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香

한암 대원스님 법문

똥하 2012. 3. 21. 11:31

“유마경에 이르기를 정토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그 마음이 깨끗함을 따라 불토가 깨끗하다.”고 했는데, 부처님의 세계를 정토(淨土)라고 하고, 이 세상을 예토(穢土)라고 합니다.


  예토의 예(穢)는 더럽다는 뜻이지요. 극락세계는 정토, 중생들이 사는 사바세계는 예토라고 합니다. 이 세상이 더럽다고 하는 이유는 중생들이 탐, 진, 치 삼독심과 오욕의 욕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정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권력을 쥐고 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괴로우니까요.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바세계를 고해(苦海)라고 하고, 이 고해를 예토라고 합니다.


  탐심, 진심, 치심 살리고 죽이고 모략중상하고, 절에 잘 다니는 사람과 절에 봉사 잘 하는 사람을 공연히 시기질투해서 중상모략하고, 누가 절에 불사를 위해서 시주하려하면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가 평상시에 마음 쓰는 것을 보면 예토와 정토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티 없고 욕심 없이 보살과 같은 마음을 쓰는 사람의 세계를 정토라고 하고, 욕심을 부리고 자기편리를 위주로 삼으며 독단적인 더러운 마음을 쓰는 사람의 세계를 예토라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을 동업중생이라고 하고요. 그러한 더러운 마음을 벗어난 사람의 세계를 정토, 극락정토라고 합니다.


  본래 더러운 것이 없으나 중생의 욕심된 생각, 자기 마음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자기편리로 자기 생각만 하는 마음이 예토입니다.


  자신은 괴로울지라도 대중의 고통을 짊어지려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데, 대중의 고통을 자기가 짊어지려는 사람이 드물어요.


  비구승이 300명도 안 되던 과거 정화 때는 대중공사가 참 많았습니다. 밥만 먹으면 대중공사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내가 대중공사에 진절머리가 난 사람입니다.


  공양을 하고 나서 대중공사를 하기 시작하면 어간에 있는 스님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이야기를 하는데 한시간만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시 밥할 때가 되어야 끝납니다. 그러면 밥하기 바빴지요.


  그런 대중공사를 하면 대중스님들이 한마디씩하고는 “이 일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누가 잘못했느냐?” 하고 물으면, 그 때 당시에는 자기가 잘못하지 않았어도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자원해서 나오는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대중 가운데 나와서 가사를 수하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잘못된 모든 책임을 제가 지겠습니다.” 하지요. 이것이 보살이지요. 이것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사에요. 조사의 뜻 다르고 부처님의 뜻 다른 것이 아니에요. 요사이는 어떻게 된 것인지 그런 분을 잘 못 보겠어요. “제가 잘못해서 그렇습니다.”하고 참회하는 사람이 잘 없어요. 다른 절에도 그렇다고 합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국민성부터 개혁을 해야 합니다. 대동단결해야하고,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고 남을 위해 좋은 말 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앉기만 하면 남 안 좋은 이야기, 남 나쁘다는 소리, 헐튿는 소리를 하는데 이러한 마음을 쓰는 세상이 더러운 예토라는 것입니다.


  10년 30년 쭈구리고 앉아 참선해도 그런 마음하나 고치지 못 하면 정토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예토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제가 사람들을 보면 그런 것이 환히 보입니다. “저래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하나?”하는 생각이 들지요. 다만 여러 사람들이 공부를 한다고 하니까 인연이라도 짓도록 잘 봐줘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본래에는 정토고 예토고 없는데 중생들이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업의 눈으로 보니까 본래 정토인 이 세상을 더럽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본인들의 보는 눈이 문제입니다. 전부 없어져서 그런 생각이 없는 천진하고 깨끗한 그 마음이야 이 세상 어느 곳을 가나 정토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머물러 있는 곳은 정토입니다. 정토가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세상에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대로가 정토라는 것이지요.


