한편의 고사를 먼저 음미한 다음 살펴보고자 한다.

 

  당나라 때의 스님인 무착문희(820-900) 선사는 문수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남쪽항주에서부터 북쪽의 오대산까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온 몸을 내던지는 오체투지의 절을 하면서 갔다.  마침내 오대산 금강굴 부근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이 소를 거꾸롤 타고 오다가 말을 걸었다.

  "자네는 어떤 사람인데 무엇하러 이 깊은 산중에 앉아 있는가?"

  "예,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왔습니다."

  "문수보살을 가히 친견할 수 있을까?"

  말끝에 노인은 그 순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자네 밥 먹었는가?"

  "안 먹었습니다."

  "순 생짜로군."

  그리고는 소를 타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무착선사는 노인이 범상치 않은 분임을 느껴 뒤를 따랐고, 얼마쯤 가니 금색이 휘황찬란한 절이 나타났다.

  "균제야."

  노인이 시자를 부르자, 시자는 뛰어나와 소를 받아 매었다.  잠시 뒤에 차가 나왔는데 다완은 모두 보석으로 만들어졌고, 차를 마시니 몸과 마음이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상쾌해졌다.

  "세상에 이런 차가 있다니!"

  혼자 감탄하고 있는데 노인이 물었다.

  "자네 어디서 왔는가?"

  "남방에서 왔습니다."

  노인은 찻잔을 들고 다시 물었다.

  "남방에도 이런 물건이 있는가?"

  "없습니다."

  "이런 물건이 없다면 무엇으로 차를 먹는가?"

  묵묵히 앉아 있으니 노인이 다시 물었다.

  "남방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住持하는가?"

  "末法比丘가 계율을 지켜 유지합니다."

  "대중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혹 3백명도 되고 5백명도 됩니다."

 무착스님은 노인의 질문에 왠지 싱거운 생각이 들어 되물었다.

  "여기서는 불법을 어떻게 주지합니까?"

  "범부와 성현이 함께 살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느니라."

  "여기의 대중은 얼마나 됩니까?"

  "전삼삼후삼삼(前三三後三三)

  대중의 수를 물었는데도 앞도 삼삼이요 뒤도 삼삼이라니.....

  무착스님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뿐이었다.  그럭저럭 날은 저물어 가고 무착선사는 노인에게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하였다.

  "染着이 있으면 잘 수 었다."

  마음에 그릇된 집착이 있는 사람은 여기에서 쉬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다시 물었다.

  "자네 계행을 지키는가?"

  "예, 어릴 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염착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네는 여기서 잘 수가 없네."

  노인은 시자인 규제를 시켜 무착선사를 배웅하게 하였다.  밖으로 나오면서 절 이름을 물으니 "반야사'라고 하였다.  그리고 '전삼삼후삼삼'이라고 한 노인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동자에게 물었다.

  "동자야, 내가 대중의 수호를 물었는데 '앞도 삼삼이ㅛ 뒤도 삼삼'이라 하셨으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

  "대덕아!"

"예."

  "이 수효가 얼마나 되느냐?"

  무착선사는 그 뜻을 리해할 수 없어 법문을 청하였다.

  "동자여, 나를 위해 법문을 해주시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가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 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이 노랫소리를 듣는 순간 크게 깨달은 무착선사가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보이던 절은 씻은듯이 보이지 않았다.  선사는 오대산에서 돌아온 뒤에 열심히 공부하여 도인이 되었다.  그리고는 젊은 스님들이 도안이 되는 것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공양주를 자청하였다.

  하루는 큰 가마솥에다가 죽을 끓이는데 갑자기 솥에서 상서로운 광명과 함께 문수보살이 연꽃처럼 피어올랐다.  이전에 꿈에도 그렸던 문수보살이 나타난 것이다.  이 광경을 목격한 대중들은 절을 올리며 경탄을 하였지만, 무착선사는 주걱으로 문수보살의 뺨을 후려치며 소리쳤다.

  "문수는 내 문수요 무착은 내 무착이다."

  그러자 죽의 방울방울로부터 천만의 문수보살이 나와 허공을 가득 채웠고, 무착선사는 닥치는대로 주걱으로 후려쳤다.  이에 문수보살은 자취를 감추며 일러주었다.

 

  내가 삼대겁을 수행하였건만

  오늘 노승의 혐의를 입고 돌아가는구나

  쓴 꼬두박은 뿌리까지 쓰고

  단 참외는 꼭지까지 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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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의 반야를 '나'의 것으로

  옛부터 불교집안에서는, 수행인이 문수보살을 친견하면 般若를 이루어 初見性을 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많은 수행인들이 문수보살을 친견하기를 발원하며 열심히 기도를 올리곤 하였다.

  무착선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착선사는 지극한 신심을 기울여, 그야말로 지심귀명례를 하면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문수보살은 노승의 몸으로 모습을 나타내었지만, 노승은 신심있는 수행자 무착에게 '장하다'는 칭찬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첫 질문부터가 엉뚱하기 짝이 없었다.

  "자네 밥 먹었는가?"

  진리의 밥을 먹었는가를 물은 것이다.  무착선사가 끼니마다 먹는 밥에 대해 묻는 줄 알고 '안 먹었습니다."고 하자, "순 생짜"라고 하면서 소를 타고 가버렸다.  노인의 뒤를 쫓아 휘황찬란한 절에 이르른 무착선사는 청량을 안겨주는 차를 대접받았다.  보석으로 만들어진 다완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노인은 '남방에도 이런 물건이 있는가"를 물었고, 무착선사는 '없다'고 대답해쑈다.

  여기서도 동문서답이다.  당연히 차는 다완에 받아마시는 것이건만 무착선사는 보석에 눈이 어두워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자 노인은 따끔하게 꼬집었다.

  "이런 물건이 없으면 무엇으로 차를 먹는가."

  여기까지가 제1라운드이다.  무착선사는 바깥 형상과 겉모습에만 집착하였고, 노인은 그 그릇된 집착을 깨뜨렸다.  사람이면 누구나가 빠지기 쉬운 겉모습만의 삶에서 깨어나라며 방망이질을 한 것이다.

  제2라운드에서 노인은 남방불교의 현황을 물었다.

  "남방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주지하는가?"

  "말법 비구가 계율을 지켜 유지합니다."

  반대로 무착선사가 이에 대해 물었을 때 노인은 뜻밖의 대답을 한다.

  "범부와 성현이 함께 살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느니라."

  자기의 해탈에만 집착하는 소승불교는 비구들의 것이다.  비구 범부와 성현이 함께 살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으면서도 조그마한 무질서가 없다.  그야말로 원용무애(圓용無碍)이다.  노인은 이것을 깨우친 것이다.

  그리고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하자 "染着이 있으면 잘수 없다"고 하였다.  물들고 집착하면 잘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계행을 잘 지킨다"고 하자, "그것이 집착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하면서 동자를 시켜 쫓아낸다.

  여기서 우리는 불자라면 당연히 지켜야할 계율에 대한 집착을 '염착'이라고 한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물론 이것이 계율을 지키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마구 행동하고 마구 먹는 막행막식( 莫行莫食)을 해도 좋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불도를 닦고 계율을 지녀, 닦아도 닦음이 없고 지켜도 지킴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도 애써 지킴을 고집하는 단계에 있으니 '염착'이라고 한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 반야의 세계로 들어가는 妙가 있다.  假!  바로 우리가 의지하고 또 집착하고 있는 현재의 가식적인 모습을 비워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교리 중 '삼제'라는 것이 있다. 空. 假. 中 세 글자로 구성된 삼제는 무상정등각의 경지인 중도에 따르는 방법을 밝ㄷ힌 것으로, 세속적인 假의 모습을 모두 비워버리고(空) 새롭게 태어날 때 무상정등각의 中道 위에서 살 수 있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이 이야기에서의 '염착' 또한 마찬가지이다.  거짓된 틀, 습관화된 형식을 모두 비워버릴 때(空) 있는 그대로를 볼수 있는 般若 속에서 살 수 있게 되고 진리는 나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이론으로만 알아서는 완전한 반야를 발현시키지도 못하고 해탈의 몸을 이루지도 못한다.  그래서 노인은 다시 무착선사에게 반야지혜의 원용무애한 경지로 나아가는 向上의 一句를 던져주었다.  그곳에서 살고 있는 대중의 수를 묻자 '前三三後三三'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제3라운드이다.

  전삼삼후삼삼!  이것은 불교의 1천6백 가지 話頭 중 한가지이다.  이 뜻을 깨우치면 진리와 하나가 된다고 한다.  무착선사는 '대중의 수효가 앞도 삼삼이요 뒤도 삼삼'이라는 이 말의 뜻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 의문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가 동자로부터 "깨끗하고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이라는 법문을 듣고 무착선사는 見性을 함과 동시에 반야의 지혜를 얻게 된다.

  하지만 문수보살과 무착선사와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 나지 않는다.  무착선사가 도인이 된 다음 공양주 소임을 맡아 젊은 스님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을 때, 죽을 끓이는 가마솥에서 수천의 문수보살이 연꽃처럼 피어나자 죽을 휘젓던 주걱으로 문수보살을 닥치는대로 치면서 '문수는 네문수, 무착은 내 무착'이라 하였고, 문수보살은 무착선사의 깨달음을 인정하는 노래를 부르며 자취를 감추었다. 

  "문수는 네 문수, 무착은 내 무착"이라는  경지 속에는 어떤 염착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와 하나가 된 무착선사의 당당한 모습이요 반야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경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불교수행은 완전히 끝난다.  이렇게 문수보살은 무착선사를 통하여 반야를 발현시키는 방법과 완전한 해탈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자, 이제 다시 한번 정리하자.  정녕 우리가 문수보살의 반야 지혜를 증득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현재 빠져 있는 헛된 모습에 대한 집착부터 비워버려야 한다.  우리의 거짓된 모습을 남김없이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가식을, 염착을 다 비워버리면 저절로 마음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진다.  이 밝음이 반야이다.

