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스크랩] 법성게(法性偈) -무비스님 강의 녹취록

똥하 2015. 7. 4.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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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게(法性偈) 강의 -무비스님


 

          법성게 (法性偈)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법의성품 원융하고 두생각에 안걸리니 모든법이 부동하여 고요하기 그지없다.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이름에도 모습에도 어디에도 안걸려야 모든것을 알아보는 참지혜를 얻게된다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참성품은 깊디깊고 미묘하디 미묘하여 자기성품 고집않고 인연따라 나투운다.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하나안에 일체있고 일체안에 하나있어 하나가곧 일체이며 일체가곧 하나이다.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한티끌은 온우주를 고스란히 머금었고 낱낱티끌 각각마다 온우주를 품었구나.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時無量劫     

끝도없이 긴긴세월 무량겁이 찰나이고 찰나가곧 긴긴세월 한량없는 겁이로다.

구세십세호상즉  잉불잡란격별성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세간들과 출세간이 서로함께 어울려도 혼란없이 정연하고 뚜렷하게 구분된다.

초발심시변정각  생사열반상공화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常共和 

처음발심 한마음이 바른깨침 이룬때요 생사경계 열반경계 항상서로 화합한다.

이사명연무분별  시불보현대인경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근본진리 현상계가 따로없고 하나이니 부처님과 보현보살 모든성현 경계로다.

능인해인삼매중  번출여의불사의     

能仁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     

넓고깊은 해인삼매 오롯하게 이루어야 불가사의 무궁한법 빠짐없이 드러난다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보배비가 중생위해 하늘가득 내려오나 중생들은 그릇따라 이로움을 얻는다네.

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

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이러하니 수행자는 근본으로 돌아가서 망상심을 쉬지않곤 얻을길이 달리없네.

무연선교착여의  귀가수분득자량

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무인연의 좋은방편 마음대로 자재하면 보리열반 성취하는 밑거름을 얻음일세.

이다라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

以陀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이말씀의 무진법문 한량없는 보배로써 온법계를 장엄하고 보배궁전 이루어서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결국에는 진여법성 중도자리 깨달아서 부동자리 돌아가면 이가바로 부처일세.       

 

 

무비스님 <화엄경>의 세계, <법성게> 강의 (1)


녹취자: 無憂手    


  그 동안 <화엄경(華嚴經)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을 공부하시고 또 화엄경을 요약한 소위 그 약찬게(略纂偈)를 2회에 걸쳐서 공부하시고 오늘은 <화엄경>의 이치를 그 뜻으로 요약한 것이 <법성게(法性偈)>라고 하는 것인데 오늘 법성게를 공부하게 되겠습니다.


  <법성게>하면 여러 신도님들 머리에 49재(齋)를 우리가 지낼 때 마지막 영가를 전송하면서 도량에 이렇게 나와서 소대(燒臺)라고 소위 하지요. 위패를 위시해서 뭐 옷가지 같은 거 이렇게 태우는데 거기를 태우는 곳을 소대라 하는데 소대까지 이제 법당에서부터 이렇게 나오면서 우리 모두가 그 영가를 위해서 외워서 전송하는 소위 그 전송곡이 말하자면 법성게입니다. 아마 그때 모두 외웠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해인사 그 소위 그 장경 정재불사에 참석해 보신 분들은 또 기억나실 것입니다. 넓은 마당에다가 각이진 네모로 각이진 그림을 이렇게 그려놓고 거기에 이렇게 팔만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돌면서 그 법성게를 이제 외우지요. 장경각(藏經閣)에서부터 쭉 이렇게 법성게를 외우면서 내려와 가지고 마당에서 법성도(法性圖)라고 그래요 그 그림을. 법성도라 그러는데 그 법성도 그림을 돌면서 법성게를 이제 외웁니다. 3월 불사라고 해인사의 그 소위 그 장경정재불사라고 유명하지요. 거기에 이 법성게를 외우면서 법성도를 따라 돌면서 외우는 그런 그 일도 있고 그렇죠. 무엇보다도 우리가 49재를 지낼 때 아무리 참 사랑했던 사람이라도 보내는 그런 마당에서 마지막 그 영가에게 지혜의 그 눈을 뜨고 보다 더 차원 높은 새로운 삶을 사시라는 그런 뜻에서 최고의 진리 가르침을 노래로 불러드리는 소위 그 법성게(法性偈)입니다.


  이것이 이제 정말 우리 염불을 통해서라든지 평소에 또 좋은 염불(念佛)이라고 해서 외우고 있는 입장으로든지 뭐 우리에게 익숙하다면 매우 익숙한 그런 염불이 되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의상스님이 중국에 이제 가서 화엄경을 공부를 했습니다. 당신이 그 화엄경 공부한 것을 전부 그야말로 압축하고 압축해서  화엄경을 터득한 그 이치를 압축하고 압축해서 한 편의 시로써 이렇게 남긴 것이 소위 법성게(法性偈)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그림을 그리고 여기에 이제 그 글을 법성게를 짓고 해가지고 스승인 지엄(智嚴)스님에게다가 올렸더니 정말 극찬을 했습니다. 참 아주 정말 기가 맥힌 그런 그 내용이다 하고 아주 극찬했습니다.


  그래서 이 법성게는요 우리나라의 고전으로서 명문(名文) 중에 명문으로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禪家龜鑑)도 아주 명문으로 손꼽히고요, 보조스님의 수심결(修心訣)같은 것도 아주 알아주는 글이고 그렇습니다. 그 중에 법성게는 뭐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만은 뜻도 깊고 글도 좋은 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에게 아주 극찬을 받았지요. 그래서 그 후로 이 법성게가 중국에나 우리나라나 일본에 많이 알려져서 화엄경에 담겨져 있는 이치를 이치로 파악하는데는 이 법성게가 제일이다. 라고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법성게(法性偈)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법성게의 그 저자이신 의상스님은 신라의 스님으로서 잘 아시죠? 속성은 김씨인데 스무 살에 황복사(皇福寺)라는 절에 출가를 해서 승려가 됐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화엄경의 시조로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원효스님하고 같이 당나라 중국으로 유학을 가다가 원효스님은 중간에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 다시 돌아오고 의상스님은 그대로 건너가게 되었지요. 물론 그 길에 원효스님이 깨달은 그 길에는 다시 또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배편으로 중국에 건너가게 되지요. 배를 타고 이제 건너가게 됩니다. 그래 가서 화엄경을 깊이 공부를 하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아주 그 부석사를 중심으로 했어요.


  돌아와서 바로는 어떤 업적을 남겼는고 하면은 유명한 낙상사 의상대라고 아시죠? 의상대 홍련암 거기에서 백 일 관음 기도를 올려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오자마자 바로 거기서 백 일 기도를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의상대가 지금도 그렇게 남아있습니다. 그래 그 관음기도를 백일 마치고 부석사로 옵니다. 영주 부석사로 와서 부석사를 창건하게 됩니다. 그 이제 앞으로 화엄경을 펴기 위해서 전국에다 방방곡곡에다 화엄사찰을 지을텐데 그렇게 할려면은 기도를 해야겠죠. 물론 당신이 그 동안 화엄경 공부한 것도 기도했지만은 또 특별히 기도를 그렇게 의상대에서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부석사를 시발로 해서 전국에다 사찰을 짓게 됩니다. 그래서 부석사하고 그 다음에 인제 화엄사, 해인사. 해인사 물론 최초창건은 순응(順應)이나 이정(利貞)같은 그런 이들입니다마는 역시 이제 처음에 지을 때 보다는 이 의상스님의 그런 그 영향력으로 화엄 사찰로 다시 개조를 한다든지 또는 그 어떤 그 건립하게 되는 건물 같은 것들을 화엄경의 어떤 이치에 맞도록 하는 그런 일들을 재차 구성을 하게 되는 거지요. 갑사. 특히 이제 갑사 가까이 있는 갑사가 특히 가까이 있는 범어사가 의상스님 창건이고 또 역시이제 화엄사찰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미리사 지금 어느 사찰인지는 내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마는 미리사 보광사 보월사 저기 옥천사 청담사 뭐 이런 등 사찰이 의상스님이 새롭게 화엄경을 펴기 위해서 창건을 했거나 아니면 또 사찰의 재출발을 기하게 된 그런 사찰들입니다.


  그래서 원효스님의 업적도 상당합니다마는 의상스님은 뿌리가 있고 그래서 제자들도 아주 상당히 많았습니다. 많고 또 그 당시뿐만 아니고 의상스님 열반하신 뒤 오래도록 그 제자들이 면면히 이어지면서 그 의상스님의 사상을 전파하게 된 그런 그 역사가 있습니다. 또 의상스님 문하에는 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그 십대덕이라고 해서 그 열 명의 큰 스님들을 꼽습니다. 의상스님 바로 직계제자로요. 오진(五眞)스님이라든지, 지통(智通)스님, 표훈(表訓)스님이라고 이 이가 이제 역사적으로 제일 알려져 있는 스님인데 표훈스님이라고 범어사도 보면 표훈스님의 그 행적이 남아있습니다. 그다음 진정(眞定)스님, 진장(眞藏)스님, 도융(道融)스님, 양원(量圓)스님, 상원(相源)스님, 능인(能仁)스님, 의적(義寂)스님 뭐 이런 이들이 의상스님의 많은 제자 중에서 손꼽는 열 명의 제자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역사가 이제 남겨져있죠.


  그래서 의상스님의 저술(著述)로는 특히 이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라 그렇게 해요. 이 법성게(法性偈)를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라고 하는 그런 그 그림과 이 법성게(法性偈) 그리고 또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그 다음에 또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이라든지 입법계품초기(立法界品抄) 또 소아미타경의기(小阿彌陀經義記) 이런 것들이 이제 남아있습니다. 이런 그 우리 신라의 아주 뛰어난 고승 또 우리 불교사 내지 한국사에 큰 사상가로서 역사가 있는 그 분이 화엄의 이치를 통달하셔가지고 그것을 그야말로 내용을 압축하고 압축해서 화엄사상을 화엄의 정신 화엄의 마음을 화엄경의 마음을 말하자면은 여기서 뭉뚱그려서 여기서 이제 법성게(法性偈)라고 하는 이름으로 표현을 한 것이 우리가 오늘 공부할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가시는 분들에게 이 염불을 해 드리는 것은 그 마당에서 하여튼 최고 좋다는 것은 다 해줘야할 그런 자리이죠. 그래서 그 49재 내용에 보면 유명한 말만 전부 모아서 49재 염불문이 되어있어요. 그 이제 마지막에는 정말 그 이건 꼭 다른 건 다 잊어버리더라도 이것만은 기억을 하고 또 여기에서 마음의 눈을 떠라 라고 하는 그런 뜻으로 정말 마지막 전송하는 마당에 이제 들려드리는 게 법성게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제 서예하는 사람들이 써 가지고 병풍으로도 또는 평소에 사경으로도 많이 그렇게 이제 남기는 그런 글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어쨌든 불자라면은 친숙한 그런 그 스님이고 또 그런 글이다 라고 이제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지요.


  법성게(法性偈)라,


법성원융무이상 

法性圓融無二相 


  처음에 이제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고 하는 출발이 법성원융(法性圓融)으로 나가지만, 또 여기 전편의 그 내용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법성(法性)에 대한 이야기다. 법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렇게 이제 생각을 하면 좋습니다. 요건 이제 뭐 어떤 이야기도 없고 순전히 이치만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딱딱하다면 아주 딱딱하고 또 그 내용이 광범위하다면 굉장히 광범위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 법성(法性). 법(法)과 성(性)이라 해도 좋고 또 법의 성품이다 이렇게 해도 좋습니다.


