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

[스크랩] 30-2 원(元)의 중국 지배와 고려와의 관계(2)

똥하 2009. 4. 19. 18:26

30. 원(元)의 중국 지배와 고려와의 관계(2)

나. 원 제국과 고려와의 관계

(1) 고려왕조의 명암

원이 중국을 지배한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중반까지 약 90년간, 고려에서는 원종에서부터 공민왕의 치세기간이 됩니다. 원종 이후 고려 왕의 묘호(廟號)에는 祖나 宗이 사라지고, 충(忠)자를 앞에 붙인 왕이라 부르기 시작하는데, 충렬왕(1275-1308), 충선왕(1308-1313), 충숙왕(1313-1330, 1332-1339), 충혜왕(1330-1332, 1339-1344), 충목왕(1344-1348), 충정왕(1348-1351) 등이 이들로서, 재위기간이 둘로 나온 것도 있습니다.

충(忠)은 누구에게든 충성했다는 것인데, 왕조사회에서 임금이 신하에게 충성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임금이 충성을 했다면, 그보다 윗자리의 대상이 있어야 되겠지요. 몽고와 화의가 성립되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했을 때(1270), 거기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붙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고려 왕의 정비(正妃)는 원의 공주(公主)라야 한다는 것이었고,...이래서 고려의 왕실은 몽고의 혈통이 뿌리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고려사(高麗史)을 이야기할 때, 태조 왕건으로부터(918) 34대 공양왕까지(1392) 475년간 지속하였다고 하지만 이것은 산술적인 수자에 불과하고, 사실상의 왕조교체는 사정에 따라 여러 차례 변동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의 변동은 거란과 북송이 여진족이 세운 금 나라에게 망했을 때(1125 / 1127), 고려에서는 이자겸의 난(1126)과 묘청의 난(1135)이 일어납니다. 이를 가까스로 진압하고 왕권은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곧 이어 무신정변(1170)으로 고려의 문벌 귀족사회는 완전히 해체되고, 최씨무신집권시대(1196-1259)를 마지합니다.

이 시기에 몽고의 1차 침입을 받았고(1231), 강화(講和)가 성립되었으나, 몽고가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내정을 간섭하자, 정권유지에 불안을 느낀 최우는 몽고와의 강화를 깨고 강화(江華)도로 천도하여 항몽을 결의합니다. 부처님의 영험(靈驗)으로 병란(兵亂)을 막고자, 그 어려운 중에서도 16년간(1236-1251)의 긴 세월을 정성 모아 대장경을 조판했지만,

수 차에 걸친 몽고의 침입은 이런 소망도 아랑곳 없이, 찬란했던 고려청자가 이때부터 맥이 끊어지기 시작하였고, 무신정권도 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만 대장경은 고려대장경(8만대장경)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이 때 최씨정권의 사병집단이 였던 삼별초가 신분의 불안을 느껴 조직적으로 항거하였으나, 진압되었고(1273), 몽고는 국호를 원이라 고치고, 고려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이 다른 정복지에서 했던 것처럼, 사람을 죽여 머리로 피라미드를 싸고, 귀를 잘라 포대에 담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고려에 대해서 가혹한 요구와 만행을 저질렀던 것은 사실입니다.

(2) 원의 고려 지배

이시기에 나타난 용어들을 중심으로 풀어보면, 고려는 원의 부마(駙馬)국이 되었다고 하는데, 부마란 왕의 사위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고려 왕은 원 왕실의 사위라는 것이지요. 1258년 최의가 주살(誅殺) 됨으로서 최씨무신정권은 무너지고, 왕권이 회복되어 몽고와의 관계에서도 일대 변화가 일어나 태자를 몽고에 입조(入朝)케 하였는데, 이에 태자 전( )은 40여명의 일행과 함께 몽고의 상도(上都) 카이펑(開平)에 들어 갔습니다(1259) 이 때 몽고에서는 몽케가 죽고 쿠빌라이는 귀로에 올라 북몽고로 돌아가던 길이 였는데, 여기서 태자 전을 만나 두터운 후대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듬해(1260) 태자 전이 부왕(고종)의 부음(訃音)을 받고 귀로에 올랐을 때 쿠비라이칸은 부왕의 죽음을 애도하고 귀로를 보살펴 주어 무사히 귀국하여 원종(元宗)으로 즉위하고, 태자를 두 차례 몽고에 보내어 성의를 표시하고 강화도에서 나오려고 하였으나, 무신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한 때 폐위되기 까지 하였으나, 몽고의 개입으로 복위되어 다시 연경으로 들어갔다가 귀국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였습니다(1270)

