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역사

[스크랩] 日本史의 이해 - 大化改新

똥하 2009. 4. 11. 23:55

가. 고대 일본(2)

 

3. 야마토(大和) 정권의 체제(體制)

 

(1) 氏姓制度(씨성제도)의 성립

 

구마모토 성고대 일본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단위는 씨족(氏族)이다. 혈연공동체로 구성된 일단의 무리들을 우지(氏)라 하였고, 우지를 대표하는 족장(族長)을 우지노가미(氏上)라 하였다.

 

우지노가미는 밖으로는 우지를 대표하고, 안으로는 우지의 사람들을 통솔하였으며 씨족의 신인 우지가미(氏神)의 제사를 맡았다.

 

경작 가능한 토지가 있는 곳이면 거주지나 조상의 이름, 세습하는 직업 등의 이름을 붙인 이런 씨족집단이 곳곳에 있었고 이런 씨족사회를 확대 재편한 것이 야마토 국(國)이다.

 

우지의 구성원은 각각의 호(戶)를 이루었고, 호당(戶當) 인원은 적게는 수십 명에서부터 많게는 수백 명이 되었으며, 호수(戶數) 역시 적게는 몇 호(戶)에서부터 많게는 수 백호까지 다양했다.

 

다시 말하면 적게는 수십 명에서부터 많게는 수 천명에 이르는 독립적인 여러 씨족공동체가 야마토 지방의 씨족연합체, 곧 야마토우지가 지배하는 체제에 통합되어 성립된 것이 야마토 국(國)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야마토 국(國)은 여러 우지(氏)의 연합정권으로 출발하였으며, 여러 씨족을 대표해서 왕이라 했지만 그 지배 영역은 야마토에 한정되고 다른 지역은 각각의 족장인 우지노가미가 지배 통솔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5부족, 신라가 6부족 연합으로 출발했다는 것과 비슷한 사례라 할 수 있으며 대개의 고대국가란 이렇게 씨족 내지는 부족 연합으로 출발했다가 점차 중앙집권화가 이룩되면 그 지배구조 역시 재편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야마토 정권의 경우, 씨족 공동체인 우지가 국가에 통합되면서 그 족장인 우지노가미(氏上)에게는 그 규모에 합당한 국가기구의 중앙관료 내지는 지방장관에 임명하고, 그 일의 성질에 따라 각각의 이름을 부여하였는데 이것이 일본식 성(姓), 즉 가바네(姓)가 되었다.

 

원래는 씨족장인 우지노가미(氏上)에게만 부여했던 가바네가 그 직무가 세습화됨에 따라 우지의 구성원 모두가 같은 가바네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것이 점차 신분을 나타내는 성(姓)이 되었다.

 

따라서 직무의 고하(高下), 세력의 대소(大小)에 따라 상하(上下), 존비(尊卑)로 차별화 되었는데 특히 오미(臣), 무라지(連), 후비토(史)등의 가바네는 유력하고 중요한 가바네가 되어 귀족화 되어 갔다.

 

인명의 호칭은 우지(氏 - 거주지 이름 혹은 조상의 이름 등), 가바네(姓 - 직무의 성격), 이름의 순서로 하였는데 이것이 일본식 씨성제도의 출발이다. 이런 연유로 일본인의 성명은 통상 4자 이상의 한자(漢字)로 쓰여지고 있는데, 이런 씨성(氏姓)을 가지고 있는 계층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일반인들은 씨성이 없었다.

 

메이지유신 후 모든 일본인들에게 씨성을 갖도록 권장했으나 지원자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강제로 씨성을 만들도록 1875년법으로 공포하자 가바네가 없었던 일반인들이 높은 가바네를 붙인다는 것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출신지와 직업에 따라 나름대로의 씨성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못했던 많은 사람들은 살고있는 동네나 자기 집의 위치에 따라 中村(나까무라) 松下(마쓰시다), 田中(다나까), 大山(오야마), 靑木(아오끼), 北原(기다하라) 등으로 구색을 맞추고, 씨성들이 만들어져 세계에서 가장 많은 씨성을 갖는 나라가 되었다.

