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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세출의 장사꾼 이야기... 여불위(呂不韋) / 墨湖

똥하 2009. 4. 12. 00:10

 

 

 

여불위(呂不韋) - 불세출의 장사꾼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약 2300 년전 중국 천하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770~221)의 후반기에 해당하는 전국시대였다.   전국칠웅(七雄)이라 불리는 진(秦) 초(楚) 연(燕) 제(齊) 한(韓) 위(衛) 조(趙)의 7개 나라가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그중 지리 문화적으로 중심지에 있던 한(韓), 조(趙) 등은 국력이 약해서 서쪽의 강대국 진(秦)나라로부터 자주 침략당하고 있었다. 

 

  그때 한(韓)나라 출신의 여불위(呂不韋)라는 큰 장사꾼(豪商)이 있었다.  국가간 전쟁이 잦은 혼란한 시절에는 물건 값이 지역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기 마련인데, 그는 이들 여러 나라를 왕래하며 물건을 사고파는 재주가 비상해서 거부(巨富)가 되었으며, 당시 중심지였던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에 큰 저택을 마련해 놓고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살고 있는 한단(邯鄲)에 진(秦)나라 소왕(昭王)의 손자인 자초(子楚)라는 사람이 인질로 와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초(子楚)는 소왕(昭王)의 태자 안국군(安國君)의 서자(庶子, 얼자:孽子)였다.  안국군은 첩이 많아서 아들만도 20 명이 넘는다고 했다.

 

   자초(子楚)는 안국군의 첩 하희(夏姬)의 아들인데, 당시 안국군은 젊고 예쁜 화양부인(華陽夫人)만 사랑했고 하희(夏姬)에게는 냉담했었기 때문에 그가 조나라에 인질로 보내졌던 것이다.  그런데 진나라는 왕손인 자초(子楚)를 인질로 보내 놓고서도 자주 조나라를 침범했으므로 조나라에서는 자초(子楚)를 처형해 버리려다가 그러면 그걸 구실로 정말로 진나라 대군이 쳐들어올까 염려해서 목숨만 살려둔 채 푸대접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안국군은 56년간 진나라를 통치한 소왕(昭王)의 둘째 아들인데 원래 태자였던 큰아들이 죽었으므로 둘째인 그가 태자로 되어 장차 왕위를 물려받게 되어 있었지만, 그가 총애하는 화양부인 소생의 아들이 없어서 안국군의 세자는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을 간파한 머리회전이 빠른 장사꾼 여불위(呂不韋)가 개밥에 도토리 신세인 자초(子楚)를 잘 이용하면 크게 장사가 될 것 같아서 자초(子楚)의 거처를 찾아갔다.  소문난 장사꾼 <여불위>가 여기저기서 푸대접만 받고 있는 자기를 찾아오자 <자초>가

  “ 보다시피 이렇게 궁핍하게 살고 있는 내 집에는 당신에게 소용 될만한 물건이 없을 텐데 여긴 뭐 하러 찾아온 겁니까?” 하고 물으니, <여불위>가 하는 말,

  “ 저는 공자(公子)님의 대문을 크게 넓혀드리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자 <자초>가 이상한 사람 대하듯 약간 비웃으며

  “ 내 집 대문을 크게 한다고 당신에게 도움 될 일도 없을 테니. 돌아가서 댁의 대문이나 더 크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니까, <여불위> 가

  “ 아뇨, 저는 장사꾼이니까 이익이 없을 것 같은 짓은 하지 않습니다.  먼저 제가 공자님 대문을 크게 해 드리면 제 집에 오는 손님도 많아질 테니 나중에 제집 대문도 넓혀야겠지요.”

 

  <자초>가 다시 하는 말 :

“ 내가 고국인 진나라에서도 내팽겨지듯 푸대접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 네, 물론 모두 계산에 포함시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자초>도 <여불위> 라는 장사꾼이 뭔가 계획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를 조용한 내실로 안내해서 밀담을 나누게 되었다.

  “ 저는 우선 공자님을 태자(太子)로 책봉되게 하고자 합니다.”