  부디 모든 염착을 버리고 반야의 지혜를 발현시켜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라. 실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면 기뻐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

  미혹은 불행의 씨가 된다.  염착이 눈앞을 가리고 있으면 고통만 더욱 커진다.  문수보살은 미혹과 염착 때문에 그릇되게 사는 중생들을 위해 깨달음으로 향하는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고,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반야지혜의 눈을 열어 주신다.  곧 팔정도의 첫번째인 正見을 성취시켜주는 것이다.  자상함보다는 엄하게 정진을 독려하고 無碍를 가르치는 문수보살님!  예불을 올리는 우리는 다시금 보리심을 발하고 이분의 반야지혜를 나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다져야 하리라.

 

 

 

 

대행보현보살

 

 

  수행의 길을 관장하는 보현보살

  문수보살이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되겠다는 결심, 곧 보리심을 일으키도록 하는 분이라면 보현보살은 올바른 수행의 길로 인도하여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도록 하는 분이다.

  문수와 보현보살은 우리 모두에게 '自覺의 길을 열어보이는 보살'이라는 점에서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문수보살은 시작인 發心에, 보현보살은 과정인 수행 자체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부처의 般若智를 상징하는 문수보살과 불지를 향한 수행과 원(行願)의 광대함을 상징하는 보현보살.  이 두 보살은 부처님이 지닌 대표적인 두 힘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반야의 지혜는 부처를 있게끔 하는 근거가 되며, 행원은 부처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수행을 가리킨다.  모든 부처님은 이 반야의 지혜를 의지하고 행원을 실천하여 참된 깨달음을 이루신 것이다.

  따라서 모든 구도자들도 이 지혜와 행원에 의지하여 해탈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구도자에 있어 지혜와 행원은 두 개의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다.  한 바퀴만으로는 결코 구를 수 없는 것이 수레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대웅전에는 석가. 문수. 보현의 삼존불이 가장 많이 봉안되고 있다.  왜 석가. 문수. 보현의 삼존불을 많이 모시게 된 것일까?  그 까닭은 지혜와 행원 없이는 그 누구도 부처를 이룰 수 없다는 것과, 지혜를 온전히 갖추고 행원을 원만하게 성취할 때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존재인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해서이다.

  실로 문수보살은 언제나 중생을 향해 끊임없이 반야의 지혜를 발현시킨다.  어디에서나 보현보살은 중생제도를 위해 쉼없이 행원을 실천한다.  그러면서 이들 두 보살은 서로를 돌아본다.  문수는 다신에게 부족한 보현의 행원을 닦고 익히고자 하며, 보현은 문수의 지혜를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은 가장 좋은 벗이 되어 함께 중생을 제도한다.  마지막 한 중생을 제도할 그날까지 그들은 서로 배우고 서로 사모하며 시작도 끝도 없는 보살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불교의 여러 신행담에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보현보살의 행동 또한 문수보살처럼 약간은 괴팍스러운 데가 있다.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처럼 측은함을 품고 중생의 고난을 구제하기보다는, 특이한 은유로써 수행인의 그릇된 자세를 고쳐주고 참된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수행의 길을 관장하는 대행보현보살!  먼저 우리 귀에 익은 拾得의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중국 당나라 때, 천태산 國淸寺에는 三聖이 화현하여 함께 머물러 있었다.  아미타불의 화현이라는 豊干선사와 문수보살의 화현인 寒山, 그리고 보현보살의 화현인 습득이 바로 그분들이다.

  풍간선사가 적성 지방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찾아가보니 열살 쯤 된 아이가 길에서 울고 있었다.  마을 사람에게 아이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이름도 모르고 집도 모른다고 하였고, 아이 또한 말을 할 줄 몰랐다.  하는 수 없이 아이를 국청사로 데리고 와서 '길에서 습득한 아이'라 하여 '습득'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길렀다.

  국청사에 머무른 지 3년, 습득은 비로소 말을 하기 시작했고, 사찰 측에서는 법당에 향을 사르고 촛불을 켜고 마지를 올리는 일을 시켰다.  얼마 동안 착실히 맡은 바를 행하더니 하루는 이상한 행동을 하였다.  법당의 부처님과 마주앉아 불기의 밥을 몽땅 먹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처님 주위에 시립하고 있는 第子像을 향하여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쯧쯧, 불쌍한 나한아.  불쌍한 나한아."

  국청사의 승려들은 습득이 미쳤다고 여겨 법당 출입을 못하게 하고, 부억에서 설겆이만 하게 하였다.  습득은 설겆이를 하면서 한톨의 밥찌꺼기도 버리는 일이 없었다.  부지런히 밥찌꺼기를 모아 대나무통에 넣어두었다가 국정사 뒷산에 사는 정체불명의 野人인 한산이 오면 먹게 하였다.  어느 날 습득은 대중스님에게 말하였다.

  "나에게는 신령한 구슬 한 개가 있다.  五陰 속에 묻혀 있건만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하지만 대중스님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로'라는 별명만 붙여주었다.  그 뒤에도 '바보' 습득의 이상한 짓은 계속되었고, 어느날 밤에는 국청사 대중스님의 꿈에 천태산 산신이 나타나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스님네들, 제발 습득을 좀 말려주소.  습득이 나를 때리면서 크게 꾸짖었다오."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너는 산신으로써 伽藍을 잘 수호하는 것이 임무이다.  그런데 어찌 스님의 공양을 받느냐?  이후부터는 스님의 공양을 받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까마귀들이 사중의 음식을 훔쳐 먹는 것을 금지시키라'고 하였소."

  국청사 산신이 스님네들이 올리는 마지를 받는 것과 가끔 까마귀들이 사찰의 음식물을 가져 가는 것을 꾸짖은 것이었다.  꿈을 꾼 스님들이 산신당으로 함께 가보니, 산신의 몸에는 역력히 매를 맞은 흔적이 있었다.  대중스님들은 비로소 습득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았다.

  그 일이 있은 뒤  습득에게는 소를 기르는 임무가 주어졌다.  습득은 소를 기르면서 알수없는 노래를 큰소리로 불렀다.  그러던 어느날 보름마다 한번씩 스님네들이 모여 戒를 설하는 布薩法會가 열리자, 소를 몰고 법당 앞에 이르러 손뼉을 치고 가가대소를 하며 말하였다.

  "한가합니다 그려.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무엇을 하는 거요?"

  "저 미친 바보놈!  포살을 파괴하다니."

  계를 설하던 스님이 크게 노하자, 습득은 또 웃으며 노래하였다.

 

  성내지 않는 것이 계율이요

  청정이 바로 출가인의 마음

  나와 너의 불성은 다를 바 없고

  모든 법은 차별이 없는 것일세

 

  더욱 노한 스님들이 법당에서 뛰쳐나와 습득을 때리면서 '소를 끌고 가라'고 하자 습득이 말하였다.

  "나는 더 이상 이 소를 기르지 않겠소.  이 소들은 모두가 전생에 이 절에서 일을 보았던 스님들이오.  자세히 보시오."

  그리고는 큰소리로 호명했다.

  "전생의 율사 홍정스님 나오너라."

  "음메~"

  흰소가 소리치며 나왔고, 습득은 계속 이름을 불렀다.

  "전생의 전좌(典座. 절 살림을 맡아 사는 소임) 정본스님."

  "전생의 원주....."

  "음메~"

  "음메~"

  습득은 소가 된 전생의 스님들을 차례로 불러내더니, 마지먁으로 큰소 한 마리를 잡고 말하였다. 

 

  전생에 짐승처럼 계행을 안 지켰으니

  금생에 이러한들 누구를 원망하랴

  부처님의 법력은 크고 또 크시건만

  그대 스스로가 은혜를 저버렸네

 

  이 일이 있은 뒤 습득은 한산의 손을 잡고 함께 천태산의 바위굴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속인의 모습으로, 또 국청사의 일꾼으로 잠시 사바세계에 몸을 나타내었던 보현보살.  보현보살은 무엇을 깨우쳐주기 위해 중구 천태종의 총본산인 국청사에 '습득'이라는 이름으로 화현한 것일까?  잠시 습득의 이야기를 음미해보자.

  습득에게 첫번째 임무로 국청사 법당의 향과 촛불 관리, 마지를 올리는 일이 부어졌을 때, 그는 부처님의 마지를 먹어버렸고 나한들을 小乘法을 닦는 수행자라며 측은햐게 여겼다.  공양을 받아야 할 존재는 흙이나 쇠로 만든 불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며, 수행자는 소승의 나한을 목포로 살지 말고 모름지기 대승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일러준 것이다.  하지만 습득은 '미친 놈' 취급을 받았다.

  다시 습득은 설겆이 일을 맡았고, 설겆이 때마다 생겨나는 밥 찌꺼기를 모아 문수보살의 화신이라는 한산에게 먹도록 하였다.  밥 찌꺼기를 모으는 보현보살과 찌꺼기밥을 먹는 문수보살.  이분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일러주고 있는가?

  대승 수행자는 더럽고 깨끗함을 넘어서야 하고, 한톨의 쌀알도 헛되이 함이 없이 모질게 도를 닦아야 함을 깨우쳐주고 있다.

  나아가 습득은 '五陰속에 묻혀 있는 구슬'을 이야기하며 최초의 설법을 한다.  참된 보배가 일사의 색. 수. 상. 행. 식의 오음 속에 있건만, 밖에서 도를 찾아 헤매는 그릇된 수행자세를 꼬집은 것이다.  그러나 습득은 '바보'라는 별명만 하나 더 얻게 된다.

  이윽고 습득은 그의 참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 첫번째 대상은 천태산의 산신이다.  산신을 꾸짖고 산신을 때려 산신으로 하여금 스님들의 꿈에 나타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산신을 핍박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산신에게 계속 공양을 올리는 스님들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대승의 수행자는 헛된 믿음의 길로 나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일러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습득은 소를 키우는 목우자가 되어 포살법회에 참석한 스님들을 경책한다.  진정한 계율은 형식에 있지 않고 청정한 마음가짐에 있으며, 깨달음을 이루려면 일체중생 모두에게 불성이 있음을 깨달아 차별없는 법을 펼쳐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하지만 스님들이 분노하여 몰매를 가하자, 습득은 道로 이끌어들이는 가장 낮은 방편, 곧 인과응보의 도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음을 보여주어 그들의 발심을 새롭게 한다.  소가 된 스님들의 전생 법명을 호명하며 한 마리씩 불러낸 것이다.  그리고는 한산의 손을 잡고 바위굴 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춘다.