  그러면 이제 법성이라고 하는 건 도대체 뭐냐?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밖에 나타난 모든 현상들을 생각하면 돼요. 제일 쉬운 그 이해방법으로써 우리 뭐 육신을 위시해서 눈앞에 나타나있는 건물이라든지 하늘이라든지 산이라든지 강이라든지 그 드넓은 땅이라든지 이런 그 변화하는 모든 현상들을 법(法)이다 이렇게 보고. 성(性)은 그 모든 현상들의 마음이다. 이렇게 보면 돼요. 그 현상들은 전부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대로 마음이 있고, 또 모든 사물은 사물대로 그 어떤 그 정신이 있고, 그 사물의 이치가 있는 거야. 사물의 원리가 있는 거라. 그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은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의 어떤 그 근본이 돼 있어요.


  이 예를 들어서 꽃이 이렇게 피는 것은 꽃이 피도록 하는 그 어떤 보이지 아니한 것의 어떤 그 정신이 있습니다. 원리가 있는 거야. 이것을 성(性)이다 이렇게 합니다. 성품이다 그래요 성품(性品). 그래서 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한 것 이것이 우주만유의 모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그러면은 화엄경이 본래 우주만유의 모든 것을 깨닫고 그것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그런 내용이라면 역시 이 법성게는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법(法)과 성(性), 거기에 대해서 이제 완전히 드러내서 한 번 이해하자라고 하는 그런 그 내용의 시(詩) 게송(偈頌) 이렇게 이제 설명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법성은 법과 성이다 이렇게 이제 이야기 할 수도 있고, 또 법의 체성이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의 본질이다. 이렇게 이제 봐도 돼요. 그래 법의 성이다. 이렇게 봐도 좋습니다. 그게 상관이 없어요. 법(法)과 성(性)으로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렇게 봐도 좋고. 눈에 보이는 것의 본질, 요렇게 이제 이해를 해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법은 현상이다. 그래서 제법(諸法)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요 법성에 대한 그 이름이 사실은 많습니다.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아까 내가 이제 보이지 아니한 어떤 본질 그것도 하나의 이름이 되죠. 또 마음이다 만유의 마음이다 그랬어요. 그 마음이란 말도 역시 하나의 그 다른 이름이 됩니다. 법성의 다른 이름이 되죠. 그래서 이제 경전에 보면은 법성의 다른 이름이라 해 가지고 여러 가지고 나와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진여(眞如)라는 말이 있죠? 진여도 역시 법성의 다른 이름입니다. 법계(法界)라고 하는 말도 법성의 다른 이름이구요. 또 경전에 보면 불허망성(不虛妄性)이라. 허망하지 아니한 성품 이렇게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허망해요. 현상(現象)은 허망하지만은 성품은 허망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허망하지 아니한 성품 그렇게도 표현하고. 또 분변위성(不變位性)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변위(變位)한다. 변하고 달라져요. 시시각각 달라져요. 시시각각 달라지는데 달라지면서 저 속에는 달라지지 아니 하는 게 있다고요. 우리도 온갖 울고불고 화내고 기뻐하고 하는 그런 그 시시각각 달라지는 어떤 그 외적인 마음작용이 있는가 하면은 또 내면에 있어서 전혀 변하지 않고 나는 웃어도 웃지 아니하는 놈이 있고, 나는 울어도 울지 아니하는 그 놈이 또 있는 거라. 그것이 말하자면 성품입니다. 그건 불생불멸(不生不滅)이에요. 변하는 것은 생멸(生滅), 없어집니다 또 생겨요. 그 변하지 아니하는 것은 없어지지도 않는다. 요게 이제 성품이라고 하는 거지요. 본질입니다. 우리 마음의 성품뿐만이 아닙니다. 만유(萬有)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또 진여라고 하는 것도 언제든지 참답고 언제든지 한결같다 그래서 진여. 이런 이야기를 하고. 또 다른 이름으로요 평등성(平等性)이라고 그래요 평등성. 법성은 어떤 곳에든지 어떤 사물에든지 본질적으로 다 갖추어져 있다. 사람에게나 동물에게나 식물에게나 광물에게나 저 보이지 않는 허공에도 역시 존재하는 것이 평등성이다. 이 성품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등성이다. 어디에든지 다 평등하게 있는 본질이기 때문에 그래서 평등성이다. 법성을 다른 이름으로 하면은 평등한 성품이다 그럽니다. 그리고 또 실제(實際)라 그런 말도 해요, 실제. 어떤 이제 실제상황 우리가 그런 말 하지요. 진실한 모습 그래서 이제 실제라고 하는 그런 말도 하고


  또 부사의경계(不思義境界)다. 그건 눈에 보이고 변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해서 알아낼라면 알아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요거는 내 것이면서, 내 참 얼굴이고, 내 본 모습이면서 또 내가 알려고 하면 알아지지 않는 거에요. 그 묘한 겁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알려고 하는 나하고 알려질 어떤 대상 객관(客觀) 이게 나눠져 있지가 않아요. 나눠져 있으면 내가 이렇게 쳐다 볼텐데 나눠져 있지 않고 알려고 하는 그놈이라 그놈 자체라. 그놈이기 때문에 이거 알려고 알려고 아무리 알려고 해도 쉽게 알려지지가 않는거라. 그래 요 또 법성을 갖다가 부사의성(不思義性)이다 불가사의한 성품이다. 도저히 생각으로나 요량으로 어떻게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 그런 어떤 그 세계다. 부사의성 또는 불가사의 경계, 이런 그 표현들을 합니다.


  또 공성(空性)이다 텅 빈 성품이다. 형상이 없으니까 외형이 아니니까요. 바탕, 본질이기 때문에 그래서 텅 비었다 해서 공성(空性), 빌 공(空)자, 공성이다. 그리고 요건 또 모양이 없다 해서 무상(無相)이다 라는 그런 말도 씁니다. 무상. 상(相)이 없다 그러죠. 상이 없으니까 그걸 진짜 모양이다. 그래서 실상(實相)이다 라는 이런 말도 또 합니다. 이 법성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많습니다. 이 제일 중요한 게 사실은 법성이니까요. 그래서 무상이다 그리고 실상이다.


  그리고 승의(勝義)다 라고 하는 그런 말도 쓰는데 승의(勝義) 수승할 승자(勝)하고 뜻 의자(義) 아주 뛰어난 이치다 승의(勝義). 뭐 법계, 법계란 말은 아까도 그 했죠.


  그 다음에 무슨 뭐  성청정심(性淸淨心)이다.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다. 자성청정심. 그 이제 인간에게다 이끌어다 생각을 해 보자 이거에요. 멀리 이야기 하면 자꾸 저 멀어지니까 그럼 인간으로 이끌어다 이야기하면 자성청정심이에요. 우리들 자성(自性)의 청정한 마음. 이 청정한 마음은 뭐 선악의 마음도 아니고 좋은 마음 나쁜 마음하고 또 다르고 텅 빈 마음이야 청정심이니까 우리 자성의 청정심이다.


  그리고 이건 법신이다. 우리 법신(法身)이라는 말 자주 쓰죠. 법신ㆍ화신ㆍ보신(法身報身化身)할 때 우리의 그 법신은 뭡니까?  마음자리에요. 근본 마음자리를 법신이라고 그래. 그리고 또 보신(報身)은 뭐겠습니까? 그 사람의 어떤 그 과보(果報) 또는 그 사람이 쌓은 업적(業績)에 대한 영향력이 보신이죠. 그리고 화신(化身)은 뭐에요. 현재 눈앞에 나타난 이 모습이 화신이라고요. 그런데 이 법성을 갖다가 법신이다 이런 말도 합니다. 법신. 그러니까 진리의 몸이다. 그래요. 또 우리가 잘 쓰고 있는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말도 법성(法性)이란 말과 같습니다, 사실은.


  그 법성의 다른 이름 속에 이게 쭉 나열이 돼 있습니다 사전에요. 어느 경(經)에서는 이렇게 이름하고 저렇게 이름하고 알아듣기 쉽도록 어떻게 하더라도 이해하기 쉽도록하기 위해서 이런 이름 저런 이름, 이 이름을 쓰면 알까 저 이름을 쓰면 알까, 이렇게 설명하면 알까 저렇게 설명하면 알까 해가지고 많은 이름들 그렇게 경전들마다 그렇게 달리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지요. 그래서 불성이라고 하는 말 부처의 성품, 그걸 이제 우리 그 마음으로만 이야기하면 쉽게 이해가 되지만 또 인간 말고 다른 어떤 그 생물이나 저 어떤 그 널려있는 객관의 세계에서도 역시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불성, 법성 또는 거기는 이제 여래가 그 속에 있다 그래서 여래장(如來藏). 여래장. 그런 등등의 많은 표현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치 법성이라고 하는 말에는 의미가 많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죠. 그래서 총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뭘 한 가지 남겨두고 이제 하나만 딱 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 전체를 이야기하는 거고, 또 인생 전부를 한꺼번에 통틀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 시간과 공간 모두를 또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모두가 포함된 내용이에요. 법성이라고하면. 시간과 공간이 다 포함돼 있고, 인생과 우주가 다 포함돼 있고,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다 포함돼 있고, 부처와 중생이 그 속에 다 포함돼 있고, 남녀가 다 포함되어 있고, 과거 현재 미래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 그런 어떤 총체적인 그 의미를 전부 법성이라고 하는 말 속에 다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면 뭐 이 세상의 모든 거에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법성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은 틀림이 없습니다.


  법성이란 말 속에는 빠져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전부 법성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뭐 그렇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걸 나누면 어떻게 되죠? 나누면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상과 본질, 현상과 실상, 요렇게 이제 나눠질 수가 있겠죠.  뭐 그 보다 훨씬 더 많이 나눌 수가 있습니다. 나눠지죠. 그래 이제 간단하게 이제 그런 어떤 현상과 본질, 이렇게 나눠봅시다. 그래야 뭐 이야기가 되지 그대로 둬 버리면 이야기 할 게 없어져요.


  그래 첫 구절에 보면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이라 그랬어요. 이상(二相)이 없다. ‘두 가지 모양이 없다’ 할 때는 두 가지일 때, 두 가지 모양이 없다 해야 됩니다. 그래서 법성은, 또는 법과 성품은, 현상과 본질은 원융(圓融)하다, 원융해서 둘로 나눌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렇게 보면 됩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아이구. 저 사람 마음 다르고 행동 달라. 마음 다르고 말 달라.” 그런 소리 잘 쓰거든요. 물론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럴 수가 있지만은 사실은 무이상이야. 法과 性은. 말과 그 사람 마음은 원융해서 같은 거에요. 그 말이 그대로 그 사람 마음이라구요. “아이고 농담도 못하나?” 농담은 어디서 나왔는데. 그 사람 마음에서 나온 거에요. 농담 딱 듣고 그 사람 알면 틀림없어요. 그 농담 함부로 그 어리석은 사람 앞에는 농담해도 되지만은 총명한 사람 앞에는 농담하면은 딱 들통나버려 ‘아 니는 벌써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안다고요. 그게 백 프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뭔가 거기에 다만 어느 정도라도 게재돼 있는 거지요. 그래 법성은 원융해서 무이상(無二相)이라고 했잖아요. 바로 그거야 법은 현상이고, 성은 뭐라고? 우리 속마음이야. 보이지 않는 거라고요

 

  그게 하나라고 원융(圓融)이라는 말이 하나라는 뜻이야. 원융해서. 하나라고 하는 말보다는「원융하다」라고 하는 게 좋잖아요. 원융하다. 『서로 원만하게 융통된다』 이 말이야 융통(融通). 융통된다. 우리가 그 융화 또는 융통 이러면은 뭐여? 어디든지 다 통한다 이거지. 뭐 과가 다르고 하다고 뭐 거기 못가고 이야기 못하는 게 아니라, 과가 아무리 달라도 융통하고 원융하면 막 그냥 무사불통(無事不通)이야. 그냥 막 그냥 통할 수가 있다고요. 이집 저집. 원융한 관계는요 이집 저집 그냥 막 가도 돼. 무상출입 벨도 안 누르고 막 들어가도 괜찮은 그런 관계를 원융이라고 그래. 그런 관계라고요 이게.