<여불위> 가 그렇게 말하자, <자초> 가

  “ 당신은 역시 아무것도 모르면서 착각하는 것 같군요”

하고 일어서려고 하자  <여불위>가 제지하며, “ 좌우간 한번 들어 보시죠” 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 50년 가까이 왕으로 계신 소왕(昭王)께서는 노령이어서 언제 변고가 생길지 모릅니다.  변고가 생기면 태자인 <안국군>이 왕이 되고 곧 그의 20 여명 아들 중에서 태자를 세워야 합니다만, 공자께서는 멀리 외국에 인질로 나와 있으니까 뽑힐 가능성이 거의 없겠죠?”

 

  <자초> 가 “ 그렇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하자,  <여불위>가 다시

  “ 지금 안국군(安國君)은 오직 정실 화양부인 만을 총애하는데 화양부인에겐 아들이 없으니 적사자(嫡嗣子)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화양부인 뿐입니다.  공자께서는 가난하고 멀리 외국에 나와 있어서 함양에 있는 화양부인에게 좋게 보일 수 있도록 교제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비록 가진 게 많지는 않으나 공자님 대신 천금을 갖고 함양에 가서 화양부인을 섬기고 공자님을 양자로 삼아 태자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자초> 가  매우 고마워하며,

“ 당신 계책대로 되기만 한다면 장차 진나라를 그대와 함께 나누겠소.” 하였다.

  그리하여 <여불위>는 <자초>에게 따로 거금을 주어 천하 빈객들과 교제하도록 하고, 자신은 온갖 진귀한 물건을 갖고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가서 먼저 화양부인의 언니를 만났다. 그리고 <자초>가 비록 외국에 인질로 나가 있지만 천하의 빈객들과 어울리며 그 현명하고 덕이 있음을 인정받고 있으며, 부친인 안국군과 화양부인을 생각하며 밤낮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화양부인에게 말해 주도록 했다. 

 

   그리고 또 “ 지금은 비록 화양부인이 젊고 용색이 고와서 아들이 없어도 남편인 안국군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늙은 후엔 사랑도 식어질 것이므로 지금 여러 아들 중에서 화양부인의 양자를 삼아 태자로 책봉해서 나중에 왕이 되게 하면, 화양부인도 오래도록 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설득하게 했다. 

 

  또한 자초가 현명하고 자기가 장남도 아니고 자기 생모(夏姬)가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태자가 될 수 없다고 여기고 있는데,  만약 화양부인이 자기를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해주면 죽을 때까지 그 은혜를 못 잊을 거 아니냐고 설득하도록 했다.

 

   결국 언니가 화양부인에게 그렇게 전했고 화양부인도 그 말에 동감해서 밤에 안국군과 사랑을 나눌 때 울면서 말하기를 “ 첩이 지금은 이렇게 전하의 사랑을 받아 행복하지만, 아들이 없는 것을 생각하면 앞날이 불안해서 전하께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조나라에 인질로 있는 전하의 아들 <자초>가 생모가 아닌 저에게도 잘 해주는 등 효행이 지극하고 그 현명함이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다하니 제 양자로 삼아 전하의 대를 잇도록 해 주십시오”

 

  안국군도 사랑하는 부인의 청을 들어주어 <자초>를 화양부인의 세자로 삼고 그 내용을 옥부(玉符)에 새겨 증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여불위>를 불러서, “ 자초가 조나라에서 인망을 받고 있는 데는 그대가 후견인 역할을 잘해준 공로가 많으니, 앞으로도 자초(子楚)를 잘 도와 달라고 당부하며 많은 예물과 함께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여불위가 한단(邯鄲)으로 돌아가 조나라 대신과 천하 빈객들을 초청하여 크게 잔치를 베풀고  <자초>가 진나라의 후계자가 되었음을 알리니, <자초>의 명망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올라가게 되었다.

 


   여불위(呂不韋)는 체격도 크고 풍채도 좋아서 유명한 조나라 미녀 가운데에서도 용모와 가무 모두 첫손에 꼽는 조희(趙姬)라는 미인을 측실로 삼아 데리고 살고 있었는데, 그가 함양에 갔다가 돌아온 후 그녀가 임신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기뻐하였다.

