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스크랩] 마음이 오염되면 삶이 오염되고, 마음이 청정해지면 삶이 청정해지고

똥하 2015. 5. 20. 06:35

 

 

마음이 오염되면 삶이 오염되고, 마음이 청정해지면 삶이 청정해지고

 

 

 

 

 

치매에 걸리면

 

요즘 노인들은 오래 산다. 기대수명이 갈수록 높아 짐에 따라 거의 구십세 까지 산다. 그에 따라 생각지도 못한 각종 질병이 나타난다. 특히 치매가 치명적이다. 주변에 치매환자가 많다. 옛날에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비슷한 말도 있다. 너무 오래 살다 보니  노망들었다라는 말을 하는데 요즘식으로 말하면 치매가 될 것이다.

 

치매에 걸리면 참으로 비참하다.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상실되기 시작하여 차츰 망각의 범위를 넓혀 간다. 대체로 어렸을 때나 젊었을 때 기억은 나지만 가까운 기억일수록 사라져간다. 그래서 나중에 자식의 얼굴도 못 알아 보게 되는 무서운 질병이다.

 

치매환자의 경우 가까운 기억부터 상실된다. 입력이 되지 않으니 더 이상 학습효과가 없다. 있는 기억마저 사라져 간다면 이제까지 배웠던 모든 것들이 차츰차츰 망각의 늪으로 사라져 간다.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치매와 같은 질병이 닥치기 전에 공부를 할 필요가 있고 공덕을 쌓아 놓을 필요가 있다.

 

죽을까 봐 벌벌 떠는

 

사람들은 지금 건강하다고 하여 이 상태가 천년만년 갈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래서일까 시각, 청각 등 오감으로 마음껏 감각적 욕망을 누리며 살아간다. 이렇게 즐기며 살 줄만 알았지 나중에 어떤 재난이 닥칠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늙고 병들고 마침내 죽고 말 것이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기대수명대로 산다는 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그래서 죽음은 언제 어디에서 예고 없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는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 (stn576)”라 하였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살아 있어도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을까 봐 벌벌 떠는 것이다.

 

기대수명이 있기는 하지만 기대수명대로 산다는 보장이 없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올지 내생이 시작될지 아무도 모른다. 여기서 내생이라 한 것은 한국적 죽음관과는 맞지 않는다. 한국불교에서는 죽고 나면 49일 동안 중음신으로 있다가 49일 후에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 따르면 무간(無間)’이다. 죽자 마자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올지 내생이 시작될지라는 말은 초기불교에 근거한 말이라 볼 수 있다.

 

하루를 사는 것처럼

 

죽음은 예고 없이 닥친다. 종종 뉴스에 보도 되는 수 많은 사건과 사고는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져서 일어난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일은커녕 앞으로 한시간 후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가 하루 밤낮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A6:19)”라 하였다. 하루를 사는 것처럼 삶을 살아 가라고 한 것이다. 심지어는 내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만 살더라도라 하였다.

 

죽음은 지금 이 순간에 들이닥칠 수도 있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아무런 준비 없이 죽음을 맞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감각적 욕망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면 어떤 운명에 떨어질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S35.235)”라 하였다.

 

지금 여기에서 오로지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에만 몰두 하는 삶을 산 자가 있는데 그 순간에 죽었다면 축생아니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깨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죽는다면 어떤 운명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특히 감각적 대상에 몰두 하였을 때를 말한다.

 

세상에서는 감각적 욕망을 자극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욕망을 자극한다. 이와 같은 오욕락을 만족하기 위한 삶을 사는 자들이 일반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깨어 있는 삶이 아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면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삶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지금 여기서 죽었다고 하였을 때 오로지 감각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 왔다면 어떻게 될까? 오로지 눈으로, 귀 등으로 즐기는 삶만 지금까지 살아 왔다면 어떻게 될까? 공덕행보다 악행이 더 많은 채 죽음을 맞았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선처에 나기는 힘들 것이다.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축생 아니면 지옥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하루가 인생의 마지막 날 인줄 알고 늘 깨어 있어야 한다. 하루를 살더라도 깨어 있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걸인(乞人)과 걸사(乞士)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삶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숫따니빠따 출가의 경(Sn3.1)’에 따르면 부처님은 감각적 욕망을 구하지 않고, 왕이여, 나는 출가한 것입니다. (Stn423)”라 하였고, 이어서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안온으로 보고, 나는 정진하고자 합니다. (Stn424)”라 하였다. 여기서 핵심적인 말은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을 보았다라는 말이다. 눈과 귀 등 오감으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은 결국 재난에 직면하고 말 것이라는 경고와 같다.

