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역사

[스크랩] 日本史의 이해 - 大和朝廷

똥하 2009. 4. 19. 18:32

日本史의 이해

 

가. 고대 일본(古代日本)(1)

 

1. 幕藩體制(막번체제)

 

후지산의 원경프랑스에서의 시민혁명, 영국에서의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18세기 후반,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 일본열도는 에도막부(江戶幕府/ 1603 ~ 1867)가 성립된 후 150년을 넘기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노출 되고 있었다.

 

에도시대의 신분제도 역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직업별 우열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사(士)는 곧 독서인구인 양반 선비(文士)를 지칭했으나 일본에서는 무인들에게 士를 부쳐 무사(武士)라 했고, 이런 무인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곧 일본 사회였다.

 

일본사회에서 관료의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과거제도란 아예 없었고, 근대화 이후 서구의 교육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군(軍)의 핵심 장교를 양성하는 기관(military academy)을 만들고 그 명칭을 무관(武官)학교가 아니라 사관(士官)학교라 했으며, 나이트(knight)를 기사(騎士)라고 번역했던 것도 이런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일본제 한어(日本製 漢語)가 이것 만은 아니고 우리들 주변에 수없이 많다. 어쨌거나 전체 무가의 우두머리를 쇼군(將軍), 쇼군의 거소(居所)를 막부(幕府 / 바쿠후)라 했으며, 1만석 이상의 도조(賭租) 수입을 가진 지방의 영주(領主)를 다이묘(大名), 그 영지(領地)를 번(藩 / 한)이라 했는데, 쇼군과 다이묘 사이에는 각각의 주종관계와 권리의무가 있었다.

 

쇼군이나 다이묘들은 각기 가신(家臣)으로서 무인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 직(職)은 세습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일본특유의 봉건제도를 막번체제라고 한다. 이런 제도하에서 에도막부의 출범당시만 해도 무인들, 즉 그들이 말하는 무사들의 사회적 지위는 단연 으뜸이었다.

 

이런 신분질서가 생산 증대와 사회 발전에 따라 변화하기시작하여 18세기 후반이 되면 다른 일에 종사하지 않고 오직 싸움만을 직업으로 삼았던 무사(武士)들은 궁핍(窮乏)해 질 수밖에 없었다.

 

생산이 증대되고 화폐경제가 발달하면 사치가 성행하고 생계유지라는 최소비용 보다는 체면유지를 위한, 소위 품위유지 비용이 훨씬 많아지는 것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다. 한정된 무사들의 수입에 비해서 씀씀이가 많아진 무사들은 빚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런 경향은 하층 무사일 수록 심했다.

 

낭인(浪人)이라는 몰락무사가 등장하고, 1868년에 단행된 일본 근대화의 기점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중심세력이 이들 하층 무사계급이라는 것도 이런 추세 변화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18세기의 양상은 같은 농업경제로 출발했던 청(淸)나라의 중추세력 만주 팔기(八旗)나 조선왕조의 핵심지배계급 양반들 역시 마찬가지로 가난하게 만들었다.

 

지배계급이 가난했다면 그 대안을 찾아야 되는데, 이것이 프랑스의 경우 몰락단계의 귀족들이 하층 신분에 불과했던 부르주아지들과 손잡고 신분의 재편성을 위해 투쟁한 것이 프랑스 혁명이고, 몰락직전에 몰린 하급무사들이 옛 영광을 되돌리기 위해 국가 기구의 최 상층부에 있던 천황과 손잡고 단행된 것이일본의 메이지유신이다.

 

중국과 조선의 지배계급들은 이도 저도 아닌 엉거주춤 속에서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가 되면서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것이 크게는 동·서양간의 차이며 좁게는 일본과 한국, 그리고 중국의 차이다.

 

일본의 경우 조닌(町人)이라 불렀던 도시의 상공업자들은 큰 돈을 모으고 부유하게 되어 새로운 부르주아지 계급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놀라운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전통이 오늘의 일본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2. 일본과 일본인

 

일본열도일본과 일본문화는 예나 이제나 이방인들에게는 많은 호기심을 자극케 한다.

 

유라시아대륙 동북쪽 끝에서 남서방향으로 활처럼 휘어져 있는 것이 일본열도다.

