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香

화두와 참선/정혜화상

똥하 2011. 12. 24. 07:57

법문:중국 조주백림선원 / 방장 정혜화상 (1933-)
禪七 법문 (7일 단위의 가행 정진 기간 중의 법문)

一. 생사를 끝마침

우리의 수행, 참선은 먼저 생사를 끝마칠 마음을 발해야 합니다.
무엇을 일러 생사를 끝마친다고 하는가?
우선 생사란 생각생각 사이에 있고, 찰나지간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생사란 단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것을 생이라 하고,
최후에 눈이 감기고 두 다리가 뻗어지게 될 때를 사라고 하는 그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일기생사”라고 합니다.),
생각생각의 생멸과 순간순간의 옮겨 흐름도 포함합니다.
(이것은 “찰나생사”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사를 끝마친다고 하는 것은 일기의 생사를 끝내는 것만이 아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생각생각지간의 생사, 찰나지간의 생사를 끝내야 하는 것입니다.

찰나지간의 생사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무명번뇌입니다.
무명번뇌가 바로 생사심이고, 생사의 표현이며,
생사의 우리의 생명과정 중의 구체적 형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과 사를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보면 안 되고,
지금 당장의 우리 생명과 무관한 것으로 보아서도 안 됩니다.
실제로, 생과 사는,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매는 과정 중에 있고,
시시각각, 순간순간 함께 연계되어 있습니다.
생사를 마침이란 우선 이 도리를 알아야 하고,
안 다음에야 구체적으로 그것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생사는 바로 현재에 있으며, 시시각각 진행되고 있습니다.
생사를 끝마치는 것은 지금 끝마쳐야지, 장래에 죽는 그날 가서 “마치려”하면, 이미 늦습니다.

생사가 이미 염념상속 한다면, 그러면 생사를 마치려고 하면
생각생각지간에서 마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생각을 일으킬 때마다, 한 마음을 낼 때마다 절대로 그것을
그냥 넘겨버려서는 안됩니다.
넘겨버렸다면 생사를 그냥 넘겨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그것(한 생각)을 알아차려 비출 수 있으며,
그러면 지금 당장 생사를 마치는 것입니다. <<심경>> 중의 이른바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아”,
그러면 바로 지금 당장 생사를 마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생사를 마치려는 마음을 내어야 하고,
이런 마음을 낼 수 없다면, 불교를 한평생 공부해도 결국 생사와는 조금도 상관이 없습니다.

생각생각지간에서 생사를 마칠 때에만 비로소 일기의 생명이 끝날 때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사를 마침이란 생사를 비추어 파한다는 것과 생사에서 해탈한다는 이중의 뜻이 있습니다.
이른바 생사를 비추어 파함이란,
우리의 생각생각지간의 생사를 비추어 깨뜨리는 것이고;
이른바 생사를 해탈함이란, 우리의 일기생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모두 놓아버리고 여기 와서 오직 수행만 하는 이 인연은 얻기가 쉽지 않으니,
모두 꼭 생사를 마치려는 이 마음을 발하여, 생사를 마침을 매 시각, 매 생각에 실행하고,
호흡과 호흡간, 일거수 일투족간에 실행하기를 바랍니다.


二. “무”자 공안

조주조정(조주의 근본도량, 곧 백림선사)은 “무”자 공안의 발상지인데,
그러면 우리 오늘 공안의 뜻과 “무”자 공안의 구체적인 내용을 이야기해 봅시다.
선종의 전적은 그 절대다수가 역대선사의 어록입니다.
이 어록들은 하나하나의 공안이 모여 구성된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이런 공안의 수는 1,700여개에 달하여,
고인이 “1,700칙의 갈등”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공안들은 주로 당,송 시기에 만들어 졌는데,
물론 당,송 이전에는 공안이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달마조사가 중국에 왔는데, 무슨 뜻인가?
이른바 “어떠한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하는 이것도 역시 하나의 공안입니다.
역대 조사들이 참선 대중을 교육할 때,
보통 300개 이상의 공안을 참구하여 뚫도록 하였습니다.
매 공안마다 내용과 요점이 같지 않기 때문에, 하는 작용도 또한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송이후의 선이 “공안선, 간화선”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공안선은 역대 조사의 공안을 하나하나 참구하여 뚫고,
공안 참구를 통하여 자기의 심지(心地)를 밝히는 것입니다.
능히 하나하나의 공안을 참구하여 뚫을 수 있으면 그러면 삼관을 통과하였다,
대사를 마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안의 작용은 대체로 말하여 세 개의 측면이 있습니다.
이미 깨달은 사람에게 하나의 공안을 드는데,
이것은 그의 깨달은 경지에 대하여 인증(印證)을 하는 것일 뿐으로서,
이른바 “면벽의 공이 이루어지니, 행각의 일(생사대사)을 마친다.”라는 것입니다.
참선자의 깨달은 바의 옳고 그름, 깊고 얕음, 바름과 삿됨에 대하여 감변을 하는 것,
이것이 공안의 첫 번째 작용입니다.

