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

[스크랩] 26-2 몽골 제국의 성립과 발전(2)- 오고타이와 고려침입

똥하 2009. 4. 19. 18:23

나. 몽고 제국의 발전

(1) 오고타이 칸(Ogadai/ 와활태 / 태종/ 1229~1241)

칭기즈칸이 사망하자 몽고 고래의 유풍에 따라 막내인 투루이가 감국(監國)이 되어 몽고제국을 섭정해 왔는데, 케롤렌 강가에서 그의 유언에 따른다고 하여 제 3자 오고타이가 쿠릴타이에서 칸으로 추대(1229). 다시 대칸이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40세, 그는 성격이 관대·온후하고 왕자로서의 인품을 갖추었다고 하며 거란인 야율초재(耶律楚材)와 위구르인 전진해(田鎭海) 등을 등용하여 중앙정부의 정치기구를 정비하는 동시에, 속령(屬領)에 대해서는 다루가치(達魯花赤)를 파견하여 통치체제를 확립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오르콘강변에 수도 카라코룸성(城)을 건설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제국 내의 교통망을 완비하였으며, 칸이 된 기념(?)으로 칭기즈칸의 정복사업을 계승, 이란·남러시아, 금(金)나라, 남송, 고려, 유럽 및 인도 방면의 정복계획을 수립하고 그 실천에 착수하였다.

몽골의 1차적인 목표는 그들의 최대의 적인 여진족의 금나라를 정복하는 것이고 금나라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금과의 동맹관계 및 배후세력인 고려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1231년 몽골의 사신 저고여의 피살(1225년)사건을 빌미로 고려에 침공, 최씨무신정권을 굴복시키고 그들의 배후세력을 제거한 후 1234년에는 고립무원의 금나라에 침공, 그 수도를 함락시키고 채주성(蔡州城 : 河南省 汝南縣)을 격파하여 몽고족의 오랜 꿈이었던 회수 이북의 광대한 중국 영토를 확보하였다.

당시의 고려는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 되어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이후 30여년간 8차례의 침략을 받았고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 사정을 다음 장에서 좀더 상세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동방을 평정한 몽골의 다음 목표는 서아시아. 1236년 오고타이는 큰형 주치의 아들 바투(拔都)를 총사령관으로 수브타이를 부사령관으로 임명, 대규모의 서방원정군을 파견, 바투의 몽골 군대는 동러시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블라디미르 대공 유리 2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삽시간에 리아잔을 함락시키고, 아직은 지방 소도시에 불과했던 모스크바를 쉽게 점령, 다시 키에프를 공격하여 이를 폐허로 만들었다(1240)

바투는 차카타이의 아들 바이달에게 별군(別軍)을 주어 헝가리에 앞서 폴란드를 침입하게 하였고, 폴란드를 함락한 후에는 당시 독일의 영토였던 실레지엔을 공격, 실레지엔의 왕 하인리히 2세는 몸소 3만의 군대를 이끌고 폴란드 및 독일 제후의 연합군과 함께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니그니츠교외에서 몽고 군에게 참패하여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1241). 이 전투를 "발시타르의 싸움"이라 하고 이 싸움에서 몽고 군은 죽은 적군의 귀를 잘라 9개의 큰 포대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한편 헝가리에 진격한 바투의 군대는 폴란드로부터 개선한 바이달의 별군과 합세, 수도 부다페스트를 함락시키고, 오스트리아로 진격을 개시, 이때 본국에서 오고타이 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투의 군대는 일단 서정(西征)을 멈추고 다음 칸을 뽑는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해 귀환 길에 올랐다. 이래서 천만다행으로 유럽은 몽고의 말발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당시의 유럽, 특히 독일은 황제와 교황간의 수위권 다툼으로 틈이 벌어져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고 중 무장한 유럽의 기사들이 몽고의 경기병(輕騎兵)을 당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 만약 몽고군이 계속 서진 하여 프랑스까지 갔다면, 노르만족 이상의 약탈과 살육의 큰 잔치(?)가 다시 벌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고타이의 죽음이 이런 환란(患亂)을 막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몽고군의 잔인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유럽인 들은 아시아를 공포의 대상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귀환 길에 오른 바투는 남 러시아의 평원에 도착했을 때, 투루이의 장남 망구에게 모종의 밀계(密計)를 주어 먼저 본국으로 보내고, 정권 변동에 따른 사태의 추이를 예의(銳意) 주시하던 중, 본국에서 이미 칸이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볼가강 하류에서 가까운 사라이에 자리를 잡아 러시아 제후들을 다스리며 이 지역을 통치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킵차크한국이다.