 

북동쪽의 홋카이도로부터 남서쪽의 난세이(南西)제도까지의 길이는 3000km, 직선거리로도 2400㎞가 되지만, 동서의 폭(幅)은 좁아서 최장이 300여 ㎞에 불과하다.

 

면적은 한반도의 1.5배가되는 37,8만 여 ㎢, 인구는약 1억 2천 6백만 명으로서 한국의 2,5배가 넘고, 국토의 70% 이상이 산지(山地)라는것과, 홋가이도(北海道)에 약간 거주하고 있다는 아이누족을 제외하면 단일민족으로 구성되었다는 것 등은 우리와 비슷하다.

 

북쪽으로부터 홋카이도(北海道), 혼슈(本州), 시코쿠(四國),큐슈(九州) 등의 큰 덩어리와 크고 작은 섬 6,852개가 일본의 영토를 구성하는데, 면적의 대부분은 혼슈가 차지하고 있다.

 

그 혼슈에는 일본알프스라고 불리는 3000m 이상의 봉오리를 무려 26개나 거느리고 있는 험준한 척량(脊梁) 산맥이 가로 놓여 있어서 사면이 매우 급하고 하천의 유속이 빨라 V자 곡(谷)을 이루며, 하천의 상류에는 선상지(扇狀地)를하구에는 삼각주(三角洲)의 평야를 이룬 곳이 많다.

 

1년 평균 강수량은 1500㎜가 넘고, 환태평양 조산대에 속하기 때문에 화산과 지진이 많고, 적도기단의 영향으로 태풍이 1년에 대여섯 차례,시베리아기단의 영향으로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는 등 자연재해가 많은 곳이 일본이다.

 

이런 자연환경은 일본 국민성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었다. 대체로 성격이 조급하고 상하관계가 분명하며, 아부라고 할 정도로 친절하고 거짓을 용서치 않지만, 주고받는 것이 분명하고 이해타산에는 빈틈이 없다. 약자에게는 강하나 강자에게는 매우약하다.

 

일본에 대한 우리들의 감정이 곱지는 않다. 수 없이 당했던 왜구(倭寇)의 난동과 왜란(1592 ~ 98)과 식민지 경험(1910 ~ 45)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산에서 쓰시마(對馬島)까지는 약 50㎞의 바닷 길로 이어지는 아주 가까운 이웃이고, 구대륙시대에는 일본열도와 한반도 그리고 중국대륙이 잇대어 있었다.

 

역사적으로 한·일 관계는 매우 복잡해서 문화적인 우월성을 서로 강조하여 그 자존심 싸움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단일 민족국가를 형성하고 살았던 과거의 경험이 두 나라 모두에게 문화적 국수주의(國粹主義)를 강하게 뿌렸고, 국가지상주의라는 목표아래 애국심이라는 이기적 이념이 이를 더욱 부채질했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 역시 여기에 초점을 맞춘 애국심 배양이 목표였기 때문에 우리들은 일본을 왜놈 쪽바리 정도로 비하해서 불렀고, 일본에서는 조센진(朝鮮人) 이라 하여 후진 민족의 대명사처럼 사용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국제화·세계화·다원화 시대에 우리들은 살고있다. 가깝고 먼 나라 일본의 역사에 관한 한 우리들은 문외한이나 마찬가지다. 이런사정은 일본도 같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일본의 역사를 모르는 것 처럼 일본인들 역시 한국의 역사는 모를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본인 역시 방공(防共)과 반일(反日)의 이데올로기 시절에 교육을 받았고, 일본과 일본 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만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사(日本史)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고, 준비된 자료도 별로 없으며 아는 것도 별로 없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더구나 이 글을 쓰기 전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같은 한자권(漢字圈)이면서도 언어에서부터 벽에 부닥치게 되어 심히 당황하기도 했으나, 일어(日語)를 이해할 수 있는 인사들의 자문을 받아 일본사의 개략을 몇회로 나누어서 올리고자 한다.

 

한자(漢字)를 문자로 사용하고 있는 일문(日語文章)의 독해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는 훨씬 어려운 것 같다. 같은 자를 두고 讀으로 읽기도 하고 訓으로 읽는가 하면 문장의 성질에 따라서는 변형해서 사용할 뿐 아니라 訓과 讀도 우리들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인명이나 지명, 제도와 관직 등이 많은 역사학의 특성상 그 어려움이 더한 것 같다.

