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사

[스크랩] 고려25대 충렬왕실록

똥하 2008. 11. 19. 19:40

1. 변발한 충렬왕과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

   (1236~1308년, 재위기간 : 1274년 6월~1298년 1월, 1298년 8월 복위~1308년 7월, 1298년 1월부터 동년 8월 초까지는 충선왕 재위기간이므로 총 재위기간은 33년 6개월)


   원 세조의 부마가 된 충렬왕(忠烈王)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급속도로 원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철저한 친 원 정책 덕분으로 고려 왕실은 오히려 무신정권에게 잃었던 힘을 회복하게 된다. 이에 따라 조신들의 힘은 미미해져 정치가 실종되고, 사회 전반에 변발과 호복차림의 몽고 풍속이 만연하여 고려는 점차 자생력을 잃어간다.

   충렬왕은 원종의 맏아들이자 정순왕후 김씨 소생으로 1236년 2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심(諶) 또는 춘(賰), 이름은 거(昛)이다. 그는 1259년 6월 고종이 죽자 몽고에 입조해 있던 원종을 대신해 임시로 국사를 대리하였으며, 1267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 후 1272년에 원나라에 입조하여 연경에 머물렀으며, 1274년에 원 세조의 딸 홀도로게리미실 공주에게 장가들어 원의 부마가 되었다. 그리고 1274년 6월 원종이 죽자 귀국하여 고려 제25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충렬왕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 귀국할 때 이미 몽고 풍속에 따라 머리를 변발하고 복장도 호복(되옷)을 하고 있었다. 또한 원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 홀도로게리미실을 맞이할 때는 모든 신하들에게도 변발을 강권했으며, 변발을 하지 않은 자는 회초리로 쳐서 환영식장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 조신들은 모두 변발을 하게 되었고, 이를 지켜본 백성들은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철저하게 친 원 정책을 표방한 충렬왕은 원의 요구를 받아들여 즉위 4개월 만인 1274년 10월에 일본정벌 전쟁을 단행한다. 그동안 고려를 통하여 일본의 조공을 요구하던 원나라는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자 무력으로 일본을 정벌하여 세력을 과시하고자 했고, 이를 위하여 고려군을 동원했던 것이다.

   일본정벌을 위해 충렬왕은 김방경, 임개, 손세정 등에게 군사 8천을 내주었고, 원나라는 도원수 홀돈, 우부원수 홍다구, 좌부원수 유복형 등이 이끄는 몽고군과 한족 연합군 2만 5천을 동원하였다. 여기에 뱃길 안내자 및 수군 6천 7백 명이 가세하여 총 4만 군사가 9백여 척의 배에 나눠 타고 일본 정벌길에 올라 대마도를 장악하였다. 하지만 태풍으로 인해 일본 본토로 나아가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그러나 원나라는 여기서 물러나지 않고 다시금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 위해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고 1281년에는 15만의 여원연합군을 형성하여 일본으로 떠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태풍으로 인해 본토 진입에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 세조는 지속적으로 고려 조정에 일본 정벌을 강요하여 민간의 피해가 극에 달했다.

   그런 가운데 1290년에는 원을 괴롭히고 있던 내안의 합단군이 고려에 내침하여 충렬왕이 조신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천도하는 지경에 이른다. 합단은 한 때 원주와 충주를 함락하고 개경을 위협하는 등 고려군을 궁지로 내몰았으나 원나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1년 반 만에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싸움에서 원충갑, 한희유 등의 활약이 컸으나 고려 왕실은 줄곧 원나라의 지원에만 의존하는 나약한 모습으로 일관하여 원나라의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북방 야인과 왜구들의 침입마저 잦아져 고려 사회는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김방경 등의 활약으로 이 같은 난국이 극복되어 가까스로 국운을 보전할 수 있었다.

   1290년에는 반역자 최탄이 몽고에 바침으로써 생긴 동녕로를 원 세조에게 직접 환부(還付)해줄 것을 요청하여 서북면 일대의 국토를 회복하기도 하였다. 그 후 1293년에 원 세조가 사망함으로써 원의 일본 정벌 압력도 사라지게 되어 고려 사회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으며, 1294년에는 삼별초의 최후 근거지로 몽고군에 의해 함락되었던 탐라를 돌려받아 제주라 고치고 목사를 파견하였다.