  수행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승보살도에 맞게 잘 수행을 해야 부처가 될 수 있지, 허망된 신앙에 빠지고 달리 인정을 구하면서 적당하게 수행하여서는 남는 것이 業밖에 없다는 것을 '습득'의 이야기는 깨우쳐주고 있다.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의 원(行願)을 거듭거듭 다지면서 끊임없이 정진하는 것만이 최상의 방법임을 일러주고 있다.

  '습득'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이 세상에 몸을 나타낸 보현보살은 스스로의 힘으로 부처가 되는 自覺의 수행에만 관심을 두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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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보살의 십대행원

  그럼 보현보살은 어떠한 수행의 길을 걸었고, 구체적으로 어떠한 수행법을 가르쳐주고 있는가?  바로 보현보살의 十大行願속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  십대행원이란 무엇인가?

  먼저 <화엄경> 普賢行願品의 첫 구절을 그대로 옮겨보자.

 

  보현보살은 부처님의 거룩한 공덕을 찬탄하고 나서 여러 보살과 선재동자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부처님의 공덕은 비록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들께서 수없이 많은 세월을 두고 계속하여 말씀할지라도 끝까지 다하지 못하느니라.  만일 부처님의 거룩한 공덕을 성취하고자 하면 마땅히 열 가지 크나큰 행원을 닦아야 한다.  무엇을 열 가지 행원이라 하는가?"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함이요 (禮敬諸佛)

  둘째는 부처님의 덕행을 찬탄함이며 (稱讚如來)

  셋째는 여러가지로 공양함이요 (廣修供養)

  넷째는 지은 허물을 참회함이며 (慘悔業障)

  다섯째는 남의 공덕을 같이 기뻐함이요 (隨喜功德)

  여섯째는 설법해주기를 청함이요 (請轉法輪)

  일곱째는 부처님이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함이며 (請佛住世)

  여덟째는 부처님을 본받아 배움이요 (常隨佛學)

  아홉째는 이웃의 뜻에 따름이며 (恒順衆生)

  열째는 모두 다 돌려줌이니라 (普皆廻向)

 

  이것이 십대행원이다.  어찌보면 특별한 행원인듯 하지만,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께 (1)예비를 드리고 (2)찬탄하고 (3)공양하고 (4)참회하고 (5)공덕을 따라서 기뻐하고 (6)법문을 청하고 (7)이 세상에 오래 머물러주시기를 청하고 (8)본받아 배우고 (9)중생에게 순응하고 (10)회향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생들은 '나'밖에 모르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나'의 굴레를 쉽게 벗어버리지 못한다.  보현보살의 십대원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나'의 애착, '나'의 욕심, '나'의 굴레에 사로잡혀 살기 때문에 해탈로부터 자꾸만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실로 보현보살은 '나' 중심으로 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를 열어 진리의 세계에 맡기고 살 것을 가르치고 있다.  '나'의 모든 생각을 비우고 진리 그 자체인 부처님께 맡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잠깐 우리의 삶을 돌이켜보자.  현재 대부분의 우리는 '나'의 욕심에 짓눌린 채 살아가고 있다.  내가 잘먹고 내가 잘하고 내가 잘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지배당한 채 허둥대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는 어떠한가?  잘먹고 잘하고 잘살고 있는가?  솔직한 대답은 "아니다"일 것이다.  내가 욕심에 지비를 받고 있는 이상, 내가 평화롭게 사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나'의 욕심을 쉬고 '나'의 욕심을 놓아버릴 줄 알아야한다.  그리고 진리 또는 부처님께 '나'를 내맡긴 채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야 한다.  '잘살아야지'하는 생각보다는 진리에 입각하여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다보면 저절로 잘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보현행원은 바로 이와같은 원리에 입각한 실천법이다.  '나'를 부처님 또는 진리로 바꾸어놓는 수행법이다.  '나'를 놓아버리고 진리에 맡기면 '나'는 진리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어찌 우리 스스로가 문을 닫고 살까보냐.  스스로를 감옥 속으로 집어 넣는 아집의 문을!

  이제 우리는 '나'의 문을 보다 넓게 열어야 한다.  부처님께만 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과 사회와 세계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나' 혼자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회에 보탬이 되고 전체를 감싸안으며 보람있게 살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그리고 실천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보현행원의 이상은 실현된다.

  이제 이러한 관점에 맞추어 보현보살의 십대행원을 다시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1) 禮敬諸佛 : 모든 사람을 부처님처럼 대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듯6이 우리 이웃

       의 인격을 존중한다면, 이 사회는 틀림없이 부처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아가는 불국토가 될 것이다.

  (2) 稱讚如來 : 모든 이웃의 좋은 점을 칭찬해주고 찬탄을 하면 아무리 악한 사람도 차츰 바뀌게 된다.  칭찬을 아끼지

        말자.  칭찬을 통하여 힘을 얻고 완전한 인격자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중생임을 명심하면서......     

  (3) 廣修供養 : 공양은 함께 나누어 가지는 일이다.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이웃과 서로 나누는 생활을 할 때

        닫힌 문은 열린다.  형편따라 능력따라 후회없이 두루 나누어 가질 때, 나의 마음에는 자비가 깃들고 깨달음의 씨앗은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이다.

  (4) 慘悔業障 : 참회는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을 반성하는 것이다.  잘못이 있으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할 줄 알아야 한다.

        참으로 '잘못했다'고 할 때 모든 업장은 녹아내린다.  마음을 비우고 무조건 참회할 때 모든 이웃은 '나'와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5) 隨喜功德 : 수희는 더불어 기뻐하는 것이다.  이웃에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자.  함께 기뻐하는 가운데 질투는

       사라지고, 우리는 보다 평화로운 세계에 안주할 수 있게 된다.

  (6) 請轉法輪 : 우리가 부처님께 진리의 법문을 베어주기를 청하였듯이, 우리 또한 이웃에게 진리의 법문을 전하고자 노력

        해야 한다.  진리 속에 함께 머무는 자, 그들은 가장 좋은 도반이다.

  (7) 請佛住世 : 부처님뿐만 아니라 훌륭한 스승들이 이 세상에 계시도록 잘 섬겨야 한다. 훌륭한 스승이 어찌 부처님뿐이랴

        랴.  '나'만 분명하다면 나를 애먹이는 자, 나를 슬프게하는 자, 나를 꾸짖는 자들이 모두 '나'의 스승인 것을!

  (8) 常隨佛學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언제나 부지런히 배우고, 부처님의 과거 수행시절처럼 보살도를 실천해야 한다. 

        보살도는 결코 남만을 이롭게 하는 利他行이 아니다.  이타행 그 자체가 '나'를 이롭게 하는 자리행이라는 것을 깨달아

        야 한다.

  (9) 恒順衆生 : 항순중생은 말 그대로 이웃을 잘 이해 하고 연민히 여겨 언제나 거두어주는 생활을 뜻한다.  하지만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는 것, 그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진리에 입각하여 '나'의 뜻보다는 '너'의 뜻을 헤아릴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10) 普皆廻向 : 회향은 내가 지은 공덕을 다른 무엇을 위해 쓰는 것이다.  좁게 해석하면 자신의 노력으로 이룩한 정신적

        물질적인 여유를 사회와 이웃에 돌려주는 생활이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회향은 내가 쌓은 공덕을 조금도 남김

        없이 중생의 행복과 성불을 위해 기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회향할 때 '나'의 벽은 저절로 무너진다.  회향이 올바로 되

        어 모든 벽이 무너지면 '나'의 마음은 온 우주와 하나가 되고, '나'는 우주의 충만한 기운을 받아쓰는 대자유인이 될 수

        있다.

 

  불교에는 종파마다 갖가지 수행법이 있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행할 수 있는 수행법으로는 보현보살의 십대행원을 으뜸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십대행원 중 어느 하나만이라도 철저히 행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단, 보현보살은 이에 대해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그 조건은 보현보살이 열 가지 행원을 설하면서 한 가지 행원이 끝날때마다 반드시 강조한 사항이다.

 

  "이와 같이....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지라도 나의 이 행원은 다하지 않으리니, 생각 생각 잊지 않고 되새겨서 몸과 말과 생각의 삼업으로 꺼리거나 싫증을 냄이 없으리라."

 

  바로 이 구절 중 "꺼리거나 싫증을 냄이 없으리라"라는 것이 보현 보살의 요ㅗ구조건이다.  우리는 각자가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일에 확신을 갖지 못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싫증을 낸다.  중심을 잡지 못하기 때문에 방황을 하고 포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현보살의 행원은 꺼리거나 싫증냄이 없는 굳건한 정열을 가슴에 품고 정진할 것을 강조한다.  '꺼리거나 싫증냄이 없이' 부단히 정진하지 않으면 보현행원을 실현할 수 없고, 결국은 도중에서 하차를 하게 된다.  곧 부처를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현행원을 닦는 우리는 곧세게 굳세게 결심하여야 한다.  "보현보살의 십대행원 중 하나만이라도 물러남이 없이 꼭 실천하겠다"고.

  그와 동시에 우리는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보현보살의 행원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  불법 수행에 별다른 묘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열면 되는 것이다.  내 마음을 이웃과 우주를 향해 열어보라.  이웃과 우주는 내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깨달음은 그대로 '나'의 것이 된다.  그렇게만 되면 내가 서 있는 여기가 바로 극락이요 불국토가 된다.

  물론 '나'를 버리고 마음을 완전히 여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비우고 또 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수행이요 보현행원이기 때문이다.  부디 대승의 불자답게 보현보살의 십대원으로 부처님을 향하여 진리를 향하여 문을 열도록 하자.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이웃, 세계의 모든 중생을 향해 문을 열어보자.  틀림없이 대행보현보살은 우리를 부처의 경지로 인도할 것이다.

  이제 한산과 습득이 주고 받은 깨달음의 법문 한 편을 소개하면서 '대행보현보살'에 대한 끝맺음을 대신하고자 한다.

 

  한산이 습득에게 물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비방하고 업신여기고 욕하고 비웃고 깔보고 천대하고 미워하고 속이니 어떻게 대처함이 좋을까?"

