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사

[스크랩] 고려27대 충숙왕실록

똥하 2008. 11. 19. 19:12

1. 충숙왕의 위태로운 삶과 불안정한 왕위

   (1294~1339년, 재위기간 :1313년 3월~1330년 2월, 1332년 2월 복위~1339년 3월, 총 24년)


   충선왕은 왕위를 충숙왕(忠肅王)에게 물려주면서 동시에 조카 왕고를 세자로 세웠다. 이 같은 충선왕의 이해 못할 행동은 고려 조정을 왕위 쟁탈전의 소용돌이로 휘몰아간다. 이 때문에 충숙왕은 누차에 걸쳐 원나라에 송환당하는 수모를 겪다가 급기야 왕위를 내놓아야 하는 위기 상황에 몰린다.

   충숙왕은 충선왕의 차남이자 몽고녀 의비 소생으로 129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도(燾), 이름은 만(卍), 자는 의효(宜孝), 몽고식 이름은 아자눌특실리다. 1298년에 강릉군 승선사에 봉해졌다가 장성해서는 강릉대군으로 진봉되었으며, 1313년 3월 원나라의 심양왕직을 고수하던 충선왕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 27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20세였다.

   충숙왕은 충선왕이 즉위 전부터 줄곧 원나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을 거의 원나라에서 보냈다. 게다가 모후 역시 몽고 여자였던 까닭으로 그에게는 원나라가 고려보다 훨씬 더 친근했을 것이다. 그런데 충선왕이 갑작스럽게 왕위를 넘겨주는 바람에 그는 엉겁결에 고려왕이 되었다.

   원래 충숙왕에게는 감이라는 이름을 가진 형이 하나 있었다. 그는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1310년 부왕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충선왕은 즉위 후 단 2개월을 제외한 재위기간 전부를 원나라 연경에서 보냈고, 이로 인해 고려 조정은 항상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조정 중신들은 누차에 걸쳐 원나라에 왕의 환국을 청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몇몇 조신들이 세자 왕감을 중심으로 힘을 형성하려 하였다. 이에 이미 충렬왕과 부자간의 세력다툼을 벌여본 바 있는 충선왕은 세자 왕감과 그 주변 인물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충숙왕은 냉혹한 정치적 결단의 희생자가 된 동복형 왕감을 대신하여 고려왕에 올랐다. 하지만 상왕인 충선왕이 건재한 상태였기 때문에 왕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충선왕은 이복형 왕자의 아들 왕고를 총애하여 그를 세자로 세운 상태였다. 이 때문에 왕고는 지속적으로 왕위찬탈 음모를 꾸며 충숙왕을 곤경에 빠뜨리곤 한다.

   충숙왕 재위 초년에는 충선왕이 일시 귀국하여 개경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만 하더라도 각 도에서 올라오는 결재서류는 모두 충선왕에게 먼저 올라갔다. 또한 충선왕은 한때 자신이 108만 승려에게 음식을 먹이고 108만 개의 등에 불을 켜겠다고 공언한 바 있었는데 이를 실천하기 위해 이른바 ‘만승회(萬僧會)’라는 행사를 치르는 통에 국고가 탕진되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공덕을 10여 개 조목으로 손수 작성하여 은밀히 식목도감에 보내 백관들로 하여금 찬양문을 올리게 하는 등 노골적으로 공명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 같은 행동의 목적은 원 왕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충선왕은 낡은 궁궐을 중수하고, 민지와 권보에게 명령하여 태조로부터 원종에 이르는 역대 왕들의 실록을 7권으로 축약한『본국편년강목』을 편찬케 하는 등 왕실의 권위를 세우는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고, 왕권은 충숙왕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의 국왕에게는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1315년에는 원나라의 강요로 귀족과 천민들의 옷 색깔을 다르게 하는 정책을 실시하였고, 1316년에는 상왕인 충선왕이 자신의 심양왕 지위를 조카이자 세자인 왕고에게 넘겨줌에 따라 왕위를 위협받게 되었다. 심양왕에 오른 왕고는 원 왕실의 신뢰를 얻게 되자 그 힘을 바탕으로 고려 국왕의 자리를 넘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충숙왕은 왕고의 형인 왕유를 단양부원대군으로, 동생인 왕훈을 연덕부원대군으로 봉하여 심양왕 왕고에게 화합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 무렵 연경에 머무르고 있던 충선왕은 전례에 따라 충숙왕을 원 왕실의 공주와 혼인하도록 해줄 것을 요청해 둔 상태였다. 충숙왕을 원의 부마가 되게 함으로써 고려 국왕의 왕권을 안정시키고 동시에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충선왕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해 7월 충숙왕은 원나라 영왕의 딸 역련진팔랄공주(복국장공주)와 결혼하여 원 왕실의 부마가 된다.

