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역사

[스크랩] 日本史의 이해 - 平安時代(2)

똥하 2009. 4. 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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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史의 이해 - 平安時代(2)

가. 고대 일본(古代日本)(5) - 平安時代(2)    

                     

5. 院政과 武家

 

(1) 무사(武士)계급의 발생

 

사가노 아라시야마(山)의 단풍미국의 문화인류학자베네딕트(Benedict, Ruth Fulton / 1887 ~ 1948) 여사는 일본사회를 국화와 칼(TheChrysanthemum and the Sword)이라는 이질적인 양면성을 전제로 접근을 시도한 바있다.

국화(菊花)는 일본황실의 문장(紋章)이고 칼은 일본무인들의필수 무기(武器)다. 총포가 등장하여 어떻게 보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게 된 20세기전반까지 군인과 경찰은 물론이고 관료와 교원들까지도 일본도(日本刀 / 니뽄도)라하여 땅에 닿을 정도의 긴 칼을 차고 다녔다.

 

오상고절(傲霜孤節)에 피어나 고고(孤高)한 기품으로군자(君子)에 비유되는 국화와 오싹 할 정도의 섬광(閃光)부터 내뿜는 일본도가 어떻게궁합을 맞추고 조화를 이루는지 벽안(碧眼)의 이방인에게는 무척이나 궁금하면서도신기했을 것이다.

일본인들의 칼에 대한 애착은 신앙에 가까울 정도라고한다. 따라서 일본도(日本刀)의 역사가 곧 일본의 역사라 할 정도로 그들에게는 칼의문화라는 것이 있었고 시대상황에 따라 조금씩 바뀐 과정 또한 매우 복잡하다.

 

흐르는 냇물에 칼을 대고 있으면 떠내려가던 지푸라기가끊어질 정도로 칼날은 예리하고, 바위를 후려쳐도 부러지거나 휘지 않아야 명품으로서의대접을 받았다. 이런 명품은 장인(匠人)의 혼(魂)이 담긴 담금질(quenching)에 그비법이 있었다고 그들 스스로 자랑한다.

 

이것이 과장(誇張)이던 아니던 그런 것과 상관없이아무리 신기(神技)에 가까울 정도의 명품(名品)이라 할지라도 이를 아껴주고 받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역시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칼을 신주(神主)처럼떠받들게 된 신분계급이 등장하였고 이런 계급을 그들은 무사(武士)라고 해서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무사계급의 발생은 후지와라 씨(氏)의 섭관(攝關)정치로지방이 난장판이 되면서 비롯되었다. 고꾸시(國司)의 횡포와 부정은 지방정치를 문란하게만들었고 급기야는 부랑인(浮浪人)의 폭행과 도적들까지 극성을 부리게 되었다.

지방의 호족이나 묘슈(名主)들은 자위(自衛)수단으로자신의 사용(使用)인을 무장시켜 이에 대처하였으며, 장원 영주는 이 무력단체를중앙으로 불러들여 경위(警衛)·숙직(宿直)을 이들에게 맡겼다. 이런 것이 대개 9세기말에서10세기에 들어서면서 나타났는데 이것이 무사의 발생이며 따라서 무사는 사적(私的)무력집단의 구성원들, 이를테면 사병(私兵)집단이 무사(武士)들이다. 카마쿠라시대가되면 이들을 사무라이(侍)라고도 부르는데, 사무라이란 상전의 곁에 서서 대기하며모시는 경호(警護) 및 시종(侍從)이라는 뜻이다.

 