  "참고 양보하고 내버려두고 피하고 그들을 공경할 뿐, 그들과 함께 따지지 않는다면 몇 해 후에는 그들이 저절롤 그대를 바로 보게 될 걸세."

  "그런 것들을 모두 비켜갈 비결은 없을까?"

  이때 습득이 노래로써 답하였다.

 

  늙은 몸이 누더기 옷 입고

  거칠은 밥으로 배를 불리며

  해진 옷 기워 몸을 가리니

  모든 일은 인연을 따를 뿐

 

  누가 나를 꾸짖으면

  나는 '좋습니다'하고

  누가 나를 때리면

  나는 쓰러져 눕네

 

  얼굴에 침을 뱉아도

  마를 때까지 그냥 두나니

  내 편에선 애쓸 것 없고

  저 편에선 번뇌 없으리

 

  이러한 바라밀이야말로

  신묘하기 짝이 없는 보물

  이 소식을 바로 알기만 하면

  도가 차지 못할까 걱정할 것 없네

  사람은 약하나 마음은 약하지 않고

  사람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하지 않나니

  한결같은 마음으로 행을 닦으면

  언제나 부처님의 도에 머무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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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예불문 속의 4대보살 중 미혹 속에서 방황하는 중생들을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는 自利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이 문수와 보현보살이라면,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은 대자비로서 중생의 현실적 고난을 없애주는 利他의 보살이다.

  자리와 이타!  어느 누구든 이 둘을 모두 갖출 때 이상적 인간인 보살이 되고, 문수. 보현. 관음. 지장의 4대보살께서 가르치는 정신을 올바로 수용하여 '나'의 것으로 만들면, 自覺과 覺他를 모두 갖춘 깨달음의 길에 이르게 된다.

  남을 이롭게하고(利他) 남을 깨닫게 하는 (覺他)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불자들이 잘 알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두분 보살님의 구원능력에 대해 간략히 서술한 다음, 두편의 이야기를 통하여 '나' 속에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의 本心을 담는 방법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한다.

 

   대비관세음보살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그분은 天上이나 극락에 안주하고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현세에서 괴로움을 걲는 인간에게 해탈을 이룰 수 있게끔  도와주는 보살이요, 拔苦與樂하는 자비의 화신이며 현세의 구제자이다.

  "만약 갖가지 고뇌를 받고 있는 무량백천만억의 중생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칭명하면, 관세음보살은 곧바로 그들의 음성을 관하여 모두 해탈케 한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있는 이 구절은 관음신앙의 요체와 관세음보살의 현세이익적 염원을 단적으로 표출시킨 석가모니불의 말씀이다.  이 말씀처럼 관세음보살은 현실 세계에서 괴로움을 걲고 있는 인간의 음성을 마음으로 듣는 절대 전능자이며, 인간의 간절한 기원과 요구를 쫓아 몸을 나타내는 구세대비자이다.

  관세음보살은 普薩道를 행할 때 지극한 誓願을 세웠다.

  "중생이 갖가지 공포와 고뇌로 憂愁孤窮하여 구호를 받지 못하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때, 만약 나를 念 하고 나의 이름을 칭하면 나는 어느 곳에라도 천 개의 귀로써 듣고 천개의 눈으로 보아서 그들의 고뇌를 구제할 것이다.  만약 한사람이라도 그 고뇌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영원히 성불하지 않겠다."

                                                                                                                                  <悲華經>

  이와 같은 서원을 세운 관세음보살이기에, 불교의 깊은 교리를 알고 모르고에 관계없이 고난에 처해 있는 그 어떤 중생이라도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난을 피할 수 있고 복을 받을 수 있으며, 중생의 원에 따라 示現하는 자비로운 관음을 접할수 있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 속에서 구제를 받을 수 있는 고난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법화경> 보문품에서는 七難三毒의 救苦救難을들고 있다.

 

  첫째, 입(口)으로 관세음보살을 지성껏 부르면,

  (1) 불로 인한 재난(火難)

  (2) 물로 인한 재난 (水難)

  (3) 바람에 의한 재난 (風難)

  (4) 각종 무기로 인한 검난(劍難)

  (5) 귀신에 의한 재난(鬼難)

  (6) 감옥에 갇히는 재난(獄難)

  (7) 원수나 도적에 의한 재난(賊難)

  등 일곱가지 재난을 면하게 된다.

  둘째, 마음 (意)으로 관세음보살을 생각할 때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三毒이 녹아내려 청량을 얻고 기쁨을 누리고 지혜를 이룰 수 있다.

  셋째, 몸(身)으로 예배하고 공양하면 훌륭한 자녀를 얻게 된다고 하였다.

  뿐만이 아니다.  관세음보살의 한량없는 자비와 공덕은 세간의 낙을 추구하는 자의 소원까지 저버리지 않는다.

  보배와 재물을 마음대로 얻고자 하는 자,

  불안으로부터의 안락을 구하는 자,

  병고를 없애고자 하는 자,

  잡귀등을 쫓아내고자 하는 자,

  일체의 天魔를 진압하기를 원하는 자,

  모든 怨敵을 꺽어 없애려는 자,

  두려움이 많은 자,

  어두운 눈에 광명을 얻고자 하는 자,

  모든 병이 낫기를 바라는 자,

  높은 벼슬을 바라는 자,

  착한 친구를 만나고자 하는 자,

  일체의 장애가 소멸되기를 원하는 자,

  모든 이의 화합을 바라는 자,

  관제구설이 없기를 바라는 자,

  자손 얻기를 원하는 자,

  공덕성취를 기원하는 자,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자,

  지혜 얻기를 바라는 자,

  부처님을 친견하기 원하는 자,

  보물을 얻으려는 자,

  신선의 도를 성취하고자 하는 자,

  남을 구하는 자,

  天宮에 나고자 하는 자,

  원수를 물리치려는 자,

  善神 만나기를 바라는 자,

  귀신을 부리려는 자,

  부처님의 구원을 바라는 자,

  미묘한 법을 성취하기 원하는 자,

  용왕에게 구호를 바라는 자,

  훌륭한 언변을 얻고자 하는 자,

  중생을 구원하려는 자,

  뭇 사람들로부터 공경 받기를 원하는 자,

  항상 부처님 곁에 있기를 원하는 자,

  많이 듣고 배우기를 원하는 자,

  성불할 때까지 물러나지 않기를 원하는 자,

  곡식과 과일의 풍년을 바라는 자,

  魔軍을 진압하려는 자,

  기갈하는 중생이 청량함을 얻기를 바라는 자 등

  그 누구의 소원도 관세음보살은 저버리지 않고 포용한다.  어떠한 장애가 있는 중생이라 할지라도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관세음보살은 그들의 소원을 남김없이 성취시켜주는 것이다.

  실로 고해의 파도를 타고방황하는 이 사바세계의 중생에게 있어서는 자비의 빛으로 모든 생명을 비추어 주고 구원해주는 관세음보살이 계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크나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 '나무관세음보살'을 부르고 그분의 대자대비에 의지하여 正念으로 산다면 그보다 더 마음 든든하고 큰 행복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눈에 보이게 또는 은근히, 언제나 우리에게 자비의 손길을 뻗쳐주는 관세음보살...   하지만 관세음보살은 우리에게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음식도 돈도 희생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잡됨이 조금도 없는 순수한 사모의 마음으로 현재 우리가 처한 어려움과 어둠의 길을 열고자 하는 간절한 한 생각만을 바랄 뿐이다.  왜냐하면 가나절히 구하는 한마음이라야 그분과 우리가 하나로 합하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고픈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찾듯이, 병자가 훌륭한 의사를 찾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애타는 믿음을 일으켜 관세음보살께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고 하여 마음이  굳어 있어서는 안된다.  마음을 곧골 부드럽게 하여 오로지 일심으로 귀의해야 한다.  이렇게 일심으로 받들다보면, 저절로 관세음보살과 하나가 되어 관세음보살과 함께 말하고 함께 행동하고 함께 싱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원본존 지장보살

  대원본존 지장보살(大願本尊地藏普薩)!  우리는 흔히 지장보살을 '대원본존'이라고 부른다.  지장보살은 처음 발심한 이래 오로지 중생제도를 위한 힘을 길렀고, 중생을 해탈시키기 위해서는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 뛰어드는 일조차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분이 구한 중생은 가히 헤아릴 수도 없는 불가칭 불가설(不可稱不可說)의 수효라고 한다.

  지장보살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여 볼 수 있다.

  첫째, 지장보살은 성불을 포기한 대원의 본존이다.

  지장보살은 이미 여래와 같은 삼매를 증득하고 여래의 경지에 이르러 무생법인(無生法印 : 不生不滅의 진리와 하나가 됨)을 얻었지만, 그분은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오늘도 중생들을 제도하고 있다.  먼저 <지장보살본원경>의 前生談을 잠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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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서로 이웃한 나라의 두 임금은 正法의 벗이 되어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들 나라 백성들은 여러가지 악한 일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이를 측은히 여긴 두 임금은 여러가지 방편을 베풀어 백성들로 하여금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였고, 항상 열 가지 선을 행하여 모범을 보였다.

  어느 날 두 임금은 각각의 願을 발하였다.

  "빨리 불도를 이루어 널리 이들 무리를 남김없이 제도하리라."

  "罪苦에 빠진 이들을 먼저 제도하되, 그들 중 안락을 얻지 못하거나 보리(깨달음)를 이루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결코 성불하기를 원치 않노라."

  이 가운데 성불하여 중생을 구하겠다고 한 임금은 출가하여 일체지성취여래(一切智成就如來)가 되었고, 성불을 원하지 않는 임금은 지장보살이 되었다.

 

  이 경전의 내용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지장보살은 부처가 되어도 오래전에 되었어야 할 분이다.

  모든 사람들은 '성불하고 나서'를 강조한다.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리!'  그러나 지장보살은 자신의 성불을 앞세우지 않는다. 자신의 성불보다는 중생의 성불을 앞세우고 있다.

  "성불하지 못하는 중생이 있으면 나도 성불하지 않겠다."

  이것이 지장보살의 근본 마음이다.

