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역사

[스크랩] 日本史의 이해 - 奈良時代

똥하 2009. 4. 11. 23:57

일본사(日本史)의 이해 - 奈良時代

가. 고대 일본(古代日本)(3) - 奈良時代(710 ~ 784)

4. 율령(律令) 체제(體制)

(1) 율령제(律令制)의 성립

奈良의 法隆寺인간이 인간을 다스리는 원초적인기술은 폭력(暴力)이다. 여기에 지배(支配)·예속(隸屬)의 인간관계를 설정하고 이를합리화시키면 국가권력이 되고, 이를 행사하는 것이 정치(政治)라는 것이다.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선악(善惡)으로 구분된 규범(規範)이있어야 하고, 그 규범을 지배층의 자의(恣意)에 따라 일방적으로 강제 통용시킨 것이율령(律令)이며, 율령을 집행하는 것이 군주전제국가라는 조직이다.

이런 율령(律令)에 격식(格式)을 만들어 중국 당(唐)나라의정관연간(626 ~ 649)에 완성되었다는 것이 당률(唐律), 곧 율(律)·영(令)·격(格)·식(式)을갖춘 당의 율령이며, 이런 당률이 일본으로 건너가 645년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의원동력이 되었다.

율(律)은 행위사실의 위반에 대한 처벌(處罰)인 형벌(刑罰)을말하며, 영(令)은 강제(强制)와 금지(禁止)에 대한 명령(命令)으로서 시대상황에따라 수시로 변하는 칙령(勅令/황제의 명령)을 말한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변별한다면행정법규(行政法規)라고 할 수 있다.

격(格)은 율령을 개정하는 명령에 대하여 이후에도계속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규정으로 관습법(慣習法) 내지는 보충법에 해당되고,식(式)은 시행령, 즉 시행세칙(施行細則)을 말하는데, 당률을 모방한 일본의 율령은다이카 개신(645) 이후 여러 차례 수정과 보완을 거듭한 개폐(改廢)의 내용은 三代格式과類聚三代格의 편집으로 집성되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율령은 대보(大寶 / 다이호)율령이다.주변상황에 따라 수시로 개폐되었지만 그 골격은 이 율령에 근거하고 있었다. 다이호(大寶)원년(701)에 집성되었다는 大寶律令에 따르면, 관제는 중앙에 神祇官(신기관 / 진기깐,가미쯔카사)을 두어 제사를 맡았고, 太政官(태정관 / 다이쪼오깐)을 두어 정무(政務)를총괄케 하였다.

太政官위에 三公(삼공)이라 하여 非(비) 상설직으로太政大臣을 두었고, 常設職(상설직)으로 左(좌)·右(우) 大臣(대신)을 두었으며,太政官 밑으로는 左·右 辨官에 분관(分管)되어 정무의 실제를 분담하는 八省(中務,式部, 治部, 民部, 兵部, 刑部, 大藏, 宮內)을 두었다.

지방제도는 國·郡·里의 제도를 기초로 國의 우두머리인國司(국사 / 고꾸시)는 중앙에서 파견하였으나 郡의 우두머리인 郡司는 종래의 國造(국조/ 구니노미얏꼬 - 國司)의 집안에서 채용하였으며, 里 혹은 鄕은 50戶로 편성하고그 속에 5戶로 구성되는 保를 두어 경비(警備)와 조세(租稅)의 연대책임을 지게 하였다.

관료는 직무(職務)와 계위(階位)에 따라 록(祿 / 봉급)과직전(職田 / 직무에 따라 지급된 토지), 그리고 위전(位田 / 공훈과 계급에 따라지급된 토지)과 봉호(封戶 / 부릴 수 있는 家口) 등을 지급 받았고 조세(租稅)와신역(身役)은 면제되었다. 군제(軍制)는 징병제를 실시하였고, 4 郡에 1군단을 두었는데수도와 변방의 경비를 맡게 하였다.

중앙과 지방에 대학을 세우고 중앙에는 5위 이상의관료 자제를 지방에는 郡司의 자제를 입학시켜 明經, 明法, 文章, 音, 書, 算의 六道(육도)를배우게 하였으나 중국처럼 과거(科擧)나 궁중의 환관(宦官)제도는 없었다.