   하지만 복국장공주는 고려에 온 지 3년 만인 1319년 9월 의문을 남기고 죽는다. 이 당시 고려는 제주도에서 민란이 일어나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충숙왕은 복국공주의 입국으로 밀려난 덕비 홍씨를 잊지 못하고 자주 미행을 나갔으며, 정사를 뒷전으로 하고 사냥과 주색을 즐기고 있었다. 또한 미행을 나갔다가 백성들을 만나면 그들을 구타하는 일이 잦아 왕의 폭력적인 경향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복국공주의 부고가 전해지자 원나라 중서성은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선사 이상지를 개경으로 보내 수사하게 하였다.

   이상지는 복국장공주의 궁녀와 요리사 한만복을 가두고 심문하였다. 한만복은 심문을 당하자 1318년 8월에 왕이 연경궁에서 덕비 홍씨와 노는 것을 목격한 공주가 질투를 하다가 왕에게 얻어맞아 코피가 난 일과 그 다음 달에 다시 유련사에서 왕으로부터 심하게 구타당한 일을 실토한다.

   이렇게 되자 이상지는 호라적 출신 궁녀 1명과 한만복을 원나라로 압송해 갔고, 다급해 진 충숙왕은 백원항, 박효수 등으로 하여금 중서성에 공문을 보내게 하여 한만복이 거짓진술을 하였다고 변명하였다.

   이 사건 이후 충숙왕은 원 왕실의 불신을 받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1320년 원에서는 영종이 새롭게 즉위하였고, 심양왕 왕고는 신임을 받으며 충숙왕을 강하게 비토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충숙왕은 밤마다 연회를 차리고 술에 절어 살았으며, 기생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돈을 주는 바람에 국고가 탕진되고 있었다. 국고가 바닥났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내서사인 안균을 경상도에 파견, 돈을 거두게 하여 향락생활을 지속하였다. 이렇게 되자 대신들의 불만이 심화되었지만 왕은 불만 섞인 상소를 하는 대신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하여 조정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충숙왕의 이 같은 행패는 왕고를 통하여 원 왕실에 보고되었고, 그러던 중에 백응구 사건이 발생하여 1321년 3월 원나라의 입조 명령을 받아 충숙왕은 왕유에게 서무를 대리하게 하고 연경으로 떠났다. 그리고 약 3년 동안 원나라에 붙잡혀 있으면서 왕위를 노리던 왕고의 협박을 받으며 지내야 했다.

   이 당시 충선왕은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영종의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유배된 상태였고, 충숙왕은 거의 폐위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1322년에 경사만 등의 대신들이 충숙왕을 복위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원 왕실에 요구하지만 왕고 세력의 방해로 무산된다. 그리고 그해 8월에 전찬성사 권한공은 심양왕 왕고를 고려 국왕으로 세울 것을 원나라에 요청하기 위해 자운사에 백관들을 모아 놓고 원나라에 보낼 문서에 서명을 강요했지만 윤선좌 등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된다. 이에 왕고파인 유청신, 오잠 등은 원나라 도성에 서면을 보내 고려의 국호를 폐하고 고려를 원에 편입시켜 성(省)을 설치해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원 왕실은 이 같은 터무니없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처럼 국권이 완전히 상실된 가운데 제주 만호 임숙의 학정에 반발하여 제주 백성 1천 여 명으로부터 임숙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가 올라오고, 전라도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는다. 이에 조정은 임숙을 파면하고 박순인을 그 후임으로 임명하는 한편 송기를 파견하여 왜구를 물리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가라앉힌다.