원의 지배하에 들어간 고려는 태자(太子)를 격을 낮추어 세자(世子)라고 불렀는데, 충렬왕은 세자로 있을 때 원의 수도 연경에서 머물었고, 쿠빌라이의 딸을 비(妃)로 맞이하게 되었으며, 이후 고려 왕실의 정비(正妃)는 반드시 원의 공주를 마지해야 했으며, 공주의 소생이 왕위를 잇게 되는 것을 이때부터 법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몽고풍(蒙古風)이라는 말도 많이 들어 봤을 줄 압니다. 몽고의 풍속이 고려에서 유행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가운데 일품(?)이 호복(胡服)과 변발( 髮)로서, 이것은 만몽(滿蒙)계 북방민들의 옷 모양과 머리털을 처리하는 모습을 두고 일컫는 말인데, 몽고족은 머리 한가운데를 고속도로처럼 밀어버리고, 양 옆의 머리를 길게 길러, 양귀 밑으로 두 갈래로 땋아 늘였는데 이를 개체(開剃)변발이라고 하고,

만주(여진)족은 앞 머리와 옆 머리카락을 자르고 뒤통수의 머리카락만 남겨서 한 줄로 길게 땋아 늘어 뜰였는데 이를 체두(剃頭)변발이라고 합니다. 중국인들은 장발(長髮), 선비족은 삭두(削頭)라 하여 머리를 빡빡 밀었고, 한(韓)족은 어려서는 댕기머리, 성인이 되면 상투를 틀었습니다.

충렬왕이 연경에서 즉위하고 원의 공주와 함께 고려에 귀국했을 때, 호복과 개체변발을 하고 나타나 조정의 신하들이 비애를 금치 못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후 신하들 중에서도 호복과 변발을 쫓는 자가 늘어나, 일반화하기 시작하다가 공민왕 때 반원정책으로 변발은 사라졌지만 복식과 언어에서는 우리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몽고식 이름. 말 끝에 붙인 치(赤 : 이치, 저치, 장사치, 양아치 ), 임금의 진지상인 수라(水刺), 절다말(赤馬)과 가라말(黑馬) 등의 말 이름 등은 그 후에도 오래동안 사용되었고, 조선후기까지 관리들의 평상집무복인 단령(團領), 무신들이 비올 때 신는 수화자(水靴子), 남자의 소매 좁은 저고리인 착수(窄袖), 가랭이가 좁은 홀태바지, 여자의 머리에 얹는 족두리, 옷고름에 차는 장도(粧刀), 얼굴에 찍는 연지 등등이 몽고풍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몽고풍에 대칭해서 고려양(高麗樣)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고려의 의복, 신발, 모자, 음식(떡) 등이 원나라에 전해진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두 나라 사이에 문물의 교류가 빈번했던 것은 양국 왕실간의 혼인, 사절, 상인 등의 내왕이 많았기 때문인데, 이런 것과 관계없이 몽고의 일방적인 강요에 의해서, 혹은 원의 왕실에 아부하기 위해서 끌려간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 중 대표되는 것이 이른바 공녀(貢女)였습니다.

공녀(貢女)란 치욕의 역사가 남긴 산물임에는 틀림없고, 다시 기억하기 싫은 어두운 그림자가 되겠지만, 이것은 고려후기에 시작하여 조선왕조 중종때 까지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몽고가 저고여 피살사건(1225) 이후, 이를 구실로 고려에 침입하여, 항복 조건으로 고려의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500명씩을 바치라고 한 것이 그 효시(嚆矢)가 되었고, 원(元)으로 나라 이름을 고치고(1271), 계속해서 고려에 공녀를 요구하였는데, 이로부터 고려는 원의 왕실과, 귀족·고관이 요구하는 여자의 공급처가 되었습니다.

