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보르헤스의 불교강의-<18> 열반

똥하 2009. 3. 30. 23:19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18>열반

 

니르바나(nirvana, 涅槃)라는 말은 서구인들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는 가장 매력적인 말이 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부드러운 발음을 내는 용어의 깊은 뜻은 간과한 채, 너도 나도 현묘(玄妙)하면서도 이국적(異國的, exotic)인 이 말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유럽과 미주(美洲)의 작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의 시인 루고네스(Leopolda Lugones)는 니르바나라는 말을 환각이나 혼돈이란 뜻과 혼동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까닭모를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그는 마침내 어렴풋한 니르바나에서

깨어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니르바나는 산스크리트어인데 팔리어로는 닙바나(nibbana)로 발음되고 중국어로는 니판(ni-pan)으로 발음된다. 역시 니르바나라는 발음이 가장 듣기에 좋은데, 이는 어원적으로는 휴지(休止)나 소멸을 의미한다. 혹은 동사로 ‘사라지다’나 ‘종식되다’로 번역될 수 있다. 불교 경전에서는 흔히 의식(意識)을 촛불이나 등불에 비유하는데 이 불꽃은 기름이 다하면 자연적으로 사그라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니르바나라는 말은 매우 적절한 용어로 보인다.

 

부처님은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이 용어를 차용했고, 자이나교에서 역시 이 용어를 사용했다. 고대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니르바나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종종 브라마니르바나(brahmanirvana 브라만(神)에 녹아듬)로 변형되어 쓰이기도 한다. ‘신성(神聖) 속에 녹아든다’는 개념은 대양(大洋)에 합류하는 물 한방울이나 우주적 용광로 속으로 사라지는 작은 불꽃 등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힌두전통 속의 인도인들은 개인의 영혼이 우주적 규모의 대양이나 화염과 합치(合致)될 수 있다고 믿는다. 흔히 니르바나는 브라만 신이나 행복이란 단어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브라만 신에 녹아든다는 것은 개인이 곧 브라만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불교에서는 의식과 물질, 주체와 객체, 영혼과 신성을 부정한다. 우파니샤드에는 우주의 순환이 신이 꾸는 꿈이라고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그 꿈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주의 운행은 꿈과 같은 것이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꿈은 아니다. 니르바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유럽의 학자들은 처음에 니르바나의 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오해했다. 달만(P. Dahlman)은 니르바나를 ‘무신론과 허무주의(nihilism)의 심연’으로 불렀고, 부르노(Burnouf)는 절멸(絶滅)로 번역했다. 이런 현상에 영향을 받은 쇼펜하우어는 니르바나가 무(無)의 완곡화법인줄 알았다. 또한 데이비드(Rhys David)는 생각하길, 니르바나는 이 땅에서 쟁취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의식의 소멸이 아니라 탐·진·치 삼독의 극복에 의하여 달성된다고 보았다. 피셸(Pischel)은 욕망의 소멸(Trishna)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죽음 이전에 니르바나에 도달한 성인은 이제 그의 행동의 업(業)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의 행위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그로 인해 상이나 벌을 받지 않는데, 그는 이미 생사(生死)의 수레에서 벗어났고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리수 아래서 니르바나에 도달한 부처님은 40년 뒤 육체적 죽음을 통하여 파리니르바나(Parinirvana, 완전한 열반)를 이룬다. 논리적으로는 세계가 환영(幻影)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에겐 그때부터 우주가 사라져야 한다. 신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은 죽어야 하듯이 끔찍한 계시를 받은 사람도 죽어야 한다. 베단타 경전에 적혀 있기를 마치 도자기가 완성되어도 도공의 회전 작업대는 계속 돌아가듯이 깨달음을 이룬 사람도 계속 살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삶은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쌓았던 행위의 관성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 이후의 행위는 또 다른 결과를 불러오지 않는다. 꿈을 꾸는 자가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계속 꿈이 진행되도록 두는 것처럼 지반묵티(jivan-mukti, 땅위의 學者)도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상카라는 이렇게 비유한다. “눈이 아픈 자에게 달이 2개로 보이더라도 그는 원래 달이 하나인 것을 아는 것처럼, 깨달은 사람은 감각의 세계를 지각하고 살지만 그것이 환영이라는 것을 안다” 달만은 인도의 고대 서사시를 인용한다. “성공과 실패, 생과 사, 육체적 쾌락과 고통… 나는 그런 허구(虛構, fiction)들의 친구도 적도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니르바나는 “안식의 문, 폭풍우 이는 바다속의 안전한 섬, 시원한 동굴, 피안(彼岸), 신성한 도시, 모든 병의 해독제, 욕망의 갈증을 가라앉히는 물, 열락의 음식, 생사윤회의 강(江)에 빠진 조난자들을 구제하는 대안(對岸)”이다.

 

<미란다왕문경>에서 말하기를, 니르바나는 비시간적이어서 감각적으로는 인식되지 않는다고 한다. 여러 생을 거친 뒤에야 겨우 그곳에 도달할 수 있지만, 니르바나는 사실상 그 생들을 선행하고 그 생들의 외부에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 위치를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불자들은 대개 그곳을 깨달은 사람이 편히 쉬는 곳이라고 형이상학적으로 인식하여 흔히 “열반에 든다”라고 표현한다.

 

오스트리아의 불교학자 에리히 프라우알너(Erich Frauwallner)는 부처님 당시에 사용되던 니르바나의 뜻을 연구해서 이 말에 대한 서구인들의 이해를 향상시켰다. 우리들은 불꽃이 꺼지는 것을 불이 소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인들은 불이 등을 켜기 전에도 존재했고, 등을 끈 뒤에도 지속한다고 생각한다. 불을 켜는 것은 불이 눈에 보이게 하는 것이고, 끄는 것은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지 불을 근절시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의식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육체가 있을 때 우리는 의식을 느낀다. 죽을 때 육체는 사라지지만 의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부처님은 니르바나를 묘사할 때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해탈을 통해 열반에 드는 것은 부처님이 가르친 교설의 핵심이다. 부처님은 세상의 모든 신비를 풀고 궁극적인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가 가르치고자 한 것은 속세(俗世) 즉 표피적인 세계로부터 해탈하는 방법이었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이것을 겨냥하고 있다.

 

편역:홍근(외대강사·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