신분제도는 양민(良民 / 公民)과 천민(賤民 / 家人,奴婢)으로 크게 나누었고, 특정한 기술업에 종사했던 베민(部民)은 원칙적으로는양민에 속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천민대접을 받았고 세습적으로 관(官)에 예속되어있었다.

公民은 6세 이상의 남자의 경우 구분전(口分田 / 개인에게지급된 토지)으로 600평(2 段)을 班給(반급)받았고, 여자는 400평을 家人(가인)과奴婢(노비)는 200평을 각각 받았으며, 6년마다 변동사항을 정리토록 하였다.

租(조/토지세)는 수확량의 1/4를 바치게 하였고, 신역(身役)인庸(용 / 군역과 요역)은 21세에서부터 60세까지 부과하였는데 1년에 10일은 수도에서,지방에서의 雜요(잡요)는 60일 이내로 규정하였다.

律(율)은 笞(태), 杖(장), 徒(도), 流(유), 死(사)의다섯 가지를 두었고, 謀反(모반), 謀大逆(모대역), 謀叛(모반), 惡虐(악학), 不道(부도),大不敬(대불경), 不孝(불효), 不義(불의) 등을 팔역(八逆)으로 규정하여 엄하게 다스렸다.

大寶(대보/다이호) 율령이란 당(唐/ 618 ~ 907)의제도를 일본의 실정에 맞게 개편한 것으로서, 중앙관제에 神祇官(신기관 진기깐)을두어 제사를 맡게 했다는 것은 일본 황실의 신적 신비감을 계속 유지하여 권위를높이겠다는 것으로서, 제정일치 사회의 유습을 담고 있는 이런 전통은 지금까지도이어지고 있다. 神道가 일본의 고유신앙이라고는 하지만 외국인의 눈에는 미개사회에서나볼 수 있는 주술신앙처럼 비친다.

太政官(태정관 / 다이쪼오깐) 위에 상징적인 三公(삼공)을두고, 그 아래로 8省(성)을 두어 행정을 분담시켰다는 것은 당의 3성 6부제를 억지로나마짜 맞추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방행정에서 당은 전국을 道(도 / 모두 열 개로서행정구역이 아닌 순찰구역)·州(주 / 뒤에 郡으로 개칭)·縣(현)·里(리)로 구분하였는데일본에서는 國·郡·里로 구분, 國(국)을 상위의 지방행정구역으로 정하고 모두 66개의國(국)을 두었다는 것은 씨성제도의 잔재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은 國이라고 하면나라 전체를 뜻하는데, 일본에서의 國은 지방행정 내지는 구역 단위라는 것도 흥미로운사실이다.

토지제도 역시 당의 균전제는 良人(양인) 丁男(정남)인18세에서 59세 사이의 장정에게만 구분전을 지급했으나, 일본의 경우 班田이라 하여노비를 포함하여 6세 이상의 모든 남녀에게 신분에 따라 차등지급했다는 것은 토지의공급여력과 생산증대라는 목표가 일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2) 아스카(飛鳥)· 하쿠오(白鳳) 문화

초기 야마토국가에서는 도읍(都邑), 즉 수도(首都)를빈번하게 천도(遷都)하였다. 이는 황자(皇子)가 천황이 된 후에도 평소에 거주하며자랐던 외가(外家)나 연고지에 계속 머물게 되고, 천황의 거주지가 수도로 되었기때문이다. 따라서 옮긴 것(遷都)이 아니라 옮겨온 것(換都)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사람의 집을 흉가(凶家)라 하여 기피했던 일본의 고대신앙 또한 깊이 작용하여 수도가빈번하게 바뀌는 요인을 제공했다.

聖德太子(성덕태자 / 쇼토쿠태자)가 섭정으로 있던쓰이꼬(推古/33代 天皇)천황 시대의 수도는 나라분지(奈良盆地) 남쪽 아스카(飛鳥)였고,다이카 개신 이후에는 나니와(難波-大阪)에서 오쯔노미야(大津宮-近江)로 옮겼다가다시 후지와라코오(藤原京)에 일단 정착하여 이후 약 20년간은 이곳이 수도가 되었다.그러다가 다시 710년 나라(奈良 / 平城京)로 옮겼다.