 

나. 고대(古代) 일본

 

1. 선사시대(先史時代)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일본 역사에서 고대,중세, 근세, 근대, 현대로 분류하는 시대구분은 우리와 같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왕조를 기준으로 시대를 분류하지만, 일본의 경우 그들이 말하는 텐노(天皇)는 만승일계(萬乘一系)라 하여 일본의 왕통을 같은 가계에서 이었기 때문에 왕조로서의 구분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지금도 일본에는 그들이 텐노(天皇)라고 부르는 왕이 있고, 현재의 텐노 아키히토(明仁 / 명인 / 1933 ~)는 그들 왕통으로 따졌을 때 제125 대의 왕이 되며 헤이세이(平成)라는 독자적인 연호도 사용한다. 그러나 왕으로서의 전제군주권은 형식에 불과하고 국정에 관한 권능은 내각과 의회가 장악하고 있는 입헌군주국이다.

 

그러나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국왕의 권위는 아직도 대단하며 비록 형식적이라고는 하지만 내각을 임명하고 그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따라 국사(國事)를 관장한다. 이런 일본적인 정치형태는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고 고대국가가 성립되었다는 4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군림은 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 다"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일본 왕실을 보전케 한 요인이기도하다.

 

일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약1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는 조몬(繩文/승문)인들이 외래문화에 자극받아 문화를 발전시키고 점차 주변을 통합했다는 설과, 기원전 3 ~ 4세기 경 농경문화를 앞세운 야요이(彌生/미생)인들이 들어와 토착 선주민을 정복하고 나라를 세워 오늘에까지 이어졌다는 설, 그리고 고구려계 기마민족인 부여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정착했다는 설 등이 대체적인 윤곽이다.

 

일본인들의 신체적 형질은 우리와 같은 몽골계이다.그러나 언어적으로는 남방계에 속하는 말레이 - 폴리네시아어계에 가깝고 한국어와의 유사성도 포함하고 있어서 정확하게 어느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조몬인과 야요이인, 여기에 남방계 인종이 혼합되어 야요이시대(彌生時代/미생시대 / BC 300 ~ AD 300)에 대체적으로 일본인종의 근간이 이룩되었다고 보고 있다.

 

조몬시대(繩文時代/승문시대)니 야요이시대(彌生/미생/ BC 300 ~ AD 300)니 하는 것은 이 시기에 제작 사용되었다는 토기 표면에 새끼(繩文)모양의 무늬와 곡식(彌生)모양의 무늬를 두고 붙인 이름이다. 우리 나라에서 민무늬, 덧무늬, 빗살무늬토기 등의 이름이 붙여진 것과 같은 이치다.

 

야오이시대가 되면 농업생산의 증대를 바탕으로 부족내지는 부족연합세력으로서 기원전 200년경 백여 개의 작은 나라가 등장했고, 말기에 해당하는 기원 3 ~ 4세기에는 거대한 무덤이 등장하는 이른바 고분시대로 접어든다.

 

기원 후 57년 큐슈(九州)의 북부에 있던 나고꾸(奴國- 福岡市부근)라는 나라가 樂浪(낙랑)을 통하여 후한에 조공, 광무제로부터 漢委奴國王(한위노국왕)이라고 새겨진 금인(金印)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중국 사서에 나타난 일본에 관한 최초의기록이다.

 

우리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전 57년 신라의 박혁거세가 사로 6촌 촌장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에 있었다는 奴國이 박혁거세가 거서간이되고 나서 꼭 백년이 되었을 때 이미 중국과 연결 통로를 가졌다는 것은 눈 여겨볼만 한다.

 

107년에는 伊都國(이토 - 福岡縣 怡土郡)이 다른 여러나라와 더불어 노예 160명을 한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 진수의 삼국지 위지(魏志)에는(2세기 중엽) "...일본에는 분립 된 작은 나라들끼리 전쟁이 일어나 큐슈북부에 있던 많은(100 여 개) 나라가 30여 개로 통합되었다.

