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

[스크랩] 52.조선왕조의 건국과정(2)

똥하 2009. 4. 11. 23:46

52. 절대왕정(2) - 조선왕조의 건국과 支配 層 간의 갈등(葛藤)

가. 역성 혁명

(1) 정몽주와 이방원

정몽주가 격살(擊殺)되는 과정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몽주가 집에(이성계의 사저에 병 문안 갔다가) 머물지 않고 곧 나오니, 전하(이방원)는 일이 성공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친히 가서 지휘하고자 하였다. 문 밖에 나오니 휘하 인사의 말이 안장을 얹은 채 밖에 있는지라, 드디어 이를 타고 달려 상왕(上王 / 정종)의 저택에 이르러 몽주가 지나갔는가, 아니 갔는가를 물으니,“지나가지 아니하였습니다.”하므로, 전하가 다시 방법과 계책을 지시하고 돌아왔다.

이때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는데, 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弔喪)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영규 등이 무기(武器)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몽주가 이르매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이날이 1392년 4월 4일 고려왕조의 마지막 기둥 정몽주(鄭夢周 / 1337 ~ 1392)가 밝은 대낮에 이방원 일당에게 피살됨으로써 사실상 고려왕조는 더 이상 지탱할 힘을 잃고 말았다. 이 때 그의 나이는 이성계 보다 두 살 적은 56세, 정몽주가 피살된 곳이 선죽교라는 이야기는 없고 동리 입구라고만 되어 있다.

대로(大路)에서 원로재상을 척살(刺殺)하고도 무사할 수 있는 세력이라면 누가 그 세력을 꺾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성계는 병석에서 정몽주를 죽였다는 이방원의 보고를 받고 몹시 화를 냈다고 한다.

정몽주는 친원과 친명으로 고려조정이 분열되었을 때, 이성계와 한패가 되어 친명외교의 주역을 담당했고, 위화도회군(1388) 후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 드디어 1390년(공양왕 2)에는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정몽주에 앞서 이성계 역시 위화도회군 후 모든 시선과 관심이 그에게로 집중되었고, 그의 말 한마디가 곧 법이었다. 경쟁자 없이 수시중(守侍中)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으며, 공양왕을 옹립하고 다시 1390년 삼사영사(三司領事), 1391년 삼군도총제사가 되어 문무 양 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과감하게 과전법(科田法)을 단행하여 원의 고려 간섭이래 성장해온 구세력(권문세족)을 일소했다.

(2) 혁명파와 온건파

이때까지는 이들 두 사람을 비롯해서, 이로 인해 혜택을 입은 많은 신진관료(사대부)들은 고려왕조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반자였던 정몽주를 죽였다는 보고를 받고 이성계도 화를 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로부터 피해를 당했던 사람들, 이를테면 우왕과 창왕의 측근, 혹은 위화도회군으로 밀려난 최영의 일파, 과전법의 시행으로 하루아침에 몰락한 조민수 등 원한을 가진 상대가 있는 한, 안주(安住)는 고사하고 잘못하면 벼랑 끝에 내 몰리게 될 위험도 늘 안고 있었다.

이런 난세에 그들을 추종하는 무리들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세상인심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줄 서기에 따라서 공신(功臣)으로 책록(冊錄) 되거나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불러 올 수도 있기 때문에 힘이 어느 쪽으로 쏠리고 있느냐에 관심이 있을 뿐, 충성이니 의리니 하는 것은 장식에 불과 하다.

이런 것이 이방원이라는 걸물(傑物)의 등장과 정몽주의 죽음으로, 갈라지는데, 분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방원을 추종하는 세력을 혁명파, 정몽주를 추종하는 세력을 온건파라 하고, 이를 그들의 출신 성분이나 학문적 견해 등에서 구별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줄 서기에 따라 명암(明暗)이 엇갈렸을 뿐, 이런 것과는 무관하다.

이렇게 해서 전세는 역전(逆轉),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은 풀려나 조선왕조 창업에 중심에 서게 되었고, 반대로 정몽주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된 이색, 우현보, 이숭인, 이종학 그리고 이들을 탄핵했던 많은 대간들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3) 이성계의 즉위

이제 남은 것은 이성계의 즉위 절차, 7월 12일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王大妃)를 핍박하여 공양왕을 폐하여, 원주(原州)로 내쫓고, 13일(임진)에 대비(大妃)가 교지를 선포하여 이성계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다.