미술사에서는 이 시기를 아스카시대니 하쿠오(白鳳)시대니 하고 부른다. 아쇼카 시대란 聖德太子(성덕태자 / 쇼토쿠태자)의 섭정시기의수도가 飛鳥(비조 / 아쇼카)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고 아쇼카문화의 본질은불교문화다.

성덕태자 자신이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불경(佛經)의주석(註釋)을 쓸 정도로 해박한 지식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교를 통하여 사상적통일을 기하고 황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다. 불교 흥륭이 국가적 정책이 됨에 따라각 씨족(氏族)은 저마다 사원을 건립하였고, 태자 자신도 四天王寺(사천왕사 / 시텐노오지/ 大阪 所在)와 法隆寺(볍륭사 / 호류사)를 세웠다.

사원에는 悲田院(비전원 / 빈민구호), 施藥院(시약원/ 빈민에게 약품제공), 療病院(시병원 / 빈민치료) 등의 복지시설을 두고 빈민구제의사회사업을 하였으며 그 후에도 승려들이 이를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또한 불교의융성은 건축과 조각, 회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런 불교미술에 공헌한 것은 한반도로부터 건너간渡來人(도래인)들이 주축을 이루었고, 607년에 완성되었다는 호류사(法隆寺 / 법륭사)는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서 1949년 화재로 많은 것이 소진되어 그 후 복원되거나모사된 것이 많지만 지금도 일본의 국보급 문화재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

금당(金堂 / 대웅전)에 안치된 여러 불상은 백제에서건너간 귀화인 도리(止利 - 鞍作鳥)의 솜씨로 알려져 있고 금당 내부의 벽화는 중국의윈강석불(雲崗石佛), 경주의 석굴암 등과 함께 동양 3대 미술품의 하나로 꼽히고있으며,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이 벽화를 그린주인공은 610년(고구려 영양왕 21)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그린 것으로 우리들은알고 있다.

다이카개신이 단행되었던 645년부터 나라에 도읍을정한 710년까지를 하쿠오(白鳳)시대라 한다. 이 시기 일본의 수도는 나니와(難波-大阪),오쯔노미야(大津宮-近江), 후지와라코오(藤原京) 등으로 옮겨 다녔고, 성세기에 사용된연호에 따라 하쿠오(白鳳)시대라 부른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그 유민들이 대거 일본으로망명하여 하쿠오 문화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663년 白村江(금강)하구 전투에서 백제·일본의연합군이 패배함으로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고(676), 일본으로서는 한반도남부의 세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신라와의 교통은 단절되고 당나라에사절을 파견하는 등 당과의 직접교섭으로 그 문물을 수용하게 되었다.

다이카 개신 후 야마토조정은 일본의 동북지방을 평정하여이곳에 살고 있던 에조(蝦夷/ 하이/ 아이누)족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이것은지금까지의 영토확대의 목표였던 서남쪽에서 미개한 동북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이며이로 인해 태평양방면의 개발이 활발해 졌다.

새로 개척된 동북지방의 요소에는 백성들을 옮기는사민(徙民)정책으로 영토를 확대하였으며 큐슈남부에도 중앙정부의 힘이 미쳤고 서남(西南)방면의 섬들도 조공을 바쳤다.

거의 전국에 시행된 반전법에 따라 정부의 농업발전에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관개(灌漑) 수리 시설이 보급되고 철제농기구가 널리 사용되어생산력이 향상되고 국고의 수입이 충실했다.

천연자원의 개발도 활발해져 무사시(武藏-埼玉縣)의구리와 무즈(陸奧)의 금도 이 시기에 채취하기 시작하였으며, 708년에는 당의 것을모방하여 동전(銅錢)과 은화(銀貨)를 주조하여 유통을 장려했으나 그 범위는 중앙에한정되었다.