 

그중 야마타이(耶馬臺)국에는 히미꼬(卑彌呼)라는(샤먼적인)여왕이 있어서 이들 약 30여 개의 나라들을 통속(統屬) 하였는데 여왕은 군병이 호위하는 궁전에서 천여 명의 시녀를 거느리고 살았으며 관리를 임명하여 이들 여러 나라들을 검찰(檢察)하였고, 조세징수와 엄한 형벌로 통치하였다. 또한 대방(帶方)을 통하여 위에 조공, (위로부터) 親魏倭王(친위왜왕)의 금인자수(金印紫綏)와 많은 물자를 받았다. (3세기 중엽)히미꼬가 죽고 남자가 왕이되었으나 백성의 반대로 다시 도요(壹與)라는 여왕을 세워 내란을 수습하였다....."고쓰여 있다.

 

이 야마타이國의 소재에 대해서 일본의 학계에서는 기타큐슈(北九州)설과 긴키(近畿)의 야마토(大和 - 奈良縣에 해당되는 옛 행정구역) 설이 있으나 아직까지 확실한 결론은 얻지 못하고 있다.

 

2. 야마토 조정(大和朝廷)

 

일본에서 최초로 고대국가의 체제를 갖춘 것은 4세기초 긴키(近畿) 지방에서 일어난 야마토 國이라는게 정설이다. 앞서 말한 奴國과 伊都國(논쟁이 되고 있는 耶馬臺는 제외하더라도)이 있었던 큐슈지방이 아닌 그 보다 더동쪽, 즉 지금의 나라(奈良)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미 야요이시대에 긴키지방에는 큐슈와는 다른 동탁문화(銅鐸文化)를 가진 정치 세력이 있었고 이들이 야마토정권을 세우고 발전한 것이 오늘에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당시의 일본열도에서 철기의 보급이 빨랐던 큐슈와는 별도로 야마토에도 청동기를 사용했던 정치 세력이 있었고 이들 가운데 야마토 남부에 자리잡고 있었던 세력은 철기를 받아들여 세력을 키우고 여러 세력들과 연합해서 나라를 세우고 주변을 통합해 나갔다는 것이다.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이 성립된 4세기초에서 카마쿠라막부가 성립되는 12세기말에 이르는 시기를  일본사에서는 고대사로 분류하고, 이야마토조정이 점차 강력해져서 일본을 통일한 중앙권력으로 성장, 일본 황실의 기원이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학설이다.

 

그러나 초기의 야마토 조정이란 세력이 미약하여, 기타큐슈(北九州) 일대에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던 세력들을 완전히 제압한다는 것은 벅찬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야마토정권으로서는 이들을 제압하는 것이 최대의 급선무였다.

 

이런 사정에서 4세기 말, 한반도의 남쪽 임나(任那-김해지방)에 세력을 펴고, 백제와는 관계를 돈독히 하며, 신라에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여 키타큐슈지방의 세력을 사방에서 포위 함으로써 우선 그들의 기를 걲고 이어 견제 내지는 토벌한다는 것이 국가적인 정책이자 목표였다.

 

그러나 이런 모든 시도는 한반도 북방에서 일어난 고구려에 의해서 무산되고 말았다. 4세기말에 있었던 이런 일들은 광개토대왕릉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낙동강 유역에서 섬멸시켰다는 것과, 왜와 연결한 백제군을 격파했다는 비문의 기록들은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5세기경까지도 국내통일을 이루지 못했던 야마토 정권이 눈을 돌린 것은 중국 대륙이었다.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강성해지고 고구려가 버티고있는 한 그 목적을 달성하기란 어렵다고 보고 대륙으로부터 문물을 수입하여 국력을 키우고, 동시에 권위를 높여 그 위광(威光)으로 반(反) 야마토세력을 제압코자 했던것이다.

 

이런 필요에서 중국과의 교섭을 서둘렀는데, 이런사실들을 중국의 사서(史書)에서는 왜왕 찬(讚)이 중국 남조의 송(宋 / 劉宋)에 조공하고(421년,425년). 478년에는 왜왕 武가 조공과 함께 표문(表文)을 지어 올렸다고 적고 있다.

 

송(劉氏 宋 / 420 ~ 478)에 조공하였다는 왜왕 찬(讚)은 그 연기로 보아 닌도꾸(仁德) 천황으로 추정되며 일본 황실의 계보로서 믿을 만한 것은 이 닌또꾸 천황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또한 왜왕 무(武)는 유랴꾸(雄略) 천황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때 일종의 외교문서인 표문을 한문으로지었다면 이 시기 일본의 한자와 한문 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출처 : 양재클럽(Y-Club)
글쓴이 : 拈華微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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