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역사

[스크랩] 日本史의 이해 - 平安時代(1)

똥하 2009. 4. 1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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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史의 이해 - 平安時代(1)

 

가. 고대 일본(古代日本)(4) - 平安時代(1)     

                     

4. 장원의 발달과 攝關政治(섭관정치-셋간정치)

 

(1) 헤이안(平安-평안)의 정도(定都)와 당의 문물도입

일본의 神社 정문 鳥居(조거-도리이)간무(桓武)천황이헤이안쿄(平安京-京都)에 도읍을 정한 794년부터 미나모토 오리토모(源賴朝-원뢰조)가카마쿠라(鎌倉-겸창)에 바쿠후(幕府-막부)를 개설한 1192년까지를 日本史에서는 편의상헤이안(平安 - 평안)시대라 한다. 정치의 중심이 이곳이 되었다는 뜻이다.

 

덴표(天平-천평)문화로 이름을 떨친 나라시대(奈良時代- 내량시대 / 710 - 784)의 융성이면에는 불교 승려 및 귀족들의 지나친 정치간섭과구분전의 부족 등으로 공지(公地)·공민(公民)제가 타격을 받고 중앙집권적인 율령체제가심하게 훼손(毁損)되고 있었다.

 

따라서 수도의 이전은 중앙집권적인 율령제의 부흥및 강화가 목적이었고, 이런 목적이 적중해서 8세기말에서 10세기초까지 약 150년간국내는 평온했고 생산은 크게 증대되어 왕실과 그 일족은 이른바 공가(公家)의 성대(聖代)를구가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일본은 당의 문화를 적극 수용, 그 전대(前代)의덴표문화를 발전시켜 다음 세대로 연결시키는 중간단계가 된다. 따라서 문화적인성격은 당의 문물제도를 모방한 이른바 당풍(唐風)이 주류를 이루었고, 이런 외래문화에반발해서 독자적인 일본문화의 부흥을 모색한 것이 후지와라 시대에 전개된 국풍(國風)운동이며,이 국풍운동의 결과로 독자적인 일본문화가 형성되었다.

 

간무천황의 아들로서 그의 형 헤이세이(平城 / 평성)의뒤를 이어 52대 천황이 된 사가(嵯峨-차아 / ~842)는 조정의 일상 의례와 관리들의복장인 조복(朝服)까지 당나라에 따를 것을 명하였다. 이렇게 되자 귀족들의 저택이당의 건축양식을 모방하고 당의 한시(漢詩)까지 유입되어 크게 유행하였는데 당나라를모방한 이런 유행을 당풍(唐風)이라 한다.

당풍이던 국풍이던 10세기초에 이르면 동아시아 사회는다시 시대적인 격변기에 접어든다. 중국대륙에서는 당이 망하고(907) 5대 10국의혼란기에 들어서며, 한반도에서는 통일신라가 쇠퇴하여 후삼국으로 분열되며, 만주일대에서는발해가 망하고(926) 유목민에 불과했던 거란족이 동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하게 된다.

 

역사의 순환에 법칙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나 당의최성기인 현종(玄宗 / 712 ~ 56)의 치세 45년간의 연호가 초기 30년은 개원(開元/ 713 ~ 41)으로 했다가 후기 15년은 천보(天寶 / 742 ~ 56)로 고쳤다. 개원년간에최성기를 맞았던 당은 천보년간에는 이미 기울기 시작한다. 그러나 세계적인 대제국답게이후에도 150년간을 더 버티었다.

당이 융성했던 개원년간, 신라는 33대 성덕왕에서35대 경덕왕의 치세기간이 된다. 찬란한 통일신라문화가 이룩된 것은 대개 이시기에해당되며, 당이 쇠미해진 이후 150년간은 신라의 하대로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진골간의골육상쟁을 거듭하다가 당이 무너지면서 동시에 통일 신라도 무너졌다.

