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

[스크랩] 30-1 원(元)의 중국 지배와 고려와의 관계(1)

똥하 2009. 4. 19. 18:25

29. 원(元)의 중국 지배와 고려와의 관계(1)

가. 몽골의 중국지배

(1) 유목지대의 몽고족

유목(遊牧)사회가 농경(農耕)사회를 일시적인 힘으로 정복할 수는 있어도, 이를 지배하고 통치하는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인데,

그것은 인구의 열세, 문화적인 후진성, 관습의 차이, 통치기술의 미숙(未熟)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국을 정복한 유목왕조들은 중국에 동화(同化)되거나, 동화를 두려워한 나머지 이중 지배구조를 채택하는 것이 상례(常例)로 되었습니다.

몽고가 동서양에 걸친 정복사업을 수행할 때도, 그들이 눈독을 들인 것은 유목초원지대로서 농경사회에 대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초원지대를 장악한 몽고가 다시 농경사회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이곳의 풍부한 경제력이 대단한 매력을 주었고, 자신들의 군사력으로 농경민들을 쉽게 정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복의 목표가 된 것이 중국을 비롯해서 한반도와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가 다시 포함되었습니다.

몽고제국 내부의 사정도 문제가 대단히 많았는데, 후계자를 미리 정하지 않는 유목사회의 관습은 절대권력자가 죽고 나면 그 후계문제가 항상 시끄럽게 됩니다. 이것은 이미 오고타이칸의 즉위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그의 만년(晩年)에 이르러서는 더욱 노골화되어, 안으로는 일족(一族)내의 권력장악을 위한 항쟁으로 모든 기강은 흔들리고 중앙정부의 통치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속령(屬領)통치는 무정부적인 상태를 가져오고 지방에 웅거하는 지방 분권 세력이 나타나 통일제국의 형성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칭기즈칸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 주치는 서아시아 원정에 공을 세웠으나 부친 칭기즈칸 보다 먼저 죽었고, 둘째 차가타이는 칸의 지위를 동생에게 양보하고 일리강을 중심으로 막영(幕營)생활을 하면서 유목생활의 전통을 지켰으며, 셋째 오고타이가 칸을 계승하여 정복사업을 계속하였고, 막내인 툴루이(Tului / 1192~1232)는 1227년 칭기즈칸의 사후 몽골 본토와 대부분의 군대를 통솔하며 섭정으로서 국정을 도맡았고, 1229년의 쿠릴타이(집회)에서 형인 오고타이를 제2대 칸으로 추대 하였습니다.

툴루이는 그후 금나라에 재침입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나, 1232년 본토로 귀국하는 도중 병사하였는데, 그에게는 케레이트족 출신의 부인 소르칵타니와의 사이에 몽케(망구)·쿠빌라이·훌라구(푸라그)·아리크부가 등 훌륭한 네 아들을 두었습니다. 몽고는 말자(末子)상속의 유풍이 있었기 때문에 칭기즈칸의 사후, 막내 툴루이가 칸을 계승해야 했으나, 현실을 직시한 툴루이 가(家)에서는 은인자중(隱忍自重), 세력이 큰 제 3자 오고타이에게 칸을 양보하였으나, 이때부터, 오고타이가와 툴루이가 사이에는 권력의 암투가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암투는 오고타이가 죽은 후 표면에 나타나, 그의 장자 귀위크가 칸을 계승하였으나, 그의 칸 계승을 반대한 집안의 어른 바투(칭기즈칸의 맏 손자)와 일전을 각오하고, 바투가 지배하고 있던 남러시아에 자리잡은 킵차크한국을 정벌하기 위해서 서정(西征)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고, 이 후 칸의 계승은 툴루이가에서 계승하여 4대 칸이 된 것이 몽케였습니다.