이런 무사들이 유력자를 중심으로 뭉치면 무사단(武士團)이되고 이들 무사단이 지방의 치안과 방위를 맡으면 공적권리인 공권력(公權力)을 발동하게된다. 사적으로는 개인에게 고용된 입장이면서 경찰과 군대의 임무를 수행했다는점에서는 국가조직의 중요한 몫인 치안과 방위 등 공적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삼별초가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私兵)집단이지만국가기구의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무사단의 형성과정은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섭관정치가 전개됨에 따라 중앙에서는 후지와라 일문의전제로 이들에게 밀려 어렵게 된 귀족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들이 지방으로 내려와토착하면서 지방 인들을 모아 주종(主從)관계를 맺고 조직(組織)·통솔(統率)한 것이무사단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있었고, 임기가 끝난 고꾸시(國司-국사) 중에서도 중앙으로돌아가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 무인들을 영도(領導)하는 자가 생겼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위로 지방 토호(土豪)와 혼인(婚姻)하거나묘슈(名主)들과 주종(主從)관계를 맺어 세력을 확산하였다. 무사단의 조직은 동족(同族)집단을기초로 농민과 묘슈들을 예속시켜 구성하였고, 구성원들간에는 상하관계가 분명한가부장적(家父長的) 권위가 통용되어 대장의 권위는 절대적이며 명령에 절대복종하는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이렇게 되자 고꾸시들도 죄인의 체포 및 압송 등 일종의경찰 업무인 게비이시(檢非違使-검비위사)의 직무를 이들 무사단에게 주어 지방의치안을 바로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무사들의 지위는 낮아서 중앙에가면 귀족의 종자(從者)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무사단의 우두머리에 황족출신의 源氏(원씨-겐지)와平氏(평씨-헤이지)가 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源氏나 平氏는 황족이신하로 강등되어 신적(臣籍)을 가질 때 받은 姓(성-가바네)으로 이들이 만든 새로운우지(氏族)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천황의 자손이 귀족이 되면서 源이니 平이니 하는성(姓)을 받고 새로운 씨족으로서 족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814년 사가(嵯峨-차아)천황이 그 자녀에게 미나모토(源)라는성을 내려 사가겐지(嵯峨源氏) 가 된 것을 시작으로 준나(淳和), 세이와(淸和) 등약 10개 파의 겐지가 있었고, 이들을 氏姓으로 부를 때는 미나모토노 누구(源の누구)라고부른다.

 

이들 가운데 무사단을 조직·통솔하여 세력화 한 것은간무헤이지(桓武平氏)와 세이와겐지(淸和源氏)로서 간무(桓武-환무)천황의 후손이라는간무헤이지(桓武平氏)는 간토(關東-관동)지방에 정착하여 그 일대에 큰 세력을 펼치게되었으며 세이와(淸和-청화)천황의 후손인 세이와겐지(淸和源氏)는 긴키(近畿-근기)지방을근거로 뿌리를 내렸다.

무사의 우두머리가 황족이라고 해서 국가로부터 특별히받은 공식직함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힘을 가진 지방의 실력자로서 그 권위는막강했고 싸움이 직업이 된 이상 많은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은 동족간의 내분도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런 싸움이 확대되면 내란으로까지 이어진다.

 

940년에는 다이라노 마사가도(平の將門-평장문)가간토에서, 941년에는 세토(瀨戶) 내해(內海)에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の純友)가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평정한 것은 지방의 무사단(武士團)이었다.

1031년 헤이지 가문의 다이라노 다다쯔네(平の忠常-평충상)라는자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 반란을 평정하도록 명령을 받은 것이 세이와겐지의 미나모토노요리토부(源の賴信-원뢰신 / ~ 1048)였다.

세이와겐지(淸和源氏)는 이 란(亂-平忠常)을 평정하는과정에서 간토지방에도 세력을 갖게 되었는데 미나토모노 요리요시(源の賴義-원뢰의/ ~ 1075)와 미나토모노 요시이에(源の義家-원의가 / ~ 1106)는 간토의 무사들을거느리고 계속해서 동북지방으로 나아가 아베(安倍)氏와 기요하라(淸原)氏를 십 수년의싸움 끝에 평정하였다.

 

이 평정과정에서 源氏(원씨-겐지)와 간토 무사사이에는강한 주종관계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카마쿠라막부를 개설할 수 있는 힘의 배경이되었다. 이렇게 源氏(겐지)의 세력이 커지자 묘슈(名主) 중에는 이들에게 토지를기진하는 자가 늘어났다. 힘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실력을가진 새로운 계급으로서 무사의 힘이 인정된 것이다.

源氏(겐지)의 세력은 요시이에(源義家) 때를 전성기로차츰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런 틈을 타 이세헤이지(伊勢平氏)가 인세이(院政-원정)라는새로운 정치체제의 등장과 함께 황실과 관계를 맺고 다시 세력을 잡게 된다.

 

(2) 院政(원정-인세이)

 

후지와라 氏의 섭관정치로 천황은 실권이 없어졌다.후지와라 氏의 외손이 아닌 고산쵸(後三條 / 71代)천황은 장원정리령을 발표하여왕권회복을 시도하였으나 앞 글에서 이야기 한 대로 재위 4년만에 타계함으로서 실효를거두지 못했다.

