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스크랩] 이성적 믿음(saddha)과 재가불자의 길

똥하 2015. 5. 20. 06:33

 

 

 

이성적 믿음(saddha)과 재가불자의 길

 

 

 

불자의 사전적 의미

 

불교신자를 불자(佛子)라 한다. 불자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일까. 인터넷 국어사전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경우가 등재 되어 있다.

 

 

1) 부처님의 제자

2) 보살을 달리 이르는 말

3) 계를 받아 출가한 사람

4) 불교신자

5) 부처의 아들딸, 곧 모든 중생을 이르는 말

 

 

이 중 자신은 어느 경우에 해당할까. 일반적으로 불자라고 하면 불교신자를 말하고, 절에는 신도로 불리운다. 그런데 불자의 진정한 의미는 국어사전의 첫번째의 경우와 같이 부처님의 제자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출가 또는 재가불교도를 말한다. 이는 단지 믿고 따르기만 하는 신도와 다른 개념이다. 그렇다면 불자를 신도라기 보다 부처님의 제자의 의미로서 칭해야 하는지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인터넷을 통하여 불교tv사이트에서 아상가교수의 강의를 통해서이다. 아상가(Asanga Tilakaratne)교수는 스리랑카의 불교학 교수이다.

 

꼭꼭 숨어 있는

 

아상가교수의 강의를 찾기란 쉽지 않다. 검색을 통하여 결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어느 곳에 있는지 아는 사람만이 찾아 갈 수 있다. 마치 보물지도를 가지고 찾아 가는 것과 같다. 그런 아상가 교수의 강의는 불교tv종영프로그램에 숨어 있다.

 

메인 메뉴에는 올려져 있지 않고 단 한줄로 된 종영프로그램선택을 클릭 하면 수십개의 프로들이 뜨는데 그 중 불교영어도서관특강, 근본불교의 가르침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5&PID=P518)’이라는 프로가 그 것이다.

 

이처럼 꼭꼭 숨어 있어서 검색만으로 결코 찾을 수 없는 아상가교수의 강의는 숨어 있는 진주와 다름 없다. 이미 2008년에 강의가 시행되어서 뒤로 밀려나 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아니면 거의 찾을 방법이 없지만, 아상가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 한국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불자들의 바른 종교생활에 대한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것 같다.

 

주옥 같은 아상가교수의 강의 중에 믿음(saddha)’에 대하여 녹취하고 정리 하였다.

 

 

 

 

 

아상가(Asanga Tilakaratne)교수

스리랑카 불교학자

출처’ ;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5&PID=P518에서 디카 녹취

 

 

 

근거 없는 믿음과 이성적 믿음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삿다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근거 없는 믿음(amulika saddha)’이고, 또 하나는 이성적 믿음(akaravati saddha)’이다. 부처님께서 뜻하시는 믿음과 뜻하지 않은 믿음을 구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맞지마 니까야의 위맘사까경(vimamsaka-sutta)에서 다루고 있는 믿음은 이성적 믿음이다. 빠알리어 karavati는 실체가 있는, 근거가 확실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akaravati saddha는 이성적인 믿음이 되는 것이다.

 

 

 

Vimamsaka Sutta.docx

 

 

근거 없는 믿음이란 실체적 이유없이 어떤 사람이나 종교적 스승을 믿는 것을 말한다. 그런 식으로도  여전히 믿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성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 하셨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종교적 삶에 있어서 그것이 이성적 믿음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고 논쟁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종교적 스승을 따라 결과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구조적 면에서 본다면 궁극적으로 해탈은 지식(knowledge)’에서 나온다.

 

왜 내몸만 바라보지요?”

 

지식은 정말로 중요한 요소이다. 이 지식은 해탈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지닐 때 이성적 믿음으로 시작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물론 사람들은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부처님의 제자중에 왁깔리에 대한 이야기(Vakkali Sutta, SN 22.87 )가 있다.

 

왁깔리는 부처님의 용모에 반하여 줄곧 부처님만 바라보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왁깔리에게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내몸만 바라보지요?

내 육신을 보지 말고 나의 가르침을 보세요.

가르침을 보는 것이 진정한 저를 보는 것 입니다.”