그는 동생 쿠빌라이로 하여금 중국·티베트·다리(大理)·안남(安南)을, 훌라구로 하여금 서아시아 이슬람교의 아바스왕조를 정복하게 하였고, 자신도 남송정벌을 결의하고, 쓰촨(四川)까지 진군하였으나 진중에서 병사하였습니다. 이에 형의 부보를 들은 쿠빌라이는 서둘러 남송(南宋)과 화평교섭을 체결(締結)하고 북으로 회군하다가,

수도 카라코럼으로 가지 않고 내몽고의 카이펑부(開平府)에서 소규모 쿠릴타이를 열고 칸에 올랐고 중국식 연호를 사용하여 중통(中統)이라 했습니다(1260) 이래서 다시 카라코럼에 있던 막내동생 아리크부가와 4년간의 골육상잔을 거쳐 칸의 지위를 확보하고, 인구가 조밀하고 생산력이 풍부한 중국본토를 포함한 대제국의 건설할 야심을 펼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훌라구가 서 아시아를 정복할 때, 이란 북부지방에는 이스마일(Ismailism)이라고 불리던 이슬람교단에 속한 세력권이 있었는데, 이들은 시아파(派)의 한 분파로서 7 이맘 파라고도 하며, 물라히다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물라히다가 아라비아말로 "바른 길을 잃어 버린 자"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정통이슬람에서는 이들을 이단으로 취급했으나, 막상 그들 자신들은 이스마일이라고 칭했고, 이슬람의 교의(敎義)에 매우 충실하였으며, 다만 이들이 카스피해 남쪽 엘부르즈 산맥의 산성(山城)을 중심으로 모여 살면서 광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들의 종교를 이교도(異敎徒)에게 강요하고 여기에 따르지 않으면 무조건 학살하는 등 난폭한 행동을 자행해 오고 있었습니다.

훌라구는 텐산산맥 북쪽 길을 돌아 투르크스탄에 이르러 이스마일교단의 산성을 공격했는데, 이들의 저항이 워낙 완강해서 곤욕을 치루기도 했으나, 결국 산성은 함락되고 그 두목은 몽고로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1256) 훌라구는 다시 동칼리프가 있는 아바스조의 수도 바그다드성을 포위하고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이를 함락, 500 여 년 동안 명맥을 유지해 오던 이슬람제국을 멸망시키고, 여기에 일한국을 세웠는데, 일한(일칸)은 "나라의 왕"이라는 뜻이며 이후 훌라구가계의 후계자들의 칭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몽고인 특유의 만행(?)으로 성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학살하였는데, 학살된 인원이 80만명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2) 원조(元朝)의 중국지배

(가) 원조(元朝)의 성립
쿠빌라이는 도읍을 연경(燕京/北平)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중국식으로 대원(大元)이라고 고치고, 송대의 제도문물을 원용하여 중국식으로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1271) 그러나 남송의 끈질긴 저항으로 이를 정복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은 이를 정복하고(1279) 중국을 완전히 통치하는 최초의 유목국가가 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쿠빌라이(Khubilai : 忽必烈/홀필열/1215~1294)의 제위(帝位)기간은 1260년부터 1294년까지, 35년간으로, 내몽고의 개평(開平)부를 상도(上都), 연경(燕京)을 대도(大都)라 이름하여 이 두 곳을 수도로 정하고, 이 양도(兩都)을 중심으로 하북, 산서, 산동과 내몽고 지역을 포함하여, 이곳을 복리(腹裏)라고 불러 중서성의 직할지구로 하였고,

그 밖의 지역에는 행중서성(行中書省)을 설치하고 중앙의 중서성과 동등한 권한을 부여하여 군사, 행정의 대권을 장악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영토를 확장하면 그 곳에 행중서성을 다시 설치하였는데, 이를 줄여서 행성(行省)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중서성(정동행성)은 일본 원정을 위한 임시 기구였으나, 고려의 내정 간섭기구가 됨-