 

사절(使節)·유학승(留學僧)·유학생(留學生)을 파견하여대륙 문화를 적극 수용했던 일본에서도 개원의 성당시대에는 덴표문화가 이룩되었지만당이 쇠미해진 천보이후 소위 公家의 聖代가 이룩되었다고는 하나 이면에는 왕실을능가할 수 있는 후지와라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고, 당의 멸망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이른바 세쇼오-간바쿠(攝關-섭관)가 등장하여 왕실은 상징적인 존재로 권위가 추락되었다는것은 흥미 있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일련의 사실들은 통일신라나 당시 일본의독자적인 사정에 의한 것이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그 선이 너무나 극명하다. 당이라는든든한 기둥(배경)으로 세운 집(국가)에 그 기둥이 무너졌다면(당이 망했다면) 그집(당의 영향하에 있었던 정권)을 다시 수리하거나 아예 새로 지어야 할 것이다.충격을 크게 받은 신라는 손상이 너무 심해서 아예 고려라는 새집을 지었고 그래도옛집이 그리웠던 일본은 외양(황실)은 그냥 두고 모양새가 다른 집을 지어 내부 장식을고쳤다(후지와라씨의 집권)고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문화란 받아들이는 쪽의 입장에서 본다면사회변동을 촉진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이래서 보수적인 집단일수록 개방에는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이후 일본에서는 송 및 고려와의 접촉은 민간무역수준에 머물게 되고 공식적인 수교는 단절되어 대륙의 문호가 막힘에 따라 그들의독자적인 문화, 소위 국풍(國風)운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이것이 독자적인 일본문화의틀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정치상으로는 후지와라씨의 세이간(攝關-섭관)정치가, 경제적으로는 장원(莊園)이, 사회적으로는 무가(武家 / 武士)가 등장하여일본적인 문물제도가 재편성되었는데, 그 요지를 풀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2) 셋쇼-간바쿠(攝政-關白 : 섭정-관백) 정치

 

세이간(攝關-섭관) 정치란 황실의 외척이 천황이 어렸을때는 셋쇼오(攝政-섭정)가 되어 천황을 대신해서 정치를 하고, 천황이 장성하면 간바쿠(關白-관백)가되어 정치경험이 미숙한 천황을 보필하는 것을 말한다.

간바쿠(關白-관백)란 말이 보필(輔弼)이지 조정의원로 훈신의 자격으로 천황에게 올라오는 모든 주문(奏文)을 먼저 열람하는 특권을가지고 마음대로 정치를 움직였다. 다시 말하면 어떤 상달(上達)도 간바쿠를 통하지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이간(攝關)은 천황을 능가하는 세력이라고할 수 있다. 이런 攝關정치는 나카노오에노(中大兄 - 중대형) 황자와 함께 소가우지(蘇我氏-소아씨)를몰아내고 다이카개신을 주도했던 나까도미노 가마따리(中臣鎌足 - 중신겸족)의 후예들인후지와라우지(藤原氏-등원씨)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후지와라우지(藤原氏)의 시조가 되는 나카도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 614 ~ 669)는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의 공으로 만년에 후지와라(藤原)라는 성(姓)을하사 받았고, 그의 아들 후히토(不比等-불비등)를 비롯한 후손들이 계속해서 정부요직을 차지하면서 번성한 중앙귀족 가문이다.

 

후지와라 집안이 번영하면서 南家, 北家, 式家, 京家등의 네 집으로 다시 분열되었고, 분열된 이들 일족들이 통일된 힘은 고사하고 제각기집권을 위한 음모에 열중하게 된다. 다른 경쟁자가 없어지자 경쟁의 상대는 일족으로한정되고 다시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집안끼리 다투었다는 것이다. 이런 4가중끝까지 영화를 누리고 이른바 후지와라 시대를 이룩한 것은 北家였다.

시조인 나까도미노 가마따리(中臣鎌足)가 대신(大臣)을사양하고 내신(內臣)으로서 측근에서 천황을 보좌하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이 집안은지방에 연고가 없는 순수한 중앙의 관료귀족으로 출발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경제적 기반 역시 율령체제에 따라공신과 관료에게 지급했던 위전(位田)과 직전(職田), 위봉(位封)과 직봉(職封) 및봉록(俸祿) 등이 전부였다. 그러나 권력이 있으면 부(富)가 따르게 되는 것은 미분화된고대사회일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