공안의 두 번째 작용은 곧 깨달으려는 사람에 대하여 이끌고 촉진하는 작용입니다.
곧 깨달으려는 사람은 공부가 순일하게 익어져서,
마치 계란 속의 병아리가 껍질 밖으로 나오는 것과 같이,
속에서 필사적으로 그 껍질을 쪼고 이 때 스승이 바깥에서 조금 도와주어
병아리가 더욱 빨리, 더욱 부드럽게 나오도록 하는데, 이를 “줄탁동시”라고 합니다.
이른바 “영남에 처음 당도하였으나 아직 그 참소식을 모르는” 이 때,
공안으로 학인을 이끌어 그로 하여금 빨리 본지풍광을 보게 합니다.
당년에 육조스님이 오조스님 회상에 이르자,
오조 스님은 먼저 종종의 방편으로 그를 이끌어 그로 하여금 철저히 깨닫게 하여,
육조스님이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 역시 대가 아니네, 본래 무일물인데,
어느 곳에 먼지가 일겠는가”라는 한 수의 게를 일렀을 때에야,
오조스님은 비로소 그를 인증하였습니다.

공안의 세 번째 작용은 깨닫지 못한 사람을 일깨워서,
장애와 계박을 제거하고 정진하고 노력하도록 합니다.
이 때 스승은 왕왕 공안 하나를 들어 학인으로 하여금 붙들고 놓지 않게 하고,
밤낮으로 참구하여 간단이 없도록 하며 그리하여
“생사를 아프게 여기고 보리심을 발할 수 있도록” 하여
조사의 올가미 안으로 들어오도록 해서,
마침내 하나의 전환점이 오게 되면 당장에 승인을 합니다.
공안에다가 조사는 학인을 이끌기 위하여 왕왕 종종의 올가미를 설치하고,
학인으로 하여금 하나하나 뚫어 나가도록 하는데,
올가미를 뚫는 과정 역시 장애와 계박을 제거하는 과정이며,
올가미는 단지 방편일 뿐, 바꾸어 말하면,
공안은 실재하는 법문이 아니고 문을 두드리는 벽돌일 뿐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니,
실제 이치의 땅에 이르러서는 이 벽돌과 손가락은 마땅히 놓아버려야 합니다.
대체로 말하여, 공안은 이러한 세 종류의 작용을 합니다.

다음은 조주스님의 無자 공안을 말해 봅시다.

누가 조주스님에게 묻기를 :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스님은 명확히 답변하기를 : “없다!”

조주스님은 삼관을 뚫은 대선지식이고, 사람들이 “조주고불”이라고 하는데,
의문의 여지없이, 불교교의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개는 불성이 없는가?
조주스님은 단호하게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무”자라는 말을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닌데,
수백 년에 걸쳐 무수한 참선자들의 주의를 끌어 이 “무”자를 둘러싸고 참구하게 하여,
그리하여 선종에서의 최상법문인 무문관을 형성하였습니다.
조주스님의 이 무자는 근기에 응한 설법에 불과한 것으로서,
이는 고불(古佛)의 수단이며, 선문에서
“사람을 죽이는 칼, 사람을 살리는 칼(살인검, 활인도)”이라고 부릅니다.
이 무자상에 학인의 법신혜명이 매여 있습니다.
이래서 역대의 참선자들은 이 무자공안을 모범으로 받들었습니다.

무엇을 일러 “살인검, 활인도”라고 하는가?
살인검이란 번뇌를 깨끗하고 철저하게 절단하는 것입니다.
활인도란 법신혜명을 번뇌로부터 구출해 내는 것입니다.
수백 년간, 중외의 참선자들이 모두 이 무자 공안을 참구하였는데,
목적은 이 공안을 빌어 번뇌를 제거하고 자기의 본성을 보아 법신혜명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현재에 이르러, 아직도 많은 참선자들이 여전히 이 무자 공안을 참구하고 있습니다.

이 무자공안은, 만약 글자 상으로 이해하려고 하여,
의식 중에서 답을 찾는다고 하면, 영원히 관건을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꿈 얘기를 하는 것과 같고, 마치 자기 다리가 가려운데
필사적으로 남을 붙잡고 있는 것과 같아, 이래서는 영원히 가려움을 그치게 할 수 없습니다.

“무”자는 비록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 중에 필경 어떤 소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떠한 소식인가? 바로 학인이 물었을 때, “무”자로
그의 일체의 사량, 분별, 계교 등을 모두 틀어막아, 하늘로 올라가도 길이 없고
땅으로 들어가도 문이 없는 것으로, 이 때는 마치 몸이 만길 낭떠러지 가에 서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에게 한 번 떠밀리는 것-이것을
“현애살수(깎아지른 절벽에서 손을 놓다)”라고 함-과도 같습니다.
일종의 이와 같은 마음이 없고서는 깨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조주스님은 너무나 잔혹하지 않은가,
만길 낭떠러지에서 사람을 밀어뜨리면 바로 상신실명하는 것 아닌가?
솔직히 말하면, 바로 그대를 상신실명시키려는 것입니다!
크게 한 번 죽지 않으면, 크게 살아날 수 없습니다.
물론 “상신실명”과 “만길 낭떠러지”를 진짜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 뜻은 생각하는 의식을 막다른 곳으로 밀어붙여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게 하는 것이니,
이 때에야 크게 전환하여 생명 밑바닥의 불성종자를 찾아낼 수 있고,
통 밑바닥이 떨어져 나가 크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한 곳까지 참구해 가면, 자연히 몸을 뒤칠 때를 얻는다”함입니다.