여자뿐만 아니라, 멀쩡한 남자를 거세(去勢)한 환자(宦者)도 공급해주어야 했으며, 이로 인한 고려의 풍속도가 점차 바뀌기 시작하여, 조혼(早婚)이 유행하였고, 결혼도감(結婚都監) 또는 과부처녀 추고별감(推考別監)이라는 회한한 관청이 등장했으며, 1274년 3월 원나라는 만자매빙사(蠻子媒聘使)라는 듣도 보도 못했던 사신이 명주 1640단을 가지고 와서 여자 140명을 내 놓으라고 욱박 질렀습니다. 이에 고려에서는 역적의 처나 파계한 승려의 딸 민간의 독녀(獨女) 등으로 이 무리한 요구를 매워 나갔는데, 만자란 중국 남송 치하의 강남인들로서, 이들을 결혼시켜 주기 위해서 사절까지 보낸 속사정이야 모르지만, 그 대가로 1인당 명주 12필을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공녀 요구는 계속되었으며, 이들의 대부분은 궁녀가 되었거나, 황제나 후비(后妃)의 심부름꾼으로 배치되었는데, 그 중 기황후라고 부르는 기자오(奇子敖)의 딸은 순제의 제 2황후가 되어 그 영광이 친정에까지 미쳐서, 그의 오라버니 기철은 고려후기 대표적인 권문세족(權門勢族)이 되어, 정치에 많은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고려의 여자들이 원나라의 왕실에 가득 하자 이것이 고려풍(高麗風)이라는 유행을 만들었고, 고려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야 귀족·고관으로서의 체면이 서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공녀의 폐습(弊習)은 공민왕의 반원정책(反元政策)으로 원나라에 대한 공녀는 끝났지만, 원을 대신한 명나라에서도 공녀를 요구해왔습니다. 그리하여 고려를 멸하고(1392),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에서도 명나라에 공녀를 바쳤는데, 명나라 태조(太祖) 주원장의 경우 한비(韓妃)는 함산공주(含山公主)를 낳았고, 석비(碩妃)는 영락제(永樂帝)를 낳았는데, 이들이 모두 조선의 공녀들이 였으며, 석비가 낳은 영락제는 처음 연왕이 되어 베이징에 주둔해 있다가, 정난의 변을 일으켜 난징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고, 자기의 본거지 베이징으로 천도하고, 20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거대한 자금성(紫禁城) 완성하였습니다.

그 후부터는 공녀를 보내기도 하고 중단하기도 하였으나, 1521년(중종 16) 명나라에서 세종 가정제가 즉위하자, 조선에서는 하등극사(賀登極使)라는 축하사절을 보내면서 공녀의 철폐를 요구하였고, 명나라에서도 더 이상 필요를 느끼지 못하여 이를 허락하므로써, 300 여 년 간 각가지 애환과 사연을 남겼던 공녀 문제는 공식적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다. 성리학(性理學)의 전래