가마따리 이래 누대(累代)에 걸쳐 공적도 많아지고그에 수반된 경제적 기반 역시 팽창하기 시작하여 지급된 공봉(功封)만도 총계 1만7천 호나 되었고, 전국 향(鄕)의 1/12에 해당하는 340개소의 鄕이 후지와라 집안의소유가 되었다. 이것이 이 집안의 특별한 재원(財源)으로서 이것만으로도 일가의영화는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이것이 율령정치가 무너지는 10세기에 이르면 기진지계장원(寄進地系 莊園)이라는 형식으로 사유화(私有化) 되지만, 율령제도하에서는 이러한봉호(封戶)를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는 관직도 계속해서 보유해야만 가능했다. 때문에이들에게는 관로(官路)라는 길이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결국 계속적인 관직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다른 귀족을배제하고 궁정과 결혼관계를 맺어 자신들의 위치를 보장받겠다는 수단과 목적이 세이간(攝關)정치의 연결고리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관료란 그 지위나 녹봉(祿俸)이 세습되는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를 계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관직 또한 계속 확보해야되고, 이런 관직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황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천황의 외조부 내지는외삼촌으로서 권력과 관직을 계속 유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후지와라 집안의 계책이 실효(實效)를 거두어9세기말에 이르게 되면 가마따리의 6세손(世孫)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 ~872)는 신하로서 최초로 셋쇼(攝政-섭정)가 되었고, 그의 아들 모토즈네(基經 ~ 891)는한 발 더 나아가 셋쇼(攝政-섭정)가 되었다가 간바쿠(關白)가 되었다. 이것이 섭관(攝關)정치의 시작이다.

후지와라 집안의 원로가 대대로 攝政과 關白이 된것은 63代 레이제이(冷泉-냉천) 천황의 康保 4년(967)부터 시작된다. 후지와라노미키나가(藤原道長 ~ 1074)는 5대에 걸쳐 천황의 외조부가 되어 50년 동안 섭관(攝關)을독점하였으며, 이런 배경에 힘입어 그의 아들 요리미찌(賴通 ~ 1074) 때는 후지와라씨(氏)의 영화가 극에 달했다.

 

이시기를 전후해서 고노에(近衛), 쿠죠(九條), 다카스카사(鷹司),니죠(二條), 이치죠(一條) 등 이른바 5 攝家(섭가)의 관례가 형성되었는데, 攝家란攝政과 關白을 차지할 수 있는 집을 말한다. 후지와라 집안의 외손이 아닌 宇多(우다-59代)같은천황은 후지와라 집안의 세력을 겪고자 시도해 보았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이들은후대에까지 궁정귀족으로서 영화를 누렸다.

최초로 攝政자리에 올랐던 요시후사(藤原良房 ~ 872)에서부터갖은 호사를 다했다는 요리미찌(賴通 ~ 1074)까지 약 200년간은 후지와라 씨(氏-집안)의세상이 되었고, 따라서 이 시대를 후지와라 시대라고도 한다. 정치의 중심은 황실이아니라 攝關家의 가정(家政)을 처리하는 만도코로(政所-정소)가 되었고, 조정은 단지의식을 행하는 장소에 불과했다.

조정의 신하는 의식이나 선례를 연구하거나 시가(詩歌)를지어 관현(管絃)에 맞추어 노는 것이 고작이다. 이리하여 유한적(有閑的)인 귀족생활이후지와라 시대에 전개되었다는 일본문화의 근간이 되었다.

 

(2) 장원(莊園)의 발달

 

율령제의 근간인 公地·公民의 班田授受制가 무너지고장원(莊園)이 등장한 것도 이와 때를 같이 한다. 장원이란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정의가 약간씩은 다르나 일반적으로 개인에 의한 토지 과점(寡占), 즉 대토지사유제를말한다.

고대일본에서 장원을 발생시킨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구분전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정부스스로 개간을 권장하고이를 사유케 했던 것이 첫 번째 요인이고, 고꾸시(國司-국사)의 횡포에 대항하기위해 유력자에게 명목상 소유권을 넘겨주고 실질적인 관리는 원래 주인이 맡았던토지 지입(持入)제가 두 번째 요인이다.

 

전자를 자간지계 장원(自墾地系 莊園)이라 하여 8세기경에많았고, 후자를 기진지계 장원(寄進地系 莊園)이라 하여 10세기경에 많았는데 후일장원이라 하면 후자, 곧 기진지계 장원을 말한다.

 

앞 글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743년 간전 영대사유령(墾田永代私有令)의 발표로 일반 시민은 10정(町 / 3만평)이내, 5위 이상의 귀족은100정(町)에서 500정(町)까지의 개간이 허용되고 세습을 인정함에 따라 너 나할 것없이 개간을 서둘렀다.