바로 육유(陸游)의 시 중에서 “산이 중첩하고 물이 거듭하여 길이 없는가 의심하였더니,
버들은 짙고 꽃은 밝아 또 하나의 마을이네.”라고 함과도 같습니다.
조주스님의 이 무자공안이 수백 년 동안 참선자들로부터 중시되어 온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이 무자 공안을 참구하여, 깨달을 기대를 여기에 담읍시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힘써야 하는가?

역대의 조사들이 이 문제에 있어서 많은 말씀을 하여, 몇 권의 책으로도 다 적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리저리 말하더라도, 이 무자상에 온 몸채 의단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른바 의정을 일으킨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다들 기억하십시오.
의단을 일으키는 것은 무자상에서 분별, 계교하고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고,
“있음과 없음으로 이해하지 않아야”합니다. 무자 공안의 이 무는, 유무의 무가 아니고,
허무로 이해해서도 안 되고, 있음으로 말해도 안 되고, 유무의 대립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고 , 허무로 이해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무자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로 우리의 생명과 이 무자를 한 덩어리로 만들고, 한 몸이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바로 이 무자이고, 이 무자가 바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이와 같이 의심해야만 합니다. 어느 정도로 의심해야 되는가? 여기 하나의 비유가 있습니다.
거리에서 자파(?? : 찹쌀을 쪄서 이겨 떡 모양으로 빚어 그늘에 말린 것.
찌거나 삶거나 기름에 튀겨서 먹음)를 튀기고 있는데, 개 한 마리가 뛰어 지나가다가,
막 기름 솥에서 건져 낸 자파를 한 입에 물었습니다.
자파는 끈적끈적한 것인데, 펄펄 끓는 기름을 가하여 한 번 튀겼으니,
그 개는 삼키려고 해도 삼킬 수가 없고(지독한 화상을 입을 것이고),
뱉아 내려고 해도 뱉아 낼 수가 없으니(이빨에 달라붙어서),
이 삼킴과 뱉음의 사이에 있는 것이 어떤 상태이겠습니까?
무자 공안을 참구하여 의정을 일으킬 때에는 이런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고 뜨거운 철환을 머금은 것과 같으니,
그것이 어떤 맛이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맛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가 의정을 일으키는 노력이 이러한 정도에 이르렀습니까 못 이르렀습니까?
만약 이런 정도에 이르렀다면, 그것은 “온 몸채로 의단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온 몸채 의심하고,
의심 이외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없는 것, 이렇게 노력을 해야 합니다.
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의심을 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의심을 해야 합니다.

무자를 참구하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높아서 올라갈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높아서 올라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구자무불성” 이 공안을 깨칠 분이 없는 것이고,
이 조사관을 뚫을 분도 없는 것입니다.
조사관은 우리들 인인이 모두 뚫을 분이 있습니다.
단지 우리들이 결심이 있나 없나만 봅니다.
결국 조사관은 어떻게 뚫는가?
이것은 평소 우리가 노력하여 참구할 것을 요합니다.


三. 화두를 비추어 살핌.

중이 조주에게 묻기를 :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 이르기를 : 없다. 앉아 있는 과정 중에 늘 이 “무”자를 들고,
또렷하고 분명하게 하여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화두를 비추어 살핌”이라는 것입니다.

화두를 비추어 살피는 과정 중에 비추는 시간이 길어지면,
알아차려 비추는 능력이 엷어지게 되고, 이 때에는 다시 들고 들어야 합니다.
앉아 있는 전 과정 중에 이러한 방법을 써서 흐리멍덩하여 있는 듯 없는 듯 한 것이 아니라
화두가 아주 또록또록하고 분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화두가 분명하지 않게 될 때에는, 다시 이 화두를 들고 듭니다.
이것이 바로 알아차려 비추는 노력입니다.
이러한 알아차려 비춤을 유지하는 것이 처음에는 쉽지 않습니다.
많은 망상이 찌르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하므로 우리는 부단히 경각심을 가지고,
부단히 분발하며, 온 몸과 마음을 모두 오로지 공안상에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닭이 알을 부화하는 것과 같고,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과 같아,
자나 깨나 생각해야 하며, 한사코 주시하여 놓아버리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화두를 떠나지 않게 해야 하고, 설사 떠났다 해도 얼른 도로 잡아 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좌선하는 중에 비교적 상용하는 일종의 방법입니다.

오직 화두에 집중하는 과정 중에, 우리의 알아차려 비추는 힘이 충분히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두 종류ㅡ 즉 혼침에 빠지는 것과 망상이 일어나는 것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혼침이 오면, 화두를 좀 더 부지런히 들어야 합니다.
일단 화두가 흐릿하여져서 다시 분명하고 또록또록하지 않을 때에는,
얼른 잡아들어서 화두가 선명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효과적으로 혼침을 피할 수 있습니다.
정신이 뚜렷하여 혼침이 없을 때에는, 종종의 망상이 나타나 방해를 하게 마련인데,
어떻게 대치하는가? 역시 알아차려 비추는 것에 힘을 기울여,
망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이것은 비추어 살피는 바의 화두를 바짝 주시하고
면면밀밀하게 하여 바늘도 찌르고 들어오지 못하고 물도 밀고 들어올 수 없는 정도에까지
도달하기를 요합니다.