 

부처님은 온갖 감각적 욕망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고 출가 하였다. 그리고 걸식에의존 하였다. 수행자들이 직업을 갖지 않고 걸식하는 것이야말로 청정한 삶을 실현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걸인과는 어떻게 다를까?

 

밥을 빌어먹는 것으로 본다면 걸인과 걸사(걸식수행자)와의 차이는 없다. 걸인은생계형으로서 아무 곳이나 들어 가서 구걸한다. 그러나 걸사(빅쿠)는 이와 다르다.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그들은 조용히 자선을 바라며 문 바깥에 서 있다. 그들은 보시자가 자발적으로 주는 것에 의지하여 살아 간다. 그는 신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도 아니고 성직자도 아니다. 그는 생계를 위한 어떤 것도 하지 않겠다고 천명한다. 다만 자신이 준수하는 계율안에서 살아간다. 그는 자발적 빈곤과 금욕적 생활을 한다. 만일 그가 성스런 삶을 살 자신이 없다면, 그는 언제든지 가사를 버릴 수 있다. (bhikkhu , PCED194)”라 하였다. 이렇게 걸인과 걸사는 다르다.

 

왜 청정한 삶(brahmacariya)인가?

 

걸인과 걸사의 차이점은 계행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걸사라도 같은 걸사라 볼 수 없다. 부처님 당시에는 수 많은 출가수행자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바라문 수행자도 있었고, 허무주의적 견해를 갖는 육사외도도 있었다. 이들은 걸식에 의존하는 걸식수행자들이었다. 이 중에 바라문수행자가 있었다.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어느 바라문걸식자가 부처님에게 물었다. 그 바라문은 “존자 고따마여, 저도 걸식자이고 그대도 걸식자입니다. 우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걸식에 의존하였다. 그런 걸식수행자 중에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바라문 출신의 걸식수행자도 있었던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였다.

 

 

 [세존]

“다른 사람에게 걸식을 한다고

그 때문에 걸식자가 아니니

악취가 나는 가르침을 따른다면

걸식 수행자가 아니네.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살며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가

그야말로 걸식 수행승이네.(S7:20)

 

 

바라문출신 수행자도 걸식에 의존하고 부처님도 걸식에 의존하였다. 얻어 먹는 것은 같지만 같은 걸식수행자가 아니라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걸식수행자, 즉 빅쿠는 청정한 삶(brahmacariya)’을 살기 위하여 걸식한다고 하였다. 청정한 삶을 살아야만 오염원이 소멸되어 궁극적으로 열반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걸사라 하여 모두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청정한 삶을 살 수 없어서 결코 열반을 성취할 수 없다.

 

세상사람들의 삶의 방식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사성제의 실천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삶이 요청된다. 그런데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출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이는 세상의 흐름대로 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세상사람들이 감각적 욕망으로 산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사는 것이다.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말하는가? 법의 장군 사리뿟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리뿟따]

벗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세속적인 일에서 호감을 찾고, 세속적인 일에서 기쁨을 찾고, 세속적인 일에서 즐거움에 몰두하고, 잡담에서 호감을 찾고, 잡담에서 기쁨을 찾고, 잡담의 즐거움에 몰두하고, 잠에서 호감을 찾고, 잠에서 기쁨을 찾고, 잠의 즐거움에 몰두하고, 모임에서 호감을 찾고, 모임에서 기쁨을 찾고, 모임의 즐거움에 몰두하고, 교제에서 호감을 찾고, 교제에서 기쁨을 찾고, 교제의 즐거움에 몰두하고, 희론에서 호감을 찾고, 희론에서 기쁨을 찾고, 희론의 즐거움에 몰두합니다. 벗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살면 임종에 이를 때 후회하는 그러한 삶을 삽니다.” (A6:15)

 

 

이것이 세상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이다. 즐거움에 몰두하는 삶이다. 다름 아닌 오욕락을 충족하는 삶이다. 그래서일까 음식점을 운영하는 힐링센터의 주인장은 잘먹고 수다떠는 것이 행복이고 힐링이라 하였다. 하지만 가르침에 따르면 먹고 떠들고 즐거움에 몰두한다면 반드시 후회한다고 하였다. 특히 임종에 이르러 후회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임종에 이를 때 후회하는 그러한 삶을 삽니다라 한 것이다.

