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보르헤스의 불교강의-<25> 禪불교(1)

똥하 2009. 3. 30. 23:31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25>禪불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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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인도 북부에서 기원하여 동아시아로 퍼졌다. 이 전도는 주로 인도 승려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인도에서 동아시아로 건너간 승려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사람은 보리달마일 것이다. 그는 6세기 초엽 중국에 입국하여 선종(禪宗)의 초조가 되었다.

그가 양무제(梁武帝) 앞에서 세속적 공덕을 쌓는 일보다 공적(空寂)한 지혜를 파악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불교의 가장 성스러운 교리(聖諦第一義)를 묻는 황제의 질문에 달마는 성스러운 것이 없는 텅빈(確然無聖)이라고 대답하고 떠나버렸다. 그는 황제의 실력으로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숭산 소림사(嵩山 少林寺)에 들어가 면벽참선(面壁參禪)을 했다고 한다.

 

자신의 신앙심을 증명하고자 왼팔을 끊어 바친 혜가(蕙可)에 의해 달마의 법(法)은 이어진다. 수년에 걸친 면벽기간동안 침묵을 지키던 달마는 그 충직한 제자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었다.

 

“제 마음은 평안을 찾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제 마음을 진정시켜 주십시요.”달마가 대답했다.

 

“어디 자네 마음이란 것을 내놓아 보게. 그러면 내 그것을 진정시켜 줌세.”한동안 침묵이 흐른 끝에 혜가는 스승에게 “마음을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고 고백하였다.

 

달마가 말했다.

 

“좋아, 자네 마음은 이제 평온을 찾게 되었네.”

그 말을 듣는 순간, 혜가는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전등(傳燈)의 시작이다. 이후 선가(禪家)에서는 깨달음의 순간에 대한 수많은 일화들이 전해 내려온다. 우리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고민하다가 문득 그 답을 깨치게 되었을 때나 익살맞은 농담에 순간적으로 미소지을 때 느끼는 신비로운 경험을 통해 그 깨달음의 세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중국의 선종은 7세기에 등장한 천재 혜능(638~713)에 의해 크게 발전한다. 그뒤 한국과 일본에 전해져 극동불교의 대표적인 종파로 자리잡는다. 선(禪)은 중국어로는 찬(Chan), 일본어로는 젠(Zen)으로 발음된다.

 

선불교는 순수한 정신집중을 통해 언어와 감각의 실재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 사물과 자신 나아가 붓다의 존재마저 의심해보는 수련이 요구된다. 많은 선원(禪院)에선 불경(佛經)의 권위가 그리 높지 않다. 선체험은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며, 개별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스승과 제자의 직접적인 관계가 매우 친밀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경전의 문구보다 조사(祖師)의 직접적인 이심전심 가르침이 더 중시되었다. 서양에도 “문자는 정신을 가두지만, 성령은 정신을 해방시킨다”는 속담이 있다.

 

좌선의 목적인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하여 가장 많이 이용되는 방법은 화두(話頭 혹은 公案)를 붙잡는 일이다. 화두는 대개 논리적인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물음으로 구성된다. 전형적인 화두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어느날 제자가 “부처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왔다. 동산수초선사(洞山守初禪師)는 “마삼근(摩三斤)”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에 무슨 특별한 상징적인 뜻이 담겼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에게 와서 물었다.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의미가 무엇입니까?” 스승이 대답하기를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庭前栢樹子)”고 말했다. 제자가 단순한 물건을 대상으로 들었다고 항의하고 다시 질문했다. 그러자 조주는 다시 한번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고 대답했다.

 

서양에서 엄격한 수도원 생활규칙을 세운 성 베네딕트(St. Benedict)의 규범과 비교할만한 <백장청규(百丈淸規)>의 저자인 백장의 문하에는 많은 승려가 모여 들었다. 불어난 승려들을 수용할 새로운 절을 짓고, 그 절을 관리할 지도자를 뽑기 위하여 모두 모이게 했다. 그들 앞에 항아리를 하나 놓고, “‘항아리’란 말을 쓰지 않고 이게 뭔지 말해 보아라”고 했다. 수제자 중 한 사람이 나서서, “진흙조각도 아닙니다”고 대답했다. 이때 주방에서 일하던 젊은 스님이 지나가다 그 말을 듣고 항아리에 다가가 발로 찼다. 그는 아무 일이 없은듯이 다시 주방으로 가버렸다. 백장은 그 젊은 스님에게 새로 지은 사원을 맡겼다.

