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

[스크랩] 26-3 몽골 제국의 성립과 발전(3)-몽골의 일본원정

똥하 2009. 4. 19. 18:24

(3) 몽고의 일본 원정

(가) 세조 쿠빌라이
태종 오고타이가 죽고 그의 맏 아들 귀위크 칸(貴由/귀유/1246~48)이 즉위했으나, 성격이 억세고 완고하였고,

1235년 바투를 따라 유럽원정에 나섰으나, 바투와 사이가 나빠져 본국에 소환 도중에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의 노력으로 칸을 계승할 수 있었지만, 바투는 이를 끝내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서쪽에서 킵차크 한국(汗國)을 건국한 바투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앞날을 우려할 만한 사태가 되었으므로, 후에 바투와 대결하려고 대군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고도 하며, 암살되었다고도 합니다.

다음으로 몽고의 칸을 계승한 것은 투루이가계의 몽케 칸(Mongke Khan/蒙哥汗/몽가한: 1251∼59)으로서, 칭기즈칸의 막내 아들 투루이의 맏 아들이고, 쿠빌라이와 훌라구는 그의 동생들이 였습니다.

유럽 원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고, 1248년 정종(定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카라코룸에서 번영을 누렸으며, 쿠빌라이로 하여금 중국·티베트·다리(大理:중국 雲南省 서부)·안남(安南)을, 훌라구로 하여금 서 아시아 이슬람교의 바그다드 아바스왕조를 정복하게 하였으며(1258), 스스로도 남송정벌을 결의, 쓰촨(四川)까지 진군하였으나 병사하였습니다.

몽케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 세조 쿠빌라이(Khubilai/忽必烈/홀필열/ 1260∼94)가 칸을 계승하였는데, 형 몽케 칸이 쓰촨(四川)의 병영에서 병사하자, 쿠빌라이는 국도(國都) 카라코룸을 지키고 있는 막내 아우 아리크부카의 야망에 선수를 써서 이듬해 이례적으로 중국의 카이핑부(開平府)에서 쿠릴타이를 소집, 칸의 자리에 올랐다.

중국식으로 연호를 세워(建元) 중통(中統)이라 하였고, 이에 맞서 막내가 카라코룸에서 칸에 오르자, 그 뒤로 두 칸이 싸우기를 4년, 마침내 아리크부카를 굴복시킨 쿠빌라이는 도읍을 연경(燕京:北京)으로 옮겨 대도(大都)라 일컫고, 이어 1271년 나라 이름을 중국식으로 원(元)이라 하였습니다.

그의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키고, 이민족으로서 최초의 중국 통일을 이루었는데(1279), 이 시기 쿠빌라이의 관심은 일본 정복에 두고 있었으나 동서양을 종횡무진하던 몽고군도 이 일본 정복만은 끝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2) 일본의 무가 정치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


당시의 일본은 무가시대였는데 이른바 막번체제라고 하는 일본 특유의 봉건제도가 성립된 것은 미나모토씨(源氏) 집안의 골육상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の賴朝)와 미나모토노요시쯔네(源の義經)는 형제지간였으나, 단노우라(壇の浦)에서 헤이씨(平氏)를 멸망시킨 동생 요시쯔네는 혁혁한 공을 세운 개선장군으로서 당당한 모습으로 수도 쿄오토(京都)로 돌아와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카마쿠라(鎌倉)에 있던 요리토모는 요시쯔네에게 냉담했는데, 일찍이 요리토모는 요시쯔네와 친형제지간이면서도 부하처럼 대하였고, 요시쯔네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것을 시기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시쯔네가 타이라노토키타다(平の時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에 대하여 분개하고 있었습니다.

요시쯔네는 요리토모의 화를 풀기 위해 카마쿠라 부근까지 가서 요리토모에게 편지를 보내어 만나 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지만, 요리토모는 이를 거부하고 카마쿠라에 들어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하를 보내어 요시쯔네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 요시쯔네는 쿄오토로 돌아와 고시라카와법황(後白河法皇)에게 간청하여 요시쯔네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아 내고, 토벌에 필요한 무사들을 동원하였으나, 동원된 군사는 겨우 300기에 불과 하였습니다. 고시라카와법황은 이런 사실을 알고 이번에는 요리토모에게 요시쯔네를 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요시쯔네는 나라의 요시노(吉野)등으로 몸을 숨기면서 토호쿠(東北)지방의 히라이즈미(平泉→이와테현 소재)까지 도망하였으나, 더 이상 피할 은신처를 찾지 못해, 자살로서 30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이에 그 형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카마쿠라를 근거지로하여 전국을 지배하기 시작하여, 1192년 고시라카와법황이 죽자 세이이 다쇼군(征夷大將軍/정이대장군)에 임명되어 카마쿠라 막부(幕府)를 열었습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싸움에서 활약한 무사들에게 토지를 주어 주종관계를 맺어 부하로 삼았으며, 그 중에서 유력한 자를 관리에 임명하여 각지로 파견하는 등 전국적인 군사권과 치안권을 장악하게 되어 실질적인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로써 카마쿠라 막부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다) 호쿠죠오 시대