그 영토는 원래 투르크계의 유목민 킵차크족들의 것이기에 이곳을 킵차크한국(칸국)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칸은 황금색 천막에 살고 있어서 금장국(金帳國)이라고도 하였다. 이 후 몽고의 러시아 지배는 약 200 여 년 간 계속되었다.

(2) 몽고의 고려 침입

고려가 몽고와 악연(惡緣)을 맺게 된 최초의 동기는 칭기즈칸이 부족을 통합하고, 금 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을 토벌 한데서부터 시작한다.

여진족이 세운 금 나라가 내부 분열로 국력이 쇠약해 지자 중국의 동북 지방에 있던 거란족이 다투어 독립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고, 칭기즈칸은 그의 조부 때부터 원수가 진 이 거란족을 토벌하고, 가마솥에 삶아 죽이는 등 잔인하게 살륙을 서슴없이 자행했다.

거란족의 한 무리가 이 무서운 몽고족을 피해서 동쪽으로 도망하다가 결국은 한반도의 북부까지 들어 왔고, 1216년 거란유민이 영삭진(寧朔鎭)˙정계진(定戒鎭)에 침입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황주를 침공하였다.

다시 1217년 고려는 거란 병에게 대패, 그러나 1218년 거란 병이 재침 하자 조충 등이 거란병을 강동성(江東城)으로 패주시켰다.

이듬해 고려는 조충과 김취려를 보내어 이들을 토벌하고 있었는데, 한편 당시 두만강 유역에는 금의 장군 포선만노가 독립정권을 세워 동진이라 부르고 있었다. 이에 몽고는 고려, 동진과 연합하여 강동성에 웅거하고 있던 거란족을 섬멸하고 고려와 외교관계를 수립, 거란을 응징해준 대가로 조공을 요구하였다(1219) 고려는 마지못해 이에 응하고 한편으로는 여러 곳에 성을 쌓아 몽고에 대비하였다.

그 후 몽고 사신 저고여(차고여 / 札古與) 피살사건(著古與被殺事件)이라는게 발생하였는데, 저고여는 1221년과 1224년 두 차례에 걸쳐 몽고의 사신으로 고려에 파견되었고, 한편, 동진의 포선만노는 칭기즈칸이 서역원정으로 정신없는 틈을 이용, 이를 호기로 삼아 몽고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고려에 무역을 하자고 요청해 왔다.

이에 난처한 입장에 선 고려는 일단 몽고와 동진 두 나라와 통교를 계속하며 정세를 관망, 1224년 11월 공물을 요구하러 온 저고여가 1225년 정월 함신진(咸新鎭 / 함신진 / 의주)을 거쳐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압록강가에서 피살된 사건이 일어났다. 그 무렵 금(金)나라와 동진은 고려와 몽고를 이간할 목적으로 고려를 침범할 때 몽고복장을 하여 몽고의 소행으로 가장하고, 몽고 사신이 고려에 들어올 때는 고려의 복장을 하여 습격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는 이 사건이 금 나라 도둑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으나, 몽고는 고려와 국교를 단절하고 이 사건을 고려 침입의 구실로 삼게 되었다. 이로써 동진과의 관계도 악화되어 1228년 동진(東眞)은 정주(定州)와 장주(長州)에 침입하였으나 이를 물리쳤다.