   이 같은 영토 회복에도 불구하고 고려 사회에 대한 원의 복속정책은 점점 강화되었다. 원은 고려의 행정관제가 자신들과 다름없다고 비판하면서 격하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1275년에 중서문하성과 성서성을 합쳐 첨의부로, 추밀원은 밀직사로, 어사대는 감찰사로 격하되고, 6부도 통폐합되어 전리사, 군부사, 판도사, 전법사로 바뀌었다. 게다가 묘호에 조(祖)나 종(宗) 대신에 왕을 붙이도록 하였고, 왕의 시호 앞에는 일괄적으로 ‘충(忠)’ 자를 붙이도록 강요하였다. 또한 선지(宣旨, 임금의 명을 널리 선포함)는 왕지(王旨)로, 짐(朕)은 고(孤)로, 폐하(陛下, 섬돌 아래라는 뜻으로 임금을 부르지 않고 임금을 표현하는 호칭)는 전하(殿下, 궁궐 아래라는 뜻으로 왕족을 부르지 않고 표현하는 호칭)로, 태자는 세자로 격하되었다.

   이 밖에 몽고 직제의 영향으로 생긴 관직도 많았는데, 몽고식 기병이 야간 순찰을 돌게 하는 순마소, 매 잡는 일을 임무로 하는 응방, 귀족의 자제로 일찍이 왕을 좇아 원나라에 질자[質子, 독노화(禿魯花)라고도 불렀으며, 일종의 볼모시종]로 갔다가 순번제로 숙위를 맡는 홀치(忽赤 또는 忽只), 몽고어를 습득케 하는 통문관 등이 있었다. 그리고 관직은 아니지만 원나라 공주를 따라와 보필하는 임무를 맡았던 겁령구[怯怜口, 사속인(私屬人)] 등도 관직 이상의 힘을 행사했다.

   이러한 몽고 직제에 속한 관원들은 토지를 지급받는 등 특권을 누렸으며, 원나라 세력에 의지하여 권세가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부역을 피해 도망하다 잡힌 양민들을 부리며 대농장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며, 조세를 가로채고 주현의 부세를 뜯어 먹는 등 여러 방면에서 권력을 남용하였다.

   게다가 원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온 이후에도 줄곧 몽고인 시종을 부리며 몽고어를 쓰고 몽고 풍속을 그대로 따르는 바람에 고려 왕실에는 몽고 언어와 풍속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민족성을 고취시키고 자주성 회복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던 승려 일연은 1281년에『삼국유사』를 저술하고 고려민족의 역사적 전통을 일깨운다. 또한 당대의 대학자 안향은 민족주의와 춘추대의에 의한 명분주의 정신을 강조하는 주자학을 도입하여 고려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하지만 충렬왕은 점점 몽고에서 배운 사냥에 빠져 정사를 뒷전으로 미루고 국고를 탕진하였으며, 그의 총애를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던 궁인 무비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졌다. 이 때문에 제국대장공주와 세자 원의 반발이 심했지만 충렬왕의 잦은 사냥과 폐행은 계속되어 일부 측근 신하들의 권력 독식이 심화되었다.

   이렇게 되자 충렬왕과 세자 간에 알력이 생겼고, 세자는 1296년에 원에 가서 진왕 감마라의 딸 계국대장공주에게 장가들어 원의 부마가 된다. 그런데 그 이듬해 5월에 세자 원의 모후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하여 충렬왕과 세자 간의 알력은 더욱 심해진다.

   모후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세자 원은 그해 7월에 귀국하여 궁인 무비와 환관 도성기 및 최세연, 전숙, 방종저 등과 중랑장 김근을 죽이고 그들의 도당 40여 명을 귀양 보낸 후 다시 원나라로 떠난다. 이로써 원 왕실은 세자 원을 지지하게 되고, 충렬왕은 스스로 와위를 내놓고 물러나겠다는 글을 원에 보낸다.

   충렬왕이 물러남에 따라 1298년 1월 세자 원이 즉위하여 왕위에 오르니, 그가 충선왕이다. 하지만 충선왕은 고려제도를 복원하는 등 자주적 기틀을 마련하려고 하다가 왕비인 계국대장공주가 원에 무고하는 바람에 즉위 7개월 만인 그해 8월에 국세를 빼앗기고 원으로 압송된다.