  “유교경에 이러되 다만 마음을 한 곳으로 잘 단속하면...” 이라고 했는데, 이 세상 사람들이 마음을 잘 단속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자기 생각대로 살고, 자기 목소리 다 내려하니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윗턱 아래턱이 없습니다. 젊은 아이들에게 담배 피운다고 야단하면 맞아죽습니다. 그것뿐인가요? 나라에도 기강이 서지 않고 전부 엉망진창이가 됐다고 합니다. 왜 그리 되었느냐? 하면 전부 자기 목소리 내려하고 자기 생각대로 자유분방하게 살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편안하겠어요? 나중에 가면 자기도 편하지 못하고 집안도 편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편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다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자기 하나를 단속하지 못한다는 소리입니다. 자기를 억제하고 단속하는 것을 지금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 국민들이 시급히 해야 할 일이 바로 자기 마음 단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 단속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앞으로 큰 문제입니다.


  “유교경에 이르되 다만 마음을 한 곳으로 잘 단속하면 판단치 못할 일이 없다.” 즉, 이 마음을 잘 단속하면 성취하지 못할 일이 없는 것이지요.


  “성인은 마음을 구하지 부처를 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요새 사람들이 단전호흡하는 사람, 기를 돌리는 사람, 몸이 변한다고 하는 사람 등 온갖 사람이 다 있습니다. 대전에 사시는 분들은 더러 볼 겁니다.


  그런 것은 모두 유위법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니고 단막극으로 끝나는 유위법입니다. 하나 마나입니다.


  마음의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공부해야 하는데, 마음은 내 던지고 바깥으로 가는 것입니다.


  “성인은 마음을 구하지 부처를 구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를 구하려하지 마음을 구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를 얻으려하고 신을 얻으려하는 등 바깥으로 무엇을 얻으려고 헤매는데, 지혜 있는 사람은 마음을 조복 받고 잘 다스리지 몸을 다스리지 않는다. 기를 돌리고 신선방술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는 소리입니다.


  필생이면 필멸이다. 반드시 생하면 반드시 멸하는 것이 철칙이고 진리입니다. 생과 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생과 멸 자체가 진리에요. 그것 떠나서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과 멸을 없애 치우고, 생도 멸도 없는 것을 취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소리입니다. 생과 멸 그 자체가 영원하다는 것을 바로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생이라는 것은 영원히 끝없이 생합니다. 보십시오. 끝이 없이 무한하게 생하고 있고, 끝이 없이 멸하고 있잖아요. 멸이라는 것도 끝이 없이 무한하고 생이라는 자체도 무한한 것이에요. 생과 멸이 끝나는 것이 어디 있어요. 끝나는 것 없습니다. 연이어서 계속 생하고 있어요. 멸도 끝이 없이 멸하고 있어요. 멸이라고 단막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멸이라는 것이 끝없이 이어져 가고 있어요. 이것은 무한해서 한계가 없어요. 그 생과 멸 자체가 영원한줄 바로 보라는 소리지, 생과 멸을 싹 없애 치우고 생과 멸이 없는 다른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지 말아요. 바로 보고 바로 깨달아야 됩니다.


  멸이라는 것이 철칙이고 법이며, 옷이 다 떨어지면 새로 만들어 있고 영원히 바꾸어 입는 것인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늙어서 죽으려하는 이 몸뚱이에 집착해서 영원히 붙들어 두려는 공부를 합니다. 이것은 사마외도고 영원히 헛된 공부입니다. 천지에 이런 공부는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조복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마음 하나 조복 받지 못하지 않아요. 오늘도 학림사에 법회가 있어 정진한다는 말을 듣기는 들었지만 “뭐 갈 필요가 있나? 등산이나 가서 바람이나 쐬고 술 한 잔 하면서 좀 즐기자.”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리로 이끌립니다. 이 자리에는 오지를 않습니다. 집에서도 저녁에 잠이 안 오면 “재미난 곳에 놀러 나갈까?” 하는 생각 등 오만 가지 생각이 나는데, 그 일어나는 생각을 쫒아가다 보면 안 됩니다. 일어나는 생각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몸을 다스린다”는 말은 나무에 병이 들면 뿌리에 영양실조가 들어 병이 든 것은 모르고 나뭇잎에만 약을 친다는 소리입니다. “마음을 바로 보고 다스린다”는 것은 나무뿌리에 거름을 주고 약을 주면 나무가 싱싱하고 건강하게 모양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도 우리 마음을 잘 다스리면 건강해집니다.


