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스크랩] 달마대사는 누구? 2

똥하 2009. 4. 29. 07:19

-담원 화백님의 고뇌달마도-
(전편에 이어서) 무제는 철저한 불교신자여서 황가보살이란 호칭까지 받았으나 무제의 곁에는 광통율사라는 승려가 있어 왕에게 모든 조언을 하고 신임을 독차지해 왔다. 이 광통율사는 자신의 교세를 유지하기 위해 왕이 달마대사를 배척 하도록 교묘히 조종했다고 전해진다. 국가의 통치 목적과 고승들의 기존세력 유지목적이 맞아떨어져서 '외형적인 공덕보다는 한생각 돌리면 부처'라는 달마대사의 외침이 무참히 무시되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짐은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요'라고 해서 자칫하면 목이라도 벨 상황까지 갔다. 이때 달마스님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살얼음같은 분위기에서 교만하지도 않고 비卑하지도 않으면서 의연히 참법을 보여주신 행동의 설법이었다고 본다. 만약 무제의 귀에 솔깃한 대답 한마디만 했어도 한세대의 명예와 안락이 보장되었을 것을 달마대사는 의연히 외면했던 것이다. 양무제의 궁전에서 나온 달마스님은 아직 이곳에는 선의 깊은 뜻을 전하기엔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후위 효명제 정광(正光) 원년에 당시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던 북방의 낙양에 도착하였다. 이 때 달마가 갈대를 꺾어 타고 양자강을 건넜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달마의 신통력을 보여주는 일화인 듯 하다. 달마와 그의 제자들 달마스님은 낙양 북쪽에 있는 숭산 소림굴에 들어가 홀로 9년동안 면벽좌석만을 실천했다. 달마는 소림사에 자리를 잡고 법을 전할 제자가 나타날 때까지 고요히 좌선에 잠긴다. 아무 말 없이 주야로 얼굴을 벽에 대고 고요히 앉아 있을 뿐이니 당시 사람들은 달마를 '벽관바라문'이라고 불렀다. 벽을 바라보는 바라문이라는 뜻이다. 이런 수행을 수년동안 한결같이 하였다. 그럴 때에 어느 날인가 신광이라는 수도자가 달마를 찾아왔다. 이 사람은 불법의 깊은 이치에 정통하였으나 아직 무엇이 부족한 듯, 가슴이 답답하였다. 그리하여 달마가 깊은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달마에게 법을 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달마는 늘 벽을 대하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눈오는 날, 뜰 앞에 신광이 서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다음 날이 되자 대사가 말하길, "네가 눈 가운데 서서 무엇을 구하느냐?" 그러자 신광이 말했다. "바라옵건대 화상께서 감로의 문을 여시어 여러 중생들을 널리 제도해 주소서" 대사가 이렇게 대꾸하였다. "부처님들의 위없는 도는 여러 겁을 부지런히 정진해야 하는 법, 행하기 어려운 일을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참아야하거늘 어찌 작은 공덕 작은 지혜와 경솔한 마음 교만한 마음으로 참법을 바라는가. 헛수고일 뿐이다. 정법을 구하기 위해서는 신명을 내던지는 각오가 있어야한다." 신광이 그 말을 듣자 차고 있던 칼로 왼팔을 끊어서 대사 앞에 바치자 대사는 그가 법을 이어 받을 그릇임을 알았다. "모든 부처님이 처음 도를 구할 때 법을 위하여 신명을 잊었나니 네가 이제 내 앞에서 구도하는 정성이 가상하도다."라고 감탄하였다. 신광이 대사에게 "부처님들의 법인을 들려주십시오" "부처님들의 법은은 남에게 얻는 것이 아니다" "제 마음이 아직 편안치 않습니다. 스님께서 자비를 베푸사 편안케 해 주소서" "그러면 네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편안케 해 주겠다" "마음이 어디에 있어 가져오리까. 아무리 찾아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편안케 했다" 그제서야 혜가스님은 활안대오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다. 신광은 달마의 가르침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어 달마의 뒤를 이을 제자가 되었다. 이에 이름을 고쳐 혜가라고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달마와 혜가의 일화도 또한 널리 알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혜가가 팔을 자른 것 등은 정확한 사실인지 확실치가 않다. 한편 이런 이야기도 있다. 위나라에 머문 지 9년에 대사가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본국으로 갈 때가 되었으니 너희들은 각자 얻은 바를 말하라." 도부라는 자가 먼저 말하기를,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문자를 여의지도 않으므로써 도를 삼습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가 말했다. "아난이 아촉불국을 보았을 때, 제 생각으로는 한번 보고 다시 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도다." 