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사

[스크랩] 고려26대 충선왕실록

똥하 2008. 11. 19. 19:36

1. 충선왕의 전지(傳旨)정치와 고려 조정의 불안정

   (1275~1325년, 재위기간 : 1298년 1~8월, 1308년 7월 복위~1313년 5월, 총 5년 3개월)


   원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은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면서 고려의 몽고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진다. 심지어는 왕이 재위기간 대부분을 원나라에서 기거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로 인해 고려 조정의 불안은 한층 가중되고, 한편에선 왕위를 둘러싼 암투가 진행된다.

   충선왕은 충렬왕의 셋째 아들이자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 소생으로 1275년 9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원(謜), 이름은 장(璋), 자는 중앙(仲昻), 몽고식 이름은 이지리부카다. 1277년 1월에 3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298년 정월에 태상왕으로 물러난 충렬왕을 이어 24세의 젊은 나이로 고려 제26대 왕에 올랐다. 하지만 왕비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로 그해 8월에 왕위에서 쫓겨나 원나라로 압송되었다가 1308년 7월 충렬왕의 뒤를 이어 복위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충선왕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9세 때 충렬왕이 사냥을 떠나는 것을 보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기에 유모가 그 연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지금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에 허덕이고 농사철이 닥쳐왔는데, 아바마마께서는 어찌하여 멀리 사냥을 떠나려 하시는지 모르겠어.”

   이 일은 곧 조의순을 통하여 충렬왕의 귀에 들어갔다. 하지만 충렬왕은 사냥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는데, 얼마 후 장목왕후가 병으로 앓아눕는 바람에 결국 사냥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고 한다.

  『고려사』에 전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충선왕의 총명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그의 모후인 장목왕후가 충렬왕의 잦은 사냥을 싫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충렬왕은 사냥과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장목왕후는 그 같은 왕의 처사를 불만스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선왕이 부왕의 사냥 행에 울음을 터뜨린 일은 장목왕후의 심정을 대변한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충선왕은 부왕 충렬왕과 모후 장목왕후의 갈등을 지켜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287년에는 원나라에 입조하여 연경에 머물다 귀국하였으며, 1281년에는 원 세조로부터 특진상주국고려국왕세자에 임명되고 금인(金印)을 받았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원 세조의 명령으로 원나라를 다녀왔으며, 1296년 11월에는 원나라 진왕의 딸 보다시리와 결혼하여 원 왕실의 부마가 되었다.

   그 무렵 충렬왕은 궁인 무비를 총애하며 그녀의 측근들과 어울려 지냈는데, 그 바람에 조정의 힘이 무비에게로 집중되었다. 이렇게 되자 장목왕후와 충렬왕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왕과 세자 간의 알력도 심해졌다. 그러던 중 1297년 5월에 장목왕후가 병으로 죽자 원에 머물던 세자는 모후의 문상을 위해 급히 귀국하여 무비를 비롯한 그녀 측근들을 살해하고 도당 40여 명을 귀양 보내버린다. 그리고 그는 다시 원나라로 떠났고, 충렬왕은 스스로 힘을 상실했다는 판단을 하고 왕위를 내놓는다. 그래서 1298년 정월에 충렬왕은 태상왕으로 물러나고, 충선왕이 즉위하여 국정을 관장하게 된다.

   원나라 역시 이 일을 묵인하고 충선왕을 고려 국왕에 임명하는 한편 상왕으로 물러나 충렬왕에게는 일수왕(逸壽王)이라는 칭호를 내린다.

   충선왕이 이처럼 갑자기 힘이 강대해진 것은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은 충렬왕을 제국공주와 혼인시켜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았고, 충렬왕은 원의 힘을 빌려 왕권을 되찾았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제국공주가 버티고 있는 경우에 한해서 충렬왕은 원나라 부마국의 국왕으로서 원의 지원을 받으며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제국공주의 죽음은 충렬왕의 왕권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고려 왕실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에 반해 충선왕은 그때 막 진왕 감마라의 딸과 결혼을 하여 원 왕실의 부마가 된 입장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원은 충선왕을 더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던 충렬왕은 스스로 힘이 약해진 것을 깨닫고 왕위에서 물러났던 것이다.