이런 행정, 군사 기구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모든 행정관청에 행정장관과 나란히 몽고인이나 색목인으로 임명된 다루가치(達魯花赤)라는 일종의 행정감독관이 있어서, 중국인 관료들이 결재(決裁)하는 서류에 같이 결재를 하여, 이들을 일일이 감시하였고, 모든 행정에 간섭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나) 쿠빌라이의 재정(財政) 정책(政策)
교초(交초)라는 이름의 지폐를 들어 본적 있지요. 이것은 중국 금(金)·원(元)나라에서 발행하여 사용하던 지폐(紙幣)를 말합니다. 지폐가 유통되었다는 것은 경제규모가 그만큼 컷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쿠빌라이가 중국을 지배하고 특히 남송을 정복한 후에는 그 방대한 경제규모를, 경제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담당할 수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였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겠지요. 더구나 남송 정벌을 위시한 그의 대외 정복은 막대한 군사비의 지출을 초래하였고, 군사비의 지출은 적자재정을 몰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경제에 식견이 높은 이슬람상인 출신인 아흐마드(阿合馬)를 등용하여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난국 타개를 시도(試圖) 하였습니다.

당시 재정수입의 골격은 상세(商稅)를 비롯한 전매수입으로서의 염세(鹽稅) 등이 였는데, 몽고가 국호를 원이라고 칭하기 전해인 1270년의 재정상태가, 모든 것을 합해서 10만 정(鋌) 내외였던 것이, 2차 일본원정을 실패로 끝낸 1285년 경에는 무려 270만 정으로, 20배 이상이 되었으나, 반면에 지출도 팽창, 지출이 100만정 이상의 수입을 초과하여 적자(赤字) 재정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재정적자의 가장 큰 원인은 일본원정을 비롯한 대외 정복사업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쿠빌라이는 다시 상인과 위구르 출신들을 등용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습니다.

상인 출신의 노세영(盧世榮)과 위구르 출신의 셍가(桑哥) 등이 등용되어 추진한 재정확보책은 종래의 미봉책(彌縫策)에서 벗어나, 전매(專賣)와 관업(官業)을 확충, 이를 통해서 수입을 얻고자 했는데, 생산시설을 늘리거나 외국과의 통상을 통해서 활발한 교역을 유도한 것은 아니 였으나, 이로 인한 국내 산업의 개발과 수공업 생산의 발전은 사회대중의 구매력(購買力)을 증대 시키고, 경제적으로 활기를 띠게 하여 국가의 경제에도 고도의 성장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경제규모의 팽창은 통화(通貨)의 공급이 필수적으로 따라야 되겠지요. 통화란 유통화폐를 총칭하는 말로서, 흔히들 총통화, 통화 등으로 현대에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통화라고 할 때, 현금과 요구불 예금이 여기에 포함되고, 다시 여기에 저축성 예금(정기예금)을 포함하면 총통화라고 합니다. 현대국가에서는 그 발권과 관리를 중앙은행에서 담당하고,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데, 돈이 흔하다고 하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물가가 오른다는 뜻이고, 돈이 귀하다고 하면 물가는 안정되나 경제가 위축되는 불경기를 의미합니다.