 

현재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씨성은 10만개가 넘고부자(父子)간 씨성이 다른 경우도 허다하며, 여자 이름에 아들 子(꼬)를 붙이는 것도 한자문화권에서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도 4 ~ 50 대 이상의 여인들의 이름에서 順子, 英子, 貞子........등 아들 子가 붙은 이름을 흔하게볼 수 있는데 이것 또한 식민지가 남긴 상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을 모방한 우리의 성씨(姓氏)제도는 관향(貫鄕)과 성(姓)을 가지고 있지만, 성과 이름만 사용하여 통상 3자의 한자로 구성되어 있다. 김해 김 아무개가 아니라 그냥 김 아무개라고 부르고 호적에는 부계(父系)의 관향을 기재하고 무슨 김씨니 이씨니 해서 구분한다.

 

근대 이후가 되어서야 모든 사람이 성과 이름을 가질수 있었다는 것은 동·서양이 같고, 지금도 이슬람세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름만 있을 뿐 성이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서양의 이름은 First name이라 해서 존과 메리(마리아)등 성경의 이름을 대부분 차용해서 부르고, Last name이라 해서 가문을 표시(Familyname)하는데 근래에는 중간에 모계(母系 / middle name)를 넣기도 한다.

 

현재 우리사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성씨는 김, 이, 박을 필두로 240 여개가 된다. 그렇다면 이런 성씨제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학자들에 따라 해석이 구구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결론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3대 임금 유리 니사금이 6부를 개편하고 그 6부의 촌장에게 각각 성(姓 / 李, 崔, 孫, 鄭, 裵, 薛)을 하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신빙성이 부족하고 후대에 붙인 것으로 보고 있다. 소년화랑 관창의 속성은 김씨며, 불교전파를 위해 순교한 이차돈(異次頓 / 506 ~ 527)은 박씨라고 한다.

 

이사부, 거칠부, 솔거 등은 이름일 뿐 성은 포함되지 않았고, 을파소, 을지문덕, 연개소문, 성충, 흥수, 계백 등과 궁예, 견훤 등은 어디까지가 성이고 이름인지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왕실을 비롯한 왕족들은 성을 사용했지만 여타 대부분은 성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백성(百姓)이란 말은 고려시대부터 등장하는데, 성(姓)을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란 뜻이다. 따라서 성을 가진다는 것만으로 대단한 가문이라 할 수 있고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성이 없었다.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의 초명은 삼능산이고, 복지겸은 복사귀, 배현경은 백옥, 홍유는 홍술이었다가 왕실로부터 성을 하사 받고 백성에 들게 되었다는 것도 흥미 있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에서도 하층민에게는 성이 없었다.

 

우리 나라에서 민적(民籍)이라 해서 근대적 호적제도를 도입한 것은 1909년 3월부터이다. 이때부터 모든 사람에게 성(姓)을 붙이게 하였고, 기왕이면 좋은 성을 붙이자고 해서 특정 관향과 성씨가 많아졌다. 신분 때문에 수 없이 당했던 맺힌 한을 이렇게 나마 풀어보자는 심사였을 것이다.

 

(2) 神道(신도/신토)와 歸化人(귀화인)

 

씨족의 원초적 구성은 혈연적인 것이었지만 농업의 발전에 따라 씨족의 성원이 아닌 예속민(隸屬民)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들 예속민 중 공동체인 우지(氏)에 속하면 베(部),구성원 개인에게 속하게 되면 얏꼬(奴)라 하였고, 피정복민, 생계곤란자, 귀화인으로구성된 베민(部民)이나 얏꼬들이 하는 일은 토지경작과 특수업종의 일을 맡았다.

 

중앙정권도 베민을 중요시하고 그들에게 많은 토지를 소유케 하여 경작시킨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우지와 같았다.