 

먹고 마시고 떠들며 사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그런 삶만을 평생 살았을 때 임종순간을 맞는 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지금 이순간에 맞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 젊은 시절에, 그 힘이 있던 시절에 좀 더 공부해 놓을 걸’ ‘좀 더 공덕 쌓아 놓을 걸’ ‘좀 더 청정한 삶을 살 걸라며 후회할지 모른다.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

 

수행자는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아야 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윤회에서(samsare) 두려움(bhayam) 보기(ikkhati) 때문에 비구(bhikkhu)라 한다.”라 하였다. 윤회의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빅쿠라는 것이다. 윤회의 종식을 위하여 빅쿠가 된 것이다.

 

연기가 회전되어 업으로서의 존재로 태어나게 되었을 때 윤회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존재에서, 나는 두려움을 보고(bhavañca vibhavesina, M49)”라 하였다. 그런데 존재는 행위(kamma: )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는 존재의 두려움을 보고, 존재의 두려움을 보는 자는 행위의 두려움이라 볼 수 있다.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는 아무리 작은 행위에서라도 두려움을 본다. 그래서 계행을 지킨다. 이는 초기경에서 작은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율을 수용하여 배운다. (A4.22)”라는 정형구로 표현된다. 이렇게 행위에서 두려움을 보고,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고,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가 빅쿠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출가한 자만을 빅쿠라 볼 수 없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알고, 존재에서 두려움을 알고, 사소한 행위에서 두려움을 아는 자는 출재가를 막론하고 빅쿠라 볼 수 있다.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감각적 유혹에 사로 잡혀 그 순간에 죽음을 맞는 다면 악처에 떨어지지만 늘 깨어 있다면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단하루를 살아도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기 위하여 극도로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진하고 정근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야 한다. (A6:20)”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자세로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옷이 불붙고, 머리가 불붙었는데, 그 옷이나 머리에 불을 끄기 위해 극도로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진하고 정근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야 하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그 수행승은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기 위하여 극도로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진하고 정근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야 한다. (A6:20)

 

 

부처님은 머리에 불이 난 듯이 정진 하라고 하였다. 지금 머리에 불이 붙어 있는데 감각적 쾌락을 즐길 여유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음에도 일반사람들은 눈이나 귀 등으로 감각적 유혹에 빠져 헤어 나올 줄 모른다. 왜 그럴까? 오랫동안 그렇게 습관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랜 세월동안 이 마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물들어 왔다.(S22.100)”라 하였다. 이는 마음이 오염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그 오염된 마음을 관찰하고 알아차려야 한다고 하였다.

 

마음이 오염되면 삶이 오염되고, 마음이 청정해지면 삶이 청정해지고

 

마음이 오염되었다는 말은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에 지배 되어 사는 삶을 말한다.반면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이 없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마음이 오염되므로 뭇삶이 오염되고 마음이 청정해지는 까닭으로 뭇삶이 청정해진다.(Cittasakilesā bhikkhave, sattā sakilissanti. Cittavodānā sattā visujjhanti, S22.100)” 라 하였다. 마음이 오염된 삶은 세간적 삶이고, 마음이 청정한 삶은 출세간적 삶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마음을 청정하게 하려면 사념처를 닦아야 한다. 그리고 청정한 삶을 살려면 걸식에 의존하여 걸사로 사는 것이 가장 빠르다.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이 청정하지 않다. 이는 대부분 오염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이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욕망을 극대화 하는 삶을 부추긴다는 사실이다. TV에서는 늘 먹거리 방송이 끊이지 않고 성적욕망을 자극하는 드라마, 영화, 광고 역시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후각적으로, 미각적으로, 촉각적으로 늘 감각적 유혹에 노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삶은 다시 태어나는 요인이 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마음이 오염 되어 있기 때문에 행위에 따른 업으로서 존재의 탄생을 유발하고 만다.

 

마음이 오염되어 있으면 윤회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물질을 반복해서 생겨나게 하고, 느낌을 반복해서 생겨나게 하고, 지각을 반복해서 생겨나게 하고, 형성을 반복해서 생겨나게 하고, 의식을 반복해서 생겨나게 한다. (S22.100)”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의 존재로서 다시 태어남을 말한다. 존재의 두려움을 몰랐을 때 윤회의 삶을 살게 됨을 말한다.

 

 

2015-05-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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