이래서 돈이라는 것은 국가든 개인이든 말도 많고 탈도 많습니다. 쿠빌라이 시대의 원나라도 교초라는 지폐(紙幣)를 발행하고, 중통교초 2관문을 은 1냥과 같은 가치로 하여 이를 유통시켰는데, 각지에 평준고를 설치하여 지폐를 은(銀)과 바꾸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여 신용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10문에서 2관문에 이르기 까지 9등급으로 세분하여 발행하였으므로, 소액 사용이 가능하여 일상생활에서 물자를 구입하는데 불편함이 없었기 때문에 전역에 걸쳐서 유통되었고, 유통화폐로서의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송을 지배한 후 경제력을 더욱 높아지고, 교역이 활발해 짐에 따라 교초의 발행도 늘려야 했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태환에 필요한 은(銀)의 부족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쿠빌라이의 해외정복에 따르는 비용 조달은 교초를 남발하게 되고, 이래서 교초는 불환지폐(不換紙幣)가 되어 물가앙등과 가치 폭락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원의 조정에서는 화폐개혁을 단행, 지원교초라는 새로운 지폐를 발행(1287)하여 폭락한 중통교초와 교환하게 하여, 통화위기를 모면하였는데, 이는 인물본위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한 쿠빌라이의 탁월한 정치 수완으로서, 그가 도덕적인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후세에 세첸칸(賢主)으로도 불리게 된 일면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치세기간에 한정된 것이었고, 이후 궁중의 사치를 교초의 남발로 충당하면서, 원은 쇠망을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지폐(紙幣)를 실질가치가 있는 귀금속(주로 금과 은)과 바꿀 수 있는 것을 태환(兌換)지폐라고 합니다. 세종대왕이 새겨져 있는 만원 권 지폐를 가지고 한국은행에 가면, 만원에 상당한 금이나 은으로 바꿔 준다는 것인데,... 이를 본위화폐제도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계공황(1929) 이전 까지는 가능한 것이었고, 지금은 어느 나라에서도 개인이 중앙은행에 가서 금이나 은으로 교환해 달라고 해도 바꿔주지 않습니다.

이런 지폐를 태환권이 없다 해서 불환지폐라고도 하고 법으로 강제 통용시킨다고 해서 법화(法貨)라고도 합니다. 그 국가가 망하면 지폐라는 것은 휴지보다 못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법화가 국내에서는 물론 국제간에도 통용되는 것은 국가의 신용입니다. 미국의 달러화가 강세라는 것은 미국의 국가적인 신용이 높다는 것이고, 미국의 달러에 대한 원화의 환율이 오른다는 것은 한국의 상품가치를 비롯해서 국가적인 신인(信認)도가 낮다는 것을 1차적으로 의미합니다.

거기에 부채는 누증되고, 유동성이 부족하면, 부도(不渡)가 발생하는데, 이를 막기 위해서 기업은 국가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거나, 채권자와 화의신청을 하고, 국가라면 국제통화기금(IMF)에 필요한 자금을 빌려줄 것을 요청, 위기를 모면하는데 이를 IMF 사태라고 우리들은 말 합니다. 경제라는 것은 힘이나 이론만으로는 안되는 것 같습니다. 부자가 되겠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경제를 경제논리로 풀어서, 수요(需要)를 확대하고 공급(供給)을 늘리면 간단한데, 그렇게 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겠지요.

(3) 문벌 지상주의

과거(科擧)가 송대 이후 중국 관료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 제도였으나, 원대에 이르러 이제도가 폐지되고, 고대의 관리임용방법인 세습(世襲), 은음(恩蔭), 추거(推擧), 이원출신(吏員出身) 등의 제도로 복귀하였습니다. 개인의 능력이나 인물 본위의 인재 등용에서 문벌중심으로 관리 선발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씨족적 사회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봉건적, 혈통적 사회 질서 속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제도는 결국 문벌사회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겠지요.

소수의 몽고인이 다수의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을 관리로 임용할 수밖에 없었던 내부의 사정이 이렇게 만들었다고는 하나, 이러한 전통주의에 따르는 인재등용 방법은 일반 서민에게까지 적용되어 일반 민중을 군호(軍戶), 민호(民戶), 참호(站戶), 장호(匠戶)로 대별하고, 각기 세습화된 직능과 신분을 부여하였습니다. 군호와 참호는 군역(軍役)과 역전(驛傳)을 맡아보는 세습화된 특수 임무를 가지고 있어서 일반 민호와는 사회적 위치도 달랐습니다.

이들 군호와 참호에게는 1명이 군역에 종사하면 400 무(畝/묘)에 해당하는 전세(田稅)를 면제해 주었는데, 이것은 1 묘에 한 말의 과세를 부과한다고 가정할 때 40석을 면세 받는 계산이 되고, 이런 혜택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고, 몽고제국 창건 당시부터 국가에 공헌한 가문의 출신자 가운데서 과거(過去)의 공적을 참작하여 국가가 선출해서 고정화 시키고, 국가의 배려에 의하여 그 직분을 세습적으로 지닌 사람만이 가지고 있던 특혜였습니다.