 

야마토국가에 통합된 소국들의 수장들은 그 특수지위를 승인 받아 그 집단의 대소에 따라 구분된 국, 현, 군, 촌의 수장이 되어, 구니노미얏꼬(國造), 아가따누시(縣主), 이나기(稻置) 등으로 불렀고, 가바네처럼 세습되고 그렇게 불렀다.

 

야마토정권이란 야마토지방을 지배하던 강력한 우지가 주변의 대소우지를 통합하고 정치적 수장이 된 것이다. 왕실은 그 독특한 지위 때문에 야마토우지에게는 가바네가 없었다.

 

연합체의 군장으로서 출발한 일본 황실은 통치기능보다는 군림(君臨)하는 기능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일본황실의 영속성의 원인이 되었으며,지금의 일본왕실도 가바네, 즉 성(姓)은 없고 우지(氏)인 야마토(大和)에 히로히토(裕仁)니 아끼히도(明仁) 하는 등의 이름만 붙인다.

 

중앙의 호족인 우지노가미는 중앙과 지방의 정치에 참여하는 한편, 우지를 구성하는 우지노비또(氏人)와 베민(部民)을 거느리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역(勞役)과 우지에 부과된 조세(租稅)를 바치고, 군사(軍事)에 종사하였다.

 

따라서 우지노비또, 베민, 우지의 토지는 사적 지배밑에 있었고, 천황은 별도로 미야께(屯倉)라는 직할지(直轄地)를 소유하고, 미야께는 다베(田部)라는 천황직속의 베민에게 경작시켰는데, 이들을 미꼬시로베(御子代部), 미나시로베(御名代部)라 불렀으며, 노비(奴婢)도 소유하였다.

 

수공업품은 도모노 미얏꼬(伴造)라는 수장이 관장하는 도모베(品部)라는 베민이 제조 공납하였다. 지방의 우지노가미의 사유지를 다도꼬로(田莊) 사유민을 가끼베(曲部)라 하였다.

 

우지에 우지가미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황실에도 아마데라스 오미까미(天照大神)라는 여신(女神)을 우두머리 신으로 받들고, 이를 모시는 제사가 천황의 중요행사가 되었다. 제정일치(祭政一致)의 풍습을 갖고 있었던 것 역시 다른 사회와 큰 차이가 없었다.

 

씨족통합이 황실주도로 이루어짐에 따라 각 씨족의 신과 그 신화는 황실의 조상신으로 정리 통합되어 일본의 건국신화를 만들었고 이것이 일본 신도(神道 / 신토)의 원류가 되었다. 종교로서의 신도는 조상신이거나 숭배하는 인물을 신으로 모시고 받들기 때문에 도덕적 죄악감이 결여된 밝고 쾌활한 성격을 가진 원시적 종교의 성향이 강하고, 외래 종교에 대해서 관대한 것도 이런 신도의 바탕에서 수용하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인 중 이슬람교도는 없고 다른 종교도 神道의 바탕에서 이를 변형 수용하고 있다.

 

비록 각 씨족의 연합체 위에 군림한 황실이긴 했으나 수리시설의 확대, 개간, 지방 씨족 소유지의 몰수 등을 통해 미야께(屯倉)를 기타큐슈로부터 간토오(關東) 지방까지 확대하여 경제적 기반을 만들고 자체 권력 증대를 추진하였다.

 

(3) 古墳(고분)시대

 

일본의 고고학계(考古學界)에서는 이 시기(3세기 ~8세기)를 고분시대(古墳時代)라 한다.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으로 대표되는 고분중에는 봉분(封墳)의 모양에 따라 원분(圓墳), 방분(方墳), 상원하방분(上圓下方墳)등으로 불리는 고분들이 긴끼(近畿) 일대에 2600 여기가 산재해 있고 시신(屍身)과 함께 각가지 물건들을 부장(副葬)하였다.