 

  

Vakkali Sutta.docx

 

  

 

왁깔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건 근거 없는 믿음 혹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믿음이었다. 왜냐하면 단지 잘 생긴 용모 때문에 어떤 사람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상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광고에서는 항상 잘 생긴 남자예쁜여자가 나오는 것이다.

 

앎과 빤냐(pañña)

 

우리는 늘 잘못된 곳에 우리의 믿음을 두는데, 그 것은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 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바람직한 믿음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항상 근거 없는 믿음 대신 이성적인 믿음을 가져야 된다고 강조 하였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주치의을 선택할 때 믿을 만한 친구에게 묻는다. “누가 좋은 의사인가”, “그런 의사는 어디에 있는가등이다. 그렇게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그 의사를 찾아 가게 된다. 종교도 이와 비슷하다.

 

부처님께서 우리는 고통스럽고, 그 고통으로 부터 자유로워져야만 하니 이렇게 하십시요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 것을 믿어야만 하고, 수행해야 한다. 만약 우리들이 너무 의심이 많다면 절대로 수행 할 수 없을 것이고, 어떤 결과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나 그냥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필요한 정보를 모아서 직접 해 보아야 한다. 해보지 않고는 절대로 알 수가 없다. 결국 앎(knowledge)이 믿음(saddha)를 대신 하는 것이다. 불교용어로 앎은 빤냐(pañña)이다. 따라서 빤냐가 삿다를 대신 하는 것이다.

 

알고나면 믿을 필요가 없다

 

처음 시작 할 때 믿음(saddha)은 있고, 앎은 거의 없다. 그러나 수행이 완성되면 앎(pañña)은 커지고, 믿음(saddha)은 작아진다.  이 말은 믿을 대상이 이제는 아무 것도 없다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제 아니까 어떤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믿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모를 때의 일이다. 그 때는 믿어야 한다. 하지만 알고나면 믿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지식(knowledge)이 또는 앎(pañña)이 있기 때문이다삿다는 믿음만을 뜻하지 않고 지적즐거움, 행복이라는 또 다른 종류의 감정적 요소가 있다.

 

우리들이 앎에 다다랗을 때 우리들은 스승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된다. 그 대상이 부처님일 수도 혹은 상가의 한 분이거나 혹은 길을 가르쳐 주는 재가불자의 한 분일 수 있다.

 

우리들이 그 가르침의 길을 걸을 때 결과를 성취하게 됨으로서 스승께서 제대로 가르쳐 주신 것을 알게 되고, 따라서 스승을 깊이 존경하고 칭송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경험은 없어지지 않으며 다른 것으로 대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스승에 대한 이런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기에 그 이후로 우리들 인생에 있어서 영원히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초기불교 전통에서 많은 아라한들, 해탈한 많은 비구, 비구니와 재가불자들을 볼 수 있는데 해탈(liberation)의 기쁨을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앎의 기쁨이다. 바로 그 때 믿음이란 요소는 더 이상 존재 하지 않게 된다. 다만 이제 알 뿐 더 이상 믿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될까

 

불자로 사는 것 또는 불자가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에 귀의함을 의미한다. 불법승에 귀의 하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믿음이 없다면 귀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될까. 이는 불교에서 권장하는 이성적 믿음(akaravati saddha)’이 있다.

 

믿음은 나쁘지 않지만 이성에 근거 하지 않은 믿음은 때때로 감정적이거나 미성숙하고 유치한 행동으로 끝날 수 있다. 종교적 수행과정에서 그런 행동을 종종 보게 된다. 사람들이 믿음을 갖지만 그 믿음의 근거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궁극적으로 이성적 믿음이어야만 한다고 강조 하는 것이다.이성적 믿음과 관련하여 집고 넘어 가야 할 한 가지는 합리성이다.

