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

[스크랩] 51,조선왕조의 건국과정(1)

똥하 2009. 4. 11. 23:45

51. 절대왕정(絶對王政 Absolute Monarchy)

가. 조선왕조의 전제군주 권

(1) 절대주의(absolutism : 絶對主義)란?

"짐(朕)은 곧 국가"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루이 14세가 바로크(Baroque)풍의 베사유(베르사유)궁전을 짓고, 호화의 극치를 즐기면서 했던 말이라고 한다.

...왕권은 신성(神聖)하기 때문에 왕(君主)은 신(神) 이외 어느 누구로부터도 간섭 받을 수 없다.... 군주의 행위는 신에게만 책임을 진다... 국가기관은 군주 한 사람의 권력집행기관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국가의 모든 통치는 군주 개인의 전단(專斷)에 의해서 이루어지던 시기(16 ~ 18세기)를 절대주의, 혹은 절대군주, 전제군주, 절대왕정 등으로 부르는데,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 시민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이런 과도기적인 형태를 다른 시대와 구분하기 위해서 붙여진 것으로 유럽사의 한 장(章)을 마련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16세기 이후 나타났다는 것을 뒤집어 보면, 그 이전, 즉 중세 봉건제도하에서는 주권(主權)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군주는 영지를 소유한 지주(地主)에 불과, 봉건법에 따라 권리와 의무가 정해졌기 때문에 다른 영지를 소유한 봉건귀족(영주, 기사, 수도원, 교회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유 영지 내의 농민지배도 왕의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반증(反證)한 것이다. 따라서 유럽에서의 국가다운 국가는 이 절대왕정 시기에 등장했다는 것이 된다.

국가권력이 분산되는 것을 지방분권(봉건사회)이라 하고, 국왕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중앙집권(근대국가)이라 한다면, 중앙집권 위에, 절대(絶對)라는 수식 관사(冠詞)를 하나 더 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전제왕권이 유럽에서는 오직 이 시기에 한하여 일시적으로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이다.

16세기를 전후해서 나타나기 시작한 이 절대(絶對)라는 자리를 먼저 차지한 것은 에스파냐와 프랑스, 그리고 영국 왕실,...절대권을 유지한 이론적인 배경은 왕권신수설(the divine right of King), 힘의 배경은 봉급을 지불하고 고용한 상비군(常備軍)과 관료(官僚), 이들에게 지불해야 할 막대한 봉급 재원(財源)을 찾아 다각적인 돈벌이에 국왕은 열중해야 되었고, 큰 돈을 벌 수 있는 무역 차익(貿易差益)을 얻기 위해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하였으며, 광산개발과 국내 산업 보호 등 일련의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도 이 시기의 한 특징에 해당한다.

무역에서 얻어지는 이익이 큰 만큼 절대왕정은 단연 무역에 비중을 두었고, 최고의 수단은 식민지를 얻고, 그 곳 주민들에게 바가지(?) 씌우는 일,..이런 역할에서 총책(總責)은 국왕, 일을 맡은 것은 상공(商工) 인들.....이런 일에 재미를 붙여 계속 밀어부친 것이 19세기에 등장한 제국주의(Imperialism)로 이어졌고, 결국 두 차례의 큰 전쟁(1, 2차 세계대전)을 치루고 얻은 교훈이 공멸(共滅) 보다는 공생(共生), 세계는 공생의 길을 찾아 UN도 창설하고, GATT를 출범시켰다가, 다시 지루한 Uruguay Round를 거쳐 지금은 WTO 체제로 들어 섰지만, 치열한 경쟁은 양상만 다를 뿐 내용은 전쟁이나 다름없다.

절대왕권의 선두주자였던 에스파냐는 본국의 산업발전없이 식민지 착취에만 의존했다가 한계를 들어내 스스로 파멸하였고, 이상하게도 야만의 나라로

 얏 보았던 섬나라 영국과 그와 인접했던 프랑스가 그 자리를 차지해 근대국가로 먼저 발전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영국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갈수록 근대국가의 성장은 늦어지고, 중앙아시아를 지나 동아시아에 이르면, 중국이나 한반도에서의 절대군주권은 유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였지만, 체통없이 군주가 돈벌이에 나선다는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에 근대화의 지연은 말할 것도 없고,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로 추락하는 비운을 마지하여야만 했다.