  자신의 주어진 현실을 잘 받아들이면 스트레스도 없이 괜찮은데, 조그마한 일에도 신경질을 내고 삼십육계 도망을 치고 야단이 나는 것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당장 관상이 달라집니다. 신경질 자주 내는 사람은 관상이 달라지고, 얼굴에 바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성질도 안 내고 마음이 온화하고 느긋하고 편안한 사람은 얼굴에 그러한 마음 상태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총무원장이 밑에 사람에게 무시를 당했다면, 성질이 옹색하고 작은 사람은 당장 ‘저놈이 나를 무시해? 저런 놈은 당장 없애 치워야겠다’고 감정적인 생각이 일어나는데, 마음이 무한대하게 수양이 되고 다스려진 사람은 절대 화를 내거나 큰 소리를 치지 않습니다.


  우리 고암 큰스님이 그렇습니다. 절대 화를 내지 않으셨어요. 한번도 화를 내지 않으세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으세요.


  예전에 청담스님이 조계종을 탈퇴하신 바 있고 서암스님도 탈퇴하셨지요. 우리 고암 스님이 종정하시고 청담스님이 총무원장 하실 때, 청담스님이 조계종을 탈퇴를 하셨어요. 그러자 우리 스님이 가셔서 “이 조계종을 정화해서 세우신 분이 탈퇴를 하면 어떻게 합니까.”하고 이야기 하셔서 청담스님이 조계종으로 복귀하셨지요. 그러나 서암 스님은 탈퇴 후에 복귀를 하지 않으셨지요.


  그러니까 참선수행을 해서 마친 사람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절대 화를 내지 않고 그 사람을 쓸어 담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을 가르치고 살립니다.


  이러한 마음을 쓰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지, 공부했다고 하면서 그런 마음 쓰지 못하고 일생동안 ‘무’, ‘무’, 하고 앉아 있으라는 소립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공부하면 자신을 점검할 수 있어요. ‘참선 공부했는데 내 마음이 얼마나 넓어졌는지 또 이 마음을 잘 쓰고 있는지’ 알 수가 있어요.


  처사님이 한 일주일이라도 참선공부하고 집에 오면 마음 쓰는 것이 다르고 편안하여 가족이 처사님을 볼 때 마음이 편안해지고 신심이 날 수 있어야지요. 가족들을 위해 무언가 해 줄 수 있는 마음이 풍겨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참선하고 왔는데’ 하면서 도리어 큰 소리 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현실성 있는 공부입니다.


  일생동안 밥만 먹고 가만히 앉아서 ‘무’, ‘무언고?’ 하고 있는 것이 근본이 아닙니다. 얼른 자기 마음을 뒤집어엎으라는 소리입니다. 해결해야 한다 이 말이지요.


  ‘삼계는 유식’이라고 하는 유식의 사상에서 볼 때 만류를 식으로 나타냅니다.


  ‘이 물건’은 본래 이름이 없습니다. 마음이라 할 때는 ‘마음’이라는 말로 표현했고, 유식법에서는 유식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다 식입니다. 식이 다 있어요.


  참외 농사지어 놓은 밭에 가서 여자들 오줌 누지 말라고 합니다. 전에 저의 아버지가 참외를 많이 갈았는데, 어머니를 절대 밭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자들이 참외밭에서 오줌을 누면 참외가 전부 다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농사 망치는 것입니다.