   고려 사회와 충숙왕에게 이러한 난관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원의 영종이 죽고 태정제(진종)가 왕위에 오르게 되어 상황은 급변한다. 태정제는 유배 중이던 충선왕을 다시 호경으로 불러들이고, 충숙왕을 풀어준다. 그래서 3년 가까이 왕위를 상실한 채 호경에 머물러 있던 충숙왕은 1324년 2월에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충숙왕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귀국하던 그해 2월 왕고의 동생 연덕대군 왕훈이 위사 김영장의 처를 간음한 죄로 순군에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충숙왕과 심양양 왕고의 세력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왕고의 힘에 밀린 충숙왕은 결국 왕훈을 풀어주게 하고 그를 원으로 보낸다.

   그 후에도 왕고의 왕위찬탈 위협이 계속되자 충숙왕은 원의 지원을 받기 위해 다시금 원나라 위왕 아목가의 딸 금동공주(조국장공주)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충선왕도 충숙왕의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태정제에게 충숙왕의 무고함을 간언한다. 이렇게 하여 충숙왕은 가까스로 왕권 회복의 기틀을 마련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듬해 10월 조국장공주가 용산원자를 낳고 산고로 인해 18세의 어린 나이로 횡사한다. 이 때문에 충숙왕은 다시 궁지에 몰리게 된다.

   충숙왕의 입지가 약해진 틈을 타 왕고의 왕위찬탈 음모가 다시 진행됐다. 왕고는 태정제의 신임을 얻은 후 평장정사 매려와 사인 역특미실불화를 고려에 보내게 하고 박중인, 조유, 조운경, 고자영 등의 측근들을 딸려 보냈다. 당시 왕고파인 유청신과 오잠이 원나라 중서성에 가서 충숙왕은 눈이 멀고 귀 먹은 벙어리라 친히 정사를 돌볼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충숙왕은 왕자 정을 세자로 책봉하여 원에 입조케 하였다. 이에 태정제는 매려로 하여금 유청신과 오잠의 말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충숙왕이 왕고의 세자인(世子印)을 가져간 이유를 캐내게 했던 것이다.

   충숙왕을 접한 매려는 유청신과 오잠 등이 거짓말을 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한편 왕고가 심양왕 직에 있기 때문에 고려 세자를 겸할 수 없다는 충숙왕의 설명을 듣고 모든 것이 왕고파의 무고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일로 입지가 강화된 충숙왕은 왕고의 도당인 조식, 김온, 권하, 전굉 등을 순군옥에 가두어 귀양 보내는 등 왕권강화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몸이 약해져 1330년 2월 세자 정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가 그해 7월 원나라에 가서 머물렀다. 하지만 충혜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음탕한 짓을 일삼다가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자 1332년 2월 복위하였다.

   복위한 충숙왕은 원에 머물러 있으면서 민상정과 조염휘를 파견하여 정승 윤석을 비롯한 손기, 김지경, 배전, 오자군, 강서 등 수십 명에 대하여 왕을 잘못 받든 죄로 삭직(削職)하고 유배시켰다. 그리고 몽고 여자 경화공주를 데리고 1333년 3월에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귀국 후 원나라가 지나치게 많이 요구하는 세공(歲貢)을 삭감케 하고 공녀와 환관의 징발을 중지하도록 청원하는 등 몇 가지 업적을 세우기는 하였으나 이전부터 나타나던 대인기피증이 심해져 신하들을 멀리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리고 복위 8년 만인 1339년 3월에 지병이 악화되어 4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능은 의릉이며, 실록은 ‘충렬왕실록’과 함께 충목왕 2년인 1346년에 편찬되었다.


   2. 충숙왕의 가족들


   충숙왕은 공원왕후 홍씨를 비롯하여 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 숙공휘령공주, 수비 권씨 등 5명의 부인을 두었다. 그는 이들 부인에게서 3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공원왕후 홍씨기 충혜왕과 공민왕을 낳았으며, 조국장공주가 용산원자를 낳았다. 이들 가족 중 공원왕후를 비롯한 다섯 후비와 용산원자의 삶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충혜왕과 공민왕은 각 왕의 실록에서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공원왕후 홍씨(1298~1380년)

   공원왕비 홍씨는 남양 출신으로 부원군 홍규의 둘째 딸이다. 홍규는 첫딸을 충선왕에게 시집보냈는데 그녀가 순화원비이다. 그리고 둘째 딸을 1313년 8월 왕위에 오른 충숙왕에게 시집보냄으로써 2대에 걸쳐 왕비를 낸 집안이 되었다.