그 동쪽 끝 섬나라 일본은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해 있었으나, 무사들에 의해서 지방분권과 중앙집권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많은 전비(戰費)를 얻는데 체면보다는 실리적인 상업과 무역의 중요성을 터득하고 이에 힘쓴 것이 결국은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국가로 올라섰다는 것을 우연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며, 이주민들로 채워진 미국은 처음부터 관습이니 체면이니 하는 것은 없었기 때문에 홀가분한 가운데 그들나름대로의 제도를 마련하고 발전하여 오늘에 이른 것도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절대왕권과 공생(共生)했던 상공(商工)인들은 국왕의 절대권력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급속히 성장, 부(富)와 명예(名譽)를 얻어 시민계급(bourgeoisie)으로 국가구성에서 중요한 계층을 형성하였고, 그들의 지위와 발언권이 높아지자 다음 순서는 권력(權力) 쟁취(爭取)를 위한 절대군주와 대결, 이를 위해 영국에서는 청교도 혁명(1642)과 명예혁명(1688) 후 의회라는 합법을 통해서, 프랑스에서는 혁명이라는 폭력을 통해서 이들 시민계급들이 주도하는 사회가 형성되었고, 이것을 근대시민사회라고 부르고 있다.

(2) 너무나 당연한 전제군주권

그렇다면 일찍부터 중앙집권이 이룩되어 어명(御命)은 말할 것도 없고, 어명의 대리자인 암행어사(暗行御史) 출두 한마디에 놀란 관장(官長)들이 혼비백산(魂飛魄散),...

판소리 춘향가에서 묘사되는 내용을 여기에서 설명하지 않아도 왕권의 실상이 하늘보다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우리 나라에서는 왜 농업만을 고집하여, 다른 산업이나 시민계급이 성장되지 못했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절대왕정이라는 용어도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일본을 중개지로 들어온 수입품(?), 당시의 유럽은 비록 신분제도(estate)가 남아 있었으나,

산업은 공장제 수공업(Manufacture) 단계에 들어섰고, 농업보다는 상공업이 무한한 부가가치를 창출해 낸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이를 열심히 추진하고 있었다.

국왕이 어떻게 장사를 하느냐? 돈이 없으면 세금으로 거두어 들이면 될 것 아닌가? 이것은 자기가 살던 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었던 농경민 들에게나 통하는 이야기고, 유목과 상업을 전통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주민들은 보따리 싸가지고 다른 곳으로 서슴없이 이주하기 때문에 군주라고 해서 마음대로 했다가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혼자 남는 꼴이 되고 만다.

따라서 이 시기의 절대왕권을 우리나라의 전제왕권과 비교 분석할 수는 없다. 르네상스 시기를 지나 절대왕정을 거쳐 시민사회를 이룩하는 단계적인 그들의 변천 과정에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왕조가 들어섰고, 이 왕조의 알려진 역사를 다시 조명해 봄으로써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가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3) 조선왕조의 3대 기본정책

조선왕조의 절대왕권과 야합한 것은 문무 양반과 사류(士類)들, 이념적인 분장(扮裝)은 유교적인 명분론, 그 척도는 왕실에 대한 충성, 그래서 이들이 꼭 익혀 두어야 할 말이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황공 무지로 소이다... 지당하신...감읍(感泣)할 따름입니다" 사극(史劇)을 통해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들은 단순히 흥미로 느끼지만.....먹고 살기 위해서 죽을 고초를 당한 당시의 농민들에게, 이들은 착취자일뿐, 협력자나 동반자는 결코 될 수 없었다.

이런 것이 조선왕조에 와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고, 오래 전부터 내려온 관행이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제도의 뿌리에, 제일 위층인 사(士)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시대의 특성이 나타난다.

