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사

[스크랩] 고려28대 충혜왕실록

똥하 2008. 11. 19. 19:13

1. 희대의 패륜아 충혜왕과 고려 왕실의 위기

   (1315~1344년, 재위기간 : 1330년 2월~1332년 2월, 1339년 3월 복위~1344년 1월, 총 6년 10개월)


   충혜왕(忠惠王)은 충숙왕의 장남이자 공원왕후 홍씨 소생으로 1315년 1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정(禎),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다. 1328년 정월에 원나라의 승인을 받아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330년 2월 병약해져 정치에 염증을 느낀 충숙왕의 양위를 받아 고려 제28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는 16세에 불과했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충혜왕은 한 나라를 통치할 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격마저 포악하여 정사를 뒷전으로 미루고 향락과 여색에 빠져 지냈다. 즉위 후 6일 동안이나 정사를 폐하고 사냥을 즐기는가 하면 날마다 내시들과 씨름을 하며 놀았다. 또한 배전, 주주 등에게 국가의 중책을 일임하여 일부 관료들의 권력 남용이 극대화대고,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다는 이유로 사관들을 몹시 싫어하여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 같은 폐정이 2년 동안이나 지속되자 원 왕실은 역시 충혜왕을 연경으로 소환하여 근신명령을 내리고 충숙왕을 복위시켰다. 하지만 연경에서도 충혜왕의 행실이 고쳐지지 않자 1336년 12월에 고려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1339년 3월 충숙왕이 죽자 충혜왕은 복위하였다.

   충숙왕은 아들 충혜왕을 항상 못마땅하게 여기며 날건달이라고 불렀으나 죽음에 임박하자 장남인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고려 조정의 통보를 받은 원나라 승상 백안 등은 충혜왕이 왕이 될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하여 심양왕 왕고를 고려 국왕으로 삼아야 한다고 상소했다. 이 때문에 한동안 충혜왕은 원 왕실의 책봉문을 받지 못했다.

   충혜왕은 왕위에 오르자 닥치는 대로 음탕한 짓들을 일삼기 시작했는데, 1339년 5월에는 부왕의 후비인 수비 권씨를 강간하였고, 8월에는 역시 부왕의 후비인 숙공휘령공주를 강간하였다.

   술자리를 마련한 왕은 연회가 끝나자 술에 취한 척하고 궁궐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숙공휘령공주의 침실을 덮쳤는데, 이 때 공주가 완강하게 저항하자 수하들을 시켜 양팔과 다리를 잡게 한 다음 입을 틀어막고 강간을 자행했다. 그리고 수비 권씨 역시 그런 방법으로 강간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숙공휘령공주는 수치심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분에 이기지 못해 원 왕실에 충혜왕을 고발하려 하였다. 그래서 직접 원나라로 떠날 요량으로 수하를 시켜 말을 사들이게 했는데, 이를 눈치 챈 충혜왕이 말 시장을 열지 못하도록 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하지만 이 일은 나중에 원 왕실에 알려져 충혜왕 폐위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또한 수비 권씨는 강간을 당한 뒤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이듬해 죽었는데, 아마 자살한 듯하다.

   이처럼 자신의 서모까지도 서슴없이 강간하던 충혜왕이었기에 일반 민가의 아녀자에 대한 강간 행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내시 유성의 처 인씨가 아름답다 하여 수하 구천우와 강윤충을 데리고 가서 유성에게 술을 먹이고 그 아내를 겁탈하였으며, 자신의 장인 홍탁의 후처 황씨와도 간음하였다. 그런데 충혜왕은 항상 정력이 강해지는 열약을 복용했기 때문에 그와 관계를 가지는 여자들은 임질에 걸리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홍탁의 후처 황씨도 임질에 걸렸는데, 충혜왕은 승려 복산을 시켜 그녀의 임질을 치료토록 하였다.

   충혜왕이 이 같은 패륜 행위를 벌이고 있을 때는 아직 원나라로부터 그의 복위가 승인된 시기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중은커녕 거의 매일같이 여자들과 어울려 난삽한 행동을 일삼고 있었다.

   한때 충숙왕이 어느 선비 가문의 며느리로 있던 남씨라는 여자를 강간하고 노영서라는 심복에게 주었는데, 충혜왕 역시 그녀를 강간하고 노영서에게 돌려주었다.

   이 같은 충혜왕의 패륜 행위에 대한 소문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의주와 정주 고을 사람들은 나라가 소란하다며 짐을 꾸려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이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원나라 조정은 그해 11월에 중서성 단사관 두린과 직성사인 구통을 개경에 파견하여 충혜왕에게 국새를 내려 복위를 인정하였다.