  모든 보살들이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上求普리 下化衆生을 추구하지만, 지장보살만은 상구보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누구보다 빼어난 자비의 힘과 지혜를 갖추었지만, 결코 부처가 되는 데 연연해 하지 않는다.  지장보살의 관심은 중생의 해탈에만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지장보살의 근본 서원에는 그 어떤 보살의 誓願도 따르지 못한다.  그 어떤 부처의 서원도 이를 능가하지 못한다.  서원 중의 서원, 가장 근본이 되는 원, 모든 보살과 부처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本願'으로 가득차 있는 분이 지장보살이다.

  대승의 보살이 소승의 수행자와 다른 점은 하화중생에 있다.  나보다 못한 중생을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대승보살의 특징이요, 이 하화중생이야말로 보살을 있게끔 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만약 보살이 하화중생을 버리고 상구보리만 추구한다면, 그들에게는 이미 보살이라는 칭호가 붙을 수 없다.  그리고 하화중생을 도외시하는 소승의 수행자라면 阿羅漢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뿐, '부처'의 경지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지장보살은 끝없는 용서와 사랑의 보살이다.

  <지장보살본원경> 촉루인천품에서 석가모니불은 지장보살을 이렇게 찬탄하셨다.

  "지장, 지장이여,

  그대의 神力은 불가사의하도다.

  그대의 慈悲는 불가사의하도다.

  그대의 智慧는 불가사의하도다.

  그대의 辯才는 불가사의하도다.

 

十方의 모든  부처님이 그대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천만겁 동안 찬탄하고 말하여도, 능히 다 말하지 못할 것이니...."

  지장보살은 갖고 계신 이 불가사의한 공덕을 모두 중생의 안락을 위해 사용한다.  감히 우리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지장보살의 위대한 공덕은 모두가 사바세계의 중생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의 삶은 어떠한가?  우리의 인생은 인과응보의 굴레에 얽매어 있다.  악한 씨를 심으면 苦의 과보를 받고, 선한 씨를 심으면 樂의 열매를 거둔다.  한량없는 과거의 생애를 살아오면서 몸과 말과 뜻으로 지어온 바를 따라 순간 순간 현재와 같은 모습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業이라고 한다.  업에 따라 중생은 윤회하고, 지은 바 업이 행복과 불행을 좌우한다고 한다.

  중생은 결코 인과응보의 현실, 정해진 업을 면하기 어렵다는 '定業難免'의 영역을 뛰어넘지 못하는 '업덩이'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지장보살의 이름 아래에서는 정업난면의 업설이 적용되지 않는다.  중생의 가장 무거운 죄업이 만들어낸 지옥조차 지장보살의 자비 앞에서는 없어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을 향하면 지장보살과 하나가 되고, 모든 업은 지장보살의 크나큰 본원력에 의해 녹아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왜?  지장보살의 본원력이 끝없는 용서요, 사랑이기 때문이다.

  지장보살은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는다.  오직 衆生愛愍의 悲心으로 끝없이 사랑하고 끝없이 용서할 뿐이다.  불쌍히 여기고 또 불쌍히 여기는 지장보살,  용서하고 또 용서하며, 모든 죄업의 감옥을 부수어버리는 지장보살,  지장보살의 존재 목적은 성불의 길을 열어주고자 하는 것 뿐이다.

  그 어떤 중생이라도 지장보살을 염할 때 고난의 감옥은 부서진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지장의 사랑은 끝이 없다.  열번 백번도 용서할 수 있는 지극한 사랑으로 중생의 업이 만들어 낸 갖가지 장애와 부자유의 감옥들을 부수고, 행복의 세계로, 성불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셋째, 지장보살은 破地獄의 보살이다.

  파지옥....  원래 지옥이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중생의 악한 마음, 지극한 이기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가 지옥이다.  자유로운 하늘의 세계와는 달리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무거운 업보가 땅 속 감옥인 지옥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옥은 한없는 고통의 세계이다.  그 고통은 평범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아니,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불행의 양상을 모아놓은 곳이 지옥일 수도 있다.  그와 같은 지옥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 고통받는 지옥 중생을 남김없이 구하고자 하는 분이 있다. 그분이 바로 지장보살이시다.

  지장보살은 지옥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그곳으로 들어가는 중생을 못 들어가도록 막는다.  때로는 염라대왕의 몸으로, 때로는 지옥졸의 모습을 나타내어 고통받는 지옥 중생에게 설법을 한다.  때로는 지옥 그 자체를 부수어서 모든 지옥 가족을 천상이나 극락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중생과 함께 하는 한, 지옥은 계속 생겨난다.  그리고 지옥이 있는 이상 지장보살은 지옥을 떠나지 않는다.  지장보살은 수많은 분신들을 지옥의 요소 요소에 배치하여 고통받는 중생의 해탈은 물론, 그릇된 마음의 중생을 고화하고 영원히 지옥을 없애고자 잠시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지장보살의 자비와 원력은 '파지옥'에만 이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장보살은 현세의 행복과 내세의 안락을 함께 보장하며, 나아가 뭇 생명있는 자들을 성불토록 하여 이 윤회하는 세계 자체를 없애고자 하는 '破사바의 보살'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원력과 자비를 담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윤회를 벗어나 寂滅爲樂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지장신앙의 참뜻이며, 지장보살이 존재하는 진정한 까닭임을 기억해야 하리라.

 

  관세음보살의 발원

  이제 관음과 지장, 이 두분 보살의 최초 발원의 이야기를 함께 음미해보자.

  관세음보살이 현세의 求世大悲者로 출현하기까지는 수많은 사연과 수행이 뒤따랐고, 그 근본인연은 아득한 세월 전에 있었던 처절한 고난에서 비롯되었다.

  <觀音本緣經>에는 그때의 사연을 담은 애절한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진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옛날 남인도의 마열바질국에는 장나장자와 마나사라 부인이 살고 있었다.  금실이 좋은 그들은 행복한 부부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지만, 결혼한 지 10여년이 지나도록 자식을 두지 못해 안타까워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天妙神殿에 가서 기도하였다.

   "제석을 비롯한 모든 천신들이여, 아무쪼록 굽어 살펴 귀한 옥동자를 내려주소서.  만일 저희에게 자식을 주신다면 많은 덕과 복을 쌓아 그로 하여금 모든 중생의 의지처가 되게 하겠나이다."

  간절하고 정성스러운 이 기도가 헛되지 않아 그들 부부는 머지않아 아주 잘생긴 아들을 낳았고, 3년 뒤에 또 한 명의 아들을 낳았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 장나장자는 이름있는 관상가를 청하여 두 아들을 보였다.

  "이 두 아이는 용모가 단정하고 여러가지 묘한 모습을 갖추었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게 될 운명입니다.  큰 아이는 이름을 早離라 하고, 작은 아이는 速離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관상가의 예언을 들은 이들 부부는 몹시 불안하였지만 그것도 잠시뿐, 아이들의 재롱 속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조리가 일곱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 마나사라는 갑자기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날부터 장나장자와 어린 두 형제는 슬픔속에서 살아야 했고, 주부가 없는 집안살림은 엉망이 되어갔다.

  마침내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못이긴 장나장자는 사랑하는 두 아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일념에서 새 아내를 맞아들었다.  그녀는 죽은 아내와 모습이 비슷하고 아이들을 잘 돌보았으므로, 장자의 집안은 오래지 않아 안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어느 해 오랜 가뭄으로 큰 흉년이 들게 되자 식량이 없어 굶어죽는 이들이 계속 늘어났고 장나장자도 식량을 구해오기 위해 이웃나라로 길을 떠났다.  처음 아이들을 잘 돌보았던 새어머니는 보름만에 돌아오기로 한 남편이 한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걷잡을 수 없는 이기심에 휩싸여 끔찍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토록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남편은 죽은 것이 틀림없다.  나 혼자서 저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야, 저 아이들을 위해 남은 생애를 허비하기에는 내 젊음이 너무 아까워.  나도 내 인생이 있지 않은가.  더구나 남편의 유산은 모두 아이들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으니.... 나의 장래에 있어 조리와 속리는 가장 큰 장애물이요, 눈의 가시이다.  장애물은 일찍 제거할수록 좋고 가시는 빨리 빼낼수록 좋겠지."

  마침내 새어머니는 아이들을 무인고도에 버려 굶겨 죽이기로 작정하고 뱃사공 한 사람을 매수하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경치 좋고 맛있는 과일이 많은 섬으로 놀러 가자고 꾀었다.

  너무나 기뻐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남해의 무인고도 보나락가산에 도착한 새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음식 준비를 하고 있을 동안 섬을 돌아다니며 화초도 꺾고 조개껍질도 주우면서 놀도록 하였다.  아이들은 새어머니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섬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 섬에서는 맛있는 과일도 아름다운 꽃도 발견할 수 없었고, 새어머니가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와보니 새어머니는 물론 배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어머니!"

  아이들의 애절한 부름을 듣지 못하는 듯, 배는 먼 바다 저쪽으로 까마득히 사라지고 있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없는 무인고도에서 조리와 속리는 굶주림에 시달리며 아버지와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리고 어둠이 깔리면 추위와 두려움을 견디기 위해 둘이서 꼭 끌어안고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지내기를 며칠, 기진맥진한 조리와 속리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손짓하고 있는 듯함을 느꼈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깨달은 조리는 속리를 붙들고 일어서서 조용히 속삭였다.

  "속리야,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하셨단다.  그런데 훌륭한 사람이 되어 보지도 못하고 어머니 곁으로 가게 되는구나.

  속리야, 우리는 어머니의 유언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지금 죽을지라도 혼일망정 성현이 되고 보살이 되자.  그리하여 고통받는 이들의 의지처가 되어 그들을 구제하자꾸나.

  세상에는 부모를 잃고 우리와 같이된 아이들이 얼마나 많겠느냐.  우리는 그들에게 부모의 모습을 나타내어 감싸주고 의지가 되어주며, 또는 어린이의 몸을 나타내어 친구가 되어주자.

  세상에는 우리처럼 헐벗고 굶주리는 이가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 부자의 몸을 나타내어 의복과 양식을 주자.

  그리고 넓은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나 조난 당하는 자가 얼마나 많겠느냐.  우리는 죽은 다음 이 섬의 높은 산에 머물면서 그들을 수호하고 구제하자꾸나.