그의 아들 시라까와(白河-백하 / ~ 1129)천황은 후지와라氏의 섭관정치에 맞서기 위해 1068년 태자에게 양위하고 上皇(法皇)이 되어 계속해서친정(親政)을 하게 되었고 이것을 院政이라 한다. 上皇의 가정사무소인 院廳(원청)이정치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院(上皇)의 명령을 院宣(원선) 혹은 院廳下文(원청하문)이라하여 절대적 권위를 가지게 되었는데, 院廳의 힘의 배경에는 北面武士라고 하는 무력집단이있었고, 知行國(지행국-지쿄코쿠)이라는 경제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北面武士란 上皇의 호위무사들의 거처가 원청(院廳)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知行國란 어느 一國의 수입전부를 일정기간어떤 개인에게 주고 그 자가 희망하는 인물을 고꾸시(國司)로 임명한 것을 말한다.이런 院政이 14세기까지 계속되었다.

 

院政의 출현으로 후지와라 氏의 攝關家는 무력해 졌으나天皇과 上皇이라는 두 명의 주권자가 동시에 나타남으로서 이들을 둘러싼 파벌이형성되고 그 대립·갈등 역시 심하게 되었다. 후지와라 氏의 수족은 源氏(겐지) 집안이었고上皇의 북면무사로는 平氏(헤이지) 집안이 차지하면서 이들간에도 실력대결의 양상이새롭게 전개된다.

이때 伊勢에 자리잡고 있던 간무헤이지(桓武平氏)의다이라노 다다모리(平の忠盛 / ~1153)는 시라까와(白河) 上皇과 손을 잡고 瀨戶(뢰호-세토)內海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대송(對宋)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 한 층 더 세력을높였다.

그의 아들 기요모리(淸盛 / ~1181)는 1156년의 호겐(保元)의난과 1159년의 헤이지(平治)의 난을 평정하는 등 공을 세워 정적 겐지(源氏) 일문을몰아내고, 1167년에는 다이조 대신(太政大臣-태정대신)이라는 최고의 관직에 올랐다.

 

天皇과 上皇 사이의 대립·갈등과 후지와리 씨의 내분이겹쳐진 이 두 차례의 내란으로 헤이지(平氏)와 겐지(源氏)라는 같은 뿌리에서 시작된양대 집안도 서로 엇갈려 골육상쟁(骨肉相爭)에 말리게 되고, 결과적으로 겐지(源氏)집안은 큰 타격을 입었고 헤이지(平氏) 집안은 세력을 잡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두 난을 계기로 궁정귀족인 공가(公家)의 무력은만천하에 폭로되었다. 무사단의 협력없이 그들 단독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없다는 것을 스스로 밝힌 셈이다. 기존의 정치집단이 힘을 가진 새로운 집단을 사전에차단하지 못하고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이 따른다. 우물쭈물하는 가운데 새로운 세력은 구세력을 몰아내고 권좌의 주인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무가(武家)시대를 예고하는 제 1막의 연출은 이렇게 시작되고 끝났다.

권력의 이동은 당연히 헤이지(平氏) 집안으로 넘어갔다.이 집안의 전성기 때 규모는 전국 66개의 國(구니-고쿠) 가운데 30 여 개가 그들의수중으로 들어갔으며 500 여 개의 장원(莊園)도 갖게 되었다. 가인(家人)을 영국(領國)의고꾸시로 임명하고 장원에는 지토(地頭-지두)라는 관리인을 두어 지배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자기 소령(所領)의 관리에만 몰두하였기 때문에전국적인 무사계급의 신뢰도 얻지 못했고 따라서 이를 통합하지도 못했다. 헤이지(平氏)집안이 확고해지면서 후지와라의 영화를 재현하려는 듯 헤이지 집안도 황실과 혼인관계를맺고 외척으로서의 기반을 닦아 귀족으로 행사코자 했을 뿐이다. 이것이 이 집안의한계였다. 귀족화가 이루어지면 영화는 누릴 수 있지만 힘을 잃게 된다. 힘을 잃게되면 동시에 귀족의 영화도 사라진다. 이런 것이 인간사회가 안고 있는 이치다.

 

이렇게 실권을 장악한 다이라노 기요모리(平の淸盛)가1179년에는 고시라카와(後白河王)천황을 유폐하고, 이듬해에는 자기의 외손인 안토쿠(安德/ 1180∼85)천황을 세웠으며, 후쿠하라(福原) 천도를 강행하는 등 외척으로서 정권을전단(專斷)하였다.