   홍씨는 입궁하여 덕비에 책봉되었으며, 1315년 아들 정(충혜왕)을 낳았다. 하지만 1316년 7월에 충숙왕이 원나라의 복국장공주와 혼인하게 되면서 대궐에서 밀려나 종실 정안공의 집에 거처하였다. 그러자 충숙왕은 그녀를 잊지 못하여 밤마다 정안공의 집에 가서 자곤 하였는데, 이를 애처롭게 여긴 윤석, 손기 등이 왕에게 거처를 정안공의 집으로 옮길 것을 권고하였다. 이에 따라 충숙왕은 정안공의 사저로 거처를 옮겼고, 홍씨는 그 이웃집에 머물도록 하였다.

   이처럼 홍씨에 대한 충숙왕의 사랑은 극진하였다. 그래서 충숙왕은 자주 복국장공주의 눈을 피해 홍씨와 함께 미행을 즐기기도 하였는데, 이를 눈치 챈 복국장공주는 홍씨를 매우 미워하였다고 한다. 이 같은 심한 질투와 충숙왕에 대한 증오심으로 인해 복국장공주는 1319년에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 후 1324년 8월에 충숙왕은 다시 원의 조국장공주와 혼인하였다. 하지만 조국장공주 역시 이듬해 10월 용산원자를 낳은 후에 산욕으로 죽는다. 이렇게 되면서 홍씨와 충숙왕의 부부에는 더욱 깊어지게 되어 1330년에는 둘째 왕자 기(공민왕)를 출산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 부부 사이에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330년 충숙왕은 정치에 염증을 느낀 상태에서 세자 정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는데, 이 때 정만길, 강융, 김원상 등이 간하는 말을 곧이듣고 홍씨를 고향으로 추방하고, 충혜왕과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1332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 가고 충숙왕이 복위하자 그녀는 다시 개경으로 소환되었다. 그리고 1339년 충혜왕이 복위한 이후에 그녀의 거처를 덕경부로 격상시켰으며, 1351년 공민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 문예부로 개칭되었다. 이 때부터 그녀를 대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홍씨는 공민왕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반대하고, 공민왕에게 누차에 걸쳐 신돈과 어울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 때문에 신돈은 그녀와 대립하였고, 신돈을 통해 개혁을 이루고자 하던 공민왕도 그녀를 피하였다. 그녀는 또 공민왕이 개혁 작업의 일환으로 신하들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 잦아지자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여 공민왕과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1371년 공민왕이 신돈 일파를 제거할 때 유탁을 그의 도당으로 간주하고 죽이려 하자 홍씨는 사람을 시켜 유탁을 놓아주라고 요청한다. 이에 공민왕은 홍씨가 보낸 하인을 하옥하고 한동안 홍씨에 대한 문안을 중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공민왕은 1372년에 홍씨가 병에 들자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승경왕 태후라는 존호를 올리고 화해하려 한다. 이 때 홍씨가 머물던 거처를 문예부에서 승경부로 개칭한다. 그런데 이듬해 공민왕이 아들 우를 세자로 삼으려 하자 모자간의 갈등은 증폭된다. 홍씨는 우가 신돈의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세자로 세우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또 공민왕이 벌이던 영전공사도 마찰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공민왕은 영전공사를 실시하여 왕실의 권위를 되살리고자 하였으나 홍씨는 백성을 괴롭히고 국가 재정을 소비하는 큰 공사는 제왕으로서 할 바가 아니라고 반대하고 나섰다.

   이렇듯 공민왕과 모후 홍씨의 첨예한 대립이 지속되는 가운데 1374년 9월 공민왕은 피살을 당하였다. 이 때 홍씨는 종실에서 적당한 인물을 선택하여 왕위를 잇고자 했지만 시중 이인임 등이 백관들을 앞세워 우를 왕으로 세우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우왕과도 곧잘 마찰을 일으키다가 1380년 정월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능은 영릉이며 시호는 공원이라 하였다. 후에 명덕태후로 추존되어 흔히 그녀를 명덕태후라고 불렀다.