   두린 일행은 개경에 당도하자 숙공휘령공주를 찾아 원나라 왕이 보낸 술을 건넸는데, 이 때 공주는 은밀히 충혜왕이 자신을 강간한 일을 고하였다. 그러자 두린 일행은 수하들을 시켜 충혜왕을 비롯하여 홍빈, 한첩목아불화, 조운경, 황겸, 백문거, 왕백, 주주, 조영휘, 이안, 한승, 장거재, 배성경 등을 포박하여 연경으로 압송하였다.

   충혜왕이 원나라로 압송되자 정권은 숙공휘령공주에게 넘어갔다. 그녀는 충혜왕이 자신을 강간하도록 방조한 찬성사 정천기를 정동성에 가두고 정동성의 관리들을 대폭 교체하였다.

   한편 원나라로 압송된 충혜왕은 1340년 3월에 형부에 갇혔고, 이 때 김인, 김륜, 한종유, 홍빈, 이몽가, 이엄, 노영서, 안천길, 손수경, 윤원우, 남궁신 등도 함께 갇혀 심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충혜왕은 탈탈대부의 도움으로 그해 3월에 풀려나 4월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원나라에서는 고려 출신 여자 기씨를 순제의 제2왕후로 삼았는데, 그녀는 기철의 누이동생이었다.

   원나라에서 돌아온 충혜왕은 이전과 다름없이 음행을 일삼으며 정사를 어지럽혔다. 1341년에는 왕이 예천군 권한공의 둘째 처 강씨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호군 박이라적으로 하여금 궁중으로 데려오게 하였는데, 이라적이 데려오던 중에 그녀와 먼저 간통한 사실을 알고 왕이 직접 두 사람을 때려 죽였다. 또 그해 11월에는 내시 전자유의 집에 갔다가 그의 처 이씨를 강간하였으며, 그 며칠 뒤에는 자기가 때려죽인 박이라적의 처를 찾아가 역시 강간하였다.

   이외에도 충혜왕은 임흥보의 시비와 간음했으며, 재상 배전이 원나라 사신으로 가고 없는 사이에 배전의 처와 그의 동생 금오의 처를 강간한다. 또 만호 전찬 이포공의 처를 강간하고 귀양 보냈다. 이렇게 되자 거리의 불량배 3명이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주부 공보의 처를 강간하는 사건까지 벌어지기도 하였다.『고려사』에 기록된 강간사건만 해도 이와 같은 데 기록되지 않은 일을 합한다면 충혜왕의 음행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충혜왕의 행동은 단순히 이처럼 음탕한 행위에만 그치지 않았다. 매일같이 연회를 베풀고 사냥과 수박희를 즐기는가 하면, 민가의 재물을 갈취하고 백성들을 강제부역에 동원하는 바람에 원성이 끊일 날이 없었다.

   1343년 3월의 어느 날 밤에는 민천사 누각에 올라 비둘기를 잡으려다가 횃불이 옮겨 붙어 누각을 태운 일이 있고, 그 다음 날에는 연회장을 만들기 위해 민가 1백여 채를 철거하고 토지와 재산을 강탈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해 4월에는 개경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개경 사람들 사이에 근거 없는 소문이 유포되기를 왕이 민가의 어린아이 수십 명을 잡아다가 새로 짓는 대궐의 주춧돌 밑에 파묻으려 한다고 하였기에 집집마다 놀라 어린아이들을 안고 도망치는 자가 있었으며, 못된 소년들이 이 틈을 타서 마음대로 강탈하고 절취하였다.”

   이 기록에서처럼 충혜왕은 새로운 궁궐을 짓기로 하고 백성들을 강제부역에 동원하여 민생을 어지럽게 하였다. 그는 직접 공사장 담장에 올라가 감독을 하였으며, 궁궐이 준공되자 각 도에서 칠을 거둬들여 단청을 하였다. 이 때 단청의 안료를 수송하는 데 기한을 늦추면 그 벌로 몇 곱의 값에 해당하는 베를 징수하였다.

   충혜왕의 학정이 계속되자 이를 참지 못한 현효도가 왕에게 독약을 먹이려다 실패하여 사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기철 등은 원나라 조정에 고하여 충혜왕의 폐정이 극에 달했다며 그를 소환하여 폐위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충혜왕은 1343년 10월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신축한 신궁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그의 신궁생활은 채 한 달도 가지 못했다. 충혜왕의 악행을 보고받은 원나라 조정은 협의 끝에 그를 소환하기로 결정하고 대경 타적과 낭중 별실가 등 6명을 보냈다.