   충선왕은 즉위하자마자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을 감행한다. 즉위 교서에 담긴 30여 항의 개혁안은 정치뿐 아니라 경제와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광범위하고도 과감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우선 합단 침입 시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포상하고 개국 이래의 공신 자손들에게 공신전을 환급함으로써 국가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였고, 내시와 다방 관속들의 등급을 올려 왕권을 강화하고, 급사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주고 벼슬이 정7품에 한정되어 있던 남반(南班)에 속한 자도 연한에 상관없이 7풍 이상에 제수될 수 있는 동반(東班)으로 바뀔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승려의 직분을 새롭게 하고 지방에 묻혀 있는 선비들을 등용하여 문신의 힘을 키우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해 4월에는 인사를 담당하던 정방을 폐지하여 한림원과 합쳤으며, 5월에는 전면적 관제개혁을 실시하였다. 충렬왕 즉위년에 원의 강압으로 격하된 관청명이 사라지고 광정원, 자정원, 사림원 등의 새로운 관청들이 생겨났다. 이는 이름만 다를 뿐 시중, 좌우복야 등 종전의 고려 관제를 복구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관제개혁은 다소 반원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충선왕의 개혁정책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명 ‘조비무고사건’으로 불리는 이 일은 세자 비였던 조인규의 딸 조비와 충선왕의 금실이 너무 좋자 이를 시기한 왕비 계국공주에 의해 발생한다.

   계국공주는 조비가 충선왕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이를 질투하여 위구르 글로 편지를 써서 수하 활활불화와 활활대로 하여금 원의 황태후에 전하게 한다. 공주는 충선왕이 조비만 총애하여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관직을 변경하여 정사를 반원적 차원에서 처리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그 며칠 뒤에 조인규의 처가 무당을 불러 굿을 하여 왕이 공주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딸만 사랑하도록 해달라고 빌었다는 익명의 편지가 궁문에 나붙었다.

   이에 공주는 조인규와 그의 처 그리고 척족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또 철리를 원나라에 보내 투서사건을 알리게 하였다. 그러자 원의 황태후는 활활불화에게 사신을 붙여 사건을 추궁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조비를 비롯해 최충소와 장군 유온이 순마소(巡馬所)에 갇히고 조인규와 그의 처는 원나라로 압송되었다.

   원나라로 압송된 조인규는 고문을 견디지 못해 허위 자백을 하였고, 조비와 내관 이온이 다시 원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원의 태후는 승려 5명과 도사 2명을 보내 공주에 대한 저주를 풀어주고, 홍군상을 파견하여 부부간의 애정을 돋우는 음식을 만들어 왕과 공주가 함께 먹도록 하였다.

   하지만 사건은 여기서 종결되지 않았다. 충선왕이 궁지에 몰린 상황을 이용하여 충렬왕지지 세력이 충렬왕의 복위를 도모한 것이다. 이 때문에 1298년 8월 충선왕은 즉위 7개월 만에 왕위에서 쫓겨나 원으로 호송되고 충렬왕이 복위되었다. 또한 충선왕이 새롭게 설치했던 관청과 관직도 모두 혁파되고 충렬왕 대의 것으로 복원되었다.

   원으로 호송된 충선왕은 그 이후 10년 동안 연경에서 머무른다. 이 기간 동안 충렬왕은 충선왕 파를 제거하는 한편 자신의 10촌 종제이며 신종의 3대 손인 서흥후 왕전에게 왕위를 넘겨주려는 계획을 짠다. 그래서 측근인 왕유소, 송린, 석천보 등을 앞세워 계국공주를 서흥후 전에게 개가시키려는 음모를 진행하게 된다. 또한 충선왕의 환국을 저지하는 운동을 벌이다가 급기야 충선왕을 폐하기 위해 충렬왕이 직접 원나라에 가기도 한다.

   충렬왕이 원나라를 방문한 것은 1305년이었다. 이 당시 원은 적자를 두지 못한 성종 티무르의 건강이 좋지 않은 관계로 왕족 간에 왕위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충선왕은 그들의 왕위다툼에 가담하여 나름대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렬왕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1307년에 티무르가 죽고 충선왕이 지지하고 있던 회녕왕 하야샨(무종)이 차기 왕으로 유력시되자 사태는 오히려 반전된다. 충선왕을 폐하기 위해 원에 갔던 충렬왕은 되레 충선왕에 의해 왕유소 등의 측근들을 모두 잃고 왕권마저 상실한다. 말하자면 이름만 왕일 뿐 모든 권한은 충선왕이 쥐게 된 것이다. 그리고 1308년 7월 충렬왕이 죽자 충선왕은 다시금 왕좌에 앉았다.