   복국장공주(?~1319년)

   복국장공주 역련진팔랄은 원나라 영왕 야선첩목아의 딸이다. 1316년 7월 충숙왕에게 시집 와 이 해 10월에 개경에 왔다.

   그녀가 개경에 왔을 때 충숙왕에게는 덕비 홍씨와 아들 정이 있었다. 덕비 홍씨와 충숙왕은 무척 금실이 좋았기 때문에 복국장공주는 홍씨를 무척 싫어했으며 질투도 심했다. 이 때문에 충숙왕으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며 지내다가 1319년 9월 갑작스럽게 죽었다.

   이 일로 원나라 중서성에서 공주의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선사 이상지를 보냈다. 이상지는 고려에 도착하자 공주의 궁녀 호라적 여자와 요리사 한만복을 심문한다. 그리고 한만복으로부터 충숙왕이 두 번에 걸쳐 공주를 심하게 구타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그들 두 사람을 원나라로 압송한다. 하지만 고려 조정은 백원항, 박효수 등을 원나라 중서성에 보내 한만복의 말이 거짓이라고 항변하여 충숙왕은 위기를 모면한다.

   그해 12월에 공주의 초상화가 마련되어 순천사에 두었으며, 1343년에 원나라에서 복국장공주에 추봉하였다.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소생은 없었다.


   조국장공주(1308~1325년)

   조국장공주 금동은 원나라 순종의 아들 위왕 아목가의 딸이다. 1324년에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충숙왕에게 시집왔으며, 이듬해 10월 한양 용산에서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용산원자이다. 하지만 그녀는 산욕으로 인해 18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1343년에 원나라에서 조국장공주에 추봉하였다.


   숙공휘령공주(?~1344년)

   숙공휘령공주는 몽고 여자로 이름은 백안홀도이다. 백안 성씨가 당시 원나라 귀족이었으므로 그녀는 귀족 가문 출신의 여자로 추측된다. 그녀는 충숙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원나라에 머물던 1330년에서 1332년 사이에 시집왔으며, 1332년 2월 충숙왕이 복위하여 1334년에 귀국할 때 동행하여 고려에 왔다.

   1337년에 그녀를 경화공주에 봉하고 경화부를 신설하여 관속을 두었다. 1339년 충숙왕이 죽은 후에 충혜왕은 연안궁에서 수차에 걸쳐 연회를 베풀고 그녀를 초대하였다. 이 때 술좌석이 끝나자 충혜왕은 술에 취한 척하고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그녀의 침실을 덮쳤다. 하지만 그녀가 완강히 거부하자 송명리 등을 시켜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강간하였다.

   이튿날 공주는 이 일이 수치스러워 원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아랫사람을 시켜 말을 사들이게 하였다. 그런데 충혜왕이 이 일을 전해 듣고 이엄과 윤계종을 시켜 개성의 말 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였다. 그 후 1343년에 원나라 사신 두린 등이 와서 공주에게 어주(御酒)를 전달하고 대경 타적과 낭중 별실가를 시켜 충혜왕을 붙잡아갔다.

   그러자 공주는 찬성사 정천기를 정동성(征東省)에 감금하고 이어 김지겸에게 정동성을 임시로 대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344년 충혜왕이 귀양길에서 죽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해에 공주도 죽었다. 1367년에 원나라에서 숙공휘령공주라는 시호를 주었다. 능호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소생도 없었다.


   수비 권씨(?~1340년)

   수비 권씨는 복주 사람으로 좌상시 권형의 딸이다. 그려는 원래 밀직상의 전신의 아들에게 시집갔으나 권형은 전씨 집안이 몰락하자 이혼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336년 충숙왕의 내지(內旨, 궁중에서 내리는 명령)를 받아 마침내 이혼시키고 충숙왕에게 바쳤다.

   입궐한 그녀에게 충숙왕은 수비라는 칭호를 주고 총애하였다. 그런데 충숙왕이 죽자 그해에 충혜왕은 그녀를 폭행하여 강간하였다. 그녀는 이에 충격을 받고 다음해인 1340년 4월에 죽었는데, 수치를 못 이겨 자살한 것으로 추측된다.