(3) 나라(奈良) 시대(710 ~ 784)

법륭사의 5층 목탑다이카 개신이란 왕권강화가그 목적이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이를 뒤 받쳐 줄 힘이 있어야 되고, 그 힘을얻기 위해서는 많은 관료와 호위군사, 경찰 조직이 필요하다.

이런 세력들이 결집되어 규모가 커지면 섣불리 수도를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 없을 만큼 국가의 규모도 커지고 법의 중심으로서의 수도의역할은 더욱 무거워지게 된다.

일본에서 율령국가의 수도로서 자리를 잡은 것은 겐메이천황(43代 元明天皇 / 女帝) 和銅3년(710)에 야마토 평야 북단에 세워진 헤이죠오코오(平城京-奈良)를시작으로 한다.

야마토국가의 정치기반인 畿內(기내 / 기나이)의 범위가나라시대 이후 더욱 확대되었으며 5위 이상의 귀족은 京畿(경기)에 거주하도록 하였기때문에 보다 넓은 지역의 새로운 수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라(奈良)에 당의 수도 長安(장안)을 1/4 정도로축소 모방하여 동서 4, 4㎞, 남북 5㎞의 사각형의 都城(도성)을 만들고, 도성 안에바둑판처럼 가로(街路)를 정비하여, 아스카로부터 많은 사찰(寺刹)을 이곳으로 옮겨새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이 헤이죠오코오(平城京-奈良)다.

710년에서부터 784년까지 약 70 여 년 간 수도의 자리를지켰던 헤이죠오코오(平城京)는 최대 20만의 인구가 상주하였다고 하는데, 당의 수도장안의 인구가 백만을 넘었다는 것과 비교하면 별 것 아니라고도 할 수 있으나 고작수천에서 많아야 수만에 불과했던 다른 도시들과 비교해 보면 당시로서는 세계적인도시라고 할 수 있다.

각처로부터 공납(貢納-調)이 모여들고, 몸으로 봉사해야되는 신역(身役)인 용(庸)을 베(布)로 받았기 때문에 도성 곳곳에는 물화가 넘치고,여기에 황실과 귀족들의 많은 토지수입까지 유입되면서 황족과 귀족들은 잉여물자를처분하기 위해 교환과 판매의 시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추세에 따라 도성의 동서(東西)에는 시장이 들어서고많은 물자가 교환·판매되었으나 전문적인 상인계급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며,이 도성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뻗어 나간 일곱 개의 간선 도로망(7道)에는 중간 중간에역(驛)을 두어 교통에 편의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중앙집권정치의 효율을 높였다.

이런 여유가 생기면 사람들은 더 많은 복록(福祿)과장수(長壽)를 추구하게 되고 그 방법은 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것이 상례다.

앞서 이야기 한데로 일본의 불교는 6세기 백제로부터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까다롭고 복잡한 불교의 철학적 원리를 터득한다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어림없는 일이고, 평소에 믿고 있던 현세기복(現世祈福)을 추구하는토속신앙에서 한 발 더 나가 숭배대상을 부처님으로 대치한 것이 고작이었다.

이미 쇼토쿠태자 때 많은 사찰을 건립하기 시작하여,나라시대가 되면 기나이(機內)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500 여 개의 크고 작은 사찰이건립되었다.

가장 존중된 불경은 법화경(法華經)과 금광명경(金光明經),그리고 인왕경(仁王經) 등이라고 하는데, 이는 왕실로부터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호국불교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天武天皇(40代 텐무텐노)은 집집마다 불상과불경에 예배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聖武天皇(45代/쇼무텐노)은 이런 불교정책을 보다구체화하여 전국적으로 國分寺라는 남·여 승려들의 사찰을 짓고 불교를 국가통지의정신적 지주로 삼고자 했으며, 지방관인 고쿠시(國司)의 감독 기능까지 이들 국분사에맡겼다.

이 시대 불교 흥륭의 모습은 10년 공사 끝에 752년에개안(開眼) 완성되었다는 좌불(坐佛)이면서도 그 높이가 16m나 된다는 東大寺(동대사/ 도다이지)의 毘盧遮那佛(비로자나불)로 대표될 수 있는데, 불상의 얼굴 길이만도5 미터나 된다는 이 불상이야말로 국력의 결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치면 그 반대급부 역시 엄청난 대가를 요구한다.이런 숭불정책은 국고를 어렵게 만들었고 승려들이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기회를제공했으며, 율령정치의 기본인 반전수수제를 밑에서부터 흔들기 시작했다.

