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보르헤스의 불교강의-<20> 대승불교(20)

똥하 2009. 3. 30. 23:22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20>대승불교(2)

 

대승불교의 가장 유명한 스승인 나가르주나(용수·BC2~3세기)는 북인도 날란다에 대승원을 짓고 제자들을 모아 가르쳤다. 여기서 확립된 교리는 후일 동아시아 여러나라로 전파된다.

대승불교는 이 세상이 실재하지 않다고 가르친다. 반면 소승불교는 세상의 외관(外觀)은 일시적이고 허망하지만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Skandha)는 실재한다고 가르친다. 대승불교에서는 수행하는 그가 열망하는 열반까지도 환(幻)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만일 모든 것이 공이라면, 사성제니, 팔정도니, 업이니, 윤회니, 승단이니 심지어 부처님까지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대해 나가르주나는 두가지 차원에서 진리를 고려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하나는 인습적인 진리로써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설명하는데 사용된다. 또 하나는 절대 진리로서 니르바나(열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주를 거울에 비친 반영(反影)에, 메아리에, 그리고 꿈에 비유한다. 우리들은 사랑과 증오로부터, 노심초사로부터,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그런데 그 본질이 바로 공이라는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부정(否定)의 방법들을 통해 중도(中道)를 설파했다. 파괴도 없고, 불멸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고 불어나지도 않으며, 파괴되지도 않고 지속되지도 않으며, 단일(單一)도 아니고 복수(複數)도 아니며, 입구도 없고 출구도 없다는 것이다.

 

불교의 특성상 나가르주나의 공론(空論)이 출현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내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때, 나는 철학자임이 분명하다. 나의 일상생활 속에서는 자아와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한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1711~76)도 결국 무아론(無我論)을 주장했다.

 

원시불교에서는 깨달음을 통해 열반에 이르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사라진다고 말하고, 각자(覺者)를 불이 꺼진 등에 비유한다. 나가르주나는 말하기를 원래 없던 것이 어떻게 있거나 없거나 할 수 있느냐고 한다. 열반의 세계는 공의 세계이며, 현상세계를 넘어선 그 세계에선 이미 삼사라(俗世)가 니르바나라는 것이다. 자성(自性)이 공함을 깨달은 자는 니르바나에 이른다. 광대한 우주조차도 그와 똑같이 공한 것이다. 자(自)와 타(他)의 구분이 녹아 없어진 세계가 바로 니르바나라는 것이다.

 

니르바나에 도달하는 특수한 과정도 부정된다. 나가르주나는 자신의 저술에서 이렇게 썼다.

 

걸어 온 것에도 길은 없고

걸어야 할 것에도 길은 없다

그러나 걸어온 것과 걸어야 할 것 없이는

길 또한 없을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엘레아학파의 제논도 이와 유사한 말을 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결코 과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화살이 아니다. 왜냐하면 화살은 궤도의 각 순간마다 정지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지상태가 비록 무한히 많다고 할지라도 모인다고 해서 결코 움직임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원전 4세기경 디오도로 크로노스(Diodoro Cronos)는 “벽은 무너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벽돌들이 잘 결합되어 있을때 벽도 굳건히 서있다. 벽돌이 무너지고 없다면 이미 벽 또한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가. 이런 논지들이 단순한 궤변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크로노스와 제논과 나가르주나는, 현실이란 우리가 논리로만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허망한가 하는 것을 일깨우려고 했던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사물의 본질이 공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 부정적 방법을 강조했던 것 같다. 그 이전의 학승들은 모두 부처님의 전지(全知)만 강조해 왔다. 이와 반대로 그는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갠지스강이 있고 또 그 각각의 갠지스강에 있는 모래알을 다 합쳐도 그 수는 부처님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사물의 수보다는 적을 것이다”고 말했다. <최상지혜>라는 책에 적혀있기를, 모든 것은 단순히 이름 뿐이며 본성은 공하고 또한 ‘최상의 지혜’조차도 이름일 뿐이며 공한 것이라는 사실을 현자는 잘 알고 있다고 한다.

 

원시불교에서는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아라한(Arhat)을 든다. 그는 성자로,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업을 쌓지 않아 다시는 태어나지 않고 입적하면 바로 열반에 드는 사람이다. 그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우주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또한 자신의 무한한 전생을 반추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대승불교에서는 보살(Bodhisattva)을 이상형으로 본다. 그는 수많은 생과 사를 거쳐 언젠가는 붓다가 될 운명을 지닌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미래의 성불 못지않게 현세에서의 자비행을 소중히 여긴다. 전설에 의하면 부처님도 전생의 어느 순간에 호랑이의 허기를 달래주기 위해 몸을 보시한 적이 있다고 한다.

 

고독한 성자인 프라티에카 붓다(Pratyeka Buddha)의 경우도 있다. 그는 스승의 도움없이 깨달음에 이르렀지만 그것을 전달할 줄은 모르는 사람이다. 경전에는 그를 중요한 꿈을 꾼 벙어리나 밀림을 홀로 종횡하는 코뿔소에 비유한다.

 

대승불교는 여러 부처님의 존재를 인정하여 일련의 이름들을 명명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세계에 수많은 부처님들이 계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 세계의 부처님은 인도에서 태어나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룬 분이다. 각 부처님들은 그가 속한 세계에 따라 체격이나 나이가 다양하게 정해진다. 모든 부처님들에게 동일한 조건이 있다. 즉 몸에 서른두개의 성상(聖相)이 있고, 발에는 백팔개의 성흔(聖痕)이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가 이룩하고자 가장 열망하는 것은 모든 인류사이의 형제애이다. 이 땅에 오실 부처님은 미륵불(Maitreya)로서 서기 4457년에 출현할 것이다. 그의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자비의 화신’ ‘사랑의 충만자’이다. 그는 지금 천상에 계시지만, 이땅에는 이미 그가 계시한 성전이 존재한다고 한다. 오랜 세월 대승불교도들에겐 미륵불이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7세기 초엽 당나라의 현장법사가 인도를 순례하였을 때 어느 계곡에서 엄청나게 큰 금박목조 미륵불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 조각가는 세번이나 천상에 올라가 친견한 후에 그 작품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미륵불에 관한 설화는 매우 다양하다. 그 중의 하나를 현장법사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절에서 미륵불탱화 조성을 위해 크게 불사를 벌이고 수년간 기도하였다. 어느날 이름모를 낯선 사람이 찾아와 그림을 그리겠다고 자원했다. 그는 등과 물감을 방에 들인 뒤, 안에서 문을 잠구어 버렸다. 여러 날이 지나도 기척이 없어 방문을 열어보니 그 사람은 온데 간데 없고 찬란한 불화만이 걸려 있었다. 그날밤 한 승려의 꿈에 미륵불이 나타났는데 그 얼굴은 사라진 사람의 모습과 같았다.

 

편역:김홍근<외대강사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