이럴 때에 망상이 자연적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전체의 수행과정이 이 두 종류의 것과 투쟁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혼침에 대치하지 않으면 도거(들뜸, 망상)에 대치합니다.

알아차려 비추는 능력은 서서히 길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부를 시작할 때에, 혼침과 망상이 오면, 두려워하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말고, 다만 화두를 주시하여 놓지 마십시오.
처음에는 틀림없이 망상이 아주 많고, 알아차려 비춤이 상대적으로 적은데,
이것은 하나 하나의 밝은 점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알아차려 비춤이 많아지면 망상은 적어지고, 나아가 망상이 없어지면,
그 때에는 밝은 점이 이어져 한 줄의 선을 이룰 것입니다.
선을 이룬 뒤에 다시 노력을 강화하면 이 선이 가는데서 굵은 것으로 변하고,
마지막에는 한 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1분 동안 한 덩어리가 되면, 5분 동안 한 덩어리가 될 것을 걱정할 것이 없고;
5분 동안 한 덩어리가 되면 10분 동안 한 덩어리가 될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향 한줄기가 타는 동안 기본적으로 한 덩어리가 된다면,
그 공부는 일정한 큰 진보가 있었고 상당한 정도에 도달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는 “가도 가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는 줄 모르는” 정도까지 해 낼 수 있어,
마치 나무로 만든 사람과 같습니다. 이 때에, 깨달음은 멀지 않았습니다.

참선을 하는 과정에서, 만일 의정이 일어나지 않으면, 화두를 비추어 살피십시오.
화두를 비추어 살피는 과정은 바로 부단히 망상을 제거하고,
바른 생각을 진작시키는 과정입니다.
부단히 (화두를) 들었다가, 부단히 놓치고, 또 부단히 들고,
이렇게 매 번 드는 것이 그 전에 들었던 것보다 좀 더 힘 있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과정 중에, 가장 주된 적이 바로 혼침과 도거입니다.
혼침과 도거와 싸워 이기고, 알아차려 비추는 힘을 높이는 방법은 바로
부단히 바른 생각을 진작시켜서, (화두에) “오로지 집중하고, 또렷하고,
면면밀밀하게” 함을 해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노력을 하는 중에, 이러한 방법들을 잘 터득하여, 필사적인 힘을 쏟아야 합니다.
필사적인 힘을 쏟지 않고, 알아차려 비추는 능력을 높이려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두 화두를 들고 참구합시다.


四. 망상과 싸워 이김

어제 여러분에게 어떻게 알아차려 비춤을 유지하는가를 말했습니다.
오늘은 더욱 상세하게 어떻게 번뇌습기에 대치하는가를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할 때에, 알아차려 비춤이 어려운 까닭은,
바로 우리들의 무시이래의 번뇌습기가 너무나 많고 너무나 무겁기 때문입니다.
만약 번뇌, 습기가 부피가 있다면, 온 허공이라도 이를 다 포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각자가 하루 24시간 모두 번뇌 중에서 구르는 것 아닙니까?
꿈속에서 조차도 역시 번뇌를 떠나지 못합니다!
우리의 번뇌가 얼마나 많은지 보십시오!

번뇌와 습기는 본질상 하나인데, 다만 거칠고 가는 차이가 있습니다.
번뇌는 비교적 굵직하여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데, 비유하자면
심중에 무명의 불이 있으면 얼굴이 곧 붉어지고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오는 것입니다.
습기는 비교적 미세하고 또한 널리 퍼져 있어, 잘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번뇌는 상대적으로 말하여 비교적 쉽게 다스릴 수 있는데,
습기는 다스리기 상당히 곤란합니다.
수행은 바로 번뇌습기와 투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번뇌와 습기를 합치면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망상입니다.

번뇌습기가 비록 많고 지독하지만, 일단 그 본질을 뚜렷이 인식하고 보면,
결코 싸워 이길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우리는 망상이 마음 밖의 어떤 실체가 아니고,
알아차려 비춤과 같이 동일한 마음의 작용인데, 다만 알아차려 비춤은 청정한 것이고,
망상은 탁한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참됨과 망상이 둘이 아니고,
참됨을 떠나 망상이 없고, 망상을 떠나 참됨이 없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의 이 마음은 참됨의 일면도 있고, 망상의 일면도 있습니다. 만일 참된 면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근본적으로 수행할 방법이 없으며,
수행을 해도 좋은 점이 없습니다.
참됨이란 마음이 본래 스스로 구족해 있는 것이고, 망상 역시 마음에서 일어난 것으로, 참됨과 망상이 동일하게 하나의 마음입니다.
이 점을 명백히 이해하면, 수행할 때에 의식적으로 망상을 끊으려고 하지 말고,
또 의식적으로 참됨을 향하지도 않도록 마땅히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 번 생각을 움직이면 바로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육조 대사 말씀하시기를 : “깨끗한 마음은 망상 중에 있으며,
마음을 일으키면 곧 망상이다.” 망상이 오면, 그것을 따라가지 말고,
단지 화두만 들고, 의식적으로 누르려 하지 마십시오.
망상은 눌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상대하지 않고, 따라 돌지 말며, 시시각각 마음을 무자상에 매어두고,
무자로 하여금 한 덩어리가 되게 하면, 이 때 망상은 자연히 사라질 것입니다.
고인은 말씀하기를 :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늦게 알아차림을 두려워한다.
생각이 일어나는 즉시 알아차리면, 알아차리는 즉시 없어진다.”
망상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알아차려 비춤을 일으키는 것이니,
알아차려 비춤으로 지금의 생각(망상)을 비추어 고립시켜 다시는 더 계속될 수 없게 합니다.
현재의 매 생각마다 모두 고립시킬 수 있으면,
지금 당장 정식(情識)에서 벗어납니다.