오고타이가 칸이 되고, 1231년(고려 고종 18) 몽장 살리타(Salieta i/ 撒禮塔 / 살례탑 / ? ~ 1232)가 이를 고려인에게 살해된 것으로 의심하고, 함신진(咸新鎭)을 넘어 공격해 왔으나 구주(龜州)에서 박서(朴犀)에게 패하였다가, 다시 군대를 정비하여 개경 성의문(省義門) 밖까지 침공해 왔으므로 고려에서는 살리타가 있는 안북부(安北府:安州郡)까지 사신을 보내어 강화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듬해에 살리타는 다루가치(darughachi / 達魯花赤 / 달로화적) 72명을 남겨 두고 일단 돌아갔다. 이 때 고려는 무신 정변(1170) 이래 국정이 매우 혼란하였는데, 최충헌이 등장하여 사방에서 일고 있던 반란을 과감히 진압하고, 최씨무신정권을 수립하였으며, 그의 아들 최우가 교정도감이 되어 집권하고 있었다.

최우는 몽고가 다루가치를 파견하자, 정권에 불안을 느꼈고, 몽고의 요구가 지나치게 과다하였으며, 반 최씨 세력을 견제할 목적도 있고 해서 도읍을 강화도(江華島)로 옮기고, 다루가치를 철수시키는 등 반몽 태세를 갖추자 다시 살리타가 고려에 침입하였다(1232) 이 후 몽고의 침입을 연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231년 제1차 몽골군 침입. 살리타[撒禮塔]를 원수로 삼아 평주(平州)를 치고 개경에 육박.
1232년 강화도(江華島) 천도.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축출. 몽골군 살리타 2차 침입. 김윤후(金允侯)가 지휘하는 부곡민이 처인성(處仁城)에서 항전. 살리타를 사살.
1235년 몽골군 당올대 3차 침입, 용강(龍岡), 삼등(三登), 용진진(龍津鎭), 동주성(洞州城) 등을 함락, 동경(東京/경주)까지 침입. 야별초군(夜別抄軍)이 지평(砥平)에서 몽골군 격파.
1236년 개천(价川), 죽주(竹州)에서 몽골군을 크게 격파. 강도(江都)에서 대장경의 재조(再雕) 시작(고려대장경/ 8만대장경).
1238년 동경의 황룡사9층목탑, 황룡사장륙상(皇龍寺丈六像)이 불탐. 조현습(趙玄習) 등이 몽골에 투항, 홍복원의 지휘를 받음.
1239년 몽골군 철수. 몽골 사신이 와서 왕의 친조(親朝)를 조유(詔諭).
1241년 족자(族子) 영녕공(永寧公)을 왕자(王子)라 칭하고 몽골에 보내어 볼모[禿魯花]로 삼음.
1247년 아모간(阿母侃)이 지휘, 제4차 몽골군 침입.1249년 몽골, 고려왕의 출륙친조(出陸親朝)를 강요. 별초군, 동계(東界)에 침입한 동진군을 격파. 최우 죽고, 최항(崔沆)이 정권 장악.
1253년 야굴(也窟)의 몽골군이 제5차 침입. 고종 출륙하여 승천(昇天) 신궐(新闕)에서 야굴의 사자와 회견.
1254년 차라대(車羅大) 제6차 몽골군 침입.
1255년 차라대 제7차 몽골군 침입
1256년 수군을 남하시켜 몽골군을 막게 함. 몽골의 차라대(車羅大), 고려왕자의 몽골방문 요청.
차라대 철군.
1257년 최항 죽고, 최의(崔誼) 집권. 차라대의 제8차 몽골군 침입.
1258년 최씨무신정권 붕괴. 충주의 별초군이 박달령서 몽골군 격퇴.
1259년 성주 기알성의 야별초군과 주민 몽골군 대파. 한계성(寒溪城)에서 몽골군 격멸. 고종 죽고(1192~), 태자 전 몽골로 감.
1261년 몽골, 요양(遼陽)의 고성(故城) 수리,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摠管府)를 둠. 동서학당(東西學堂)교역장 설치.
1269년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을 세웠으나 반년 만에 원종이 복위.
1270년 강화에서 환도. 삼별초군(三別抄軍)의 항몽전(抗蒙戰). 삼별초군의 해산명령에 배중손(裵仲孫) 등이 항쟁 시작.


