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보르헤스의 불교강의-<1> 서론

똥하 2009. 3. 30. 22:35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저자:    김 홍 근     한국외국어대 강사·성천문화재단 연구실장·문학평론가

 

 

‘20세기의 창조자’라고 불리는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1976년 <불교강의>를 저술했다. 20세기 후반에 활동하는 전세계 작가와 지식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으며, 후기구조주의와 해체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등 최근 서구사상사 상의 큰 반전을 이루고 있는 정신적 흐름의 사상적 기초와 인식의 맹아(萌芽)를 마련한 것으로 알려진 보르헤스가 불교강의를 직접 저술할 정도로 불교에 깊은 애착과 정통한 이해를 가졌던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연재가 진행됨에 따라, 작금 서구사상가들이 맞고 있는 ‘인식의 전환’에 불교가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한 단초가 드러날 것이다.

보르헤스에 미친 불교의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그의 대표적 단편소설인 ‘알레프’를 보자. 이 소설에는 보르헤스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사귀던 애인이 죽고난 뒤 기일을 맞아 그녀의 집에서 가족과 친지들의 추모 모임이 열렸을 때 그도 참석한다. 그곳에서 죽은 애인의 사촌오빠를 만나는데, 이 사람은 반쯤 실성한 것 같은 시인이었다. 왜냐하면 취중에 “지구 표면 전체를 묘사하는 시를 쓰겠다”는 호언을 보르헤스에게 떠들어 대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믿지 않는 보르헤스에게 시인은 부에노스아이레스시 외곽에 있는 자신의 고택 지하실에 우주의 비밀을 간직한 물체가 있는데 그것은 동전만한 크기의 발광체(發光體)라고 알려준다. 그말을 외면했던 보르헤스는 여러날이 지난 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 집을 찾아가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그 집 지하실에서 보르헤스는 ‘알레프’라고 불리는 발광체를 보게 된다. 그는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때 나는 알레프를 보았다. … 그 거대한 순간에 나는 수백만 가지의 황홀하거나 잔혹한 장면들을 보았다. 정말 놀라운 일은, 그 많은 장면들이 한 점에서 보이는데도, 서로 겹쳐지지도 않고, 투명한 실루엣으로 보이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본 것은 한 번에 보았는데, 글로 쓰자니 이렇게 하나하나 나열할 수 밖에 없다. … 알레프의 직경은 2~3센티미터밖에 안 되지만, 우주 전 공간이 축소되지 않고 거기 있었다. 각각의 사물의 갯수는 무한했는데, 왜냐하면 (거울에 비친 달이 복수가 되는 것처럼) 나는 우주의 모든 지점에서 그것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 나는 내 열굴과 내장을 보았으며, 너의 얼굴을 보았다. 나는 현기증이 나서 울고 말았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그 이름을 남용하지만 결코 본 일이 없는 玄玄한 가상의 대상, 즉 불가해한 우주를 내 두 눈이 보았기 때문이다.” (보르헤스 전집 Ⅰ, 625쪽 이하 보르헤스 글은 원문에서 필자가 직접 번역)

보르헤스의 서술은 평범한 소설속의 묘사를 뛰어 넘는 직관이 담겨있다. 그것은 마치 번개같이 짧은 순간에 우주의 신비를 깨달은 어느 각자(覺者)의 체험담같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그 무한 시공간체(時空間體)의 이름을 <알레프>라 불렀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 알파베트의 첫글자로, 흔히 문명의 기원을 상징하며 또한 신성(神性)을 담고 있는 글자로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알레프>는 희랍어에서는 알파로 발음된다.