우리의 평소의 마음은 늘 부단히 반연(攀緣)합니다.
반연하지 않도록 하고 싶으면, 유일한 방법이 이리저리 궁리하고 분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른바 “능히 정이 사물에 붙지 않으면, 사물이 어찌 사람을 장애하겠는가?”
함은 바로 이 뜻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한 생각을 고립시켜 앞의 것을 잇지 않고 뒤의 것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면,
생각생각이 모두 지금 현재 순간이 되고, 생각생각이 모두 무념을 이루어,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른바 무념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생각생각이 무념이면,
곧 생각생각이 무주입니다. 만약 능히 생각생각이 무주일 수 있으면,
즉시에 일념만년, 만년일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부는 아주 미세한 것입니다.
그대가 진정으로 고요해지고, 고요히 자기의 마음 상태를 관하고,
지금 일어나는 이 한 생각을 고요히 관할 때만이, 이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는 늘 마음이 들뜨고 조급하며, 자기는 문제가 없고,
분명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래가지고는 진정으로 생사를 벗어나려는 마음,
도를 향한 마음,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이번 7일 가행정진 기간 중, 반드시 모든 반연을 놓아버리고,
몸과 마음을 거두어 들여, 자기의 마음을 잘 관조하여
내가 방금 말한 바를 한 번 체득하고 연습해 보십시오.

*****법문 : 백림선사 방장 정혜화상 2002-10-25 ******
** 생활속의 참선수행(정혜화상)**
백림선사는 중국 선종의 대가였던 조주고불(조주종심 선사)께서
천년전에 주석하신 관음원이 있는 도량입니다.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이신 진제 큰스님께서 우리 불교계의 발전을 위해
무차선회를 준비하시기 위해 직접 중국을 방문하셔서
비록 공산화가 되었지만 부처님의 최고의 진리인 선의 안목자를 찾아 여러 대사찰을
두루 다니셨다고 합니다.
12억이 넘는 중국 인구에, 큰 스님께서 견성 후 처음으로 인정하신
이 일을 아는 이가 중국에 있더라고 하셨습니다.
이분이 정혜화상입니다.
얼마전 해운정사 무차선회에 중국 선불교의 대표로 초청되신 분이기도 합니다.

정혜화상은 중국의 생활참선을 선양하는 종교 지도자로서 추앙을 받는 분입니다.
선의 대가의 법문의 참 맛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백림야화(柏林夜話)]

각 거사 여러분, 생활선 참여자 여러분.

오늘밤은 백림야화 시간입니다.
왜 이러한 이름을 붙였느냐?
두 가지 측면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백림사에서 야화(夜話)를 진행하니까 “백림야화”라고 부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곳을 왜 백림사라고 부릅니까?

여러분은 아마 이곳이 측백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인데,
이 대답은 물론 아주 정확합니다. 하지만 거기는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오후에 양선생의 “어떠한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라는
강의를 들었는데, 그의 논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요.

당시에 한 학인이 백림사에 왔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는 아직 백림사라고 부르지 않고 관음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관음원에 와서 조주 노화상에게 묻기를,
어떠한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이 제목은 아주 오래된 제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전등록>>, <<지월록>> 내지 모든 선사의 어록을 펼쳐 보면,
이 문제가 최소한 일만 번도 더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일만 번의 물음에 대한 동일하지 않은 답은 최소한 9천9백9십9종이 있습니다.

그러면 당시에 조주스님은 이 문제에 어떻게 답했는가?
조주스님은 말씀하기를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듣고서 동문서답으로 조금도 관계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동문서답의 문제가 역대로 온갖 해석, 해명으로 천변만화해 왔습니다.

좀 불경스럽게 말한다면, 정말 기괴하고,
어떠한 평설도 다 있고 어떠한 대답도 다 있습니다.
이것은 일천칠백 공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가장 특색있는 공안입니다.

조금전에 사회자가 불법을 공부함에 있어서 어떤 문제들에 주의해야 하는지를
일러 주었으면 했는데,
내가 곧바로 이 공안을 언급하니 역시 (물음과 답이)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절대적으로 관계가 있습니다.

불법을 공부하는 것을 그 궁극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첫째는 일체의 지(성)적인 것들을 막아버려야 하고,

둘째는 지(성)적인 차원을 떠나서 진정하게 생명으로 불법을 체험하고,
불법을 체득하고 혹은 불법을 체증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어떠한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하는
이 제목은 실제적으로는 우리가 매일매일 묻는 불법이란 도대체 어떠한 도리입니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조주스님처럼 “차 마시러 가게나.”라든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지 않고, 어떠한 것이 불법인가,
불법이란 석가모니가 말한 법이고, 불법은 어떠한 내용을 포괄하며,
어떻게 불법에 들어가며 등 지성상으로 한량없는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선종의 풍격은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선종의 풍격은 남에게 의지하여 견해를 지으면
자신의 깨달음의 문을 막아 버리는 것으로 여깁니다.