  눈에 보이는 것하고 안보이는 것하고 본래 그런 관계라. 그러니 무이상(無二相)이라고 그랬잖아요. 두 가지 모양이 없어. 둘로 나눠져 있는 것 같지. 말하고 마음하고 다른 것 같지. 또 외모하고 그 속의 그 사람의 그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의 어떤 씀씀이 용심(用心)하고 다른 것 같지요? 천만에 같은 거야. 용심대로 모습이 나타나는 거야. 모습은 그대로 안 보이는 마음의 어떤 그 모습이지 뭐 다른 겁니까? 어째서 그럼 그 모습이 그렇게 왔는데? 생각도 안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생겼단 말이야? 그건 말도 아니지. 원인 없는 그 결과가 어딨습니까. 모습은 결과라면 마음 씀, 용심은 원인이거든요. 원인이라고.


  그래 잘 보면 내면까지 다 알 수 있어. 우리가 하도 이제 삼독에 찌들려가지고 눈이 어두워서 제대로 파악을 못해서 그렇지. 제대로만 파악하면은 환~히 속을 알 수가 있는 거지요 사실은. 그 너무 그렇게 마음 쓸 건 없습니다. 왜냐? 전부 번뇌(煩惱)에 찌들려가지고 못 보니까 상관없어요. 못 보니까 상관없어요. 나도 못 봐요. 신경 쓸거 없어요 그거. 마음 놔도 됩니다.


  그러나 둘이 아니라는 사실. 요건 알아야 돼요. 둘이 아니라는 사실. “아! 그 사람 보기보단 다르다”고. 그건 억지로 다르려고 할 때 조금 어느 순간 다를 뿐이지. 어느 순간 다르려고 하면 달라져요 물론. 달라져. 그러나 그거는 오래가지도 못해. 오래가지도 않고 언젠가 자기의 어떤 그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게 돼 있어. “그러면 그렇지.” 요런 소리가 마지막에 나오잖아요. “그러면 그렇지. 내 처음부터 그렇게 알아봤지.” 그렇다고요. 『안팎이 둘이 없다』하는 이야기입니다. 법성원융(法性圓融), 법성은. 법과 성품은 원융해서 두 모양이 없다.


諸法은 不動本來寂이라.

제법은 부동본래적이라.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않은 채 그것을 변모(變貌)시키지 아니하고 없게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고 본래로 고요하다 이 말입니다. 지금 이 눈앞의 것은 부동(不動)이 아니지요. 동(動)입니다, 동.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고 활발하게 변해요. 시시각각 변하고 있습니다. 이 너무너무 빨리 변해서 정신이 없을 정도죠. 근데 왜 부동이냐? 제법(諸法)은 동(動)이야. 아주 격동(激動)이라 격동. 부동이 아니라 격동이라고. 그냥도 움직이는게 아니라 아주 격동하고 있는 거지. 그렇게 정신 못 차릴 정도로 격동의 어떤 그 시간인데 여기는 부동이라 그랬어요. 그리고 본래 고요하다. 이건 뭔 말 인고하니 본질적으로 저 바탕에서는 이 밖으로만 볼게 아니다 이거지. 눈앞에 나타난 것만 볼게 아니다. 저 본질에 의한, 법성에 대한, 성에 대한 것을 우리가 좀 살펴보자 이거에요.  본질에 대한 것. 그 다음 뒤에 또 이제 나옵니다. 현상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게 돼요.


  본래로 고요하다. 이 본래로 고요한 자리, 이거를 우리가 좀 자꾸 지키고 챙겨야 돼요. 지키고 챙겨야 돼요. 요게 사실은 우리의 어떤 그 본 모습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까 이야기 했듯이 안팎이 둘이 아니다 그건 이제 어디까지나 어떤 그 현상적인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원래 우리의 그 어떤 모양으로 나타낼 수 없는 우리의 진실생명의 자리, 본성의 자리, 본마음의 자리, 그것은 사실은 모양으로 그릴 수도 없고 어떤 그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그런 자리죠. 그런 자린데 그런 그 자리 그게 이제 말하자면 우리가 참선(參禪)을 통해서 또는 기도(祈禱)를 통해서 그 속에 그 속에 우리가 뭔가 안주하는 그런 그 어떤 그 노력이 사실은 그 필요한 거지요. 그래서 


無名無相絶一切라

무명무상절일체라 


그 자리에는 이런 말입니다. 성품의 그 자리에는. 또 움직이지 아니한 채, 꼼짝도 하지 아니한 채 그대로. 없게 해서 없어진 게 아니라, 없게 하지도 아니하고 본래로 고요한 그 자리에는 無名無相絶一切 (무명무상절일체)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그래서 일체 현상이 다 끊어졌어. 그래서 거기를 부처라고 부처가 뭐 뛰어나지만은 부처라고 할 수도 없어. 보살도 아니야. 범부(凡夫)니 성인(聖人)이니 하는 그런 차별도 없어요. 뭐 남자니 여자니 하는 그런 차별도 없어. 부처라는 이름이 훌륭하다고 해서 여기 이름붙이면 안돼요. 부처라고 하는 이름 붙인다고 해서 그게 더 빛나는 것도 아니야. 그 마음자리. 저~ 마음의 본질자리에는.  그러니까 무명(無名)이지. 이름도 없지 형상도 없어요. 아무리 아름다운 형상을 가지고 여기다가 뭘 그 자리를 표현한다고 해서 그건 맞는 게 아니라고요.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야. 모든 것이 다 부정된 자리야.


  그러니까 일체 반연(一切 絆緣)이라든지, 또 거기에 뭔가 헤아리는 생각. 이렇게  이렇게 좀 이렇게 좀 표현을 해야지 하고 속에 궁리하는 게 있잖아요. 그게 다 여기에 해당이 안 돼. 다 끊어졌다 이 말입니다. 절일체(絶一切)라. 일체가 다 끊어졌다. 그런 그 깊고 깊은 마음자리, 한 생각도 일어나기 이전자리, (이전 자리) 부처도 중생도 나눠지기 이전 자리, 이전의 그 경계. 그 참 알기 어렵죠. 우리가 성질을 부리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또 얼굴로 나타나고 하는 그거는 우리가 이해하기 쉬워요. 이해하기 쉬운데. 그것 그 모든 것들의 본질. 이름붙일 수 없고 모양 그릴 수 없어서 모든 것이 끊어진 그 자리는 정말 이해하기 쉬운 게 아닙니다. 정말 무념경계(無念境界)에 들어가야 되겠죠. 그래서 


證智所知非餘境이라

증지소지비여경이라 


증지(證智), 증득한 지혜. 깨달은 지혜란 그런 말입니다. 깨달은 지혜라야 소지(所知), 알 바다. 깨달은 지혜라야 알 것이지 다른 경계가 아니다. 보통 우리가 이렇게 사량 분별(思量分別)로 말로 무슨 뭐 생각으로 사변(思辨)으로 이렇게 궁리하고 해가지고 이해될 그런 경계가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관상 봐 가지고 그 사람 용심을 아는 것은 어지간하면 알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 밑에 정말 진짜 그 사람의 본질 세계는 깨달아야 알아. 증지(證智)라야 소지(所知)야. 증지라야 알 바지 다른 경계가 아니다. 보통 우리들의 경계가 아니다.


  이거는 말하자면 과거 모든 부처님이 이것을 깨달은 거지요. 바로 그 속 그 속마음을 깨달은 거야. 우리의 그 겉으로 드러나 있는 희노애락(喜怒哀樂)하는 그런 그 어떤 그 움직이는 마음을 깨달은 게 아니라는 거지요. 뭐 관상 봐 가지고 그 사람 用心을 아는 그걸 안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곤란해요. 그런 과거 모든 조사스님들이 전부 그 자리를 깨달은 거에요. 법의 본질, 진리의 자리,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이나 보살들이나 아니면 조사들이 모두 깨달았다 하는게 전부 그 자리를 깨달았다. 그러니까 뭐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면은 뭐 사주(四柱)도 잘보고 관상(觀相)도 잘 보고 아는 소리도 하고 뭐 이렇게 척 보고 말이지. 전생이 어쩌느니 뭐 과거에 뭘 했을 것이다 하고 이렇게 아는 거, 이거는 무당이나 하는 짓이지, 공부한 사람은 절대 그렇게 하면 그건 공부하고는 거리가 먼 겁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아는 소리 하는 것. 그건 무당이 하는 짓이야. 그럼 공부해서 아는 건 뭐냐? 바로 근본 마음자리 아는 거야. 한 생각도 일어나기 이전 자리. 생각이 일어난 것을 아는 것은 말하자면은 무당이 알 수 있고 아는 사람 신들린 사람들이 알 수 있어. 그 마음의 움직임이니까 작용이니까. 그런데 여기서 이제 부처님이 알고 조사가 아는 그것은 움직이기 이전 자리를 안다니까. 성(性)의 자리를 아는 거야, 법성의 자리를. 그 자리를 아는 거 에요.


  그래서 옛날에 중국에 그 인도에서 대이삼장(大耳三藏)이라고 그 큰 대자(大) 귀 이자(耳) 대이삼장이라고 하는 어떤 그 스님이 왔어요. 그 신통을 잘 해. 특히 그 중에서 타심통(他心通)을 해 가지고 소문이 자자한 거라. 그래 속에 마음먹고 있는 걸 전부 다 들여다보고 말이지. 니는 지금 말이지 집에 거 빨래 널어 놓은 거 생각하고 있구나. 아니면 무슨 남편이 뭐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거 그거 근무 잘 하는가 못 하는가 그거 생각하고 있구나. 이렇게 척척 생각하는 것마다 알아맞히는 거야 그러니까 그 어리석은 왕이 그런 그 스님을 보고는 “야~! 세상에 이렇게 높은 도인이 있는가!” 해 가지고는 이런 도인이 없다고 그냥 궁중에다 모셔놓고 식사대접을 하고 “우리 중국에는 왜 이런 스님이 없나?” 하고 야단이 벌어진 거라. 그래가지고 중국에 있는 큰 스님들 모아가지고 도(道)의 시합을 붙인 거야. 그래 가지고 그 당시 이제 그 혜월 스님인가? (혜충스님) 내 이름은 지금 정확하게 기억이 안 되는데 어떤 스님이 발탁이 딱 돼가지고 궁중에서 시합이 붙은 거야. 그래가지고 이제 왕 앞에서 많은 신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제 그 사람의 어떤 그 타심통을 이제 시험하는 거라.


  그래 중국의 그 스님이 이제 그래 자네가 그렇게 내 마음을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잘 안다니 어디 내 맘 한 번 알아보라고 그렇게 이제 했어요. 그래서 이제 이 스님이 저기 저 공원에 가면 그 중국에 또 원숭이가 많잖아요. 그래 원숭이를 모아놓고 막 이래 재주 부리고 하는 게, 그런게 이제 지나다보면 많이 볼 수 있는 거라. 그 스님이 마침 궁중에 오는 길에 그걸 본거야. 그래서 다시 이제 그걸 기억하는 거라. 아 그 올 때 오다 그거 참 재밌게 봤는데 하고서 이제 딱 마주앉아서 그걸 이렇게 보고 있으니까. 이 대이삼장(大耳三藏)이 이 스님의 마음 움직이는 것을 보니까 기도 안차거든. 이 큰 스님이 말이지 거기 그 원숭이 그거 가지고 말이지 이렇게 원숭이 장난하고 원숭이 장난하는 그 뭐 거기 가서 구경을 이렇게 하고 하 이 재밌어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거든. 그래서 대이삼장이 아주 득의만만해가지고서 큰스님께서 말이지 어찌 그 원숭이가지고 놀리는데 어찌 거기 가서 그렇게 구경을 하고 계시냐고. 그래 탁 하는 거라. 그러니까 왕은 척 지켜보고 있는 거라. 그래 왕이 물은 거라. 스님이 과연 그 광경을 생각했느냐니까 그랬다는 거야. 아! 그거 아주 됐죠.