1271년 삼별초군, 합포(合浦)˙동래(東萊)를 공격, 금주(金州)를 점령. 세자 심(諶)을 몽골에 보냄.
1272년 세자 심이 변발(辨髮)과 호복(胡服)으로 돌아옴.
1273년 김방경(金方慶)이 원군(元軍)과 함께 탐라의 삼별초군을 공략. 탐라에 다루가치총관부(達魯花赤摠管府)를 둠.
1274 세자 심(39세) 쿠빌라이 딸(홀도로게리미실 공주,16세)와 결혼,이후 5명의 왕(충렬왕, 충선왕,충숙왕,충혜왕,공민왕)이 원제실의 부마가 됨.몽고 풍습(호복,변발,융복) 유행함. 설렁탕, 소주, 포도주, 상화 들어옴. 결혼도감제정으로 조혼 풍습 시작됨
1274년 원(元)이 전함 300척을 만들게 함. 제1차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 일본정벌 실패.


1278년 충렬왕, 원의 관리와 원군의 철수 및 고려인 송환을 요구.
1280년 일본 정벌을 위해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둠.
1281년 제2차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실패.
1291년 원의 군대와 함께 합단군을 연기(燕岐)에서 격파. 상서성(尙書省) 폐지, 다시 중서성(中書省)을 둠.
1292년 개경으로 환도.
1294년 원나라 세조(世祖) 죽고, 동방정벌 중지. 탐라에서 원나라 철수.
1295년 탐라를 제주(濟州)로 고침.
1298년 충렬왕 태상왕(太上王)이 되고, 충선왕(忠宣王) 즉위.
1308년 원이 충선왕을 심양왕(瀋陽王)에 봉함. 충렬왕 죽고(1236~), 충선왕 다시 복위. 서운관(書雲觀) 창설.
1310년 원에서 충선왕을 심왕(瀋王)에 봉함.
1313년 충선왕, 충숙왕에게 전위(傳位), 조카 연안군(延安君) 호를 심양왕(충선왕)의 세자로 함.
1316년 상왕(上王), 심왕의 위(位)를 세자 호에게 전하고 태위왕(太尉王)이라 칭함.
1320년 정방(政房)을 다시 설치, 관리임명을 담당. 원, 상왕 충선왕을 토번(吐蕃)으로 귀양 보냄.
1325년 상왕 충선왕 원에서 죽음(1275~).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리.
1332년 상왕 충숙왕 복위하고, 충혜왕은 원나라로 감.
1340년 충혜왕 복위. 원나라의 문제, 고려인 기씨(奇氏)를 제3황후에 봉함.
1343년 원, 충혜왕을 게양(揭陽)에 귀양.
1344년 충혜왕 악양(岳陽)에서 죽고(1315~) ,충목왕(忠穆王) 원나라에서 즉위(~1348). 숭문관(崇文館) 설치.
1352년 충정왕 강화에서 죽음(1337~). 변발(辨髮)을 금지. 안흥˙서산˙강화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
1356년 원나라 연호 사용을 중지. 쌍성총관부 회복.
1359년 홍건적(紅巾賊)의 제1차 침입. 4만여명이 압록강을 건너, 서경 함락.
1360년 각군 홍건적 무찌르고 서경수복. 강화에 왜구 침입.
1361년 홍건적 10만으로 제2차 침입. 개경 함락, 공민왕 복주(福州)로 파천. 이성계(李成桂), 홍건적을 대파.
1363년 문익점(文益漸), 원나라에서 목화씨 가지고 옴.
1366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 신돈(辛旽)을 판사(判事)로 함.
1369년 이성계를 보내 동녕부 공격, 원(元)나라와 절교.
1370년 명나라의 연호 사용.
1374년 공민왕 피살되고(1330~), 우왕(禑王) 즉위(~1389).
1377년 최무선(崔茂宣), 화통도감 설치.
1378년 최영, 이성계, 왜구를 승천부(昇天府)에서 대파.
1387년 왜구를 막기 위해 기선군(騎船軍)을 편성.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 이성계, 우왕을 폐하고 창왕(昌王)을 세움.
1389년 박위, 대마도(對馬島) 정벌. 왜선 300여 척 격파. 창왕 폐위되고 공양왕(恭讓王) 즉위.
1391년 이성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군사통수권을 장악.
1392년 정몽주 피살. 이성계 즉위. 문무백관의 제도 제정.
1393년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결정. 식년문과(式年文科) 실시(33인 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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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재클럽(Y-Club)
글쓴이 : 拈華微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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