 

‘토요’라는 일본소년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그는 열두살이 되던 해 모쿠라이 선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선사는 더 크면 오너라 하고 돌려보냈다. 소년은 다음날 다시 와서 졸라댔다. 할수없이 스승은 문제를 내주었다. “넌 두손으로 치는 손뼉소리를 들을 수 있을거다. 그렇다면 한 손으로 치는 손뼉소리를 내게 들려줄 수 있겠니?” 자기 방으로 돌아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소년의 귀에 이웃사람의 노래소리가 들렸다. “아! 알았다” 하고 소년은 외쳤다. 다음날 소년은 스승을 찾아가 그 노래소리를 흉내내었다. “아니다. 한손의 손뼉소리는 그게 아니다” 하고 스승이 말했다. 소년은 조용한 장소를 찾아갔다.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들려왔다. “그래, 이거야!” 하고 소년은 생각했다. 다음날 소년은 스승 앞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흉내냈다. “그건 물방울 소리인 것 같은데, 한 손 손뼉소리가 아니야. 더 찾아 보거라” 하고 스승이 말했다.

 

그뒤, 바람소리, 새소리, 귀뚜라미 소리 등등 많은 소리를 내었지만 모두 퇴짜맞았다. 일년이 넘었건만 소년은 여전히 한 손이 내는 손뼉소리를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침내 스승에게 찾아가 “아무리 소리를 찾아 다녀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제 지쳤습니다. 차라리 아무 소리도 내지 않겠습니다”고 말했다. 스승이 말했다.

 

“이제야 찾았구나.”

 

 

 

 

 

- “우주전체 풀어야할 화두”-

- 지적이해 보다 체험 직관 중시-

- 다도· 꽃꽂이 등 생활선 일본서 정착 -

 

깨달음을 통한 자아발견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선사들은 가끔 화두 대신 거친 방법을 썼다. 한번은 수로화상이 마조(馬祖)를 방문하여 물었다. “달마조사가 서방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대답 대신 마조는 그에게 절을 하라고 명했다. 수로가 몸을 숙이자마자 마조는 그를 짓밟았다. 이상하게도 수로는 당장에 깨닫게 되었다. 일어나 손뼉을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기이하고 기이하다. 수백 수천의 삼매(三昧)와 무량한 묘의(妙義)가 한 터럭 끝에 그 근원을 두고 있구나!” 그는 스승에게 큰 절을 올리고 물러갔다. 수로는 후에 방장이 되고 난 후 가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조가 나를 짓밟은 후, 나는 줄곧 웃고 있다.”다른 선사들도 할(喝:고함소리)이나 방(棒:방망이) 등 충격요법을 사용했다. 덕산(德山)은 깨닫기 전에, 용담(龍潭)선사가 있는 절에 가서 머물게 되었다. 어느날 저녁, 선사가 좌정하고 있던 덕산에게 말하였다. “밤이 깊었는데 어찌 물러가 쉬지 않는가?” 덕산은 인사를 드리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밖으로 나갔다가 곧 다시 돌아와서 말하였다. “밖이 너무 어두워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선사는 호롱불을 켜서 그에게 건네 주었다. 그러나 덕산이 막 호롱불을 받으려하자 선사는 갑자기 불을 훅 불어 꺼버렸다. 이 순간에 덕산은 문득 깨달았고 스승에게 예배하였다.

 

선불교는 기독교나 이슬람 신비주의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수단에 불과한 논리적 도식(圖式)을 믿지 않는다. 수십권의 ‘신학대전’도 진리에 대한 구체적 체험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감각을 통한 인식보다는 직관적 인식을 더 선호한다. 셋째, 논리적 갑론을박을 초월하여 결정적 확신을 안겨주는 절대지(絶對智)를 추구한다. 이것을 파악한 사람은 전제(前提)나 결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는 현 단계에서의 사물들의 대립관계가 보다 높은 차원에서는 모두 통합된다는 것을 인지한다. 따라서 세속적인 도덕윤리관을 초월할 수 있게 된다. 성 어거스틴이 “먼저 사랑하라. 그러면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도 되리라”고 말한 것은, 깊은 사랑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악한 행위를 할 수 없으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넷째, 에고의 소멸을 말한다. 과거의 개인적 삶은 전체 속으로 용해되고 그때 평화와 법열(法悅)이 보상처럼 따라온다. 다섯째, 자아와 삼라만상이 모두 일체감을 가진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블레이크는 이렇게 노래했다. “모래알 속에서 우주를 보고, 들꽃 속에서 하늘을 본다. 너의 손바닥 안에 무한(無限, infinity)이 있으며, 찰라 속에 영원이 깃든다.” 여섯째, 무한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한편 이 종교들 사이의 차이점도 크다. 불교는 유일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특히 선불교에선 무조건 믿는다는 것은 이해되기 어렵다. 유태교와 그 지파인 기독교와 이슬람에서와는 달리, 선불교에는 죄와 참회 그리고 용서라는 감상적인 개념들이 존재치 않는다. 깨달음은 기도와 두려움, 신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속죄 등에 의해 얻어지지 않는다. 덕산선사는 결코 기도하지도 않았고, 죄의 사함을 빌지도 않았으며, 불상(佛像)을 숭배하지도 않았다. 그는 경전에 매달리지도 않았고, 촛불을 켜고 두 손을 빌지도 않았다. 그의 생각에 그런 행위들은 형식적인 의례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깨달음을 향한 꾸준하고 집중적인 노력이었다.