  또 모든 나라 중생들 중 부처님을 만나지 못해 구제를 받지 못하는 자가 얼마나 많겠느나.  우리는 그들 앞에 부처의 몸을 나타내어 구제해주자.

  또 壁支佛. 聲聞. 梵王. 帝釋. 自在天. 大自在天. 天大將軍. 비沙門天. 小王. 長者. 居士. 帝官. 波羅門을 만남으로써 구제받을 수 있는 이가 있으면 그러한 몸을 나타내어 구제해주고, 비구. 비구니. 優波塞. 優波夷를 만나야 구제를 받을 수 있는 이가 있으면 그러한 몸을 나타내어 구제해주자.

  또 병고에 신음하는 자에게는 약왕신의 몸을 나타내어 병을 낫게 해주고, 흉년이 들어서굶주리는 자에게는 오곡과 잘 익은 과일을 주어 구제해주자.... "

 

  이와 같이 32가지 원을 세운 조리는 속리를

곡 끌어안고 숨을 거두었다.  그 뒤 조리는 관세음보살이 되고 속리는 大勢至普薩이 되어 때로는 함께 때로는 홀로, 중생들을 그 어떠한 조건도 없이 구제하여 깊은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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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마음을 열 때 크게 이룬다

  어린 소년의 죽음과 願力......

  누구나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되면 증오하고 욕을 하고 깊은 원한을 품기 마련이다.  그러나 소년 조리는 달랐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유언을 생각하고 불쌍한 동생을 달래면서 오히려 '자기들처럼 불쌍한 사람을 보살펴주는 존재가 되자'는 원을 세운다.

  "부모 잃은 아이를 감싸고 의지가 되어줄 뿐 아니라, 어린이의 몸을 나타내어 친구가 되어주자."

  "헐벗고 굶주리는 이들에게 부자의 몸을 나타내어 의복과 양식을 주자."

  "넓은 바다에서 조난을 당하는 자를 수호하고 구원해주자."

  나아가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구제해줄 것을 진심으로 소원하며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관음신앙의 뿌리이다.  이러한 善心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힘없는 그 소년은 한 점 증오심 없는 순결한 소원을 일으켜 크나큰 힘을 얻었고, 마침내는 '관세음보살'이 될수 있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원망하기보다는 지극한 사랑을 발현시킨 고결한 마음이 있었기에, 그 나약했던 조리는 求世大悲者 관세으음보살로 화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우리는 어떠한가?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만을 찾고 '나의 것'만을 챙긴다.  '나'에게 맞으면 사랑하고 탐하며, 나에게 맞지 않으면 싫어하고 미워한다.  '나'는 반드시 잘살아야 하고 '나'는 손해를 보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그 '나'에게 슬픔과 고난과 불행은 수시로 찾아든다.  오히려 '나'의 꿈, '나'의 욕심, '나'만의 사랑에 사로잡혀 사는 동안에는 행복이 쉽게 찾아들지 않는다.  짧은 한순간의 성취는 있을지언정, 지속적인 행복과 자유는 더욱 멀리 달아나버리는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나'라는 생각이 벽이 되어 '나'를 더욱 은밀한 밀실 속으로 가두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쌓인 밀실같은 공간.... 그 공간이야말로 지옥이다.  벽이 두터우면 두터워질수록 우리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좁아진다.  '나'에 대한 집착과 사랑과 이익과 욕심에 깊이 깊이 빠져들면, 마침내는 꼼짝도 할 수 없는 무간지옥에 갇혀버리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 좁아 몸을 쉽게 움직일 수조차 없다는 무간지옥!  어찌 이것이 땅 속 깊은 곳의 지옥세계에만 있으랴.  '나'의 욕심에 사로잡혀 이기적으로 살고 '나'만의 굴레에 갇혀 살면 바로 우리가 살고있는 이곳이 무간지옥으로 바뀌는 것이다. 

  결코 우리는 '나'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만의 고무풍선을 불면서 살아서는 안된다.  '나'의 출세, '나'의 명예, '나'의 행복, '나'의 사랑.... 우리는 한평생 내내 '나'의 풍선을 불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나'의 입김을 불어넣으면 풍선은 부풀어 커지고, 또 시간이 지나면 풍선은 줄어든다.  풍선을 한껏 불 때는 '나'가 커진듯이 느끼고, 풍선을 불지 않고 그냥 있을 때는 '나'가 위축되는 듯이 여긴다.  곧 '나'의 풍선을 불 때를 의룍적인 삶, 잘사는 삶으로 생각하고, '나'의 풍선을 불지 않을 때는 무기력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행복이 스스로 다가올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나'의 성취와 '나'의 출세. 명예. 행복. 사랑에 몰두하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이러한 착갹에서부터 깨어나야 한다.  '나'의 풍선을 크게 부는 것이 '나'를 크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참으로 큰 행복을 바라고 큰 자유를 얻고자 한다면 '나'의 풍선 그 자체를 터뜨려버려야 한다.

  풍선 속의 공기는 앏은 고무막 속에 갇혀 있다.  공기를 아무리 많이 불어 넣어도 풍선 속일 뿐이요, 얇은 고무막으로 인해 바깥 공기와는 차단되어 있을 뿐이다.

  정녕 자유롭고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나'라는 풍선을 터뜨려보라.  풍선이 터지면 풍선 안의 공기와 풍선 밖의 공기는 그대로 하나가 된다.  그 순간 나는 대우주와 하나가 되고 대자유. 대해탈의 몸이 된다.  그리고 대우주에 가득차 있는 지혜와 사랑과 행복의 기운은 그대로 '나'의 기운이 되는 것이다.

  풍선 속의 공기와 풍선 밖의 공기.  어찌 이 두 공기가 서로 다른 것이었겠는가!  '나'에 대한 집착으로 스스로 고무풍선의 얇은 막을 만들어 안팎을 구별하고 스스로를 가두어 스스로의 불행을 자초한 것일 뿐......

  관세음보살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고자 하는 우리 불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 쌓은 벽을 무너뜨리고 '나'의 풍선을 터뜨려 버려야 한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도리어 대자비심을 일으켰던 '조리' 소년과 같은 마음가짐을 먼저 배워야 한다.  시련과 힘든 일이 찾아들지라도 남을 원망함 없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자기처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소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남' 또는 '다른 것'을 위하여 보다 큰 마음을 일으킬 때 참으로 큰 것이 '나'에게로 다가오게 된다는 가르침!  우리는 이 이야기 속의 가르침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찾는 자라면 관세음보살의 근본 마음을 버려서는 아나된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모든 소원은 한없는 큰 힘 속에서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녀 지장보살의 선행

 

  아주 오랜 옛날의 일이다.  覺華定自在王如來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한 바라문 집안에 18세의 꽃다운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宿世에 깊고 두터운  복을 심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경과 사랑을 함께 받았다.  소녀의 아버지인 시라선견 또한 불교에 대한 믿음이 두터워, 삼보(三寶: 佛.法.僧)를 철저히 공경하고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三學을 부지헌히 닦다가, 수명이 다하여 하늘나라(天上)에 태어난 지가 오래 되었다. 

  그러나 소녀의 어머니 열제리 부인은 달랐다.  삿되고 방탕한 생활에 빠져 인과의 이치를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불교에 대한 비방도 서슴지 않았다.  어느 날 열제리부인은 술에 취해 쓰러져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혈관이 터지고 전신의 골절이 꼬여드는 고통에 빠져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어머니마저 잃은 슬픔과 외로움이 뼈 속 깊이 사무쳐 흐느껴 울던 소녀의 머리 속으로 불현듯 한 생각이 꿰뚫고 지나갔다.

  "우리 어머니의 혼령은 어느 곳으로 태어났을까?"

  평소 바른 삶과 바른 신앙과는 거리가 먼 분이셨으니 결코 좋은 세상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소녀는 견딜 수가 없었다.

  소녀는 부모님이 남긴 모든 재산을 팔아 어머니를 위한 祭를 올리기로 하였다.  꽃과 향, 여러가지의 의복과 음식과 탕약을 마련하여 각화정자재왕여래가 계신 절을 찾아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날 따라 길거리에는 수많은 걸인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아픔의 신음 소리를 토해내는 자도 있었다.  소녀의 맑은 마음에는 그들의 고통이 그대로 비춰지고 있었다.

  '衆生供養이 諸佛供養이라 하섰으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이 아름다운 소녀는 배고픈 사람에게는 음식을 주고,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는 옷을, 병고에 시달리는 자에게는 약을 주며 위로하였다.

  그러나 길은 멀고 사람은 많았다.  전재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음식과 옷과 약이었지만 어느덧 바닥이 보이고 말았다.  소녀는 마침내 입고 있던 옷까지도 모두 벗어주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되었다.

  소녀는 어느 구덩이 속에 들어가 벗은 몸을 가리고, 유일하게 남은 향을 사르고 꽃을  흩으며 기도하였다.

  "각화정자재왕여래시여.  이제 소녀는 더 이상은 감히 부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중생을 어여삐 여기시고 구제할 자를 구제하여 저의 이 조그마한 淨業을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어머니의 혼령을 위해 자비를 베푸시고, 그 태어난 곳을 알게 하여 소녀의 괴로움을 그치게 하여 주옵소서."

  그 순간 부처님은 소녀의 앞에 나타나 말씀하셨다.

  "착하다, 성녀여.  18세 처녀의 몸으로 옷을 벗어 걸인에게 주고 벗은 몸을 흙 속에 갈무리하였으니 누가 너를 보살이라 하지 않겠느냐!  네 너의 공양을 달게 받고 너의 소망을 성취시켜주리라."

  이 때부터 성녀는 지장보살(地藏普薩: 땅 속에 몸을 갈무리한 보살)이라고 불리워졌다.

  그 뒤 소녀는 각화정자재왕여래의 인도로 지옥이 있다는 대철위산 서쪽의 '重海'라는 바닷가에 이르게 되고, 그곳에서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는 중생의 모습과 지옥의 실체를 파악하게 된다.

  아울러 소녀의 공덕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각화정자재왕여래가 3일 전에 이미 무간지옥에 오셔서 어머니뿐만 아니라 함께 고통받던 죄인들을 모두 구제하여 하늘 나라에 태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사릴을 알게 된다.  지옥에서 나온 소녀는 다시 각화정자재왕여래에게 나아가 원을 세운다.