   10년 만에 왕위를 되찾은 충선왕은 즉위하자 곧 조신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조세의 공평, 인재 등용의 개방, 공신 자제의 중용, 농잠업의 장려, 동성 결혼의 금지, 귀족의 횡포 엄단 등 다시 한 번 혁신정치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원나라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그는 고려의 왕궁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지 즉위 두 달 만에 숙부인 제안공 왕숙에게 정권을 대행케 하고 다시 원으로 건너갔다. 이 때문에 즉위 시에 발표했던 개혁안들은 허사가 됐고, 고려 조정은 연경에 머무는 충선왕의 전지(傳旨, 멀리 떨어져 있는 왕이 전달자를 통해 신하들에게 내리는 교지)에 의해 국정 전반을 운영해야 했기 때문에 조신들은 개경과 연경을 오가며 국정을 수행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 같은 전지정치는 곧 조정을 불안정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전승 최유엄이 극언으로 귀국할 것을 상소했지만 충선왕은 원나라 왕실의 후한 대접을 잃게 될까 봐 귀국하지 않았다. 당시 충선왕은 원 무종의 신임을 받아 심양왕에 봉해져 있었으며, 심지어는 무종이 심양의 관리들에게 충선왕을 거치지 않은 청원이나 보고는 받지 않겠다고 공언한 상태였다. 따라서 충선왕은 이 같은 절대적인 힘과 배경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고려에서는 세자 감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측근들이 이를 감지하고 보고하자 충선왕은 1310년 5월 세작 감과 그의 측근 김의중을 죽여 버렸다.

   충선왕은 이처럼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원나라 체류를 고집하였고, 이로 인해 엄청난 물자가 매일같이 연경으로 이송되어야 했다. 이에 조신들은 누차에 걸쳐 왕의 환국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충선왕은 전혀 환국할 뜻이 없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의 압박은 날로 거세졌다. 이에 그는 1313년 3월 둘째 아들 강릉대군 왕도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극단적 조치를 내리고 신하들의 환국 압력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때 충선왕이 이복형 강양공 왕자의 둘째 아들 왕고를 세자로 세우는 바람에 후에 충숙왕과 왕고 간에 치열한 왕위다툼을 유발시킨다.

   이렇듯 원 왕실이 부여한 지위를 누리기 위해 원나라 체류를 고집하던 충선왕은 연경의 저택에 만권당을 세워 그곳에서 요수, 염복, 조맹부, 원명선 등 당대의 명류(名流)들과 학문을 교류하기도 했고, 고려에서 이제현을 불러내 그들과 교류하게 하여 고려의 학문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불교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1316년에는 심양왕의 자리를 조카 왕고에게 물려주고 티베트 승려를 불러 계율을 받기도 하였다.

   충선왕은 이처럼 무종, 인종 대에 걸쳐 원 왕실의 후한 대접을 받으며 호화로운 생활과 권력을 동시에 누렸다. 하지만 1320년에 인종이 죽고 영종이 즉위하자 입지가 약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원 왕실로부터 심한 환국 압박을 받아야만 했다. 거기다 고려 출신 환관인 임빠이엔토쿠스의 모략에 말려들어 토번으로 유배되는 처지가 되었다. 다행히 1323년에 태정제가 즉위하여 겨우 풀려나 연경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1325년 5월 중국 연경에서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사망 후 그의 시신은 고려로 옮겨져 덕릉에 안치되었으며, 실록은 충혜왕 대에 ‘충렬왕실록’과 함께 편찬되었다.


   3. 충선왕의 가족들


   충선왕은 8명의 부인을 두었다. 하지만 이들 8명 중 숙비 김씨는 원래 충렬왕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제외되고, 셋째 아들 덕흥군 혜를 낳은 부인은 이름이 전하지 않으므로『고려사』,『후비열전』은 계국대장공주, 의비, 정비 왕씨, 순화원비 홍씨, 조비, 순비 허씨 등에 관한 기록만 남기고 있다. 이들 7명의 부인들 중에서 의비가 세자 감과 충숙왕을 낳았고,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후비가 덕흥군을 낳았다. 열전에 기록된 6명의 후비와 세자 감, 덕흥군 등의 삶을 간단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계국대장공주(?~1315년)

   계국대장공주는 원나라 진왕 감마라의 딸이며 이름은 보다시리다. 1296년에 충선왕과 혼인하였으며, 1298년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고려로 왔다.

