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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불교강의-<15> 윤회

똥하 2009. 3. 30. 23:13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15>윤회

 

 

 

윤회라는 주제는 한편 인도인들의 시간관(詩間觀)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보르헤스도 윤회를 시간의 문제를 풀기 위해 인간이 찾아낸 한 방편으로 보고 있다. 인간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죽음’이며, 죽음은 인간에게 ‘시간’의 문제로 다가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의 문제를 풀려고 노력했다. 한 철학자가 평생을 바쳐 각고의 사색과 연구 끝에 철학사에 남을 만한 위대한 학설을 정립했다 하더라도, 시간의 근본문제 해결에 얼마나 이바지했는가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보르헤스는 말하기를 많은 작가들이 생(生)이라는 수수께끼를 마주해 그것을 풀기 위하여 노력하면 결국 시간이란 문제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즉 인간의 모든 정신적 체험은 시간체험으로 환원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간과 세계의 근본을 생각하고 인식하는 학문을 흔히 형이상학(形以上學)이라고 한다. 베르그송이 형이상학의 핵심문제는 시간이라고 말했지만, 더 나아가 시간인식은 인간의 모든 정신적 체험의 핵심을 이룬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인간이 쳇바퀴처럼 흘러가는 일상(日常)에서 벗어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지금 여기’를 인식하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경험인가. ‘오늘’은 ‘오!-늘(常)’인 것이다. 그 경험은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기도 하고, 신성한 공포를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왜 내 이름이 갑돌이인지 새삼 되돌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때 모든 것은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와 진다. 흐르고 흘러도 또 새로운, 변하고 또 변해도 그대로인 시간과 함께 하는 것이다. 참선이란 어쩌면 시간을 거스르는 방법이며 선(禪)이란 시간체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 문명(文明)의 기본구조는 시간이란 불가사의한 문제를 푸는 방법론에 의하여 만들어 진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윤회도 넓게 보아 시간이 제기한 문제를 인간이 해결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볼 수 있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永遠)도 그 해결책 중의 하나이다. 종교도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문제를 풀기 위한 고심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의 해결책도 재미있다. 그는 시간의 문제를 인류가 발명한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인 영원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이데아론(論)에 따라 먼저 영원한 존재를 상정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존재는 타존재들에게 자신을 투영시키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영원 속에서는 그것을 실현시킬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타존재들은 하나씩 하나씩 연속적으로 투영되는 사물만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원 속에선 하나씩 하나씩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영원한 존재는 시간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플라톤은 시간을 영원의 움직이는 영상이라 불렀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암 블레이크는 “시간은 영원의 선물이다”고 했다. 만일 인간이 시간을 초월한 신이나 혹은 전 존재(全存在)를 딱 한번에 다 파악해야 한다면 압도당해 죽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대신 영원은 관대하게도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그 모든 경험을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겪을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따라서 시간은 영원이 인간에게 선사한 선물이 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시간의 문제와 정면으로 부닥친 사람이다. 그는 고백록 제11권에서 그의 영혼이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불타오른다고 했다. 그는 신의 날은 나날이 아니라 ‘오늘’뿐이라고 하면서 영원으로 통하는 시간인 현재를 강조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고 또 일어날 것이지만 모두 정확하게 각자의 ‘바로 지금’에서만 일어난다고 하였다.

 

시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색 중 특이한 것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 대신 미래에서 현재로 흘러들어 오는 시간을 발견한 점이다. 인간이 미래의 어느 시간을 의식하고 그것에 기초한 소망스런 미래상(未來像)을 그려낸다면, 그때부터 그 미래상은 현재를 의욕적이고 건설적인 창조의 시간으로 바꾼다는 점을 그는 지적했다. 미래의 성취에 대한 강한 확신은 커다란 인력(引力)이 되어 현재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고무하게 된다. 뿐만아니라 영원의 시간 속에 매몰되어 버린 화석(化石)같은 과거도 미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쏘이면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고난은 찬란한 미래를 위한 시금석(試金石)으로 변하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사색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게 하기도 하고, 혹은 고난의 오늘을 극복하는 힘을 주기도 한다. 또한 시간관(時間觀)은 문명이나 시대의 성격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 주기도 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도인들처럼 그리스인들도 윤회를 믿었다. 다시 말하면, 인도인들처럼 그리스인들도 시간을 원형(圓形)으로 본 것이다. 시간은 순환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기독교는 시간을 직선으로 본다. 시간은 천지창조에서 최후의 심판까지 일회적(一回的)이고 직선적이며 유한(有限)하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 유한한 시간의 밖에 무한한 시간인 영원을 상정함으로써 유한한 시간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현대(現代)’라는 이 시대의 이름은 우리 현대인들의 의식 저변에 깔려있는 시간관을 잘 표현하고 있다. ‘현대’라는 말은 영어 모던(modern)의 번역어이다. 모던의 원래의 뜻은 ‘새로운’이었으며 영어의 뉴(new)와 동의어였다. 현대인인 우리들은 왜 자신을 ‘새로운 사람’으로 부르고 있을까? 바로 우리의 시간관이 ‘새로운 것이 좋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새로운 것은 곧 좋은 것을 의미한다. 이 시대에는 진보(進步), 선진(先進), 첨단(尖端), 진화(進化), 혁명(革命) 등의 직선논리가 각광을 받고 사회에 난무하고 있다.

 

과거엔 부끄러움이었던 불초(不肖, 아버지를 닮지 않음)가 새로움에 대한 숭배로 인해 미덕으로 대접받는 시대를 살며 맹목적으로 앞을 향해 질주하는 인간 군생들-현대인들에게 보르헤스는 불교를 인용하여 시간이란 환(幻)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편역:김홍근<외대강사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