  "맹세하오니 저는 미래의 시간이 다할 때까지 죄고에 빠진 중생이 있으면 마땅히 널리 방편을 베풀어서 해탈케 하오리다.  맹세하오니 죄고를 받는 六道衆生 모두를 해탈케 한 다음, 저는 성불할 것이옵니다."

  이분이 大願의 本尊인 지장보살이시다.

 

  나누어 가질 때 행복은 먼저 찾아든다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되어버린 18세의 꽃다운 소녀는 모든 유산을 처분하여 어머니의 天道祭를 준비하였다.  꽃과 향, 음식. 의복. 탕약 등을 마련하여 부처님께로 나아가던 소녀는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대하자 자비심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소녀는 무조건 베풀었다.  배고픈 이에게는 음식을, 추위에 떠는 이에게는 옷을, 병든 이에게는 약을 주었다.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祭物은 곧 바닥이 나고 말았다.

  마침내 입고 있던 옷까지 다 벗어주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자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벗은 몸을 숨긴 소녀!  이 소녀의 맑고 깊은 마음과 기도는 그대로 부처님께 전해져 부처님께서 그  앞에 모습을 나타내셨고, 소녀의 소원을 모두 성취시켜 주셨다.

  소녀의 착한 마음 씀씀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세상을 바꾸고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맑은 마음, 순수한 마음이 세상을 바꾸고 '나'의 운명을 바꾸어놓는다.

  흔히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왜 많이 벌려고 하느냐?"고 물으면, "돈 많이 벌어서 좋은 일을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남을 돕기 위해 많이 돈을 벌겠다는 것,  참으로 좋은 뜻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와 같은 뜻을 세우고 피땀 흘려 부자가 된 다음에는 오히려 베푸는데 인색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돈을 모으기 위해 돈에 너무 집착하고 사로잡혀 살았기 때문이다.  누구든 마찬가지이다.  돈벌이에 집착하여 돈 모으는 재미에 빠져버리면 돈에 사로잡혀 마음이 탁해지고, 마음이 탁해져버리면 잘 베풀 수가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돕고자 한다면 넉넉하지 못할 때의 맑은 돈 한푼 한푼을 정성으로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라야 부자가 된 후에도 잘 베풀 수가 있다.  오히려  부족한 듯 할 때 맑은 돈을 보시할 수 있고, 어려울 때 마음을 넉넉하게 써야 선행의 공덕이 더욱 크게 쌓이는 것이다.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이는 걸인들을 보자 측은함을 억제할 수 없어 음식과 옷과 약을 나누어주었던 그 착한 소녀.  어찌 그 소녀가 어머니의 천도제를 망각하였겠는가?

  하지만 소녀는 그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어 맑은 마음으로 마냥 베풀었다.  조건없이 집착없이, 오로지 순수한 사랑으로 샘솟는 자비심으로 베풀었기 때문에 소녀는 지장보살로 탈바꿈하였고, 마침내는  써도 써도 다 쓸 수 없고 베풀어도 베풀어도 모자람이 없는 福德을 모두 갖춘 대보살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맹세하오니, 罪苦를 받는 유도 중생 모두를 해탈케한 다음 저는 성불할 것이옵니다."

  願.  이 세상의 소원 중에서 이보다 큰 원은 없다.  불교의 최고 목표인 성불도 마다하고 중생을 해탈시키겠다는 지장보살의 근본 원력!

  여기서 잠깐 불자들이 일상으로 외우는 四弘誓願을 살펴보자.

 

  가없는 중생을 맹세코 건지리다 (衆生無邊誓願度)

  끝없는 번뇌를 맹세코 끊으리다 (煩惱無盡誓願斷)

  한없는 법문을 맹세코 배우리다 (法門無量誓願學)

  위없는 불도를 맹세코 이루리다 (佛道無上誓願成)

 

  가없고(無邊) 끝없고(無盡) 한없고(無量) 위없는(無上) '그 무엇'을 맹세코 하겠다는 불제자들의 서원.  가없기에 도저히 다 건질 수 없는 중생.  끝없기에 끊어도 끊어도 끝이 없는 번뇌.... 그런데도 불자들은 '맹세코 하겠다'고 말한다.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이것이 비록 모순이요, 이율배반이요, 거짓말일지라도 구도자는 마땅히 하여야만 한다.  가능하기 때문에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참된 보살의 길이요, 마땅히 가야할 길이기 때문에 마냥 나아가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그 길...  불가능할지라도, 지장보살은 시작도 끝도 없는 중생제도의 길 위로 한결같이 나아간다.  이것이 지장보살의 소원이요, 생활이다.

   우리는 그 어떤 성취에 앞서 한결같이 나아가는 지장보살의 대원과 마음씀을 먼저 배워야한다.  지장보살처럼 중생 모두에게 힘을 기울이지는 못할지라도, 스스로가 깊은 인연이라고 생각하는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만이라도 살리는 원을 세우며 살아야 한다.  가정과 환경이 '나'를 위해 존재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주위를 살피는 '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기도를 올리면서 원을 발하여 보라.

  "가족 모두가 잘되고 집안이 잘된 다음 복을 받겠습니다."

  "가족의 고통과 재앙은 저에게 주시고, 제가 받을 복은 가족들에게 돌려주십시오."

  이렇게 좋은 복은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돌리고 고통은 내가 짊어지겠다는 원을 세우며 살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부처님의 제자요, 법왕자인 보살이다.  물론 이러한 원을 세우라고 하면 먼저 두려움부터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원을 세우고 기도하면 나만 불행해지고 힘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누구나 이러한 원을 마음에 품고 살면 가족은 물론이요 나에게도 흠뻑 복이 찾아들게 된다.  왜냐하면 '나'를 불행 속으로 밀어넣었던 '나'의 굴레와 이기심이 이 원 속에서 그만큼 빨리 무너져내리기 때문이다.

  '나'의 풍선이 터지고 '나'의 벽이 무너져내리면 대우주의 무한 행복은 저절로 '나'에게 깃들게 되는 법!  이 원리를 깊이 명심하여 맑고 밝고 깊이 있는 불자가 되도록 노력해보자.

  비록 넉넉하지는 않지만 능력껏 남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사람, 마음처럼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우울해지거나 역정을 내기보다는 명랑함과 용기를 잃지 않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보거나 피해를 입었을 때 인과법을 생각하며 능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조급하게 나아가기보다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보자.

  이렇게 마음을 넉넉하게 쓰는 사람에게는 萬福이 저절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마음을 잘 써서 손해볼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난다고 하여도 기껏 지난 세상의 빚을 갚는 것일 뿐이다.  인생살이란 결코 손해보는 장사도 남는 장사도 아니다. 본전 놓고 본전을 먹는 장사일 뿐이다.

  부디 마음을 넉넉하게 쓰면서 자신있게 살아가자.  '나'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남을 위하는 원을 키우며 살아가자.

  願은 마음가짐이다.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여 꾸준히 나아가면 힘(願力)이 생기고, 마음을 넉넉하게 쓰면 행복은 스스로 깃들게 된다.

  지금 사랑 속에 있으면 서로를 살리는 사랑을 더욱 키워가고, 행복 속에 있으면 행복을 나누어 주고, 슬픔과 불행 속에 있으면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처럼 大悲願을 일으키며 살아가도록 하자.

  부디 명심하라.  '나'의 벽을 무너뜨리고 '나'의 풍선을 터뜨려서 '나'를 맑히고, 가정과 이웃을 살리고 뭇 생명있는 이들을 살리는 원 속에서 살 때 , 대우주에 가득차 있는 행복과 해탈의 기운은 '나'의 것이 된다는 것을...  또한 이것이 관세으음보살과 지장보살의 최초 발심 이야기가 가르치는 바요, 행복을 찾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모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누가 어떻게 살든 인생은 어차피 본전 놓고 본전 먹기!  마음 밭에 씨 심은 대로 결실을 거둘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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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심귀명례 영산당시 수불부촉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독수성

至心歸命禮 靈山當時 受佛付囑 十大第子 十六聖 五百聖 獨修聖

내지 천이백제대아라한 무량자비성중

乃至 千二百諸大阿羅漢 無量慈悲聖衆

 

지극한 마음으로 귀명례하옵니다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부처님의 부촉을 받으신 십대제자시여

십육나한이시여 오백나한이시여 독수성이시여

나아가 일천이백분의 대아라한과 한량없는 자비의 성중이시여.

 

 

십대제자(십대제자)

 

  예불문을 외우면서 올리는 일곱번의 '지심귀명례'중 다섯번째인 이 구절은 석가모니불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도를 깨달았던 위대한 제자들에 대한 귀명례이다.

 

  至心歸命禮 靈山當時 受佛付囑 十大第子 十六聖 五百聖 獨修聖

  乃至 千二百諸大阿羅漢 無量慈悲聖衆

 

  지극한 마음으로 귀명례하옵니다.  靈山會上에서 부처님의 부촉을 받으신 십대제자시여.  십육나한이시여.  오백나한이시여.  독수성이시여.  나아가 일천이백분의 대아라한과 한량없는 자비의 성중이시여

  석가모니불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의 제자는 많고 또 많다.

  그야말로 '무량' 자비성중이다.  그분들이 인도 전역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퍼뜨려 불교는 크게 교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많은 제자들 중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맡아 불교교단의 확립과 중생교화에 공헌한 큰 제자 열분을 일컬어 우리는 '十大第子'라고 부른다.

  부처님의 십대제자.  그분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1) 지혜제일 사리불 (舍利佛. Sariputra)

  (2) 신통제일 목건련(目健蓮. Maudgalyayana)

  (3) 두타제일 대가섭(大迦葉. Mahakasyapa)

  (4) 해공제일 수보리(須普리. Subhoti)

  (5) 설법제일 부루나(富樓那. Purno)

  (6) 논의제일 가전연(迦전延. Katyayana)

  (7) 천안제일 아나율(阿那律. Aniruddha) 

  (8) 지계제일 우바리(優바離. Upali)

  (9) 밀행제일 라후라(羅喉羅. Rahura)

  (10)다문제일 아난다(阿難陀. Ananda)

  현재 우리가 추앙하고 있는 이들 십대제자는 <維摩經 > 第子品에 등장하는 열분 스님들로서, 한분 한분이 석가모니불의 독특한 능력을 하나씩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분들은 교훈이 가득 담긴 행적들을 다양하게 남기고 있다.