이런 횡포는 院政이나 公家(공가-구게) 모두에게 신임을잃었고 그 타도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힘이 없는 황실로서는 또 다른 무력집단을 동원하지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소임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은 겐지(源氏) 가계만이감당할 수 있었다.

1180년 미나모토노 요시마사(源の賴政)가 드디어 거병(擧兵)을하게 되고, 뒤이어 平治의 亂으로 이즈노구니(伊豆國)의 히루섬(蛭島-질도) 에 유배되어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の賴朝-원뢰조 / 1147 ~ 99)에게도 모치히토 왕(以仁王/ 後白河天皇의 아들)의 밀령이 전달하였다. 숙적 平氏를 토벌하라는 것이다.

 

밀령(密令)을 받은 요리토모는 즉시 군사를 동원하였으나서전(緖戰)에서 패배하여 모치히토 왕과 요시마사는 죽었고 요리모토는 신변이 매우위험하였다. 그러나 그의 세력 근거지 간토(關東) 지방의 호족이며 그의 일족인 요시나카(義仲)의도움과 아우인 노리요리(範賴)와 요시쓰네(義經)의 협력으로 세력을 만회하고 1180년가마쿠라(鎌倉)에 본거지를 정하고 무가정치의 틀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가마쿠라에 본거지를 정한 1181년 요리토모는 關東지방은겐지(源氏)가 西國(사이코쿠) 일대는 헤이지(平氏)에게 분할·지배시켜 함께 충성을바치도록 진언하였으나, 헤이지 집안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1183년 平氏 일당은 요리토모가 주도하는 겐지가(源氏家)에의해서 쿄토(京都)에서 추방되어 사이코구(西國)으로 밀려나고, 쿄토는 겐지가(源氏家)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요리토모는 가마쿠라에 계속 머물면서 무가집권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쿄토에 들어간 일족 가운데 가장 유력한 힘을 가졌던요시나카는 자신의 힘을 믿고 횡포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황실로서는 이리를 쫓기위해 또 다른 이리를 불러들인 꼴이 되고 말았다. 다시 요리토모에게 상경(上京)을종용하고 그 대가로 東國(도코쿠)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대의명분을 얻게 된 요리토모는 1184년 그가 어려움에처했을 때 최대의 도움을 주었던 일족 요시나카를 토벌하고, 1185년에는 西國으로패주한 헤이지 일문을 단노우라(壇の浦)에서완전히 섬멸하였으며, 1189년에는 그의 친 동생 요시쓰네와 그의후원자였던 후지와라(藤原) 일문을 멸족시켰다. 요시쓰네의 아내가 헤이지 집안(平の時忠의 딸)의 사람이었고 그 명성을 시기해서 요리토모는 이 동생을 몹시 싫어했었다.

1192년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정이대장군)이된 요리토모는 가마쿠라에서 무가정치(武家政治)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이것이 이후 1867년메이지 유신 때까지 근 700년 동안 계속된 幕府(막부-바쿠후)정치의 시작이다.

征夷大將軍이란 동북 쪽에 살고 있던 에조(蝦夷/ 하이/아이누)족의 토벌을 맡은 장군에게 주었던 무인최고의 벼슬이다. 요리토모가 이 자리에오르기 까지는 그의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の義經), 고시라카와(後白河) 上皇등과의 숨바꼭질 같은 게임도 치루고 얻은 결과였다.

 

같은 시기 고려에서는 이자겸의 난(1126), 묘청의서경천도운동(1135) 등으로 왕권은 쇠약해지고 귀족의 세력이 높아지더니 상대적으로홀대를 받았다는 무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른바 정중부의난(1170)을 시작으로 전개된 무인정치는 1196년 최종의 승자가 된 최충헌에 의해서무가정치가 시작되는데 이를 최씨 무신정권이라 한다. 무가정치의 시작은 고려나일본이나 시기적으로 같다.

 

최씨 정권의 최고의 권력기구는 경찰 사법권을 가진교정도감이었고, 군사적인 배경은 삼별초다. 최씨 가정(家政)의 사사로운 처리기구였던정방(政房)이 관료들의 인사처리를 담당하는 국가 권력 기관으로 변질되어 최씨 정권은반석에 올랐지만 몽고의 침입으로 결국 3대 60 여 년만에 종막을 고했다.