  두뇌회전이 빠른 그는 또 다른 일을 꾀하고자 <자초> 와 빈객들을 이번에는 자기 저택으로 초대하여 축하파티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자초>가 주인 여불위에게 “듣자하니 주인장은 조나라 제일의 미녀를 측실로 두고 계시다는데, 한번 뵐 수 있는 영광을 주실 수 있습니까?” 하니까,  여불위가 “그야 어려운 일이 아니죠,  태자전하를 위해서 축하의 춤을 추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장소를 무대장치가 된 다른 방으로 옮겨 조희(趙姬)를 불러 춤추게 하였다.

 

 

  악단의 연주에 맞추어 조나라 제일의 미녀이자 가무에 능한 조희(趙姬)가 곱게 치장하고 나와서 춤을 추자 <자초>는 넋 나간 듯 쳐다보는 것이었다.  춤이 끝난 후 <자초> 가 여불위에게

  “ 나는 당신이 제일 부럽습니다. 저런 재색겸비 미인을 측실로 두고 있다니.  그에 비하면 진나라 왕의 자리 같은 것도 별거 아니라고 생각 되는군요.”

  여불위가 적당한 대꾸를 못하고 잠자코 있자, <자초>가 말을 이어서

  “ 난 저 여인을 보고 아마 미쳤나 봅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나의 은인이신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말하지 않고서는 정말 미칠 것 같네요.” 하니까 여불위가

“ 무슨 말씀인데요?  저는 공자전하의 후견인이니까 무슨 말이라도 해 주십시오.”

“ 그럼 마음먹고 말하지요.  저 부인을 저에게 양보해 주실 수 없나요?”

그러자 여불위가 안색을 바꾸는 척 하며 대답을 않고 있으니까,

 

 <자초>가 “ 당신이 화내는 것도 당연하지요. 역시 내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 여인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는데, 이를 어쩌면 좋은가? “  하며 자문자답처럼 독백하는 것이었다.  한참 후 여불위가 

  “ 정말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십니까?” 하고 되물으니  이번에는 <자초>가 잠자코 있었다. 

  “ 할 수 없군요. 저는 제가 갖고 있는 전 재산을 전하에게 맡긴 몸인데, 전하가 그토록 바라신다면 하는 수 없는 일이죠.”  <자초>가 자기 귀를 의심하듯  “ 그렇게 해주신다는 겁니까?” 하니까,

  “ 네,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조희(趙姬)를 위해서도 장차 왕이 되실 전하께서 맡아 주신다면 더 없는 영광이 될 테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다음 날 <조희>는 <자초>의 집으로 보내졌고, <조희>는 자기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자초>에게 간지 12 개월 만인 다음해 정월에 아들을 낳았다. < 자초>는 자기 아들임을 확신하고 이름을 정월과 같은 음의 <정(政)> 이라 짓고 <조희>를 정부인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8 년 후(BC 251년)에 소왕이 재위 56년만에 사망하자 안국군이 즉위하여 효문왕(孝文王)이 되었는데, 효문왕이 재위 1년도 안되어 서거해서 태자였던 <자초>가 즉위해서 장양왕(莊襄王)이 되고 부인이던 조희(趙姬)는 조왕후로 되었으며, 장양왕은 후견인이던 여불위(呂不韋)를 승상(丞相)으로 삼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해서 낙양(洛陽) 10만호를 식읍으로 삼게 했다.

 

   그 장양왕(莊襄王)도 재위 3년에 승하하자, 태자 정(政)이 13세에 즉위해서 왕이 되니 그가 후에 진시황(秦始皇)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 조 왕후는 32세에 청상과부로 태후(太后)가 되어 어린 황제의 섭정을 하게 되었다.  실권자가 된 조 태후는 승상이던 <여불위>를 상국(相國)으로 하고 황제의 작은 아버지란 뜻으로 중부(仲父)라고 높여 부르게 하니, 이전에 부부 사이였던 여불위와 조 태후가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 것이다. 

 

 

  32세 젊은 나이의 조태후는 자기를 왕비가 되게 해 준 은인이자 옛 남편인 <여불위>와 자주 사통하는 애인관계로 되어 버렸다.

  그런데 황제가 아직 어린애일 때는 별문제 없이 이들의 애인관계가 이어졌지만, 영특한 황제가 장성하게 되자 <여불위>는 이 부적절한 관계가 불안해서 내키지 않았으나, 사랑에 굶주린 태후의 청을 안 들어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급기야 자기의 식객 중 거대한 남근(男根) 소유자 노애(嫪毐)** 라는 남자를 태후에게 보내게 되었다.