   충선왕이 물러나자 왕위는 다시 충렬왕에게 돌아간다. 이후 충렬왕은 아들 충선왕을 제거하기 위해 왕위를 10촌 종제인 서흥후 전에게 계승시키고 계국대장공주를 그에게 개가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한다. 그는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1305년에 직접 원나라를 방문하여 2년간 머물기도 하였다. 그러나 1307년 정월에 원나라 성종이 죽고 충선왕이 무종의 옹립에 공을 세워 힘이 강성해지는 바람에 이 계획은 무산 된다

   무종의 신망을 얻은 충선왕은 그 후부터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아직 태자로 있던 무종의 힘을 빌려 그동안 자신과 부왕 사이를 이간질시키던 왕유소, 송방영, 송린, 한신, 송균, 김충의, 최연 및 그 일당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때부터 충렬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모든 정사는 충선왕이 주관하게 된다.

  아들 충선왕을 제거하기 위해 원나라 행을 강행했던 충렬왕은 비참한 몰골로 1307년 4월에 귀국길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308년 7월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능호는 경릉이며 그 위치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2. 충렬왕의 가족들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를 비롯하여 정신부주 왕씨, 숙창원비 김씨, 시비 반주 등 4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이들 중 제국대장공주가 충선왕을, 정신부주 왕씨가 강양공 자와 정녕, 명순 등 1남 2녀를, 시비반주가 소군 서를 낳았다. 이들 중 3명의 부인과 강양공 왕자, 소군 왕서의 삶을 간략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시비 반주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이에 대한 언급은 생략한다.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1259~1297년)

   장목왕후는 원 세조 쿠빌라이와 아속진가돈의 딸로서 봉호는 제국대장공주이며 몽고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이다. 고려에서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을 원하자 1274년에 당시 태자 자격으로 원에 입조하고 있던 충렬왕과 혼인하였다. 그리고 1274년 6월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해 11월에 고려에 왔으며, 이듬해 정월에 원성공주에 책봉되었다.

   그녀가 개경에 왔을 때 충렬왕에겐 이미 정화궁주(정신부주 왕씨)와 그녀 소생의 1남 2녀, 그리고 시비 반주 소생인 소군 왕서 등의 가족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원 세조의 딸이라는 이유로 제1왕비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정화궁주는 그녀를 대할 때마다 아랫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야 했다. 이는 장목왕후가 고려 출신의 왕비들과는 현격하게 다른 대접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목왕후는 지배국의 공주 신분임을 앞세워 국왕보다 더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때문에 충렬왕은 때때로 그녀의 강압에 못 이겨 정사를 처리하는 일이 잦았으며, 심지어는 원 부인인 정화궁주를 감금하여 왕을 만나지 못하게까지 했다.

   또한 그녀는 원종의 셋째 아들인 순안공 왕종을 역모로 몰아 그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 자기가 소유하고, 왕종을 유배시키는 한편 그의 모후 경창궁주도 서인으로 전락시켜 궁궐에서 내쫓는다.

   이렇듯 장목왕후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왕권을 능멸하자 충렬왕은 사냥과 여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장목왕후와 충렬왕 사이에는 갈등이 이어지고, 이것이 확대되어 후에 세자 원(충선왕)과 충렬왕의 권력 다툼으로 발전한다.

   정목왕후가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며 경계하였던 인물은 궁인 무비였다. 그녀는 충렬왕의 총애를 받으며 주변에 많은 측근들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충렬왕은 그녀와 어울려 가무를 즐겼고, 사냥에도 항상 그녀를 대동하고 다녔다. 이러한 왕의 극진한 배려 때문에 장목황후는 그녀를 어쩌지 못하고 속만 태우다가 1297년 5월 3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가 죽자 당시 원에 입조해 있던 세자 원이 입국하여 모후의 죽음이 궁인 무비와 그 주변 무리들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무비를 비롯한 측근들을 죽이고 도당 40여명을 유배시켜 버렸다.

   장목왕후는 죽은 해 9월에 고릉에 매장되었으며, 충렬왕은 그녀에게 장목인명왕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1298년 충선왕이 일시적으로 왕위에 올라 그녀를 인명태후로 추존하였으며, 1310년에 원나라 무종이 제국대장공주에 추봉하였다.


   정신부주 왕씨(?~1319년)

   정신부주 왕씨는 종실 시안군 왕인의 딸이다. 충렬왕이 태손(太孫)으로 머물 때 혼인하여 입궁하였으며, 충렬왕이 왕위에 오르자 정화궁주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1274년에 제국대장공주가 입국하자 제2l로 전락하여 별궁에 유폐되는 등 많은 어려움을 당한다.