(1) 원으로부터 전래된 문물들

원의 고려지배가 궁극적으로 고려에 많은 부담을 주었고, 자주성과 영토의 상실이라는 뼈아픈 교훈을 남겼지만, 이러한 외압을 당할 때 마다 역사라는 기록은 두 가지 부류의 유형(類型)을 등장시킵니다. 원에 적극 협력하여 일신의 영달을 누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이에 항거했다가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습니다. 누가 옳았고 글렀는가는 하기 좋은 말로 역사가 심판한다고 우기지만, 그 역사의 심판 기준이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를 요즘 말로 시대마다 이데올르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원의 영향하에서 이른바 혜택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는, 딸이나 누이, 아들이나 형제를 공녀나 환관으로 보내어 출세(?)한 사람도 있었고, 몽고인들이 매 사냥을 좋아하자, 응방(鷹坊)이라는 관청을 만들어 그들의 매 수요를 충당 시켜주고 비위를 맞추기도 하였고, 개인적으로 매(鷹)를 사냥용으로 길들여 이를 원나라의 유력자에게 바쳐서 출세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길들여 사냥용으로 쓰인 매를 해동청(海東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방 유목민들이 육로(陸路)로 한반도로 들어 올때는 압록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대개는 강물이 얼음으로 변하는 겨울철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산하(山河)가 많고 복잡하기 때문에,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린 지금과는 달라서 길이 여간 복잡한게 아닙니다. 낯 설은 외지인, 특히나 언어와 풍속이 다른 이방인이 이정표(里程標) 하나 없는 길을 찾기란 더욱 힘든 것은 자명한 이치고, 길을 잘 아는 현지인을 안내자로 삼아야 하는데, 그 안내자 역할은 내국인이 적격이겠지요. 물론 이들이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반역자가 되겠지만 침략자의 입장에서는 협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적에게 협력해서 출세한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대개 이런 부류들이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무서운 세상이 됩니다. 임금도 어쩔 수 없는 이들의 교만은 하찮은 서민을 사람으로 대접할 리도 없고, 서민들의 재산을 마구 약탈해서 재산을 불리고 지배층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을 통칭해서 권문세족(權門勢族)이라고 교과서에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혼돈의 시대에서 고통받는 것은 서민뿐만 아니라 지식인들도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래도 지식인들은 붓으로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도 했는데 이들이 직접 권문세족의 잘못을 욕할 수는 없고, 전설이나 신화 등을 원용해서 우회적으로 권문세족들을 풍자하고 비난했는데, 이런 것을 패관(稗官)문학이라고 합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문운(文運)이 맥을 이어 간 것은, 충선왕은 세조쿠빌라이의 외손(外孫)으로서 학문을 매우 좋아해서, 연경에 만권당을 짓고 고려의 이제현을 비롯한 조맹부 등 당대의 학자들과 교유(交遊)하며 서사(書史)를 토론했고, 원의 조정에서도 많은 서책을 하사하였으며,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고려의 전통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문학과 의학, 농학 등의 실질적인 학문과 목화의 전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성리학의 전래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만들어 이념세계에도 일대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2) 성리학(性理學)

정주학(程朱學), 이학(理學), 도학(道學), 송학(宋學), 혹은 주자학(朱子學) 등으로 불리고 있는 성리학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러나 막상 그 내용을 잘 아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철학적인 용어가 가미되면서, 알 듯 말 듯 한 용어들이 수없이 나오고, 이 학문의 원조(元祖)는 중국의 송나라지만,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여과되면서 줄여진 것이 아니라 많은 내용이 다시 추가되어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비단 성리학만이 아니라 사상이나 학문, 법령, 종교, 의례 등 외래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원주지에서 보다 훨씬 까다로워 지고 복잡해 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것을 소화하고 감당하지 못하면, 대충 넘기는 습성도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

유학이라고 하면 4서(論語, 孟子, 大學, 中庸)와 5경(詩, 書, 易經과 春秋 및 禮記)의 내용을 익히고 실천하는 생활규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漢·唐 시대에는 훈고학이라 하여, 字句의 해석에 주력하여, 스승의 학설을 고수하고 전하는 문헌적·해석적인 고전(古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성리학은 4서를 통하여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려는 학문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 학풍이 북송시대부터 나타난 중앙집권적인 독재군주권을 옹호하고, 관료주의를 합리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이민족이 중국을 침입하고 지배하게 되자, 중화(中華)의 자존심과 대의(大義)와 명분론(名分論)으로 학문적인 체계를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성리학의 출발은 북송 인종 때의 주돈이(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비롯되는데, 그의 설에 따르면 우주의 본체는 태극(근원)인 동시에 빛도 소리도 냄새도 형체도 없는 무극(無極/ 무한, 무량, 무형)으로, 아무런 차별도 없으나,

이것이 움직이면 양(陽), 정지해 있으면 음(陰)이 되어, 음양(陰陽)이라는 두 가지 기운(이기/二氣)이 생기고, 움직이고 정지하는 음양의 조화에서 다시 수(水), 목(木), 화(火), 토(土),금(金)의 다섯 원소가 발생, 그것이 오행(五行)이며,