 

무덤의 주인은 천황을 비롯한 황족과 우지노가미(氏上)등 유력한 정치세력들이 사후의 세계를 만든 것으로 닌또꾸(仁德) 천황의 것이라고 전하는 陵墓(和泉國の 大前方後圓墳)는 평지에 거대한 봉분을 쌓아 만든 것으로 흙을 쌓는대만 하루에 5천명의 장정이 동원되어 1년은 걸렸을 것이라고 한다. 이는 천황의 권위가 매우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고분에는 담홍(淡紅)색을 띈 원통형(圓筒形)·가형(家形)·동물형(動物形)·인물형(人物型)·그릇형 등의 토기를 분구(噴口)의 정상매장시설 주위 또는 아래에 둘러 세웠는데, 이를 하니와(埴輪)라 한다.

 

황위(皇位)는 형제상속이 원칙이었다. 천황의 재위기간은 평균 7년을 넘지 못했고 황위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런 분쟁은 씨족간의 세력 다툼에 이용되었고, 부강한 씨족 중에는 사유지를 확대하고 고도의 기술을 가진 귀화인을 소유함으로써 중앙권력을 위협하였다.

 

6세기 말경에 있었던 모노노베우지(物部氏)와 소가우지(蘇我氏)의 싸움은 그 전형적인 예로써, 이 싸움에서 승리한 소가우지는 그 전횡(專橫)이 날로 심해 졌고, 이에 새로운 관료적 행정적 정치질서로서의 씨성제도의 위기를 타개해야 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귀화인의 대부분은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사람(渡來人)들이었고,이들 중 관위(官位)와 토지를 받고 유명해진 사람들이 많았는데, 아야우지(漢氏)는 문필(文筆)로서 하따우지(秦氏)는 양잠과 방직의 전문기술자로서 궁정에 복무하고 높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집단적으로 키나이(畿內) 지방에 정착한 귀화인들의 베(部)로서는, 문필을 담당했던 史部를 비롯해서, 각종 기술에 따라 蠶 部, 吳服部, 陶部, 錦織部, 鍛冶部, 墅部, 手人部,  染部와 회계를 담당한 藏部, 제방, 수리,주조, 조선 등의 기술이 귀화인들에 의해서 전래되었다.

 

한반도의 남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일본에서는 가야(伽倻 / 任那)와 백제에서 여러 가지 문화를 배웠다. 후미(文), 후데(筆), 가와라(瓦), 데라(寺), 미소(味 ) 등은 한국어가 일본어로 바뀐 것이며, 815년에 편찬되었다는 신찬 성씨록에 따르면 그 당시 일본의 중앙귀족 중 1/3 이 귀화인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한자(漢字)는 백제의 아직기(阿直岐/?~?)가 한문(漢文)은 아직기의 추천을 받은 왕인(王仁/?~?)이 각각 근초고왕(近肖古王 / 346 ~ 75)과 근구수왕(近仇首王/ 375 ~ 84) 때 일본에 전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이 보다 앞서 한자와 한문이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왕명으로 일본에 건너간 아직기가 말 기르는 일을 맡아보다가 경서(經書)에 능통하여 태자(太子 : 道稚郞子)의 스승이 되었고, 뒤에 아직사(阿直史)라는 일본의 귀화씨족이 나타났는데, 그는 이씨족의 선조가 되었다.

 

오늘날 전남 영암 출신인 왕인(王仁/?~?)은 근구수왕(近仇首王)때 일본에서 아라타와케(荒田別) 등을 보내어 학자와 서적을 청하자 405년 왕의 손자진손왕(辰孫王)과 함께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오진천황(應神天皇)의 태자에게 글을 가르쳐 일본에 한문학(漢文學)을 일으키게 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서부 일본의 가와치(河內)에서 살았다고 한다.

 

일본의 고사기(古事記/고지끼)에 나오는 와니키시(和邇吉師)와 일본서기(日本書紀 / 니혼쇼키)에 기록되어 있는 와니(王仁)가 백제에서 건너간 왕인이라 한다.

 

6세기초에는 백제에서 오경박사(五經博士)가 도래(渡來)하여 한학(漢學)이 더욱 발달됨에 따라 신라의 이두(吏讀)처럼 일본어음에 한자어를 해당시키는 만슈가나(萬葉假名)식 표기법도 이 무렵부터 생겼다고 보고 있다.