16일(을미)에 배극렴과 조준이 정도전·김사형(金士衡)....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국새(國璽)를 받들고 이성계의 저택(邸宅)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마을의 골목에 꽉 메어 있었다.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저 입은 부상 때문에) 이천우(李天祐)를 붙잡고 겨우 침문(寢門) 밖으로 나오니 백관(百官)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萬歲)를 불렀다. 태조가 매우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하니, 극렴 등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였다.

“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은 위로는 사직(社稷)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할뿐입니다. 고려는 시조(始祖)가 건국(建國)함으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5백 년이 되었는데,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중략....

....하늘이 견책(譴責)하는 뜻을 알려서, 성상(星象)이 여러 번 변하고 요얼(妖헡)이 번갈아 일어나니, 정창군(定昌君)도 스스로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백성의 마음이 이미 떠나가서 사직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음을 물어 알고 물러나와 사제(私第)로 갔습니다.

다만 군정(軍政)과 국정(國政)의 사무는 지극히 번거롭고 지극히 중대하므로, 하루라도 통솔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마땅히 왕위에 올라서 신(神)과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이성계가 굳이 거절하면서 말하기를,“예로부터 제왕(帝王)의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德)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하면서, 마침내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부축하여 호위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함이 더욱 간절하니, 이날에 이르러 마지못하여 수창궁(壽昌宮)으로 거동하게 되었다.

백관(百官)들이 궁문(宮門)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니,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는데, 어좌(御座)를 피하고 기둥 안[楹內]에 서서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이상의 관원에게 명하여 전상(殿上)에 오르게 하고는 이르기를,

“내가 수상(首相)이 되어서도 오히려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이 일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내가 만약 몸만 건강하다면 필마(匹馬)를 타고도 적봉(賊鋒)을 피할 수 있지마는, 마침 지금은 병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卿)들은 마땅히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덕이 적은 사람을 보좌하라.” 하였다. 이에 명하여 고려 왕조의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에게 예전대로 정무(政務)를 보게 하고, 드디어 저택(邸宅)으로 돌아왔다.- 이상은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추려 본 것이다. 과연 이성계는 추종하는 세력들에 못 이겨 왕위에 올랐을까?

나. 지배층의 갈등

(1) 찬탈과 선양

새 왕조를 세운 이들이 시급히 다루어야 할 현안은 크게 세 가지, 그 첫째는 명나라에 이를 고하고 승인을 받는 이른바 고명(誥命) 인신(印信)의 절차, 두 번째가 흩어진 민심을 추스리는 일, 세 번째가 공신들의 위차(位次)를 정하는 것이었다.

아직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신없는 가운데, 7월 18일 대소 신료가 태조의 등극을 명 태조에게 알리기 위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조반(趙?)으로 하여금 명 나라 예부(禮部)에 아뢰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것은 중국이라는 너무나 큰 세력으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왕으로 행세할 수 있다는 단순 논리가 적용된다.

그리고 역성 혁명의 당위는 무엇보다도 천명(天命) 수수(收受), 선양(禪讓)과 찬탈(簒奪)은 결과적으로 같지만, 민심의 동향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생긴다. 선양의 명분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왕(王)씨 고려의 허물을 밝혀야 하는데,...여기에 일차적으로 동원된 것이 우왕(禑王)의 혈통, 다음이 공양왕의 무능,...

우왕이 공민왕과 신돈의 시녀(?) 반야(般若)와의 사이에 태어난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아명을 모니노(牟尼奴)라고 했던 그가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처형된 다음 궁중에 들어가,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고(1373), 명덕태후(明德太后 / 충숙왕의 비 남양 홍씨, 공민왕의 모후가 됨)의 명으로 궁인(宮人) 한씨(韓氏)의 소생으로 발표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열 살에 즉위하였고, 그의 생모 반야는 강물에 던져 죽음을 당하였다. 경위야 어찌 되었던 우는 별탈 없이 왕위를 계속했는데, 그를 보좌했던 이인임이 최영(崔塋)·이성계(李成桂) 등에게 밀려 경산부(京山府 / 성주)에 유배됨에 따라, 정치적 지지기반을 잃었으나, 최영이 그를 잘 보좌해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388년 6월 위화도회군 후 최영이 처형되고, 이제 그를 지켜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핍박에 못이겨 그의 아들 창(昌)에게 양위했다가, 느닷없이 왕씨의 혈통이 아니고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성계 일파의 주장에 따라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강릉(江陵)으로 옮겨져, 89년 12월 그의 아들 창왕(昌王)과 함께 이성계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이름도 王禑가 아니고 이때부터 辛禑·辛昌으로 기록되었다.