  그 담에 이제 다시 한 번 다시 이제 또 알아 맞춰보라 하니까. 그 다음에 스님이 이제 그 다리를 이렇게 건너면서 무슨 그 또 사람들이 이제 거기 뭐 물가에 놀이를 많이 하고 있었는지 그게 이제 생각나서 그걸 이리 다시 구경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또 대이삼장이 있다가 말이지. 아 이 큰스님께서 아! 이 일국의 큰스님께서 어찌 말이지 사람들 뱃놀이 하는 거나 구경하고 그렇게 넋을 잃고 있느냐고. 그렇게 한거라. 그래 두 번째까지 잘 맞췄다고요. 그래 이 스님이 이제 인정을 한 거라.


  그 다음 이제 어디 세 번째도 한번 맞춰보라고 그렇게 하고서 딱 있는데. 이 대의삼장이 그 다음부터 그 스님을 아무리 찾아봐야 중국 천지에 보이질 않는 거라. 그래서 자기의 마음의 어떤 그 능력을 한껏 발휘를 해 가지고. 자기의 타심통의 실력을 한껏 발휘해서 온 우주를 다 뒤졌는데 이 스님이 보이지가 않는 거야. 귀신에 되도 눈에 보이고, 어디 천상에 가도 눈에 보이거든요. 마음 작용이 있는 한은 눈에 보입니다. 마음작용이 있는 한 눈에 보이는 거라. 그 도대체 보이지가 않는 거라. 온 우주를 다 뒤져도 보이지가 않는 거야. 죽어도 몸이 죽었지 정신이 죽나요? 정신은 또 지 인연 따라서 찾아가고 있는데 그 찾아가는 거 쫓아가고 하는 이야기가 많이 있잖아요. 그까짓 거 문제가 아니거든요 이 사람 눈에는. 마음의 눈으로 쫓아가니까. 그런데 한참 찾아다녔는데도 도대체 찾을 길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막 땀을 뻘뻘 흘리고 그냥 당황해가지고 야단인거야. 왕은 말이지 기다리고 있고. 어디 갔냐고 이 스님 도대체 어디 갔냐고 어디 함 찾아보라고. 그 도대체 찾을 길이 없는 거라. 그 땀을 뻘뻘 흘리고 그 다음 계속 당황해가지고 그렇게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이 스님이 막 사정없이 이제 꾸중을 하는 거죠. 순 요괴 같은 놈이라고 말이지. 니가 그거 하나 고런 재주 하나 가지고 그게 도인이라고 말이지 여기 중국에 와서 정법을 어지럽히냐고. 그거 순 요괴들이나 하는 짓이고, 무당들이나 하는 짓이지. 어디 그게 불법이라고 어디 와서 누굴 속이려고 하느냐고. 그 미련한 말이지 왕이나 이런 사람들 속이지 말라고. 불법이란 그런 게 아니라하고 그렇게 사정없이 호되게 꾸중을 해 가지고 그 사람 그야말로 코를 싸가지고 이제 도망을 가게 한 그런 그 역사가 있습니다. 대의삼장이라고. 


  그래 이제 왕이 물은 거야. 스님 도대체 어디 갔기에 그 사람이 그런 타심통을 하고도 못 찾았느냐. 아까는 어디 가서 구경하는 거 보고 있을 때는 환히 잘 찾았는데 어디 갔기에 도대체가 못 찾았느냐. 어디가긴 내가 어딜가. 무심삼매에 들어갔다 이거야 무심삼매. 내 마음에 없으니까 내 아무 생각하는 게 없으니까, 무심으로 들어가 버리니까, 화두 일념으로 들어가 버리니까, 찾을 길이 없는 거야. 도대체 보이지가 않는 거지. 자기가 없어진 자리야. 무아자리에 들어간 거지. 무아자리. 그러니까 이 타심통한 사람도 찾을 수가 없는 거지.


  그래 그거는 증득한 사람이나 알 바지. 어떤 그 무심한 자리 있죠. 그야말로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아니한 그 자리는 진짜 깨달은 사람이나 알 바지. 다른 그런 무슨 그 타심통 했다고 신통 좀 있다고 아는 게 아니다 이거야. 그래 불교는 무슨 아는 소리하는거 이건 절대 불교의 정법은 아니다는 사실을 꼭 아셔야 됩니다.


  또 우리가 그 들은 이야긴데. 해인사 선방에 있을 때 지월스님이라고 그 아주 그 참 그 정말 만고에 이제 보살인 그런 스님이 계셨어요. 참 수행을 철저히 하신 스님인데. 지월(指月), 가리킬 지자(指) 달 월자(月)라. 그 스님 제자들이 지금 우리나라에 이래저래 계시죠. 그런데 그 스님한테 들은 이야기거든요. 지금 파계사 성전에 거기 있을 땐데. 자기가 참선하고 있을 때라. 그런데 그 밑에 마을에 성팔이라고 하는 아이가 그 이제 저 일제 때 일제 때 잡지에 거 다 난거에요. 다 그 잡지에 난거라고.


  성팔이라고 하는 애가 어쩌다가 이제 다쳐가지고 죽었는데 채 명이 안 끊어졌는데 그 집에서 죽었다고 삼일간이나 꼼짝도 안하니까 죽었다고 가서 이제 묘를 써 버린 거라. 그래 얘는 정신이 어디 혼백이 어디 나갔다가 도로 돌아오니까 지 몸뚱이가 땅 속에 묻혀있어서 어떻게? 할 수 없이 그런 몸뚱이를 버렸다는 거야. 그 가만 놔뒀으면 깨어났을 텐데 한 삼일쯤 꼼짝 안 하니까 그만 그렇게. 그러니까 장의를 빨리 지내는게 아니라구요. 삼일쯤 기다리라고 하는 게 바로 그런 뜻이라. 그래서 그 삼일장 최하 삼일장은 하잖아요. 아이가 죽어놓으니까 아마 삼일도 안가고 얼른 묘를 써 버린 모양이지.


  그래가지고 이 아이가 영혼이 영혼만 남아가지고 지 인연도 다 안했는데 이제 몸은 벌써 썩어가고 있고. 그래가지고 얘가 평소에 이제 즈그 부모가 절에 다니고 그래 절에 따라오고 해 가지고 스님들이 마을에 내려가면 귀여워하고 그래놓으니까. 지가 아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절에 성전암에 있는 스님들 뿐인거라.


  그래 이제 영혼이 성전암에 와 가지고 이제 노는 거야. 놀 때. 그 내가 직접들은 이야기니까. 그 지월스님한테. 지월스님 내가 여러 철 모시고 살았거든요. 그래 이제 평소에 이렇게 이제 방선하고 이렇게 놀 때는 곧잘 이제 귀에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소리를 이렇게 들리진 않지. 녹음하면 녹음은 안 되는데. 그 사람 귀에 들리는 거라. 사람들 귀에. 귀에는 들려오는 거야. 소리는 나긴 나는데. 그런데 우리가 꼭 대화하듯이 그렇게 꼭 소리가 들린다는. 그래 이제 이쪽에서 말 안 해도 (말 안 해도) 니 뭐라고 물으면 여기서 생각이 바로 나가면 바로 알아듣고 그냥 대화가 가능한 거라 이것들.


  그래서 뭐 대구 심부름도 시키기도 하고, 어디 가서 누구 보라고하기도 하고, 그런데 이제 심부름을 시키니까 대구에 그 일부러 이제 시험하느라고 스님들이 이제 고런데 관심이 있으니까 시험하느라고 대구에 어느 집에 가보라고 이렇게 이제 시키면 가기도 하고 그러는데 어떨 때는 굉장히 늦게 돌아오더라는 거라. 대구에서 보냈는데. 그래 그 왜 이제서 왔냐고 그러니까. 거기에 이제 대구는 대구의 어떤 영혼들의 세계가 또 있는 거라. 그래 수문장도 있고 거기에 이제 텃세까지 하는 사람들이 또 있다는 거라. 그래서 이것들이 말이지 계속 지키고 있어서 들어갈 틈이 없어갖고 아이 내 기다렸다가 그래 들어갔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그래요. 그래 내가 직접 들었어요. 그래서 늦게 왔다는 거라. 늦게 와서.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런저런 일도 많이 있었는데 굉장히 이야기가 많아요. 왜냐하면 몇 년을 거기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입선 시간이 돼 가지고 죽비를 딱딱 치고 이제 입선에 이제 떡 들어가는 거라. 그러면 이제 아니 어느 스님도 금방 앉아있더니 없다고 한다는 거라. 계속 없다고 하는 거라. 스님들이 여남은 명 앉아있다 다 이제 화두를 이제 열심히 화두들면 전부 무념상태로 들어가니까. 망상부리면 그 사람 갸 하고 갸 눈에 보이는 거야 망상만. 망상부렸다 하면 갸 눈에 보이는 거라. 그래 공부 잘하는지 안하는지 갸가 다 점검 다 잘 하는 거라. 다 아는 거야. 망상부리면은 얘가 이제 같이 대화가 되고, 망상 안 부리고 화두에 열중하면은 안보이니까 대화가 그 안 되는 거지. 그래서 이제 얘는 혼자 놀다가 심심하니까 이제 가 버린다는 거라. 입선하면 이제 가 버리고 방선해 갖고 이제 잡담하고 망상부리면 그때 또 얘가 이제 어디서 나타나 가지고 같이 이야기도하고 그랬다는 거야.


  그래 귀신이 그렇게 사람을 보는 것은 그거는 좋지 않은 일인거야 사실은 우리가 정상적인 그 정신세계에 탁 들어가 있으면 볼 수도 없어야 되는 거야. 몰입해 있으면. 그래서 아는 것, 보통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하고 여기서 불교에서 소위 그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하고는 그렇게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돼요.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이라고 하는 이 대목에서도. 다른 이의 경계가 아니다 하는 이야깁니다.


眞性甚深極微妙

진성심심극미묘 


우리의 진성 참마음자리죠 참다운 성품자리는 매우 깊다 심심 그리고 지극히 미묘하다 이 참 쉽게 알 수 있는 자리는 아닙니다. 그 마음자리가요. 망상을 부리면 알 수 있어요. 대의삼장도 알 수 있고, 성팔이란 아이도 알 수 있지만은. 그 망상 부리기 이전 자리 또 망상을 부렸다하더라도 무념으로 화두일념으로 들어가거나 기도 일념으로 들어갔을 때, 그 자리는 심심해서 극미묘야 매우 깊고 깊어서 지극히 미묘한 자리다. 그런데 지극히 미묘한 자리에만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그 자성자리를 지키지 아니하고 수련성이라.


不守自性隨緣成

불수자성수연성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야, 자성(自性)을 그 자리 그 자리가 자성이에요. 우리들 자신의 성품의 자리죠. 본바탕 자리죠. 그것을 불수(不守),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서 수연(隨緣). 인연을 따라서 성취하는 거라. 성취(成就)라는 말은 성(成), 이룬다. 모든 생각을 이뤄가고 일체사법(一切事法)을 이뤄간다. 수연성일체사법(隨緣成一切事法)이라 그래요. 일체 사법을 전부 이뤄가는 거라. 그러니까 붉으면 붉다하고 푸르면 푸르다하고 그 안 되면 안된 그 인연 따라서, 수연(隨緣)한 그 인연을 따라서, 또 안 된 대로 슬퍼하기도 하고. 그게 이제 작용입니다. 고게 작용이야.


  고렇게 작용을 할 때는 귀신도 보고 뭐 성팔도 보고 다 보는 거지요. 그 우리가 그 양면이 있는 겁니다 양면. 고 밖으로 현상 드러난 자리 마음의 어떤 작용자리 그게 이제 말하자면 법이라면 자성자리는 성품자리다. 법의 성품자리다. 이렇게 이제 보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뭐 무념무념하더라도 또 거기에 온갖 희로애락을 일으키고 또 희로애락을 일으키니까 또 어떤 그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또 뭐든지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연이라는 게 거기에 이제 게재가 되는 거죠. 본래 텅 빈 본성자리만 있다면 별 문제가 없는데 말하자면 우리가 거름을 잘 주고 물을 잘 주고 비료를 잘 주면은 그 나무가 잘 자라듯이, 내 인생의 나무도 내가 좋은 인연들을 자꾸 이렇게 가꿔가고 복도 짓고 지혜도 닦고 이렇게 하면은 그 내 인생의 어떤 그 인연들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거지요. 고게 이제 가능성이란 것입니다. 인연의 가능성이에요. 요 자성자리, 텅 빈 본래 공적한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만인이 평등하겠는데 그런데 우리가 평등하지 못한 이유는 인연을 따르는게 각각 다르기 때문에 평등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 인연을 잘 다뤄야 해. 요는 묘용(妙用)이라 작용(作用)이라, 작용이 문제가 있어요.