   용산원자(1325~1341년)

   용산원자는 충숙왕의 셋째 아들이나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다만 1325년 충숙왕과 조국장공주가 한양 부원의 용산에 갔을 때 낳았다 하여 용산원자라고 불렀다. 모후 조국장공주가 죽은 후 원나라에 보내졌으며, 1341년 17세의 어린 나이에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죽은 후 시신은 고려로 인도되어 장례를 지내고 무덤이 마련되었다.


   3. 왕고의 왕위 찬탈 음모와 충숙왕의 시련

  

   충숙왕은 왕위에 오른 후 줄곧 심양왕 왕고의 왕위 찬탈 음모에 휘말려 수난을 당한다. 이 일은 충선왕이 충렬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동시에 왕고를 세자로 세울 때부터 예상된 일이었다.

   왕고는 충렬왕과 정신부주 사이에서 태어난 강양공 왕자의 둘째 아들이다. 왕자에게는 유, 고, 훈 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왕유는 충선왕대에 단양군으로 책봉되었다가 충숙왕대에 단양부원대군으로 진봉되었으며, 충숙왕이 원나라에 입조했을 때 서무를 대리한 바 있다. 그러나 정치도감 신리가 자신이 부리던 양인 출신 노비들을 양인으로 회복하여 내보내자 이에 악감정을 품고 압록강을 건너 원나라에 갔다가 재상들이 보낸 홀치(몽고 궁궐에 숙위하는 관리)들에 의해 붙잡혀 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셋째 왕훈은 충선왕 대에 연덕군으로 책봉되었다가 충숙왕 즉위 후 연덕부원대군으로 진봉되었다. 그는 한때 위사 김영장의 처를 간음하여 순군에 감금되었는데, 당시 심양왕으로 있던 형 왕고가 압력을 행사하여 풀려났다.

   이렇듯 왕자의 아들들은 특권을 행사하며 지냈는데, 이는 모두 둘째 왕고의 힘에 의지한 것이었다.

   충선왕은 일찍이 어린 왕고를 데려다가 양육하였다. 그리고 그를 연안군에 책봉하고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하였다. 그래서 1313년 충숙왕에게 왕위를 무려줄 때 그를 세자로 세우기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 무종을 옹립하는 데 세운 공로로 받은 심양왕 봉작까지 넘겨주었다. 하지만 이는 충숙왕과 왕고 간에 벌어지는 치열한 왕위다툼의 원인이 되고 만다.

   1316년 충선왕은 원나라 인종에게 자신의 심양왕 직을 왕고에게 물려주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자 인종은 왕고를 심양왕에 봉한다. 그리고 심양왕에 오른 왕고는 원나라 양왕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 양왕은 충선왕비 계국공주의 친오빠였기 때문에 이 때부터 왕고는 충선왕과 계국공주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을 뿐 아니라 원 왕실과도 각별한 사이가 된다.

   계국공주의 총애를 받고 동시에 원 왕실의 지지도 얻게 되자 왕고는 고려국왕이 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1320년 왕고와 친분이 두터웠던 원나라 영종이 즉위하면서 이 같은 왕위  음모는 본격화된다. 이 때 충선왕은 고려로 귀환하라는 영종의 명령을 듣지 않다가 토번으로 유배되었기 때문에 충숙왕에 대한 왕고의 음해는 더욱 가속화될 수 있었다.

   이처럼 왕고의 힘이 강해지자 조적, 채하중, 권한공 등의 고려 조신들이 왕고에게 기울어졌다. 그러나 당시 충숙왕은 측근들과 어울려 다니며 사냥과 주색에 빠져 국고를 탕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고의 참소는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그때 마침 백응구 사건이 발생했다.

   백응구는 원나라에서 충선왕을 수행하던 사람으로 벼슬은 사복정이었다. 그는 재산을 증식하는 일에 능했기 때문에 심왕부(瀋王府)의 사무를 주관하게 됐는데, 어느 날 일을 팽개치고 고려로 도망해버렸다. 아마 백응구는 심왕부의 돈을 횡령하였던 모양이다.