  감자나 고구마 밭에 가서 여자가 오줌만 누면 쭉 다 갈라집니다. 그 놈이 신기하게도 잘 압니다.


  식이 다 있어서 안다는 소리입니다. 만법이 유식이라 식이 다 있습니다. 나무뿌리도 자라다가 단단한 돌이 있으면 돌아서 좋은 땅으로 갑니다.


  그래서 몸을 다스리려 하지 말고 마음을 다스리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불명경에 말씀하시기를 죄는 ...”


  그저께 ‘나는 감옥에서 형을 받고 있는 수형잡니다’하고 쓴 편지가 한 통 부산에서 와서 답장을 했습니다. 그분 역시 부처님의 말씀을 여러모로 많이 접했는데 읽을 때는 신심이 나고 좋은데 얼마가지 않아 마음이 다시 답답해져서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불교방송극에서 간행한 ‘눈 있는 자 보고 귀 있는 자 들으라’는 책에서 “한번 내 자신을 깨달으면 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 이것은 확실하다.”는 글을 읽고 궁금하기도 하고 용기가 나기도 해서 편지를 드린다고 했어요.


  그런데 죄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는 것입니다. 죄 안 짓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 세상에 죄 안 짓는 사람 없어요. 다만 경중에 따라서 틀릴 뿐이고, 또 무거운 죄를 짓고도 다른 방패막이를 해서 감옥에 안 간 사람도 있는 반면에 죄를 가볍게 짓고도 감옥에 간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돈과 권력으로 인하여 죄 없는 사람이 감옥에 가고 반대로 죄 있는 사람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일이 오늘날 없다고 볼 수 있겠어요? TV와 신문에 노다지 그런 뉴스가 나오지 않아요. 검사가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고 다들 말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죄가 다 있는데 이것은 마음을 쫒아서 생기는 것이지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또 도리어 마음을 쫒아서 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마음을 쫒아서 일어났다가 마음을 쫒아서 없어진다. 그런고로 알아라 선이니 악이니 하는 일체가 다 자기 마음을 쫒아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근본이 됨이니 여러분이 이러한 죄업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근본을 알아라. 만약에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공연히 수고로움만 허비하게 된다.”


  몸을 다스리려고 한다든지 기를 돌린다든지 호흡을 한다든지 명상을 한다면 헛되이 공로만 허비한다는 것이지요.


  “바깥 모양으로 구하고자 한다면 옳다고 할 곳이 없다. 선문경에 이르되 바깥 모양에서 구한다면 비록 수천 겁을 지날지라도 마침내 능히 이루지 못하리라.”


  우리가 바깥 모양에서 영원한 행복과 편안함을 구한다면 옳지 못 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목적은 편안하게 행복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고통스러운 불행을 버리고 편하고자 과학과 물질을 발전시키지 않습니까. 서양은 물질을 발전시켜 나가면 편안함을 이루리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물질을 발전시켜도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마약, 총기 사건 등으로 불안하니까 결국 눈을 돌려 불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곳곳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안으로 돌이켜서 마음을 관조해서 깨달아야한다.” 내 마음의 세계를 관조해서 깨달아야 거기에 영원한 편안한 자리, 영원한 안식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관(觀)이라고 하니까 여러분들은 잘못 알고 몸을 관하고 안으로 마음이 나가고 들어가는 것을 이렇게 보고 있는 것을 관이라고 하는 데 그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깨달은 사람만이 관하는 사람을 주워 담아서 깨달음의 세계로 길을 열어 주는 겁니다. 과거에도 관법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은 못 쓰니까 내어 버린 것이 아니고, 관을 해서 깊은 선정의 고요한 세계에 침체해 빠져있는 그 사람을 구하는 것이 선지식입니다.


