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

[스크랩] 조선시대 부정부패 방지법

똥하 2018. 2. 19. 16:07

전통사회의 부정부패방지법


이해가 같으면 관직은 달라야 한다 - 상피(相避)제도 -

 

전통사회에서는 관료나 아전들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상피(相避)라는 규례가 있었다. 상피는 관료체계의 원활한 운영과 권력의 집중·전횡을 막기 위하여 일정 범위 내의 친족간에는 같은 관청 또는 상하 관계에 있는 관청에서 근무할 수 없게 하거나, 연고가 있는 관직에 앉을 수 없게 한 제도였다. 이미 이 제도는 골품사회에서 관료제가 정착하기 시작한 고려시대에 성문화되었다. 1092(선종 9)에 고려의 예법인 오복제를 기초로 하고, 여기에 송나라의 제도를 참작하여 처음 실시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귀족제가 강력히 전개되는 상황에서 관료제도는 형식에 불과하였고, 상피제도도 명분뿐인 법제였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비로소 상피제도는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조선 초 개국에 앞장선 양반사대부들은 양반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이상국가 실현에 창업의 목표를 두었다. 그래서 과거제의 전면적 시행을 강조하면서 이와 함께 상피제도를 통하여 권력의 집중·전횡을 막으려고 했다. 왕권강화라는 정치철학을 가진 왕들이 계속 즉위하면서 상피제도는 신권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다만 유교 사상에 토대를 둔 부계친족사회의 성격상 그 적용범위가 4촌까지로 규정되었고, 고려시대와는 달리 모족과 처족에 대한 제한이 완화되었다. 한편 벼슬간에도 이해관계가 있으면 상피를 했다. 예를 들어 승정원의 육방 승지와 육조간에는 상피가 원칙이었다. 아울러 같은 관청이 아니라도 서로 상피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인사권과 병권의 집중을 막는 수단이기도 했다. 또한 권력의 집중이 우려되는 관청에도 상피가 적용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상피제도는 결정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외척의 정치개입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유교적 가부장제 아래서 처족과 외족에 대한 제한이 약화된 때문이었다. 처족과 외족이 상피법망에서 해방되면서 실제적으로 조선의 허약한 왕권의 후견자역을 자임하던 왕비족의 권력독점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조선 말기 일련의 세도 정권과 민씨 독재 정권의 출현은 그러한 법망에서 피한 외척의 권력 독점 과정이었다. 이러한 외척 배제의 실패는 조선시대 부패법이 유명무실화하는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하급관리의 부정부패를 막아라 - 형전 -

 

<경국대전> 5 형전 원오향리(元惡鄕吏) 항목에는 오늘날의 지방 하급관리에 해당하는 아전들의 부정부패에 대한 처벌 조항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고을 수령을 조종하여 마음대로 권세를 부린 자, 몰래 뇌물을 먹고 부역을 면해준 자, 세금을 받을 때 수고비 등을 받은 자, 불법으로 양민을 부역시킨 자, 관청을 빙자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자, 양인의 딸이나 관청 여종을 첩으로 삼은 자 등을 원오향리 즉 사악한 시골향리로 부르고, 엄한 형벌을 가했다.

 

아전들의 부정이 발각될 경우 누구든 서울에 있던 경재소(각 출신 지방을 돕거나 감시하기 위해 서울에 설치한 지방 감독 관청)나 사헌부에 신고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도형죄를 범한 경우는 아전의 출신도에 있는 군소 역참 소속 아전으로 영원히 붙잡아두게 했다. 그리고 죄질이 높아 유형(귀양)죄를 범한 자는 다른 도의 군소 역참에 평생 박혀있게 했다. 역참은 주로 천인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공무원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백령도나 벽오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일반 양인보다 훨씬 가혹한 직무를 감당하고, 미래도 전혀 보장할 수 없는 불행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고급관료에 청탁하지 말라 -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 -

 

분경이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줄임말로, 벼슬을 따기 위해 권력자의 집에 드나들며 엽관운동을 하는 행위로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이란 이를 금지하는 법이다. 이미 고려시대에도 분경금지법이 있었다. 고려사명종 5(1174) 4월에 내린 왕의 교서에 의하면요사이 분경이 극심하여 권력이 사사로운 집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이미 고려시대 중기에 들면 관료를 귀족화하는 추세에서 분경이 국가체계를 불안케 하는 요소로 인식되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마저도 청탁이 들어오면 뇌물을 받고 엽관행위를 하는 등 분경금지법은 있으나마나였다.

 

분경금지법이 강력히 실시된 것은 조선시대였다. 정종이 정권안정 차원에서 대소관리가 사적으로 만나는 일(사알)을 금지하는 교지를 처음으로 내렸다. 이후 태종이 강력히 시행했고, 성종 때 경국대전에 명문화했다.경국대전에는 상급관리의 집을 방문하여 엽관운동을 하는 자는 곤장 100대를 가하여 3,000리 밖으로 유배하였다고 한다. 100대면 사형에 가까운 징계이고, 유형 삼천리라면 사실상 조선땅에서 살 수 없다는 형벌이었다.

 

그러나 분경금지법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왕족, 그 가운데서도 외척과 왕비족 견제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는 두고두고 조선왕조가 외척정치, 세도정치로 가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숙종조에 들어 분경금지의 범위를 현실적으로 축소 정비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역시 유명무실해졌다. 급기야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통탄하듯이 고종대에 오면 왕실이 직접 벼슬을 팔아먹을 정도로 타락했고, 조선왕조는 결국 망했다


출처 : 이것이 역사다
글쓴이 : 시리게푸른하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