   이들은 하늘에 제사할 것과 대사령을 반포하라는 원나라 순제의 조서를 가지고 왔다는 핑계를 댔고, 충혜왕은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정동성으로 갔다. 이 때 타적이 발로 왕을 걷어차 포박하여 원으로 압송하였다. 이 때 왕과 함께 있던 백관들은 대부분 도주하였고, 왕을 호위하고 있던 좌우사 낭장 김영후, 만화 강호례, 밀직부사 최안우, 응양군 김선장 등은 창에 맞았으며, 지평 노준경과 용사 2명이 피살되었다.

   타적이 충혜왕을 포박하여 말에 태워 원나라로 달려가자 충혜왕은 천천히 갈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타적은 칼을 빼들고 위협하며 그를 급히 압송하였다.

   충혜왕이 압송된 뒤 기철, 홍빈, 채하중 등의 정사를 처결하며 은천옹주를 비롯한 충혜왕의 애첩 및 궁인 126명을 궁궐에서 추방하였다.

   이 때 원으로 압송된 충혜왕은 원나라 조정의 결정에 따라 게양현으로 유배되고 있었다. 그의 유배에 앞서 내려진 순제의 유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 왕정은 남의 윗사람으로서 백성들의 고혈을 긁어먹은 것이 너무 심하였으니 비록 그대의 피를 온 천하의 개에게 먹인다 해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러나 내가 사람 죽이기를 즐겨하지 않기 때문에 게양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니 그대는 나를 원망하지 말라.”

   게양은 연경에서 2만여 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충혜왕은 이곳을 향해 가던 중 악양현에서 1344년 정월 30세를 일기로 죽었는데, 독살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고려에 전해지자 백성들 중에 아무도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는 기뻐서 날뛰며 이제 다시 갱생할 날이 왔다는 사람까지 있었다 한다.

   충혜왕의 시신은 1344년 6월에 개경에 도착했고, 그해 8월에 영릉에 장사 지냈다.


   2. 충혜왕의 가족들


   충혜왕은 정순숙의공주, 희비 윤씨, 화비 홍씨, 은천옹주 임씨 등 4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들 중 정순숙의공주(덕녕공주)가 충목왕과 장녕공주를, 희비 윤씨가 충정왕을, 은천옹주가 석기를 낳아 3남 1녀를 얻었다. 이들 가족들 중 4명의 부인과 서자 석기의 삶을 간단하게 언급한다.


   정순숙의공주(?~1375년)

   정순숙의공주 역련진반은 원나라 진서 무정왕 초팔의 딸이다. 그녀는 1330년에 충혜왕게 시집왔으며, 덕녕공주에 책봉되었다.

   충혜왕의 패륜 행위로 말미암아 마음고생이 심했으며, 충혜왕이 죽고 난 뒤에는 여덟 살밖에 안 된 충목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처결하였다. 이 때 배전, 강윤층 등과 친하게 지냈고, 그들은 공주의 총애를 믿고 권세를 부렸다.

   그 후 충목왕이 병약하여 드러눕자 밀직부사 안목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정무를 처리하였다. 1348년 12월에 충목왕이 죽자 덕성부원군 기철과 정승 왕후에게 정동성의 사무를 대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희비 윤씨의 아들 충정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도 정사에 대한 간섭을 심하게 하였다. 그 후 1350년에 원나라에 갔다가 시동생인 공민왕이 즉위한 후인 1354년에 귀국하였다.

   공민왕 대에도 그녀는 왕후나 태후 못지않은 좋은 대우를 받았으며, 1367년에는 원나라로부터 정순숙의공주에 봉해졌다. 그리고 1375년에 사망하여 경릉에 묻혔다. 그녀 소생으로는 충목왕과 장녕옹주가 있었다.


   희비 윤씨(?~1380년)

   희비 윤씨는 파평현 사람으로 찬성사 윤계종이 딸이다. 1331년에 충혜왕에게 시집와 입궁하였으며, 경순공주에 봉해졌다. 이 때 충혜왕은 부를 세워 경순이라 하고 승(丞), 주부 각 1명과 사인 2명을 두었다.

   1348년 아들 충정왕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지만 희비 윤씨는 덕녕공주의 힘에 밀려 섭정을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1351년 충정왕이 쫓겨나 강화에 머물 때 그녀는 공민왕에게 청하여 강화로 가서 아들을 만나보고 수일 간 체류한 후에 귀경하였다.

