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香

10강

똥하 2011. 1. 11. 07:04

부처님의 가르침

 

지난 시간에 공부한 내용을 복습해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공부할 8정도는 지난 시간에 공부한 내용과

 

깊은 연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4법인을 5시교로 설명하고 4성제를 설명함.

 

사성제가 교학의 핵심이라면 8정도는 수행의 핵심입니다.

 

수행의 목적은 고가 다한 열반의 경지인 멸성제로 가는 것입니다.

 

사성제의 멸성제로 가기 위한 방법이 도성제이고

 

도성제의 내용이 8정도입니다.

 

8정도는 또한 3학의 좀더 분화시켜 설명한 것이며

 

대승불교에서는 6바라밀로 변화하여 설명합니다.

 

이제 8정도와 3학 그리고 6바라밀의 관계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3학

8정도

6바라밀

 

 

-불교의 전부이기도 하고 수행의 단계로 설명되기도 한다

 

 

-반드시 순서에 입각해야 함

 

 

 

 

 

초기불교(상좌부 불교)에서의 수행방법(아라한이 목표)

대승불교에서의 수행방법(보살행을 통해 부처가 되는 것이 목표)

성문: 8정도와 12연기를 수행하는 수행자

보살: 대승불교의 수행자

성스러운 8정도, 중도, 시대를 막론하고 8정도가 포함되어 있으면 성스러운 가르침이지만 없으면 텅빈 가르침이다.

 

첫지분은 정견과 정사유로 시작

세상에 대한 바른 견해(이성불교)

보시,지계바라밀로 시작(감성불교)

 

이해와 깨달음을 통해 믿음이 증장

보시, 자비와 믿음을 통해 깨달음으로 간다.

8정도를 두고 왜 6바라밀이 있는가. 재가자를 위한(불교의 대중화) 자비의 불교, 생활불교를 지향

 정언, 정업, 정명

보시 지계

정정진, 정념, 정정

인욕 정진 선정

정견, 정사유

지혜

 

 

-------------------------------------------------

(2) 중도의 진리에 대하여

 

우리는 연기의 도리에서 일체 삼라만상(諸法)은 무상하고 무아無我한 것이므로 실로 있다든지 항상된다든지 할 아무런 것도 없고 모든 현상계 제법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상의성相依性관계에 있기에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무아이고 무상이라고 제법이 ‘무無’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인연으로 결합된 모든 것은 각기 그 인연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잡아함경 권10>에 보면 이런 의문을 제시한 제자가 있었다.

‘일체 법이 무아라면 이 중에 어떤 나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며 이렇게 말하고 있는가?’

무아라고 하지만 현재 나는 분명히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의문을 일으켰던 챤나闡陀비구에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중도中道의 가르침을 펴신다.

‘세상 사람들은 있다. 혹은 없다 라는 두 극단에 의해서 미혹迷惑한다. 세간의 모임(集)을 참다이 바로 관찰하면, 세간은 없다는 소견이 생기지 않을 것이요, 세간의 멸함을 여실히 관찰하면, 세간은 있다는 소견이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래는 두 극단을 떠나 중도中道를 말한다.’

세간(世間, loka:세계 또는 일체를 의미함)은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므로 그저 없다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연기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정적으로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실재성實在性이 없는 것을 실재한다고 착각한 망념妄念에서 연기한 것에는 실체가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무명에서 연기한 것은 무명의 멸滅과 함께 없어지는 성질의 것이다.

불교가 독창적으로 주장하는 무아설無我說의 높은 뜻은 바로 여기(이것)에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나에게는 실재성이 없으므로 무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무아는 망념에 입각한 나까지도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챤나비구가 제기했던 ‘알고 보고 말하는 그 나’는 바로 이러한 ‘나(忘我, 假我)’라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불교의 무아설은 유有와 무無의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교설이라 볼 수 있으며, 그것은 곧 12연기설에 입각한 것이다.

“내가 만일 ‘유아(有我, 내가 있다)’라고 한다면 그는 유아의 사견邪見만을 더할 것이요, 만일 무아無我라고 한다면 의혹에 의혹만을 더해 줄 뿐이다. 만일 ‘내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상견常見이요, 무아라 한다면 이것은 단견斷見이다. 여래는 이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 서서 법을 설한다.”

'佛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야심경  (0) 2011.03.17
12연기1  (0) 2011.01.21
계초심힉인문(3)   (0) 2010.12.30
誡初心學人文(원문)  (0) 2010.12.16
예배하는 법  (0) 2010.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