선종은 자신이 스스로 도리를 깨달아 자신의 길을 갈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조주 스님은 이 문제에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날 저녁 내가 말한 조주 스님의 또 하나의 공안처럼(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은 것입니다.)

누가 묻기를 어떠한 것이 불법입니까?
조주 스님 답하기를 조주석교이니라;
그러면 어떠한 것이 조주석교입니까? 답하기를
나귀가 건너가고 말이 건너간다.

조주스님은 이 문제를 아주 형상화하고,
구체화하고 생동감 있게 불법의 종지를 직접적으로 게양하고 드러내 보여,
여러분이 영원히 잊지 못할 깊은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원래 불법을 공부하는 것은 이와 같이,
영원히 일체 중생을 위한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하는 등 이런 방식으로 제접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진정으로 체득을 하려고 하면, 핵심은 말 밖에 있으며,
그러한 말 밖의 뜻을 체득하여햐 합니다.

온갖 종류의 선종의 전적들은 말하기를,
학인을 제접함은 바로 그 당장의 환경에 따라서
하나의 요령을 가리켜서 깨달음에 들게하는 것입니다.

“뜰 앞의 잣나무”와 “조사서래의”는 관계가 있는가 없는가?
만약 관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역시 지성상에서 빙빙 두르는 것이고,
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조주스님의 이 대답은 무슨 작용을 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그것은 관계가 있으면서 관계가 없고,
관계가 없으면서 또한 큰 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조주스님은 여러분이 사고할 여지를 용납하지 않고
바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밀어 부칩니다.
오직 몸을 솟구쳐 아래로 한 번 뛰어야만 비로소 알 것입니다.

조주 스님은 길이 없는 곳까지 밀어 부쳤는데,
길이 없는 곳까지 밀어 부쳐져서는 어떻게 하느냐,
바로 몸을 틀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산이 다하고 물이 다한 곳에 이르면, 자연히 몸을 틀 때를 얻게 된다.”
함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갈 길이 없는 곳에 밀어부쳐, 자기 스스로 방법을 생각해 내게 하는 것,
선종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여러분에게 품위 있는 공안은 아니나,
아주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주고 싶습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 아버지가 있었는데 그는 강도 출신이고,
그의 아들이 자라 15~6세가 되었는데 이 아버지는
강도짓을 할 때마다 아들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대로 따라 하였습니다.

아들이 더 나이가 들었을 때,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 노상 아버지 뒤에 붙어서 도망하는 짓은 못하겠습니다.
저에게 몇 가지 절묘한 재주를 가르쳐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오랜 뒤에 아버지 안 계실 때
제가 어떻게 밥벌이를 하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이 장래가 있다고 생각하고
몇 가지 절묘한 기술을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어느 집에 이르렀습니다.
과거에 강도짓은 자물쇠를 비틀어 끄르거나 문을 여는 것이 아니고,
벽에다가 구멍을 팠습니다.
내가 어릴 때 이것에 대한 인상이 가장 깊어서,
내가 살던 그 조그만 절에는 거의 사흘이 멀다 하고 구멍이 뚫렸습니다.
이 강도는 아들을 어느 대가 집에 데리고 가서, 먼저 구멍을 뚫었습니다.
두 부자가 구멍을 통해서 들어가고 난 뒤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주인의 궤짝을 열고, 아들이 보니 그 속에는 금은보화가 무엇이든 다 있었습니다.
아들이 궤짝 안으로 들어가자 아버지는 갑자기 궤짝의 문을 잠그고 돌아서 나가버렸습니다.
나간 다음에는 또 많은 가시나무를 찾아서 그 구멍을 막아버렸습니다.
이렇게 하니 아들은 뚫고 나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아버지는 그 주인집 문을 두드리고는 집안에 도둑이 들었으니
빨리 나와서 잡으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이 때 아들은 아버지가 오늘 왜 이렇게 자기를 괴롭히고
사지로 몰아넣는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습니다.
사지에 처하여서야 살아나고 그때서야 비로소
진정한 재생임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 집 사람들이 일어나서 곳곳으로 강도를 찾으러 다녔지만
아무도 강도가 궤짝 안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궤짝은 잠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아들은 다급한 중에 한 꾀를 내어 쥐가 하는 것처럼 궤짝을 쏠았습니다.
이에 그 집 사람들은 궤짝 속에 웬 쥐인가 하고는 와서 열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아들은 소리를 안 내었습니다.

모두 돌아가서 잠을 잘 때, 그는 또 궤짝을 긁어 크게 소리를 내고,
사람들이 다시 와서 보면, 또 소리를 멈추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그 집 주인의 주의력을 둔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주인이 석유 등잔을 켜고 와서 어떻게 된 것인가를 보았습니다.
궤짝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는 단번에 등불을 불어서 끄고는 도망갔습니다.

그가 팠던 그 굴의 입구까지 도망 와서 보니, 가시나무가 굴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다급한 중에 꾀를 내어,
그곳에 오줌통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오줌을 쏟아 버리고 머리에
그 오줌통을 쓰고서 단번에 뚫고 나갔습니다.
뚫고 나간 이후에 그는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절묘한 기술이라는 것을.

