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보르헤스의 불교강의-<23> 중국불교

똥하 2009. 3. 30. 23:27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23>중국불교

 

중국의 불교사는 매우 복잡하다. 그 첫 전래시기도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기원후 1세기경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꿈속에서 온몸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귀인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는데, 깨어나 알아보니 그 사람이 부처님이었다고 한다. 황제는 인도에 사절단을 보내 부처님 법을 가르쳐 줄 스님을 초빙해 왔다. 다른 설에 의하면 이미 기원전 3세기경에 인도북방 서역을 통해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었다고도 하며 전한(前漢) 애제(哀帝) 1년을 초전(初傳)으로 보기도 한다. 대략 기원 전후 무렵 전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불교가 전래될 무렵 중국은 벌써 고도의 문화를 확립하고 있었다. 한무제(漢武帝)는 공자의 가르침(儒敎)을 통치이념으로 삼아 사회를 안정시켰고, 민간에서는 노자의 사상(道敎)이 널리 퍼져 있었다. 공자와 노자는 기원전 6세기에 살았고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리토스 등과 동시대 인물이었다. 유교는 초월적 세계보다는 사회질서 규범을 중시했고, 도교는 불교처럼 세계의 비현실성을 일깨웠다. 이를 호접몽(胡蝶夢)으로 표현한 장자의 유명한 비유가 있다.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기분좋게 날아다녔다. 꿈이 깨자 자신이 나비꿈을 꾼 장자인지, 지금 장자가 된 꿈을 꾸는 나비인지 알 수 없었다.”

초기의 불교전도시대에 인도와 중국의 학승들이 여러 경전을 번역하여 중국인에게 불교를 전하는 한편 그 이해를 깊이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유교와 도교사상을 확립하고 있던 지식인들은 불교사상의 독자성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어서 전설상의 황제(黃帝)나 노자의 가르침을 빌어 이해하고자 했다. 이렇게 중국 고유의 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한 격의불교(格義佛敎)가 한동안 성행하였다.

 

5세기 초 구마라습이 서역을 경유하여 장안(長安)에 도착한 후 여러 대승경전을 한역(漢譯)하여 불교 고유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번역된 경전이 정리되면서 논(論)의 연구가 진척되고 여러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526년에 보디다르마(達摩大師)가 중국에 들어왔다. 불교진흥에 힘쓰고 있던 양(梁) 무제(武帝)가 달마대사를 청해 가르침을 받고자 했으나, 대사는 화려한 사원과 수많은 승려 등 외모적인 겉치레보다 진리를 올바로 증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어전에서 물러나와 수도에 힘썼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9년간 면벽(面壁)참선 정진을 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 선불교의 초조가 되었다. 선(禪)은 중국어로 찬(Ch'an)이라고 발음되는데, 근대에 와서 일본에 의해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서구에서는 일본식 발음인 젠(Zen)이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수·당(隋·唐)시대에 이르러 중국의 정치가 통합되면서 문화가 번영하였다. 중국불교도 이때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이 시대는 불교 본래의 모습에 대한 중국인의 이해와 실천이 실현된 시기였다. 삼론(三論), 천태(天台), 화엄(華嚴), 법상(法相), 밀교(密敎), 율(律), 선(禪), 정토(淨土) 등의 종파가 확립되었다.

 

수·당(隋·唐)시대 이후 한때 폐불이 있어서 여러 경전이 소각되고 종파도 중절되었으나 실천에 전념하는 정토교와 선종 그리고 민간신앙에 동화된 밀교가 번창하였다. 그중에서도 선종은 중국 특유의 불교로 발달되고 탁월한 승려가 배출되어 그 가르침이 계승되어감과 동시에 고승들의 어록이 편집되었다. 또 선종의 사원에서는 자급자족적인 생활규정이 생겨 그것을 청규(淸規)라고 했다. 송(宋)나라 이후 대장경이 출판되고 경전이 간행됨으로써 불교사상이 지속적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한편 불교는 중국인들의 조상숭배사상과 도교적 민간신앙과 타협하고 그것들을 흡수하였다. 가족의 중요성이 체질화된 중국인들에게 출가(出家) 독신생활은 그리 긍정적으로 비쳐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지식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직접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일은 드물었다. 따라서 일반 승려들은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농민 출신들이 많았다. 사원에서 교육을 실시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았다. 때때로 가난한 서민들이 어린 자식을 사원에 파는 경우도 있었다. 체계화된 유교식 교육을 받은 인재를 등용하는 관료체제가 확립된 중국사회에서 출세를 지향하는 지식인들에게 출가 수도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출가제도는 중국인들에게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또한 불교가 외래종교라는 사실도 자존심 높은 중국인들에겐 약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불교의 초월적 인식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유교의 혁신을 가져온 신유학(Neo-confucianism)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불교는 민간의 일상생활에 깊숙히 침투해 갔다. 중국의 문학과 조형미술은 불교를 모르면 이해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영향을 받았다. 대승불교의 제불(諸佛)과 여러 보살 중에서 민간에 가장 친숙한 인물은 관세음보살이었다. 여성화된 자애로운 모습을 띤 이 자비의 화신상을 중국 어디서나 만나볼 수 있다.

 

서구 유일신(唯一神) 신앙의 배타적 성격과는 달리, 중국에선 여러 종교가 쉽게 혼융되었다. 유·불·도의 3교 융화가 활발히 논의되었고, 실제로 사원내에 도교의 영향을 받은 산신각(山神閣)이 세워진 사원이 많았다.

 

가장 유명한 불교소설인 「서유기(西遊記)」는 손오공과 삼장법사 일행이 불경을 구하러 중국에서 서쪽으로 여행을 떠나 겪게되는 환상적인 모험 이야기이다. 소설이 쓰여진 연도는 정확치 않지만 대략 16세기경으로 추측된다. 삼장법사와 동행하는 원숭이와 말과 돼지는 법사의 분신들로 각각 지성, 영성, 감성을 상징한다. 그들은 천신만고 끝에 불경을 구해 돌아오지만 그 경전들은 모두 백지였다. 이것은 어쩌면 지고한 진리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사실(不立文字)을 상징하는지 모른다.

 

멀리 인도에서 이룩된 불교는 인도의 온갖 문화를 수용, 포용하면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였으며, 또 중국으로 전해진 다음에는 중국의 독특하고 우수한 문화와 접촉, 융화되어 풍부하고 다양한 중국적인 불교문화를 이룩하였다. 그 문화는 한국과 일본에도 전파되었다.

 

편역: 김홍근<외대강사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