(4) 율령정치의 쇠퇴

다이카개신의 두 중심인물 나까노오에노(中大兄) 황자와나까또미노 가마따리(中臣鎌足)는 그 후 中大兄황자는 사이메이(齊明)의 뒤를 이어38대 텐지텐노(天智天皇)가 되었고 가마따리는 왕실로부터 후지와라(藤原)라는 씨성을하사 받고 화려한 궁중귀족의 반열에 올랐다.

이들이 구상했던 개신(改新)의 요지는 쇼가우지(蘇我氏)라는요지부동의 공룡과도 같은 거대한 세력을 겪고 氏姓제도의 모순을 없애는 동시에왕권을 강화하자는 것이 표면적인 명분이고, 권력장악이 그 목표였다.

이런 수단으로 당의 균전제(均田制)를 도입하여 이른바반전수수(班田授受)법을 만들고, 공지(公地) 공민(公民)이라 하여 모든 토지와 인민을국가에 귀속시켰다. 다시 말하면 토지를 국가 소유로 하고 이를 반전(班田)이라 하여농민들에게 분급(分給)함으로써 토지와 주민을 개인이나 집단의 지배로부터 국가의관리하에 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래된 전통과 관습을 하루아침에 고칠 수는없다. 황위를 계승한 나까노오에노(中大兄) 황자, 즉 텐지텐노(天智天皇)는 개신정치에대한 호족들의 불만을 완화하기 위해서 이들에게 다시 베민(部民)의 사유를 허락하고우지노가미(氏上)의 권위를 높여주었다.

결국 다이카개신이란 종래의 사유지(私有地)와 사민(私民)소유자인 호족들의 정치적 계급적 지위가 바뀐 것이 아니라 중앙 귀족이 특권적 관료로변모하였을 뿐이다. 그 대표적 인물이 가마따리(鎌足)였던 것이다.

중국의 균전제 역시 후위의 효문제(471 ~ 499)로부터시작하여 당의 정관연간(626 ~ 649)에 완성되었다고는 하나 그 실시여부에 대해서는정확한 자료도 없고, 이른바 무위의 화(690 ~ 712)를 계기로 장원(莊園)이 등장하여반세기만에 점차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균전제가 무너지면 이를 바탕으로 실시했던 조(租)·용(庸)·조(調)의세법도 동시에 무너지게 되고 병농일치로 추진했던 부병제 역시 무너지게 마련이다.이래서 성당(盛唐)시대라고 일컫던 현종을 전후해서 세제는 양세법으로 병제는 모병제로바뀌게 되었다.

672년 天智天皇이 죽고 그 아들 弘文(홍문/고호문)천황이뒤를 이었으나, 형제상속의 황위계승권을 주장한 황제(皇弟) 오아마노(大海人)가반란을 일으켜(壬申의 亂) 그들 황실의 계보로 40代가 되는 텐무텐노(天武天皇)가되었다.

텐무텐노(天武天皇)는 율령제를 더욱 강화하여 그의형에 의해서 부활되었던 호족들의 특권을 몰수하고 모든 씨족을 재편하기 위해서야꾸사(八色)의 가바네(姓)를 제정하는 동시에 궁정문화를 발전시키는 등 여유와안정으로 율령정치의 번영을 구가하였다.

그러나 慶雲 3년(706)에는 전년도부터 거듭된 흉작(凶作)과역병(疫病), 기근(饑饉)으로 민심이 사나워지고 백성들의 과역(課役) 기피현상도뚜렷하게 나타났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수도와 기내(畿內)에 한하여 각개인에게 부과했던 조(調 / 貢納)를 일가(一家) 단위인 호(戶)에 부과하여 결과적으로백성들의 부담을 들어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상층 귀족들은 위봉(位封)의 배가를 요구하여정(正) 1위(位)의 경우 종전의 300호에서 600호로 봉호(封戶)가 배가되었으며 종4위의귀족도 80호가되었다. 귀족들이 산택(山澤)을 독점하는 것도 크나 큰 문제였다. 봉호란귀족들의 사유민(私有民)을 말한다.