  본래 그 마음자리가 똑 같지. 부처나 중생이나 똑같은 자리야 똑같은 자리인데 그 작용. 인연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서 부처도 되고 중생도 되는거야. 부자로 살기도 하고, 가난하게도 살기도 하고, 재주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총명하기도하고 둔하기도 하고, 고건 이제 우리가 작용을 어떻게 하느냐 인연을 어떻게 짓느냐 그게 묘용이야 참 그 묘하죠. 그 근본자리는 똑같은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솜씨 따라서 맛이 다르잖아요. 음식 맛이 다르잖아요. 재료가 똑같다고 하는 것은 본성 자리요. 솜씨 따라서 음식 맛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작용이라. 작용이라구요. 고게 인연도리거든 인연도리.

 

  그래서 고런 관계입니다.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 참 그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한데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 그 기묘한 자리에서 그게 움직여가지고 가만있질 않고 자꾸 꼼지락거리거든 나부대거든. 나부대는게 고게 이제 좋은 방향으로 이루어져가야 되는 거지요. 그래서 인연을 잘 만나라. 향싼 종이에서는 향기가 나고 생선을 묶은 새끼에서는 비린내가 난다. 그게 수연성(隨緣成) 식으로 인연 따라서 내 인생을 어떤 인연을 가지고 가꿔가느냐 거기에 이제 묘(妙)가 있습니다. 본성(本性)자리는 부처나 나나 똑같아요. 여러분이나 부처나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그 다음에 이제 그 우리의 진성(眞性)자리 그 진성자리에는 모든 것을 전부 총체적으로 포함하고 있어. 포함하고 있지 않는게 없습니다. 그 속에 전부 포함 다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 가운데, 일중(一中)에 일체(一切)고 다중(多中)에 하나다. 일체(一切) 가운데 하나다. 일체라 하면 글자가 많아지니까 일체(一切)를 많을 다자(多)로 또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 가운데 일체(一切)요, 많은 것 가운데 하나다.』 『많은 것이 곧 하나요, 하나가 많은 것이다.』 하나 속에 많은 것이 다 포함되어 있어. 우리 성품자리에는 그래요. 내 한 성품이 다른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과 일체 세상의 성품하고 통해 있어. 다 포함되어 있어. 그리고 그 전체 속에서 내 한 사람이야. 내 한 사람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사람 속에서 내 한 사람이 있다. 이렇게 이제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건 이제 사람을 두고만 이야기 할게 아니고,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도 다 그런 관계를 맺고 있어요. 그래서 일즉일체(一卽一切)요 다즉일(多卽一)이라. 『하나가 곧 모든 전체고, 전체가 곧 하나다.』


  그러니까 전체와 내가 둘이 아닙니다. 이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 사회 이렇게 우리가 이뤄놓은 사회일 때는 더욱 더 그렇죠. 어떤 그 구성원 속에 그 전체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과 결국은 서로 부즉불리 떠날래야 떠날 수 없고 하는 그런 그 관계에 놓여있다. 그게 이제 일즉일체(一卽一切), 하나가 곧 전체고, 전체가 곧 하나야. 왜냐하면 하나하나 빠지면 전체가 없어져요.


  전체라고 하는 건 뭐에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전체가 되는 거라. 사천만 국민이라고 하는 것은 내 한 사람 빠지고 누구 하나 빠지고 하면은 사천만이 안 돼. 그 사천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누구냐? 이 자리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내 한사람하고 사천만하고 그게 동일하다고요. 같은 거야. 그래서 일즉일체(一卽一切). 하나가 사천만이고 사천만이 나 하나다. 그게 그런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이제 우리가 어떨 때는 느끼고 어떨 때는 잘 못 느껴요. 잘 못 느껴가지고 잘 못 느끼면은 그만치 어리석은 것이고, 그 어리석은 만치 불행한 것이고 그렇죠. 그걸 우리가 잘 느껴가지고 그야말로 같이 살아가는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그 자세 이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거지요.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라. 그 앞에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이요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라 하는 그 원리. 내가 내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 원리. 이것은 좀 더 명확하게 하자면 한 먼지 속에, 일미진중(一微塵中)가운데 시방세계(十方世界)가 다 포함되어 있다. 또 어떤 한 특별한 그런 먼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하나하나 모든 먼지 먼지가 일체진중(一微塵中)에 그런 먼지 하나하나 속에도 또한 똑같이 그렇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아주 작다고 그래서 우리가 무시할 것이 아니죠. 그 작은 것 속에 온 우주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낱낱이 그래요. 낱낱이 그 속에 충만 돼 있는 거죠.


  사실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고, 뭐라 이름 지을 수도 없고, 그러고 뭐 찾을 수도 없어요. 그건 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런 미묘한 것입니다. 그런 그 속에 어떻습니까? 온 법계가 온 우주가 그 속에 다 있어요. 또 온 시간이 모든 그 과거 현재 미래가 그 속에서 다 있습니다.


  우선 쉬운 예로요. 내 이 눈이 어떻습니까? 얼마나 작습니까. 조그마하지요? 그런데 여러분들 얼마나 커요. 여러분들 그 큰 몸뚱이가 내 눈 속에 작은 눈 속에 다 들어와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야. 내 눈만 뭐 특별하게 무슨 뭐 미제(美製)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여러분들 눈도 똑 같애요.


  아 여기 방안에 있으니까 지금 요렇지. 밖에 나가서 금정산을 보십시오. 저 거대한 금정산이 내 작은 그 눈동자 속에 다 들어와요. 금정산만 들어오는게 아니라 저 드넓은 공간, 넓은 하늘이 그냥 다 들어오잖아요 그냥. 아무 걸림 없이 다 들어오잖아요. 참 묘한 이치지. 이게 도대체 이거 한번 알아봐야지. 우리가 이러고도 안 알아보고 무심하게 지내면 그거 참 곤란해요. 도시 뭐가 들어서 그런 재주가 있는지 참 알 수가 없어. 그 우리가 이런 그 어떤 그 보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아주 위대한 보물을 가지고 있는..


  그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아시겠지요? 내 눈만 그런게 아니라니까. 여러분들 눈도 마찬가지야. 그래 뭐라고?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라. 사람 사람마다 다 역시 그래요. 시간 공간이 다 그렇습니다. 뭐 과거 현재 미래 당장에 생각해 보십시오.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가 그 속에 다 그렇게 들어가지요. 그걸 뭐라고?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라.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한량없는 세월이, 한량없이 많고 많은 세월 그게 이제 멀 원자(遠)를 썼는데, 먼 세월이 일념(一念), 한 순간 그런 말입니다. 이 일념이란게 제일 짧은 시간이에요. 일 초를 뭐 수 백 등분 했을 때 그게 한 일념이라. 한 순간 아주 짧은 한 순간. 그런 무한한 한량없는 오랜 세월이 한 순간 속에 다 포함되어 있고, 한 순간이고. 고 한 생각이 결국은 또 한량없는 겁(劫)이다. 무량겁(無量劫)이다. 일념이 즉시 무량겁(無量劫)이다 그랬어요. 고것도 이제 우리가 지금 무한한 과거, 무한한 미래, 이 자리에 앉아가지고 다 생각할 수 있어요. 다 생각할 수 있어.


  그 전에 저기 저 수덕사에 키가 180얼마가 되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뭐 원효대사 무슨 연극에도 나오고 뭐 했던 스님인데 그 스님이 그때 한참 매스컴도 타고 그랬어요. 그래 기자가 “왜 중이 됐느냐?” 그래 이제 물으니까. 그 신문에 난걸 내가 기억해서 하는 소립니다. 자기는 “한 5분만 생각을 하면은 각계각층의 삶을 살아가는 그 인생을 전부 파악할 수 있다.” 그러더라고요. 그 사실 맞는 말이거든요. 예를 들어서 뭐 결혼을 해서 주부가 되든지, 아니면 무슨 뭐 대통령 마누라가 되던지, 뭐 탈렌트가 되던지, 뭐 뭐 기자가 되던지, 어떤 그 분야의 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한 5분만 생각하면 쫙  꿸 수 있다 이거야. 그 사람의 삶은 어떻고, 그 사람의 삶은 어떻고, 그 사람의 삶은 어떻고, 환하게 다 마음속에 그게 전부 납득이 된다는 거야. 그래서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이런 소릴 이제 했더라고요. 사실 그렇거든요.


  누가 거 뭐 어떻게 산다고 해 봤자 가만히 이렇게 앞뒤 재보면 뭐 빤하지 모를거 뭐 있나요? 뭐 모를거 별로 없다고요. 어릴 때 어려서 전혀 세상이 이제 우리가 이제 잘 모를 때, 세상을 전혀 모를 때, 뭐 아 그 인생은 어떨까 저 인생은 어떨까. 굉장히 신기한 것 같지만은 사실 좀 살아보면 알고 보면 그게 다 거기 거기라고요. 다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요량해보면.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고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야. 그러니까 그 각계각층의 그 일생. 그러니까 그 사람이 말한 다종다양한 어떤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일생이 예를 들어서 뭐 70년이라 하면 70년의 그 삶이 그것도 한 사람의 삶이 아니라 여러 그 사람의 그 삶이 한 5분 안에 그냥 다 그냥 파악이 돼 버린다는 거지. 사실 그렇죠.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니까. 뭐 그건 아주 그 너무 참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라고 한 말을 비유한 것은 너무 부족하지만은 그러나 한 예로써 그렇게 이제 생각할 수가 있고.


  또 까마득한 우리 그 어릴 때 기억도 한 순간에 금방 떠올릴 수가 있어요. 그게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아닙니까. 그 수십 년 전의 일이 그거 뭐 일 년 전으로 되돌아가는데 1초도 안 걸려. 일 년 작년 때 생각하는데 1초 걸리고, 2년 전 것 생각하는데 2초 걸리고, 그게 아니라구요. 백 년 전 것 생각해도 1초도 안 걸려. 1년 한 순간 속에 100년 전 것, 천 년 전 것, 만 년 전 것, 그냥 뭐 시간이 걸리지가 않아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라.


  무한한 미래도 역시 마찬가지야. 과거 생각하는 것도 그렇지만 미래도 마찬가지야. 본래 그렇게끔 돼 있어. 그러니까 그게 가능한 거지요. 그게 안 돼 있으면 그게 아무리 우리가 마음을 쓴다고 해도 될 리가 없습니다. 본래 우리 마음의 세계가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겁니다. 다 펼쳐져있어요.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구세십세호상즉  잉불잡란격별성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이라.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이란 말은. 과거 현재 미래, 요걸 이제 삼세(三世)라 그러죠. 그런데 과거에도 또 세분하면은 과거 현재 미래가 있어요. 또 현재에도 또 세분하면은 과거현재미래가 있어, 미래에도 과거현재미래가 있다. 그래서 구세(九世) 그래요.


  그 다음에 十世는 뭔 말 인고하니. 현전일념(現前一念)이라. 현전(現前), 이 한 순간 이건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그래요. 어쩌면 금방 현재인 것 같으면서 과거가 돼 버리고. 아니 그건 아닌데 하고 앞의 걸 생각하면 이미 그것은 미래가 아니고 현재가 돼 버리고. 이렇게 해서 현전일념(現前一念)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해서, 물론 구세(九世) 속에 포함이 되면서 또 십세(十世)라고 그렇게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호상즉(互相卽)이라. 호상이란 말은 북한에서 잘 쓰죠. 우리는 상호라고 하는데. 상호 서로서로 연결돼 있다. 즉(卽) 이란 말은 연결돼 있다. 손바닥에 손가락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즉(卽) 이라 그래요. 이건 떼려야 뗄 수 없잖아요. 하나거든요. 그러면서 어떻죠? 손바닥은 어디까지나 손바닥이고, 손가락은 또 어디까지나 손가락이야.