   1276년 12월에 어떤 사람이 다루가치 석말천구의 처소에 “정화궁주가 공주를 저주하고 있으며, 제안공 왕숙과 김방경 등 43인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내용의 투서를 하였다. 이 때문에 정화궁주 및 왕숙, 김방경 등이 하옥되었다. 하지만 재상 유경이 장목왕후를 찾아가 울면서 이들의 무죄를 주장하여 가까스로 풀려났다.

   장목왕후 사후에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충렬왕과 함께 상수궁으로 거처를 옮겨 함께 지냈으며, 충렬왕 사후에도 10년을 넘게 살다가 1319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소생으로는 강양공 자와 정녕, 명순 두 원비가 있으며,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숙창원비 김씨(생몰년 미상)

   숙창원비 김씨는 위위윤으로 있다가 물러난 김양감의 딸이며 용모가 뛰어난 여자였다. 그녀는 일찍이 진사 최문에게 시집갔으나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그런데 장목왕후가 죽자 충선왕이 부왕이 총애하던 궁녀 무비를 죽이고 대신 그녀를 충렬왕에게 바쳤다.

   충렬왕의 사랑을 받은 그녀는 숙창원비에 봉해졌는데, 충렬왕이 죽은 후 빈전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충선왕과 눈이 맞아 불륜관계를 맺었다. 그 얼마 후에 충선왕은 그녀를 숙비로 봉해 다시 자신의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충선왕의 이 같은 행위는 고려 풍속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몽고에는 부왕이 죽으면 모후를 제외한 나머지 후궁들을 아들이 취하는 풍속이 있어 그 전례를 따른 듯하다.

   그녀를 숙비로 맞아들인 충선왕은 한때 완전히 정사를 폐하고 그녀와 노는 데만 열중하기도 했으며,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에 방해가 된다 하여 팔관회를 정지시키는 일도 있었다. 또한 원나라 왕태후에게 부탁하여 몽고부인들이 머리에 쓰는 고고(姑姑)를 구해다가 그녀에게 선물하기도 했을 정도로 그녀에 대한 충선왕의 애정은 지극했다.

   그녀는 충선왕이 원나라에 머물 때도 곧잘 원나라 사신들의 연회에 초대되기도 했고, 궁인들을 거느리고 박연폭포로 나들이를 떠나는 일도 잦았다. 또한 매일 같이 사원을 출입하여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온갖 사치를 부리며 화려한 옷을 입고 다녔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소생은 없었던 것 같다.


   강양공 왕자(?~1308년)

   강양공 왕자는 충렬왕의 맏아들이자 정신부주 왕씨 소생이다. 그는 맏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제국공주 소생 충선왕에게 밀려 세자에 오르지 못했으며, 제국공주의 미움을 받아 1279년에 충청도 아주(牙州) 동심사로 보내져 그곳에서 지내야 했다. 이는 당시 다섯 살의 어린 아이였던 세자 원을 위협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1283년에 소환되어 강양공에 봉해졌으며, 1308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에게는

유, 고, 훈 등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 중 둘째 아들 왕고는 충선왕이 친자식처럼 사랑하여 궁중에서 키웠으며, 나중에 충숙왕에게 선위하면서 그를 세자로 세웠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봉호인 심양왕 자리를 그에게 물려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이 같은 충선왕의 총애를 기반으로 왕위를 넘보게 되고, 누차에 걸쳐 충숙왕을 무고하여 곤경에 빠뜨린다.


   소군 왕서(생몰년 미상)

   소군 왕서는 충렬왕의 둘째 아들로 시비 반주 소생이다. 시비 반주는 충렬왕이 태손으로 있을 때 최이의 시비로 있었는데, 그가 제거되자 김준에 의해 충렬왕에게 바쳐졌다.