봉호(封戶)는 1대로 한정한 것이 원칙이었으나, 세습을예외로 두었기 때문에 공지·공민의 원칙은 이미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이런 시기에 나타난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후지와라씨의 세력강화와 사원세력의성장이다.

가마따리의 아들 후히도(不比等)는 율령의 제정과헤이죠오쿄(平城京) 조영에 큰 공을 세우고, 그 여세를 몰아 45대 쇼무(聖武) 천황과2중 외척관계를 맺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고려시대의 이자겸(? ~ 1126)처럼 후히도가쇼무천황의 외조부이자 장인이 되었던 것이다.

불교의 장려로 사원은 귀족과 마찬가지로 각가지 특권을부여받아 사원이나 神社(신사/ 진자)의 토지는 사유가 허용되었고 조세를 면제받았으며노비와 봉호도 소유하였다. 정치란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의 매듭을 풀어야 하는 현실문제다.독경과 수양을 벗삼아야 할 승려들이 현실정치에 끼어 들면 많은 폐단과 부작용이따르게 마련이다.

도오꼬오(道鏡)라는 승려는 46대 고오껜(孝謙 / 女帝)천황과많은 추문(醜聞)을 남겼을 뿐 아니라 여제와 결탁하여 후지와라씨(藤原仲麻呂)를몰아내고 太政大臣(다이죠오다이진)과 법왕(法王)의 지위를 확보하여 일세를 풍미하다가왕위찬탈까지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인구증가와 사유지의 증대는 구분전을 부족하게 하여반전제의 파탄에 근본 요인을 제공했다. 부족한 구분전을 메우기 위해 정부 스스로개간을 서둘고 "3세 1신의 법"을 만들어 일반에게도 개간을 장려하였다.수리시설을 새로 만들어 개간할 경우 3대에 걸쳐 소유를 인정하고 기존 수리시설을이용한 개간일 경우 1대만의 소유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법령에도 개간에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자 743년에는간전영대사유령(墾田永代私有令)을 발표, 일반 시민은 10정(町 / 3만평)이내, 5위이상의 귀족에게는 100정(町)에서 500정(町)까지 지위의 고하에 따라 차등으로 개간을허용하고 이를 영대(永代/후대)로 세습을 허용하였다.

이런 일련의 조치로 간전(墾田)은 크게 확대되었지만그 성격상 개인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공지(公地)인 구분전(口分田)은 늘어나지않았고, 오히려 농촌사회를 빈(貧)과 부(富)로 분화시켰으며 호족과 사원은 많은토지를 개간하거나 기진(寄進)받아 광대한 장원(莊園)을 갖게 되어 반전수수제는점차 무너지고 장원이 등장하게 된다.

율령제의 근간인 반전수수가 헤이안시대에 가서는6년마다 해야 할 것을 20년 혹은 50년만에 행해지고 10세기 이후에는 아예 폐지되었다.

대토지소유제는 초기 장원제로 발전하였다. 도다이지(東大寺)를비롯한 큰 사원들은 백성들의 구분전(口分田)과 둔전(屯田)을 포함, 광대한 토지를소유하여 장원이 전국에 미쳤다.

반전제의 파탄은 부호(富戶)로의 토지 집중과 귀족의대토지사유를 초래하였다. 농민들의 생활을 곤궁케 한 것은 조(租)용(庸)조(調)와과다한 잡요(雜 )와 국방의 임무가 주 요인이었다. 궁핍해진 농민은 결국 유민(流民)이되어 귀족이나 사원의 사유지에 유입되기도 하고 유리(遊離)걸식(乞食) 하기도 하여국가의 조세수입은 그만큼 감소되었다.

