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보르헤스의 불교강의-<22> 라마불교(2)

똥하 2009. 3. 30. 23:25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22>라마불교(2)

 

승려는 사자(死者)에게 이렇게 독경한다.

“당신의 식(識)은 이제 공(空)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공은 무(無)가 아니라 충만한 것으로서 어디에도 매이지 않으며 찬란히 빛나고 가볍게 떨리면서 행복한 바로 식(識) 자체인 완벽한 붓다입니다.” 그리고는 마치 눈에 비치는 물위의 달이 보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같이 그런 자신의 신성을 명상하라고 권한다.

 

해탈하지 못한 자의 영혼은 두번째 바르도로 들어간다. 죽은 자는 사람들이 방청소를 하고 그의 옷을 벗기는 것을 보게 되며 가족들이 우는 것을 듣는다. 하지만 그는 말을 할 수 없다. 이때 그는 환영을 보게 된다. 먼저 선신(善神)들이 나타나며 그뒤 무서운 모습의 악신(惡神)들이 나타난다. 이때 승려는 독경을 통해 그 환영들은 실제가 아니라 단지 그의 의식의 그림자일 뿐이란 것을 일깨운다.

 

다음 칠일동안 일곱명의 평화의 신들이 나타나 각기 다른 색깔의 빛을 비추어 영혼이 환생할 세계를 보여준다. 그중에는 인간세계도 들어 있다. 승려는 독경을 통해 영혼이 속세의 유혹을 뿌리치고 좋은 세계를 선택하도록 권고한다.

 

그 신들과 빛이 보여주는 세계는 실상 그 영혼이 생전에 축적한 업(業)의 방사(放射)일 뿐이다. 칠일이 지나면 그 신들은 다시 모습을 바꾸어 이번에는 험악한 악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것은 머리가 세개에, 팔이 여섯개 그리고 다리가 네개 달렸다. 온몸을 해골과 검은 뱀으로 치장하고, 입에선 화염을 내뿜는다. 오른쪽 팔들은 칼, 도끼, 수레바퀴를 휘두르고, 왼쪽 팔들은 종, 쟁기, 해골을 치켜든다. 그 해골에는 피가 담겨있어 마실 때마다 악귀의 입으로 피가 흘러 내린다.

 

이렇게 해서 십사일째가 되면 호랑이, 돼지, 범, 사자의 머리를 단, 동서남북을 대표하는 거대한 몸짓의 사방수호신이 나타나 영혼을 위협한다.

 

마침내 영혼은 염라대왕 앞으로 불려나가 심판을 받게된다. 변호신이 나와서 그의 선행을 열거하고 나면, 악신이 나와 그의 죄과를 들춘다. 영혼은 변명을 하려 들지만, 업경(業鏡)에 그의 생전의 행위가 생생히 비친다. 재판관 염라대왕은 양심이며, 업경은 기억이다.

 

긴 통과의식이 끝나면 사자는 자기가 어디에 다시 태어날지를 알게 된다. 자세한 것을 알고 싶은 독자는 에반스 웬츠(W.Y.Evans Wentz)의 <티벳사자(死者)의 서(書), The Tibetan Book of the Dead>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 책에는 융(Jung)의 유명한 서문이 있다. 책 제목은 이집트의 <사자의 서>를 연상시킨다. 보다 쉬운 텍스트로는 ‘새들에 대한 붓다의 설법’이란 서사시가 있다.

 

아침 저녁으로 지저귀는 새소리의 합창에서 발상을 따온 것 같은 새들의 회의 장면은 그리스, 페르시아, 영국, 인도 등지의 문학에 등장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붓다는 신들과, 악귀들과, 인간들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언어로 설법을 하였다고 한다. 이 서사시에서 관세음보살은 뻐꾸기로 화신(化身)하여 티벳과 인도의 새들에게 설법한다. 독수리, 학, 거위, 비둘기, 까마귀, 부엉이, 닭, 종달새, 공작새 등은 각자 삶의 고(苦)와 무상(無常)을 고백한다.

 

뻐꾸기로 변한 관세음보살은 사회자인 앵무새의 요청으로 그 자리에 모인 새들에게 세상의 실상(實相)이 공(空)임을 깨우쳐 준다. 돌로 세워진 굳건한 궁전도 결국 세월의 풍화작용을 견딜 수 없으며, 일가친척과 친구와의 만남도 하룻밤 함께 빵을 나눈 여행자 사이의 만남과 진배없는 것이다. 육체는 구름처럼 허망하고, 공작새의 찬란한 깃털도 사라지는 거품과 같은 것이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태어나고 죽는 꿈을 꾸는 것이다. 그 설법에 감화받은 새들은 앞으로 행실을 바로잡을 것을 맹세한다. 단지 악에 깊이 물들어 있는 솔개와 까마귀만이 맹세에 불참한다. 감화받은 닭은 이렇게 말한다.

 

 

속세에 사는 동안에는 영원한 행복이란 없다.

 

이것 저것 해야할 일은 끝이 없다.

 

육체도 혈액도 무상하지 않은 것은 없다.

 

죽음의 신 마라는 항상 노리고 있다.

 

아무리 부자라도 결국 빈손으로 홀로 떠난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도 언젠가는 잃을 수 밖에 없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실체는 없다.

 

 

이탈리아 아시시 출신의 프란시스코도 새들에게 설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가 한 설교는 새들에게 아름다운 옷과 원하는 곳으로 날아갈 수 있는 자유를 준 신께 감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라마는 티벳어로 상인(上人)이라는 뜻이다. 티벳불교는 인도 대승불교중 특히 후기밀교(後期密敎)의 구루(上人) 신앙의 영향을 받아 종교 지도자를 존중하는 강한 전통을 세우게 된 것이다. 오늘날 티벳불교의 주된 전통은 1042년 인도에서 입국한 아티샤가 주도한 불교부흥운동 이후에 세워진 것이다. 티벳에서는 이 시기 이후의 불교역사를 후기홍통시대(後期弘通時代)라고 한다.

 

아티샤는 정법(正法)을 수호하고 계율을 엄수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의 사후 여러 개의 종파가 생겨나고, 정법과 계율은 다시 세속권력과 결탁하여 타락해 갔다. 14세기 말 아무드 지방의 촌카파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개혁운동의 지도자들은 아티샤의 법맥을 계승할 것을 선언하고, 승려의 덕행을 존중했으며, 밀교의 바탕인 반야(般若), 중관(中觀) 교리의 철저한 학습을 주장했다. 몽골과 중국 동북지방으로 전파된 티벳불교는 아티샤의 개혁 이후 세확장에 따른 것이다.

 

티벳불교의 종교의례음악은 라마승의 독경과 찬가가 조화를 이루고 기악반주를 곁들인다. 종교음악은 티벳 태음력에 기준한 종교적 제일(祭日) 등에 빠짐없이 연주된다. 또한 라마승에 의해 의례적인 색채가 강한 가면무용이나 자타카(本生譚)를 소재로 한 설화극과 함께 공연되기도 한다.

 

종교미술로는 밀교 특유의 만다라를 많이 사용한다. 만다라는 사물의 본질, 중심, 우주, 도량을 나타내며, 완전무결한 세계의 상징으로 괘폭에 그려져 사원안에 걸렸다. 만다라에는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이(理)의 세계를 나타내는 태장계와 원과 모(方形)를 짝지어 지(智)의 세계를 나타내는 금강계의 두갈래가 있는데 티벳에서는 후자의 만다라를 많이 사용하였다.

 

편역:김홍근<외대강사·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