  그래서 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이라. 이에 잡란(雜亂)하지 아니하고 격별(隔別)하게 이룬다. 서로 분명하게 이루어져있어. 어제는 어제야, 오늘은 오늘이야, 내일은 또 내일이야. 그리고 손바닥은 손바닥이고, 손가락은 손가락이야. 요렇게 손바닥과 손가락이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면서도 고렇게 또 우리가 나누어놓고 보기로 하면은 잡란하지 아니하고. 한 덩어리라고 하니까 그냥 막 두루뭉실이가 돼 가지고 니꺼도 내꺼도 없는게 아니라, 잡란(雜亂)하지 않고, 격별(隔別)하게. 격(隔)이라고 하는게 뭡니까? 간격(間隔), 엄격하게 착 나눠져 있다 이거에요. 딱 잘라져있듯이 그렇게 돼 있는게 격별(隔別)입니다. 그렇게 분명 분명하게 그렇게 나눠져 있다.


  그래 뭐 니꺼도 없고, 내꺼도 없고, 그렇게 두루뭉실로 하면은 좋겠지만 그것도 아니야. 또 그렇게 분명히 다르면서 또 어떤 의미에서는 또 『한 덩어리다』라고 하는 것도 우리가 너무 잊어서는 안 될 일이죠. 한 덩어리이면서 독립돼 있고, 독립돼 있으면서도 한 덩어리고. 요걸 이제 우리가 참 분별해서 적용하고 그걸 우리가 잘 수용하는거 이게 지혜겠죠. 꼭 니꺼내꺼만 고집하는 것도 문제가 있고, 또 너무 한 덩어리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도 그것도 또 문제가 없지 않죠.


初發心是便正覺 生死涅槃常共和

초발심시변정각 생사열반상공화


  그 다음에 이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라. 이런 이치를 알고, 야 그 참 우리 마음의 세계가 그와 같은가, 우리 마음의 세계가 그와 같은가 라고 해 가지고 그 마음의 문제, 마음의 문제는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꿰뚫는 일이니까. 그래서 그 거기에 야 그거 참 진짜 그런 위대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단 말인가! 해가지고 여기에 뜻을 이제 내는 것. 그게 이제 발심이야. 그리고 처음으로 냈으니까 초발심이거든요. 초발심 그 마음이 고대로 이 마음의 근본자리를 결국 깨닫는 그 마음이 된다. 그래서 정각 이죠 그거는.  처음 그런 마음 문제에 관심을 갖었을 그 시기, 그때 바로 곧 정각(正覺)이다. 초발심시에 정각이다. 원만한 그런 그 과보를 이루는 그런 입장이죠.


  그래서 마음에는요. 시간이 있으면서 시간이 없습니다. 거리가 있으면서 거리가 또 없는게 마음이라.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런 불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이 마음이 앞으로 성불한 그 마음이라고요. 성불해 놓고 나면은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려서 성불했는데도 불구하고 성불하고 나면은 시간이 걸린게 아니야. 그 자리에 있다고요. 그 자리에. 한 걸음도 옮기지 않은 그 자리에 있어. 성불을 못 했을 때는 수행하는 기간이 굉장히 까마득하고 어렵고 힘들었는데, 그건 이제 몰랐을 때 이야기고 성불하고 나면 아니야. 한걸음도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 본래 그 자리에 있어. 처음 마음 낸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고요. 그게 이제 말하자면은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이라.


  우리가 꿈을 꾸다가 꿈을 아주 험한 꿈을 꿔 가지고 그냥 막 물에 떠내려가는 꿈을 이제 꿔 가지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는데 턱 깨고 나면 어떻게? 물에 간 적도 없고, 물도 한 방울도 없고, 물에 빠진 적도 없고, 물에 안 갔으니 빠진 적도 없고, 무슨 뭐 강가에 누가 사람이 말이지 건질려고 한 적도 없고, 그대로 편안한 이불속에 그냥 그대로 누워 있는 거에요. 그대로 누워 있다고요. 한걸음도 옮기지 아니했어.


  그 깨닫긴 꿈속에서 그렇게 괜히 친구들하고 무슨 해수욕 간다고 가 가지고 가가지고 온갖 놀다가 그냥 물에 빠져가지고 살려달라고 하고 했지. 깨고 나니까 간 적도 없고, 온 적도 없고, 그대로 이불속에 그대로 누워있어. 처음 잠들 때 그 마음 그대로에요. 잠들 때 그 모습 그대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이야. 깨달은 마음 그대로야. 꿈 깬 마음, 잠들기 전 마음 자세, 잠 깨고 난 마음 그 자세 그대로야. 괜히 내가 허우적거렸지. 그런줄 알았으면 아예 허우적거리지도 않았을 걸. 물에 빠지지도 않았겠지만 물에 빠졌다 해도 하나도 겁도 안 낼거야. 왜냐? 요건 꿈인데 뭐 하고. 요건 꿈이니까 괜히 내가 겁낼 것 없다 이러고 있을 것 아니겠어요? 그럼 고통이란 게 있을 까닭이 없지.


  어떨 때 그 정신이 초롱초롱할 때 꿈꾸면 그런 경우가 더러 있어요. 꿈속에서 아 이거 꿈인데 하는 그런 경우 나는 많이 경험을 하는데. 그 정신 초롱초롱할 때 그래요. 그래서 뭐 고통같은 거 또 그럴 때는 또 별로 고통도 없습니다. 험한 꿈을 안 꿔요. 꿈인데 하고 정신 차릴 정도 정신이 되면요. 험한 꿈이 절대 꿔 지지가 않아요. 그건 뭔 소리냐? 우리 삶이 꿈 인줄을 알면요. 꿈이니까 하고 마구잡이로 안산다고요. 마구잡이로 사는 사람은 꿈인 줄 몰라서 마구잡이로 사는 거야. 꿈 인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절대 함부로 살지가 안 해. 꿈 인줄 아는 사람은 절대 함부로 살지가 않는다고요. 참 정도대로 살지. 정도대로 착착 그렇게 살지. 꿈 인줄 모르는 사람, 이런 사람이 함부로 살지. 그래 우리가 꿈 인줄 알면 험한 꿈 잘 안 꾼다고요. 절대 꿔 지지가 안 해. 험한 꿈 꿀 거 같지? 험한 꿈 꿔도 괜찮으니까 꿀 거 같지만 또 그렇지가 안 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이라. 그래 이제 처음 마음이나 마지막 마음이나 한마음입니다.


生死涅槃常共和

생사열반상공화


  생사열반상공화라. 생사와 열반이. 생사는 우리가 죽고 사는 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제일 그 큰 문제. 생사대사라 해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죠?  그리고 열반은 뭡니까? 삶과 죽음을 다 뛰어 넘은 그 자리, 그것이 다 소멸한 자리가 열반이죠.


  그런데 그것이 둘 이 아니다. 서로 공하다. 공화국이다 이 말이여. 함께 화 융화한 그 자리. 공화. 함께 융화한 자리. 한 덩어리 된 자리. 공화가 한 덩어리란 이런 말입니다. 그게 이제 생사와 열반이 한 덩어리인 자리다. 생사는 우리가 떠나고 싶은 자리고, 열반은 이르고 싶은 자린데, 떠나고 싶은 그 자리와 이르고 싶은 그 자리가 결국은 한 덩어리인 자리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생사의 자리나 꿈 깨가지고 말이지 편안한 이불속의 열반의 자리나 알고 보면 한 덩어리야. 하나라고. 알고 보면 한 덩어리라고. 참 비유가 아주 그럴듯하네요. 됐네요 딱 아주. 그 자리거든.


理事冥然無分別

이사명연무분별


 그래서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이라. 이(理)와 사(事)가 명연(冥然)히 분별(分別)이 없다. 이(理)는 마음의 세계라면 사(事)는 現象의 세계다. 이(理)는 성(性)의 세계라면 사(事)는 법(法)의 세계다.


법성(法性)할 때 내가 그걸 나눠서 이야기했죠. 눈앞에 나타난 현상은 사(事)고, 그 내면의 본질의 세계는 이(理)다 그랬어요. 그것이 사실은 분별이 없습니다. 그게 그거라고요.


  초기에 내가 이야기 했죠. 그 마음 씀씀이가 얼굴에 다 나타난다. 얼굴 잘 읽으면 마음 씀씀이가 그대로 다 알 수 있다. 라고 하는게 그게 이제 명연(冥然)이라는 말은 어둡다는 뜻인데 한 덩어리라는 뜻입니다. 어두우면 한 덩어리가 되죠. 어두우면. 어두울 때는 한 덩어리가 됩니다. 나눠 보이면 아직 그건 어두운게 아니죠. 그래서 이사(理事)가 분별이 없다, 이 말입니다. 어두워서 분별이 없는게 아니라 본래 분별이 없는 거야.


十佛普賢大人境 

시불보현대인경 


  그래서 시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이라. 여기 시불(十佛)이라고 하는 말은 보현, 그 화엄경(華嚴經)에 열 가지 그 부처를 이야기 하는데 여기에 뭐 열 가지 부처라고 하니까 무슨 아미타불 무슨 뭐 비로자나불 이런 것이 아니라. 허공도 부처야. 허공도 부처고 또 이 세상이 그대로 현상이 그대로 부처고, 물론 마음도 부처고, 전체가 전부 부처라고 하는, 시간은 시간대로 부처에요. 그런 입장으로서 원만한 부처의 세계 이런 뜻입니다.


  시불(十佛)이란 건. 또 거기 숫자는 또 열 가지 부처 이름이 나와요. 그런데 그 시불(十佛)이라고 하는 그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대로 허공은 허공대로, 육신은 육신대로 그대로 다 부처다』라고 하는 그런 그 의미로써 그 여기서 이야기합니다.


  우리 업 있죠 업(業). 업은 업대로 부처에요. 업보불(業報佛)이라 해 가지고 업은 우리가 싫어하는 거죠. 부처하곤 거리가 먼 거 같지요? 천만에 화엄경에선 그게 아니야. 업이 그대로 부처야. 번뇌는 싫어해야 하는 거고 떠나야 하는 것이지만은 번뇌도 그대로 부처야. 번뇌불(煩惱佛)이야. 번뇌삼매라니까요. 번뇌도 삼매야. 번뇌도 부처야. 망상삼매야 망상삼매(妄想三昧). 망상도 부처야.


  이건 너무 차원 높은 소리라서 어떻게 들릴진  모르겠습니다만은 화엄경에선 그렇습니다. 번뇌도 부처요, 망상도 부처라. 업보불이 있어요 업보불(業報佛). 이 시불(十佛) 속에 업보불(業報佛)이 있습니다. 업이 그대로 부처에요. 무슨 업을 행하던 간에. 그렇게 알면은 아까 그 꿈 인줄 알면은 험한 꿈 안 꾼다 하듯이. 『업도 부처다』라고 하는 그런 그 차원에 우리가 있다면 그 뭐 업 함부로 짓지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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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 佛> ;

  無着佛 (무착불) : 생각이 청정하신 부처님

  願 佛 (원 불) : 목표가 우주적이신 부처님

  業報佛 (업보불) : 긍정적인 부처님

  枝 佛 (지 불) : 보살행을 하는 분은 다 부처님이다

  化 佛 (화 불) : 화신불, 부처님의 화신불

  法界佛 (법계불) : 자연의 생명력을 느끼는 부처님

  心 佛 (심 불) : 한량없는 心을 가지신 부처님

  三昧佛 (삼매불) : 정진하는 부처님

  性 佛 (성불) : 성품의 부처님

  如意佛 (여의불) : 내 뜻과 같이 해주시는 부처님

 - 우학스님 글 중 발췌

 

  또 무슨 뭐 지불(持佛)이라고 해 가지고 온갖 것이 전부 다 부처다. 가지는거. 그 다음 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삼매불(三昧佛) 삼매가 그대로 부처고, 또 어떤 거는 또 허공(虛空), 허공은 허공대로 그대로 부처고 그렇게 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구체적으로 하면 뭐 무착불(無着佛), 원불(願佛), 원력(願力), 원력이 그대로 부처고, 업(業)이 부처고, 뭔가 수순하고 가지는게 부처고, 변화하는게 부처고, 법계(法界)가 부처고, 마음이 부처고, 삼매(三昧)가 부처고, 성품이 부처고, 여의불(如意佛)이라고 해 가지고 뜻대로 되는 것 그것도 부처고.