 

대혜(大蕙)선사는 깨달음을 막 꺼지려는 촛불이나 우리 목에 댄 칼날로 비유했다. 이 우주 전체가 우리가 풀어야 할 생생한 화두이다. 모든 화두는 사실 우주라는 큰 화두에 포함되는 것이다. 또한 부분은 전체를 머금고 있다. 일중일체(一中一切)요, 다중일(多中一)이다. 작은 화두 하나가 풀리면, 우주 전체가 드러난다.

 

불교교리를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적 깨달음의 무아경(無我境)이다. 인도에서 흔히 쓰는 여행자의 비유가 있다. 어떤 사람이 사막을 걷다가 다른 사람을 만나, 피곤하고 목이 타서 죽을 지경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샘이 있는 곳의 길을 일러주었다. 그러나 길을 아는 것은 실제로 물을 마시는 것과는 다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샘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사막은 생사로 가득찬 속세이고, 목마른 여행자는 우리 모두이며, 길을 가리켜 준 자는 부처님이고, 샘은 열반(니르바나)이다.

 

불교는 언어와 변론을 믿지 않는다. 앞에서 얘기한대로, 붓다는 초기 설법에서, 화살에 맞은 사람에게 시급한 것은 화살에 맞은 이유가 아니라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라고 했다. 선불교는 이 가르침에 충실하여 모든 의례와 논리와 사변에 앞서 정각(正覺)에 비중을 둔다. 따라서 갑자기 열린 꽃봉오리에 흔히 비유되는 깨달음이야말로 선의 시작이자 끝이다.

 

선(禪)은 그 가르침이 퍼졌던 사회의 일상생활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건축, 시, 회화, 서도 등 많은 예술이 선미(禪味)를 담고있다. 신중한 생략과 암시가 그 생명이다. 동양화의 여백미와 일본의 단시(短詩) 하이쿠(俳句)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하이쿠는 5·7·5조의 단시이다.

 

 

바람에 너울대는/풀잎끝 이슬방울/덧없는 인생

인형가게에 들린/자식없는 부인/만지작 만지작 인형을 못놓네

강물에 출렁이는/살구꽃 그림자/떠내려가진 않네

난간에 기대어/가을달을 바라보니/내 본래 얼굴이로다

 

검술과 궁술의 고된 수련도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흔히 정신수양의 한 방편으로 이용된다. 숙련된 궁사는 어둠속에서도 정확히 과녁을 맞춘다. 그는 정신적 안정을 통해 어둠을 꿰뚫는 심안(心眼)을 터득한 것이다.

 

생활속의 선불교는 일본에서 토착화되면서 일본예술혼의 기저를 이루었다. 불교의 유입과 함께 꽃꽂이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사원에서 의식(儀式)으로 시작된 꽃꽂이는 후에 민간에서도 널리 행해졌다. 꽃꽂이의 미학은 기묘한 불균형을 이루는 디자인 형태에 달려있다. 그것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상징하는 세 요소의 조화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에 꽃꽂이 하는 사람의 신앙적 정성이 깃들면 그 아름다움은 배가 된다.

 

일본식 정원도 유명하다. 작은 공간에 바위와 관목 그리고 물로 자연스러움을 창조한다.

 

다도(茶道) 또한 선불교적 정서의 산물이다. 차를 마시는 일상의 작은 행위도 생의 오묘한 이면을 드러내고 고양시키는 신성한 종교적 의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