이것 역시 역사의 필연인지 우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카마쿠라에 막부를 세우고 일본을 통치했던 겐지(源氏)집안도 3대를 끝으로 단절되고세력은 외척인 호죠(北條) 가계로 이동되었으나 몽고의 침입으로 결국은 무너졌다.

중국에서는 5대의 혼란을 통일한 송(宋)나라가 절도사라는무인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이른바 문치주의를 채택하여 경제적으로융성하여 중세라는 새로운 시대의 장을 마련했으나, 지나친 문치주의로 인해 국력의쇠약을 초래하였고 이로 인해 동북 쪽의 거란과 서북쪽의 서하에게 늘 시달림을 받아야만했다.

 

그러다가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운 금(1115 ~ 1234)나라와협력하여 거란은 물리쳤으나 자체 국방력 부족의 모순을 메우지 못한 것이 결국은원인이 되어 정강의 변(1127)을 계기로 회수(淮水) 이북의 중국은 금 나라에게 물려주고강남지방에 본거지를 정했다. 이것을 남송(南宋)이라 한다. 그러나 이 남송도 금나라도그 후 모두 몽고에게 멸망되고 만다.

 

2. 일본문화의 성립

 

(1) 주택(住宅)과 방술(方術)

 

후지와라 집안의 집권이 시작되는 10세기에 이르면더 이상의 대륙문물을 수용할 수 없게 되고 또한 지나친 외래문화에 대한 반동이귀족사회에 퍼지면서 일본 고유문화를 찾는 경향이 나타났다. 외래문물을 수용할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중국에서는 당이 망했고 한반도에서는 통일신라가 무너지고고려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본적인 문화의 바탕에는 후지와라 집안을 비롯해서부유한 귀족가문이 주축을 이루었고 따라서 귀족문화로 귀결된다. 그러나 가나문자가일반화되고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는 일본적인 불교가 정리됨에 따라 그 문화의폭이 훨씬 넓어졌다.

귀족의 주택이 당풍에서 벗어나 우미(優美)한 침전조(寢殿造)라는양식으로 바뀌었는데 대체적인 그 모습은 중앙에 주인이 거처하는 침전(寢殿)이 남향으로세워지고 침전의 동 서 혹은 북쪽에 가족들의 건물을 배치하였다.

 

지붕은 회나무 껍질을 사용하고 바닥은 판자를 깔았으며다다미(重疊)는 필요에 따라 이동하였다. 방은 벽을 쌓지 않고 포장이나 병풍으로구획하였는데, 그 포장이나 병풍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유행하여 그림의 수요가 늘어나고이것이 회화 미술 발달에 기여하였다.

12세기경에는 우아하면서 해학적인 두루마리 그림(繪卷物)이유행하여 이름 난 화가를 배출하였으며 귀족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염직(染織),칠공(漆工), 금공(金工) 등의 공예기술도 발달하였다.

율령정부에서는 음양료(陰陽療)라는 관아를 두고 음양(陰陽),천문(天文), 역(曆) 등을 가르쳤고 음양도(陰陽道)라는 것이 생겨 재앙을 쫓아내고복을 들어오게 하는 양재(攘災)초복(招福)의 방술(方術)을 믿었고 일시(日時)의 방위(方位)와점괘(占卦)가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하였다. 이것을 보는 견해에 따라 미신이라고하지만 이런 전통은 문명국 답지 않게 지금의 일본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2) 가나문자와 일본문학

 

한자(漢字)의 한 부분만을 따서 문자로 대용한 것이이른바 가나(かな)문자라는 것이다. 기본 모음(母音) 다섯 개[あ(a), い(i), う(u).え(e), お(o)]에 자음(子音) 7개[か(k, g), さ(s), た(t, d), な(n), は(h), ま(m),ら(r)]로 우선 조합하고 여기에 반모음 ゃ(ya)와 わ(w)를 보태어 50音圖(ごじゃうおんず)라는 것을 만들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쉬운 것 같지만 ち(치, 찌)와つ(쓰 쯔)가 우리 발음에는 없고 "ㅓ" 발음을 일본인들은 하지 못한다.............