 

불교가 일본에 전래된 것은 6세기 중엽으로서 백제의 성왕(聖王 / 523 ~ 554)은 긴메이(欽明) 천황에게 불경을 보낸 것을 시초로 많은 승려들이 한반도에서 건너갔다. 불교의 수용여부를 두고 소가(蘇我)파에서는 진보적인 입장에서 수용을, 모노노베(物部)파에서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반대를 주장했는데, 소가우지가 승리하여 불교는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이후 일본 문화에 많은영향을 주었다.

 

(4) 쇼토쿠태자(聖德太子)와  관위제도(冠位制度)

 

불교와 전래와 한학의 발달, 소가우지의 전횡 등은 고대 일본사회의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였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 따라 중국의 수(隋)·당(唐)을 모방한 일본 최초의 율령(律令)과 관등이 정해졌다.

 

새로운 정치의 추진자로 등장한 것이 쇼토쿠태자(聖德太子/ 성덕태자 / 573 ~ 621)였고, 그는 아버지가 죽고 593년 숙모인 스이코(推古王 /女帝) 천황이 즉위하자 태자로 책봉되어 섭정으로서 정치를 맡아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황실세력을 능가하고 있던 소가우지의 협력없이는 왕권강화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일단 쇼가우지와 협력해서 행정적 관료국가를 지향하고, 불교를 크게 장려하는 한편 각종 개혁을 통해서 왕권을 강화코자했다.

 

쇼토쿠태자의 개혁 중 가장 주목할 것이 603년에 단행한 관위(冠位) 12계의 제정이다. 유교적 덕목인 명칭을 사용해서 大德, 小德, 大仁, 小仁, 大禮, 小禮, 大信, 小信, 大義, 小義, 大智, 小智의 12 階의 位를 정하고, 이를 신하들 본인에게 일대에 한하여 수여했다.

 

이런 계급의 표시방법으로 紫, 靑, 赤, 黃, 白, 黑의 색으로 구별한 冠(관 즉 감투)을 주었는데, 이것이 12계(階)의 관위(冠位)제도라는것이며, 가바네(姓)처럼 세습시키지 않았던 것은 전통적인 씨성제도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표현이다.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왕실의 권위를 높여야 한다. 이런 배경에서 쇼토쿠태자의 17조 헌법이라는 것과 천황(天皇)이라는 칭호, 황기(皇紀)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태자의 저술이라는 17조의 헌법은 야마토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훈계(訓戒)로서, 천황의 지위는 전통적인 신적 권위가 아니라 중국의 천자사상에 근거를 두었다고 한다.

 

이런 사상적 근저에서 천황(天皇/텐노오)이라는 칭호가 이 시대를 전후해서 사용되었고, 역사가 편찬되고, 황기(皇紀)라는 조작된 기년(紀年)을 만들었다.

 

중국의 참위설(讖緯說)에 근거하여 스이꼬 천황 9년(601)의 신유(辛酉)에서 역산(逆算)하여 전설적인 진무(神武) 천황의 즉위년(일본건국년)을 설정한 것이 그들이 말하는 황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의 참위설에 따르면, 1부( ) 21원(元)의 신유(辛酉), 곧 1260년째의 신유(辛酉)년에 대변혁이 일어난다고 되어 있는 것을 원용, 이런 큰 변혁이 자신의 치세기인 601년의 신유라고 보고, 여기에서 1260년을거슬러 올라간 해에 일본이 건국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 기년보다 약 600년 앞선, 매우 황당 것이나 일본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우리의 단군기원(檀紀)은 올해가 4335년이 된다. 그 근거는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立都 阿斯達)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했는데(開國號 朝鮮) 요임금 즉위년과 같다(與高同時)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따른것이다.(高는 堯로서 고려정종의 이름 堯를 피해서 쓴 避諱)

 