   고려의 왕비가 된 그녀는 충렬왕비 제국공주와 마찬가지로 이미 세자빈으로 있던 조비 등을 밀어내고 제1비에 올랐다. 하지만 충선왕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충선왕은 세자 시절부터 부부관계를 맺고 있던 조인규의 딸 조비를 총애하였고, 이를 질투한 계국공주는 음모를 꾸며 조비를 쫓아낸다.

   계국공주는 조비가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수하를 시켜 원나라 태후에게 편지를 보낸다. 충선왕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박경량을 보내 원으로 향하던 활활불화와 활활대를 저지시키려 하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얼마 후 “조인규의 처가 무당을 불러 굿을 하여 왕이 공주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딸만 사랑하도록 해달라고 빌었다.”는 익명서가 나붙는다. 이 사건으로 조인규와 그의 처는 원으로 압송되어 허위 자백을 하게 되고 조비도 원으로 끌려갔다. 또한 충선왕도 왕위를 빼앗기고 원나라로 호출되었다.

   그 후 충렬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원으로 돌아갔다. 그 3년 뒤인 1301년 충렬왕은 민훤을 파견하여 공주를 개가시키려 하지만 성사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충렬왕은 1305년에 왕유소 등의 측근들을 앞세우고 연경으로 직접 가서 다시금 공주의 개가작업을 시도한다. 충렬왕은 공주를 서흥후 왕전에게 개가시키고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왕전은 인물이 출중하였기 때문에 충렬왕은 누차에 걸쳐 공주가 그에게 매료되도록 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하곤 하였다. 이 같은 충렬왕의 노력에 따라 공주와 왕전은 가까워졌다. 공주는 원래부터 행실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충선왕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왕전을 마음에 두게 된 것이다.

   그러나 1307년 원의 성종이 죽고 무종이 즉위함에 따라 충선왕의 힘이 강해졌고, 이 바람에 공주의 개가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히려 공주의 개가를 주선하던 왕유소 등의 충렬왕파 대신들과 왕전은 충선왕으로부터 죽임을 당했다.

   그 후 공주는 충선왕을 따라 일시 귀국했다가 충선왕이 원으로 떠나자 연경에서 머물렀고, 1313년 충선왕이 다시 일시 귀국하자 2년 동안 머물다가 1315년에 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해에 연경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그녀의 시신은 고려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소생은 없었다. 1317년 원의 인종으로부터 계국대장공주의 시호가 추봉되었다.


   의비(?~1316년)

   의비는 몽고 여자로 이름은 야속진이다. 그녀의 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봐서 원의 왕실녀는 아닌 것 같다.

   그녀는 충선왕과 결혼하여 세자 감과 충숙왕을 낳았다. 충숙왕의 생년이 1294년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녀는 적어도 1290년을 전후하여 충선왕에게 시집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녀가 계국공주보다 먼저 충선왕의 부인이 되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충선왕이 세자의 몸으로 원에 체류할 때 결혼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녀는 줄곧 충선왕을 따라 개경과 연경에 체류하다가 1316년 연경에서 사망하였으며, 시신은 고려로 옮겨져 묻혔다. 장례 후 의비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하지만 충숙왕 즉위 후에도 태후로 추존되지는 않았다.

   

   정비 왕씨(?~1345년)

   정비 왕씨는 서원후 왕영의 딸이다. 1287년에 그녀는 원 왕실의 요구에 따라 공녀로 바쳐질 운명에 처했다. 그런데 당시 원나라로 가던 충선왕이 장차 자신이 그녀에게 장가들려고 한다고 말하여 그녀는 공녀에서 제외됐다. 그리고 1289년에 그녀는 충선왕과 결혼하여 세자빈이 되었다. 하지만 이 결혼이 동성혼이라는 이유 때문에 원 세조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원은 고려 왕실과 몽고 공주와의 결혼을 관례로 정착시키기 위해 고의적으로 동족혼을 금지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 같은 원의 의지는 관철되어 1308년에 충선왕은 즉위년 교설ㄹ 통하여 동성혼을 법으로 금지시키고 왕실과 통혼할 수 있는 대상으로 15개 귀족 가문을 선정하게 된다.