   그 후 오랫동안 쓸쓸한 여생을 보내다가 1380년에 사망하였다.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소생은 충정왕 하나뿐이었다.


   화비 홍씨(생몰년 미상)

   화비 홍씨는 평리 홍탁의 딸이다. 홍탁은 경상도 진변사로 있었는데, 충혜왕이 그의 딸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1342년에 궁중으로 맞아들이지도 않고 그녀를 화비에 봉했다.

   그 후 그녀는 재상 윤침의 집에서 기거하였는데, 충혜왕은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 싫증을 내고 출입을 끊어버렸다.

   사망 연대와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소생은 없다.


   은천옹주 임씨(생몰년 미상)

   은청옹주 임씨는 상인 임신의 딸이며 단양대군 왕유의 종이었다. 오지그릇(사기)을 파는 것을 생업으로 하고 있던 그녀는 어느 날 충혜왕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1342년 충혜왕이 화비 홍씨를 후비로 맞아들이려 하자 그녀는 질투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이에 충혜왕이 그녀를 달래기 위해 은천옹주에 봉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녀를 가리켜 ‘오지옹주’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녀가 오지그릇을 팔던 여자였다는 사실을 비꼬아 부른 별호였다.

   그녀는 무척 음탕하여 충혜왕과 죽이 잘 맞았으며, 사치가 심하여 충혜왕으로 하여금 신궁을 짓도록 하고 자신이 그곳에 거처하였다. 충혜왕이 이른바 열약이라는 정력제를 먹어 다른 비빈들이 성생활을 견디지 못했는데, 유독 그녀만은 능히 충혜왕의 성욕을 감당하여 총애를 독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녀가 아들 석기를 낳았을 때 복잔치를 차렸는데, 이 때 예물로 사용된 비단은 모두 상인들에게 강제로 탈취한 것이었다. 이처럼 권세를 누리던 그녀는 1343년 충혜왕이 원나라로 압송되자 고용보 등에 의해 궁궐에서 추방당하였다.

   능과 사망 연대에 관한 기록은 없으며, 소생은 석기 하나뿐이었다.


   석기(?~1375년)

   석기는 충혜왕과 은천옹주 임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충정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머리를 깎여 만덕사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공민왕 대에 원나라에 소환되어 그곳에 머물렀다가 고려로 돌아왔다.

   1356년에는 임중보 등이 석기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세웠다는 죄목으로 순군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정승 손수경, 밀직 홍준, 감철대부 손용, 황숙경, 교령 정세공 등 10여 명이 연루되어 하옥되었다. 또한 석기는 제주로 유배되었는데 공민왕은 이안, 정보 등을 시켜 압송 도중 바다에 빠뜨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석기는 빠져죽지 않고 간신히 도망하여 민가에 몸을 숨겼다. 이에 이안 등이 석기를 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거짓보고를 하였다.

   공민왕은 김유가 보낸 석기의 목을 저자에 내걸고 은천옹주의 아비 임신과 거짓보고를 했던 이안, 정보 등의 목을 벴다. 또한 그들의 측근들도 함께 사형되었다.

   그러나 석기는 이 때도 죽지 않았다. 평양에서 죽은 자는 석기와 평소에 같이 다니던 승려였고, 정작 석기는 도피하여 안협의 주민 백언린의 집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조용히 살았는데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들어선 다음인 1375년에 경복흥, 이인임 등이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용케 찾아낸다. 그리고 그해 이인임, 경복흥, 최영, 최인철 등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석기는 평민으로 살면서 평민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석기가 죽자 평리를 지낸 양백익이 자신의 초막에 숨겨두었다. 하지만 이 사실이 곧 알려져 양백익은 유배되고 아이는 머리를 깎여 계룡산에 출가시키기로 하였는데, 아이가 미처 계룡산에 당도하기도 전에 일부 대신들의 사주를 받은 아전에 의해 살해되었다.


   3. ‘충혜왕실록’ 편찬 관련사항


   ‘충혜왕실록’은 우왕 11년인 1385년에 ‘충목왕실록’, ‘충정왕실록’과 함께 이승인, 정몽주 등에 의하여 편찬된 듯하다.

   실록의 자료를 통하여『고려사』를 편찬한 사관들이 충혜왕에 대해 성질이 포악하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는 평을 한 것으로 봐서 이승인, 정몽주 등은 충혜왕을 매우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었던 듯하다. 특히 실록에 충혜왕의 음탕한 행위를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봐서 그 비판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출처 : 운현 시조정가교실
글쓴이 : 운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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