요리토모는 1198년 사가이강(相模江) 교량 낙성식에 참석했다가 돌아 오는 길에 말에서 떨어진 것이 원인이 되어 다음 해 정월 53세로 죽고, 장군이 된 자는 장남 요리이에(賴家)였으며 당시 겨우 18세,...그의 어머니인 호쿠죠오마사코(北條政子)는 아버지인 호쿠죠오도키마사(北條時政)와 함께 아들로부터 모든 권한을 박탈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리이에가 반발하자 마사코는 아들인 요리이에를 이즈(伊豆)의 슈젠사(修禪寺)라는 절에 유폐시키고, 얼마 후 부하를 시켜 죽이고, 1203년 9월 요리이에의 동생 사네모토(實朝)를 쇼오군(將軍)으로 추대,...당시 그의 나이 12세였고, 토키마사는 나이 어린 장군을 제멋대로 조종하여 막부 제일의 실권자가 되었습니다.

1219년 정월 3대 쇼오군 사네모토는 그의 조카인 구교(公曉=요리이에의 아들)에게 살해당하고, 구교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여, 미나모토 가문은 요리토모로부터 겨우 3대에서 골육상잔의 비극을 빚으면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쿄오토(京都)의 고토바상황(後鳥羽上皇)은 미나모토 가문의 혈통이 끊겼다는 사실을 듣고,

1221년 5월 막부의 실권자인 요시토키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전국 무사들에게 내렸습니다. 이에 마사코는 막부의 무사들을 불러모아이들을 설득하고, 즉시 쿄오토로 출진, 고토바상황의 군사를 진압하고, 고토바상황을 오키(隱岐)로 유배시켰을 뿐만 아니라, 상황 쪽에 가담했던 귀족들과 무사들을 엄하게 벌하였는데, 이것을 죠오쿠의 난(承久の亂)이라고 합니다.

(라) 몽고의 일본 침입


고려를 지배하게된 몽고는 일본 원정을 위해서 고려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요구를 강요하였습니다. 몽고는 1266년 일본에 조공(朝貢)을 받기 위해 병부시랑 흑적을 일본에 파견하였는데, 풍랑으로 뜻일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고, 1268년에는 고려의 반부를 사신으로 보내어 원나라와 고려의 국서(國書)를 일본에 전달하였습니다.

국서의 내용이 수교(修交)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예속(隸屬)을 강요한 것으로써, 일본의 실력자 호쿠오죠는 단연 거부하였습니다. 그 후 원에서는 여섯 차례에 걸쳐 해마다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일본은 끝내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격노한 쿠빌라이는 정동군을 일으켰는데, 원정군의 규모는 원군 주력이 2만, 고려군이 5천 3백, 기타 수부(水夫) 잡부(雜夫) 5천 여명이 가세하여 3만 명이 넘었습니다.

원군 주력부대의 총사령관에는 몽고인 혼도(홀돈)가 그리고 부 사령관에는 고려인 홍다구가 임용되었고, 고려군의 사령관에는 김방경이 맡았습니다.

몽고는 고려에 군선(軍船), 무기, 군사 식량 등의 준비를 강요하였고, 1274년 10월 3일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은 900여척의 군선에 나누어 타고 합포(合浦)를 출발하여 일본으로 출진하였습니다.

몽고군은 5일에는 쓰시마(對馬)를, 14일에는 이키(壹岐)섬을 점령하였고, 19일에는 하카타(博多)까지 침공하여 다음 날인 20일에는 큐우슈우에 상륙하였습니다.

일본군도 분전했으나 몽고군의 철포(鐵砲)와 화살에 화약을 장치한 화전(火箭)의 사용과 집단전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였고 사상자가 속출하여 내륙 다자이후(大宰府)로 후퇴하였습니다. 밤이 되자 일본 지리에 어두운 몽고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그들의 배로 철수하였는데,

그런데 그 날밤 갑자기 태풍이 불어 닥쳐 하카타만에 정박 중이던 몽고의 군선이 거의 침몰되고 병사들이 많은 피해를 입어 철군하였습니다. 이 때 몽고군 1만 3천 5백명 정도가 익사했다고 합니다.(文永の役)