이성계는 신종의 7대손 요(瑤)를 세워(1389) 왕씨의 혈통을 잇게 했다고 하지만, 덕이 없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폐위 시켜, 원주(原州)로 추방하고,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했다가 2년 뒤에 삼척(三陟)에서 살해하였다. 그리고는 추대되는 형식을 취하면서 몇 차례 사양하는 연출을 되풀이 한 후 여유를 보이면서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런 것만으로 민심을 수습하는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은연중 동원된 것이 각종 비기(秘記)와 참설(讒說), 태조가 잠저에 있을 당시 여러 가지 개국의 조짐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금자[金尺]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주면서 말하기를,“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은 청렴하기는 하나 이미 늙었으며, 도통(都統) 최영(崔瑩)은 강직하기는 하나 조금 고지식하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룰 사람은 공(公)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어떤 사람이 문밖에 이르러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말하기를,“이것을 지리산(智異山) 바위 속에서 얻었습니다.”하는데, 그 글에,“목자(木子 / 李)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다시 삼한(三韓)의 강토를 바로잡을 것이다.”

“비의(非衣 / 裴)·주초(走肖 / 趙)·삼전 삼읍(三奠三邑 / 鄭)”등의 말이 있었다. 사람을 시켜 맞이해 들어오게 하니 이미 가버렸으므로, 이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고려의 서운관(書雲觀)에 간직한 비기(秘記)에 ‘건목득자(建木得子 / 李)’의 설(說)이 있고,...

...일찍이 상명사(相命師) 혜징(惠澄)이 사사로이 그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내가 사람들의 운명(運命)을 관찰한 것이 많았으나 이성계(李成桂)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내가 관찰한 것은 군장(君長)의 운명이니, 그가 왕씨(王氏)를 대신하여 반드시 일어나겠지!”...

7월 18일(정유)에는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가뭄 끝에 억수같이 비가 내리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는 것도 빼지 않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것은 당시의 몽매한 민심을 사로잡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천명과 결부시키는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2) 개국 공신(開國功臣) 들

1392년 8월 개국의 논공행상을 위한 공신도감을 설치하고, 1개월의 심의 끝에 공신 44명을 가려 이를 1·2·3등으로 나누어 책록하고 등급·기여도에 상응한 토지·노비를 지급하고 전각을 세워 형상을 그리게 하였으며, 비를 세워 영구히 기록케 하였다.

1등공신은 순충분의좌명(純忠奮義佐命)개국공신이라 하여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김사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 등 17명을 책록하고, 일등 공신 배극렴과 조준에게 식읍(食邑) 1천 호(戶), 식실봉(食實封) 3백 호, 전지 2백 20결, 노비 30구를 내려 주고,

김사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에게는 전지 2백 결, 노비 25구를 내려 주고, 이제(李濟)·이화(李和)·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장사길(張思吉)·조인옥(趙仁沃)·남재(南在)·조박(趙璞)·정탁(鄭擢)에게는 전지 1백 70결, 노비 20구를 내려 주고, 정총(鄭摠)·오몽을(吳蒙乙)·김인찬(金仁贊)에게는 전지 1백 50결, 노비 15구를 내려 주고,

그 아버지·어머니·아내에게는 3등을 뛰어 올려서 봉작(封爵)을 증직(贈職)하며, 직계 아들에게는 3등을 뛰어 올려서 음직(蔭職)을 주고, 직계 아들이 없는 사람은 생질(甥姪)과 사위에게 2등을 뛰어 올려서 음직을 주고,...처음 입사(入仕)함을 허락하고, 적장(嫡長)은 대대로 이어받아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은 정안(政案) 내에 일등 공신 아무개의 자손이라고 자세히 써서, 비록 범죄가 있더라도 사면(赦免)이 영구한 세대(世代)에까지 미치게 할 것이다.

2등공신은 협찬(協贊)개국공신이라 하여 윤호(尹虎)·이민도(李敏道)·박포(朴苞)·조영규(趙英珪) 등 11명을 책록하여 각각 100결의 토지와 10명의 노비를 주었다.