  그게 전부 말하자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 번뇌가 부처고, 망상이 부처라고 하는 그런 경지는 누구의 경진고하니 보현보살의 경지다. 그래서 『보현보살은 대인(大人)이다』그래요. 큰 사람이다. 그게 이제 보현보살만 이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이르러 가야할 그런 그 경계다. 보현보살 대인의 경계다. 그래 우주를 이 세상을 전부 부처로 보는 그런 차원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된다 하는 이야깁니다.


能仁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

능인해인삼매중  번출여의불사의


  能仁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라. 능인(能仁)은 부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능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흔히 능인이라 그래요. 능인(能仁). 능히 어질다. 자비(慈悲)를 뜻하는 거지요. 아주 어질다 이 말입니다.


  부처님의 해인삼매(海印三昧) 가운데 해인삼매. 해인삼매는 화엄경을 설하는 그런 그 삼매를 해인삼매. 또 화엄경을 설하기 전 정(定)에 들었던 그 선정(禪定)의 이름이 해인삼매, 그리고 화엄경에서는 고건 이제 일반적인 해석이고, 온 宇宙가 그대로 해인삼매야. 온 우주가 해인삼매라. 온 우주가 화엄 만다라(曼陀羅)의 세계니까 화엄세계니까. 그래서 통째로 화엄이요, 통째로 해인삼매야. 그것이 이제 화엄경의 도리입니다.


  이 시불보현(十佛普賢)의 문제라던지, 또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의 어떤 이치라든지,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의 이치라든지 볼 때 전부 같이 이제 연결이 되어 있지요 뜻이. 근데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라. 여의 뜻대로, 뜻과 같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어떤 것을, 번출(繁出) 아주 많이 번거롭게 출(出), 만들어내고 있다. 해인삼매 중에서 이 말이야.


  부처님의 해인삼매가운데서 여의(如意), 뜻과 같이 불가사의한 어떤 많고 많은 것을 번출(繁出),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니까 이 현상 그대로에요. 이 현상 그대로를 이야기한 것이 화엄경이죠. 그것이 해인삼매가운데서 이야기되어지고 있는 거지요. 그 화엄경을 이야기하는 입장에서는 이제 그렇게 말 할 수 있지만은 이 세상에 나타난 모든 현상들이 그대로 해인삼매(海印三昧), 화장삼매(華嚴三昧)에서 나타난 것이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해인삼매의 한 조각이야. 화엄만다라의 한 조각 한 조각이라고요.


  전단나무를 가지고 쪼개놓으면 그 조각이 어떻게 생겼든지 간에 전부 전단나무 듯이. 지금 이 세상은 그대로 화엄만다라의 세계니까 그대로 해인삼매의 한 조각 한 조각이라. 우리가 걸어가면 걸어간 대로 한 조각 한 조각의 해인삼매요, 앉으면 앉은 대로 한 조각 한 조각 해인삼매고, 화장세계(華藏世界)고, 또 화엄 만다라의 세계고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제 보는 거지요.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을 때, 또 그런 경지에 이르렀을 때


雨寶益生滿虛空 

우보익생만허공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이라. 보배를 비를 쏟듯이 우보. 비를 쏟듯이 보배가 중생을 이익케 하려고 허공에 가득한 거지요. 그게 뭐 하늘에서 무슨 뭐 무슨 돈바람이 불어오거나 무슨 뭐 돈이 쏟아지거나 뭐 금이 쏟아지거나 해서 그게 우보가 아니라, 비가 올 때 비가 와야 그게 보배지. 돈이 쏟아지면 그 가문데 돈이 쏟아지면 그거 거 뭐하겠습니까? 물은 하나도 없고 돈만 잔뜩 쌓여있으면 그거 뭐겠어요? 아무 소용없어요.


  그래서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이 현실. 이 현실을 그대로 가장 완전하고, 가장 완벽한 세상으로 우리가 깨달아야 됩니다. 이걸 깨닫지 못하면 소용이 없어요 결국. 우리가 처해있는 이걸 어떻게 바꿀려고 하지말고 이대로 최후의 세계다, 최후의 경지다, 이렇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이게 그런 말이에요.


  한 예로써 비가 와야 될 때 금이 쏟아져가지고는 물론 금은 좋을 때는 좋습니다. 그렇지만 꼭 비가 있어야 될 입장에서 금이 쏟아져 봐요. 금은 그 소용없어요 사실은. 그럼 이 세상에 물은 한 방울도 없는데 금만 잔뜩 쌓여있다. 그 금은 뭐하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이해해야 되는 거야. 금은 귀해야 돼. 그래야 금은 가치가 있는 거지 또.


  그래서 우리가 처해있는 이 세상이 그대로 완전무결한 세상이다. 그걸 깨닫지 못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깨달아야 돼요. 절대 무슨 뭐 화장세계라 고해서, 이상세계라고 해서 또는 무슨 뭐 서방정토극락세계라고 해서 그 경전에선 휘황찬란하게 이야길 하고 있습니다만 절대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떠나서 따로 있는 세계가 아니고 여기서 우리 안목과 어떤 가치관과 우리 시각이 본래 처해있는 우리 현실을 현실의 그 보람과 어떤 그 이익과 그 의미를 깨달을 때 깨달을 때, 바로 그런 그 바로 화려한 세계, 극락세계 온갖 보물로 장엄된 세계로 내 가슴에 다가옵니다. 내 가슴에 다가와요. 정말 우리가 처해있는 이 현실이 정말 그렇게 진정한 그 의미와 가치를 깨달을 때 정말 극락세계로 다가온다니까요. 극락세계로. 그거 그게 지금 중요한 것은 참 그거지요. 제일 그 문제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이 세상이 정말 그 본래 지니고 있는 가치와 그 의미를 우리가 깨달아 가는거. 깨닫는 것도 참 정도차이죠. 얼마나 깨닫느냐, 얼마나 깊이 있게 그 깨닫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衆生隨器得利益 

중생수기득이익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이라. 그거 봐요. 중생들은 그릇에 따라서, 그 사람 깨달음 따라서, 그 사람 안목따라서, 그 사람 시각 따라서 이익을 얻는다. 수기(隨器) 아닙니까? 그릇 따라서. 그 사람 그릇이 얼마만하냐 하는거 따라서 이익을 얻는 거야. 참 뭐 아무것도 세상에는 누가 알아주는 사람 없고, 세상에 지위도 아무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도, 그대로 이 세상에 그냥 이렇게 함께 동참하고 있고, 공기로 호흡하고 있고, 이렇더라도 이것만으로도 참 훌륭한 삶이다. 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무한한 이익을 얻는 거죠. 무한한 이익을 얻고 아무리 뭐 고루 그거 가지고 산다하더라도 하루에 만 냥 황금을 수용하면서 산다하더라도 늘 허덕대고 배고프고 말이죠. 그 어떤 그 마음에 허기가 져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은 그대로 아귀죠 뭐. 그렇게 우리가 이해할 때 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


  시고(是故)로, 이러한 까닭에. 수행하는 사람이 모든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수행자에요. 행자가 환본제(還本際), 본래의 자리.  본래의 자리에 돌아가면. 본래의 자리에 돌아갈 것도 없어요. 그대로 앉은 자리에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세상이다 라고 하는 것. 내가 완전무결한 존재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게 본제(本際)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행자(行者)가, 수행하는 사람이, 본제에 돌아가 본래의 자리에 돌아가는 거에요. 저기 서방정토 십만 팔천억 국토를 지나서 서방정토에 가는게 아니라. 바로 이 자리에 앉아서 그런 그 보람과 이익과 의미를 깨닫는 것. 그게 본래에 돌아가는 거죠.


  그럴라면 어떻게? 파식망상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이야. 망상(妄想)을 쉬지 않으려고 해도 안 돼. 저절로 망상이 쉬어진다 이 말입니다. 파자는 불가 파(叵)라고 그래요. 아니 불자(不) 옳을 가자(可). 가히 망상을 쉬지 않을려고 해도 필부득(必不得)이야. 절대 안 돼. 절대 안 된다는 소리는 뭐라고? 저절로 망상이 쉬어진다. 망상 안 쉴려고 해도 망상 쉬어 진다 이 말이여. 요걸 이제 잘못 새겨가지고 망상을 쉬지 않으면 반드시 얻을 수 없다. 이렇게 새기면 안 돼요. 이 망상을 쉬어야 된다는 소리는 여기 저 이 화엄경에 해당이 안 돼요. 망상삼맨데 망상 부처인데 업보불(業報佛)인데요. 시십불보현 속에 업이 부처에요. 우리 중생업(衆生業) 그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업 그대로가 부처에요.


  그거 보십시오.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해서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해서. 시고(是故) 행자(行者)가 수행하는 사람이 그렇게 고 설명한 그대로 그 자리에 돌아왔을 때 현재 있는 상태에서 완전무결함을 깨달았을 때 무슨 망상이 있겠어요? 그건 망상이 이제 다 쓸데가 없는 거에요. 그래가 망상 안 쉴려고 해도 안 쉴 수가 없어. 저절로 쉬어져. 망상을 쉬지 않을려고 해도 반드시 얻을 수 없다. 안 된다. 저절로 쉬어진다. 그렇게 해석해야 돼요. 고 대목에 대개 이제 잘못해석하고 있죠 보면은. 그 얼핏 보기에는 반드시 망상을 쉬지 않으면 반드시 얻을 수 없다. 그렇게 이제 될 것 같지 상식적으로. 망상 쉬어야 한다고 하는게 보통 불교에서 상식이니까. 그러나 이 자리에선 그게 아니에요.


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무연선교착여의  귀가수분득자량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이라. 무연선교(無緣善巧). 인연(因緣)이 없는 선교(善巧). 여기 인연이 없는 선교라는 것은 인연이 없다는 그런 의미보다도 말하자면은 우리가 무연중생불가도(無緣衆生不可度)라 그런 말도 있긴 있는데 인연이 없는데 까지도 인연이 있는 자리에는 예를 들어서 얼마든지 마음을 쓸 수가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는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보통 우리가 인연이 있다없다 그런 차원을 넘어서서 그런 인연이 없는 그런데 까지도 선교방편(善巧方便)이라고 해서 아주 좋은 방편으로써 여의를 잡는다 뜻대로 된다하는 그런 말입니다. 선교방편으로써 뜻대로 된다. 그러니까 중생을 제도 한다든지 또 내가 뭘 어떤 일을 이뤄가는 데 설사 인연이 없다 하더라도 저절로 되게 된다. 거 온 세상이 자기 것이 되는거에요. 꼭 인연을 맺어서 자기 것이  되는게 아닙니다.


  이 자리에 오면요.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이라 집에 돌아가매 분을 따라서 자량을 얻는다. 양식을 얻는다. 이런 말입니다.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이라. 말하자면 뭐 우리가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어떤 그 집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본고향으로 돌아가는 자리입니다. 또 우리가 죽어서 다음 생을 우리가 생각을 해도 또 좋아요. 인연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전부 내 뜻대로 되니까. 어떤 상황에서든지 전부 내 분 따라서 내가 필요한 양식을 다 얻게 된다. 얻은 것이 뭐 누가 주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전부 내가 쓰는 대로 되는 거지요.