 

 

** 노애(嫪毐)는 여불위의 삼천 식객 중 한명인데 그가 식객이 된 경위는 이러하다.  노애(嫪毐)가 여불위를 찾아와 식객 되기를 청하면서,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이 계명(鷄鳴) 구도(狗盜) 등 특이한 기술을 가진 식객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 일화를 거론하면서 자기도 남이 갖지 못한 기술이 있다고 하였다.  여불위가 무슨 재주가 있느냐 했더니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게 하고 바지를 벗어 내리는데 그 남근의 크기와 힘찬 모습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오동나무로 만든 문고리 모양의 기구를 자기 남근에 매달고 풍차 돌리듯 빙빙 돌리다가 공중으로 높이 쳐 올려서 다시 남근으로 받아내는 등 마치 손으로 재주부리듯 하는 것이었다.   체구와 풍채도 여불위 이상으로 좋아서  감탄하고 식객으로 맞아 들였던 것인데, 그를 써먹게 된 것이었다. **

  

   여불위는 적당한 기회에 태후에게 노애(嫪毐)라는 남자를 보게 했고, 태후도 이 남자의 <물건>에 마음을 뺏겨서 그를 후궁에 머물게 하며 자주 즐기고 싶었지만 궁궐 규칙상 방법이 없었다.  이에 계책의 달인 여불위가 또 꾀를 내서 다른 식객을 시켜서 <노애>가 궁형(宮刑 또는腐刑: 음경을 절단하는 형벌)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다고 밀고토록 하였다.  그래서 <노애>는 궁형에 처해지게 되었는데 태후가 담당 관리를 매수하여 그의 눈썹과 수염만 뽑아 환관(宦官)처럼 만들어 후궁에 입궁시키고 밤낮으로 즐기게 되었다.

 

   결국 태후가 그의 아이까지 갖게 되자 아들인 황제에게 발각될 것을 염려해서 점쟁이(卜者)와 짜고, 태후가 멀리 떠나지 않으면 큰 변고가 생길 것이라고 말하게 해서, 수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옹(雍)이란 곳의 별궁(別宮)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렇게 피신해간 태후가 노애(嫪毐)의 2번째 아이까지 낳고서는 여불위와 낳은 아들 정(政)을 왕으로 만들었듯 <노애>와 나은 아이도 왕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노애>는 태후의 총애로 가신과 식객 수천 명을 거느리는 대 세력가로 되었는데 이를 시기하는 자의 밀고로 태후와 <노애> 와의 불륜사실을 진시황이 알게 되었다.  

 

 이에 진시황이 <노애>를 잡아오려 했으나 이를 미리 안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곧 토벌되어서 그 일가 삼족이 처형되고, 가신들은 멀리 촉(蜀 : 四川)으로 이주시켰다.

  진시황이 <노애 사건>의 책임을 물어 여불위도 처형하려 했으나, 부왕인 장양왕(莊襄王)에 대한 공헌도 지대하고 진시황도 그가 생부라는 사실을 인정했는지, 상국(相國)자리에서만 물러나게 하고 그의  식읍인 낙양으로 거처를 제한하는 조치를 내렸다.

 

   그런데도 제후의 빈객들이 낙양으로 간 여불위를 만나려고 줄을 잇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진시황이 그가 변란을 일으킬까 염려해서 친서를 보내 촉(蜀:四川)으로 이주토록 하자, 여불위가 자신의 세력이 쇠잔해지고 결국 주살될 것을 염려해서 스스로 음독자살,  자기 애첩까지 왕자에게 바치며 화려하면서도 파란만장한 풍파를 일으켰던 불세출의 상인 <여불위>도 역사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E)


** 진시황이 여불위에게 보낸 서찰 내용 :

    君何功於秦 秦封君河南 食十萬戶 ?  君何親於秦 呼稱仲父 ?  其與家屬徙處蜀 !

   (그대는 진나라에 무슨 공로로 하남 10만 식읍의 귀족이 되었나? 그대는 진나라와 어떤 친분관계로 작은아버지라 불리는가?  가속과 함께 촉 지방 산골로 가서 사시오!)

 

 

  *Y-Club*

출처 : 양재클럽(Y-Club)
글쓴이 : 카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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