이 음양 오행의 정(精)이 합하여 인간 남녀 양성(兩性)을 비롯한 만물(萬物)이 형성되는데, 만물 중에 가장 고귀하고 뛰어난 기(氣)를 타고 태어난 것이 인간의 양성, 즉 남녀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순수하고 선한 것으로써, 이러한 선한 경지를 성(誠)으로 표현하고, 우주의 본체는 태극이고, 인간의 본성은 성(誠)이며,

성을 다한 사람이 성인이 되고, 인간에게는 5행에서 파생한 5성이 있는데, 이것이 오상(五常)으로서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이며,

인간의 육체는 외물(外物)과 접촉할 때, 이 오성이 감동하여 선악(善惡)의 구별하고, 외물과 접촉이 없으면 선한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나, 오성이 감동할 때 악(惡)이 생기는 것은 욕심(慾心)때문으로 인간은 무욕(無慾)을 본의(本意)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주렴계의 제자로서 정호(程顥/明道)와 정이(程 이/伊川) 형제가 이 학설을 더욱 발전시켰는데, 정이천은 우주를 2원적으로 관찰, 우주간에 있는 모든 것은 정신적인 理와 물질적인 氣로 보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제창하였습니다.

그의 학설에 의하면, 기(氣)에 의해서 만물은 형(形)이 생기고, 이(理) 역시 형이 있는 곳에 주어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理)를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선한 것이나, 인간의 기질은 기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인간은 반드시 선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여 인간 기질의 성에는 선악의 구별이 있음을 말하고, 청기(淸氣)을 받은 기질은 선이며, 탁기(濁氣)를 받은 기질은 악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이천 사상의 특색은 성즉이(性卽理) 재적기(才卽氣)의 2원론에 두고 있는데, 기는 이의 형태를 빌린 것에 불과하므로 함양(涵養)과 진학(進學)에 의해서 기질이 나쁜 점을 고쳐 선한 길로 바꿀 수 있는 것으로, 함양이라 함은 경(敬)을 지니는 것을 말하고, 사물에 일관하는 원리 원칙을 옳게 파악하는 치지(致知)를 역설하였는데, 일사(一事) 일물(一物)에도 모두 일리(一理)가 있으니 이 일사 일물을 깨치면 마침내 만사 만물의 도리에 통하고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성리학이 남송의 주희(주자)에 의해서 학문적으로 완성되었는데. 주자는 이에 소이연(所以然:존재론적 의미를 가진다)과 소당연(所當然:법칙론적 의미를 가진다)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것은 기의 내부에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고, 기가 형질(形質)을 지니고 운동하는 것에 대하여, 이(理)는 형질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고, 그 실재는 기를 통하여 관념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즉, 기가 형질을 갖고자 할 때, 또는 운동을 일으키려 할 때, 이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의 이러한 작용은 전혀 불가능하며, 기의 존재 자체도 불가능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자는 이것을 윤리에 적용시켰을 때, 이·기에 경중을 두면서도 기를 악(惡)으로만 단정하지 않고, 기의 청탁(淸濁)에 의한 결과에서 선악을 인정하려 하였습니다.

인간의 신체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은 기에서 성립되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선(善)한 성(性)은 이(理)가 마음에 내재화(內在化)된 것으로 보았다는 것으로, 이 이기설은 그 후 오랫동안 철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윤리적 입장에서 기에 중점을 두느냐, 이에 중점을 두느냐의 차이일 뿐, 우주관 자체는 부동의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내용이 어렵지요, 내 방식대로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광대무변한 우주란 있는 동시에 또한 없는 것으로서, 이것이 태극이고, 이 태극의 動과 靜에 따라서 양과 음이 생기는데, 보이는 것은 양, 숨은 것은 음, 다시 태양은 양 달은 음, 땅은 양 바다는 음, 오르막은 양 내리막은 음,.....이런 식으로 삼라만상을 풀었고, 이 삼라만상의 생성소멸을 수 목 화 토 금이라는 다섯 개의 원소를 가지고 설명하였는데 여기에서 인간이라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에 대해서 선악을 구분 짓고자 하였습니다.