   심왕부 재산을 관리하던 백응구가 고려로 도망쳤다는 소리를 들은 왕고는 이 일을 영종에게 보고했다. 이에 영종은 원외랑 아도랄을 고려로 보내 백응구를 호경으로 잡아올 것을 명령하고, 충숙왕에게는 이 일에 협조해줄 것을 통고했다. 그러나 고려 조정에서 백응구를 쉽사리 잡아들이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왕고는 충숙왕이 조서를 찢어버렸다고 영종에게 보고했고, 이 때문에 화가 난 영종은 1321년 3월 충숙왕의 옥새를 회수하고 호경으로 호송토록 하였다. 또 한림대제 사적을 파견하여 고려 백관들을 심문하여 진상을 캐도록 하였다.

   이 때 왕고는 자신의 심복 박구를 고려 조정에 파견하여 재상들에게 편지를 전했는데, 그것은 충숙왕이 매일같이 주색잡기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급기야 영종의 조서조차 무시했다는 점을 사적이 도착하는 날 명백하게 밝히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그 후 고려에 도착한 사적은 식목도감 녹사 이윤함 등을 고문하고 조서를 넘겨받은 것으로 판명된 안규와 서윤공을 함께 체포하여 연경으로 압송하였다. 연경에 압송된 이윤함, 안규, 서윤공 등은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충숙왕이 조서를 찢었다는 진술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충숙왕이 자기변명을 뚜렷하게 하지 못하는 바람에 국문은 멈춰지지 않았다.

   이처럼 충숙왕이 왕위를 박탈당하고 갇히는 신세가 되자 왕고가 국왕의 권한을 대신하였다. 그는 또 조정에 사람을 파견하여 충숙왕의 측근들인 환윤전, 김성만, 이공, 강려 등에게 장형을 가하고 유배시켰으며, 충숙왕의 여비를 더 이상 보내지 말 것을 강권하였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경사만 등이 중심이 되어 충숙왕의 복위를 건의하는 편지를 원나라 중서성에 보냈으나 왕고 세력의 방해로 일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왕고는 10여 명의 수하를 고려 조정에 보내 충숙왕이 폐위되고 왕고가 이미 국왕에 올랐다고 말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신들을 모아 폐위된 충숙왕의 그릇된 행동들을 일일이 기록하여 원 왕실에 올리라고 강압하였다. 이에 권한공 등의 왕고파 일당은 백관들을 자운사에 모아놓고 충숙왕을 비토하는 글을 작성하여 서명을 받았다. 하지만 윤선과, 민종유, 김륜 등의 강력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권한공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채하중 등과 의논하여 왕고의 명령으로 경사만, 김인윤, 김지경 등 중신들을 순군에 가두고 다시금 충숙왕 폐위 작업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충숙왕을 비방하는 내용의 글월을 작성하여 일부 중신들의 서명을 받고 원나라 중서성과 한림원에 제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왕고파는 유청신, 오잠 등이 중심이 되어 고려의 국호를 폐하고 원나라에서 직접 고려국을 통치해줄 것을 청원하였지만 원 왕실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처럼 위태로운 상황이 전개되어 충숙왕이 거의 폐위 직전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도 행운이 찾아들었다. 충선왕을 귀양 보내고 충숙왕을 불러들였던 영종이 죽고 태정제가 즉위한 것이다. 이 덕분에 충선왕이 먼저 풀려나고 1324년 2월 충숙왕도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왕고의 왕위찬탈 음모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태정제의 신임을 얻은 왕고는 다시금 고려 국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유청신과 오잠을 시켜 중서성에 다음과 같은 참소를 올렸다.

   “고려 국왕 왕도는 이미 눈이 먼데다가 귀까지 멀어 벙어리가 되었기 때문에 친히 정사를 돌볼 수 없는 불구자입니다. - 중략 - 상왕(충선왕)이 인종 황제에게 청하여 왕도를 고려 국왕으로, 왕고를 세자로 책봉하기로 한 것이 이미 오래 전입니다. 그런데 영종 때에 이르러 왕도와 백안독고사가 공모하여 김이로 하여금 상왕을 꾀어 왕고의 세자인(世子印)을 훔쳐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왕이 지급했던 왕고의 토지와 사택 그리고 그의 신하 유청신, 오잠 등 140여 명의 토지와 사택을 강탈하였습니다.”