중앙귀족이나 사원 역시 개간에 적극 동참하여 막대한재력과 권력을 십분 발휘, 광대한 사유지를 소유하고 처음에는 노예를 사역하여 경작했으나농장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었고, 부족한 노동력은 유민을 고용하거나농민에게 빌려주어 경작하기도 하였다.

 

지방의 호족인 郡司도 개간으로 넓은 사유지를 차지하였고,지방에 토착한 고꾸시나 중앙에서 내려온 불우한 귀족들도 개간을 하거나 농민의구분전을 겸병하여 대지주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것이 자간지계 장원이란것이다.

귀족이나 사원의 사유지 및 약간의 구분전을 경작하던농민 중에 부지런한 사람들은 영주의 토지를 도급(都給)받아 경작하거나 가까운 곳을개간하여 사유지를 갖게 되었고 지방의 부호들도 농민의 구분전을 겸병하거나 개간하여사유지를 증가해 갔다.

이런 신흥 중·소 지주계급의 소유지를 묘덴(名田-명전)이라해서 소유자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으며, 묘덴의 소유자를 묘슈(名主-명주)라 했다.이런 묘슈나 부호들이 고꾸시(國司-국사)의 횡포를 막기 위해 토지의 명의는 유력자의이름으로 하고 실제의 경영은 자신들이 맡았는데 이렇게 형성된 것이 기진계 장원이다.

 

일본에서의 구니(國-국)라는 말은 나라 전체가 아니라상위(上位)의 행정구역 내지는 지역단위를 일컫는다는 것은 앞 글에서도 이야기 한바 있다. 율령정치를 실시하면서 이 國의 우두머리를 고꾸시(國司)라 했고, 중앙에서임명 파견하였다.

지방에 파견된 고꾸시는 나라로부터 녹봉(祿俸)을받았으나 구니의 최고 관료로서 마음만 먹으면 부정의 소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지방정치의중심인 고꾸시가 율령체제에 역행하는 갖가지 부정을 저지르자 이를 막기 위해 이미8세기 중엽에는 가게유시(勘解由使-감해유사)를 따로 보내어 이들 고꾸시의 부정을검찰(檢察)하기도 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섭관정치가 되면서 고꾸시의 부정은 더욱 심해졌다.후지와라 집안에서는 일족을 고꾸시에 임명하되 임지에는 가지 않고 그 수입인 요임(遙任)만을챙겼고, 심할 경우 가공의 인물을 임명하기도 하고 그 지위를 매매(賣買)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꾸시의 지위가 이권화됨에 따라 실제로 고꾸시의일은 대부분 모꾸다이(目代-목대)라고 불리는 대리인이 맡았고, 이들까지 합세하여임지에서의 부정축재는 더욱 심해졌다.

 

이런 지방정치의 문란(紊亂)으로 하층농민 중에는구분전을 겸병 당하여 유민(流民)이 된 자들이 속출하였다. 부랑인(浮浪人)이 된이들 유민들은 유력자에게 고용되거나 집단을 이루어 폭행과 도적으로 생계를 꾸릴수밖에 없었다.

고꾸시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구니(國)내의 郡司나 중소지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들마저 유민이 될 수는없었고 사는 길은 단결하여 고꾸시에 대항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고꾸시의부정을 조목조목 열거하여 중앙에 호소하기도 하였다. 9세기이래 시작된 이런 고꾸시에대한 집단소송이 10세기 초기가 되면서 매우 빈번해졌다.

이런 집단소송에서도 성과를 얻지 못하자 그 대안으로권세 있는 중앙귀족이나 사원(寺院) 또는 신사(神社)에 자기 소유지를 명목상 기진하고자신은 관리자가 되는 방편을 쓰게 된다. 고꾸시의 지위보다 높은 사람을 후견인으로선택해서 그 배경으로 고꾸시를 누르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이들과 유력인사간에는주고 받는 것이 분명해야 된다.

 

郡司 및 중소지주들은 이런 형식적인 소유자에게는일정한 공납을 바치고 대신 불수불입과 같은 특권을 얻었다. 형식상의 소유자가 3위이상의 귀족이면 領家라 했고, 그보다 더 세력이 높은 皇族과 攝關家 그리고 大寺社와같은 경우에는 本所라 했다. 이렇게 형성된 領家와 本所가 장원이 되었고, 이것이기진계 장원이라는 것이다.