   그 후 충렬왕은 그녀에게서 아들을 얻었는데 그가 왕서이다. 왕서는 제국공주 장목왕후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어떤 이유로 장목왕후가 그를 총애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덕분에 그는 대궐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고, 왕소군이라는 호칭도 얻었다. 그리고 중랑장으로 임명되어 거만한 행동을 하다가 충렬왕의 눈 밖에 나서1276년에 머리를 깎이고 승려가 되었다. 출가 이후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3. 일본정벌 전쟁 배경 및 관려 인물들

   

   몽고는 세조 쿠빌라이가 즉위하면서 국호를 원으로 바꾸고 영토확장 정책을 더욱 가속화한다. 한반도는 물론이고 중국 대륙에서도 양자강 이남의 남송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복속시켰고, 그 여파는 유럽까지 미쳤다. 이에 따라 남송의 몰락도 시간 문제였고, 동북아지역에서 복속되지 않은 곳은 오직 일본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은 여전히 남송과 유대관계를 형성하며 무역을 하고 있었고, 쿠빌라이는 이 같은 일본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1267년에 고려의 중재를 받아 일본에 사신을 보내고 속히 조공하라는 친서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 무렵 조이라는 자가 고려가 일본과 내통하여 원나라에 대항할 계책을 꾸미고 있다고 거짓 고변을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이는 원래 고려 사람으로 진사 시험에도 합격한 바 있는 문사였다. 그런데 여몽전쟁 중에 고려를 배반하고 몽고에 투항하여 그곳에서 수재 칭호를 받았다. 그는 한어, 몽고어, 금어 등 여러 나라 언어에 능통하고 국제정세에도 밝은 인물이었다. 따라서 쿠빌라이에게 일본의 존재를 인식시킨 것도 아마 그였을 것이다.

   당시 고려가 일본과 선린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한 조이의 주장에도 몇 가지 근거는 있었다. 1263년 고려는 도서 지역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들 때문에 대관서승 홍저와 첨사부녹사 곽왕부 등을 일본에 보낸 일이 있었다. 그리고 왜구의 근거가 대마도임을 확인하고 일본 조정이 왜구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요청했고, 일본은 고려의 요청을 수용해 대마도의 왜구들을 진압하였다. 이 사건 이후 고려와 일본은 나름대로 선린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중국으로 가던 일본 사절단이 풍랑을 만나 구주에 임시 정박했을 때도 고려조정은 그들에게 쌀을 내주고 도움을 주었으며, 난파된 일본 상선을 구제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내주기도 하였다.

   이 같은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조이는 1267년 정월에 일본으로 향하던 몽고 사신이 풍랑으로 되돌아오자 이것을 고려의 고의적인 방해전술이라고 보고했던 것이다.

   이 당시 몽고 사신들을 안내하던 사람은 송군비와 김찬이었다. 원나라로부터 일본 문제에 대한 추궁을 받은 고려는 즉시 송군비를 원에 파견하여 해명을 하였다. 하지만 쿠빌라이의 추궁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고려는 1267년 9월에 반부를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고 안경공 왕창을 원에 보내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반부는 일본에 당도하여 쿠빌라이의 친서와 고려 국왕의 국서를 전달했지만 일본 조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결국 이듬해 7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다. 고려는 이런 사정을 전달하기 위해 반부를 원으로 보냈다.

   고려로부터 일본의 무성의한 태도를 전해들은 쿠빌라이는 몽고 사신을 직접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흑산도와 일본 간의 뱃길을 살피는 시찰단을 보냈다. 말하자면 그는 고려의 보고를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쿠빌라이가 원종에게 보낸 조서는 고려에 대한 이 같은 불신을 잘 말해주고 있다.

   “먼젓번에 당신에게 일본으로 가는 사신의 길 안내를 부탁하였더니 말을 꾸며서 바람과 물결이 험악하여 쉬이 건널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반부 등이 어디로 해서 일본을 다녀왔단 말인가? 참으로 가증스럽고 어리석은 처사가 아닌가. 그대가 건널 수 없다는 곳을 건넜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번 보고에는 반부가 일본에 갔더니 그를 압박하여 돌려보냈다고 했는데 이 말도 어디 믿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제 다시 흑적, 은홍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반드시 일본에 도달하게 하려고 하니 마땅히 대신으로 하여금 길 안내를 하게 하여 이전처럼 지연시키거나 방해하지 말 것이다.”

   이렇게 하여 1268년 12월에 신사전과 진자후, 반부 등의 안내를 받아 원나라 사신 흑적과 은홍은 일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본토에는 가지 못하고 이듬해 3월에 대마도에 도착하여 왜인 2명을 데리고 다시 원으로 되돌아갔다.