도육이 말하길, "4대가 본디 공하고 5온이 본디 있지 않으니 제 생각으로는 한법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도다." 마지막으로 혜가스님의 차례가 되었는데 혜가스님은 그저 절을 하더니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모양을 보던 달마스님이 빙그레 웃었다.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다" 대사가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진수를 얻었노라." 라고 하며 혜가를 돌아보며 말씀하시길, "옛날에 여래께서 정법안을 가섭에게 부촉하여 전전히 나에게 이르렀나니, 내가 이제 너에게 부치노니 너는 마땅히 호지하라."하고 가사를 꺼내 혜가스님에게 주며, '안으로는 법을 전해서 마음을 깨쳤음을 증명하고 겉으로는 가사를 전해서 종지(宗旨)를 확정한다. 뒤에 환란이 생기거든 이 옷과 나의 게송을 내놓아 법을 증득했다는 증명으로 삼으라. 그러나 내가 열반에 든지 2백년이 지나면 가사를 전하지 않아도 법이 항하사 세계에 두루 퍼질 것이다' 이리하여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는 혜가에게 가사와 '능가경' 등을 전해주며 법을 전수함으로써 이제 이조 혜가대사의 시대가 열려오게 되었다. 다시 서쪽으로 이에 달마스님은, "내가 이곳에 온 후 다섯차례 독(毒)을 피했다. 인도를 떠나 이곳에 올 때 적현 신주에 대승의 기상이 있음을 보고 바다 건너 사막을 지나 법 전해 줄 사람을 구했거늘 이제 그대를 만나 전했으니 나의 뜻은 끝났다" 하고 홀가분하게 일어나 우문의 천성사로 떠났다. 그곳에서 며칠을 묵었는데 그 고을 태수 양함지가 오래전부터 불법을 사모해 온 인연을 알고 조사란 이러한 이를 일컫는다며 게송을 남기기도 했다. 악을 보고도 의으치 않고 선을 보고도 부지런하지 않고 지혜를 버리고 어리석음에 가지도 않고 어리석음을 떠나 깨달음에 가지도 않는다. 큰 도를 통달하니 한량을 지나고 부처의 마음을 통하니 법도에 지나고 범부와 성인에 같이 얽매지 않고 초연히 뛰어난 이를 조사라 한다 이에 양함지가 깊이 느끼며 말했다. "바라옵건대 세간에 오래 머무시어 많은 중생을 교화해 주십시오" 그러자 달마스님은 "나는 가야한다. 오래 머물수가 없다. 근기와 성품이 만가지 차이가 있어 많은 환란을 만날 것이다"라고 침착하게 말했다. 이는 당시 달마스님을 해치려는 무리가 있음을 나타낸 말인데, 그들은 다름아닌 광통율사와 보리류지삼장이었다. 광통율사는 황제의 측근에서 황제의 신임을 독차지한 승려였다. 덕분에 황제의 불교에 대한 정책이 관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신 광통율사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승려들은 그의 조종에 의해 흠이 잡히기 마련이었다. 그 까닭에 달마스님도 처음 중국으로 와 무제를 만난 자리에서 그토록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던 것이다. 그후에도 그들은 달마스님이 현묘한 덕을 널리 떨치고 법의 단비를 두루 뿌리자 자신들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자주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 이를 미리 알고 달마스님은 다섯차레 독을 피했는데 그러나 여섯번째에 이르자 교화할 인연도 다했고 법 전할 사람도 만났다하여 단정히 앉아 독음식을 받았다. 양나라 대통 2년(528)에 입적한 달마스님은 웅이산에 묻혔고, 정림사에 탑이 세워졌는데 그로부터 3년 뒤, 위나라 효명 임금의 명을 받고 서역에 다녀오던 송운이 총령(파미르고원)에서 달마스님을 만났다. 송운은 달마스님이 돌아가신 일을 아직 모르고 있었기에 반기며 인사했다.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인연이 다해서 천축으로 돌아가는 길이네. 그대의 임금은 이미 세상을 떳느니라" 망연해하는 송운의 앞을 달마스님은 주장자 끝에 신발 한짝을 걸어 달고 훌훌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이었다. 송운이 돌아와보니 과연 다음 임금인 효장임금이 즉위해 있었다. 송운이 돌아오다가 겪은 일을 왕에게 보고하니 왕은 무덤을 파보도록 하였다. 조사해본 즉 달마스님의 관은 텅 빈채 신발 한짝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후세, 송나라때 달마대사에게 원각대사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탑을 공관이라 불렀다. 이렇게 시작된 중국선은 그 생명이 끊이지 않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양무제가 달마대사를 추모하는 비문 내용 슬프도다. 보고도 보지 못했고 만나고도 만나지 못했으니 지난 일, 오늘날에 뉘우치고 한됨이 그지 없도다. 짐은 한낱 범부로서 감히 그 가신 뒤에 스승으로 모시나이다. -인터넷 검색 편집-
출처 : 德의 동산
글쓴이 : 은빛물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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