장원의 지배체계는 장원의 관리 및 징세를 맡았던本所 및 莊官이 있었고, 지주와 소작인으로 구성된 莊民이 있었다. 소작인은 領主또는 名主(묘슈)에게 수확량의 4 ~ 6할을 바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장원지배 관계자는누구나 일정한 수입을 장원에서 얻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권리를 시끼(職-직)라고한다.

 

장원이 국세(國稅)의 거부(不輸)와 관리들의 간섭(國吏干涉)을거부(不入)하는 특권을 가지고 완전한 사유지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대개 10세기경으로서,그 규모가 작게는 10 정보(町步) 미만에서 크게는 수천 정보가 되는 것도 있었고,本所의 장원 중 최대의 소유자는 물론 후지와라 氏(씨-집안)였다.

후지와라씨의 장원이 얼마나 되었는가에 대해서는확실히 알 수 없으나 헤이안시대 말기 5 攝家의 하나인 고노에(近衛) 家의 領만도전국에 154 莊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런 장원들이 주로 수도 인근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변경에도 수천 정보(町步) 넓이의 장원도 가지고있었으므로 후지와라씨의 경제적 기초는 전국에 걸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섭관(攝關)정치의 기반은 이러한 기진지계 장원에 있었고, 후대에 길이 일컬어진 후지와라노미키나가(藤原道長 ~ 1074)의 50년간 영화의 바탕도 돌이켜 보면 이런 장원에 있었다.

 

장원의 확대가 공지(公地)·공민(公民)을 잠식(蠶食)하여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황정부로서는 국가의 경제적 기초를 보전하고자 장원억제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부정수단으로 영유한 장원을 정리하고장원의 신개(新開)를 금하는 정책으로 장원정리령을 902년, 984년, 1045년, 1055년에잇달아 발표하고 이를 시정코자 했으나 최대 장원주인 후지와라씨가 집권하고 있었으므로이렇다 할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후지와라씨와 인척관계가 없었던 고산죠(後三條-후삼조/ 71代) 천황은 기록소(記錄所)를 설치하여 장원정리를 대규모로 단행하여 어느 정도의효과를 보았으나 그것도 그의 집권 4년간에 해당하는 1代에 그치고 말았다.

어떤 제도나 법령에는 그 나름대로의 공과가 있다.장원의 확대는 황실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율령체제를 무너뜨려 중앙집권을 저해시켰을뿐만 아니라 농촌의 계급분화를 촉진시키고 유민을 발생케 하는 등 많은 문제도 있었지만,실질적인 소유주인 대소 묘슈(名主)층의 발생으로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는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논 가운데 나무를 세워 벤 벼를 건조하는 시설인 도기(稻機)의사용, 파종(播種)전에 종자(種子)를 물에 당구는 삼종(渗種) 방법, 벼를 추수할 때이삭만을 따던 것을 벼 그루를 베는 방법 등이 이 시대에 발명 보급되었고, 철제농구의 보급도 현저하게 늘어났다.

수확량의 증가는 곧 바로 자신들의 수입증대와 맞물렸음으로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하여 열심히 일한 결과 그 수확량이 나라시대에는상전(上田)의 경우가 단보(段步)당 8말(八斗) 4되(四升)였던 것이, 헤이안 시대는하전(下田)의 경우라도 나라시대 상전과 같은 수확을 얻었다고 한다.

 

이것을 지금의 우리 농촌사회의 수확량과 단순 비교해보면 1/3 내지는 1/4 정도에 불과하지만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등에서는 아직도이런 수확량을 크게 넘지는 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의 수확량으로 보아서는가히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국가 권력이 무너지면 치안(治安)이 큰 문제가 된다.일본인들이 정직하다고는 하나 콩나물도 누워서 자라는 놈이 있고 같은 나무에 달린도토리도 크고 작은 것이 있다. 하물며 복잡한 인간사회 구성원 모두가 정직하게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고 도적과 강도가 나타나는 것 또한일본사회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를 방치할 수는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지방의 유력자들은 스스로 무장하고 예하(隷下)에 부하를 거느려 치안에 대처하였다.이것이 칼과 사무라이(侍)로 대표되는 일본의 무인(武人)들이며, 그 職(직-시끼)이세습되면서 무가(武家)가 형성되었고, 상대방을 힘으로 타도하거나 합종연횡으로무가정치를 전개하게 된다. 이것이 幕府(막부-바쿠후) 정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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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재클럽(Y-Club)
글쓴이 : 拈華微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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