다음 해인 1275년 쿠빌라이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종속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집권 토키무네는 사신의 목을 베고 단호히 거부하자, 1276년 남송의 임안을 점령한 몽고는 정동행중서성을 설치하고 2차 원정을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이어 1279년 남송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다시 사신을 일본에 보냈으나 역시 참수(斬首)당하였고, 뿐만 아니라 몽고군의 재 침입에 대비하여 하카타만(博多灣)에 방루를 쌓고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1281년 6월, 동로군(몽고/한인/고려) 5만과 강남군 10만으로 편성된 원정군은 하카타만에 도착, 일본측이 해안 수비를 강화하고 완강히 대항하였기 때문에 상륙에 실패하였습니다. 밤이 되자 일본군은 작은 배를 타고 와서, 몽고군의 배에 접근하여 횃불을 던져 배를 불태웠고,... 몽고군도 이 작전에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일단 강남군과 합류하기 위해 철수하여 대기하고 있었는데, 강남군은 당초 이키섬에서 동로군과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변경하여 히라도(平戶)로 향하였기 때문에 양 군은 7월에야 합류할 수 있었으며, 총공격을 눈앞에 두고 키타큐우슈 일대에 불어닥친 태풍으로 인해 몽고군은 다시 아무 소득 없이 철수하였습니다. (弘安の役)

몽고는 이 이후에도 일본 원정의 뜻을 버리지 않고 1282년 제 3차 원정 계획을 세웠지만, 고려, 중국, 베트남 등에서 몽고에 대한 저항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일단 원정은 중단되었지만 쿠빌라이의 일본 정복에 대한 집념은 잠시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79세의 고령으로서 사망하기 전해인 1293년에도 원정을 계획하고 고려에 막대한 수의 함선과 군량의 준비를 명하였다가,

1294년 쿠빌라이칸의 사망과 함께 일본 정복 야욕도 영영 사라지고 말았습니다.몽고의 일본원정 실패의 원인은, 몽고군이 다른 나라의 군인과 섞인 혼성군으로 이루어 졌고, 고려의 민중과 군대가 몽고에 저항하고 있었고, 시기적으로 태풍의 계절을 택해 패전을 자초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태풍을 신(神)이 가져다 준 바람(風)이라 하여, 카미카제(神風)라 하였고, 또한 신이 수호해 주는 나라라고 자긍심을 부추겨 일본의 신도(神道)가 이때부터 더욱 팽배해 졌으며, 태평양 전쟁(1941~45)에서 미국에게 밀리자 나이 어린 청소년을 카미가제 특공대라는 이름으로 사지로 내몰아 안간 힘을 다했으나, 결국 일본의 군국주의는 막을 내리고 우리는 광복을 찾았으나, 이 카미가제 특공대에 한국의 청소년이 있었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마) 카마쿠라막부의 붕괴

몽고군과의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막부는 몽고군의 침입을 간신히 방어할 수 있었지만, 서국(西國)의 어가인(御家人)들은, 이 이후에도 키타큐우슈우(北九州)연안에서의 방비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부담만 늘어났고, 어가인의 역할에 대해. 막부는 은상의 토지를 줄 수 없는 형편에 있어서, 막부에 대한 어가인의 불만은 차츰 강해졌습니다.

또한 어가인 집에서는 영지를 형제들에게 나누어 상속하였기 때문에 상속 때마다 영지가 세분화되었으며, 상업의 발달로 지출이 늘어나면서 생활고가 한층 가중되었고, 어가인들 사이에는 토지를 매입하거나 매도하는 자가 늘어나면서, 막부를 지탱하던 어가인 제도가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막부의 집안을 어가라 하였고, 황실의 집안을 공가라고 일본에서는 불렀습니다.

어가인 중에 슈고(守護)는 그 지방의 군사 및 반란 진압을 맡았고, 지토오(地頭)는 공납(年貢) 징수 및 토지 관리 등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다이묘(大名)는 지방 정권을 맡은 영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정의 혼란 속에서 카와찌(河內=지금의 大阪)의 쿠스노끼마사시게(楠木正成)를 비롯한 각지의 무사들이 천황 편에 가담하여 잇달아서 봉기하자, 막부는 아시카가타카우지(足利尊氏) 등을 대장으로 해서 대군을 보내어 정복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전부터 막부에 불만을 갖고 있던 타카우지는 갑자기 천황 측에 가담해 막부 측을 공격하자,

그 때까지 사정을 살피고 있던 무사들이 잇달아서 천황 측에 가담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닛타요시사다(新田義貞)가 일족을 거느리고 카마쿠라를 공격하여 1333년 호쿠죠타카토키(北條高時)에게 자살을 명하므로 해서 카마쿠라 막부는 멸망하였고, 아시카가다카우지가 무로마치 바쿠후를 열었으나(1336) 지방 정권에 불과 하였고,

슈고 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슈고다이묘가 되었고, 다시 전국시대가 되면서 전국다이묘가 되어 혼란과 분열을 거듭하다가, 이 후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나타나 재통일 할 때 까지 이른바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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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재클럽(Y-Club)
글쓴이 : 拈華微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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