이 공안은 보기에 품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아주 깊은 도리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 도리는 우리에게 어떻게 처세하고,
어떻게 사지에서 살아나는 법을 만나는가를 일러 줍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어떻게 안심입명처를 찾는가를 일러줍니다.
우리들은 사람으로서 이와 비슷한 시간, 이와 비슷한 일들은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문제를 처리할 아주 좋고 지혜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불법을 공부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지혜를 찾아내어
생활 중의 이러한 해결할 방법이 없는 문제들을 처리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중 가장 해결할 방법이 없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밥을 먹는 것이나, 옷을 입는 것이나, 쓸 돈이 없는 것이 아니고,
지금 당장의 우리의 이 마음, 이 생명을 편안히 할 수 없는 것,
지금 당장의 이 번뇌 무명을 타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보기에는 우리들이 자재하게 사는 것 같지만,
실은 나를 포함해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어쩔 수 없어 그렇게 살고,
모두 불법 중에서 안심입명할 곳을 찾아내려 하고,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다시 살아날 지혜, 방법을 찾아내려 합니다.

나는 불법을 공부하고, 어떻게 불법을 공부하며,
어떤 문제에 주의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매 개인이 자기의 길을 가야 하고,
매 개인이 스스로 생명의 곤혹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돌파를 하고서야 비로소 불법이 대단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느낍니다.

당시에 조주 스님이 왜 우리에게 설파하지 않았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직접 절묘한 기술을 배우도록,
“뜰 앞의 잣나무”로부터 어떻게 조사의 서래의를 체득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공안을 해석하는 것은 소용없는 짓입니다.
왜냐하면 해석하는 것은 단지 약간의 표피적인 것에만 미칠 뿐,
아무리 해도 온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온 생명으로 그것을 체득할 때에야 비로소 가장 원만하고 가장 철저하여,
능히 가장 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조금 전에 사회자가 나에게 불법공부하는 것에 관해 말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나는 단지 스스로 조주 스님의 어록을 공부하고 조주선을 익혀서
아주 조금 체득한 이것으로써 여러분께 공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생활선의 4개의 요점]

(1993년 11월 9일)

생활선을 닦는 4개의 요점

우리가 생활선을 제창하여, 강조하려는 것은 바로 생활하는 중에 수행을 하고,
수행하는 중에 생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수행이란 단지 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당연히 염불, 교학 공부, 마음을 관하는 것 등,
총괄하여 불교 수행의 일체의 법문을 가리킵니다.
일체의 법문은 모두 선정을 떠날 수 없으므로,
우리는 특별히 선을 강조하였습니다.
《유가사지론》 상에 종종의 선을 열거하고,
그 중에 “판사선(辦事禪: 일에 힘쓰면서 하는 선)”이 있습니다.
판사선의 의미가 우리가 제창하는 생활선과 비슷하지만,
생활선의 포함하는 뜻이 더욱 넓으며, 생활선이 요구하는 바는 단지 선을
일하는 중에 실행하는 것만이 아니고, 생활의 모든 면에 있어서 실행하는 것입니다.
생활의 내용은 매우 풍부하고, 생활의 천지는 광활하여 사회생활이 있고,
가정생활, 도덕생활, 정서생활 등이 있어 생활의 일체의 영역이 선의 정신,
선의 희열로 가득 차야 합니다.

그러면 생활선을 닦아 배움에는 어떠한 요점이 있는가?
생활선을 닦는 데는 4개의 요점이 있습니다.
신앙을 생활에 실행하고, 수행을 지금 당장에 실행하고,
불법을 세간에 융화시키고, 개인을 대중에 융화시키는 것입니다.


一. 신앙의 생활에의 실행

우리는 신앙의 원칙을 일상생활 중에까지 관철하여,
신앙을 생활화 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중에서 용심하고 행동하는 것 모두가 오계,
십선의 원칙에 의거하도록 하고,
우리의 인격이 신앙생활 가운데에서 분열로부터 통일로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절 안에서나 혹은 좌선할 때와 생활할 때가 서로 다른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신앙의 원칙으로, 불법의 정신으로 점차 생활의 질을 제고하고,
생활의 환경을 개선해야 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물질방면의 풍부를 포함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생활의 내용, 생활의 질을 정화하고,
흠없이 완전하게 하고 숭고하게 하는 쪽으로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저급하고 속된 취미, 감각기관의 향락을 추구하는 것도 점차 씻어 없애야 합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화목하고 즐거운 가정생활을 할 수 있고 아름답고 고상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으며, 그러면 우리는 점차 가정을 불법화하고,
사회를 불법화 하는 것을 실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二. 수행의 지금 당장에의 실행

우리의 수행은 시시각각 지금 당장의 한 생각을 떠날 수 없으며,
이 한 생각을 처리할 수 없으면, 일체 그 어느 것도 말 할 여지가 없습니다.
지장경에 이르기를 “염부제의 중생은 마음 씀씀이 하나하나가 죄가 아닌 것이 없고,
업이 아닌 것이 없다.”
(이로부터) 지금 이 한 생각이 중대하고,
십법계의 형성이 모두 이 한 생각을 좇아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한 생각 한 생각을 또렷하고 명백하게 하녀야 하며,
조금도 흐리멍덩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무명 번뇌가 막 싹터 움직이려 할 때 우리는 곧 지혜의 빛으로
그것을 비추어 깨뜨려야 하고, 그것을 따라 흘러가서는 안 됩니다.