  과거에 우두 법륭 선사 같은 분이 그런데 빠져 있었고 또 4조 같은 분도 깨어나기 전에 그렇게 빠져 있었지만, 선지식이 찾아가서 일깨워서 깨닫게 해 주었지요. 문답을 해서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바로 최고의 대각의 차원에서 주거니 받거니 한 마디 일러 주니까 그 살아 있는 소리로 인해 죽음의 고요 속에 침체해 있다가 뛰쳐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깊이 관에 빠져 있는 사람은 그 상태가 자신이 평생 공부한 자기 재산이기 때문에 버리면 죽는 줄 알고 그것에 대해 가장 심한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법우 스님 같은 분도 일생동안 호흡을 해서 기를 돌리는 공부를 했는데 앉아서 떠올라요. 저도 이렇게 뜨는 것을 봤습니다. 얼굴은 달 같이 밝습니다. 스님인데도 그 공부하고 앉았어요. 고봉 스님이 그 분에게 가서 아무리 타일렀지만, 도리어 고봉 스님에게 “네가 외도지 내가 왜 외도냐?”하면서 천질만질 뛰어요. 고봉 스님이 가서 “내 물어보자. 삼을 한 짐 지고 삼십 리를 가다가 금덩어리를 발견했을 때, 삼 짐을 내어 버리고 금을 지고 가야 할 것이 아닌가?”하니까, 오히려 “네가 외도며 그런 사람이지 나는 아니다.”하면서 펄쩍 뛰어요. 평생 그러면서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런 것이 처음부터 공부길을 잘못 든 것입니다.


  본래 깨달아 있는 이 마음, 불성, 말하자면 불성인데, 바로 이 자리 여기에 대한 소식을 척하니 전해 주면 턱하니 듣고 깨달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해 줘도 안 되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분들이 딴 짓 한 것이 많아서 그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수미산 같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소리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에요.


   더구나 이 공부를 하려고 용기를 내고 애를 써야 할 것인데 용기를 내지 않고 딴 곳으로 슬며시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미타불염관, 위빠사나, 옴마니밤메훔 주력 같은 것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빠지는 것이 잘 된 것이냐? 절대 잘 못 된 것이지요.


  이 공부는 바로 들어가려는 것인데, 바로 들어가는 길을 내던지고 딴 데로 갔으니까 될 턱이 있겠어요. 천만 년 해도 힘들다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이 화두선을 하는 분은 현실적으로 당장 눈앞에 영험이 나타나고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바라지 마십시오. 그런 것을 바라는 사람은 공부하는 사람 아닙니다. 그것을 바라는 사람은 공부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 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당장 15층 옥상에 뛰어 오르려고 공부하는 것인데 1층에 있는 것을 보고는 15층이라고 주저앉으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당장 눈앞에 영험이 나타나면 거기에 주저앉아요. 우리는 당장 서울을 뛰려하는데, 천안에 가서 서울이라 하고 주저앉아요. 그것은 백발백중으로 주저앉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공스님 같은 분이 참선하다가 깨달았다고 천하에 내가 제일이고 내가 부처라고 설칠 때 경허 스님을 만났기 때문에 바로 잡아진 것이에요. 만약에 경허 스님을 못 만났더라면 안 되는 것 아니겠어요. “천상천하에 모든 것이 부처라. 부처 아닌 것이 없다.”고 만공 스님이 말했을 때, 경허 스님이 불러서 “천상천하에 모든 것이 부처라면, 어째서 눈이 있는 돌사람은 눈물을 흘리고 말없는 동자는 탄식을 한다 (有眼石人齊下淚 無言童子暗嗟噓 유안석인제하루 무언동자암차허)고 했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만공 스님이 대답하지 못하고 꽉 막혔지 않았어요.


