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보르헤스의 불교강의-<7> 역사상의 불타

똥하 2009. 3. 30. 22:54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7>역사상의 불타

 

붓다의 전기를 연구할 때 부딪히는 문제는 붓다의 생애에 대한 자료도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기록으로 전해 내려온 게 아니라 문학이나 전설의 형태로 알려져 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어느 개인이 자의적으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대부분 원래 사실이 다소 과장되게 표현된 것일 뿐이다. 인도작가들의 과장법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들이 없는 것을 조작해 낸 것 같지는 않다. 불전(佛傳)에 등장하는 정황묘사를 통해 우리는 당시의 실제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싯다르타 태자가 왕궁을 버리고 출가한 것이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은 정확한 사실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숫자는 어떠한 상징적 복선을 깔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스승을 찾아가 배웠다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단순히 찬양하기만을 위한다면 스승을 찾았다는 것보다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했다고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 테니 말이다.

 

붓다의 발병(發病)과 죽음에 관한 대목도 거의 사실적인 묘사에 가깝다. 붓다의 병환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알려져 있는 음식도 누군가가 꾸며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사실적인 기록인 것으로 보여진다.

 

출가하기 전 태자로서의 싯다르타의 화려한 생활에 대한 묘사는, 출가 후 겪게 되는 고통스런 수행과 극적으로 비교하기 위해 다소 과장하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불교학자 올덴버거(Oldenberg)는 ‘숫도다나’란 이름이 ‘순수한 쌀’ 혹은 ‘순수한 음식을 가진 자’의 뜻을 가진 정반왕(淨飯王)으로 번역되는 것을 보고 그가 왕이라기 보다는 넓은 쌀 경작지를 소유한 부유한 대지주였다고 생각했다.

 

정각을 이루기 전 붓다의 수행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러나 45년간의 전법여행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기적에 대한 몇몇 과장된 묘사만 제외한다면 대부분 사실인 것 같다. 특히 기록된 전법 행선지와 오늘의 실제 지리(성지)는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서 잠깐 붓다가 살았던 기원전 6세기는 인류사에 성인들의 시대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싶다. 공자(孔子), 노자(老子), 피타고라스 그리고 헤라클리토스 등이 붓다와 동시대인들이다.

 

서구인의 입장에서는 붓다의 일생과 예수의 일생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이 불가피한 일인지 모른다. 예수의 전도생활은 격정적이고도 극적인 사건으로 채워진 반면 붓다의 전도생활은 인류의 스승으로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신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여 도둑들 사이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죽었다는 교리는 태자가 출가하여 성도(成道)한 뒤 깨달음의 길을 열었다는 사실보다 훨씬 강열하다. 그러나 관과할 수 없는 사실은 불교는 개인의 유일한 인격이라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예수같이 드라마틱한 인물상은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자체에 위배된다는 점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들 중 두사람이 내이름으로 모이면 내가 그중 세번째 사람이 되겠다’고 했다. 비슷한 상황에서 붓다는 ‘너희는 자기 자신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여라’라고 가르쳤다. 타력 신앙과 자력 신앙의 대조가 뚜렷하다.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는 말하기를 개인으로서 고타마의 존재는 불자의 신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덧붙이기를 대승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붓다는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이땅에 나타나는 원형(原型)이기 때문에 붓다의 개성적인 모습은 큰 의미가 없다고 했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일회적(一回的)이고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붓다의 삶과 가르침은 역사적인 주기 때마다 반복되며 고타마는 과거에서 미래로 끝없이 연결되는 거대한 흐름의 한 사슬의 역할을 다하였다.

 

 

출가수행의 전통은 고타마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도인에게 적용되며 오늘날에도 장년기를 넘어선 많은 인도인들은 가족과 재산을 뒤로하고 수행사문의 길을 걷는다.

에드워드 콘즈는 말한다. “서구의 역사학자의 눈에는 붓다의 인간적인 모습만 사실이고 신비로운 정신세계는 모두 픽션으로 보이겠지만 불자의 입장에서는 붓다의 지고한 정신세계가 일차적으로 가장 소중한 것이지 붓다의 개인사(個人史)는 찬란한 정신적 보석을 감싸는 누더기처럼 부차적인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다”

 

서구의 불교사(佛敎史) 학자들이 부딪히는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다. 쇼펜하우어처럼 인도인들도 역사를 경시한다. 연대기(年代記)적인 의식이 희박한 것이다. 11세기 초반의 아랍학자였던 알베루니(Alberuni)는 인도에서 13년을 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도사람들은 역사적인 사건의 순서나 왕위 계승의 계보(系譜)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질문을 할라치면 어떤 대답을 만들어 답할지 종잡을 수가 없다”

 

사실 인도인들에겐 어느 역사적인 날짜나 장소 혹은 개인의 이름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사상이나 정신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붓다의 탄생지로 알려진 카필라바스투(城)는 샨캬교 창시자 카필라가 불교에 미친 커다란 영향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인도철학자들은 종종 여러시대의 철학학파들을 동시대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도철학사가 확립된 것은 막스 밀러(Max miiller)나 도이센(Deussen) 같은 유럽학자들에 의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