통일신라에서는 진골(眞骨), 고려전기에는 호족(豪族 : 문벌귀족), 후기에는 권문세족(權門勢族), 그러다가 조선의 건국으로 사대부(士大夫)가 대신하였다는 도식(圖式)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고, 나머지 농공상(農工商)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변화를 전제로 고대와 중세, 근대로 구분하는 서양의 시대 구분법과는 거리가 멀고, 이런 관행은 19세기 말 까지 계속되다가 불행하게도 일제(日帝)의 식민통치를 고비로 자취를 감추었는데,

3, 1 운동 후 세워진 상해 임시정부의 정체(政體)가 왕정복고가 아닌 공화정을 표방했다는 것은 비록 망명 정부이기는 하나 우리역사에서 처음으로 사농공상의 위계 질서를 전도(顚倒) 시킨 것으로, 민족적인 자존심에 앞서 인증(引證)해야 할 사실이다. 이런 지배 층을 기준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학자도 있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역성(易姓)혁명과 서양의 시민혁명(Revolution)을 동일 선 상에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성혁명의 명분이 위민(爲民) 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표방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때 이들 새로운 지배계급들이 내 놓은 3대 기본 정책, 이를테면 사대교린(事大交隣)과 숭유(崇儒), 그리고 농본(農本)정책을 토대로 이야기를 엮어 보고자 한다.

이 시기에 남아 있는 최대의 사료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 간의 역사적 사실을 국왕 일대의 치적을 중심으로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것인데, 1413년(태종 13)에 태조실록을 편찬하였고, 이런 예에 따라 왕이 죽으면 그 다음 왕이 편찬하는 전례를 만들어, 1865년(고종 2) 25대 왕인 철종실록이 만들어 진 것을 끝으로, 1,893권 888책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을 남기고 있다.

실록의 편찬과정, 보관방법, 임진란 때 전주 사고 본 만이 살아 남은 것 등 실록에 얽힌 이야기는 접어두고, 어려운 한문으로 쓰여진 원문을 출판사(탐구당)에서 영인본으로 출간하여 보급한 것을 어렵게 구입, 그러나 난해한 내용을 해독하는데 어려움이 많아 방치상태로 두고 있었는데,... 북한에서는 1980년대에 한글 번역을 완료하였으나, 이를 구할길이 없었고, 남한에서도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1972년부터 분담하여 한글 번역작업을 시작하여 1994년 4월에 마무리 지었고 다시 CD ROM으로 만들어 보급하면서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접근이 허용되고, 쉽게 그 내용을 접할 수 있어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대개의 관찬(官撰) 사서(史書)가 승자(勝者)의 기록으로 역사적인 진실을 파악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조차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생각하고 이를 토대로 지금까지 우리들이 배워온 내용을 실록과 비교해 보는 자료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 여과없이 전재(轉載)코자 한다.


조선왕조실록 표지 및 내용

(4) 고려왕조의 마지막 기둥 정몽주 척살

이성계가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의 도움으로 공양 왕으로부터 선양의 형식을 빌려서 1392년 7월 17일 개경의 수창궁에서 즉위하여 조선왕조를 열고 태조가 되었는데, 함흥 출신의 무장으로 출발하여 홍건적과 왜구의 격퇴로 공을 세우고, 세력을 확장, 위화도 회군, 과전법 실시 등으로 실세가 되었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기 때문에(칼럼 35호 ~ 37호 참조) 여기서는 생략하고, 마지막 남은 반대파의 거두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제거되는 과정을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국역조선왕조실록. 태조 001 총서 /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정몽주(鄭夢周)가 성헌(省憲 : 언관)을 사주하여 연명(連名)으로 글을 올려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을 목 베기를 청하니, 태조가 아들 이방과(李芳果)와 아우 화(和)의 사위인 이제(李濟)와 휘하의 황희석(黃希碩)·조규(趙珪)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지금 대간(臺諫)은 조준이 전하(殿下)를 왕으로 세울 때에 다른 사람을 세울 의논이 있었는데, 신(臣)이, 이 일을 저지(沮止)시켰다고 논핵(論劾)하니, 조준이 의논한 사람이 어느 사람이며, 신이 이를 저지시킨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청하옵건대, 조준 등을 불러 와서 대간(臺諫)과 더불어 조정에서 변론하게 하소서.”