   귀족 가문으로서 충선왕과 혼인하게 되는 집안은 남양 사람 홍규의 딸인 순회원비, 상원 사람 평양군 조인규의 딸 조비, 공암현 사람 허공의 딸 순비 등과 한때는 충렬왕비였으나 그의 사후에 다시 충선왕비가 된 언양 사람 김양감의 딸 숙비가 있다.

   정비는 왕족 간의 혼인이라는 것과 고려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충선왕의 첫 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몽고 여자 의비에 이어 제3비로 머무르다가 1345년에 사망했다. 소생은 없었으며, 능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순화원비 홍씨(생몰년 미상)

   순화원비 홍씨는 남양부원군 홍규의 딸이며 충선왕이 복위된 이후에 후비에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능과 죽음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소생도 없었다.


   조비(생몰년 미상)

   조비는 상원군 출신 평양군 조인규의 딸이다. 1292년에 세자빈에 간택되어 입궁하였으며 충선왕과 금실이 매우 좋았다. 하지만 1298년에 계국공주가 입국하여 그녀와 충선왕의 관계를 질투하면서 원 왕실에 고발하는 바람에 난처한 입장에 놓인다. 거기다 그녀를 비방하는 익명서가 나붙어 아버지 조인규와 어머니가 원에 압송되고, 그녀도 뒤에 압송되어 고초를 당한다. 하지만 그녀가 언제 죽었는지에 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순비 허씨(?~1335년)

   순비 허씨는 공암현 사람으로 중찬 허공의 딸이다. 그녀는 처음에 평양공 왕현에게 시집가서 3남 4녀를 낳았는데, 왕현이 죽은 후 1308년에 충선왕에게 개가하였다. 그리고 그해에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순비에 책봉되었다.

   당시 충선왕은 한때 충렬왕의 부인이었던 숙비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숙비는 허씨를 몹시 싫어했다. 그래서 두 사람 간에는 항상 대립과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연회장에서 서로의 옷을 뽐내기 위해 두 사람이 모두 한 장소에서 다섯 번이나 옷을 갈아입는 추태를 부리기도 하였다.

   1335년에 사망하였으며,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소생도 없었다.  


   세자 왕감(?~1310년)

   세자 왕감은 충선왕의 맏아들이며, 의비 소생이다. 그의 아명은 의충이며 일찍이 광릉군으로 책봉되었다가 후에 세자에 봉해졌다. 하지만 1310년에 부왕 충선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였다.

   사서는 그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지만, 당시 충선왕이 너무 오랫동안 원나라에 머무는 바람에 조신들 중에 왕감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이를 눈치 챈 충선왕이 그와 그의 측근 김의중 등을 죽였던 것이다.

   원나라 연경에서 부왕의 손에 죽임을 당한 그의 시신은 고려로 옮겨져 개경 남쪽에 묻혔다.


   덕흥군 왕혜(생몰년 미상)

   덕흥군은 충선왕의 셋째 아들이다. 하지만 누구의 소생인지는 전해지지 않으며, 이름은 혜, 몽고식 이름은 탑사첩목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줄곧 승려로 지내다가 1351년에 원나라로 도주했다. 그 후 공민왕이 즉위하여 기왕후의 오빠 기철을 죽이자 기왕후가 공민왕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그래서 기왕후는 고려인 최유에게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게 하여 기삼보노를 원자로 삼으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다.

   기왕후는 이 음모를 실천하기 위해 군사 1만을 내어 최유에게 주고 고려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최유는 압록강 이남 달천에서 패배하고, 덕흥군은 수하들만 데리고 원으로 되돌아간다.

   이에 고려는 원 조정에 김유를 보내 덕흥군을 고려로 보낼 것을 요청하지만 덕흥군이 등창을 앓고 있다는 핑계를 대며 원은 이를 거절한다. 그래서 덕흥군은 고려에 압송되지 않고 원에 머무르며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여생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출처 : 운현 시조정가교실
글쓴이 : 운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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