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

[스크랩] 개성 고려 왕릉

똥하 2009. 4. 12. 00:15

[단독]‘천년의 눈물’…모습 드러낸 개성의 고려 왕릉

한겨레 | 입력 2009.03.09 08:00 | 수정 2009.03.09 10:51

 

[한겨레] 석축 파묻히고 난간석 나뒹굴고

농지개간·남벌로 민묘처럼 초라

북한 개성 부근 고려 왕릉들의 모습이 분단 60여년 만에 확인됐다. 도굴과 관리 소홀 등으로 황량한 모습이지만, 10~14세기 우리 역사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적들이다.

장경희 한서대 교수는 북한 당국과 교섭해 2005년부터 직접 현지에서 실측조사를 하며 왕릉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개성의 남북 언저리인 옛 경기도 개풍군 일대로 협동농장 근방이거나 휴전선에 가까운 군사지역이어서 자유로이 접근할 수 없는 유적들이다.

 

장 교수가 공개한 사진들 가운데 왕릉은 모두 12기다. 2대 혜종에서 시작해 정종(3대), 경종(5대), 성종(6대), 현종(8대), 문종(11대), 순종(12대), 예종(16대), 신종(20대), 원종(24대), 충목왕(29대), 충정왕(30대) 등이다. 태조 왕건의 비 신성왕후, 경종의 비 헌정왕후, 신원 미상의 왕족 무덤떼인 칠릉떼 등도 소개됐다. 고려 왕릉 가운데 현재의 모습이 확인된 것은 첫 임금인 태조의 현릉과 31대 임금인 공민왕의 현·정릉 2곳뿐이다.


고려 왕릉은 통일신라 능묘의 전통을 계승해 산기슭에 3~4층 단을 쌓고 맨 윗단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 봉분을 쌓고 아래로 석등, 문·무인석, 제향각 등을 배치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집중적인 도굴 피해를 입었고, 한국전쟁 때도 막대한 석물들이 파괴·분실돼 대다수는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북한 쪽은 주요 왕릉들을 보존급 유적으로 지정했으나, 야산 곳곳을 남벌하고 농지를 개간하면서 능역이 크게 축소됐다. 혜종·성종릉의 경우 병풍석과 석축이 파묻혔고, 경종릉은 장명등·석상·망주석이 사라졌다. 신종릉은 잘못된 복원으로 깨진 난간석이 굴러다니고, 민묘처럼 왜소한 몰골로 변했다.

장 교수는 "서울 근교 조선 왕릉들이 석물·수목·건축물까지 보존된 것과 대조된다"며 "산에 나무가 없어 큰비가 오면 봉토가 계속 유실될 수밖에 없는 만큼 종합방재대책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립고궁박물관은 장 교수의 답사 성과를 토대로 개성 왕릉 등에 대한 종합조사와 자료집 발간을 추진 중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장경희 교수 제공

[단독]개성 부근 조선초기 왕릉도 주목해야

한겨레 | 입력 2009.03.09 08:00 | 수정 2009.03.09 09:40

 

[한겨레] 신의왕후, 태조릉에 영향

정종-왕후 쌍릉, 후대 '본보기'

개성 부근의 왕릉들 가운데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조선 태조의 첫째 왕비인 신의왕후의 '제릉'과 2대 정종 임금과 왕비 정안왕후의 쌍릉인 '후릉'이다. 제릉은 태조의 능인 건원릉에 영향을 주었고, 후릉은 조선 후기 왕릉의 주된 본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 무덤은 고려 왕릉처럼 산 중턱에 3, 4층 단을 축조한 뒤 병풍석, 난간석을 봉분에 두르고 망주석, 문석인, 정자각을 세웠다. 하지만 병풍석 등 조각의 정교성이나 장엄한 품격 등이 훨씬 돋보인다. 무덤을 지키는 수호 동물로 말(석마)을 추가했다는 점도 색다르다. 후릉의 경우 고려 공민왕 무덤인 현정릉에서 기본 얼개가 유래됐으나 조선 초 제릉과 건원릉의 새 형식을 반영했으며, 후대 숙종의 명릉, 경종의 의릉 등 17~18세기 왕릉의 양식적 전범이 되었다. 노형석 기자

출처 : 양재클럽(Y-Club)
글쓴이 : choiclon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