 

문자로서는 표의문자인 한자를 표음문자로 대치한것이 가타카나(片假名)고 초서체를 원용한 것이 히라가나(平假名)라는 것이다. 이런일본문자의 창시자로서는 승려를 비롯한 몇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으나 어떤특정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필요에 따라 만들어 사용한 것이 세월이지나면서 고정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 동기는 승려들이 漢語로 된 梵語(범어)를 강독(講讀)하거나베끼면서(寫經) 필요한 구결(口訣) 문자를 정리한 것이 가나문자로 정리되었다는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가나의 보급은 한자를 기피하던 여성 귀족들에게 환영을받아 소설, 수필, 일기, 와까(和歌) 등이 활기를 띄고,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978 ∼ 1016)의 겐지이야기(源氏物語 / 원씨물어)와 세이쇼나곤(淸少納言)의 마쿠라노소오시(枕草子)와 같은 훌륭한 문학작품을 남겼다.

겐지이야기(源氏物語)는 황자(皇子)이면서 수려한용모와 재능을 겸비한 주인공 히카루 겐지(光源氏)의 일생과 그를 둘러싼 일족들의생애를 웅대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로 서술한 54첩(帖)으로 된 연애소설이고, 枕草子는간결과 변화가 예리한 감각으로 다듬어진 수필집이다.

 

9세기경에 6 歌仙이 출현하여 더욱 활기를 띄게 된와까(和歌)는 10세기에 이르러 우아함과 기교가 더한 古今和歌集이 나오게 되었다.이외에도 후지와라 씨의 영화를 그린 大鏡과 榮華物語, 중국, 인도, 일본의 설화를모은 今昔物語, 무사의 생활을 그린 將門記 등이 나왔다.

 

(3) 일본불교

 

8세기경부터 시작된 신불습합(神佛習合)의 경향이10세기가 되면 본지수적설(本地垂跡說)로 한 걸음 더 나간다. 신불습합이란 日本神道의여러 신을 불교의 보살과 합치시키는 것으로 神과 佛은 같다는 이론이다.

본지수적설이란 佛을 일본의 神의 본지로 보고 神을佛의 수적(垂跡)으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은 일본 神으로서 다른 곳에서태어났을 뿐 근본은 일본의 신(神)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일본인들 다운 아전인수격의기발한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유학을 받아들이면서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라는 꾀나 난해한내용을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평천하 라는 중국황제만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에그들의 왕을 올리고 천황(天皇-텐노)이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난해(難解)하기란 불경(佛經) 역시 둘째 가라면 서러울정도로 일반인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이것 역시 그들의 취향에 맞게 말법사상(末法思想)과정토신앙(淨土信仰)으로 단순화시키고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말법사상이란 석가가 죽은 후 2천년에 말법의 시대,곧 말세(末世)가 온다는 것이다. 이때가 되면 올바른 가르침은 행해지지 않고 천재(天災)와지변(地變), 그리고 전쟁과 역질(疫疾)이 계속 일어나 살아 남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무사들 간의 투쟁, 승병들의 횡포, 각 가지 질병(疾病)등은 석가 몰(歿)후 2천년이 가까워 지면서 이런 말법사상에 불을 당겼고, 그 구제방안으로 대두된 것이 정토(淨土) 신앙이다.

 

정토(淨土)란 서방정토(西方淨土), 즉 극락세계를말한다.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이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염불함으로서 자력성불이 안 되는 악인이라 할지라도 부처님의 도움으로 구제된다고믿었다. 모든 것은 아미타불에게 귀의(歸依)한다는 염불 하나만으로 구제가 가능했다는것이다.

이런 정토신앙을 일으킨 源信(원신-겐신 / ~ 1017)은지옥의 살벌한 모습과 극락의 평화로운 모습을 대조적으로 세세하게 그려 왕생요집(往生要集)이라는이름으로 간행하여 널리 보급했고, 空也(공야-구야)라는 승려는 이를 거리든 어디든사람이 있는 곳이면 찾아가 열심히 전파하였다.

 

현세적 기복(祈福) 신앙이 시대적으로 몰락하는 중소귀족들의처지와 맞물려 등장한 것이 정토신앙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귀족층으로부터 지지를받았고 그 간단한 기도방법으로 일반인들 속으로도 깊이 파고 들어갔다.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 이런 정토교가 크게 발달하자여기에 부응하여 불교예술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귀족들이 다투어 정토 사원을짓고 화려한 금동(金銅) 아미타불을 경쟁적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는 불화(佛畵)에서도그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문화란 이동하게 마련이고 이동되면 본래의 모습 그대로를간직할 수는 없다. 현지사정에 알맞게 재구성되어야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속성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불교가 일본에서는 이렇게 단순화되지만 고려에서는더욱 복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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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재클럽(Y-Club)
글쓴이 : 拈華微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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