고덕의 이른 바 “생각이 일어난 즉 알아차리고, 그것을 알아차린 즉 없어진다.”고
함은 바로 지금 당장의 한 생각을 알아차려 비추는 방법입니다.

만약 수행을 지금 당장에 실행할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납월 삼십일을 당하여 수각이 황란해 질 걱정을 할 필요가 없고,
마지막 한 호흡이 넘어갈 무렵 앞길이 망망해 질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는 것은 일종의 영원의 개념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이 한 생각이며,
이 한 생각이 지나가면 다음 한 생각이 역시 지금 당장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능히 이 한 생각을 주관할 수 있다면,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모두 주관할 수 있고,
이것이 이른바 "일념이 만년이고, 만년이 일념“인 것입니다.
능히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생사를 마치지 못할까,
번뇌를 끊지 못할까하는 걱정을 하겠습니까?
어찌 성과(聖果)를 이루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 나 자신을 포함해서 모두 “수행을 지금 당장에 실행한다.”는
이와 같은 높은 표준으로써 자기를 면려하고, 자기를 단속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해 나간다면, 우리는 일체시 일체처에서 모두 능히 수행할 수 있고,
일체의 경우가 모두 수행하는 도량이 될 수 있어,
바로 불전에서 말하는 “곳곳이 모두 화장세계를 이루었고,
개중에는 비로가 아닌 곳이 없다.”와 같을 것입니다.


三. 불법을 세간에 융화시킴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간에 맞추어 설법하심은, 세간을 교화하고 정화하여,
이 결함과 번뇌의 세간을 아름답고 청정한 인간정토로 바꾸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법이 세상에 머무는 하나의 근본목표입니다.
이 목표를 떠나서는 불법은 아무데도 쓸모가 없을 것이며,
불경도 일종의 골동품에 불과할 것입니다.

근년에, 불교계에서는 세간을 떠나려는 경향을 좀 나타내어서,
불교가 거의 죽은 사람만을 위한 천도의식이 되어 버렸고,
불교도들은 “피세주의자(避世主義者)”라고 불리었습니다.
태허대사는 이를 위해 인간불교의 사상을 고양하고,
불법이 세간을 교화하여 이끌고, 세간을 개선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태허 대사의 사상은 현재 불교의 주류가 되었으며, 우리는 마땅히 이 주류에 순응하여,
적극향상의 태도로 불법을 이해하고 수행하여,
이 세간을 건설하고 개선하며 또 이 세간을 깨우쳐야 합니다.
육조 혜능대사께서 잘 말씀했습니다.
“불법은 세간에 있고, 세간을 떠나서 깨닫는 것이 아니니,
세간을 떠나 보리를 찾는 것은 토끼의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


四. 개인을 대중에 융화시킴

불법은 연기를 말하는데, 어떤 개인이나 사물도 각종의 조건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만사만물이 모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서로 관련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수행은 무리를 떠나 홀로 쓸쓸히 지내며,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주관대로만 해서는 안되고,
마땅히 자기의 수행을 중생구제와 긴밀히 연계시켜
“스스로를 위하여 안락을 구하지 아니하고, 다만 중생이 괴로움을 벗어나기를 원하며”,
일체 중생과 함꼐 근심하고 함꼐 즐거워 해야 합니다.
아마 누군가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도 내 스스로 능히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당연히 얻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큰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이타 중에서 자리를 실현하고, 타인을 깨닫게 하는 중에서 자기의 깨달음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능히 개인을 대중에 융화시킬 수 있고, 우리의 가정 생활과 사회 인간 관계가 아주 화목하게 되고, 불법 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현실을 도피하고, 소극적이며 염세적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상의 네가지는 생활선의 요점이며, 또한 생활 중에 일체 법문을 수행하는 요점입니다. 총괄하여 말한다면, 이 네가지는 우리가 생활선의 종지로 삼는 두 마디 말, “각오인생, 봉헌인생(인생을 깨닫고 인생을 바친다. 깨달음의 삶을 살고, 봉사의 삶을 산다.)”으로 개괄될 수 있습니다. 이 여덟 개의 글자가 비교적 정확하게 보살의 근본정신을 개괄하였고, 불교가 이 시대에 담당하는 사명을 나타내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깨닫는 것은 지혜의 실현이고, 인생을 바치는 것은 자비의 실현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도의 지혜도 갖추고, 큰 자비심과 기꺼이 봉사하려는 정신도 갖춘다면, 그러면 능히 현 시대에 불법의 정신, 불법의 이미지를 아주 좋게 수립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불교도 개개인이 능히 적극적으로 진보하고,
적극적으로 사회를 위해 대중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사회적으로 남의 비방과 미움을 받지 않고,
소극염세적이라는 말을 들을 리도 없을 것입니다.

“각오인생, 봉헌인생” 이 여덟 개 글자는 보기에는 매우 소박하지만,
행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내가 이 여덟 글자를 집어 낸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들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또한 생활선을 인정하는 사람 모두가 이로써 자기를 격려하고,
자기에게(실행하도록) 요구할 것을 바라서입니다.
7일 가행정진 법회의 마지막 날, 내가 여러분에게 달리 드릴 것은 없고,
이 여덟 개 글자를 여러분에게 드립니다.
우리 모두 일체의 시간, 일체의 장소에서 “각오 인생, 봉헌인생”의 정신에 의거하여
생활하고, 일하고, 수행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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