 

사실 합리성은 아주 넓은 개념이다. 불교적 합리성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면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듣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것이 고통이다하시면 우리경험에 비추어 보고,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고 하시면 또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 하지만 위의 두가지 양상은 우리들 경험의 직접적인 부분이 아니다. 따라서 믿음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에 비추어 판단하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실에 비추어 판단한 것이 타당할 때 우리들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적 믿음이란 합리적 믿음에 근거하여 그렇군!” “이것이 옳은 것이군!” 하며 수긍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성적인 믿음을 갖게 되어 불법승 삼보에 귀의 하면 그 때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출가자와 재가자 둘 다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안내자(guider)와 지도(map)

 

몇몇 불교학자와 사회학자들은 어떻게 불교에 세속적인 문제에 대하여 철학이 있을 수 있는지 의혹을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종교적 언어로 볼 때 불자가 부처님을 따른다는 의미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길을 따른 다는 것이며 우리가 삼보라 부르는 불법승에 부처님을 안내자(guider)’, 가르침을 지도(map)상가를 제자(follower)들로 하여 귀의함을 뜻한다. 다만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이 길을 깨치신 것이고, 상가와 다른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바를 깨닫게 되는 것이 다른 점이다.

 

사실 초기불교 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이나 아라한의 근본적 차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선각자이고 나머지는 따르는 제자라는 점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아름다운 비유가 있다. 고대도시의 그 곳에 이르는 길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숲에서 어떤 길을 발견하여 그 길을 따라 가다보니 마침내 그 도시에 이르러 기쁨을 얻는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부처님은 선각자와 똑 같이 비유 할 수 있다.

 

그는 길을 발견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그곳에 이른다. 즐거움을 만끽한 뒤 돌아와 다른 이들에게 그 길에 이르는 지도를 전한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그것은 부처님께서 행하신 바와 완전히 똑 같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은 스스로 그 아름다운 고대도시에 이르러야 한다. 물론 진정한 의미의 열반은 도시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철저하게

 

아상가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로 맹목적인 믿음보다 확신에 찬 믿음을 강조 하는 것이다. 그런 믿음은 부처님의 말씀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수긍 할 수 있는 이성적인 믿음을 말한다. 불법승 삼보를 믿게 되면 반드시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그런 믿음을 말한다.

 

두번째로 이런 확신에 찬 믿음을 바탕으로 많이 알고 수행할 것을 강조한다. 선가에서 많이 아는 것을 경계하고 알음알이로 폄하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많이 안다는 것은 지식(knowledge)을 말한다. 그리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직접 수행 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체험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기쁨이 일어나고 그 이 바로 빤야(지혜)’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알게 되었을 때 삼보에 대한 믿음은 존경으로 바뀌기 때문에 최초의 믿음은 이제 버려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알아야 할 것을 알고, 닦아야 할 것을 닦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에 대한 초기경전의 게송이 있다.

 

 

빠알리어

Sambuddho paijānāsi (i tiselo brāhmao) dhammarājā
Dhammena cakka
vattemi ita bhāsasi gotama

 

 

영어

Brahmin, realzing, what should be realized, developing what should be developed.

I have dispelled what should be dispelled, therefore I'm enlightened."

 

(출처: Suttanipata Mahāvaggo, Selasutta

http://awake.kiev.ua/dhamma/tipitaka/2Sutta-Pitaka/5Khuddaka-Nikaya/05Suttanipata/3-maha-vagga-p.html)

 

 

우리말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은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

(숫따니빠따 558, 3장 대품, 셀라경, 전재성역)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을 안다는 것은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법을 올바르게 이해 하고 철저하게아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빠알리어로 빠리얏띠(pariyatti)’라 한다.

 

닦아야 할 것을 닦는 다 는것은 부처님법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고 바른 도를 철저하게실천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빠알리어로 빠띠빳띠(paipatti)’라 한다.

 

마지막으로 버려야 할 것을 버렸다는 의미는 괴로움에서 벗어남을 말하고 이는 부처님이 보이신 해탈 열반을 철저하게실현하는 것을 말하는데 빠알리어로 빠띠웨다(paivedha)’라 한다.

 

이처럼 모든 것을 철저하게 알아야 하고, 철저하게 닦아야 하고, 철저하게 열반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세번째로 재가불자들이 단지 믿음에 머무는 신도가 아니라 부처님이 가신 그 길을 스스로 가는 부처님의 제자가 될 것을 말한다. 그 때 부처님은 안내자(guider)이고, 가르침은 지도(map) 내지는 나침반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 안내자와 지도를 따라 가는 자가 출가와 재가를 막론 하고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라 볼 수 있다.

 

 

2010-12-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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