중국의 전설상의 이상군주 요임금이 즉위한 것이 올해로서 4335년째라는 것이고 같은 해에 단군이 나라를 세웠으니 우리의 건국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어디에 근거해서 이런 기록을 남겼는지는 알수 없지만 그래도 일본의 황기라는 것보다는 훨씬 논리적이다.(魏書에 기록되어 있다고 일연을 쓰고 있으나 위서라고 붙인 사서 어디에도 이런 구절이 없다)

 

쇼토쿠태자는 신라를 견제할 목적과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수(隋)와 교통하고 사절을 파견하면서 유학생과 유학승을 같이 보냈는데, 이들이 새 지식을 배우고 돌아와 율령정치 전개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595년(고구려 영양왕 5년, 백제 위덕왕 42년) 고구려의 승려 혜자(惠慈)와 백제의 승려 혜총(慧聰)이 일본에 건너가자, 혜자를 스승으로 삼아 불교를 보급하여 596년 호코사(法興寺)를 607년에는 호류사(法隆寺)를 창건하는 등 불교의 흥륭에도 힘썼다.

 

이런 사찰 창건에 많은 고구려의 기술자들이 초빙되었고, 백제 아좌태자(阿佐太子)가 그렸다는 쇼토쿠태자의 초상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5)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쇼토쿠태자가 개혁을 완수하지 못한 체 사망하자 소가우지는 천황을 능가하는 권력을 장악하고, 태자의 일족을 죽이고 그 베민과 영지를 몰수하고 사유화 해 버렸다. 이렇게 되면 그 반대파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소가우지의 반대파는 나까노오에노(中大兄) 황자와 나까또미노 가마따리(中臣鎌足)가 중국에서 돌아온 신귀국자와 결합하여, 소가우지 일당을 죽이고 나까노오에노(중대형) 황자를 황태자로 새우고 중국 유학생들을 과감하게 기용하여 개혁정치를 단행했는데, 이것이 645년에 이룩되었다는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라는 것이다.

 

우선 여러 호족을 모아 충성을 서약시키고, 동쪽 제국의고 꾸시(國司 / 구니노쓰까사) 토지와 인구조사를 명했다. 645년 나라(奈良) 부근의 아스카(飛鳥)에서 나니와(難波 - 大阪)로 도읍을 옮기고 다음해인 646년 정월 개신의 조(詔)를 발표하였다.

 

개신의 요지는 종래의 귀족 및 호족(氏族)이 소유하고 있던 미야께(屯倉-田莊)와 베민을 폐지하고 그것을 국가의 공지(公地)와 공민(公民)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이 필요하였는데,이를 위하여 중앙에는 京師(경사)·畿內(기내)의 制(제)를 마련하였고, 지방조직으로서는 國, 郡. 里를 두었다.

 

호적조사를 기초로 당의 균전제(均田制)를 모방한 반전수수(班田授受)의 법을 정하여 公民의 부담능력을 보충하였는데, 세제(稅制)로는 당의 조용조(租庸調)을 채택하여 인민의 사적 지배를 막는 동시에 귀족에게는 국가에서 토지와 食封(식봉)을 지급하였다.

 

冠位制度(관위제도)를 혁신하기 위해서 649년에는오미(臣), 무라지(連), 도모노 미얏꼬(國造 = 國司) 등에 대신할 八省(팔성) 백관(百官)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이런 일련의 개혁들은 견당사를 따라 당에 유학하였던 유학생과 유학승이 주축이 되었는데, 그 중요 인물은 다까무꼬노 구로마사(高向玄理)와 미나우찌노 쇼안(南淵請安), 그리고 승려 민(旻) 등인데, 이들은 당나라에서 한창 번창 했던 정관의 치(貞觀 - 治 / 당태종의 치세기간에 있었던 중흥)에 깊은 감명을 받고 이를 일본에 옮긴 것이다.

 

같은 시기 한반도에서는 당과 연결한 신라가 백제를 무너뜨리고(660) 이어 고구려마저 무너져(668) 삼국시대의 막을 내리고 676년에는 신라에 의해서 삼국통일이 이루어졌다.

 


출처 : 양재클럽(Y-Club)
글쓴이 : 拈華微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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