  이제 부처님의 큰 제자 열분 스님들의 행적 중 대표적인 일화 한두편씩을 음미하면서, 예불을 올리는 우리 불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스스로 느껴보는 기회를 삼았으면 한다.

 

  사리불과 목건련

  사리불과 목건련은 부처님의 양쪽 팔과 같은 분이다.  십대제자중 지혜제일인 사리불 존자와 신통제일인 목건련 존자는 마가다국의 왕사성 부근 마을에서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났고, 함께 자라면서 매우 친한 친구로 지냈다.

 

  어느 날 사리불과 목건련은 화려한 축제였던 산정제에 참여하였다.  맛있는 음식들, 흥겨운 노랫소리, 모든 사람들이 축제 분위기에 들떠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함께 즐기던 사리불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아, 이렇게 떠들썩하고 즐거운 행사가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남게 될까?"

  시간이 흐르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허탈한 생각이 들자 사리불은 곁에 있던 친구 목건련에게 그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마침 목건련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둘은 '영원한 즐거움을 찾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면서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스승 산자야를 찾아가 출가하였다.

  스승이 가르쳐주는 것을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의 가르침을 모두 이해하고 2백명의 제자를 가르치게 되었다.  하지만 영원한 즐거움은 커녕 마음의 평안조차 얻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상의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은 다 배웠어.  그렇다고 이것으로 공부하는 것을 끝내면 안돼."

  "맞아, 어딘가에 더 좋은 가르침이 있을 거야."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흩어져 다른 훌륭한 스승을 찾아보자.  훌륭한 스승을 찾게 되면 서로 연락해서 같은 길을 걷자."

  하루는 사리불이 길을 가다가, 부처님의 최초 5비구 중 한 사람인 馬勝 비구를 만났다.  마승 비구는 코끼리왕이 길을 가듯 앞만 보고 갈 뿐 이리저리 돌아보지 않았으며, 돌아보더라도 사자처럼 온몸을 돌려서 보는 것이었다.  사리불은 마승비구의 걷는 모습을 보고 크게 느낀 바가 있어 물었다.

  "스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어떠한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나의 스승은 카필라국에서 출가한 왕자 고오타마 붓다요."

  "어떤 법을 배우셨습니까?"

  "모든 법은 인연을 쫓아서 생겼다가 인연이 다하면 없어진다는 법을 배웠소."

  그리고는 그 게송을 노래로 부르고 지나가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부처님 대사문께서는 항상 이러한 설법을 했습니다."

  마하남 존자의 이 말 한마디에 반한 사리불은 목건련에게로 쫓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으며, 두 사람은 그 길로 제자 2백명을 이끌고 부처님을 찾아가 귀의하였다.

  부처님은 매우 기뻐하면서, 제자가 된 이들 두 사람을 모든 제자의 상좌에 두었다.  이는 하루라도 일찍 교단에 들어온 자를 윗자리에 앉게 하는 전통에 어긋난 것이어서 고참 비구들이 불만을 터뜨렸지만,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잘 달래서 두사람을 윗자리에 두었다고 한다.

  그 뒤 사리불은 언제나 부처님 곁에서 부처님의 교화활동을 도왔다.  특히 外典(불교밖의 경전)에0 통달하고 있었던 사리불은 外道들을 교화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수달타 장자가 부처님과 스님들을 위해 기원정사를 지으려 했을 때, 사위성의 바라문들은 자기네 법의 잘못이 부처님에 의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저지하고, 왕에게 부처님과 논의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때 부처님의 명을 받고 사위성으로 가서, 赤眼이라는 바라문과 논의를 하여 굴복시킴으로써 그들 무리들을 부처님께 귀의하게 한 사람이 바로 사리불이다.

  또 부처님의 교화사업을 방해하던 체바닷다가 다섯가지의 비법을 제창하여 승단을 파괴하고 많은 비구들을 꾀어 가야산 속으로 들어갔을 때, 사리불과 목건련은 함께 가야산으로 가서 도리어 5백명의 비구들의 잘못을 깨우쳐 부처님에게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리불을 가리켜 부처님은 '나의 長子'라고 하셨으며, 당신을 대신하여 제자들에게 법을 전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목건련의 신통에 대해서는 <아함경>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도리천을 자유자재로 왕래하였고, 용왕들을 교화하였으며, 오른쪽 발가락으로 땅을 짚어 도리천궁을 진동시키는 등 수많은 이적을 보였다.  그리고 교단 내부의 분쟁해결과 그릇된 수행자를 통제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타락의 길을 걷던 어머니가 죽은 후 아귀의 과보를 받아 극심한 고통 속에 빠져 있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盂蘭盆齎를 열어 어머니를 구하였다는 효성스런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효도의 귀감으로 남아있다.

  한평생 부처님의 양쪽 팔이 되어 교단을 이끌었던 사리불과 목건련 존자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기 얼마 전에 먼저 입적하였다.  대성인에 앞서 가장 큰 제자들이 먼저 입적한다는 인도의 풍습을 따른 것이다.

 

  대가섭과 수보리

  두타제일 대가섭은 흔히 마하가섭이라고도 부른다.  왕사성의 매우 부유한 바라문의 집안에서 태어난 대가섭은 부처님께 귀의하기 전에도 기이하고 청정한 삶을 살아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출가하여서는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아는 少欲知足의 삶 속에서 언제나 頭陀行을 닦아 교단의 우두머리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그 청정한 수행으로 인해 부처님으로부터 중히 여김을 받았고, 열반 전에 부처님께서는 "나의 무상정법을 가섭에게 부촉한다."는 유지를 남기기도 하셨다.

  그러나 대가섭 존자의 위대함은 그 맑디맑은 수행속에 한없는 자비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 한 편을 함께 음미해보자.

 

  어느 날 사위성으로 탁발을 나갔던 대가섭 존자는 부잣집 담밑에 앉아 구걸하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문둥병에 걸린 그녀의 온몸은 부스럼으로 가득하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부스럼이 터져 진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고, 코는 문드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으며, 손발 또한 썩어서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구했는지 쌀죽 한 그릇을 점심으로 먹으려다가 가섭 존자의 인자한 모습을 보고 문득 생각하였다.

  '저렇게 훌륭한 분에게 보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이상한 병에 걸린 것이리라.'

  그녀는 가섭 존자에게 자신의 점심인 쌀죽이라도 대접하고자 했고, 불쌍한 여인의 생각을 알아차린 가섭존자는 기꺼이 다가가 바리때를 내밀었다.  여인은 기쁜 마음으로 가섭 존자의 바리때에 쌀죽을 부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파리 한 마리가 그 쌀죽에 빠져 들었고, 여인은 급히 파리를 꺼내려고 쌀죽에 손을 집어 넣었다.  순간 썩어 문드러진 여인의 손가락 마디 하나가 바리때 속으로 쑥 떨어지는 것이었다.  당황한 여인은 쩔쩔 매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데, 가섭 존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쌀죽을 맛있게 먹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여인은 가섭 존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큰절을 올렀고 가섭 존자는 미소를 지으며 여인에게 물었다.

  "그대의 소원을 말해보시오."

  "저는 가난하고 또 나쁜 병에 걸려있습니다.  빨리 이 몸을 벗고 다음 생에는 하늘나라에 가서 좋은 몸을 받아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대의 소원이 곧 이루어질 것이오."

  오래지 않아 가섭 존자에 대한 신심을 간직하고 죽은 그 여인은 가섭 존자에게 보시한 공덕으로 하늘나라 중 가장 좋은 도솔천에 태어났고,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

  정녕 중생의 해탈을 위하는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이 가장 혐오하는 문둥이마저도 조금도 멀리함이 없었던 대가섭 존자의 자비행이야말로 두타행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空의 이치를 가장 잘 깨달았다는 해공제일 수보리 존자에 대해 알아보자.

 

  사위성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난 수보리는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총명하기가 그를 따를 자가 없었지만, 성질이 매우 험악하여 눈엥 보이는 모든 것을 매도하였고 불만을 표시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러한 성격은 부모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큰 걱정거리가 되었고, 마침내 자기의 성질을 이기지 못한 수보리는 집을 뛰쳐나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산신이 수보리를 기원정사에 계신 부처님께로 인도하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성내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의 허망하고 공한 모습을 깨우쳐주셨다.  이에 수보리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공의 이치를 탐구하여 無諍三昧를 이룰 수 있었다.

  그토록 성내고 시비하고 싸우기를 좋아하였던 수보리가 부처님의 설법 아래 대립과 투쟁이 모두 사라진 무쟁삼매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 뒤 수보리 존자는 어떠한 일에도 동요됨 없이 묵묵한 가운데에서 중생을 교화하였고, 언제나 모든 法의 空 함을 관찰하여 삼매 속에 머물렀다.  이러한 존자의 태도는 부처님이라하여 예외일 수 없었다.

 

  어느 해 여름, 부처님께서는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도리천으로 올라가셔서 3일 동안 설법을 하고 閻浮里地로 내려오신 일이 있었다.  이에 모든 제자들과 신도들은 부처님을 맞이하고 예배드리기 위해 몰려갔다.  때마침 영축산에서 옷을 꿰매고 있던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를 드리려다가 생각했다.

  "여리는 모슨 모양을 하고 계신가?  여래의 참 모습을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뜻(意)이라 할까?  흙(地). 물(水). 불(火). 바람(風)이라 할까?"

  모든 것(一切諸法)은 하나같이 비고 고요하며,조작할 것도 없다(無造無作).  모든 것이 텅 비고 고요하다면 무엇이 '나'인가?  나는 오직 참된 법(眞法)이 모인 곳에 귀명(歸命)하노라."

  그리고는 다시 앉아 옷을 꿰매었다.

  이렇게 수보리 존자는 공의 이치를 철두철미하게 깨달아 여리의 참 모습을 보는 해공제일의 제자였다.  <금강경>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반야경 계통의 경전에서 반야바라밀을 논하는 분이 수보리로 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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