   이 같은 제소를 받은 태정제는 1328년 7월 평장정사 매려와 사인 역특미실불화 등을 고려 조정에 보내 진상을 확인토록 하였다. 이 때 왕고의 도당인 박중인, 조유, 조운경, 고자영 등이 동행하였다.

   고려에 도착한 매려는 오잠 등의 참소문에 대한 진위를 가리기 위해 충숙왕을 만나고자 했으나 충숙왕은 병을 핑계로 하여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매려는 오잠의 말대로 충숙왕이 귀 먹고 눈 먼 불구자인 줄 알고 자기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직접 왕의 거처로 가서 태정제의 조서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충숙왕을 힐난하며 심문하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충숙왕이 조리 있게 대답하여 매려는 당황하였다.

   충숙왕은 자신이 세자인을 가져온 것에 대해 왕고가 심양왕에 머무르며 동시에 고려 세자가 되는 것은 두 가지의 왕위를 겸할 소지가 있기에 충선왕의 명에 따라 세자인을 받아온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유청신과 오잠의 참소문 중에 잘못된 부분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유청신 등의 토지와 사택을 몰수한 것은 그들의 재산이 모두 백성들의 고혈을 짠 강탈품이기 때문에 환수하여 옛 주인을 찾아준 것이라고 역설했다.

   충숙왕의 이 같은 항변을 접하자 매려는 유청신과 오잠의 참소문이 거짓이라는 판단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그를 따라온 조유 등의 왕고파 일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또한 매려는 충숙왕의 무고함을 원나라 왕에게 보고 하겠다고 약속하며, 충숙왕의 건의에 따라 당시 고려에 와서 행패를 일삼던 원나라 탐관들을 본국으로 소환해가기까지 하였다.

   이 일 이후 왕고는 더 이상 충숙왕을 몰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1334년 충숙왕이 원에서 귀국할 때 왕의 행궁(行宮, 왕의 임시 거처)을 찾아와 문안인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원 왕실의 명령에 따라 충숙왕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런데 1339년 충숙왕이 죽자 왕고는 원으로 되돌아가면서 다시 계략을 꾸몄다. 원으로 돌아가던 그는 평양에 일시 머무르며 측근 조적과 더불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계획을 짰던 것이다.

   왕고는 우선 자신의 수하 박전을 개경에 보내 “원 왕실에서 이미 심양왕을 고려 국왕에 봉했다.”고 거짓말을 하도록 하였다. 당시 충혜왕은 원 왕실의 불신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왕고의 이 같은 거짓말은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충혜왕이 즉시 홀치 60여 명의 기병을 평양으로 보내 왕고의 무리를 쫓아가게 함으로써 왕고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 때 충혜왕은 왕고의 행렬을 멈추게 하고 개경으로 불러들여 직접 심문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보낸 기병들이 미처 왕고의 행렬을 따라잡지 못하는 바람에 왕고를 개경으로 호송하지는 못했다.

   왕고는 그 후 줄곧 원나라에 머무르다가 1345년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토록 열망했던 고려 국왕에 오르지 못하고 그해에 생을 마감하였다.



▶ 충숙왕 시대의 세계 약사


충숙왕 시대 중국은 원나라의 통치가 여전히 지속되었지만 26년간 지속된 재위 쟁탈전으로 인해 원 왕실은 조금씩 불안한 상황을 연출하며 멸망의 조짐을 보인다. 특히 순제 재위 시기인 1333년에서 1338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은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부패상이 노골화되고, 전국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난다.

이 시대 유럽에서는 독일의 루이 5세와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3세가 선위다툼을 벌이다가 루이 5세가 승리한다. 이에 교황 요한 22세가 선위다툼에 개입하여 루이 5세를 파문한다. 이 때 프랑스에서는 샤를 4세가 즉위했다가 필리프 6세로 교체되고, 영국에서는 의회에서 에드워드 2세가 폐위되어 처형되고 에드워드 3세가 즉위한다. 한편 오스만투르크가 유럽에 침입하여 발칸 남부를 유린하고 니케아를 점령한다.  

이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인문주의가 강성하고 그리스에서는 문학이 부흥하는 한편, 단테의『신곡』이 완성되어 유럽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출처 : 운현 시조정가교실
글쓴이 : 운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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