   왜인 2명을 데리고 신사전을 비롯한 고려인들과 흑적, 은홍 등이 연경에 도착하자 쿠빌라이는 무척 기뻐하며 고려인들에게 상을 내리고 2명의 왜인에게 일본이 원에 내조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대마도로 돌아간 왜인들은 그 뒤에 어떠한 소식도 알려오지 않았고, 일본 조정 역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원은 다시 고려를 의심하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쿠빌라이는 원종에게 고려에 난파한 남송의 상선을 그냥 돌려보낸 일을 따지는 한편, 일본으로 가는 고려의 귀화인을 통해 한때는 일본이 해마다 고려에 공물을 바쳤다는 말을 들었다며 고려가 일본과 내통하고 원과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지 않느냐고 추궁했던 것이다.

   이에 고려는 남송의 배를 놓아준 적은 있으나 그것은 단순한 상선에 불과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일본에게서 공물을 받았다는 문제도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하였다. 그런데 1272년 삼별초의 난이 한차이던 때에 이를 진압하러 온 홍다구에 의해 새로운 문제가 하나 제기된다.

   홍다구는 서경의 낭장으로 있다가 몽고에 항복한 홍복원의 아들로 몽고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으며, 조이와 더불어 고려를 자주 곤궁에 빠뜨리던 인물이다. 홍복원은 몽고에 전향한 이후 줄곧 몽고군을 인도하여 고려 침략을 도왔기 때문에 몽고 조정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당시 몽고에 볼모로 가 있던 영녕공 왕순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다가 왕순의 아내를 분노케 하여 몽고 칙사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왕순의 아내는 몽고 왕족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남편을 능멸하는 홍복원을 칙사에게 고발했던 것이다. 이에 칙사가 홍복원을 죽이고 그의 처와 아들 다구, 군상 등을 포박하여 데리고 갔다.

   그 후 홍다구는 쿠빌라이에게 신망을 얻어 다시 관직을 얻어 아비의 죽음에 대한 원한으로 고려 조정을 곧잘 궁지에 몰아넣곤 하였다. 그리고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몽고군을 이끌고 고려에 왔다.

   사건은 난이 한창 진행 중이던 1272년에 일어났다. 그해 왜선이 김해에 정박한 일이 있는데, 경상도 안무사 조자일은 왜선이 정박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다시금 원나라로부터 고려가 일본과 연계를 가지고 원을 치려고 한다는 오해를 사게 될까 봐 서둘러 왜선을 돌아가게 하였다. 그런데 홍다구가 이 사실을 알아내고 조자일을 문초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쿠빌라이에게 “고려가 왜와 상통한다.”는 보고를 하였다.

   이 일이 화근이 되어 결국 원은 일본을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1274년부터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에 돌입하였다. 이 때 홍다구는 조선감독관이 되어 조선 작업을 독촉하고 각처에서 뛰어난 사공들을 징집하였다. 그리고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한 지 4개월 만인 그해 10월 드디어 여원연합군은 일본정벌 길에 올랐다.

   연합군은 총 4만 명으로 몽고군 및 한(漢)군 2만 5천, 고려 육군 8천, 수군 6천 7백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여기에 여진 군이 가담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여진 군이 시간을 지키지 못하자 이 병력만으로 9백 여 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합포를 출발하였다.

   고려군은 도독사 김방경이 중군을 통솔하고 박지량, 김흔을 지병마사로, 임개를 부사로 삼았으며, 김선을 좌군사, 위득유를 지병마사, 손세정을 부사로 임명하였다. 또 김문비를 우군사로 삼고, 나유와 박보를 지병마사, 반부를 부사로 임명한 후 전체를 삼익군이라고 하였다. 한편 몽고는 도원수 홀돈을 원술, 홍다구를 우부원수로, 유복형을 좌부원수로 삼아 군사를 통솔하게 하였다.

   연합군은 합포를 떠나 곧 대마도에 도착하여 섬을 장악했으며, 다시 일기도(一岐島)로 진격하니 일본군이 진을 치고 버티고 있었다. 이에 따라 연합군과 일본군 간에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일본군은 1천 여 명의 희생자를 내며 대패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이 다시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여 좌부원수 유복형이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는 등 피해가 속출하자 연합군은 뱃머리를 돌려 후퇴하였다. 그런데 퇴각하던 날 밤에 폭풍이 몰아쳐 많은 전함들이 파손되고 군사들이 수장되는 바람에 연합군은 황급히 귀환해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 원정에 실패한 원의 쿠빌라이는 1277년에 다시금 일본 정벌을 독촉한다. 하지만 이 때 위득유 등이 김방경이 갑옷을 감추고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무고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 바람에 김방경은 홍다구로부터 고문을 받고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쿠빌라이 앞에서 결백을 증언하여 풀려난다.

