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보르헤스의 불교강의-<19> 대승불교(1)

똥하 2009. 3. 30. 23:20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19>대승불교(1)

 

역사적으로 보면 새로나온 특이한 이론일지라도 기존의 유명한 사상가의 이름을 빌려 알려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이론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하거나, 스승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의지 혹은 모두에게 존경받는 고명(高名)을 빌어 새 이론에 권위를 부여하려는 목적 등에서 그러는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전에는 소수의 직계제자들에게만 자신의 내밀한 사상을 강의하고 오후에는 대중들을 대상으로 일반론을 강의하였다고 한다. 비전(秘傳)은 아무래도 극소수에게만 전해지는가 보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도 그랬고 이점에서 부처님도 예외가 아니다.

열반에 들기 직전 부처님은 제자들 중의 한명에게 기존에 행한 설법의 요약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부처님은 지상에서 뿐 아니라 천상에서도 설법을 베풀었으며 그 비전(秘傳)은 용왕의 지하궁전에 보관되어 있다가 기원후 2세기경에 나가르주나(龍樹)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여기서 대승불교가 탄생한다.

 

부처님이나 예수같은 옛 성인들은 스스로 종교를 창시하려고 하지 하지 않았다. 부처님의 목적은 업보의 윤회를 믿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소망하는 수도승들의 개인적인 해탈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이의 소망이었다. 프랑스 시인 르꽁뜨 드리슬은 그 적멸에의 열반을 이렇게 표현했다.

 

 

시간과 이름과 공간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생이 휘저어 놓은 평정을 가라앉혀 주소서

 

하지만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에 비운다는 표현은 채운다는 표현보다 어딘지 모르게 어려워보인다. 모든 종교는 시대에 따른 신도들의 다양한 욕구를 수용해야 하고, 불교도 오랜 세월동안 깊고도 다양한 변화과정을 거쳐왔다.

 

대승(大乘, Mahayana)이란 말은 ‘큰 수레’를 의미한다. 이와함께 원시불교는 소승(小乘, Hinayana) 즉, ‘작은 수레’라고 불리게 되었다. ‘수레’라는 용어는 다음의 비유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큰 집에서 불이 났는데, 한사람이 염소가 끄는 ‘작은 수레’를 타고 혼자서만 빠져나왔다. 반면 다른 사람은 소가 끄는 ‘큰 수레’에 대중을 싣고 빠져나왔다. 두 사람의 행위 중 어떤 것이 더 가치있는 일인가? 해답은 자명하다.

 

대승불교는 신도들에게 수많은 전생(轉生)을 통하여 자신이 성불(成佛)도 하고 많은 타인들도 구원하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긴 과정 중의 한 단계일지라도 이 생은 열반에 이르는 소중한 단계임에 틀림없다. 이렇게하여 적멸에의 지향은 생의 의지와 조화를 이루게 되고, 비움은 곧 채움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비움과 채움은 서로 상응하게 된다.

 

몇몇 불교사학자에 따르면 이미 아소카왕(기원전 264~228)시절부터 종파의 분열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유명한 왕은 불교를 신봉했지만 신앙을 강요하기 위하여 무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종교전쟁은 선민의식이 강한 유대교와 그 지파인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유물이다. 동양에서는 한사람이 여러 종교를 숭배해도 갈등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고 한 곳에 여러 종교의 제단이 같이 꾸며져 있는 곳도 있다.

 

대승불교 이론의 가장 어려운 점은 그 논리체계가 너무나 복잡하다는 사실이다. 긍정과 부정을 되풀이하고, 나누고 또 나누고 해서 결국 논리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 본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리의 건축물을 부수기 위하여 논리의 도구를 사용(때로 남용)한다.

 

대승과 소승 둘 다 기본교리는 같다. 양자는 모두 삼법인(제행무상·일체개고·제법무아)과 사성제(고·집·멸·도)에 기초한다. 그런데 대승불교는(서양철학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절대이상주의다. 우주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색·성·향·미·촉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인식된 표상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환(幻)이고, 산다는 것은 바로 꿈꾸는 것이다. 후에 세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꿈의 재료로 만들어졌다.

 

(「폭풍」, 4막1장)

 

 

서양철학자 버클리(Berkeley)와 쇼펜하우어도 현실을 환으로 보는 철학을 전개했다. 끝없이 윤회전생을 하는 속세(Samsara)는 이미 열반(Nirvana)의 세계이다. 이것을 의식하기만 하면 우리는 열반에 이르른다. 초원의 억새풀(억조창생)까지도 성불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언젠가 도달할 해탈의 그날을 기다리며 육도(六道)를 윤회하는 것이다.

 

 

소수의 수행승을 대상으로한 원시불교의 서원은 다시는 다른 육체로 환생하지 않겠다고 한 굳건한 의지를 다지고 적멸에 이르러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지만, 다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대승불교의 서원은 그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것을 혼자가 아니라 모두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성불을 미루고서라도 타인의 성불을 위해 노력하는 보살의 이상향이 불타의 이상향과 나란히 제시되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매진할 것을 권했다. 반면 대승불교는 자비의 실천을 강조한다. 복전(福田)은 팔정도를 통해 얻어질 뿐만 아니라 염불과 좌선 그리고 보시에 의해서도 구해지는 것이다.

 

 

천상불(天上佛)이란 개념은 플라톤식 원형(原型)개념과 유사하다. 석가모니불의 원형인 천상불의 이름은 아미타불(Amitabha)이며 ‘무량광명(無量光明)’이란 뜻이다. 여러 천상불은 지상에 각자 한명씩의 보살과 붓다를 가진다.

 

초기에 원시불교의 승려들과 대승불교의 승려들은 같은 사원에서 함께 거주하며 설법했다. 당연히 각자의 교의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두 교파는 서로의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어갔다. 서로의 차이점이 두드러져서 수용하기 어렵게되자 두 교파는 과도기를 거치면서 나름대로의 길을 걷게 된다.

 

편역:김홍근<외대강사·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