과거제도의 폐지는 많은 중국 지식인들의 불만을 초래하였고, 이들을 무마하기 위해서 한 때 부활한 적도 있었으나, 그것은 형식에 불과하였고, 피 지배 신분의 사회적 분업에 대하여도 국가가 세심한 배려를 기울려 세습화하고 고정화시킨 데서 문벌과 전통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원 왕조의 현실적인 여건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오래 지탱할 수 없는 한계를 스스로 안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인종(人種) 분리주의

소수의 몽고인들이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우수한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서 채택한 것은 몽고인 제일주의였고,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처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군사나 행정에서 요직을 몽고인이 차지하였으나, 그 방대한 조직을 무식한 몽고인들 만으로 채우기에는 역 부족이 였기 때문에 협력자를 얻어야 했는데, 종래의 유목 정복왕조들이 택한 중국 지식인 등용대신에 색목인(色目人)들은 그들의 파트너로 선정하여 지배층을 형성하였습니다.

색목인(色目人)이란 눈이 푸르거나 노랗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고, 보기에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여러 종족이 섞여서 복잡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투르크계 제족과 이란계 민족들이 대부분이 였는데, 몽고인들이 중국본토를 점령하기 이전부터 이들과 교섭하고 있었으며, 중국과는 이질적인 문화전통속에서 성장하여, 인정이나 안면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한인(漢人)과 남인(南人)이라고 불렀던 중국인들을 통치하는데 전혀 부담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 색목인 중에는 관리로 임용되는 자, 중국문화를 흡수하여 학예에 종사하는 자, 무역 상인으로 활약하는 자들이 많이 나왔고, 특히 투르크계의 위구르인들은 정상(政商)으로 중용되어 왕공(王公)들의 자본으로 고리대금에 종사했는가 하면, 티베트의 승려는 라마교를 궁정에까지 끌어들여 권력의 보호 아래, 중국의 불교를 탄압하는 등 횡포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들은 자기들의 고유문자, 언어, 혼인과 장례의 풍습 등의 사용을 원의 조정으로부터 허락받았고, 재판에서도 그들만이 따로 행할 수 있는 등 각가지 특혜가 주어져, 원(元)왕조 각 분야에 공헌(貢獻)하여 이름을 남긴 자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한인(漢人)으로 취급된 제 3의 신분은 금나라에 치하에 있던 화북인, 그리고 거란인, 여진인, 고려인, 발해인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금국치하의 중국인과 남송치하의 중국인을 신분적으로 갈라놓아, 이간책(離間策)을 도모한 것은 정책적 수단이 였고, 거란인과 여진인 중에도, 몽고에 협력했거나, 중국화하지 않고 순수한 유목사회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부류는 그들과 같은 몽고인으로 취급해 주었으며, 중국에 동화되었거나 중국화한 나머지는 계급을 낮추어 이들과 갈라놓음으로서, 이들간의 민족적 단결을 막고자 했습니다.

최하위층에 있던 남인(南人)들은 남송이 멸망할 때 까지 그 치하에 남아있던 사람들로서, 이들을 만자(蠻子)라고 부르기도 하여 홀대(忽待)하고, 생산에만 종사하게 하였으며, 무거운 공부(貢賦)의 의무를 지웠는데, 금국 치하에 있던 한인(漢人)이라고 할지라도 국가관료로 임용될 수 없었으며, 주(州)나 현(縣)의 관리로 임용되는 것이 고작이 였습니다.

원 왕조가 중국인들에게 이렇게 혹독하리만치 억압과 제약을 가하여, 엄중한 감시와 경계(警戒)를 했던 것은, 몽고 이전에 중국본토에 무력으로 정복왕조를 세웠던 어떤 이민족도 궁극에 가서는 중국 문화에 동화되고 자주성을 상실하여, 중국민족에게 다시 정권을 넘겼던 역사의 교훈을 통감했기 때문입니다.