   제2차 일본 정벌은 한동안 연기되다가 1280년에 일본 정벌을 위한 기구인 정동행성이 세워지고, 이듬해 3월에 재개된다.

   제2차 원정에서는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 흔도와 홍다구가 이끈 몽고군과 한군 등 총 5만 군대가 선발대로 출발했고, 범문호가 이끄는 남만군 10만이 후발대로 출발했다. 이들 연합군 15만은 다시 한 번 일본 본토를 노렸으나 홍다구가 이끄는 몽고군이 크게 패하고 후발대로 도착한 범문호의 남만군 10만이 8월에 폭풍을 만나 모두 수장되는 바람에 대패하고 돌아왔다. 이 때 김방경의 뛰어난 통솔로 고려군의 피해는 비교적 적었으며, 밀물과 썰물에 밀려다니는 남만군 10만의 시체가 합포 포구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이렇듯 1, 2차 원정에서 일본에 대패하자 쿠빌라이는 정동행성의 기능을 더욱 강화하여 일본 정벌에 혈안이 된다. 이 때문에 고려는 막대한 물질적 피해와 노동력 손실을 입게 되어 누차에 걸쳐 일본 정벌 계획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1294년에 죽을 때까지 일본 원정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쿠빌라이가 죽자 원나라 내부에서 일본 정벌이 불가함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승상 완택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일본 정벌 계획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일본 정벌을 위해 만들어졌던 정동행성은 여러 차례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다가 1299년부터는 고려와 원을 연결하는 교량적 기구로 변모되었고 공민왕 대에 가서야 비로소 타파된다.

   쿠빌라이가 그토록 일본을 정벌하고자 했던 것은 그 스스로가 일본에 보냈던 조서에서 밝힌 대로 후대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명예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1276년에 그동안 양자강을 버팀목으로 겨우 지탱하던 남송이 무너지자 동복아에서 일본은 원에 조공을 바치지 않은 유일한 나라로 남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이 점이 마음에 걸려 끊임없이 일본 정벌을 추진했지만 해군력이 약한 몽고군으로서는 일본 정벌은 무리였다. 일본은 이 때 자신들을 지켜준 태풍을 일러 ‘가미카제’ 즉 ‘신풍(神風)’이라고 불렀으며, 이 명칭은 태평양전쟁 때에 자살특공대의 이름으로 되살아난다.


   4. 일연과『삼국유사』


   몽고의 고려 복속 정책이 급속도로 진행되던 13세기 말, 고려의 문화와 역사가 형편없는 취급을 받아 민족성이 사라지고 있던 시기에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기반 마련에 박차를 가하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승려 일연이다.

   일연은 김언정의 아들로 1206년 경상도 장산(경산)에서 태어났으며, 처음 법명은 견명이고, 처음 자는 회연, 자호는 목암이다. 1214년 지금의 광주 지방인 해양의 무량사에 가서 학문을 닦았으며, 1219년 설악산 진전사로 출가하여 고승 대웅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여러 곳에서 수련하여 구산문 사선(四選)의 으뜸이 되었다.

   1227년에는 승과의 선불장에 응시하여 장원인 상상과에 급제하고 비슬산 보당암에 거처하면서 수년 동안 참선과 수행 정진에 몰두하였다. 1236년에 여몽전쟁이 한창일 때 조정으로부터 삼중대사의 승계를 받았으며, 1246년에는 선사에 올랐다. 또한 1249년에는 남해의 정림사로 자리를 옮겨 대장경 주조 작업에 참여하였다. 1256년 여름에 윤산의 길상암에서『중편조동오위』 2권을 지었고, 1259년에는 대선사의 승계를 제수 받았다. 또한 1261년에는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로 갔으며, 선월사에 머무르면서 설법을 행하고 지눌의 법을 계승하였다.

   이후 오어사에 머무르다가 인홍사의 만회를 이어 후학을 양성하였고, 1268년에는 조정에서 선ㆍ교 양종 승려 1백 명을 대상으로 대장낙성회향법회를 베풀자 그것을 주관하였다.