 

보르헤스는 그의 <불교강의>중 붓다에 관한 전설을 설명하는 곳에서 싯다르타 태자가 오랜 수행 끝에 보리수 아래 앉아 정각을 이루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홀로 나무 아래 정좌한 싯타르타는 순간적으로 자신과 모든 중생의 수많은 전생을 보았다. 한눈에 우주 구석구석의 수없는 세계를 전관(全觀)했다. 그뒤, 모든 인과 과의 사슬들을 직관했다. 새벽녘에는 사성제를 관하였다.” (보르헤스, <불교강의> 10쪽)

보르헤스 자신이 묘사한 이 글을 보면, 그의 단편 <알레프>의 모티브가 바로 붓다의 정각 장면이고, 자신이 지하실에서 본 광경은 붓다가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직관한 공을 관통한 진리의 모습을 자신의 입장에서 자세히 풀어 쓴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르헤스는 그의 단편을 통해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밝혀보고 싶어 했던 것이고, 또 그 작업을 통해, 그도 붓다처럼 우주의 비의(秘義)를 엿보았다는 체험을 작품화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불타가 성도한 깨달음의 내용을 정밀하게 표현한 <화엄경>의 핵심인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선재(善財) 동자가 오랜 순례 뒤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전관한 장엄세계의 모습은 보르헤스가 <알레프>에서 묘사한 놀라운 체험의 장면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알레프는 탑으로 상징된다.

 

“숫자상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 모든 탑들이 전혀 따로따로의 방식대로 서 있는게 아니라, 각각의 탑들은 나머지 모두와의 완전한 조화 속에서 그 나름의 개별적 존재성을 보유하고 있다. … 젊은 순례자 수다나(善財)는 각개의 탑 하나하나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탑들 속에서, 즉 하나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고 그 각각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그런 곳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카프라,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범양사출판부, 343쪽에서 재인용)의상대사가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화엄일승법계도>에서 칠언절구의 시로 노래했듯이, 보르헤스도 그것을 <알레프>라는 소설속에서 작품화한 것이다. <알레프>는 1949년 발표된 작품이다. 따라서 보르헤스는 매우 일찍부터 불경을 읽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는 여러차례 인터뷰에서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통해 불교를 알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1914년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거주하며 학교를 다녔는데, 그가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읽은 시기는 독일어를 배워 독일 문학과 철학을 원문으로 읽었던 1918년(19세) 때였기 때문에 불교는 이때 이미 상당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불교강의>를 쓰면서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 다이세즈 쓰지키(D. T. Suzuki), 파올 도이센(Paul Deussen), 아더 윌리(Arthur Waley) 등 수많은 불교학자와 중국문학가들의 책을 인용하고 있다. 그는 또한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정통했고, 주역의 서문을 쓴 일도 있다. 그가 만년에 이르러 고향 부에노스 아이레스시에서 가장 애착을 가진 일곱가지 주제를 7일간에 걸쳐 강연을 했을 때도 불교를 포함시켰다. 불교는 보르헤스가 젊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집착했고, 그의 사상이 변화를 맞을 때마다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중요한 테마였다.

 

 

보르헤스는 1899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변호사인 아버지과 영문학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그는 영어, 불어, 스페인어로 된 책이 무한히 꽂혀있었던 도서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특히 할머니가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집안에선 영어와 스페인어를 동시에 사용하였다. 이 영향으로 그는 유년시절부터 많은 영국소설을 읽게 된다.

 

보르헤스는 15세 되던 해인 1914년에 아버지를 따라 유럽으로 이주한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유럽식 교육을 받으며 불어와 독어를 익히게 된다. 이어 라틴어도 마스터하게 된다. 1921년 조국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그는 새로운 문예사조를 반영하는 문학잡지를 발간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초기에 당시 유행하던 아방가르드 풍의 시를 썼다. 그러나 곧 그의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성향을 표현하기 위해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아버지가 사망한 해인 1938년 시립도서관에 취직한다. 같은 해 성탄절날 창문에 머리를 부딪히는 사고를 당해 의식불명 상태에까지 빠진다. 의식이 돌아온 뒤, 스스로의 사고 능력을 실험해 보기위해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의 대표작은 1944년 출판한 단편집 <픽션>과 1949년 출판한 <알레프>에 수록된 소설들이다. 그가 처음 이 작품들을 발표했을 땐 당시 문학계로부터 이해를 받지 못하고 단지 소수의 지식인 작가들만이 그의 글을 읽었다. 대중으로부터 외면받던 그는 1961년 베케트와 유럽출판인상을 공동으로 수상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그는 1967년 하버드 대학 찰스 엘리엇 노른 렉취에서 강의하고 계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등 1986년 죽을 때까지 왕성한 문학활동을 하게 된다.