참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두고 풀이를 했다는 것이지요. 예의와 범절, 분수를 지키는 것이 인간이고 그렇지 못한 것이 짐승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다시 예의는 무엇이고, 범절과 분수는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것을 理와 氣를 두고,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우주생성에는 의미의 세계와 실체의 세계가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 것과 같이, 소우주인 인간에게도 육체라는 보이는 형상(氣/행위,행동)과, 이 육체를 조절 운용하는 마음(理/억제,자제)이라는 보이지 않는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이냐 하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논란과도 비슷하나, 우리들이 흔히 듣는 말 가운데,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지,...돈만 있으면 최고냐, 마음을 옳게 써야 사람이지,...여기에서 마음도 곱고(예절도 바르고) 얼굴도 예쁘면(심성도 바르면) 성인, 마음이 고우면 군자, 얼굴만 예쁘면 범인, 둘 다 나쁘면 짐승(오랑캐),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개 이런 식으로 설명된 것 같습니다.

만약 내가 길을 갈 때, 다리가 아파서 말을 타고 갔다면, 말을 타자고 충동질 한 것은 누구고 실제로 말을 탄 것은 또 누구냐는 것입니다. 말을 타자고 한 것은 아픈 다리겠지요. 아프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마음이고, 그리고 말을 탄 것은 육신이 될 것이고,....이렇게 보면 정신세계를 理, 힘의 원천을 氣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프고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며, 반대로 마음이 즐거우면 육신도 즐겁고 육신의 즐거움은 마음의 즐거움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양자가 조화를 이룰 때, 이것은 가능하고, 오랑캐는 즐거움만 추구하다 보니(마음이 행동을 누르지 못하니) 예절을 모르고 따라서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名分論이라고도 합니다.

주자는 이런 명분론의 입장에서 4서를 해석하고 그 주해(註解)를 달았으며, 관혼상제(冠婚喪祭)라는 인간의 통과의례를 엄격히 하여 각자의 분수를 지킴으로서 인간사회의 조화로운 질서가 유지된다고 보고, 주문공가례(주자가례)라는 일종의 생활 규범을 만들었습니다. 다분히 봉건적인 신분질서와 그 한계를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성리학은 고려 말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元)나라에 갔던 안향(安珦)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고, 그 후 성균관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으로서 새로운 학풍을 이루게 되었으며, 침체에 빠진 불교를 대신해서 새로운 사상과 이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을 건국하는 지도적인 이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성리학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6세기에 였는데, 송대의 성리학이 이 땅에 전래된 지 300년이 지난 후 였습니다. 이때 이미 중국에서는 성리학이 자취를 감추던 시기였는데, 조선 유학의 쌍벽인 이퇴계(李退溪)와 이율곡(李栗谷)에 의해서 다시 정리되었습니다.

그들은 성리학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함에 있어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 인간 내면의 성정(性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더 추구하여, 이른바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변(論辨)을 펼치기 시작하였는데,...다시 내면적 도덕원리인 인성론(人性論)은 송익필(宋翼弼)·김장생(金長生) 등에 의하여 유교의 행동규범인 예설(禮說)로 발전하였고,

예절을 모르면 금수보다 못하다 하여 세세한 면까지 서민생활을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얽어 매었는데...주자가례에서 밝힌 관혼상제 중 관례는 오래 전에 없어졌고, 혼례도 현대화되어 특이한 예식장문화로 변질되었으며, 상례도 간소화되어 차츰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나 남은 제례(제사)가 곧 어떻게 될지,.. 모르긴 해도 복잡하고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성리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겼던 3년 거상(居喪)과 시묘(侍墓)살이는 고사하고, 도로가 자동차로 막혀 몇 시간을 차안에서 보내면서 까지, 그래도 지금은 고향을 찾아 조상의 설 제사를 올리고 있으나, 이것이 언제까지 계속 될지 의문스럽습니다.

**

출처 : 양재클럽(Y-Club)
글쓴이 : 拈華微笑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