   충렬왕 즉위 후에는 청도 운문사에 머무르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고, 이 때부터『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1277년에서 1281년 사이에 집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은 총 5권 2책으로 이뤄져있으며, 권에 상관없이 왕력(王歷), 기이(紀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 등 9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 편은 삼국, 가락국, 후고구려, 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며, 기이 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로 서술하였는데 1, 2권에 계속된다. 기이 편의 서두에는 이 편의 설정 이유와 서문이 붙어 있다. 흥법 편에서는 삼국의 불교 수용과 그 융성에 관한 6항목, 탑상 편에서는 탑과 불상에 관한 사실 31항목, 의해 편에서는 원광서학조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하는 14항목, 신주 편에서는 신라의 밀교 승려들에 관한 3항목, 감통 편에서는 신앙의 영적인 면과 감응에 대한 행적 10항목, 효선 편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5항목을 수록하고 있다.     

   이처럼 5권 9편 144항목으로 이뤄진『삼국유사』의 체제는 그 어떤 책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특이하기 때문에 자칫 설화집이나 민담집 정도로 이해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 형식의 차이가 있을 뿐 일연은 이 책을 분명 역사서로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기이 편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편자의 평가가 부기(附記)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일연이 청년시절에 사료를 모아 70세 이후의 노년기에 집필한 이 책은 1289년 그가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이후에 제자 무극에 의해서 1310년에 처음 목판본으로 간행된다.

   하지만『삼국유사』는 그 내용의 특이성으로 인해 고려시대에는 그다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는『동국여지승람』,『동사강목』등에 언급되고 있다. 물론 이 책들은『삼국유사』의 기록을 허황하여 믿을 바가 못 된다고 못 박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조선 초부터 현재까지 편찬을 거듭하면서 한국의 고대 역사 이해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가장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왔다.

   『삼국유사』의 편찬 작업에 인용된 역사, 불교, 설화 등에 관한 서적과 문집류, 고기(古記) 등의 문헌들은 지금은 전하지 않는 것들이라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여기서 언급된 ‘단군 이야기’를 비롯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 이야기는 후대 사학자들의 역사 이해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또한 여기에 수록된 14수의 향가는 한국 고대문학 연구의 보석 같은 자료이다.

   이처럼『삼국유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 고대의 역사, 지리, 문학, 종교, 언어, 민속, 사상, 미술, 고고학 등 모든 부분의 열쇠를 제공하는 총체적 문화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삼국사기』에서 미처 담아내지 못한 내용들을 후세에 전달하여 민족성을 고취시키고자 했던 일연의 깊은 뜻을 되새기게끔 한다.


   5. ‘충렬왕실록’ 편찬 관련 사항

 

   ‘충렬왕실록’은 충목왕 2년인 1246년 10월 왕명에 의하여 편찬된다. 이 때 부원군 이제현, 찬성사 안축, 한산군 이곡, 안산군 안진, 제학 이인복 등은 왕명에 따라 먼저 민지의『편년강목』을 보충하여 재편찬하고 충렬, 충선, 충숙의 3대 실록을 함께 편찬하였다.


▶ 충렬왕 시대의 세계 약사


충렬왕 시대 중국 대륙은 원이 전역을 차지하여 지배하였으며, 이에 따라 새로운 문화가 시작된다. 이 때  원의 세력이 유럽과 이슬람 국가에까지 미침에 따라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중국에 유입된다. 또한 곽수경의 활약으로 천문학이 발전하고 마단림에 의해『문헌통고』348권이 저술되어 중국 역사의 흥망성쇠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시기에 원나라는 중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4등급으로 나누는데 몽고인을 1등급, 색목인을 2등급, 황하유역의 한족과 여진족을3등급, 양자강 이남의 한인과 그 이남 사람들을4등급에 예속시켜 다르게 대접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유럽에서는 잉글랜드가 웨일스를 정복하여 병합하고, 스코틀랜드를 정벌한다. 또한 동방에서는 오스만이 소아시아에서 세력을 어어 투르크 제국을 건설한 후 제1대 술탄에 오르고, 십자군이 악콘에서 철수함에 따라 오랫동안 지속되던 십자군 전쟁이 종결된다. 이 때 스위스는 삼주동맹을 결성하여 신성로마제국에 대해 독립전쟁을 시작하고, 독일은 뤼베크를 맹주로 한자동맹을 결성한다.

출처 : 운현 시조정가교실
글쓴이 : 운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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