승려의 세력을 몰아내고 다시 정권을 잡은 후지와라씨는정교(政敎) 분리책과 백성의 부담을 줄이는 정책을 취해 노력하였고, 율령정치 재흥의노력은 50대 간무(桓武)천황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정권쟁탈의 내분과 율령정치의부패원인이 되었던 귀족과 승려들의 지반을 단절한 필요에서 수도를 옮기기로 했던것이다.

간무 천황(桓武天皇)은 784년 수도를 나라에서 나가오카(長岡)로옮겼다가 다시 794년에는 헤이안쿄(平安京 - 京都)로 옮겨 카마쿠라 막부가 등장할 때 까지 이후 약 400년간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새로운 수도에는 사원의 이전을 금하고 신축 및 토지기진도 금하였으며 징병제를 폐지하고 교육받은 지방의 군사(郡司)자제들을 모아곤데이(健兒)라는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였다.

간무천황의 율령 재흥은 일단 성공하여 8세기말에서10세기초에 이르는 150년간 중앙정부의 권위가 어느 정도 회복되어 공가(公家)의성대(聖代)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미 안으로는 율령정치가 뿌리 채 흔들리고 있었다.

당의 제도를 그대로 모방했던 율령이 풍토가 다른일본에서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정치에 맞지 않는 부분도있었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개수(改修)의 필요가 생기게 되고 영(令) 외의 관이라하여 새로운 관직도 등장하였다.

內大臣(내대신 / 나이다이진), 右納言(우납언 / 쥬나곤)參議(참의 / 산기)를 비롯하여 고꾸시(國司)의 부정을 막기 위해 8세기 중엽에 설치된가게유시(勘解由使 / 감해유사), 천황의 측근에서 문서를 담당하기 위해 9세기초에만들어진 구로도(藏人 / 장인), 같은 무렵 쿄토의 경찰사무를 관장한 게비이시(檢非違使/ 검비위사) 등이 영 외의 관직이다.

(5) 덴표문화(天平文化)

나라시대를 일본사에서는 율령정치의 전성기라 한다.그 중에서도 平城京을 중심으로 최대의 번영을 누렸던 것은 天平(천평 / 덴표)이라는연호를 사용했던 729년에서부터 748년까지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연호에 따라 덴표문화라고도한다. 따라서 덴표문화라고 하면 나라시대의 문화를 말하는 것이다.

덴표문화의 총 결집이라 할 수 있는 東大寺 대불(大佛)이개안(開眼)된 것이 752년이고, 이를 전후해서 세계사의 움직임 또한 매우 활발했다.

프랑크 왕국에서는 난쟁이 피핀(소 피핀)이 로마 교황과결탁, 751년에는 칼롤링거 왕조를 열었으며, 이슬람세계에서는 750년 다마스쿠스를도읍으로 삼고 있던 우마이야 왕조가 무너지고 아바스 왕조가 오늘날 이라크의 수도바그다드에서 성립되어 사막의 모래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중국은 開元 治라 하여 당 현종의 어진 정치로 성당(盛唐)시대를구가하고 있다가 안사의 난(756 ~ 63)을 계기로 쇠락(衰落)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한반도에서는 통일신라가 번영을 거듭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이 조영되는 등 불교미술의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덴표문화의 바탕은 아스카문화와 같이 불교문화다.東大寺에는 대불 외에도 많은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는데, 正倉院(정창원 / 쇼소인)은고대 일본 문화의 보고라 할 정도로 수많은 자료들이 지금까지 잘 보관되어 있다.

고메이(光明)황후가 쇼무(聖武)천황의 유품을 기진한데서 비롯되었다는 正倉院의 北倉에는 천황의 일용품을 中倉에는 귀족들의 헌상품을,南倉에는 불구(佛具)와 악기류가 들어 있다고 하는데, 그 종류로는 미술공예품을비롯하여 무기, 마구, 복식, 조도(調度), 서적, 문서, 유희기구, 악기, 약품 등이있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신라와 당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하며그 중에는 일본에서 제작된 것도 있어서 그 제조기술까지 도입했음을 알 수 있고,중앙아시아, 이슬람, 인도, 그리스, 로마와 관련된 희귀(稀貴)한 것도 있다고 한다.