以陀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이다라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


  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이라. 다라니무진보로써 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이 다라니라고 하는 것이 말하자면 총지(總持)라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그 우리의 마음자리에요. 마음속에 없는게 없으니까. 그 무진보(無盡寶)여. 다함이 없는 보배. 참 그 마음은 아무리 써도 피곤하지도 않고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이건 아무리 누를려고 해도 눌려지지가 않고 계속 이 마음자리는 일어나고 있는 거지요. 이게 다라니 뭐 그 속에 모든게 다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무진보라. 다함이 없는 보배.


  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이라. (법계의 그) 법계를 장엄해서 실보전이라. 보배의 궁전을 실 채운다 그렇게 해도 좋고, 법계의 실보전(實寶殿)을 장엄한다. 말하자면 이 세상을 법계는 뭡니까? 이 세상이고, 이 세상은 아주 실다운 보배의 말하자면 전각이다. 법당이다. 이렇게 보아도 좋아요.


  그 법계 그대로가 실다운 보배의 대웅전, 실다운 보배의 집, 그 전각을 전부 장엄한다. 무엇으로? 다라니 무진보로써, 내 마음으로써. 뭘 그렇게 장엄할라면 온갖것 사다 걸고 꽃을 꽂고 할 것 같지요? 그대로 있는 대로 가치있게 보면 그대로 장엄이야. 하나하나 사물 하나하나가 돌은 돌대로 흙은 흙대로, 어쩌면 돌은 돌이 있을 자리에 돌이 있고 흙이 있을 자리에 흙이 있고 나무도 가지각색 나무가 크고작게 피어있고 그대로 법계실보전을 장엄한거지요. 그대로 장엄이 돼 있습니다. 다라니 무진보로써 장엄이 돼 있는 거지요. 뭘 뭐 귀금속을 사다 장엄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을 수 없죠.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이라. 궁좌실제중도상 그래서 끝내 우리는 어디에 앉게 되느냐? 어디에 머물게 되느냐? 실제중도상(實際中道床)에 앉는다. 실제(實際)는 진리라고 했죠. 아까 법성을 가지고 다른 말로 할 때는 실제(實際)라고도 했습니다. 법성자리 바로 그 자리는 중도(中道) 자리다. 그 평상이야. 상자(床)는 의자 또는 평상 그 자리 진리의 또는 법성의 중도 그 자리에 끝내 앉는다.


  궁좌(窮坐) 끝내는 그 자리에 중도자리에 실상자리에 진리자리에 앉는다. 앉아 있는 거야 또 사실은. 이미 앉아 있는 거에요. 거기 앉은 사람이 누구라고? 부처야. 명위불(名爲佛)이라. 그 사람을 일러서, 이름 해서 부처라고 한다. 언제부터? 옛날부터. 옛날부터 꼼짝도 안하고, 뭐 수행한 적도 없고, 절에 쫓아 다닌 적도 없고, 법성게 배운적도 없이 그대로 아무것도 안한 그 상태 그대로 아무것도 안한 상태 그대로 이름이 부처다 하는 것입니다.


  왜냐? 본래 진리 속에 다 있으니까. 진리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이걸 잊어버리면 이건 안돼요. 자꾸 알아야 됩니다. 알아야지 잊어버린 사람은 물론 잊어버려도 진리 속에 있어요. 법성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법성 속에 있으면서 법성 속에 있는 줄 아는 사람과 또 그것을 의식적으로라도 자꾸 기억하는 사람과 전혀 관계없이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과는 또 삶이 다르다 하는 것입니다.


  꿈이 꿈 인줄 알고 꿈꾸는 사람과 같은 꿈을 꾸되 꿈 인줄 모르고 꿈을 꾸는 사람에게는 천지차이가 있어요. 정말 천지차이가 있듯이. 우리가 진리 속에 이렇게 앉아있지만은 진리 속에 앉아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아는 것 하고 그걸 전혀 모르고 진리 속에 앉아 있는 사람은 그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걸 알아야 돼는 거죠.


  그래서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라. 예부터 옴으로 저 먼 과거 생으로 오면서 뭐 돈 십 원 한번 시주안하고 이 말이죠. 부동(不動), 움직이지 옴짝하지도 않고 뭐 움직인적도 한번 없이 그대로 이름이 부처다 참 편안해요. 화엄경은 뭐 특별히 할 게 없어요. 깨달으면 돼. 그대로 알면 되는 거라. 아 내가 사는 이 세상 내 인생이 그대로 순간순간이 다이아몬드로 빛나는 인생이다. 내가 처해 있는 이 환경이 그대로 이 세상의 최고 좋은 다이아몬드로 빛나고 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전부 부처님이고 전부 관세음보살이고 전부 문수보현이다. 이렇게 아는 그 자세 그것이 말하자면 화엄경의 삶입니다.


  뭐 어떻게 따로 크게 뭐 노력하고 자시고 할 게 없어요. 노력하고 기도하고 참선해서 결국 어디에 이르는고 하니 바로 그것을 아는 겁니다. ‘아! 내가 본래 이런 세상에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참선하는 거에요. 그 이상 없어요 갈데 없어요. 참선 아무리 해 봐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데서 벗어나지가 않거든요. 이 자리에 다시 돌아 온다구요. 고걸 알기 위해서. 여기서 화엄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고 경지. 우리의 이미 이런 환경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기위한 참선이라. 그걸 알기위한 기도가 되는거고. 그거지 뭐 달리 어떤 다른 세상에 가는게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고 완전무결한 세상이다 하는거. 이것을 우리가 깨달아 아는거. 그렇게 알지 못하고 자꾸 무슨 비판적으로 보고 불만스럽게 생각하면은 결국은 지만 손해야. 그게 똑똑한 사람 같지? 비판적으로 보고 불만스럽게 보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같지만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야. 그 어리석은 사람이 불행한 사람이라. 비판적으로 보고 하는 사람은 결국 불행한 사람이야 그 사람은 결국 현명하지 못해요. 그게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 우리가 “하 총명하다 똑똑하다.” 하는 것 우리가 잘못 해석하고 있죠. 정말 총명하고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 세상 좋게 보는 거에요.


  내가 처해 사는 이 세상 비판적으로 본다고 해서 달라지면 좋아. 또 그걸로 그거 해결로써 모든 게 한꺼번에 해결되나? 천만에 그게 아니에요. 한 가지 해결하기 위해서 그래서 잘 해놓으면 딴 데서는 그거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이 수 없이 많아. 그러니까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세상이 완전무결한 그런 그 세상으로 아는거.


  어떤 경우라도 마찬가집니다. 뭐 합격했다고 해서 기분 좋고, 합격 안 했다고 해서 불만스럽고 그게 아니에요.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자기가 완전무결한 세상에 산다. 라고 하는 그 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를 두고 하는 소리가 절대 아니라는 거지요. 그래 그때 구래부동명위불이라고 하는 의미가 제대로 살아나지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런 이치를 그야말로 참 마지막 그 이생을 하직하고 다음 생을 출발하는 사람에게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 정말 지혜의 양식이 되도록 마음의 불을 밝혀드리는 그런 그 소위 그 전송곡이라고 할까요? 그런 그 곡으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주 그 참 바람직하죠. 그래서 49재 염불의 내용이 참 잘 돼 있습니다. 뭐 꼭 그 49재. 우리가 외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때 많이 접하니까 그래서 이제 그런 관계를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법성게 공부를 다 했습니다. 여기서 이제 화엄경과 관계되는 그런 공부는 이쯤 이제 했습니다. 그 여래수량품과 약찬게 그리고 이제 법성게까지 했습니다. 다음주 일은 목요일이 바로 (설 밑이기) 설 다음이기 때문에 하루 쉬기로 하고 그 다음 목요일 한 주 건너서 그 다음 목요일부터 임제록을 가지고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설 잘 쇠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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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성게 (法性偈)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時無量劫     


  구세십세호상즉  잉불잡란격별성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초발심시변정각  생사열반상공화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常共和  


  이사명연무분별  시불보현대인경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능인해인삼매중  번출여의불사의     

  能仁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

  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무연선교착여의  귀가수분득자량

  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이다라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

  以陀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법륜불자교수회  법성게 2006/09/20

   


 


무비, 조현춘 공역


법의성품 원융하고 두생각에 안걸리니 모든법이 부동하여 고요하기 그지없다.

이름에도 모습에도 어디에도 안걸려야 모든것을 알아보는 참지혜를 얻게된다

참성품은 깊디깊고 미묘하디 미묘하여 자기성품 고집않고 인연따라 나투운다.

하나안에 일체있고 일체안에 하나있어 하나가곧 일체이며 일체가곧 하나이다.


한티끌은 온우주를 고스란히 머금었고 낱낱티끌 각각마다 온우주를 품었구나.

끝도없이 긴긴세월 무량겁이 찰나이고 찰나가곧 긴긴세월 한량없는 겁이로다.

세간들과 출세간이 서로함께 어울려도 혼란없이 정연하고 뚜렷하게 구분된다.

처음발심 한마음이 바른깨침 이룬때요 생사경계 열반경계 항상서로 화합한다.

근본진리 현상계가 따로없고 하나이니 부처님과 보현보살 모든성현 경계로다.

넓고깊은 해인삼매 오롯하게 이루어야 불가사의 무궁한법 빠짐없이 드러난다


보배비가 중생위해 하늘가득 내려오나 중생들은 그릇따라 이로움을 얻는다네.

이러하니 수행자는 근본으로 돌아가서 망상심을 쉬지않곤 얻을길이 달리없네.

무인연의 좋은방편 마음대로 자재하면 보리열반 성취하는 밑거름을 얻음일세.

이말씀의 무진법문 한량없는 보배로써 온법계를 장엄하고 보배궁전 이루어서

결국에는 진여법성 중도자리 깨달아서 부동자리 돌아가면 이가바로 부처일세.




           - 법륜불자교수회 공식/한글세대를 위한 독송용 매일법회 중에서 -






    법성게 (法性偈)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법의성품 원융하고 두생각에 안걸리니

모든법이 부동하여 고요하기 그지없다.

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이름에도 모습에도 어디에도 안걸려야

모든것을 알아보는 참지혜를 얻게된다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참성품은 깊디깊고 미묘하디 미묘하여

자기성품 고집않고 인연따라 나투운다.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하나안에 일체있고 일체안에 하나있어

하나가곧 일체이며 일체가곧 하나이다.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한티끌은 온우주를 고스란히 머금었고

낱낱티끌 각각마다 온우주를 품었구나.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時無量劫     

끝도없이 긴긴세월 무량겁이 찰나이고

찰나가곧 긴긴세월 한량없는 겁이로다.

구세십세호상즉  잉불잡란격별성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세간들과 출세간이 서로함께 어울려도

혼란없이 정연하고 뚜렷하게 구분된다.



초발심시변정각  생사열반상공화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常共和 

처음발심 한마음이 바른깨침 이룬때요

생사경계 열반경계 항상서로 화합한다.

이사명연무분별  시불보현대인경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근본진리 현상계가 따로없고 하나이니

부처님과 보현보살 모든성현 경계로다.

능인해인삼매중  번출여의불사의     

能仁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     

넓고깊은 해인삼매 오롯하게 이루어야

불가사의 무궁한법 빠짐없이 드러난다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보배비가 중생위해 하늘가득 내려오나

중생들은 그릇따라 이로움을 얻는다네.

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

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이러하니 수행자는 근본으로 돌아가서

망상심을 쉬지않곤 얻을길이 달리없네.

무연선교착여의  귀가수분득자량

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무인연의 좋은방편 마음대로 자재하면

보리열반 성취하는 밑거름을 얻음일세.

이다라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

以陀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이말씀의 무진법문 한량없는 보배로써

온법계를 장엄하고 보배궁전 이루어서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결국에는 진여법성 중도자리 깨달아서

부동자리 돌아가면 이가바로 부처일세.

 

 

출처 : 대방사(大方寺)
글쓴이 : 통달무아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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