  공부를 하다가 어떤 경계가 나타나면, 근기가 미약한 사람은 백발백중 그것에 속게 되어 있습니다. 근기가 약하다 보니까 그 엄청난 기운의 희열, 기쁨에 춤을 추고 날 뛰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잡아 주는 데에는 선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하는 사람이 서울을 가는데 천안이 나타나더라도 천안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가니까 표시가 없고, 수원을 봤으되 수원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라는 소립니다.


  화두하다가 뭐가 환히 보이지 않나 얼른 깨달아지지 않나 경계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데 호리라도 생각을 하고 의식적으로 표가 있는 것을 바라면 그 사람은 공부 못합니다.

  전혀 표시가 없어야 합니다.

  점점 해 나갈수록 아는 것도 다 없어지고 깜깜해져야 됩니다.

  만약 아는 것이 조금씩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아는 것에 취해서 다시는 더 나갈 길이 없고 거기에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은 절대 표가 나는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서울까지 갈 때까지는 거기까지는 본 것도 없고 표도 없다는 소립니다.


  화두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서양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얼른 표가 나는 것을 바라다보니까 미국 같은 곳에 가서 참선 가르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잘못 가르쳐 가지고 문제가 되어 있어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바로 가르쳐야 하는데 설득력이 없으니까 잘못 가르치는 겁니다.


  말하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부는 많이 했어도 영어를 못해서 세계적으로 스케일이 크게 사람들을 상대해서 설법하여 인식시키지를 못 한다고들 합니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지 않아요. 나도 미국 갔다 와서 보니 예전에 나에게 영어 배우라고 하면 “미친놈 지랄하고 있네.” 하면서 영어를 안 배웠는데, 지금 와서 보면 답답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이 공부하는 것을 영어로만 다 해 줄 것이 아닙디다.


  이 공부를 철저히 해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은 점수돈오(漸修頓悟)를 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돈수돈오를 못하니까 점수돈오를 하는 겁니다. 나무를 쪼아 나가다가 한번에 넘어뜨린다는 것입니다. 돈오하면 다 된다는 소립니다. 소승으로 조금씩 닦아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안으로 나를 관조해서 깨달아라’고 했는데 여기서 관조(觀照)라는 것은 의심관(疑心觀)입니다. 깊이 의심을 해서 관하라는 소리지 그냥 가만히 관을 하고 드려다 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도대체 무엇일까?’하고 의심관을 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면, 한 생각 찰나에 바로 보리를 증득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리라는 것은 대승진리입니다. 각성자리, 부처자리, 성품자리, 이 자리를 바로 증득한다는 소리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무엇일까?’ ‘왜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하고 깊이 공을 들이고 애를 쓰는 사람은 뛰어난다는 소립니다. 그냥 슬며시 해서는 안 됩니다.


  화엄경 같은 곳에 잘 비유를 해 놓았습니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폭포를 따고 올라가면 용이 되는 용문폭포가 있는데, 피라미나 미꾸라지 같은 작은 물고기가 용이 되려고 시도를 하지만 다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잉어는 그냥 차고 용문에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와 같은 힘을 들여야 합니다.

  화두를 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잉어라는 소립니다.

  사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힘을 줘서 단번에 올라가듯이 화두 드는 것을 강력하게 힘을 줘서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그냥 어렴풋이 앉아서는 하고 서서는 안 하고, 오만 소리 다 지껄이고, 이 작단해서는 일생 이 문중의 시주밥 만 축내고 잔뜩 빚이 되어서 나중에 어떡할 겁니까? 재가자들은 속세에서 빚지는 것이고요.


  그래서 여러분이 하루 저녁만 힘을 주면 대번 됩니다. 이렇게 힘만 주면되는데, 그냥 느슨하게 망상 나오면 망상 따라가고 잠이 오면 잠 따라가고 하면 안 됩니다. 대장부로 태어나서 아주 철저하게 해 보십시오. 남자나 여자나 이 공부하는 사람은 모두 출격장부라고 했습니다. 오늘 저녁에 한번 열심히 해서 깨달아 봅시다.



[주장자 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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