세조쿠빌라이를 비롯해서 모두 11대를 이어온 원나라 역대 군주 가운데, 단 한명도 중국어와 한문자에 통한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모든 칙령(勅令)을 비롯한 중요한 공문서에 몽고어와 몽고문자로 표현하고 기록하였다는 사실은 이들이 얼마나 중국문화의 동화력을 경계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5) 라마교와 파스파문자

세계를 정복한 몽고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늘로부터 뜻과 명령을 부여받은 민족이라는 긍지와 자만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삭막한 초원 사막 지대에서 찌들은 유목생활로 연명에 급급했다는 사실은 숨길 수도 속일 수도 없는 일이었고, 따라서 문자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었고, 중요한 문서는 시리아문자를 모방한 위구르문자를 사용하다가, 그와 비슷한 문자를 만들어 몽고어를 표기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몽고문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세계의 제패(制覇)라는 위업(?)을 달성하자 문자에 대한 욕구도 생겨나게 되어 이른바 파스파문자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파스파(1235~1280)는 라마교의 고승으로서, 파크파라고 하기도 하고, 바쓰바(八思巴)라 음역(音譯)하기도 하는데, 1253년 쿠빌라이가 티베트를 정복했을 때, 그의 설교에 감동한 나머지 그를 데리고 왔고, 쿠빌라이가 칸으로 즉위한 이후 국사(國師)가 되어 전 티베트의 통치권을 위임받았으며, 쿠빌라이의 명을 받고 파스파 문자를 창안, 1269년에 완성하여 이듬해 공용문자로 정식 채용·공포하였습니다.

파스파문자가 티베트 문자를 개혁한 것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며, 세로쓰기용으로 된 모가 난 글자라고 하는데, 황제의 조칙(詔勅)이나 중요한 공문서에는 반드시 파스파문자를 몽고 공용문자로 규정하고 이것을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파스파문자가 쓰기가 불편했기 때문에 보급이 잘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하나의 행정문자의 구실을 담당했을 뿐, 상용문자로 일반화된 것은 위구르문자에서 변형된 몽고문자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원나라에서는 한문자, 아라비아문자 등 각국의 문자도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라마교(Lamaism)란 티베트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한 불교로서, 7세기경 당나라와 네팔의 불교가 들어와, 주술을 중시하는 티베트의 고유신앙인 본교(bon敎)와 혼합되어 토착화되었는데, 그 후 8세기 중엽, 인도로부터 밀교(密敎)가 들어와 이후 티베트 불교의 근본은 밀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1세기에 반야중관(般若中觀)사상을 기초로 하여 이를 밀교와 융화시킴으로써 티베트 불교의 기초가 확립되었고, 그 후 티베트인들의 관음(觀音) 정토(淨土)사상과 결합되어, 그 통치자인 다라이라마를 관음(觀音)의 화신으로 생각하고 따르게 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의 14대 다라이라마는 중국 지배에 항거하고, 1959년 측근들과 함께 인도로 탈출하여 망명 정권을 이루고 있으며, 얼마 전 한국 방문 문제로 중국과의 외교적인 마찰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원나라에서는 어느 유목사회와 마찬가지로 주술적인 미신이 강하여, 모든 종교에 대해서 매우 관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라마교가 각종 궁중의식에 적용됨으로서 국교화하였고 전몽고인 사이에 널리 퍼졌습니다. 라마교에 대한 국가적 우대는 "라마승을 때리는 자는 그 손을 자르고, 욕을 하는 자는 그 혀를 자른다"는 법령까지 만들게 되자, 라마승들은 이를 이용하여 불교를 박해하고, 사원 건립과 불사(佛事)에 과대한 비용을 지출하는 등 그 부작용 또한 심각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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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재클럽(Y-Club)
글쓴이 : 拈華微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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