하여, 이 말을 주고받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공양 왕이 듣지 않으니, 여러 소인들의 참소와 모함이 더욱 급하므로, 화(禍)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전하(殿下 : 이방원)께서 몽주(夢周)를 죽이기를 청하니, 태조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나가서 상왕(上王 : 정종)과 이화(李和)·이제(李濟)와 더불어 의논하고는, 또 들어와서 태조에게 아뢰기를,“지금 몽주 등이 사람을 보내어 도전(道傳) 등을 국문(鞫問)하면서 그 공사(供辭)를 우리 집안에 관련시키고자 하니, 사세(事勢)가 이미 급하온데 장차 어찌하겠습니까?”하니, 태조는 말하기를,“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하면서, 우리 전하에게“속히 여막(廬幕)으로 돌아가서 너의 대사(大事)를 마치게 하라"고 명하였다. 전하가 남아서 병환을 시중 들기를 두세 번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하는 수 없이 나와서 숭교리(崇敎里)의 옛 저택(邸宅)에 이르러 사랑에 앉아 있으면서 근심하고 조심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므로 급히 나가서 보니, 광흥창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었다. 정탁이 말하기를,“백성의 이해(利害)가 이 시기에 결정되는데도, 여러 소인들의 반란을 일으킴이 저와 같은데 공(公)은 어디로 가십니까? 왕후(王侯)와 장상(將相)이 어찌 혈통(血統)이 있겠습니까?”하면서 간절히 말하였다.

전하가 즉시 태조의 사제(私第)로 돌아와서 상왕(上王)과 이화(李和)·이제(李濟)와 의논하여 이두란(李豆蘭)으로 하여금 몽주를 치려고 하니, 두란(豆蘭)은 말하기를,“우리 공(公)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하매, 전하는 말하기를,“아버님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몽주는 죽이지 않을 수 없으니, 내가 마땅히 그 허물을 책임지겠다.”하고는, 휘하 인사(人士) 조영규(趙英珪)를 불러 말하기를,

“이씨(李氏)가 왕실(王室)에 공로가 있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나, 지금 소인의 모함을 당했으니, 만약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고 손을 묶인 채 살육을 당한다면, 저 소인들은 반드시 이씨(李氏)에게 나쁜 평판으로써 뒤집어 씌울 것이니, 뒷 세상에서 누가 능히 이 사실을 알겠는가? 휘하의 인사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이씨(李氏)를 위하여 힘을 쓸 사람은 없는가?”하니, 영규(英珪)가 개연(慨然)히 말하기를,“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영규·조영무(趙英茂)·고여(高呂)·이부(李敷)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들어가서 몽주를 치게 하였는데, 변중량(卞仲良)이 그 계획을 몽주에게 누설하니, 몽주가 이를 알고 태조의 사제(私第)에 나아와서 병을 위문했으나, 실상은 변고를 엿보고자 함이었다.

태조는 몽주를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이화가 우리 전하에게 아뢰기를,“몽주를 죽이려면 이때가 그 시기입니다.”하였다. 이미 계획을 정하고 나서 이화가 다시 말하기를, “공(公)이 노하시면 두려운 일인데 어찌하겠습니까?”하면서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니, 전하가 말하기를,“기회는 잃어서는 안 된다. 공이 노하시면 내가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아뢰어 위로하여 풀도록 하겠다.”하고는, 이에 노상(路上)에서 치기를 모의하였다.

전하가 다시 영규에게 명하여 상왕(上王)의 저택(邸宅)으로 가서 칼을 가지고 와서 바로 몽주의 집 동리 입구에 이르러 몽주를 기다리게 하고, 고여·이부 등 두서너 사람으로 그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이방원 일파가 백주 대로상에서 원로요 당대의 재상이었던 정몽주를 척살하는 내용과 이성계 즉위 과정은 다음 회에서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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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재클럽(Y-Club)
글쓴이 : 拈華微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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