그 아버지·어머니·아내에게는 2등을 뛰어 올려서 봉작을 증직하며, 직계 아들에게는 2등을 뛰어 올려서 음직을 주고, 직계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사위에게 1등을 뛰어 올려서 음직을 주고, ...처음 입사함을 허락하고, 적장(嫡長)은 대대로 이어받아 그 녹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은 정안(政案) 내에 개국 이등 공신 아무개의 자손이라고 자세히 써서, 비록 범죄가 있더라도 사면이 영구한 세대에까지 미치게 할 것이다.

3등공신은 익대(翊戴)개국공신이라 하여 안경공(安景恭)·김곤(金 ?)·유원정(柳爰廷)·이직(李稷) 등 16명을 책록하여 각각 공신전 70결, 노비 7명을 주었다.

그 아버지·어머니·아내에게는 한 등을 뛰어 올려서 봉작을 증직하며, 직계 아들에게는 1등을 뛰어 올려서 음직을 주고, 직계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사위를 녹용(錄用)하고,,,입사함을 허락하고, 적장은 대대로 이어받아 그 녹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은 정안(政案) 내에 개국 삼등 공신 아무개의 자손이라고 자세히 써서, 비록 범죄가 있더라도 사면이 영구한 세대에까지 미치게 할 것이다.

이어 같은 해 조견(趙)·황희석(黃希碩) 등 2명의 2등공신과 한상경(韓尙敬) 등 6명의 3등공신이 추록되어 개국공신은 52명으로 늘었고, 다시 1398년 이방원이 정도전 등을 제거한 뒤 방원·방의·방간 등 세 왕자를 개국공신 1등에 추록하여 조선건국의 개국공신은 모두 55명이 되었다. 이들 중 정도전·남은(南誾)·이제(李濟)·오몽을(吳蒙乙)·박포(朴苞) 등 12명은 왕자의 난에 휩쓸려 피살되었다.

(3) 사림파의 조종(祖宗) 길재(吉再 / 1353 ~ 1419)

정도전이 순충분의좌명(純忠奮義佐命)개국 1등 공신이 되어 국사(國事)를 총괄 하면서 그의 이상(理想)인 양반 관료 중심의 공화정을 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이방원에게 피살되었고(1398), 그 후 조선왕조가 어느정도 질서를 잡아 가면서 정몽주를 비롯한 과거의 적이였던 사람들이 대부분 사면 복권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사면되지 못한 사람이 정도전이었다.

여기에 비해서 문하주서라는 문하부의 종 7품 벼슬에 머물렀던 길재는 문하부의 문서 기록이나 정리 하던 미관 말직이 였지만, 그의 고고한 지조 하나를 잘 지켜 그의 사후 세종은 통정 대부 사간원 좌사간 대부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을 증직하고 충절(忠節)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길재의 본관은 해평(海平). 자를 재부(再父). 호를 야은(冶隱) 혹은 금오산인(金烏山人)이라고 불렀는데, 금주지사 (錦州知事) 원진(元璡)의 아들로서 지금의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다. 1370년 상주사록 박분(朴賁)에게 성리학을 접하였고,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생원시(生員試)와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고,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하였다. 89년(창왕 1)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여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후진을 양성하였다.

우왕의 부음(訃音)을 접하고는 3년 복을 입고 채과 혜장(菜果?漿)을 먹지 아니하였으며,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여 혼정 신성(昏定晨省)을 폐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올렸다.

그가 성균관 유생시절 이방원과 같이 공부한 인연이 있어,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고 그를 불렀으나 위조(僞朝) 이기는 하나 우왕을 섬겼던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그런 갸륵한 뜻을 받아 들인 태종은 그의 귀향을 허락하였다.

1402년(태종 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상장 제사(喪葬祭祀)를 한결 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의하고, 불가의 화장법을 쓰지 아니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으며, 그 가운데 강호 김숙자(金叔滋)가 그의 제자였고, 김숙자의 아들이 점필제 김종직(金宗直)이며 김종직의 제자가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일두 정여창(鄭汝昌) 등으로 이 시기에 이미 사림파가 형성되어 정치 및 사상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한훤당의 학통을 정암 조광조(趙光祖)가 이어 조선 성리학의 맥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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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재클럽(Y-Club)
글쓴이 : 拈華微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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