신라의 민정문서라고 이름 붙인 신라장적(新羅帳籍)도근년 이 正倉院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이며, 이것을 근거로 신라사회의 편린을 볼수 있다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 보다 힘든 자료의 갈증을 조금이남아 들어주었다고할 수 있을 것이다.

東大寺의 法華堂(三月堂)에는 덴표 조각의 걸작들을한 곳에 모아 두어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율령국가가 확립되고 천황의 권위가 높아지면서 국가및 황실의 영원한 번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역사를 편술하였다. 쇼토쿠태자가 편찬했다는역사는 蘇我氏(소가 우지)의 멸망과 함께 없어졌다고 한다.

712년에 완성되었다는 古事記(고사기 / 고지키)와720년에 편찬되었다는 日本書紀(일본서기 / 니혼쇼키)는 일본 최고(最古)의 사서(史書)로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일본 상대의 신화시대부터 7세기초까지를 다루었다는古事記는 그 편술 방법이 특이하다. 문자로서의 기록이 불가능했던 시절에 있었던일들을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주로 맹인)에게 이를 암기케 하고 누대에 걸쳐 암송(暗誦)으로전승된 것을 太安萬侶(태안만려 / 오노 야스마로)가 당시의 암송자 裨田阿禮(비전아례/ 히에다노 아례)의 구술을 토대로 전 3권으로 편찬한 것이다.

천황 중심의 정치로 일관된 내용은 야마토시대 사람들의소망과 신념을 표현한 것으로 사실(史實)로서의 의미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한자의音과 訓을 써서 일본어를 그대로 표현하였다는 것은 5세기부터 시작되었다는 이런방법이 8세기에는 한자로 일본어를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日本書紀는 되도록 많은 자료들을 여러사람이 편집하여 한문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舍人(사인 / 도네리) 친왕과古事記를 편찬한 太安萬侶가 중국의 사서를 기본체제로 신화시대부터 7세기말까지의역사를 30권으로 엮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風土記(풍토기)는 광물,식물, 동물, 농지의 상태, 산천평야의 이름 유래, 노인들에 전승된 전설 등을 기록한地方誌(지방지)라고 하는데, 지금은 그 일부가 남아있다.

고대의 일본인들이 즉흥적으로 불렀던 노래가 일본어의음조에 따라 일구(一句)를 5음과 7음으로 정제(整齊)하는 방법으로 발전하여 일본의독특한 시가(詩歌)인 와카(和歌)가 생겼고, 이를 집대성한 萬葉集(만엽집 / 만요슈)이편찬되었는데 그 정확한 편찬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대개 8세기 중엽으로 추정하고있다.

위로는 천황으로부터 아래로는 농민, 병사, 유예인(遊藝人)등 무명인사의 작품을 만슈가나(萬葉假名)로 기록하여 20권으로 엮었는데 모두 4천5백수가 수록되어 있으며, 내용은 자연이나 연애에 관한 서정시가 많고, 서사시(敍事詩)와같은 뛰어난 것도 적지 않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된 세계적인문화재다 8세기 중엽 신라의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세웠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만 전할 뿐 더 이상의확실한 논거가 없어 학계의 중론만 분분하다.

김대성이 죽은 부모를 기리기 위해 이런 거찰(巨刹)을세웠다면 그 재력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더 이상의 소상한 기록이아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한가윗날 사로 6부의 부녀자들이 밤늦게까지 애절하게불렀다는 회소곡(會蘇曲)은 노랫 말이 즉흥적이라 전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쩔 수없다고 하지만, 888년에 각간 위홍과 승려 대구화상이 엮었다는 신라의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은이름만 있을 뿐 지금까지 그 내용은 단 한 구절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솔거가 그렸다는 황룡사의 노송도, 관료전(官僚田),녹읍(祿邑), 식읍(食邑), 정전(丁田) 등의 명칭도 한자의 자의(字意)적 해석에 따를뿐 구체적 내용이 없어서 궁금함을 더해 주고 있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라는삼국사기는 12세기 중엽(1145)에, 삼국유사는 13세기  말에 편찬된 것이다.

 

 


아오모리 / 밝은바다

출처 : 양재클럽(Y-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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